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의 짧은 역사
토마 피케티 지음, 전미연 옮김 / 그러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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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에 의한 경제지식의 재전유"
- [평등의 짧은 역사], 토마 피케티, 2021.


"평등과 정의를 향한 여정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투쟁의 과정이다."
- [평등의 짧은 역사], <4장. 배상의 문제>, 토마 피케티, 2021.


세계적 역사학자로 부상한 '빅히스토리' 대가 유발 하라리의 최근 관점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하라리의 최근작 [넥서스](2024)를 찾아 읽어본 후, 나는 또 하나의 세계적 경제석학 토마 피케티의 최근 근황이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이후 5년만에 [평등의 짧은 역사]라는 피케티의 책을 집어 들었다.

토마 피케티는 2013년에 [21세기 자본]을 통해 300년 서구 자본주의 역사에서 'r>g', 즉 자본의 축적된 부가 생산과 임금보다 빨리 증가한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21세기 자본], <결론>)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파헤쳤다. 이 [21세기 자본]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는 '평등'에 먼저 주목한 게 아니고 '불평등'의 정당화가 가능한지 질문을 던졌다. 당시의 나는 그런 피케티를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로 보지 않았다. '불평등'의 정당화를 이야기하는, 미국에서 공부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내가 보기에 미국식 '정의론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후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으로 얻은 세계적 명성을 타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좌파 경제학자들과 활발한 의견을 나눈 결과 더 이상은 '불평등의 정당화'가 아닌 '평등을 위한 투쟁'으로 관점을 전환한다. 
2019년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는 본인의 사상을 알고자 한다면 이 책 한 권만 읽으라면서 본인 사상의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2019년에 '불평등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본격 파헤친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식의 '자유주의'적 개혁으로부터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사상전환을 감행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후 3년 후인 2021년에 토마 피케티는 [평등의 짧은 역사]를 통해 '불평등'의 틀을 벗어나 '평등'의 나라로 완전히 들어선다. 그러는 한편, 역사적으로 대다수 민중의 집단행동과 반란으로 쟁취해 온 '평등'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주장한다. 

물론 결론은 이전 저작들과 동일하다. 
'사회적 국가'의 재부상과 강력한 '누진세' 확대, '민주적 사회주의 연방제'를 통한 '글로벌 자본세' 등으로 '현대화된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제도로 '불평등'을 없애면서 '평등'을 더욱 현실화시키자는 주장이다. 20세기 초에 세계전쟁을 겪으며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뤘던 강력한 누진세의 역사를 통해 부상한 '사회적 국가'의 재부상이다. 피케티는 이를 자본주의 역사상 1914~1980년대의 '대규모 재분배'([평등의 짧은 역사], <6장>)라고 명명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신식민주의 청산을 통한 모두에게 고르게 분배되는 '상속' 제도 등을 덧붙인다. 20세기 식민주의 해방은 가진 자들에 대한 대규모 배상을 통해 식민지 해방보다는 제국주의 부자들의 배를 더 불렸다는 역사를 돌이켜 보며, 포스트식민주의에서는 소수의 부자들이 아닌 다수 민중 모두에게 돌아가는 제대로 된 배상과 상속이 필수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러한 정책과 제도 일체는 21세기에 맞게 현대화된 민주적, 분권적, 다문화적, 연방적 '사회적 국가'가 투명하고 합법적으로 시행하는 강력한 '누진세'와 '글로벌 자본세'를 통해 가능한 것인데, 가진 자들에 대한 몰수에 가까운 '부유세'로 다수 민중이 '평등'하게 사회적 부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평등'을 향한 이 역사적 과정은 '다수 민중, 다수 시민들의 집단행동과 반란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피케티가 다시금 확인하는 역사의 교훈이다.

역시 대전제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란 개인적인 소유 개념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생산한 집단의 영역이라는 확고한 신념이다.
소유와 분배의 문제는 사회적 개념이다.


"... 소유와 그 분배의 문제... 소유는 역사적 맥락에서 보아야 하는 개념... 소유의 집중은 시대를 막론하고 한 번도 극단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전반적인 경향 속에서도 집중이 뚜렷하게 꺾이는 추세는 관찰된다... 평등을 향한 여정은 앞으로 계속되는 게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를 좀더 확대강화해야 할 것이다."
- [평등의 짧은 역사], <2장. 서서히 일어난, 권력과 소유의 탈집중화>, 토마 피케티, 2021.


'평등'을 향한 여정은 '다수 민중의 집단행동과 반란투쟁'을 통해 여전히 진보해 왔고 앞으로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평등'의 길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토마 피케티는 [평등의 짧은 역사]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저작을 통해 기존 [21세기 자본](2013)과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라는 매우 두꺼운 벽돌책들의 결론을 좀더 대중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감사의 말>에서 쓰고 있다.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참여적 사회주의' 제도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실현 가능한 경제시스템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확보한 역사적 경험들에 따르면, 이런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민중의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 [평등의 짧은 역사], <5장. 혁명, 지위, 계급>, 토마 피케티, 2021.


