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전투 1 - 히데요시의 죽음
시바 료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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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에야스의 '모략'? 히데요시의 '유산'!
- [세키가하라 전투], 시바 료타로, 1966.


"이해관계만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2권. 이에야스의 모략>, 시바 료타로, 1966.


[초한지]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가 일본 역사소설작가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77)을 읽고 난 후, 시바 료타로의 '역사 심리소설'의 면모를 좀더 보고자 집어든 책이 [세키가하라 전투](1966)다.

내 비록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1950~) 12권은 읽을 생각을 안했지만, '일본인의 근원'을 탐색하기 위해 '역사 심리소설'을 쓴 시바 료타로의 작품을 통해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를 이 참에 조금 읽게 된 것이다.

시바 료타로가 15~16세기에 걸친 일본 전국시대를 통해 묘사한 일본인의 '심리'는 '이익'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사내는 워낙 기분의 변화가 별로 없는 성격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막힌 데 없이 쾌활한 사람... 쾌활함을 더욱 연출하여 인심을 수렴하는 데 쓰기도 했다. 이에야스의 성격에는 노부나가라든가 히데요시와 같은 선명한 색채감이 없었다... 어둡고 가라앉은 중간색... 워낙 기분의 변화가 별로 없는 성격이었지만 그 스스로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에게는 평생토록 어린애 같은 데가 있어서 기쁠 때는 몹시 들뜨기도 했지만, 이에야스는 나면서부터 애늙은이 같은 데가 좀 있었다. 점잖은 미소를 띠고 있는 정도의 상태이면 이 남자의 마음 속에 즐거움이 파도치고 있을 때였다."
- [세키가하라 전투], <3권. 미쓰나리, 일어서다>, 시바 료타로, 1966.


100년에 걸친 일본 전국시대를 최초로 통일한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였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쓰히데로부터 기습을 받고 자결한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노부나가의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제패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1584년)에서 실질적으로 히데요시 군대를 무력에서 이겼다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를 잇는 전국시대 천하통일은 외교전략의 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몫이 된다.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오다 노부나가는 새를 죽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를 울게 만들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세 인물의 '심리' 대비는 유명하다.

이처럼,
노부나가는 까다롭고 무서웠고,
히데요시는 쾌활하고 자유자재였으며,
이에야스는 신중하고 너그러운 한편, '음흉'했다.

조선과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무리한 7년 전쟁으로 일본 내 민심을 잃은 도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6살 짜리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를 제치고 다이코(대정대신) 쇼군이 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략'이 판치게 된다. 
노부나가와 동급의 다이묘였음에도 무력에서 실력이 모자랐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이겼음에도 외교와 모략의 실력에서 히데요시에게 밀렸던 이에야스에게는 하데요시의 죽음이 바로 그가 천하를 차지할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나이,
이미 오십대 중반을 넘어섰을 때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측은 변함 없었다. 관측이라기 보다는 '신념'이었다. 아니, '신념'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지혜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 이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미쓰나리가 경모하는 히데요시나 노부나가의 경우에는 모든 정세와 조건들을 유연하게 계산하고 난 후에 얻어진 마지막 결론을 신념에 찬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미쓰나리는 항상 '고정관념'이 먼저였다. 그 '관념'은 모든 정세와 조건을 끼워 맞춰서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4권. 결전 전야>, 시바 료타로, 1966.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대망]의 주인공이 소설의 원제처럼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였다면,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의 주인공은 히데요시의 비서관(지부쇼유)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시절 시동으로 들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가토 기요마사 같이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이라기 보다는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관료'에 가까웠다. 히데요시의 천하쟁패 과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같은 맹장과 구로다 조스이 같은 책사가 필요했지만, 천하통일 이후에는 이시다 미쓰나리 같은 '경리/재정/인사'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낸 관료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책사 구로다 조스이는 히데요시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견제한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 본토에서 먼 남쪽의 규수 지방으로 지혜롭게 은거했고 역시 규수 지역 20만석의 다이묘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 최측근 비서관이자 오사카 인근의 고슈(사와 산성) 19만석의 미쓰나리와 대립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대에서 서로 대립한 가토 기요마사(무장)와 고니시 유키나카(관료) 간 갈등관계의 근원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비서관' 이시다 미쓰나리였다. 미쓰나리 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카는 세키가하라 전투 패전 후 미쓰나리와 함께 참수당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파고든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전국시대를 해쳐온 백전노장 이에야스가 '이익'을 앞세워 도요토미 가신들의 갈등을 조장하고 이간질시키며 가토 기요마사 등의 무장들을 자신의 편으로 사전포섭하는 '모략'의 대가였다면, 그의 적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주군인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의(義)'를 앞세워 간토(관동) 지역 250만석의 당시 최대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간적(奸賊)'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의 책사 혼다 마사노부의 간책에 따라 미쓰나리의 '심리'를 역이용하여 미쓰나리로 하여금 천하를 건 일대 대전투를 일으키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이에야스(에도-동군:7만5천명)와 미쓰나리(오사카-서군:10만명)의 양군이 건곤일척으로 벌인 대전투가 바로 1600년 9월의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였다.


"히데요시는 남들에게 '이익'을 주는 걸로 천하의 영웅호걸을 타락시켰어. 그러다 보니 천하의 인심이 오직 '이익'에만 급급하여 큰 '도리'를 생각하지 않지. '이익'으로 얻은 천하는 그것이 흩어지면 망할 수밖에. 지금 (세키가하라) 미노 평야에서 나이후(이에야스)를 위해 몰이꾼처럼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모조리 히데요시가 세운 다이묘들 아닌가? 그들의 정신은 히데요시의 '유산'일 뿐이야."
- [세키가하라 전투], <5권. 시대의 패자, 역사의 승자>, 시바 료타로, 1966.


'세키기하라 전투'의 결론은 전투에서의 '전술'보다 모략에 의한 '전략'에서 이미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의 승리였다. 

아직 유학의 '인의(仁義)' 개념이 확립되기 전의 당시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미쓰나리 식의 '의(義)' 관념보다는 원초적인 가문의 생존본능과 '이익'이 우선이었다. '이익'으로 모인 동군은 무공의 경쟁으로 혼란스럽지만 강력하게 뭉쳤고, '이익'보다 '관념'으로 미쓰나리에 의해 강요받아 모인 서군은 군사의 수가 많았음에도 '세키가하라 대전투' 이전에 이미 사전와해된 상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략은,
'먼저 이겨놓고 싸움을 거는(先勝而後求戰)' 손자의 병법이기도 했다.

미쓰나리의 참모 시마 사콘의 패배를 알면서도 목숨걸고 싸우는 사무라이다운 죽음 이후 미쓰나리의 서군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서군의 실질적 주장 미쓰나리가 체포되어 참수당하면서 오랜 기간 '준비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상이 시작된다.

시바 료타로는 [세키가하라 전투] 다섯권의 소설 내내 그 특유의 '역사 심리소설'답게 각 인물들의 심리를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배신자와 양다리 걸친 자, 남의 공적을 가로채는 자와 관망하는 자 등.

사무라이 무사도에 따라 사나이다운 약조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자들도 있었던 반면, 결국에는 가문 또는 개인의 '이익'에 따라 자신의 편을 선택하는 인간 '심리'의 적나라한 본성의 대부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드러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훗날 2백년 이상 지속된 에도 막부의 포용력을 연 이면에 천하 최대권력을 훔치기 위한 음흉한 '모략'의 대가로 그려진다. 열도의 다이묘들을 '이익'으로 꼬셔서 이용해 먹는 한편 겉으로 드러나는 관대함과 온화함은 권력 앞에 선 인간의 무서움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유일한 유학자로 불린 후지와라 세이카의 세평에 의하면, 인간군상의 '이익' 우선주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략'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익'으로 다이묘들의 충성을 모집한 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던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분석에 의하면, 
귀족 '적통'이 없던 히데요시는 '상인'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앞세웠고, 
타고난 귀족이었던 이에야스는 '농민'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했으나 희대의 경쟁자들이 사라진 후 일생일대 마지막으로 눈앞에 보이는 천하의 권력 앞에서 '이익'을 매개로 한 '모략'의 대가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시바 료타로는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의 마지막 5권의 소제목을 <시대의 패자, 역사의 승자>로 지었다.
'실리'보다 '관념'만을 중시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한계는 있었으나 '의'를 지키고자 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비록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쟁에서는 '패자'였지만, 역사에서는 '승자'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소설의 결론은 현실로부터 도피했다가 다시금 미쓰나리-이에야스와 함께 '천하삼분지계'를 도모하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은둔하려는 히데요시의 예전 책사 구로다 조스이의 다음과 같은 세평으로 마무리된다.


