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그 가의 살인 - 추리.공포 단편선 시공 에드거 앨런 포 전집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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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탐정 추리소설의 원조
- [모르그가(街)의 살인]/[마리 로제 수수께끼]/[도둑맞은 편지], 에드거 앨런 포, 1841~1844.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었다.

그냥 1980년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경이 좋았고, 음울하지만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주제도 관객인 나에게는 극적이었으며, 심지어 내 어린 시절 한 때 한참 회자되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현실적 모티브를 통해 연상되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뜬금없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던지, TV 영화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그 영화가 방영되면 무조건 끝까지 보았다.

한참 후 알게 된 일이었지만,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졌을 때 나는 소름 같은 게 돋았는데,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무죄로 놓친 그 자가 바로 범인이었다.

영화의 원작인 희곡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는 오리무중의 장기미제 살인사건의 범인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했던 거다.

과연,
영화적 '추리'의 쾌거라는 생각이 든다.

"분석력을 단순한 재간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분석가는 반드시 재간이 있지만, 재간 있는 사람은 종종 놀라울 정도로 분석력이 부족하다... '재간'과 '분석력'의 차이는 공상과 상상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지만 그 차이의 성격은 극히 유사하다. 사실 재간이 있는 사람은 항상 기발하지만 진정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분석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독자들이 보기에는 방금 제시한 주장에 대한 일종의 논평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18**년 봄과 여름 잠깐 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C. 오귀스트 뒤팽'이라는 신사를 알게 되었다..."
- [모르그가(街)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1841.


어린 시절 영국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 이야기와 애거서 크리스티, 미국의 엘러리 퀸의 장편들을 통해 추리소설을 배운 나는 한참 후 중년에 들어서서 우연한 기회로 엘러리 퀸의 원형이 되었다는 S.S.반 다인까지 거슬러 올라 읽게 되었다. 다섯 작품을 읽고는 더 이상 반 다인의 [OO살인사건] 시리즈를 구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차, 그럼 이 참에 '미스터리' 소설의 진짜 시조새라는 '에드거 앨런 포'까지 역주행해보자 싶었다. 워낙 유명한 고전작가라 [모르그가의 살인](1841)과 [검은 고양이](1843)는 어린 시절 읽기는 했더랬지만, 지금 다시 탐정 '뒤팽' 시리즈 단편을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 1809~1849)는 시인이자 문학비평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공포', '추리' 등 '미스터리' 소설의 원조로 유명하다. 

1833년 24세의 데뷔작 [병 속의 수기]는 난파를 당한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친 유령선에 올라타고는 함께 사라져 가는 기괴한 공포를 선사한다. 이후 19세기 초 무너져 가는 명문 귀족가문의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붕괴를 그린 [어셔가(家)의 몰락](1839), 엽기적 살인행각을 과감하게 1인칭으로 그린 [검은 고양이](1843)나, 해적 보물지도의 암호를 파헤치고 분석한 [황금벌레](1843) 등의 기괴하고 기묘한 단편소설들은 프랑스 작가 보들레르, 포스트모던 작가 보르헤스, 화가 르네 마그리트와 영국 록밴드 앨런 파슨즈 프로젝트 등의 예술가들에게 깊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포의 '공상'적 이야기는 쥘 베른, 웰스, 아시모프 등 후대의 'SF 공상과학' 소설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고 포의 <시공사> 전집 번역자인 권진아 교수는 해설한다([에드거 앨런 포 추리공포 단편선], <해설>, 권진아).

그리고 여기, 
에드거 앨런 포의 명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귀족으로 화자가 '슈발리에(기사)'라고도 부르는 뒤팽은 19세기까지 여전히 놀고먹는 한량으로, 아마도 선대부터 '기사(슈발리에)' 작위를 세습받은 귀족청년으로 추정된다. 막대한 유산을 기본으로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 한가롭고 게으르지만 머리가 비상하여 '분석력'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소설의 화자이자 뒤팽의 같이 놀고먹는 한량 친구인 나는 말한다.

뒤팽의 첫번째 활약극 데뷔작인 [모르그가(街)의 살인](1841)은 실제로 단순한 '재간'을 넘어서는 '분석력'의 대가로서의 이러한 뒤팽의 면모를 길고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뒤팽의 캐릭터와 그를 지켜보며 기록으로 남기는 친구로서 화자의 관계는 이후 코넌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와 친구 왓슨, 반 다인의 아마추어 탐정 파일로 번즈와 화자인 반 다인, 엘러리 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고 복사된다. 
그렇게 포의 원시적 탐정 '뒤팽'과 그의 '분석적' 추리결과를 듣고 받아적는 친구의 구도는 적어도 그후로 1백년 이상 동안 '탐정추리소설'의 진짜 원조이자 고전이 된다.

단, 단편소설 [모르그가의 살인] 속 파리에 사는 레스파나예 모녀를 '밀실'과도 같은 집에서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 다소 어처구니 없는 경악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가 요망된다. 
결과보다는 뒤팽의 분석추리를 쫓아가는 데 묘미를 두면 되겠다.


"... 모르그가 사건에서 내 친구(뒤팽)가 한 역할이 파리 경찰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 파리 경찰들 중 '뒤팽'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그 수수께끼(미스터리)를 푼 단순한 '귀납적' 추리 방법을 뒤팽이 나(화자) 말고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파리경찰국) G국장에게조차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놀랍지 않게도 그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이 간주되었고 '슈발리에(뒤팽)'의 '분석능력'은 직관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뒤팽은 솔직한 사람이라 사람들이 물어봤다면 그 편견을 바로잡아줬겠지만, 게으른 성격 탓에 이미 오래전 흥미를 잃은 일을 더 이상 들쑤시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보나 그는 경찰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의 도움을 받으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경우가 '마리 로제'라는 젊은 아가씨가 살해된 사건이었다."
- [마리 로제 수수께끼], 에드거 앨런 포, 1842.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이자 고전으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2백년도 훨씬 전에 발표된 소설임을 잊지 말고 포의 탐정 뒤팽을 만나야 한다.