여기에 전작들에 비해 다수 민중의 집단적 투쟁을 통한 '평등'의 쟁취 역사를 한층 강조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분배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혁명적 제도로서 '민주적 사회주의'와 강력한 '누진세', 투명한 '글로벌 자본세'와 기후 대응 등의 대안을 광범위하고 민주적으로 논의하고 만들어가자는 제안을 피케티는 반복하고 있다.

토마 피케티의 이 민주적 논의 제안 과정에서 다시 등장하는 1970~1980년대 스웨덴의 강력한 사민주의 국가 시절 '평등'한 '사회주의' 이행체제 대안 중 하나였던 렌-마이드너의 좌파적 '임노동자 기금' 또는 우파적 응답으로서 '중앙집권적 시민기금안' 등의 재조명을 언급한 것 또한 반가운 일이다.
'평등'을 향한 여정에서 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을 위한 가능한 대안 체제를 열어놓고 논의하자는 것이 피케티의 일관된 입장이다.


"이 책에서 나는 민주적이고, 연방제적인, 분권화되고 참여적인, 환경적이고 다문화적인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이 사회주의는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의 확대, 기업내 권력분유, 포스트식민주의 배상, 차별철폐, 교육평등, 개인 탄소카드 도입, 점진적인 경제의 탈상품화, 고용보장, 모두를 위한 상속, 화폐적 불평등의 대폭축소, 그리고 마침내 금권의 영향에서 벗어난 선거와 미디어 시스템의 기반 위에서 작동하게 될 것이다."
- [평등의 짧은 역사], <10장. 민주적,환경적,다문화적 사회주의를 향하여>, 토마 피케티, 2021.


'평등'을 위한 이 모든 '민주적 사회주의' 결론들은 다수 민중, 즉 시민들에 의해 광범위하고 민주적으로 재전유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이후 토마 피케티가 주장하는 그의 사상적 목표다.

현재 토마 피케티의 사상적 궤적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시민에 의한 경제지식의 재전유'([자본과 이데올로기], <결론> / [평등의 짧은 역사], <감사의 말>, <10장>)가 바로 그 한 마디다.


"'시민에 의한 경제지식의 재전유'는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단계다. 이 책의 독자들에게 평등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무기를 손에 쥐어주었다면, 나는 목표를 다 이룬 셈이다."
- [평등의 짧은 역사], <10장>, 토마 피케티, 2021.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과연,
현대식 [공산당선언]에 버금간다 할 수 있겠다.

***

1. [평등의 짧은 역사](2021), Thomas Piketty, 전미연 옮김, <그러나>, 2024.
2. [21세기 자본](2013), 토마 피케티,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
3.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4.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기금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신정완, <사회평론>, 2012.
5.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1848), 마르크스/엥겔스,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93. /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선언'], 황광우/장석준, <실천문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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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서스 -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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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유일한 상수는 '변화'다
- [넥서스], 유발 하라리, 2024.


"역사는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이 그대로이고, 무엇이 변하며, 어떻게 변하는지 가르쳐 준다. 이 원리는 다른 모든 종류의 역사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정보혁명에도 적용된다."
- [넥서스], <프롤로그>, 유발 하라리, 2024.

2011년에 [사피엔스(Sapiens)]라는 책으로 인류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생태계 일반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빅 히스토리' 열풍을 일으킨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 1976~)는 2015년에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거친 인류가 궁극에는 '정보혁명'의 대표격인 AI 혁명으로 현대판 '길가메시' 영생을 길을 '사피엔스'답게 슬기롭고 지혜롭게 열어가면서 유한한 '인간(Homo)'이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신(神:Deus)'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역사학자로서 [총,균,쇠](1997)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뒤를 이어 본격적인 '빅 히스토리' 대가가 되었지만, 갈수록 급격한 현대 과학기술혁명을 맞아 '미래예언서'로 전환되는 듯한 유발 하라리는 어느덧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모든 책은 결국 '역사책'이며 모든 지식은 궁극에는 '역사지식'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유발 하라리에 관해 알고 싶다면 [사피엔스] 한 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최근에 동성애 남편과 함께 교육과 스토리텔링 사회적 기업인 '사피엔스십(Sapienship)'을 창립하여 AI로 대표되는 현대 과학혁명의 중대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유발 하라리의 근황이 궁금하여 그의 최근작 [넥서스(Nexus)](2024)를 펼쳤다.