"(구로다) 조스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의/불의'라는 것은 일을 만드는 명분은 될지언정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는 되지 못한다.
...
이번 (세키가하라 전투) 거사는 고 다이코(히데요시)에 대한 더없는 대접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멸망에 즈음하여 미쓰나리 같은 총신들 마저 이에야스에게 달려가 아양을 떤다면 세상은 망가지고 인간은 정절을 잃는다. 더구나 남겨두고 간 총신들에게 그렇게까지 배신을 당한다면 히데요시는 어찌해 볼 도리없이 비참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말한다면 그 사람(히데요시)은 충분히 성공한 것이라고 조스이는 말하고 있었다."
- [세키가하라 전투], <5권. 시대의 패자, 역사의 승자>, 시바 료타로, 1966.

***

-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1966), 시바 료타로, 서은혜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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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깟디마 The Muqaddimah - 이슬람 역사와 문명에 대한 기록
이븐 칼둔 지음, 김정아 옮김 / 소명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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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서 '역사학'의 시초
- [무깟디마], 이븐 칼둔, 1377.


'사합키란' 티무르는 '세계정복'을 위해 1,700만 명을 학살했지만, 칭기스 칸 몽골 대제국의 계승을 표방하며 학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현대의 학살자 히틀러의 '신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과 비슷한 것이었을는지 모르겠으나 '세계정복자' 미치광이들의 대규모 살육전은 한편으로 아시아와 유럽 일대의 문명과 문화교류의 흔적을 역사책에 남기기도 했다.

학문을 장려한 티무르가 말년에 독대를 요청하여 딱 한 번 만났다는 이슬람권 최고의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이븐 칼(할)둔(Ibn Khaldun : 1332~1406)이다.


"이 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정치원리, 사물의 성질, 민족, 지역, 시대에 따라 그 생활방식, 성품, 관습, 교파, 학파, 주요 상황 등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숙지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상황도 포괄적으로 숙지해야 한다. 역사학자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하고 어떤 상황에서 유사함과 차이가 발생하는지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각각의 사건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지식'으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각 사안의 '기원'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 이후의 단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원칙'과 '근거'에 따라 전승되어 온 기록이나 보고를 면밀히 검토하고 조사해야 한다. 만약 그런 기록이나 보고가 역사학자 스스로 정한 요구들을 모두 충족시키면 그것은 '옳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역사학자는 이를 '그른 것'으로 간주하고 과감히 버려야 한다."
- [무깟디마], <서론>, 이븐 칼둔, 1377.


이븐 칼둔이 당대 '사힙키란(세계정복자)'의 대명사였던 티무르에게 어떤 지혜의 말을 전했는지 알 수는 없다. 역사책은 티무르의 초청으로 이 두 사람이 한 번 독대한 사실만을 전했고, 이븐 칼둔은 티무르가 죽은 이듬해에 사망했다.

작가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2018)를 통해 알게 된 이슬람 역사가 이븐 칼(할)둔은 이슬람권에서 '역사학의 아버지' 급이다. 

즉, 역사학자의 연구방법으로 당대 '인문주의'와 '과학적 방법'의 결합을 제시했고, 그로 인해 역사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정초했다. 적어도 이븐 칼둔 이후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역사학은 더 이상 이야기의 단순한 서술이나 노래(서사시)의 전승만이 아닌,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논리'를 기반으로 하여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고 분석하며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역사적 사실 간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하나의 '사회과학'이 되었다.

물론, 역사서술 내내 알라신을 칭송하는 이븐 칼둔 당시의 '과학적 방법'이라고 해봐야 '연금술' 따위를 위시한 '신비학'이었겠지만, 이븐 칼둔 당시는 근대 과학의 이전 시대였다. 중세 당시는 '신학'도 '과학'이었다.
우리가 지금 아는 '과학'이란, 르네상스 이후 근대의 '과학'이다.

'옳고 그름'의 잣대는 다를 수 있겠지만,
'옳음'을 취하고 '그름'을 과감히 기각하는 '과학적 탐구방법'은 같은 것이다.


"... 역사적 정보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는 법칙은 바로 인간의 사회, 즉 문명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문명 자체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상황, 기대하지 않았으나 나타나는 상황,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상황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의심할 바 없는 '논리'적인 입증을 통해서 역사적인 정보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법칙'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명'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도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옳은 잣대를 가지게 되고, '역사가'는 그 잣대를 이용해서 자신이 기록하는 정보에 대해 진리와 정확성을 심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제1권>([무깟디마])의 목적이다."
- [무깟디마], <권두언>, 이븐 칼둔, 1377.


14세기 북아프리 튀니지 출신의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칼둔은 [충고의 서(Kitab al-ibar)] 7권을 썼다는데, 그 중 '서문'격인 <제1권>을 [무깟디마(The Mugaddimah)](1377)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는 [역사서설]로 번역되는데, 보통명사 '무깟디마'는 '서문' 또는 '서설'이겠지만, 역사학에서 [무깟디마]는 이븐 칼둔의 [역사서설]로 알려졌다.

이븐 칼둔은 그의 역사책 [충고의 서] 7권 중 <제1권> [무깟디마]에서 <서문>과 <권두언>을 통해 '역사학' 일반에 대한 규정과 '과학적 연구방법'을 소개한 후 <1부>에서 역사학의 기본 토대로서 '인간의 문명 일반'을 다룬다. 철저한 중세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기후조건과 주술, 꿈 등이 인간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장황하게 기술하고, <2부>부터 <6부>에 걸쳐 민족과 권력, 유목과 도시 문명, 경제(재무/징세)와 문화(철학/지식/교육) 등에 관해 상세한 서술을 이어간다.

내가 읽은 결론부터 말하면, 
알라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기에, 인류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최초의 스승'이자 철학자로부터 배울 것은 불가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식('철학적 진리')이 아니라 그의 '논리학'적 사고방식일 뿐이며, 그러한 '과학(논리)적 방법'에 따라 철저하게 역사를 연구하되, 역시 세계의 본질이나 역사의 진리는 오직 알라신만이 알고 인도한다는 '인샬라(신의 뜻대로)'의 영역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가 이븐 칼둔의 [무깟디마]에서 얻을 것은 '역사학'의 '과학적 연구방법', 
그것 단 하나 뿐이다.


"인간의 성품에는 완고함이 있기 때문에 그 완고함을 꺾기 위해서는 '투쟁'을 해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투쟁하기 위해서 '아싸비야(al-asabiyyah)'를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 [무깟디마], <2부>, 이븐 칼둔, 1377.


모든 게 알라로 귀결되는 [무깟디마]의 구조 속에서 인류사의 잡다한 항목들이 장황하게 다뤄지고 [충고의 서(書)]라는 제목의 <서설>답게 '알라'의 이름으로 무차별하게 '충고'되고 있다. 

그나마 [무깟디마] 또는 [역사서설]이라는 이븐 칼둔의 고전 역사책에서 '과학적 연구방법'의 중요한 핵심 개념 하나는 언급해야 하겠다.

바로,
'아싸비야(al-asabiyyah)'다.


"지도력은 어느 집단에서 지도자가 되거나 다른 이로부터 복종을 받은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자신의 지배를 강요할 정도의 힘은 아니다. 그러나 왕권은 지배권이나 강제적인 지배력을 의미한다. 만약 '아싸비야'를 지닌 자가 남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지위에 오르거나 우두머리가 되어 추종자를 갖게 되면 지배권과 강제력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런 권력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아싸비야'의 도움 없이는 바라는 바를 성취할 수 없다. 왕권을 '아싸비야'의 궁극적인 목표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무깟디마], <2부>, 이븐 칼둔, 1377.


'아싸비야'는 아랍어로 '부족주의' 또는 '연대의식'이라는 의미다.

이븐 칼둔이 [무깟디마] 내내 수천, 수만 번 언급하는 '아싸비야'는 혈통적 종족주의 연대의식으로써, '왕권'을 쟁탈하는 정치력이고 최초의 무력만이 아닌 '지도력'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지속시키는 이데올로기와 같다.

물론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
'창업'-'독재'-'축재와 사치'-'평화'-'부패와 쇠락'의 역사적 소단계를 거치며 4대를 제대로 넘기지 못할 수도 있는 이 '아싸비야'는,
프랑스 현대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식으로 보면 권력투쟁에서 상부구조로서 자율성을 가진 주요한 이데올로기이며,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 식으로 보면 다수 민중을 지배하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현상태로서 '강제의 철갑을 입은 헤게모니'와도 같다.

이븐 칼둔이 역사학을 '역사과학'으로 진화시킨 증거 중의 하나가 '아싸비야'라는 역사 분석과 서술의 요소에서 나타난다.


"아마도 우리 다음에 오는 이는 '알라'로부터 올바른 생각과 분명한 지식을 허락받은 이로서, 우리가 기술한 것보다 훨씬 더 심층적으로 이 '문제들('문명'의 본질과 그에 관계된 모든 사항들)을 다룰 것이다. 어떤 학문을 새로이 고안하는 자는 그 문제가 다루는 모든 것을 열거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그 학문의 주제와 세부사항을 다양하게 하고 관련사항들을 다룰 것이다. 그러면 그 이후 후학들이 문제를 부가하고 차츰차츰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 [무깟디마], <맺음말>, 이븐 칼둔, 1377.