[모르그가의 살인]으로 파리 경찰당국 사이에 유명해진 '명탐정 뒤팽'을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는데, 파리 시내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담배가게 젊은 아가씨 '마리 로제'의 살인사건 또한 미궁에 빠지면서 뒤팽이 소환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뉴욕의 '담배가게 아가씨'였던 메리 세실리아 로저스라는 젊은 여성의 살인사건을 전한 신문기사들을 에드거 앨런 포가 분석하면서 범인을 추적해 보는 내용이다. 
신문기사들의 선정적이지만 섣부른 추측과 과학적이지 못한 억측을 뒤팽은 낱낱이 분석하고 반박하면서, 당시 유력 용의자였던 마리 로제의 남자 친구의 무죄를 분석해내고, 파리 외곽 불량배들의 집단적 행위도 아님을 증명하면서, 비록 범인을 특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마리 로제가 비밀리에 만났을 외항 선원의 단독 범행임을 추리하고 있다. 만일 소설속 파리의 마리 로제, 현실의 메리 로저스 살인사건의 진범이 나중에라도 잡혔다면, 포의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에도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현실의 범인을 추적하고 밝혀낸 공을 돌릴 수 있지 않을는지.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The Mystery of Marie Rose)]의 제목에서 '수수께끼'의 원문이 '미스터리(Mystery)'다. 굳이 번역하자면, '수수께끼', '비밀', '추리' 등이 되겠는데, 포가 이후의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후예 작가 엘러리 퀸의 유명 시리즈의 제목은 [국적+사물+'미스터리'](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로마 모자 미스터리 등)였다. 그리고 엘러리 퀸은 모든 사실을 다 드러내 놓은 다음 독자들에게 '이제 범인을 맞춰보라'며 '수수께끼(미스터리)'를 내기도 한다.


"난 추상적 논리가 아닌 특수한 형태로 계발된 논리의 유효성과 가치가 의심스럽네. 특히 수학 연구를 통해 추출된 이성이 의심스러워. 수학은 형식과 수량의 과학이야. 수학적 추론이라는 것은 단지 형식과 수량의 관찰에 적용되는 논리에 불과하거든. 그런데 크나큰 오류는 이른바 순수 대수학의 진리를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진리로 간주하는 걸세. 이건 정말 너무 터무니없는 오류여서 그게 이렇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당혹스러울 지경이야. 수학적 공리는 일반적 진리의 공리가 아니야. 예를 들어, 형식과 수량의 관계 문제에서는 진리인 공리도 윤리 문제에서는 턱도 없이 틀리는 일이 종종 있거든. 윤리학에 있어서는 부분들의 합이 전체와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말일세."
- [도둑맞은 편지], 에드거 앨런 포, 1844.


뒤팽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편 [도둑맞은 편지](1844)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소설은 프랑스 왕족으로 추정되는 고위층 부인의 중요한 편지를 빼돌린 'D장관'의 집에서 그 '도둑맞은 편지'를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경찰 당국의 '수학적'이고 치밀한 추리와 탐색 과정의 헛점을 노린 범인의 관점에서 추리를 한 뒤팽이 어이없게도 아주 단순한 곳에 숨겨져 있던 편지를 찾아내 바꿔치기하는 결과로 끝이 난다.

편지를 훔친 장관은 수학자이자 시인이었다. 즉, 그가 '수학'적 사고를 통해 편지를 숨긴 것으로 보고 경찰이 '과학' 수사로 추적했지만, 범인은 오히려 '시인'의 기질을 활용해 경찰의 허를 찌르고는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장소에 편지를 숨겼다는 것.

뒤팽은 장관의 심리와 기질을 파악하고는 가위바위보에서 상대방을 읽으면서 매번 이기는 심리를 이용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도둑맞은 편지] 역시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결과가 좀 어이없기도 하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다. 19세기 중반 당시는 획기적 반전이었을지도.


뒤팽의 분석적 추리는 다분히 '귀납적'이다.
모든 사실관계를 나열하고 퍼즐처럼 짜맞춰 어디 있을지 모를 진실 또는 범인을 밝혀낸다. 이러한 '귀납적 추리'는 이후 같은 19세기 중후반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 등의 탐정들에게 전승된다. '과학수사'의 대원칙이다.

한편 20세기 초 미국에서 부활한 새로운 뒤팽인 반 다인의 파일로 번스와 앨러리 퀸의 앨러리 퀸 또는 바너비 로스의 드루리 레인 등의 사변적 탐정들은 게으른 귀족한량 같은 면모는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추리방식은 '귀납적'이지 않다. 이들은 뒤팽와 달리 범인을 먼저 심리적으로 지목한 후 수많은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대입하여 부실한 논리구조를 보이는 용의자들은 하나씩 소거해 나가면서 탄탄하고 완벽한 논리구조로 완성된 최종 용의자를 결국 범인으로 확정하는 '연역적' 방법를 구사한다. 소설로는 재미있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이른바 '연역소거법'이다. 심지어는 '법률적 정의'를 실현하는 법적 증거의 효력이 다소 떨어져 범인을 자살하게 만드는 '사적 복수'로 결말을 짓기도 한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살인사건 현장에서 범인은 늘 한정된 공간에 있다. 일본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주인공 김전일이 문을 잠그며 "범인은 이 안에 있어"라고 외치는 서사의 전형이다.

어쨌든 좋다.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에드거 앨런 포와 그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이제서야 제대로 만났으니.

그리고 아직 '미스터리' 안에 더 머무르고 싶어,
한정된 공간의 오로지 이야기만을 위한 이야기인 '밀실살인'의 대가,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의 소설을 두 권 더 마을도서관에서 빌려 간다.

***

- [모르그가(街)의 살인 외 - 에드거 앨런 포 추리공포 단편선](1833~1844), Edgar Allan Poe, 권진아 옮김, <시공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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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린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6
S.S. 반 다인 지음, 안동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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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이지 않아도, 머무르고 싶은.
- [그린살인사건]/[비숍살인사건], S.S.반 다인, 1928~1929.


엘러리 퀸의 원형적 모델인 S.S.반 다인의 화제작들을 마저 읽어보고자 마을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 [비숍살인사건](1929)이었다. 

반 다인의 세번째 작품이자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그린살인사건](1928)을 단연 먼저 읽어야 했으나 마을도서관에 없어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고, 알라딘 서점에서도 품절이었기에 중고서적으로 주문했으니, [그린살인사건]에 이은 그 다음 작품이었으나 반 다인 두번째로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라는 [비숍살인사건]을 [벤슨살인사건], [카나리아살인사건], [딱정벌레살인사건]에 이어서 펼쳤다. 

추리소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와 코넌 도일, 엘러리 퀸 등의 '미스터리소설'류는 빨리 읽고 싶어서 책을 펼친 후에 막상 그 책을 다 읽기 아까워서 다시 덮고는 책등만 어루만질 때가 자주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비록 어수선하고 긴박할지 몰라도 관객이자 독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현실과 동떨어져 고요하고 신비로운 인물들과 왠지 이불 속에서 읽을 법하게 고즈넉한 그 설정들 속에 더 남아 있고 싶어서다. 얼른 살인사건의 범인을 확인하고 싶은 한편, 그 추적과정의 밑그림들을 더 보고 싶어 다 읽어버리기를 머뭇거리는 모순된 관객이자 독자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가끔 읽는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그렇지 않고, 유독 엘러리 퀸과 최근 읽게 된 미국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반 다인의 작품들이 그렇다.