"이 책의 입장... 인간 병사들은 자신들의 유전코드와 상사의 명령을 따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독립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AI 알고리즘도 마찬가지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고리즘도 인간 개발자가 프로그래밍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학습할 수 있고 인간 경영진이 예측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수많은 (비인격적) '새로운 주체들'이 세상에 등장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AI 혁명의 본질이다."
- [넥서스], <2-6. 새로운 구성원 : 컴퓨터는 인쇄술과 어떻게 다른가?>, 유발 하라리, 2024.

9년 전 [호모 데우스]의 결론은, 다소 진부하지만 19세기 근대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연속으로서 21세기 현대의 '정보혁명'인 급진적인 AI 혁명 과정에서도 인류(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선택과 결정으로 긍정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역사), 또는 열어가야 한다(예언)는 것이었다.

2018년부터 구글과 페이스북, 유투브, 일론 머스크 같은 AI 관련 기업과 기업가 등을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집필하기 시작해 2024년 올해 발표한 유발 하라리의 책 [넥서스] 역시, '과학혁명'의 최신판인 AI 정보혁명 과정에서 '비유기(비인간)적인 새로운 주체로서의 컴퓨터 정보네트워크 환경 속 기존의 인식적 주체인 인류(사피엔스)의 현명한 선택과 결정을 믿는다는 이야기를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넥서스(nexus)'는 '연결고리'라는 뜻의 라틴어다.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는 [사피엔스]에서 고찰했던 언어의 발전으로 시작한 인류 최초의 '인지혁명', 즉 '이야기'를 통한 '인간 네트워크들'([넥서스], <1부>)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면서 시작한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가 규정하듯 경제와 물질 결정론이 아니다. 인간 관계(네트워크/넥서스)를 규정하고 변화시킨 것은 신화와 종교, 이데올로기 같은 '이야기'들이다. 인간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권력투쟁 또는 계급투쟁 보다는 신화 또는 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 즉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전쟁도 일으켰고 함께 발전도 해 왔다는 주장이다. 

역사학자답게 인류 역사에서 '이야기'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여 문자와 인쇄술([넥서스], <1-3>), 이른바 '거룩한 책들'로 번역된 '무오류성'을 본질로 하는 [성경]같은 각종 경전들(같은책, <1-4>) 및 '이야기' 공유를 통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정치체제(<1-5>) 같은 '인간 네트워크들'을 돌아본 후, 이 책의 <2부. 비유기적 네트워크>에서는 컴퓨터 네트워크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비인간적' 네트워크를 다룬다. 

컴퓨터와 AI는 처음에는 인간이라는 전통적인 인식의 주체에 의해 만들어지고 통제되지만 '스스로' 발전하는 알고리즘으로 인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비인간적' 또는 '비유기적' 주체로서 새롭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AI 혁명의 키워드는 '스스로'다. 
급진적으로 발전하는 AI는 인간처럼 '인식'의 주체일 수는 없으나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정보제공을 받아 빅데이터로 집적된 정보를 무한하게 조합하고 자발적인 '좋아요'와 '구독'의 참여 순위로 콘텐츠가 배치되고 노출되며 공개되는 자체 알고리즘 메커니즘을 통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책임의 주체 또한 인간도, 기업도 아닌 컴퓨터 네트워크 자체가 된다.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는 인류의 '이야기' 역사를 유발 하라리는 '상호주관적' 네트워크라 부른다. '진실'이 아닐지라도 '진실' 이상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적' 넥서스는 AI 혁명 과정에서 새로운 '비인간적' 주체의 등장과 함께 '상호컴퓨터적' 현실로 대체된다.

인류 역사에서 '상호주관적 이야기'의 힘을 훨씬 능가할 이 '상호컴퓨터 현실'은 강력하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실행할 힘은 강력한데 인류 역사 속 전통적 주체인 인간처럼 '자정 기능'은 없다. '지능'은 있지만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 없는 '과학', 반성 없는 기술의 미래다. 
디스토피아다.


"인간 사이에서 협력의 전제 조건은 비슷함이 아니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화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우리를 단합하게 해줄 어떤 공통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를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만들었다... 
... 나는 역사학자로서 '변화' 가능성을 믿는다. 역사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우리가 자연스럽고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간이 만들었으며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 문명이 분쟁으로 소멸한다면 그것은 어떤 자연 법칙이나 낯선 기술이 아니라는 뜻... 우리가 노력할 경우(인간의 선택)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뜻... 모든 오래된 것은 한때 새로운 것이었다. 역사의 유일한 상수는 '변화'다."
- [넥서스], <3-11. 실리콘 장막 : 세계 제국인가, 세계 분열인가?>, 유발 하라리, 2024.

