왓칭 2 Watching 2 - 시야를 넓힐수록 마법처럼 이루어진다 왓칭 시리즈
김상운 지음 / 정신세계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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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년 전 쯤에나 이 책을 읽었다면 전혀 믿을 수 없다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인생수업>, <사후생>을 읽었을 때 처럼. 

그러나 지금은 안다. 모든 것은 믿음, 확신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또한 모든 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워야 자연스럽게 온다는 것을!

내가 믿으면 있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없는 것이니, 내 보기엔 먼저 100% 확신을 전제로 

 

해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Secret>에서 말하는 바 임을 이 책을 보고 나니 알

 

아진다. 말처럼 100%확신이라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굉장히 어렵다. 그러하다고 딱 믿어

 

야만 온 우주는 우리의 확신을 위해 움직여 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금강경을 보니 한결 수월하다. 좌선할 때 심안(心眼)으로 공간을 바라보고자 

 

집중하니 잡념도 덜해지며, 올라오는 생각들을 바라본다는 것, 왓칭이 어떤 것인지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의 사고에 있어서의 전환점 역할을 해 준 왓칭1,2. 무엇보다 방법론적인 입장에서 나와 

 

계합이 잘 되어서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일렁이는지! 

 

텅 빈 공간을 보고 싶다. 나도 찬란한 빛을 보고 싶다.ㅎㅎ

 

 

 

 

 

 

*에너지 장을 보면 몇 년 후에 어떤 질병에 걸릴지르 미리 알 수 있다.

 

*시야를 넓혀 전체를 다 볼수록 운이 좋아진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마음속에서 그 문제와의 시간적, 물리적 거리를 늘리는 게 좋다.

"만일 내가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지금부터 50년 후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

(...)

내 마음의 공간을 천 킬로미터 밖까지 넓히면 그 만큼 많은 지혜가 쏟아져 나온다. 내 마음

의 공간을 천 년 후까지 늘려도 그만큼 많은 지혜가 쏟아져 나온다. 마음의 공간을 넓힐수록

'나'는 무한히 퍼져 나간다.

 

*내 아이들은 10년 후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나는 세상을 떠날 때 내 인생을 어떻게 되돌아 볼까?

100년 후에는 사람들이 나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렇게 시간적 시야를 넓힐수록 '나'는 더욱 커진다. 그러면 나 자신을 더욱더 정확히 보게

되고, 헛발을 내딛지도 않게 된다.

 

*상대와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상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라. 절대로 손해나는 일이 아니다.

그래야 나의 공간이 상대에게까지 확장된다. 그러면서 상대는 마법처럼 내 의도대로 움직이

게 된다. 공간을 넓힐수록 기적이 일어난다.

 

*한꺼번에 몰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잘게 쪼개 조금씩 공부하는 것이 오래 기억된다.

 

*현실세계는 고통의 바다이다. 나 스스로 시공간상으로 시야를 좁혀 '나'를 육신의 공간 속에

가둬놓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시야를 넓혀 텅 빈 공간의 고요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 이렇게 조용한 걸!'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시끄러운 소리

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시끄러운 소리가 점점 커졌다. 거꾸로 텅 빈 공간의 고요에 초점을

맞추자 고요함이 점점 깊어졌다.

 

*시야를 완전히 넓혀 텅 빈 공간과 하나가 되면 코가 얼얼해지거나 눈 주변, 이마 등 얼굴이

꿈틀거리는 걸 느끼기도 한다. 가슴이 쿵쿵 뛰기도 한다. 내 몸을 움직이는 건 두뇌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텅 빈 공간은 만질 수도 있다. 양 손바닥을 벌려 서로 가까이

했다 멀리했다 해보라. 손바닥 사이의 공간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밀면 밀리고 당기

면 끌려온다. (...) 텅 빈 공간과 하나가 되면 완벽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빛의 물결이 흐르는 것처럼 가뿐하고 섬세한 음악같은 소리만 감지될 뿐이다.

