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성중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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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상 속 ㅡ 김성중 , 2018년 제 63 회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



KBS라디오 문학관으로 단편들을 듣는다 . 책을 몇권이나 쌓아 놓고 활자에 집중이 안되는 며칠이 이어진다 . 헛손질이나 헛발질처럼 텅 비어 있는 곳을 할퀴는 느낌 . 세 권의 책을 들쑤시다가 포기했다 . 억지로 읽은 책도 있었지만 그런 상태로는 읽은 맥락조차 정리를 못한다 . 왜 이렇게 방황하나 싶다 .

E-BOOK 에서 팟캐스트로 , 별 관심도 없던 TV 종영 드라마로 공간을 떠돌 뿐이다 . 그러다 지난 해 말에 라디오 문학관에 올라온 김성중 작가의 < 상속 >을 기억해 내곤 듣기 모드로 전환했다 . 몸은 일상의 일로 도피하면서도 귀는 그쪽으로 열어 둘 수 있어서 마지못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

마침내 < 상속 > 한 편이 끝나고 잠시 숨을 골랐다 . 지금은 책 속 문장과 라디오문학관의 단편들 속 문장을 퍼즐처럼 맞춰보는 시간 . 라디오 문학관은 말그대로 단편을 연속극처럼 재연하기에 문장과 똑 맞아 떨어지진 않는다 . 행간을 건너 뛰고 , 열과 줄을 바꾼 글의 짝을 맞춰 찾듯이 그런 시간을 갖느라 겨우 책장 속에 눈을 박아둘 수 있었다 .

소설 속에선 기주 언니와 선생님이 화음처럼 들리도록 다자이 오사무의 ' 사양 ' 속 문장에 겹쳐 긋던 밑줄처럼 나는 라디오 문학관의 상속과 내 책 속의 상속을 고르고 펴는 일을 하는 중인 셈이랄까 . 그렇지만 내가 앓고 있는 이 허무를 상속이 뭔가 채워주진 못한다 . 더 반짝이는 '상속'으로 다음 선을 잇지도 못한다 . 하지만 겨우 알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신이 의미도 모르게 낭비처럼 퍼부어주는 재능에 대한 의문문만은 어쩐지 내가 익숙하게 알던 세상의 것이었다는 작은 깨달음이다 . 그것만이 유구한 진실의 낱말처럼 혀 밑에 사파이어로 자리한다 . 아릿하고 투명하게 .

소설에서 기주 언니였다가 나 ' 진영 ' 이었다가 결국은 작가 김성중이 말하는 읽고 쓰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 그들이 보낸 찬란하고 아름답던 여름나기로 독백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 작가는 어느 날에 익숙하고 가깝던 이들을 떠나보내고서야 다음 문장으로 마침내 이륙할 수 있었을까 ?

정말로 지독한 일을 겪으면 그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되는 법이다 .
마찬가지로 진영 또한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함구했다 . 시시콜콜 일상을 털어놓던 아이가 입도 떼기 싫을 만큼 끔찍했구나 , 짐작할 뿐이다 .


" 이렇게까지 힘든데 고통이 글자로 변하지 않아서 화가나요 . "
진영은 여전히 책 속 문장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

" 불행한 건 괜찮아요 . 고통스러운 인간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생각에 매달리는 법이니까 . 저는 언제나 불행을 숭상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 어릴 때는 불행이 모자란 것 같아 불행했을 정도로 . "
" 그만큼 네가 평탄하게 살아왔다는 소리지 . "
" 막상 내 처지가 되고 보니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우게 되더라고요 . "
(본문 13 쪽 )

요즘의 문제는 생각과 감정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 분노는 분노로 된 생각일 때가 많았고 , 생각을 파고들다 보면 화가 치밀거나 눈물이 흘러나와 중단된다고 했다 . 이렇게 정신없이 상태가 변하는 통에 그럴싸한 표현하나 걸려들지 않고 , 그저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는 나날이라는 것이다 .
진영은 불행을 극복하기보다 거기에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 빌어먹게도 작가인 것이다 . 작가로 변해버린 것이다 . 이 애는 여전히 자신에게 몰두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본문 14 쪽 )

" 어떤 책을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어 . ‘ 여기서는 안전해 . ‘ 그러니까 왈칵 좋은 거야 . ‘ 안전 ‘ 이라는 말이 너무 정확해서 .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든 책을 펼치고 문을 닫으면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어 . "
(본문 17 쪽 )

선생님이나 기주 언니 같은 사람들에게 재능은 왜 있는 것일까 ?
선생님은 주목받는 유망주였지만 첫 책을 낸 지 2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 가슴에 품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밖으로 나갈 기회를 못 찾은 새들처럼 선생님과 함께 영원히 봉인되어버렸다 . 기주 언니의 재능은 분명했지만 나이도 환경도 받쳐주지 않았다 .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듬해 가출한 딸이 돌아와 보상을 요구했고 ,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날들이 시작됐으니까 . 이륙하는 데 성공한 언니의 비행기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영원히 허공에서 맴돌고 있다 .

참으로 잔인하고 신비로운 일이 아닌가 . 아무리 참담한 슬럼가에도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 인구가 많으면 그중 몇퍼센트에게는 반드시 예술적 재능이 발현된다 . 재능이 삶을 낫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 삶 쪽에서는 재능을 펼칠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 퍼부어주는 것이다 . 이런 재능은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
(본문 27 쪽 )

발밑에 채는 무수한 파편들 , 사금파리의 연약한 미광 , 빛은 거기에서도 나왔다 . 일찍 죽은 천재가 쓰지 못한 다음 책 , 세월을 통과하지 못한 새태소설 , 잔업에 지친 회사원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야근‘ 이라는 제목의 소설과 대학생 습작품 속 뜻밖의 좋은 두 문장 , 요컨대 성공을 거두지 못한 모든 소설의 잔해가 거기 있었다 . 모래보다 작고 반딧불보다 약한 빛의 입자가 대지 위에 빛무리를 이루었다 .
(본문 35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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