'자정 기능'은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의 주요 특징이다. 히틀러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현대 전체주의 정치체제는 모든 정보를 중앙에 집중하고 독점하는 본질적 특성상 AI라는 새로운 '비인간적' 주체에게 권력을 넘길 가능성이 크다. 정보를 독점한 1인 독재자가 AI의 꼭두각시가 되는 순간이다. 그러면 말 그대로 디스토피아가 된다. 그러므로 유발 하라리는 사회 '스스로' 분권화하고 견제하며 '자정 작용'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강조한다. AI 혁명이 계속되면서 전체주의의 유혹은 여전하거나 더욱 강화되겠지만 인류는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AI 디지털 신화 제작자와 디지털 관료들과의 대결 과정에서 정치체제는 여전히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간의 대립으로 반복되겠지만, 실은 21세기 AI 혁명 과정에서의 정치분열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분열"(같은책, <1-5>)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인간적'이고 '상호컴퓨터적' 넥서스는 기존의 '인간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이야기' 넥서스보다 상상 이상으로 훨씬 강력하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정치투쟁보다 인간과 비인간의 주체간 투쟁이 더욱 위험하다.
20세기 '철의 장막'은 21세기에 '실리콘 장막'으로 세계질서의 전선이 구분된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현실이 된다.


"AI의 발명은 전신이나 인쇄기, 심지어는 문자의 발명보다 중대한 사건일 수 있다. AI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아이디어를 생성할 수 있는 최초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 네트워크가 막강해 질수록 네트워크의 '자정 장치'가 중요해 진다... 
... '자기 수정'을 통한 개선은 인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된 원리다. 그것은 자연의 기본 원리요, 유기체의 근본 바탕이다. 최초의 유기체는 어떤 오류도 범하지 않는 천재나 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으며, 복잡한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출현했다."
- [넥서스], <에필로그>, 유발 하라리, 2024.

유발 하라리의 신작 [넥서스]의 결론은 '사피엔스'가 AI라는 새로운 '비인간적' 주체에 의해 멸망한다 해도 우주의 역사나 지구의 '빅 히스토리'는 변함없이 흐르겠지만 그렇다고 허무주의로 빠지기 보다는 '인간의 선택'을 중시하자는 내용이다. 즉,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같은책, <에필로그>)에 따라 AI 혁명의 미래는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 될 수 있다. 인류가 새로운 '비인간적' 주체인 '상호컴퓨터적' 넥서스를 스스로' 진화하도록 그냥 둔다면 디스토피아가 올 것이요, 새로운 주체의 창조자로서 인간의 민주주의적 '자정 기능'을 지키고 변화 및 발전시킨다면 '사피엔스'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역사학자다운 결론이다.
역사가 '정의'의 편이라는 믿음은 '정글의 법칙'처럼 신화에 불과하다(같은책, <에필로그>).
역사 속 모든 오래된 것들은 처음 한때는 새로운 것이었고(같은책, <3-11>),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역사'는 이러한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같은책, <프롤로그>).

AI도 마찬가지다. 
이 새로운 '비인간적' 주체도 '사피엔스'의 슬기롭고 지혜로운 결정이 어떠한가에 따라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만이 역사의 유일한 진리다.


"역사의 유일한 상수는 '변화'다."
- [넥서스], <3-11>, 유발 하라리, 2024.

이것이,
[넥서스] 본론의 마지막 문장이다.

***

1. [넥서스(Nexus) : A Brief History of Information Networks from the Stone Age to AI](2024), Yuval Noah Harari, 김명주 옮김, <김영사>, 2024.
2. [사피엔스(Sapiens)](2011),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1.
3. [호모 데우스(Homo Deus)](2015), 유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문학과 사상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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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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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사는 건가, 파는 건가
- [시간을 파는 상점], 김선영, 2012.


'시간'에 대한 관념에서,
당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략 2년 전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 후 딱 1년만에 돌아가신 후부터였던 것 같다. 사실 당시에는 잘 몰랐다. 작년에 아버지의 남은 형제인 백부와 숙부가 아버지를 따라가셨고, 올해 어머니가 당뇨쇼크로 오랜만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시고 뇌졸중으로 오래 누워계시던 장인이 돌아가시는 과정이 누적되면서 나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집 마당 지킴이였던 알래스칸 말래뮤트 에코마저 요단강을 건너갔다. 

일련의 '죽음'에 대한 관념이 3년 동안 나를 '시간'의 깊은 심연에 빠뜨렸다.

원래는 아버지 세대의 '죽음'과 그곳을 향해 서서히 걸어가는 어머니 세대, 하다못해 마당을 지키던 큰 개까지 가세하는 과정을 반추하면서, 마치 '죽음'의 필연적 종착점을 향해 직진하는 중세적 시간관으로부터 나는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몇 개월 더 나는 '시간'에게 잡혀 있었다. 

