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우리 자신 속에 정체를 감춘 채 숨어들어 있었다 .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죽여야 했다 . 내가 저들의 적이었고 , 내가 곧 나 자신의 적이었다 .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수용소의 죄수처럼 한손
에 삐라를 들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왔다 . ...명색이 작가인 나는 분단으로 인해 수천만 의 한국어 독자를 빼앗긴 가련한 소설가였다 . 그렇다면 독자를 되찾기 위해 , 그리고 만성적인 우울증에 걸려 쥐가 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뭔가를 써야 하는데 ,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그 오랜 여행 끝에 다시 이 장면 앞으로 돌아온 지금,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바로 이 순간 막막한 공포를 가면으로 간신히 억누르며
경쾌하게 몸을 놀리는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이제 나는 사진의
안팎을 넘나든다 . 내가 포로가 되고 , 또 비쇼프가 된다 . "
( 본문 p . 25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