"실제로 (지방검사) 매컴이 4년 재직하는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범죄를 대부분 해결한 것은, 거의 모두 번스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인간 본질에 대한 지식', '뛰어난 박식과 교양', '예민한 논리 감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표정 뒤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후각과 같은, 이러한 자질은 모두 번스를 범죄 수사, 매컴의 소관인 여러 사건을 번스가 비공식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알맞은 것들이었다."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반 다인, 1929.


엘러리 퀸도 그렇지만, 반 다인 소설의 주인공 탐정 파일로 번스 또한 미국 하버드대를 다닌 수재다. 아니, 머리 좋고 싸움도 잘하고 하다 못해 운전실력까지도 뛰어난, 세상 못하는 것 없는 천재다. 영국 옥스포드대에서도 공부한 적 있고, 하는 일 없는 귀족 청년 같지만 '본업'을 굳이 따진다면, 미술 또는 예술 비평가로 추정된다. 작가인 '반 다인', 본명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가 바로 그렇다. 그의 추리소설 속 화자가 '반 다인'이기는 하나, 실제로 작가의 모습은 아마추어 탐정이자 미술 비평가인 귀족청년 파일로 번스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번스는 뉴욕시 지방검사 매컴, 화자인 반 다인과 하버드대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뉴욕 지방검사 매컴 재임 4년 동안의 굵직한 살인사건(Murder Case)들에 개입하려 번스 특유의 '연역소거법'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화자인 '반 다인'은 '파일로 번스'라는 가명의 탐정이 해결한 사건의 기록들을 [OO살인사건(Murder Case)]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사변적이고 지적인 탐정 파일로 번스는 '법률적'이고 '귀납적'인 과학적 수사과정을 경시한다. 오로지 용의자들을 먼저 설정하고 그에 얽힌 사실들을 큰 그림과 같은 거대한 논리구조로 구성한 후 일관성에 맞지 않은 사실과 논리를 소거해 나가면서 유력 용의자들을 배제시키고는 궁극에 완벽한 논리구조로 남겨진 최후의 용의자를 범인으로 가려내는 '연역소거법'으로 살인사건의 원인을 추적한다.

물론,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사건에 모두 '밀실'이나 '지인' 등 장소나 용의자가 한정된 상황만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고, 작가 반 다인과 주인공 번스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런 '연역소거' 추리만으로는 죄인을 법정에 세워 배심원과 판사를 설득할만큼 '법적 증거'와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러리 퀸과 파일로 번스의 '연역소거법'에서 오로지 확실한 '법적 증거'는 문명적이지 못하게도 범인의 '자백' 뿐이게 된다.

그리하여, 반 다인의 첫 작품 [벤슨살인사건](1926)과 세번째 작품 [그린살인사건](1928)은 범인의 최종 자백이 가능한 상황까지 몰고 가서 매컴 검사와 히스 형사가 수사종결 및 기소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었지만, [카나리아살인사건](1927), [비숍살인사건](1929), [딱정벌레살인사건](1930)의 범인들의 최후는 '자살'이 되고 만다.

이 중 [비숍살인사건]과 [딱정벌레살인사건]은 '법률적 정의'를 믿지 않는 주인공 파일로 번스의 직간접적 개입 하에 범인에게 '자살'이라는 극단적 최후를 선사한다.

이러한 결말 또한 이후 엘러리 퀸의 또 다른 필명 바너비 로스가 발표한 [Y의 비극](1932)에서 반복된다.

"지나치게 간단해, 매컴. 지나치게 간단하단 말일세. 아무래도 겉으로만 그럴 듯한 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과연 이론이긴 해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단 말이네. 나로서는 '비숍'이 그 끝없는 장난을 이렇게 '평범한 형태(자살)'로 끝을 맺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네. 뇌를 쏘아 버리다니. 그런 재치 없는 짓을 할 리가 없네. 진부하기 짝이 없어. 전혀 독창성이 없으며, '마더 구스 살인'을 고안한 사람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짓일세."
- [비숍살인사건], <카드로 지은 집>, 반 다인, 1929.


반 다인의 네번째 작품인 [비숍살인사건](1929)은 '마더구스' 동요에서 착안한 모티브로 물리학자와 수학자들, 체스 전문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나예요' 하고 참새가 말했다.
'내 활과 화살로
코크 로빈을 죽였어요.'
...
상주(喪主)는 누가 되나,
'나예요' 하고 비둘기가 말했다.
'잃어버린 사랑을 파묻겠어요,
상주는 내가 되지요.'
...
죽는 것을 본 건 누구인가,
'나예요' 하고 파리가 말했다.
'작은 내 눈으로
죽는 걸 보았어요.'"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활터에서>, 반 다인, 1929.

물리학자인 딜러드 교수의 집 활터에서 '로빈'이라는 사람을 '스팔로(참새)'라는 이름의 사람이 죽였다고 '자백'을 하는 사건이 첫번째 살인사건이다.
그리고는 '비숍(Bishp)'이라는 서명으로 '마더구스' 동요가 배달된다,

"조그만 남자가 있었습니다.
조그만 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총알은 납, 납으로 만든 총알로
'조니 스프리그'를 쏘았습니다.
가발 한복판을 쏘았습니다.
가발은 날아갔죠, 날아가는 머리에서."
- [비숍살인사건], <제2막>, 반 다인, 1929.

살인자가 '자백'을 했음에도, '비숍'의 동요가 유포되고, '존 스프리그'라는 수학전공 대학생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우울한 꼽추는 담 위에 앉아 있었다네.
우울한 꼽추는 높은 담 위에서 떨어졌네.
임금님의 말도 신하들도 모두 야단법석
우울한 꼽추는 그래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네."
- [비숍살인사건], <제3막>, 반 다인, 1929.

딜러드 교수의 이웃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던 꼽추 드래커 또한 의문 속에서 '마더구스' 동요처럼 죽게 되는데, 드래커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그린살인사건](1928)과 [비숍살인사건](1929)은 모두 연쇄살인사건인데, 범인의 치밀한 계획에 천재탐정 번스조차도 내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작들인 [벤슨살인사건](1926)과 [카나리아살인사건](1927)에서 번스는 최초 살인사건 현장에서 이미 범인을 속으로 지목해 놓고는 그에 맞는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구축한 후 나중에 다 밝히면서 엄청 잘난 척을 해대는 밉상을 보이고 있는데, 심지어 1930년에 발표한 다섯번째 작품인 [딱정벌레살인사건]에서조차 이미 점지한 범인을 속이기 위한 반전극을 스스로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1928~29년에 발표한 그린 가문과 비숍의 '마더구스' 연쇄살인사건에서는 번스 조차도 마지막 대반전에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모든 사건의 해결자는 결국 파일로 번스이며, 반전극의 종결자도 번스 자신이지만 말이다.