아니 사실 내가 '시간'을 붙잡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객체적으로는 '죽음'을 늘상 연상하는 83세의 노모가 내 곁에 계셨고, 주체적으로는 미욱한 솜씨라도 매주 글을 끄적여대야 내가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나를 잡았고,
내가 '시간'을 잡았다.

이제 슬슬 '시간'을 조금씩 놓고 싶은 마음에 집어든 책이 김선영 작가의 소설 [시간을 파는 상점](2012)이었던 거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이 늘 처음인 것처럼."

소설의 첫 문장이 아니고 마지막 문장이다.

반복하는 듯 아닌 듯 흘러가고 다가오는 '시간'에 관한 작가의 결론인 것이다.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시간을 파는 상점]은 '백제'라는 이름의 소방관 아버지를 일찍이 먼저 떠나보내고 환경시민단체 활동가인 어머니와 둘이 사는 '백온조'라는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의 짧은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 '백제'의 딸 '온조'의 시간은 1학년부터 2학년 가을까지 약 1년을 두고 있으되 주인공의 삶에서는 결코 짧다고만 볼 수 없는 '시간'에 관한 장기적인 성장과정으로 볼 수 있다.

2020년대 들어 '편의점'이든 '골동품서점'이든 대유행하기 전이었던 2012년에 일찍이 '상점'을 제목으로 다룬 소설인데, 고등학생 백온조의 알바가 '시간을 파는 상점'의 정체다.
일종의 심부름센터 같은 '상점'을 인터넷 카페에 개설하고 의뢰인들의 '시간'을 대신해서 써주는 일을 익명 및 비밀보장의 조건으로 맡아서 처리해주는 거다.

학교에서 발생한 우연한 도난사건에서 장물을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첫 번째 의뢰건부터 시작하여 할아버지, 아버지와의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이어주기 위한 일, 죽은 보육교사의 생전 의뢰를 받아 남은 아이들에게 한 통씩 천상의 편지를 몰래 전달해주는 일, 정식의뢰는 아니지만 절친의 짝사랑을 연결해주는 일 등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시간'을 사색하고 통찰한다.

'사간을 파는 상점' 주인장 백온조의 익명은 '크로노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절대적 '시간'을 관장하는 거인족 타이탄이면서 제우스 형제자매들의 아버지다. 한편으로 '크로노스' 백온조가 느끼는 '시간'은 '카이로스'에 가깝기도 하다. 앞머리는 길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인, 앞에서 올 때는 잡아야 하고 또 잡기도 쉽지만,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대머리라 잡을 수 없는 '기회의 시간'이다. '카이로스'이기도 하고 영어 'occasion(기회)'의 어원인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이기도 하다. 또 다른 버전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제 때에 잡지 못하면 어떻게든 그 댓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시 다른 '기회' 또는 '시간'이 또 올 수도 있겠지만 한 번 지나가 버린 그 '시간'과는 다르다.

그래서 [시간을 파는 상점]이 보는 모든 '시간'은 늘 '처음'이다.

객관적으로는 '나선형'으로 진보하는 근대적 시간관을 믿는 내가, 주관적으로 최근 3년 동안 '죽음'의 필연을 형해 '직선형'으로 흐르는 중세적 시간관에 빠진 것처럼,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 주인공 '크로노스'가 일련의 성장을 통해 '카이로스'의 시간관을 정립하는 과정과 비슷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청소년의 성장소설이기에 다소 유보적이기도 하다.


"온조는 지금 맞이할 이 '순간'을 먼 미래의 어느 '시간'에 맡겨두려 한다. '시간'이라는 것이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궁금하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치 않는다면."
- [시간을 파는 상점], <미래의 시간에 맡겨두고 싶은 일>, 김선영, 2012.


중년인 나도 이제,
'시간'에 관해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둬야겠다.

타인의 '시간'을 돈을 받았으니 파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본인의 '시간'을 지불하면서 도리어 타인의 '시간'을 사는 것인지 모를 시간 상점 주인 백온조처럼, 
'크로노스'의 관장 아래 무시로 흘러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나를 잡고 있는지, 아니면 도리어 내가 잡으려 하는지를.

내 생각엔,
'크로노스'의 '나선형 시간'은 나를 잡고 있지만,
'카이로스'의 '직선형 시간'을 잡으려 하는 건 오히려 나인 것 같다.

그러니 굳이 이 '시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려 한다.

'크로노스'의 명령에 따라 지금 지나가버린 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아쉽게도 뒤통수가 대머리라 잡을 수가 없겠지만, 또 다시 찾아올 다른 빛깔의 또 다른 '카이로스' 또는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의 그 '시간'은 그 앞머리를 잡아둬야겠다는.