텅 빈 공간은 지혜로 가득하다.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왓칭을 하고 나면 갑자기 답

이 떠오른다. 텅 빈 공간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세파에 절은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고 위로

해 준다.

 

*육신 속의 나는 '개체 나'이다. 무한한 빛의 공간은 '전체 나'이다. '개체 나'가 점점 커지면

'전체 나'가 된다. 거꾸로 '전체 나'가 점점 작아지면 '개체 나'가 된다. 그래서 '전체 나'와

'개체 나'는 하나이다. '개체 나'가 시야를 넓히면 '전체 나'가 되고, '전체 나'가 시야를 좁히

면 '개체 나'가 된다. 그렇다면 '개체 나'가 소멸될 땐? '전체 나'로 완전히 돌아간다. 사람들

은 '전체 나'를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체 나'와 신은 별개의 존재일까? 아니다. 신과 나는

하나이다. 신을 나와는 별개의 존재로 분리시키면 신의 무한한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시야를 넓힐수록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고, 생각이 만들어내는 환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만일 내가 과거에 큰 죄를 지었다면? 지금 진심으로 뉘우치면 죄가 완전히 사라질까? 당연한

일이다. 단 조건이 있다. 아무런 주저함이나 의심도 끼어 있지 않은 '진심'이어야 한다는 것이

다. '진심'일 때만 텅 빈 공간과 접속되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은 이처럼 시간과 거리를 초월

해 요술을 부리는 빛 알갱이들로 가득하다. 자연히 내가 시야를 넓히면 넓힐수록 '나'의 공간

이 넓어져 그만큼 더 많은 요술이 쏟아져 나올 수 밖에 없다.

 

*때로는 인생이 장애물로 가득한 미로처럼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육안으로만 바라보면

아무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물질인 육안은 시야가 짧다. 반면, 마음의 눈은 물리적 한계를

초월해 모든 걸 다 본다. 시야가 무한하다. 위에서도 보고, 아래에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모든 방향, 모든 시점에서 다 본다. 정말 출구가 안 보일까? 만일 출구가 없다면 그건 설계가

잘못된 미로이다. 인생의 모든 시련도 마찬가지다. 벗어나지 못할 시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영적 성장을 위해 스스로 설계해놓은 시련이기 때문이다.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인생의 가장 귀중한 기회가 최악의 시련을 가장해서 나를 찾아왔은을 깨닫게 된다.

 

*내 육신은 감정과 생각의 공간에 같혀 있다. 감정과 생각이 내 육신을 움직인다. 하지만 이게

진실일까? 시야를 좀더 넓혀보면 영혼이 감정과 생각, 육신을 움직인다. 시야를 완전히 넓혀

보면 텅 빈 공간이 감정과 생각, 육신, 영혼을 움직인다. 내가 생각의 공간에 같혀 있으면 생각

이 육신을 움직인다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야를 완전히 넓혀 전체를 보면 텅 빈 공간이

그 공간 속의 모든 현상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각이 내 몸을 돌아가게 한다'고

믿으면 나는 생각과 한 덩어리가 된다 생각의 노예가 된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반면, 무한한 텅 빈 공간이 내 몸을 돌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나는 무한한

공간과 하나가 된다. 자연히 내 몸은 무한한 공간 속에 잠시 떠 있는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용돌이도 잠시 스쳐가는 현상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설레는 마음은 '이럴까, 저럴까?', '될까, 말까?' 등과 같은 잡념을 품고 있지 않다. 오로지

문을 활짝 열어놓고 결실을 맞이하길 기다릴 뿐이다.

 

*새로운 생각을 깔려면 낡은 생각부터 놓아주어야 한다. 텅 비워야 한다. (...) 생각만 완전히

텅 비우면 텅 빈 공간이 내 속마음을 읽고 알아서 이뤄준다.