[비숍살인사건]에서는 범죄자에 대한 최고의 응징으로써 '자살'을 옹호하는 번스 조차도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면서도 용의자의 자살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결국 그 자살은 자살을 가장한 타살로 증명되지만 아직 당시의 번스는 범인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모든 걸 다 아는 그 잘난 번스답지 않게 엄청 헤매고 있는데, 역시 흥행을 위해서 주인공의 고난과 갈등은 반드시 필요한가 보다.


"마지막 암흑의 시간에 인간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
"그 점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겁니다. 그 어린아이(마패트)의 증언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나의 술책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고요. 아마 당신(아넷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생각에 대해 갑자기 반발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 [비숍살인사건], <막이 내리다>, 반 다인, 1929.


그럼에도 결국 번스는 '주교'와는 상관없는 연쇄살인마 '비숍'의 정체를 파악해내고, 살인마 비숍을 역으로 속이면서 그가 '자살'로 악행을 마감하도록 조치하고 만다.


"한심한 상류 가정이로군...
... 깊은 유서를 자랑하는 옛 가문도 안일과 나태를 탐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니 한 발 한 발 조락의 길을 더듬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인과응보의 불가사의여! 서(西)에 위텔스바하(비텔스바흐) 집안이 있고 동(東)에 로마노프 집안이 있으며, 저 로마의 줄리앙 클로디안 집안 또한 그렇잖나. 사라센의 압시드 왕조 역시 그렇지. 이 모두가 종족 붕괴의 표본이야... 사치와 궤도가 없는 방종이야말로 부패의 요인일세. 저 무장을 황제로 추대한 로마는 어떠했는가. 권세가 하늘에 닿은 앗시리아의 '사르다나파로스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이것은 모두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 [그린살인사건], <번스, 사건을 분석하다>, 반 다인, 1928.


반 다인 최고의 베스트셀러 [그린살인사건](1928)은 뉴욕의 명문가 '그린' 집안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또 하나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일종의 대저택 '밀실살인' 사건의 형태로 전개된다.

첫 장면은 흡사 미스터리소설의 원조인 애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1839)와도 같다. 오래된 근대적 명문가가 현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치와 부패, 방종으로 무너지는 상황 자체가 소설의 기괴한 배경이 된다.  

파일로 번스의 세번째 '살인사건(Murder Case)이 되는 그린 집안의 연쇄살인사건에서 번스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만큼 사건의 전개가 기괴하고 피해자의 규모도 크며 범인의 계획 또한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하여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연역소거 추리법에 맞는 사건 또한 현실적일 수 없다는 필연의 결론 아니겠는가.


"나는 마침내 그 문서의 각 항목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고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확고하게 지목할 수 있게 되었네. 일단 기초 도안이 세워진 뒤에는 각 세부가 전체 조형에 완전히 들어맞아 왔다네. 그런데도 범죄의 기법만은 여전히 애매모호하였지... 우리에게 그녀의 모략을 쳐부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해서 굳이 우리들의 우매성을 탓하지는 못할 걸세. 왜냐하면 우리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 그것은 그녀 하나가 아니었던 걸세. 그녀 이전의 모든 범죄자 계보, 몇 백을 헤아리는 간교한 범죄자가 한 경험의 축적에다 세계 최대의 범죄학자인 한스 그롯스 박사의 분석 과학의 성과가 덧붙여졌으니 말일세."
- [그린살인사건], <놀라운 진상>, 반 다인, 1929.


결국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또한 현실의 '법적 증거'가 아닌, 그린 저택의 밀폐된 서재에 있던 범죄학자의 고전서적에서 발견한 정황이다. 장서가 앨러리 퀸도 그렇지만 그의 원조 파일로 번스 탐정 또한 서지학과 문헌학의 대가답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천재답게 수천 쪽의 책, 그것도 독일어로 된 책들을 뒤져서 근거를 기어이 찾아낸다.

[그린살인사건](1928)을 통해 번스는 자신의 '연역소거법'의 아웃라인을 밝히는데, 역시 미술 비평가답고 또 그런 만큼 지극히 추상적이며 현학적이다. 


"매컴, 우리가 그린 집안 사건의 온갖 상황을 더듬어 온 수사 방법이 바로 사진처럼 대상의 통일이 없고 서로 관련점이 없었다는 말일세. 우리들은 하나하나의 사실을 그것이 떠올라 온 형태 그대로 음미했을 뿐, 이미 알려진 다른 사실과 관련시켜 분석해 보는 방법을 게을리했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이 사건 전체가 하나하나의 독립된 정수의 배열 또는 배합된 것처럼 다루는 착오를 범하고 말았네. 따라서 각 정수 자체의 의미는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어.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건 하나하나가 부분이 되어 이루고 있는 전체에 대해서 기초 도안(회화의 통일성/디자인)을 밝혀내는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여기까지는 알아듣겠나?"
- [그린살인사건], <빠뜨린 사실>, 반 다인, 1928.


즉,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사진'과 달리 '회화'가 논리적이든 상황적인 주제와 연결되는 '디자인(통일성)'으로 예술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의 '연쇄살인사건' 또한 백가지 사실들을 일관된 통일성으로 '다자인'해서 배치해 보아야 진실을 추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술사가 '열전'을 지은 조르조 바사리가 말한 미술가의 '디세뇨(디자인/design)'가 범죄학에 본격 적용되는 현장이다.

과연,
'범죄 미학론'의 결정체다.

S.S.반 다인의 12편 중 국내 번역된 다섯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내가 중고로나마 구입한 [그린살인사건]을 우리 마을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마을 도서관이 반 다인의 고전적인 다섯 작픔을 모두 소장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래도,
아쉽다.

비현실적인 사건전개는 그렇다 치고,
천재탐정 파일로 번스가 활약하는 이 미스터리 추리상황극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관객으로 그냥 계속 머무르고 싶은데,

아쉽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제대로된 현대 미국 뉴욕의 영어를 구사했다는 반 다인의 다른 작품을 영어로 읽어봐야 하나...

***

1. [그린살인사건(The Green Murder Case)](1928), S.S.Van Dine, 안동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7.
2. [비숍살인사건(The Bishop Murder Case)](1929), S.S.Van Dine, 김성종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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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비숍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
S.S. 반 다인 지음, 김성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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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이지 않아도, 머무르고 싶은.
- [그린살인사건]/[비숍살인사건], S.S.반 다인, 1928~1929.