내가 맞이하는 모든 '시간'은 항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시간'을 기꺼이 지불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귀하게 사야겠다.

나의 '시간'을 팔아,
소중한 이들의 '시간'을 사는 상점처럼.

***

- [시간을 파는 상점], 김선영, <자음과모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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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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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시간에 갇힌 채
-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2003.


"1975년의 겨울로 인해 모든 것이 확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로 인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2003.


요사이 계속,
여전히 '시간'에 갇혀 있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나는 고대의 순환적 시간관이나 중세의 직선적 시간관보다는, 근대적 나선형 시간관을 믿는다. 
시간은 돌고돌아 제자리 또는 반복한다는 순환론이나 궁극적 종말을 향해 결국 직진한다는 직선론이 아닌, 돌고돌며 반복하는 듯 하지만 그 반복은 동일한 순환이 아니고 앞으로 또는 위를 향해 전진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 진보의 '필연'을 향해 직진만 하지 않는다. 반복 같지만 똑같진 않고 어떻게든 더 나은 발전을 이룬다는 믿음이다. 그 시간의 나선운동 속에는 잠깐의 퇴행도 있을 수도 있지만 결국 '진보'의 필연을 담고 있다는 다분히 '20세기 소년'스러운 신념이다.

인류사적 관점에선 그렇다는 말이다.

46억년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친다면 하루 한나절도 안될 인류 600만년의 역사에서, 100년도 안될 내 생애를 가정하면 나선형식 퇴행과 진보의 변동폭은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느낌이다. 쉽게 말해 큰 변동 없이 정해진 길로 서서히 직진한다는 느낌이 크다. 
뒤로 쌓여가는 지난 시간은 앞으로 남은 내 시간에 별로 영향이 없다. 
지난 시간에게 나는 관객에 불과하다.


2003년에 출간된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 : 1965~)의 장편소설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2003)는 아프가니스탄인이 쓴 최초의 영어소설이라고 한다. 1973년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되었으나 내전을 겪다가 1980년대 소련의 침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간 저자의 경험이 녹은 이야기다. 주인공 아미르 '도련님'에게 실은 이복동생이었던 '머슴' 하산은 아미르가 두고 떠난 조국 아프가니스탄 자체의 상징이다. 본의 아니게 아미르가 저지른 어린 날의 과오는 자신의 과거를 두고두고 부정하다 못해 피해가고만 싶은 그런 시간으로 만들었다. 
아미르에게 친구같던 하인 하산과 어머니같던 조국 아프가니스탄이 바로 그렇다.

그렇게 소설의 첫 문장은 "1975년의 겨울로 인해 모든 것이 확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로 인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가 되었다. 1975년 겨울에 아미르 자신을 위해 나섰다가 곤경에 빠진 하산을 외면한 과오를 제일 앞에 내세우지 않고서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

소설의 첫 문장이란 그렇게 과거와의 길고긴 대화에서 중요한 첫 마디가 된다.


"20세기 초에 영국인이 깨달았던 것을, 소련인들이 1980년대 말에 결국 깨닫게 될 것을, 그 인도 애 역시 곧 알게 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독립적이라는 것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관습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규칙을 혐오한다. 그리고 연날리기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규칙은 간단했다. 규칙이 없는 것이 규칙이었다. 연을 날려서 상대방 연줄을 끊으면 된다. 행운을 빌 뿐이다."
-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2003.


사실 아미르가 20년도 훨씬 지난 후 다시 돌아간 아프가니스탄은 그의 아버지 바바 없이는 회상될 수 없는 시공간이다. 카불의 성공한 사업가이자 모든 면에서 당당하고 영웅적이었던 아버지 바바는 소련 침공으로 인해 미국으로 탈주하는 과정에서는 물론 미국 땅에서 어렵게 자리잡는 동안이나 말기암으로 죽어가던 순간까지도 변함없이 뿌리깊은 아프가니스탄인이었다. 무슬림이긴 하지만 그닥 신에 의지하지 않았고 외부가 아닌 본인 스스로의 의지를 믿는 매우 독립적인 인물, 아버지와는 천성이 다른 아들 아미르가 보기에 아버지 바바는 타고난 아프가니스탄인 자체였던 거다.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에 인도를 점령하고 북쪽의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이란 식민지 도박전쟁을 벌이던 영국도, 20세기에 결국 직접 침략을 감행한 소비에트연방 조차도 지배하지 못한 다분히 '독립'적인 나라였다.

'규칙 없는 것이 규칙'이며 오랜 기간 강대국의 침략은 받았으나 '독립'의 시간이 길었던 동아시아의 우리 한반도와 요동 또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같은 강인한 민족성을 공유하는 듯 하다.