 

*'이젠 완전히 끝났다'라는 생각으로 일을 놓아버리면 마음의 공간이 넓어져 시야도 투명해

진다. 전체가 보인다. 마찬가지 이치로 문제가 이미 완전히 풀린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전체가 훤히 보인다. 미래의 시점을 멀리 잡을수록 더 크고 투명한 눈으로 볼 수 있다.

 

*의지로 무의식에 깔려 있는 부정적 생각을 바꿀 수 있는가? 무의식은 의지보다 백만 배나 더

강하다. 그 속에 가둬놓고 짓누른다고 부정적 생각이 사라질 리 만무하다. 그보다는 마음의

공간을 넓혀 부정적 생각이 스스로 자유를 찾아 떠나도록 도와주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진심으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근원적인 진실을 이해해야 한다. 내 몸을 포함한 우주만물

은 죄다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이다.

 

*잘 치겠다는 생각을 멈추고 공과 몸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몸이 스스로 알아서

공을 쳐준다.

 

*몇 년 전 시골에 내려가서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빈 방에 들어갔다. 눈을 감고 왓칭을 시작

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다니는지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라보고, 

또 떠오르면 바라보고... 생각은 바라보면 사라졌다.

'다음 생각은 어디서 떠오를까?'

텅 빈 공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숲 속의 올빼미가 어둠 속에서 먹잇감이 떠오르길 지켜

보듯. 얼마나 지났을까?

'어?'

갑자기 양손과 팔이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너무나도

황홀한 무한한 공간이 활짝 펼쳐졌다. 아름다운 투명한 빛이 가득한 바다였다. 너무나도 순수

하고 명징한 의식만 남았다.

'아, 드디어 고향을 찾았구나.'

공허하던 마음이 난행처음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내가 그토록 하늘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과거 마음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릿속은 들여다보는 순간 텅 빈

공간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말하는구나!'

마음의 공간에 울타리가 있을까? 다음 생각은 어디서 떠오를까? 하고 이 구석 저 구석 가만히

살펴보면 아무 울타리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각이 사라지면 그냥 무한한 공간이다.

육안으로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들여다보는

순간 저절로 공간 속을 들여다보게 되고, 생각도 역시 저절로 사라진다. 생각은 들여다보면

꺼지는 거품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왓칭하려면 상당한 연습이 필요할 수도 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졸음도 쏟아지고 잡념까지 끼어들기 때문이다. 왓칭과 졸음, 잡념이 서로 숨바꼭질을

한다. 하지만 연습을 하면 할수록 마음의 공간은 점점 더 커지고 맑아진다. 그러면서 쉬워진다.

 

*모든 생각은 에너지의 물결이다. 장기간 흘려보내지 않은 채 품고 있으면 마음속에 틀어 박힌

다. 정체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깊이 틀어박힌다. 나중엔 넓은 공간에 나가는 게 두려둬진다.

약을 먹어도 나을 리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나'를 생각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머릿속에 든 생각을 어떻게 분리시키지?'

분리시키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마음의 눈으로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들여다보는 순간 생각과 '나' 사이엔 거리가 생긴다. 거리가 생기면서 생각과 '나'는 저절로

분리된다.

 

*어두운 생각은 들여다보지 않으면 틀어박힌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사라진다. 들여다보면

꺼지는 허상의 거품이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은 모든 말을 알아듣는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면 상대의 내면도 알아차린

다. 단 어떤 주저함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어야 한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마음이 완전히 열리

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에게 잘못을 저질렀든 안 저질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만일 상

대가 불쾌감을 느꼈다면 상대의 시각에선 그게 옳다. 따라서 무조건 용서를 비는 게 해결책이

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다.

 

*화가 내 몸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화는 내 몸속에 갇혀버린다. 그래서 독이 된다.

하지만 '나'는 몸에 갇힌 존재인가? 아니다. 시야를 넓히면 넓힐수록 무한히 퍼져나가는 존재

이다. 그래서 화가 몸 밖으로 퍼져나간다고 상상하면 실제로 퍼져나간다.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면 시간도 사라진다. 시간도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이다. (...)