'과학적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의 동료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2권>을 내는 '서문'에서 "선학들이 해답을 본 곳에서 마르크스는 문제(질문)을 보았다"고 썼다.

역사를 '과학'으로 만들었던 '과학적 사회주의' 관점에서 '역사'는 '해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문제제기'였다.

비록 이븐 칼둔은 '알라신'의 종교에 묶인 중세의 '과학'으로 '역사'를 보았지만, 
'역사'를 보는 그의 '과학'적 시선 만큼은 '역사과학'의 '서설'(무깟디마)로서 그 가치가 충분하다.

***

- [무깟디마(The Mugaddimah)](1377), 이븐 칼둔(Ibn Khaldun), 김정아 옮김, <소명출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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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 2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달궁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초한지(楚漢誌)'의 고전적 '심리극'
- [항우와 유방], 시바 료타로, 1977~1979.


제갈량이 '융중대책'(기원후 206년)을 통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출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4백여 년전 한신의 '한중대책'과 장량의 '하읍대책'이 있었기에, 더 나아가 제왕이 된 한신에게 대책을 강권하던 모사 괴철의 고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항우에 의해 관중과 파촉으로 쫓겨나 '한중'의 왕이 된 유방의 대장군 한신이 정세를 분석하며 공을 세울테니 봉토를 나눠달라고 했던 한신의 '한중대책'(기원전 206년).
팽성전투에서 항우의 3만 정예군에게 56만 군웅연합군이 대패하고 자식까지 수레 밖으로 밀어내며 유방이 도망친 하읍에서 제왕 한신과 양왕 팽월 등에게 봉토를 하사하여 독립시키고 그 힘으로 항우를 포위하자고 제출한 장량의 '하읍대책'(기원전 205년).
제나라 정벌 후 평정을 위해 제나라 왕위를 내려달라고 유방을 협박한 한신에게 종횡가적 책사 괴철(괴통)이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 양국의 전쟁을 한신의 독립된 제나라가 합세한 '삼국'의 전쟁으로 만들어 오랜 전란을 끝내자고 제안한 '천하삼분지계'(기원전 203년).

이처럼, '초한지'는 '삼국지'의 주요 모티브다. 
정사로서 사마천의 [사기](기원전 1~2세기)와 진수의 [삼국지](기원후 3세기)의 관계가 우선 그렇다. 
이는 먼저 씌어진 나관중의 [삼국연의](14세기)와 나중에 발표된 견위의 [서한연의](17세기)의 관계에서도 증명된다. 
물론, 이문열은 2000년대 초반에 [초한지]를 새로 쓰면서 명나라 말 종산거사 견위의 [서한연의]가 역사적 사실을 너무 비틀어버린 완전 허구라고 비판하지만.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의 기원은 분명 '초한전쟁'이었다.
또한 촉한황제 유비의 '백절불굴'의 정신 또한 서민황제 한고조 유방의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삼국지'의 '고전'적 원형은 '초한지'라 생각한다.

카프(KAPF)의 젊은 사회주의 작가였다가 일제 말기 친일문인이 된 소설가 팔봉 김기진은 1980년대까지 살아남았는데, 한국전쟁 후인 1954년에 종산거사 견위의 [서한연의]를 토대로 우리 현대사 최초로 '초한지'를 소개했다. 사마천의 [사기]라는 '정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해하결전에서 한신의 '구리산 십면매복'을 배치한 대중민담적 [서한연의]를 토대로 한 것이다. '초한전쟁' 민담이 조선 선조 때부터 우리나라에 유행했다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초한지'의 고전은 어쨌든 팔봉 김기진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초한지-통일천하](1954)라 할 수 있겠다.

이후 1983년에 역시 일제말 친일 문인의 경력이 있던 소설가 정비석의 [소설 초한지]가 또 한 번 신문연재 후 출간되었고, 2008년에는 보수우익 소설가 이문열이 2000년대 초반 다시금 <동아일보>에 연재한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대풍기운비장/大風起雲飛揚)]를 '초한지'로 엮었다. 아마도 정비석은 '구리산 십면매복'을 삽입한 [김팔봉 초한지]와 [서한연의]를 토대로 했을 것이고, 이문열은 그의 작풍대로 '정사'에 기초한 엄밀한 '평역'식 서술을 따랐기에 '구리산 십면매복'을 사실로 고증할 수 없다며 삭제했다.

견위의 [서한연의]를 최초로 완역한 중국고전 전문가 김영문 선생께서는 세상에 '초한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초한전쟁을 결정적으로 끝장낸 '구리산 십면매복'이 있는 '초한지'와 그렇지 않은 '초한지' 두 종류라고 한다.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1954)와 정비석 [초한지](1983), 이문열 [초한지](2003~2008), 그리고 김영문 선생 완역 [원본 초한지(서한연의)](2019)는 그 주장과 관점은 다를지라도 우리 '초한지'의 '고전'들이다.

그리고 이 중간 어디 쯤에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1923~1996)의 '초한지'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 몽골어를 전공하고 신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인의 근원'을 찾는 작업을 역사소설로 수행하고자 했다는 시바 료타로는 한 작품을 쓰기 위해 '한 트럭'의 자료를 섭렵하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그런 작가가 '초한지' 또한 썼다. 
1977~1979년에 역시 신문에 연재한 [항우와 유방]이다. 신문 연재 시 원제목은 [한의 바람, 초의 비]였다는데, 1980년에 출간하면서 제목을 [항우와 유방]이라 고쳤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80) 또한 소설 '초한지'의 '고전'이라 생각하게 된 건,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적으로 '초한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심리극'으로서의 '고전'적 면모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항우, 유방이 본격적인 활약을 펼친 시대는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춘추와 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고대문명이 형이상학적 사상과 기술문명을 숙성시켰을 때였다. 성숙기에 든 그 문명에는 근대적인 요소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상들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제각기 교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다.
'사(士)'라는 개인도 성립하였다. 사는 사상과 뜻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개인을 가리켰다...
중국사는 참으로 이상하다. 후대에 갈수록 문화의 균일성이 높아지면서 지적 호기심이 약해진다. 후한 말부터 이른바 아시아적 정체가 시작되어, 그 정체가 놀랍게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 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선진(先秦)'시대부터 이 시기까지의 중국은 전혀 다른 민족이 산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팔팔 살아 숨쉬는 사회였다. 진 제국은 사상적으로 보면 '법가'의 실험국가였다. 마치 은밀한 '법가사상'의 비밀결사가 그 성립과정의 이면에서 암약을 펼쳐 궁정을 장악하고, 제국의 원리를 구성하고, 체제를 만들어, 중앙과 지방의 관료조직을 구석구석까지 설계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진 제국을 붕괴시킨 힘은 '유민(流民)'이었다. 그 힘에 방향성을 부여하고 추진시킨 지도자들의 측근에는 '노장사상'의 후예와 '병가', '유가'의 후예, 또는 '종횡가'라는 외교기술자들이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법가'가 없었던 것은 '법가주의'를 쓰러뜨리겠다는 의식이 잠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항우와 유방], <저자 후기>, 시바 료타로, 1980.8.


1980년 [항우와 유방]의 <저자 후기>에서 시바 료타로는 춘추전국시대 농업생산력 발전을 토대로 전개된 정치세력간 권력투쟁과 정치외교술의 발전, 그 속에서 '사(士)', 즉 자신을 써달라고 '상품화'하던 '개인'의 등장을 조명하고 있다. 모두 '사'는 아니지만 사마천 [사기]의 <본기>와 <세가>, 그리고 <열전>에서 그리는 것처럼 등장인물 각자의 개성에 집중한다. 이들 영웅들은 '병가'로서 무인은 물론 '도가'와 '유가', '종횡가'의 모습으로 단결하여 진시황이 남긴 '법가주의' 폐해를 없애고자 했다. 또한 1천 년 정도 지나야 중국 역사에서 정착될 수 있었을 '중앙집권' 체제라는 '신문명'에 저항하던 다수 민중의 지지를 얻은 정치지도자 유방의 궁극적인 승리를 그려내고 있다. 
유방은 혁명으로 진나라를 무너뜨렸지만 그가 세운 한나라는 진의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답습함으로써, 이후 오래 지속되는 중국사에서 '천하통일' 군주의 롤모델이 된다.


"진(秦) 제국의 (중앙집권)체제는 분명히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1,000년이 넘는 역사의 성숙이 필요했다. 거기에다 '사(士)'나 서민들이 진 제국 체제의 선악을 논할 여유도 없을 만큼 세금은 과중하였고, 노역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가혹했다. 사람들은 그냥 왕후(王侯)를 모시기만 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옛날을 그리워했다. 그런 기분으로 본다면, (초)회왕의 장엄한 행렬은 (초나라)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는 광경이었다."
- [항우와 유방 1], <항우, 팽성에서 전군을 장악하다>, 시바 료타로, 1977~1979.