[연을 쫓는 아이]의 주된 이야기는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뒤에 남겨진 하산으로부터 시작된다. 
제목처럼 연을 잘 쫓던 아이 또한 하산이다. 그런데 책을 덮은 내겐 아미르의 아버지 바바가 더 깊이 남았다. 

알고보니 아미르의 이복동생이었던 하산은 아들 소랍을 남기며 아미르에게 미래의 여지를 주었지만, 아미르의 아버지 바바는 이제부터 모든 것을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 아들 아미르에게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아프가니스탄이다. 자신이 외면했던 하산을 통해 부정하고 싶던 아미르의 과거는 언제나 당당하고 든든했던 아버지 바바가 아니었다면 다시 돌아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아미르를 다시 조국으로, 하산과 그의 아들 소랍에게로 다시 초대한 건 아버지 바바의 친구이자 아미르의 멘토와 같던 라힘 칸이었지만, 어린 아미르의 정신적 지주 라힘 칸조차도 아버지 바바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후 하산의 아들 소랍을 찾아 다시 돌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의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우연한 재회와 오랜 원한, 숨가쁜 혈투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장면은 너무 극적이라 말 그대로 '소설'로만 읽으면 되겠으나, 내게는 주인공 아미르의 아버지 바바를 통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조국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따뜻하고 푸근하게 남았다.


미래는 정해져 있다.
아버지는 이미 내게 모든 걸 맡기고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서서히 걸어가고 계신다. 
그렇게 내가 의지했던 모든 과거의 시간들은 나의 뒤로 하루하루 차곡하게 쌓여간다.
나는 그저 그들을 따라갈 뿐이다.

다시금 연을 쫓아 뛰기 시작한 아미르처럼,
나도 과거의 시간을 딛고 곧 앞으로 뛸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의 적지 않은 동안의 나는 여전히, 
시간에 갇힌 채 살고 있지만,
어쨌든 다시 돌아보는 과거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처럼 언제나 따뜻한 것일테니.

***

-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 Khaled Hosseini,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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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까지 인류가 상상한 온갖 저세상 이야기
켄 제닝스 지음, 고현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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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시간이 멈춘다면
- [환상특급] 시즌2, 1985~1989.


1987년, 아니면 그 다음 해였던가.
토요일 늦은 오후 '황혼'(twilight)의 시간은,
'환상특급' 열차를 타고 '신비스럽거나 또는 초자연적인''(twilight) 어딘가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중학교 때 오락실에서 동전은 이미 떨어진지 오래되었고 구경이나 하다가 싫증나면 동네 구씨 형제네 집으로 놀러가곤 했다.
구씨 형제는 나보다 한 살 많은 태환이형과 나보다 한 해 아래인 태영이였는데, 두 살 터울의 그 형제의 어머니는 아마도 신용카드가 없던 1980년대 중반에 우리 어머니와 서로 현금을 융통해주던 모종의 '신용카드'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같은 계모임 회원이었거나.
아무튼 1987~8년 중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구씨 형제네 집에서 민화투도 치고 애거서 크리스티 장편 추리소설도 읽었으며 TV 드라마를 봤다.

화투 가지고 놀길 좋아하시는 내 어머니한테 배운 민화투를 내가 구씨 형제들한테 가르쳐줬는지 아니면 애초에 민화투를 구씨 형제한테서 배운 건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서로가 아는 규칙들을 조정하고 일반화시키면서 팔뚝이나 딱밤 맞기 내기로 민화투를 가끔 쳤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다른 친구네 집을 들락거리며 섭렵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 추리소설 시리즈를 넘어 중학교 때 영국의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국의 엘러리 퀸의 장편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읽게 된 것도 역시 구씨 형제의 방에서였다. 팬더 문양의 <해문출판사>에서 낸 그 장편 추리소설 시리즈들과 그 책들에 들어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 풍의 미스테리한 미국식 삽화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토요일 오후에도 구씨 형제네 부모님께서는 여전히 일터에 계셨고, 1987년인가 1988년인가 당시 토요일 학교 끝나고 구씨 형제네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나면 미국 드라마 [브이(V)]를 봤던 것 같다. 친한 척 하면서 지구를 방문한 파충류 외계인들이 사실은 지구를 점령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외계인들의 정체를 알게 된 도노반과 줄리엣 같은 과학자 반군이 전력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이들에 대항하여 독립해방투쟁을 실천하는 감동의 드라마였다. 나는 용감한 남자 주인공 도노반이나 여자 주인공인 외계인 총사령관 다이애나 보다는 또 하나의 여자 주인공인 반군측 줄리엣이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보고는 했다. 그 여배우 이름이 페이 그란트(Faye Grant : 1957~)라는 건 이제서야 검색해보고 알았지만. 
어쨌든 당시의 사춘기 남학생인 나는 줄리엣 상사병 같은 것도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구씨네 어머니의 귀가가 좀 늦어져 그 집에서 줄리엣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집에 갈 타이밍을 놓친 나는 같은 채널에서 이어서 방영하던 [환상특급]도 보게 된다.