생각이 먼저 사라져도 텅 빈 공간이 되지만, 텅 빈 공간을 먼저 상상해도 생각이 사라진다.

 

*눈 뜨고 왓칭하려면?

1. 시야를 최대한 넓혀 넓은 공간 전체를 바라본다. 육안의 초점을 완전히 풀고 힘도 완전히 뺀

다. 육안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상상한다.

2. 시야를 넓히면 마음의 공간이 넓어져 갇혀 있던 생각들이 풀려나간다.

3. 텅 빈 공간에 또 어떤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지 지켜본다. 지켜보고 있으면 안 떠오른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은 어디 있을까? 안구 바로 뒤의 두개골 깊숙한 곳에 송과선이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데카르트가 '영혼의 자리'(seat of the soul)라 불렀

던 곳이다. 육신의 세계와 영적 세계를 이어주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왓칭할 때 '난 육안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 혹은 '마음의 눈에서 사방으로 빛이

퍼져나간다.'라고 상상하면 왓칭이 편안해진다.

 

*인생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를 알면 신을 알게 된다. 내 마음을 수정처럼 맑게 닦아

시야가 무한해지면 무한한 신과 하나가 된다. '원래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모든 것은 영적 성장을 위해 설계된 수업이다. 지구는 거대한 학습

장이다. 이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만으로 시야는 무한히 넓어진다. 모든 걸 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지구는 육신의 옷을 걸친 무수한 영혼들이 연기를 펼치는 연극무대이다. 모든 등장인물은 연기

자들이다. 연극의 이야기도 각자의 영적 성장을 위해 짜인 각본대로 전개된다. 때로는 각본에

정해진 나의 매역이 너무 견디기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배역을 맡은 연기자는 연기자일 뿐이

다. '진정한 나'는 연극 전체를 멀리서 지켜보는 무한한 마음이다. 시야를 넓혀 멀리서 큰 눈으

로 내려다보면 무수히 많은 '개체 나'들이 한 무대 위헤서 다 함께 연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내가 중간에 배역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 연극을 무

사히 마치도록 해준다.

견디지 못할 시련은 존재할 수 없다. 왜야하면 나 스스로 써놓은 각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겪는 가장 힘겨운 시련이 내 인생의 가장 귀중한 선무이 될 수 있다.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생각은 '나'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럼 생각은 '나'와 분리돼  스스로

사라진다. 생각이 사라지면 무한한 공간이 열린다.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흐르는 공간이다

그곳이 나의 진청한 안식처이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지친 걸음을 잠시 멈추고 마음속을 들여다보라는 신호이다. 들여다

보면 고통을 일으키는 온갖 생각이 사라진다. 슬픔은 스쳐가는 것에 매달리지 말라는 신호이

다. 들여다보면 슬픔을 일으키는 생각도사라진다.

내 힘으로안 될 땐 너무 애쓰지 마라. 내 팔다리의 힘도, 내 몸뚱이의 열정도, 내 두뇌의 생각도,

나를 휘감는 온갖 감정도 사실은 바깥세상에 속한 것이다. 바깥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건 내

마음속에 들어 있다. 바깥세상은 착가의 세계이다. 그 속에서의 몸부림을 멈추고, 대신 마음 속

을 들여다 보라. 들여다보면 무한한 공긴이 열린다. 시야가 무한해진다. 내가 그토록 매달리던

것도, 붙들고자 했던 것도, 얻으려 애쓰던 것도, 죄다 스쳐가는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무한한 공간 속에 사랑으로 가득한 무한한 존재가 들어 있다. 그 존재와 분리될수록 나는 점점

작아진다. 그 존재와 하나가 될수록 나는 점점 커진다. 그 존재 앞에 나의 모든 아픔과 두려움

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맘껏 눈물을 뿌려라. 나에 대한 모든 비판과 심판을 내려놓아라.

나를 완전히 열어놓고, 나의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무한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래야 비로소 참다운 안식을 얻게 된다. 참다운 안식 속에서 모든 새로움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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