엘러리 퀸의 원형적 모델인 S.S.반 다인의 화제작들을 마저 읽어보고자 마을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 [비숍살인사건](1929)이었다. 

반 다인의 세번째 작품이자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그린살인사건](1928)을 단연 먼저 읽어야 했으나 마을도서관에 없어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고, 알라딘 서점에서도 품절이었기에 중고서적으로 주문했으니, [그린살인사건]에 이은 그 다음 작품이었으나 반 다인 두번째로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라는 [비숍살인사건]을 [벤슨살인사건], [카나리아살인사건], [딱정벌레살인사건]에 이어서 펼쳤다. 

추리소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와 코넌 도일, 엘러리 퀸 등의 '미스터리소설'류는 빨리 읽고 싶어서 책을 펼친 후에 막상 그 책을 다 읽기 아까워서 다시 덮고는 책등만 어루만질 때가 자주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비록 어수선하고 긴박할지 몰라도 관객이자 독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현실과 동떨어져 고요하고 신비로운 인물들과 왠지 이불 속에서 읽을 법하게 고즈넉한 그 설정들 속에 더 남아 있고 싶어서다. 얼른 살인사건의 범인을 확인하고 싶은 한편, 그 추적과정의 밑그림들을 더 보고 싶어 다 읽어버리기를 머뭇거리는 모순된 관객이자 독자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가끔 읽는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그렇지 않고, 유독 엘러리 퀸과 최근 읽게 된 미국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반 다인의 작품들이 그렇다.

"실제로 (지방검사) 매컴이 4년 재직하는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범죄를 대부분 해결한 것은, 거의 모두 번스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인간 본질에 대한 지식', '뛰어난 박식과 교양', '예민한 논리 감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표정 뒤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후각과 같은, 이러한 자질은 모두 번스를 범죄 수사, 매컴의 소관인 여러 사건을 번스가 비공식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알맞은 것들이었다."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반 다인, 1929.


엘러리 퀸도 그렇지만, 반 다인 소설의 주인공 탐정 파일로 번스 또한 미국 하버드대를 다닌 수재다. 아니, 머리 좋고 싸움도 잘하고 하다 못해 운전실력까지도 뛰어난, 세상 못하는 것 없는 천재다. 영국 옥스포드대에서도 공부한 적 있고, 하는 일 없는 귀족 청년 같지만 '본업'을 굳이 따진다면, 미술 또는 예술 비평가로 추정된다. 작가인 '반 다인', 본명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가 바로 그렇다. 그의 추리소설 속 화자가 '반 다인'이기는 하나, 실제로 작가의 모습은 아마추어 탐정이자 미술 비평가인 귀족청년 파일로 번스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번스는 뉴욕시 지방검사 매컴, 화자인 반 다인과 하버드대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뉴욕 지방검사 매컴 재임 4년 동안의 굵직한 살인사건(Murder Case)들에 개입하려 번스 특유의 '연역소거법'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화자인 '반 다인'은 '파일로 번스'라는 가명의 탐정이 해결한 사건의 기록들을 [OO살인사건(Murder Case)]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사변적이고 지적인 탐정 파일로 번스는 '법률적'이고 '귀납적'인 과학적 수사과정을 경시한다. 오로지 용의자들을 먼저 설정하고 그에 얽힌 사실들을 큰 그림과 같은 거대한 논리구조로 구성한 후 일관성에 맞지 않은 사실과 논리를 소거해 나가면서 유력 용의자들을 배제시키고는 궁극에 완벽한 논리구조로 남겨진 최후의 용의자를 범인으로 가려내는 '연역소거법'으로 살인사건의 원인을 추적한다.

물론,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사건에 모두 '밀실'이나 '지인' 등 장소나 용의자가 한정된 상황만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고, 작가 반 다인과 주인공 번스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런 '연역소거' 추리만으로는 죄인을 법정에 세워 배심원과 판사를 설득할만큼 '법적 증거'와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러리 퀸과 파일로 번스의 '연역소거법'에서 오로지 확실한 '법적 증거'는 문명적이지 못하게도 범인의 '자백' 뿐이게 된다.

그리하여, 반 다인의 첫 작품 [벤슨살인사건](1926)과 세번째 작품 [그린살인사건](1928)은 범인의 최종 자백이 가능한 상황까지 몰고 가서 매컴 검사와 히스 형사가 수사종결 및 기소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었지만, [카나리아살인사건](1927), [비숍살인사건](1929), [딱정벌레살인사건](1930)의 범인들의 최후는 '자살'이 되고 만다.

이 중 [비숍살인사건]과 [딱정벌레살인사건]은 '법률적 정의'를 믿지 않는 주인공 파일로 번스의 직간접적 개입 하에 범인에게 '자살'이라는 극단적 최후를 선사한다.

이러한 결말 또한 이후 엘러리 퀸의 또 다른 필명 바너비 로스가 발표한 [Y의 비극](1932)에서 반복된다.

"지나치게 간단해, 매컴. 지나치게 간단하단 말일세. 아무래도 겉으로만 그럴 듯한 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과연 이론이긴 해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단 말이네. 나로서는 '비숍'이 그 끝없는 장난을 이렇게 '평범한 형태(자살)'로 끝을 맺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네. 뇌를 쏘아 버리다니. 그런 재치 없는 짓을 할 리가 없네. 진부하기 짝이 없어. 전혀 독창성이 없으며, '마더 구스 살인'을 고안한 사람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짓일세."
- [비숍살인사건], <카드로 지은 집>, 반 다인, 1929.


반 다인의 네번째 작품인 [비숍살인사건](1929)은 '마더구스' 동요에서 착안한 모티브로 물리학자와 수학자들, 체스 전문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나예요' 하고 참새가 말했다.
'내 활과 화살로
코크 로빈을 죽였어요.'
...
상주(喪主)는 누가 되나,
'나예요' 하고 비둘기가 말했다.
'잃어버린 사랑을 파묻겠어요,
상주는 내가 되지요.'
...
죽는 것을 본 건 누구인가,
'나예요' 하고 파리가 말했다.
'작은 내 눈으로
죽는 걸 보았어요.'"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활터에서>, 반 다인, 1929.

물리학자인 딜러드 교수의 집 활터에서 '로빈'이라는 사람을 '스팔로(참새)'라는 이름의 사람이 죽였다고 '자백'을 하는 사건이 첫번째 살인사건이다.
그리고는 '비숍(Bishp)'이라는 서명으로 '마더구스' 동요가 배달된다,

"조그만 남자가 있었습니다.
조그만 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총알은 납, 납으로 만든 총알로
'조니 스프리그'를 쏘았습니다.
가발 한복판을 쏘았습니다.
가발은 날아갔죠, 날아가는 머리에서."
- [비숍살인사건], <제2막>, 반 다인, 1929.

