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시선 386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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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려도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것

붉고 붉은 피가 무겁고 무거운 솜이불로

스며드는 광경을 기억하는 것.

죽을테야,

울부짖던 밤을 기억하는 것.

그 무겁게 젖은 이불이 버려지던 깊은 겨울 밤.

그녀의 멍하던 눈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던 칼날이

아직도 기억 속에 뜨겁고 생생하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

살면서 날붙이는 부엌칼은 두려워 하면서

충동적으로 자꾸만 모아들이는 커터칼이

있다는 것도.

당신들은 모를거라고.

그 겨울 깊은 밤. 우린 못 본것으로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무심함.

상처입었다. 도망간 당신들이.

내팽개친 우리는 돌연 기억이 부르는 날에

혼자 상처를 핥을 뿐이고.

상처 입은 개처럼...

칼 이야기


펄펄 날뛰는 목숨을 재우는 데 전부를 탕진했지

시커면 녹을 흉터처럼 두른 칼

아무 주방 아무 선반에고 엎드려 질긴 시간을 채 썰었지만


정작


어느 것 하나 썰어낸 일 없는


스치듯 새겨진 물의 이름들


젖은 꿈속을 헤엄쳐 올 때면 백치의 비린 눈을 슴벅일


때면


오롯한 죄여 병이여 맨발로 탄식하는


이따위 몰지각한 쇠붙이라니,


너는 말하지 칼자루를 거머쥔 너는


끌끌 혀를 차며 빈 찬장 구석으로 팽개쳐버리고 말지만


이런 칼도 하나쯤 있는 법


예리하고 날랜 칼날이 아니라 부러진 칼끝으로 썩어가는


자루로 이야기하는


아무도 벼릴 수 없고, 어쩌면 누구도 벼리려 하지 않는





벌써 오래전 스스로를 절단 낸



한자루 무쌍한


심장에 가까운 말 : 제 2부 [칼 이야기 ] 박소란 詩

p.64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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