[환상특급] 역시 1980년대 미국 드라마였는데, 내 어릴적 1980년대에는 평일 오후 TV 만화영화는 다 일본 만화였고, 토요일 오후 TV 외화는 죄다 미국 드라마였다. [브이], [맥가이버], [전격Z 작전], [에어울프], [머나먼 정글] 등등이 토요일 오후를 장식했지만 그 중 나는 [환상특급]을 제일 좋아했던 것 같다. [브이]는 오로지 줄리엣만 좋았던 거고.


"당신이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시작이었습니다."

미국 작가 켄 제닝스의 [사후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2023)를 보면, [환상특급]의 <어둠 속의 공허> 에피소드 중 인격화된 '죽음(Mr. Death)'이 '죽음'을 안내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대부분 에피소드의 줄기는 이런 '환상'적 반전이다. 즉,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또다른 세계의 시작일 수 있으며, 이 '사후세계'는 종교적으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의 도교와 동아시아적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처럼 우리 곁에 있는 그 무엇일 수 있다는 관념의 서양식 또는 미국식 표현이겠다.
죽음의 여객선을 탄 노부부들은 유령이나 귀신들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이웃들과 같다. 그 누구도 이 배가 '사후세계'로 간다는 사실을 대놓고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잘못 탑승한 젊은 부부가 스스로 알아서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해야 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그 시간은 경각을 다투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현실의 시간이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채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해도 [환상특급]의 '사후세계'(The Great Beyond)로 간 나는 어디 먼 너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 가까운 그 어딘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겠다. 또는 죽음의 여객선 위의 젊은이가 어느새 옆에 있던 늙은이가 되어 버린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죽음'이 현실의 어딘가에서 새로 시작하는 또 다른 삶일 수 있는 거다.

저 멀리가 아닌 옆 동네 어딘가로 건너가 신선이 된 동양의 죽은 자는 늘 산 자의 곁을 맴돌며 그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하는 서양의 그 무엇이 된다.
현실과 '사후세계'의 경계는 모호하다.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은 미국의  방송제작자이자 각본 작가인 로드 설링(Rod Sirling)의 TV 단편드라마 시리즈라고 하는데, 이어지는 연속극이 아니라 매주 토요일 늦은 오후에 한 두편씩 하는 단편 에피소드들이었다. 내용은 현실에선 낯선 환상의 세계나 현실의 이면 또는 곁에서 도사리는 공포나 호러, 죽음과 사후세계 같은 기묘한 이야기들이었다. 과학적 모티브는 있었겠지만 그리 과학적이지도, 그렇다고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주제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의 우리가 잊고 살지만 항상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온갖 환상적인 이야기들로 상상의 세계가 잠시 펼쳐졌다.

에피소드들을 다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본 것들 조차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린 중학생이었던 내게 인상깊었던 에피소드 하나는 시간이 멈추는 환상 이야기였다. 어떤 계기가 되면 나만 빼고 모든 것이 정지되는 순간이 온다. 그 '얼음/땡'의 반복 후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 같은 건 없다. 그냥 나 빼고 다 멈춘 채 정지되었으니 시간이 멈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주인공은 처음에 시간이 멈추었을 때 신이 난 듯 장난도 쳐보았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지되곤 하는 시간 속에서 무료함과 무력감을 느끼다가 종국에는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절규하면서 끝났던 것 같다. 

현대과학에서는 시공간을 구부리고 겹쳐버리는 '상대성 이론'과 이를 초월하기도 하는 '양자역학'을 통해 보듯 오래된 뉴턴식 절대적 시간관은 붕괴된지 오래지만, 짧은 생을 잠시 스치듯 사는 우리 개인에게 '시간'이란 다시 되돌아가거나 붙잡아 둘 수 없는 불가역적인 '절대적' 존재다. 그래서 유한한 나는 오래전 토요일 늦은 오후의 [환상특급] 에피소드 이후 35년 넘게 '만약 시간이 멈춘다면?'이란 말도 안되는 가정을 가끔씩 혼자 해보곤 한다.

시간 없어 가보지 못한 공간을 가보거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만 알지 다시 흐르게 할 방법 같은 건 모른다. 혹시 내 의지대로 시간을 움직일 수 있다 한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내가 정지된 듯한 시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어차피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함께 살지 않는 한 그 삶의 시간은 거의 정지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말이다.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없는 우리들 개개인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고 평등하다.

그래도 만약,
시간이 멈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

- [사후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2023), 켄 제닝스, 고연석 옮김, <세종>,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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