살인자가 '자백'을 했음에도, '비숍'의 동요가 유포되고, '존 스프리그'라는 수학전공 대학생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우울한 꼽추는 담 위에 앉아 있었다네.
우울한 꼽추는 높은 담 위에서 떨어졌네.
임금님의 말도 신하들도 모두 야단법석
우울한 꼽추는 그래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네."
- [비숍살인사건], <제3막>, 반 다인, 1929.

딜러드 교수의 이웃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던 꼽추 드래커 또한 의문 속에서 '마더구스' 동요처럼 죽게 되는데, 드래커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그린살인사건](1928)과 [비숍살인사건](1929)은 모두 연쇄살인사건인데, 범인의 치밀한 계획에 천재탐정 번스조차도 내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작들인 [벤슨살인사건](1926)과 [카나리아살인사건](1927)에서 번스는 최초 살인사건 현장에서 이미 범인을 속으로 지목해 놓고는 그에 맞는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구축한 후 나중에 다 밝히면서 엄청 잘난 척을 해대는 밉상을 보이고 있는데, 심지어 1930년에 발표한 다섯번째 작품인 [딱정벌레살인사건]에서조차 이미 점지한 범인을 속이기 위한 반전극을 스스로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1928~29년에 발표한 그린 가문과 비숍의 '마더구스' 연쇄살인사건에서는 번스 조차도 마지막 대반전에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모든 사건의 해결자는 결국 파일로 번스이며, 반전극의 종결자도 번스 자신이지만 말이다.

[비숍살인사건]에서는 범죄자에 대한 최고의 응징으로써 '자살'을 옹호하는 번스 조차도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면서도 용의자의 자살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결국 그 자살은 자살을 가장한 타살로 증명되지만 아직 당시의 번스는 범인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모든 걸 다 아는 그 잘난 번스답지 않게 엄청 헤매고 있는데, 역시 흥행을 위해서 주인공의 고난과 갈등은 반드시 필요한가 보다.


"마지막 암흑의 시간에 인간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
"그 점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겁니다. 그 어린아이(마패트)의 증언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나의 술책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고요. 아마 당신(아넷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생각에 대해 갑자기 반발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 [비숍살인사건], <막이 내리다>, 반 다인, 1929.


그럼에도 결국 번스는 '주교'와는 상관없는 연쇄살인마 '비숍'의 정체를 파악해내고, 살인마 비숍을 역으로 속이면서 그가 '자살'로 악행을 마감하도록 조치하고 만다.


"한심한 상류 가정이로군...
... 깊은 유서를 자랑하는 옛 가문도 안일과 나태를 탐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니 한 발 한 발 조락의 길을 더듬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인과응보의 불가사의여! 서(西)에 위텔스바하(비텔스바흐) 집안이 있고 동(東)에 로마노프 집안이 있으며, 저 로마의 줄리앙 클로디안 집안 또한 그렇잖나. 사라센의 압시드 왕조 역시 그렇지. 이 모두가 종족 붕괴의 표본이야... 사치와 궤도가 없는 방종이야말로 부패의 요인일세. 저 무장을 황제로 추대한 로마는 어떠했는가. 권세가 하늘에 닿은 앗시리아의 '사르다나파로스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이것은 모두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 [그린살인사건], <번스, 사건을 분석하다>, 반 다인, 1928.


반 다인 최고의 베스트셀러 [그린살인사건](1928)은 뉴욕의 명문가 '그린' 집안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또 하나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일종의 대저택 '밀실살인' 사건의 형태로 전개된다.

첫 장면은 흡사 미스터리소설의 원조인 애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1839)와도 같다. 오래된 근대적 명문가가 현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치와 부패, 방종으로 무너지는 상황 자체가 소설의 기괴한 배경이 된다.  

파일로 번스의 세번째 '살인사건(Murder Case)이 되는 그린 집안의 연쇄살인사건에서 번스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만큼 사건의 전개가 기괴하고 피해자의 규모도 크며 범인의 계획 또한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하여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연역소거 추리법에 맞는 사건 또한 현실적일 수 없다는 필연의 결론 아니겠는가.


"나는 마침내 그 문서의 각 항목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고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확고하게 지목할 수 있게 되었네. 일단 기초 도안이 세워진 뒤에는 각 세부가 전체 조형에 완전히 들어맞아 왔다네. 그런데도 범죄의 기법만은 여전히 애매모호하였지... 우리에게 그녀의 모략을 쳐부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해서 굳이 우리들의 우매성을 탓하지는 못할 걸세. 왜냐하면 우리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 그것은 그녀 하나가 아니었던 걸세. 그녀 이전의 모든 범죄자 계보, 몇 백을 헤아리는 간교한 범죄자가 한 경험의 축적에다 세계 최대의 범죄학자인 한스 그롯스 박사의 분석 과학의 성과가 덧붙여졌으니 말일세."
- [그린살인사건], <놀라운 진상>, 반 다인, 1929.


결국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또한 현실의 '법적 증거'가 아닌, 그린 저택의 밀폐된 서재에 있던 범죄학자의 고전서적에서 발견한 정황이다. 장서가 앨러리 퀸도 그렇지만 그의 원조 파일로 번스 탐정 또한 서지학과 문헌학의 대가답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천재답게 수천 쪽의 책, 그것도 독일어로 된 책들을 뒤져서 근거를 기어이 찾아낸다.

[그린살인사건](1928)을 통해 번스는 자신의 '연역소거법'의 아웃라인을 밝히는데, 역시 미술 비평가답고 또 그런 만큼 지극히 추상적이며 현학적이다. 


"매컴, 우리가 그린 집안 사건의 온갖 상황을 더듬어 온 수사 방법이 바로 사진처럼 대상의 통일이 없고 서로 관련점이 없었다는 말일세. 우리들은 하나하나의 사실을 그것이 떠올라 온 형태 그대로 음미했을 뿐, 이미 알려진 다른 사실과 관련시켜 분석해 보는 방법을 게을리했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이 사건 전체가 하나하나의 독립된 정수의 배열 또는 배합된 것처럼 다루는 착오를 범하고 말았네. 따라서 각 정수 자체의 의미는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어.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건 하나하나가 부분이 되어 이루고 있는 전체에 대해서 기초 도안(회화의 통일성/디자인)을 밝혀내는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여기까지는 알아듣겠나?"
- [그린살인사건], <빠뜨린 사실>, 반 다인, 1928.


즉,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사진'과 달리 '회화'가 논리적이든 상황적인 주제와 연결되는 '디자인(통일성)'으로 예술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의 '연쇄살인사건' 또한 백가지 사실들을 일관된 통일성으로 '다자인'해서 배치해 보아야 진실을 추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술사가 '열전'을 지은 조르조 바사리가 말한 미술가의 '디세뇨(디자인/design)'가 범죄학에 본격 적용되는 현장이다.