백전백패하고 도망만 치다가 운 좋게 황제가 되는 유방보다는 전투에서 백전백승했던 항우의 죽음으로 소설을 끝내는 것을 보면,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주인공은 항우로 볼 수도 있겠다.

실례로 시바 료타로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역동적인 시대의 마지막 이민족으로 '초(楚)' 나라를 지목한다. 오래전 오와 월은 사라졌고 화북의 중원 문명에 대항했던 마지막 이민족이 초나라였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그는 펼치기도 하는데, 아마도 고대 일본 문명에 영향을 끼친 지방으로 중국 동남부 일대를 추정하고 일본 작가로서 '일본 문명의 근원' 같은 걸 염두에 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초한전쟁에서 초나라의 항우가 패배한 후 중원에 도전하는 남방 '이민족'은 사라졌기에, 항우의 죽음이 더욱 비장하다는 식으로 읽힌다.

어쨌든,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대단원은 항우가 죽음으로써 장식하고 있다.


"사마천은 스무 살 나이에 역사가로서 그 인생의 초석이 될 여행을 하였다. 그 여행의 마지막에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 이 오강 주변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항우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 밖에 흐르지 않았을 때였기에, 마을 사람들의 기억도 선명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항우의 마지막을 듣고, 또한 다섯 명의 천연기념물 같은 제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만년에 그는 [사기]를 저술함에 있어 그 제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인간의 추악한 욕망에 대한 요설을 절약해 버렸다.
또한 다섯 명의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초한의 전쟁이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하였다.
그 사건으로 유방의 본질도 사정없이 드러났다. 유방은 그 보잘 것 없는 다섯 명의 병졸에게 약속대로 상을 내렸다. 항우의 사체와 다섯 명의 이름의 배후에 있는 유방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항우는 BC 202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 [항우와 유방 3], <오강의 최후>, 시바 료타로, 1977~1979.


전투에서 진 적은 없으나 초한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게 된 항우가 하늘을 탓하며 오강에서 자결한 후 그의 사체를 하이에나처럼 뜯어가서 유방으로부터 작위와 식읍을 받은 다섯 제후의 이름을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하면서, 한고조 유방과 같은 역사의 '승리자'에게서 보이는 씁쓸한 잔영을 기록하고 있다. 

소설 내내 시바 료타로는 각 개인의 심리 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는 '통속연의' 전통대로 상황과 전투장면 같은 배경을 중심으로 연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정비석 '초한지' 등과 차별되는 점이다. 시바 료타로는 그런 배경보다는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변화하는 각자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초한지'의 '고전'적 '심리극'을 시종일관 연출한다.


"... 장량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유방을 재료로 삼아 전투를 구상하고, 그것을 실시하여 결과를 얻는 과정에서 순수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재능은 늘 표현을 갈구한다. 장량은 그 표현의 재미를 알아버렸다. 이제 장량은 진(秦)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다고 해서 유방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유방의 미래를 두 눈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 [항우와 유방 2], <관중을 점령한 유방>, 시바 료타로, 1977~1979.


진나라에 대한 복수 일념으로 살다가 유방이라는 주군을 만난 후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는 최고의 책사로 거듭나는 장량의 심리 변화를 통해, 장량의 '도가'적 또는 '황로술'적 면모를 보여준다. 
'노장사상(도가)'의 최고선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흐르는 물과 같은 '변화'다. 이에 따라 장량의 천하통일 계책은 고정되지 않고 물처럼 순리에 따라 흐른다. 평화시기 민중의 통치에는 '의(義)'가 필요하지만, 건곤일척의 초한전쟁에서는 항우라는 대적을 꺾기 위해 '의'를 배반할 수도 있다. 홍구를 경계로 휴전협정을 맺고 돌아가는 항우의 뒷통수를 친 장량의 계략은 그러므로 비열한 모략이 아니라 천하를 위한 상책이 된다.


"그 순간, 한신은 (예전의 장량과 같이) 유방에 대해 감격해야 마땅했다. 만일 항우가 그런 (솔직한) 말을 들었더라면,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신은 그런 순간에 감격할 만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장량과는 기본적으로 달랐다. 한신은 유방을 말하기 쉬운 상대로 파악했고, 그렇게 파악한 이상 그것은 하나의 기호가 되어 머리속에 새겨진다. 하나의 기호에 감격할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 [항우와 유방 2], <초한전쟁의 서막>, 시바 료타로, 1977~1979.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말지만, 제왕 시절 모사가 괴철의 꼬임에도 불구하고 한왕 유방에 대한 '의'를 지켰던 한신은 원래부터 군사천재였던 기질은 물론, 한편으로는 타인에 관한 공감능력이 결여된 일종의 '사이코패스' 또는 '일 중독자'로서의 심리로 줄곧 묘사된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은 본인의 영달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업무중독의 근원이 한신의 이러한 심리이며, 이 때문에 고뇌하는 한신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낸 '심리극'의 고전이다.


"폐하(유방)는 스스로를 '허공(虛空)'이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끝없는 '허공'이라 생각하기에 지자도 용자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허튼 지자들보다도 스스로를 어리석다 생각하시고, 힘 깨나 쓴다고 자만하는 자들보다도 스스로를 용기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시기에,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나 작은 용기를 가진 사람 모두가 폐하의 '허공' 속에서 기분좋게 숨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덕(德)'이라 하나이다."
- [항우와 유방 3], <영웅의 덕은 허공과 같은 것>, 시바 료타로, 1977~1979.


누구보다 초한지 '심리극'의 압권은 한왕 유방이다. 주지하다시피 서민건달 유방의 면모는 허접했고 패배자였으며 도망자였지만, 특이한 용모와 허술한 내면이 그의 주위에 인재들이 모이게 된 요인이었다. 
시바 료타로에 의하면, 유방이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허공'과 같은 그의 심리와 그에 따른 포용력, 그리고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었다. 
유방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방은 먹고 살기 위해 그의 수하로 모여든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그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매번 패배하고 도망치면서 전투능력은 사라질 지언정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인 식량에 대한 관심은 놓치 않았다. 귀족 출신 항우와 달리 유방은 난세의 '유협(流俠)' 정신의 끝판왕이었고, 결국 '유협'들의 대장으로서 새로운 세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방은 특히 식량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재능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수군의 늪지대에서 도적생활을 할 때도 늘 굶어야 했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싸움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경험만은 지겨울 정도로 쌓아온 사람이었다. 일군의 총사가 된 다음에도 늘 식량을 긁어모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여력이 있을 때 한해서 싸웠다."
- [항우와 유방 3], <항우와 우희>, 시바 료타로, 1977~1979.


장량이 본 것처럼, 그리고 시바 료타로가 평한 것과 같이, 이것이 진말한초의 난세에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결코 무시할 수 없이 주요한 이유였다.


"항우의 가장 큰 실패는 병사들의 배를 곯렸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유민 출신으로서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떠도는 사이에 항우의 병사가 되었던 만큼, 배가 고프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습성을 가진 것도 당연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항우에 대한 존경심 하나 때문이었다."
- [항우와 유방 3], <영웅의 덕은 허공과 같은 것>, 시바 료타로, 1977~1979.


항우는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숙부인 항량을 따라 거병을 했고 초나라 의제를 내세운 책사 범증을 초반에 속으로 욕하며 스스로 패왕이 되고자 했던 항우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용력과 최후의 권력 뿐이었다. 실제로 항우의 군대는 그의 용맹한 개인기로 연명했지만 매번 굶으면서 끝내 파멸했다. 이에 비해 유방은 매번 지고 도망치면서도 동료들을 먹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병참기지를 끝까지 지켰으며 그로 인해 다수 민중의 지지를 놓치지 않았다.

'공허'하고 허풍쟁이 같은 유방의 '난세'의 '덕(德)'은 오히려 동지들과 다수 민중의 믿음을 강화시켰고, 이것이 바로 백전백패의 건달에서 천하통일의 황제로 변모하는 유방 '심리극'의 핵심이었다.

'구리산 십면매복'의 극적인 요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초한지'라는 정해진 역사를 작가마다 섭렵하는 이유는, 그만큼 작가마다 남기는 매력이 크기 때문이다.

견위의 [서한연의](17세기)는 고전연희 원문 자체의 매력이 있고,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통일천하](1954)는 현대 최초의 '초한지'로서 고전적 특징이 있으며,
정비석의 [소설 초한지](1983)는 대중판 '초한지'의 현대화로서,
이문열의 [초한지](2003~2008)는 정사에 입각한 '평역'의 고전으로서,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77~1979)은 초한지 '심리극'의 단연 '고전'으로서,
각각의 마력으로 독자를 유인한다.


그렇게 '초한지' 매니아인 나는,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를 소장하기 위해 주문을 하고는,
시바 료타로의 '심리극' 역사소설 한 편을 더 읽어보기 위해 다시 도서관으로 간다.

다음 책은 시바 료타로의 일본 역사소설, [세키가하라 전투](1966)다.

***

1. [항우와 유방](1977~1979), 시바 료타로, 양억관 옮김, <달궁(북21)>, 2002.
2. [원본 초한지 - 서한연의](17세기), 견위,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3. [김팔봉 초한지 - 통일천하](1954), 견위, 팔봉 김기진 옮김, <문예춘추사>, 2020.
4. [소설 초한지](1983), 정비석, <범우사>, 2003.
5. [이문열의 사기 이야기 - 초한지](2003~2005), 이문열,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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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 1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달궁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초한지(楚漢誌)'의 고전적 '심리극'
- [항우와 유방], 시바 료타로, 1977~1979.


제갈량이 '융중대책'(기원후 206년)을 통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출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4백여 년전 한신의 '한중대책'과 장량의 '하읍대책'이 있었기에, 더 나아가 제왕이 된 한신에게 대책을 강권하던 모사 괴철의 고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항우에 의해 관중과 파촉으로 쫓겨나 '한중'의 왕이 된 유방의 대장군 한신이 정세를 분석하며 공을 세울테니 봉토를 나눠달라고 했던 한신의 '한중대책'(기원전 206년).
팽성전투에서 항우의 3만 정예군에게 56만 군웅연합군이 대패하고 자식까지 수레 밖으로 밀어내며 유방이 도망친 하읍에서 제왕 한신과 양왕 팽월 등에게 봉토를 하사하여 독립시키고 그 힘으로 항우를 포위하자고 제출한 장량의 '하읍대책'(기원전 205년).
제나라 정벌 후 평정을 위해 제나라 왕위를 내려달라고 유방을 협박한 한신에게 종횡가적 책사 괴철(괴통)이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 양국의 전쟁을 한신의 독립된 제나라가 합세한 '삼국'의 전쟁으로 만들어 오랜 전란을 끝내자고 제안한 '천하삼분지계'(기원전 203년).

이처럼, '초한지'는 '삼국지'의 주요 모티브다. 
정사로서 사마천의 [사기](기원전 1~2세기)와 진수의 [삼국지](기원후 3세기)의 관계가 우선 그렇다. 
이는 먼저 씌어진 나관중의 [삼국연의](14세기)와 나중에 발표된 견위의 [서한연의](17세기)의 관계에서도 증명된다. 
물론, 이문열은 2000년대 초반에 [초한지]를 새로 쓰면서 명나라 말 종산거사 견위의 [서한연의]가 역사적 사실을 너무 비틀어버린 완전 허구라고 비판하지만.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의 기원은 분명 '초한전쟁'이었다.
또한 촉한황제 유비의 '백절불굴'의 정신 또한 서민황제 한고조 유방의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삼국지'의 '고전'적 원형은 '초한지'라 생각한다.

카프(KAPF)의 젊은 사회주의 작가였다가 일제 말기 친일문인이 된 소설가 팔봉 김기진은 1980년대까지 살아남았는데, 한국전쟁 후인 1954년에 종산거사 견위의 [서한연의]를 토대로 우리 현대사 최초로 '초한지'를 소개했다. 사마천의 [사기]라는 '정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해하결전에서 한신의 '구리산 십면매복'을 배치한 대중민담적 [서한연의]를 토대로 한 것이다. '초한전쟁' 민담이 조선 선조 때부터 우리나라에 유행했다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초한지'의 고전은 어쨌든 팔봉 김기진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초한지-통일천하](1954)라 할 수 있겠다.

이후 1983년에 역시 일제말 친일 문인의 경력이 있던 소설가 정비석의 [소설 초한지]가 또 한 번 신문연재 후 출간되었고, 2008년에는 보수우익 소설가 이문열이 2000년대 초반 다시금 <동아일보>에 연재한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대풍기운비장/大風起雲飛揚)]를 '초한지'로 엮었다. 아마도 정비석은 '구리산 십면매복'을 삽입한 [김팔봉 초한지]와 [서한연의]를 토대로 했을 것이고, 이문열은 그의 작풍대로 '정사'에 기초한 엄밀한 '평역'식 서술을 따랐기에 '구리산 십면매복'을 사실로 고증할 수 없다며 삭제했다.

견위의 [서한연의]를 최초로 완역한 중국고전 전문가 김영문 선생께서는 세상에 '초한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초한전쟁을 결정적으로 끝장낸 '구리산 십면매복'이 있는 '초한지'와 그렇지 않은 '초한지' 두 종류라고 한다.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1954)와 정비석 [초한지](1983), 이문열 [초한지](2003~2008), 그리고 김영문 선생 완역 [원본 초한지(서한연의)](2019)는 그 주장과 관점은 다를지라도 우리 '초한지'의 '고전'들이다.

그리고 이 중간 어디 쯤에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1923~1996)의 '초한지'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 몽골어를 전공하고 신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인의 근원'을 찾는 작업을 역사소설로 수행하고자 했다는 시바 료타로는 한 작품을 쓰기 위해 '한 트럭'의 자료를 섭렵하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그런 작가가 '초한지' 또한 썼다. 
1977~1979년에 역시 신문에 연재한 [항우와 유방]이다. 신문 연재 시 원제목은 [한의 바람, 초의 비]였다는데, 1980년에 출간하면서 제목을 [항우와 유방]이라 고쳤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80) 또한 소설 '초한지'의 '고전'이라 생각하게 된 건,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적으로 '초한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심리극'으로서의 '고전'적 면모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항우, 유방이 본격적인 활약을 펼친 시대는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춘추와 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고대문명이 형이상학적 사상과 기술문명을 숙성시켰을 때였다. 성숙기에 든 그 문명에는 근대적인 요소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상들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제각기 교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다.
'사(士)'라는 개인도 성립하였다. 사는 사상과 뜻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개인을 가리켰다...
중국사는 참으로 이상하다. 후대에 갈수록 문화의 균일성이 높아지면서 지적 호기심이 약해진다. 후한 말부터 이른바 아시아적 정체가 시작되어, 그 정체가 놀랍게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 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선진(先秦)'시대부터 이 시기까지의 중국은 전혀 다른 민족이 산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팔팔 살아 숨쉬는 사회였다. 진 제국은 사상적으로 보면 '법가'의 실험국가였다. 마치 은밀한 '법가사상'의 비밀결사가 그 성립과정의 이면에서 암약을 펼쳐 궁정을 장악하고, 제국의 원리를 구성하고, 체제를 만들어, 중앙과 지방의 관료조직을 구석구석까지 설계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진 제국을 붕괴시킨 힘은 '유민(流民)'이었다. 그 힘에 방향성을 부여하고 추진시킨 지도자들의 측근에는 '노장사상'의 후예와 '병가', '유가'의 후예, 또는 '종횡가'라는 외교기술자들이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법가'가 없었던 것은 '법가주의'를 쓰러뜨리겠다는 의식이 잠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항우와 유방], <저자 후기>, 시바 료타로, 1980.8.


1980년 [항우와 유방]의 <저자 후기>에서 시바 료타로는 춘추전국시대 농업생산력 발전을 토대로 전개된 정치세력간 권력투쟁과 정치외교술의 발전, 그 속에서 '사(士)', 즉 자신을 써달라고 '상품화'하던 '개인'의 등장을 조명하고 있다. 모두 '사'는 아니지만 사마천 [사기]의 <본기>와 <세가>, 그리고 <열전>에서 그리는 것처럼 등장인물 각자의 개성에 집중한다. 이들 영웅들은 '병가'로서 무인은 물론 '도가'와 '유가', '종횡가'의 모습으로 단결하여 진시황이 남긴 '법가주의' 폐해를 없애고자 했다. 또한 1천 년 정도 지나야 중국 역사에서 정착될 수 있었을 '중앙집권' 체제라는 '신문명'에 저항하던 다수 민중의 지지를 얻은 정치지도자 유방의 궁극적인 승리를 그려내고 있다. 
유방은 혁명으로 진나라를 무너뜨렸지만 그가 세운 한나라는 진의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답습함으로써, 이후 오래 지속되는 중국사에서 '천하통일' 군주의 롤모델이 된다.


"진(秦) 제국의 (중앙집권)체제는 분명히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1,000년이 넘는 역사의 성숙이 필요했다. 거기에다 '사(士)'나 서민들이 진 제국 체제의 선악을 논할 여유도 없을 만큼 세금은 과중하였고, 노역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가혹했다. 사람들은 그냥 왕후(王侯)를 모시기만 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옛날을 그리워했다. 그런 기분으로 본다면, (초)회왕의 장엄한 행렬은 (초나라)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는 광경이었다."
- [항우와 유방 1], <항우, 팽성에서 전군을 장악하다>, 시바 료타로, 1977~1979.