과연,
'범죄 미학론'의 결정체다.

S.S.반 다인의 12편 중 국내 번역된 다섯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내가 중고로나마 구입한 [그린살인사건]을 우리 마을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마을 도서관이 반 다인의 고전적인 다섯 작픔을 모두 소장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래도,
아쉽다.

비현실적인 사건전개는 그렇다 치고,
천재탐정 파일로 번스가 활약하는 이 미스터리 추리상황극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관객으로 그냥 계속 머무르고 싶은데,

아쉽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제대로된 현대 미국 뉴욕의 영어를 구사했다는 반 다인의 다른 작품을 영어로 읽어봐야 하나...

***

1. [그린살인사건(The Green Murder Case)](1928), S.S.Van Dine, 안동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7.
2. [비숍살인사건(The Bishop Murder Case)](1929), S.S.Van Dine, 김성종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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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정벌레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9
S.S. 반 다인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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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리 퀸'의 '이전(以前)'으로 거슬러 올라
- S.S. 반 다인, [벤슨살인사건]/[카나리아살인사건]/[딱정벌레살인사건], 1926~1930.


"(파일로) 번스는 35살로 차갑고 조각적인 용모가 훌륭하고 인상적이었다. 갸름한 얼굴의 표정이 풍부했으나 어쩐지 엄격하고 냉소적인 기색이 깃들어 있어 친구들 사이에 울타리를 치는 근원이 되었다. 그는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감정은 주로 지적인 것이었다. 금욕적이라고 곧잘 비난받곤 했으나 나는 미학이나 심리학 문제에 이따금 그가 정열을 쏟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사와는 일체 멀리 떠나온 듯한 인상을 풍겼는데, 사실 정열도 없는 비인격적인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인생을 내려다 보면서 모든 일들이 부질없음을 소리없이 비웃고 있었다. 한편 지식에 대해서는 욕심이 많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인간 희극의 아무리 하찮은 점이라도 그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번스가 비공식적으로 매컴의 범죄수사에 적극 관여하게 된 것은 결국 이 지적 탐구심 때문이었다."
- [카나리아살인사건], <카나리아>, 반 다인, 1927.


결국,
'반 다인'에게까지 오고 말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단편소설의 강물에 떠 있을 수 있게 된 건 친구 집에 있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추리소설 단편집이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오락실만 전전하다가 우연히 동네 형의 방에서 발견한 영국의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국의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 몇 권을 통해 장편소설의 바다에서 헤엄을 칠 수 있게 된 내게,
독서의 근원은 역시 '추리소설'인가 보았다.

지난달 말부터 아들의 군입대를 앞두고 허전함에 그랬는지 그렇게 좋아라 하는 독서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니 서평도 쓸 게 없었고 오로지 종이접기나 하며 쉬는 시간을 보냈는데, 매주 토요일 초안산 산책 후 찾아가는 마을 도서관에서 <동서문화사>의 '동서 미스터리 북스' 시리즈 전집이 새로 들어온 것을 보게 되었다.

내 독서의 근원이 '추리소설'인지라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19세기 영국 소설가들의 작품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한때 잠시 20세기 초 미국 추리소설의 대가 엘러리 퀸을 잠시 몇 권 읽고 재미있어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몇 년 전 '엘러리 퀸'을 필명으로 데뷔한 그들 사촌형제들의 '미스터리(비밀)' 시리즈를 대거 구입하여 출퇴근길에 읽고는 둘째딸에게 물려주기도 했다.

법률적인 물적 증거가 아닌, 거대한 가설 아래 순전한 지적 논리전개를 통해 연역적으로 그 가설을 증명함으로써 용의자들을 하나씩 제외해 가는 이른바 '연역소거법'으로 유명한 엘러리 퀸 작품의 젊은 백수이자 아마추어 탐정 '엘러리 퀸'과 같은 작가 다른 필명의 바너비 로스 작품에 나오는 은퇴한 연극배우인 늙은 귀머거리 탐정 '드루리 레인'이 매우 인상 깊었는데, 1929년 미국 대공황기에 유행한 '엘러리 퀸 이전'의 모태가 바로 1926년부터 활동한 S.S. 반 다인(Van Dine:1888~1939)이었다.

그렇게 나는 의도적으로 가고자 했던 목표는 아니었지만, 여차저차 미국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대가인 '반 다인'에게까지 오게 된 거다. 
순전히 아들 덕분에 말이다.


"그것이 자네의 근본적인 잘못일세. 범죄는 모든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의해 목격되고 있네. 범죄자나 예술가가 실제로 작업하는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네. 예를 들어 루벤스가 안트워프의 대성당에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을 때 그가 어떤 외교적 용무로 다른 데 갔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유력한 상황증거가 있다면 현대의 범죄수사가들은 그것을 루벤스의 작품으로 믿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여보게. 그런 결론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네.
비록 부정적인 추론이 법률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유력하다 해도 그림 자체는 어디까지나 루벤스가 그렸음을 증명하겠지. 그 이유는 간단하네. 루벤스를 빼놓고는 누구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일세.  거기에는 루벤스의 개성과 천재가, 루벤스만이 지닌 뭔가가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네...
... 이 특수한 범죄를 해치운 사람은 자네나 경찰이 찾아낸 증거 쯤으로는 자기 신변이 위태로워질 염려가 전혀 없다고 꿰뚫어볼 만큼 간교한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네 눈이 범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걸세."
- [벤슨살인사건], 반 다인, 1926.


'반 다인'은 미국의 문예비평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Willard Huntingron Wright)가 어떤 계기를 통해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써서 발표하면서 지은 필명이다. 당시 추리소설은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부터 등장하여  영국에서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작가를 거치면서 유명세를 탔지만, 타고난 천재 지식인이었던 라이트는 '추리소설'을 문예비평문보다 낮은 급으로 생각했는지 필명 뒤에 숨어 익명으로 1년 넘게 활동하다가 정체가 드러났다고 한다. 이는 몇 년 후 반 다인의 후예였던 엘러리 퀸이 바너비 로스라는 다른 필명으로 드루리 레인이라는 같은 캐릭터의 다른 탐정을 앞세워 독자대중을 혼란케 한 것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문예비평이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에 비해 발표하자마자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소설 작품을 쓴 작가로서 더 이상 존재를 숨길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게다.