백전백패하고 도망만 치다가 운 좋게 황제가 되는 유방보다는 전투에서 백전백승했던 항우의 죽음으로 소설을 끝내는 것을 보면,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주인공은 항우로 볼 수도 있겠다.

실례로 시바 료타로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역동적인 시대의 마지막 이민족으로 '초(楚)' 나라를 지목한다. 오래전 오와 월은 사라졌고 화북의 중원 문명에 대항했던 마지막 이민족이 초나라였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그는 펼치기도 하는데, 아마도 고대 일본 문명에 영향을 끼친 지방으로 중국 동남부 일대를 추정하고 일본 작가로서 '일본 문명의 근원' 같은 걸 염두에 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초한전쟁에서 초나라의 항우가 패배한 후 중원에 도전하는 남방 '이민족'은 사라졌기에, 항우의 죽음이 더욱 비장하다는 식으로 읽힌다.

어쨌든,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대단원은 항우가 죽음으로써 장식하고 있다.


"사마천은 스무 살 나이에 역사가로서 그 인생의 초석이 될 여행을 하였다. 그 여행의 마지막에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 이 오강 주변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항우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 밖에 흐르지 않았을 때였기에, 마을 사람들의 기억도 선명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항우의 마지막을 듣고, 또한 다섯 명의 천연기념물 같은 제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만년에 그는 [사기]를 저술함에 있어 그 제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인간의 추악한 욕망에 대한 요설을 절약해 버렸다.
또한 다섯 명의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초한의 전쟁이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하였다.
그 사건으로 유방의 본질도 사정없이 드러났다. 유방은 그 보잘 것 없는 다섯 명의 병졸에게 약속대로 상을 내렸다. 항우의 사체와 다섯 명의 이름의 배후에 있는 유방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항우는 BC 202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 [항우와 유방 3], <오강의 최후>, 시바 료타로, 1977~1979.


전투에서 진 적은 없으나 초한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게 된 항우가 하늘을 탓하며 오강에서 자결한 후 그의 사체를 하이에나처럼 뜯어가서 유방으로부터 작위와 식읍을 받은 다섯 제후의 이름을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하면서, 한고조 유방과 같은 역사의 '승리자'에게서 보이는 씁쓸한 잔영을 기록하고 있다. 

소설 내내 시바 료타로는 각 개인의 심리 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는 '통속연의' 전통대로 상황과 전투장면 같은 배경을 중심으로 연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정비석 '초한지' 등과 차별되는 점이다. 시바 료타로는 그런 배경보다는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변화하는 각자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초한지'의 '고전'적 '심리극'을 시종일관 연출한다.


"... 장량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유방을 재료로 삼아 전투를 구상하고, 그것을 실시하여 결과를 얻는 과정에서 순수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재능은 늘 표현을 갈구한다. 장량은 그 표현의 재미를 알아버렸다. 이제 장량은 진(秦)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다고 해서 유방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유방의 미래를 두 눈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 [항우와 유방 2], <관중을 점령한 유방>, 시바 료타로, 1977~1979.


진나라에 대한 복수 일념으로 살다가 유방이라는 주군을 만난 후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는 최고의 책사로 거듭나는 장량의 심리 변화를 통해, 장량의 '도가'적 또는 '황로술'적 면모를 보여준다. 
'노장사상(도가)'의 최고선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흐르는 물과 같은 '변화'다. 이에 따라 장량의 천하통일 계책은 고정되지 않고 물처럼 순리에 따라 흐른다. 평화시기 민중의 통치에는 '의(義)'가 필요하지만, 건곤일척의 초한전쟁에서는 항우라는 대적을 꺾기 위해 '의'를 배반할 수도 있다. 홍구를 경계로 휴전협정을 맺고 돌아가는 항우의 뒷통수를 친 장량의 계략은 그러므로 비열한 모략이 아니라 천하를 위한 상책이 된다.


"그 순간, 한신은 (예전의 장량과 같이) 유방에 대해 감격해야 마땅했다. 만일 항우가 그런 (솔직한) 말을 들었더라면,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신은 그런 순간에 감격할 만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장량과는 기본적으로 달랐다. 한신은 유방을 말하기 쉬운 상대로 파악했고, 그렇게 파악한 이상 그것은 하나의 기호가 되어 머리속에 새겨진다. 하나의 기호에 감격할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 [항우와 유방 2], <초한전쟁의 서막>, 시바 료타로, 1977~1979.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말지만, 제왕 시절 모사가 괴철의 꼬임에도 불구하고 한왕 유방에 대한 '의'를 지켰던 한신은 원래부터 군사천재였던 기질은 물론, 한편으로는 타인에 관한 공감능력이 결여된 일종의 '사이코패스' 또는 '일 중독자'로서의 심리로 줄곧 묘사된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은 본인의 영달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업무중독의 근원이 한신의 이러한 심리이며, 이 때문에 고뇌하는 한신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낸 '심리극'의 고전이다.


"폐하(유방)는 스스로를 '허공(虛空)'이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끝없는 '허공'이라 생각하기에 지자도 용자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허튼 지자들보다도 스스로를 어리석다 생각하시고, 힘 깨나 쓴다고 자만하는 자들보다도 스스로를 용기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시기에,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나 작은 용기를 가진 사람 모두가 폐하의 '허공' 속에서 기분좋게 숨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덕(德)'이라 하나이다."
- [항우와 유방 3], <영웅의 덕은 허공과 같은 것>, 시바 료타로, 1977~1979.


누구보다 초한지 '심리극'의 압권은 한왕 유방이다. 주지하다시피 서민건달 유방의 면모는 허접했고 패배자였으며 도망자였지만, 특이한 용모와 허술한 내면이 그의 주위에 인재들이 모이게 된 요인이었다. 
시바 료타로에 의하면, 유방이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허공'과 같은 그의 심리와 그에 따른 포용력, 그리고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었다. 
유방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방은 먹고 살기 위해 그의 수하로 모여든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그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매번 패배하고 도망치면서 전투능력은 사라질 지언정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인 식량에 대한 관심은 놓치 않았다. 귀족 출신 항우와 달리 유방은 난세의 '유협(流俠)' 정신의 끝판왕이었고, 결국 '유협'들의 대장으로서 새로운 세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방은 특히 식량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재능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수군의 늪지대에서 도적생활을 할 때도 늘 굶어야 했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싸움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경험만은 지겨울 정도로 쌓아온 사람이었다. 일군의 총사가 된 다음에도 늘 식량을 긁어모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여력이 있을 때 한해서 싸웠다."
- [항우와 유방 3], <항우와 우희>, 시바 료타로, 1977~1979.


장량이 본 것처럼, 그리고 시바 료타로가 평한 것과 같이, 이것이 진말한초의 난세에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결코 무시할 수 없이 주요한 이유였다.


"항우의 가장 큰 실패는 병사들의 배를 곯렸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유민 출신으로서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떠도는 사이에 항우의 병사가 되었던 만큼, 배가 고프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습성을 가진 것도 당연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항우에 대한 존경심 하나 때문이었다."
- [항우와 유방 3], <영웅의 덕은 허공과 같은 것>, 시바 료타로, 1977~1979.


항우는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숙부인 항량을 따라 거병을 했고 초나라 의제를 내세운 책사 범증을 초반에 속으로 욕하며 스스로 패왕이 되고자 했던 항우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용력과 최후의 권력 뿐이었다. 실제로 항우의 군대는 그의 용맹한 개인기로 연명했지만 매번 굶으면서 끝내 파멸했다. 이에 비해 유방은 매번 지고 도망치면서도 동료들을 먹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병참기지를 끝까지 지켰으며 그로 인해 다수 민중의 지지를 놓치지 않았다.

'공허'하고 허풍쟁이 같은 유방의 '난세'의 '덕(德)'은 오히려 동지들과 다수 민중의 믿음을 강화시켰고, 이것이 바로 백전백패의 건달에서 천하통일의 황제로 변모하는 유방 '심리극'의 핵심이었다.

'구리산 십면매복'의 극적인 요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초한지'라는 정해진 역사를 작가마다 섭렵하는 이유는, 그만큼 작가마다 남기는 매력이 크기 때문이다.

견위의 [서한연의](17세기)는 고전연희 원문 자체의 매력이 있고,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통일천하](1954)는 현대 최초의 '초한지'로서 고전적 특징이 있으며,
정비석의 [소설 초한지](1983)는 대중판 '초한지'의 현대화로서,
이문열의 [초한지](2003~2008)는 정사에 입각한 '평역'의 고전으로서,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77~1979)은 초한지 '심리극'의 단연 '고전'으로서,
각각의 마력으로 독자를 유인한다.


그렇게 '초한지' 매니아인 나는,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를 소장하기 위해 주문을 하고는,
시바 료타로의 '심리극' 역사소설 한 편을 더 읽어보기 위해 다시 도서관으로 간다.

다음 책은 시바 료타로의 일본 역사소설, [세키가하라 전투](1966)다.

***

1. [항우와 유방](1977~1979), 시바 료타로, 양억관 옮김, <달궁(북21)>, 2002.
2. [원본 초한지 - 서한연의](17세기), 견위,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3. [김팔봉 초한지 - 통일천하](1954), 견위, 팔봉 김기진 옮김, <문예춘추사>, 2020.
4. [소설 초한지](1983), 정비석, <범우사>, 2003.
5. [이문열의 사기 이야기 - 초한지](2003~2005), 이문열,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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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초삼걸 - 천하 최강의 참모진
쉬르훼이 외 지음, 장성철 옮김 / 지식노마드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서한삼걸(西漢三傑)' 평전
- [한초삼걸], 장따커/쉬르훼이, 2002.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군막 속에서 계책을 짜내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판내는 것은 내가 '자방(子房/張良)'만 못하오. 나라를 어루만지고 백성들을 위로하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도로를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오. 백만 대군을 통솔해 싸우면 어김없이 이기고 공격하면 어김없이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빼어난 인재이지만 내가 그들을 임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만 있었으면서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오."
- [사기], <고조본기>, 사마천, 기원전 1~2세기.


'칭기스 칸의 위대한 장수'였던 용장(바투르) '수부타이'를 통해 역사의 '2인자'에 대해 새삼 상기하게 되면서, 몽골제국사에서 칭기스 칸 일족에게 있어 '수부타이'라는 존재가 비록 그 최후는 달랐을지라도 중국 한(漢)나라 고조 유방 진영의 '한신'과 같다 생각했었다. 

기원전 3세기 중국 초한전쟁에서 한왕 유방이 초왕 항우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건달유협 유방이 유능한 참모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참모진은 유방의 건국 후 치열하게 서로 '2인자'를 다투었겠지만, 진나라 붕괴 직후 건곤일척의 초한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이 참모진 전체가 '2인자'였다.

5년간의 초한전쟁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 해하결전에서 패한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함으로써 초나라가 멸망한 한나라 5년, 
그 해 5월에 낙양의 승전 축하연에서 유방이 한나라 승리의 원인을 신하들에게 물으니 고기와 왕릉이라는 신하가 유방은 비록 거만하나 항우와 달리 신하들과 공을 나눌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 유방은 그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며, 승리의 원인은 유방 본인이 유능한 인재 3인을 잘 기용했기 때문이라고 다시 답한다.

이 3인이 바로 이른바, 
'서한삼걸(西漢三傑)' 또는 '한초삼걸(漢初三傑)'로 불리는 '장량(張良)'과 '소하(蕭何)' 그리고 '한신(韓信)'이다. 
유방이 '삼걸(三傑)'을 규정한 후 장량은 은거했고, 소하는 장수했으며, 한신은 요절을 당했다. 

비록 최후는 달랐지만, 과연 이들은 '한나라 초기(서한/한초) 3인의 영웅(삼걸)'이었다.


1. '포의장상(布衣將相)'의 계급전쟁


"진나라와 한나라의 천하통일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생산력의 발전'과 '계급모순'에 따라 형성된 역사적 국면이며 역사발전의 법칙이다... 경제기초의 변화는 계급관계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공경의 대물림'이라는 귀족의 세습제도가 붕괴되면서 평민세력이 점차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유방 집단의 승리는 유민계층이 주축이 된 농민봉기군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즉 춘추전국 시기 이래 장기간 형성된 방대한 유민계층이 '한초 포의장상(布衣將相)의 형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계급적 기초'였다."
- [한초삼걸], <2장. 난세가 인재를 단련하다>, 장따커/쉬르훼이, 2002.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 최초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의 진(秦)나라는 폭압적인 정치로 15년 만에 전국적 반란을 야기했다. 항우 같은 초나라 귀족가문도 있었지만, 진승과 오광, 유방과 경포, 팽월 같은 농민반란군들은 대부분 유협 중심의 민중들로 구성된 평민세력이었다.

중국 역사가이자 고전문헌학자 장따커와 쉬르훼이는 [한초삼걸(漢初三傑)](2002)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중국사 최초의 '계급전쟁'의 원인이 춘추전국시기의 제후와 귀족들을 거의 전멸시킨 진나라의 중앙집권체제로 본다. 황제와 측근 외 다른 지배계급을 탄압한 결과 그들의 힘이 약화되면서 '포의(布衣)', 즉 거친 옷을 입은 민중들이 '장상(將相)', 즉 장군과 재상 같은 지배계급이 되는 '난세'가 온 것인데, 진나라 말기의 민중봉기를 개시한 진승과 오광의 난은 중국 역사상 첫 농민반란이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 선언한 진승을 사마천은 [사기]에서 제후들의 전기를 다룬 <세가>로 기록했는데, 바로 <진섭세가>다.

고대사회 농민반란의 본격적 계급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한 '진말한초(秦末漢初)'의 난세는 진승과 오광, 유방 같은 민중 영웅들을 불러 일으켰고, 평민 출신의 영웅들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군주를 선택했다.


2. '한초삼걸(漢初三傑)' 또는 '서한삼걸(西漢三傑)'


1) 장량(張良) -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전략가([한초삼걸], <4장>)


"항우는 제후왕을 봉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팠지만, 유방은 제후왕을 봉해 그들의 충성을 얻어냈으니, 상황에 따라 책략의 효과도 크게 달랐다. 장량은 유방에게 여섯 나라의 후예들을 왕으로 봉하지 말 것을 권유했고,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세 영웅(한신/경포/팽월)'을 왕으로 봉할 것을 권유했다.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 짓는 데서는 아무도 그(장량)를 따르지 못했다."
- [한초삼걸], <4장. 장량,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전략가>, 장따커/쉬르훼이, 2002.


한고조 유방의 책사 장량(장자방)은 민중 출신은 아니었다.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전국시대 한(韓)나라 재상 집안 출신으로 본래 주(周)나라 왕족의 '희(姬)'씨 성을 썼는데, 박랑사 계곡에서의 진시황 저격 작전 실패 후 수배생활을 하면서 이름을 '장량'으로 바꿨다. 이후 유방의 책사가 되었지만 부귀공명을 위해 합류한 다른 참모들과 달리 조국의 복수와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며 유방의 동지이자 '제왕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방과 항우의 마지막 전투에서 홍구의 동서강화조약을 바로 폐기하면서 항우의 등을 친 해하결전은 평소 도인 또는 선비같던 장량답지 않은 계책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오랜 전란을 끝내고 세상을 구제하려는 최고 책사의 마지막 한 수였을 수도 있다.

한고조의 천하통일 후 장량은 부귀영화를 더 바라지 않았다. 건국의 논공행상에서 유방이 내린 3만호의 최고 식읍을 거절하고는 '68등 공신'인 1만 식읍의 '유후'로 만족하였으며, 권력투쟁에 관여하지도, 한신 같은 다른 개국공신의 숙청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도인 '적송자'의 삶을 조용히 살다 갔다.


"한니라가 수립되면서 장량은 자연스럽게 '제왕의 스승이 되었다. 모든 것을 이룬 유방이 장량을 묶어둘 수 없었던 것은 장량에 대한 유방의 수요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더이상 전시처럼 절박하지 않았다. 장량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았고 공명과 이익에 초연했기 때문에 공명과 이익을 쫓던 사람들이 맞았던 비극적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으로 고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 [한초삼걸], <9장. 유방과 한초삼걸>, 장따커/쉬르훼이, 2002.


2) 한신(韓信) - 천하의 절반을 경략한 군사천재([한초삼걸], <5장>)


"정말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狡兎死走狗烹/兎死狗烹),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 버리며(高鳥盡良弓藏),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敵國破謀臣亡)'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
- [사기], <회음후열전>, 사마천, 기원전 1~2세기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책사이자 스승인 장량(자방)의 원대한 계책은 물론, 대장군 한신의 신출귀몰한 군사정책에서 나왔다.

중국 오천 년 군사역사상 최고의 군사이론가이자 군지휘관으로서 한신의 전략전술이야말로 '실정에 맞는 물과 같은 무형의 대책으로 유형의 적을 제압'하는 '출신입화(出神入化)'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수백만의 군대라도 지휘할 수 있었다는 한신은 '먼저 계획을 세운 후 출병(선계후병:先計後兵)'하고, '기이한 책략으로 승리(출기제승:出奇制勝)'하며, '적을 유인해 허를 찌르는(의병시형:疑兵示形)'까지 '5대 군사사상'의 대가로 정리된다([한초삼걸], <6장>).

한신은 온갖 '병법'에 능통했고 군사정책에도 능수능란했는데, 그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천시와 지리는 물론 인문학적 소양도 두루 지닌 무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초나라 회음 민중 출신의 한신은 아마도 전국시대에 몰락한 귀족 가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정확히는 알 수는 없고 청년 시절 빌어먹다가 전란의 시기를 맞아 항우의 보초병이 되었다. 큰 뜻을 품었기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한신 같은 거구의 건장한 청년이 빌어먹거나 평민 다수가 소작농이나 유민으로 내몰리는 상황 자체가 반란의 객관적인 필수요소다. 진나라 말기가 바로 그랬으며, "진섭(진승)의 탄식과 한신의 분노는 고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서, 이들이 진나라에 항거했던 사상적 출발점"([한초삼걸], <1장>)이라고 이 책의 저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어쨌든, 항우로부터 중요하게 기용되지 못한 한신이 유방의 진영으로 귀순했을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승상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은 대장군이 되었다. 

한중에서 대장군으로 제수된 한신이 유방에게 제출한 '한중대책'(기원전 206년 5월)은 항우진영과 유방진영의 객관적 정세비교와 공신들의 성과에 따른 봉읍을 권하면서, 장차 제후가 되고 싶었던 본인의 뜻을 이루고자 한 정치전략이었다. '한중대책'은 1년이 지나 팽성전투에서 유방군의 대패 후 장량이 제출한 '하읍대책'(기원전 205년 4월)과 함께 유방의 한나라가 승리할 수 있게 한 매우 중요한 정치전략이었다. 장량의 '하읍대책'에서 항우를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군사작전(북쪽의 제왕 한신, 남쪽의 구강왕 경포, 배후의 위왕 팽월)은 '한중대'를 통해 중국 동북부 일대를 제패한 한신의 백만대군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한신은 군사이론과 지휘재능을 겸비한 위대한 군사가다. 5년 간의 초한전쟁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중국 군사역사상 전무후무하다. 유방은 한신을 얻었기 때문에 통일전쟁의 과정을 대폭 단축할 수 있었다. 한신의 '성동격서', '명수잔도 암도진창', '배수진'. '십면매복' 등의 전략전술은 2천년 동안 군사가가 이루기 어려웠던 전쟁의 기적이다. 한나라의 건국에 기여한 한신의 군공은 실로 거대했다. 그러나 삼족이 멸족되는 비운을 맞았기 때문에 후대인들은 그에 대해 무한한 동정심을 나타냈다."
- [한초삼걸], <9장. 유방과 한초삼걸>, 장따커/쉬르훼이, 2002.


대장군 한신은 옛날의 중원인 '삼진(조/위/한)' 지역을 장악하고 동북의 연 땅을 항복시키며 동쪽 끝의 제나라까지 정복하는데, 유방은 한신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정예군을 계속 빼앗아 갔고 한신은 정벌한 지역의 오합지졸과 신병부대를 양성해 가면서 중국 동북부를 장악하고는 제왕이 되어 항우군을 포위하는 '천하삼분지세'를 만든다. 향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의 전장은 실상 한신의 제나라까지 독립하였다면 초-한-제 '삼국전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신은 제후의 욕심은 강했지만 섣불리 주군인 유방를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고자 했다. 한신의 책사 괴통(괴철)을 비롯한 혹자들은 그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하고 지적했는데, 
결과적으로 한신의 '반역'은 한고조 유방의 공신 숙청작업 제1의 과제였다. 제왕에서 초왕으로, 또 회음후로, 왕에서 제후로 강등되며 죽음을 앞두게 된 한신이 뒤늦게 반란을 획책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한신의 '토사구팽'은 역사 속 '2인자'의 운명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3) 소하(蕭何) -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킨 명재상([한초삼걸], <7장>)


"승상으로서 소하의 핵심 임무는 유방이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군수품을 원활하게 공급하고, 파촉의 식량과 군수물자를 개발하여 유방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었다."
- [한초삼걸], <7장. 소하,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킨 명재상>, 장따커/쉬르훼이, 2002.


그리하여 정치의 달인 '소하'가 소환된다.
'한초삼걸' 중 가장 장수한 소하는 유방이 패현의 정장 시절 현의 말단 사무직 공무원으로서 오래전부터 유방과 함께 했고, 아마도 유방이 반역을 하게 만든 초기의 지식인 책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따커와 쉬르훼이의 [한초삼걸]에서는 유방의 고향 패현의 동지였던 소하가 유방보다 한 살 많은 기원전 248년생이었다고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에 따라 유방은 기원전 247년생(?)으로 추정되었고, 장량은 유방보다 네 살 많은 기원전 251년생, 한신은 기원전 228년생으로 유방보다 열아홉 살 가량 어리다. 참고로 항우(기원전 232년생)는 유방보다 열 다섯 살 적고 한신보다 네 살 많은 것으로 추산된단다([한초삼걸], <1장>).

소하는 유방이 본인보다 네 살 많은 '스승'이자 최고 책사인 장량을 대동하여 전장에 나가고, 한편으로 젊은 대장군 한신이 전선을 넓히는 동안 유방의 본거지(패현, 관중 등)에서 후방 지원과 정국 안정을 수행한 정치가였다.
유방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소하를 평생 존중했다고 하며, 소하는 이 '삼걸' 중 가장 오래 살아 남았다.


"유방은 때때로 소하에게 경고를 보냈고 곳곳에서 경계하였다. 이에 대해 소하는 평생 지나치게 조심하고 신중했으며 '전전긍긍'하였다. 참으로 애석하고 가련한 일이었다."
- [한초삼걸], <9장. 유방과 한초삼걸>, 장따커/쉬르훼이, 2002.


장량은 제왕이 될 유방의 '스승'으로서 근신했고, 한신은 군주인 유방보다 군공이 더 컸기에 억울하게 숙청을 당했던 한편, 소하는 유방이 전투에서 패배하고도 계속 재기할 수 있도록 후방에서 지원한 큰 공을 세우고도 절대로 유방을 넘어서려 하지 않으면서 항상 유방의 뒷편을 조용히 지켰다. 소하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을 존중하기는 하나 권력이 공고해질수록 본인을 감시하고 견제하게 된 유방에게 계속 몸을 낮추며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았다. 한나라의 승상으로, 즉 정치적 '2인자'로 만족하고 살았지만 국가의 안정과 본인의 안위를 위해 '전전긍긍'하며 평생을 지낸 '가련한' 영웅으로 [한초삼걸]의 저자들은 소하를 평가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초한전쟁 승리를 가능케 한 '서한삼걸' 중 하나인 소하의 공이 폄하되지는 않는다. 한고조 유방은 공식적으로는 함께 전장을 누빈 동지 조참을 식읍 1만6천호의 '1등 공신'으로 세웠지만, 항상 자신의 후방을 지켜준 승상 소하를 비공식적인 '1등공신'으로 추천했다.


3. '한초삼걸(漢初三傑)'의 최후


"장량은 유방을 섬기며 '스승이면서 또한 벗'의 관계를 유지했고, 소하는 유방을 수행하며 늘 '전전긍긍'했으며, 한신은 유방의 명성을 능가하여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했다. 이것이 '한초삼걸(漢初三傑)'의 결말이다."
- [한초삼걸], <9장. 유방과 한초삼걸>, 장따커/쉬르훼이, 2002.


과연, '한초삼걸' 중 누가 유방의 뒤를 이어 '2인자'가 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사실, 의미도 없는 것이 이들 '서한삼걸' 모두가 적재적소에서 유능하게 자기 역할을 해냈고, 설령 견제는 했지만 유방이 이들로 하여금 역량을 펼쳐 자신의 대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장을 펼쳐 주었기에 '한초삼걸'은 중국사 최초의 '천하 최강의 참모진'이 되었다.

그들의 최후를 되짚어보는 건,
한참 후대인 나에게 있어, 
한낱 '서정(抒情)'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장량의 '도인' 같은 말년은 그 자체로 인간의 욕심과 욕망을 초월한 넘사벽의 사례이고,
한신의 우유부단한 '의리'는 비록 역사에서는 소인배들에게 패배했지만 그럼에도 대인배의 잔영을 남기기도 하며,
소하의 '전전긍긍'은 국가를 안정시킨 명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 음모가 진평과 함께 한신과 여태후 등 잠재적 정적을 숙청하는 정치적 장수(長壽)의 구차한 이면을 씁쓸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한 시절을 구가한 '삼걸(三傑)'을 기릴 뿐이다.

장따커와 쉬르헤이의 [한초삼걸](2002)의 원제는 [중국사상가평전-장량,소하,한신평전]이다.

***

1. [한초삼걸(漢初三傑) / 중국사상가평전-장량,소하,한신평전](2002), 장따커/쉬르훼이, 장성철 옮김, <지식노마드>, 2011.
2. [사기(史記)],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3.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4. [유방(劉邦)](2005),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7.
5. [제왕의 스승, 장량(張良傳:風神謀士)](2008),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6.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7.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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