반 다인의 첫 작품은 [벤슨살인사건](1926)이다. 살인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추리소설은 그 구성의 중복성으로 세 편 이상 나올 수 없다고 반 다인은 선언했다는데, 과연 처녀작 [벤슨살인사건](1926)과 두번째 작품 [카나리아살인사건](1927)을 연달아 발표하여 흥행시켰고,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세번째 작품 [그린살인사건](1928)을 발표한 후 반년간 벌어들인 수익은 그의 전체 15년 작품생활 중 나머지 기간에 번 돈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 상업적 계기는 반 다인으로 하여금 총 12편의 'ㅇㅇ살인사건' 시리즈물을 계속 쓰게 만든 것이다. 

엘러리 퀸도 다작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기원과도 같은 반 다인 또한 거의 매년 한 작품씩 발표한 다작의 미스터리 추리소설 작가였다.

반 다인의 'ㅇㅇ살인사건' 시리즈 제목은 역시 그의 후예 엘러리 퀸으로 내려가면 '국적+사물+미스터리'('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그리스 관 미스터리, 로마 모자 미스터리 등) 형식의 제목으로 변형되어 추리소설의 유행을 이어간다.

반 다인이 창조한 비공식 탐정 '파일로 번스'는 작가 본인처럼 문예와 미술에 조예가 깊은 귀족풍의 35세 젊은이로서, 오로지 지적 호기심으로 친구인 뉴욕시의 4년 임기 선출직 지방검사 매컴이 지휘하는 살인사건 해결에 개입한다. 사실 정식 탐정도 경찰도 아닌 그냥 천재 백수건달 귀족이지만 지방검사 친구 빽으로 용의자들을 심문하고 사건현장을 어슬렁거리며 범인을 마음껏 추리한다. 이는 또한 아버지 퀸 경감 빽으로 설치는 엘러리 퀸의 원조 모델임을 보여준다.

[벤슨살인사건]은 첫 작품이라 주인공 파일로 본스와 화자인 번스의 고문변호사 '반 다인' 및 매컴 검사와 히스 형사 같은 주요 등장인물들에 관한 세밀한 묘사가 나오는데, 사실 번스는 오로지 '지적 호기심'으로 천재적 논리전개와 추적을 통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게 목적이지 친구인 지방검사 매컴처럼 범죄자를 전기의자 사형대로 보내는 사회적 정의 구현 따위는 관심이 없다. 번스는 법률가들이 법정에서 중시하는 물적 증거는 무시하며 오로지 용의자들의 심리분석과 살인동기 추적, 가설적 범죄자를 설정하고 나서 상황 증명을 통해 논리를 구성함으로써 용의자들을 차례로 소거해 나가는 방식을 중시한다. 그러면서 용의자들의 심리를 확인하기 위해 카드놀이와 골상학 등의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제들은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는 머리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봐도 현실의 사건에서는 적용되기 어려운 추리이기도 하다. 

현실적이지 않은 '연역소거' 추리를 혼자 머릿속으로 계속 그리면서 파일로 번스는 검사 매컴과 형사과 살인부 히스 부장을 놀리며 다음과 같은 현학적인 말로 계속 약올려 대는데, 거의 동일한 캐릭터인 엘러리 퀸도 그렇지만 모든 지능이 높아 모르는 게 없고 세상 못하는 것도 없는 천재들이 그렇듯 때로는 얄밉기도 하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보게. 나는 늘 데카르트의 자연주의적 철학에 마음이 끌린다네. 그것은 보편적인 회의에서 출발하여 자의식 속에서 실증적 지식을 추구하고 있지. 스피노자는 범신론에서, 버클리는 유심론에서 모두 그 선구자가 자신있어 하던 생략론법(연역소거법)의 의의를 크게 오해하고 있네. 데카르트는 그런 오류에서도 광채를 내뿜고 있지. 그의 추리법은 과학적으로는 아주 부정확하지만 분석학자의 신조에 새로운 의의를 주었다네. 정신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수학적 정확성과 천문학적인 순수 사색을 함께 갖추어야 하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소용돌이설은..."
- [벤슨살인사건], 반 다인, 1926.

"자네는 언제나 성급하군. 어째서 한꺼번에 뛰고 달리려는 거지? 온 세계의 훌륭한 철인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타이르고 있잖은가? 세자르는 Festina Iente(급하면 돌아가라)라고 했지. 아니, 루프스(신성로마제국 오토2세)가 말했듯이 Festinatio tarda est(서두르면 늦어진다)가 더 좋을지 모르겠군. 그리고 코란은 아주 간단한 말로 서두르는 것은 악마가 하는 짓이라고 했으며, 셰익스피어는 늘 스피드를 경멸했었지. '늦지 않으려고 너무 서두르면 막상 유사시에는 맥을 못 추고 만다'(리처드3세)라고 했네. '명심하고 천천히 가라. 빨리 가는 사람은 걸려 넘어진다'(로미오와 줄리엣)고도 말했지."
- [카나리아살인사건], <네 가지 가능성>, 반 다인, 1927.


'사회정의 구현'에 관심 없으니, 번스는 첫 사건인 월스트리트의 사기꾼 주식중개인 벤슨이 살해된 [벤슨살인사건]에서는 매컴 검사와 히스 부장이 범인을 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돕지만, 유명 여배우가 살해당한 [카나리아살인사건]과 온갖 이집트 역사와 유물 이야기로 도배하는 [딱정벌레살인사건] 같은 케이스(Muder case)에서는 교활하고 용의주도한 범죄자가 법정 외에서 스스로 또는 타인에 의해 단죄당하도록 둔다.
이 방식은 또한 엘러리 퀸이 바너비 로스 필명으로 내세운 탐정 드루리 레인이 [Y의 비극] 같은 사건에서 채용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이 세속의 '법적 정의'를 경시하는 작가 반 다인과 탐정 파일로 번스가 판단하는 진정한 '정의의 복수'인 듯이 말이다.


"매컴, 나는 고대 이집트 신들이 솔론이나 유스티니아누스나 다른 모든 법률 편찬자를 한데 묶은 것보다 더 현명했다고 생각하네. 하니는 사크메트의 복수에 대해 사뭇 능청을 떨었지만, 요컨대 저 태양의 테를 머리에 두른 여신은 자네들의 어리석은 '법률' 못지않은 효력을 가지고 있지. 신화에 담긴 사상은 난센스지만, 현대 '법률'의 어리석음 이상으로 난센스인지 어떤지...
...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 발굴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박사는 모든 사실을 자백할지도 모르네. 그는 약삭빠른 이기주의자일세. 빠져나갈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진상을 털어놓고 자신의 우수한 두뇌를 과시할지도 모르네. 그리고 매컴, 저 늙은 여우를 사형집행인 앞으로 끌고 갈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살하게 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자네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네."
- [딱정벌레 살인사건], <아누비스의 심판>, 반 다인, 1930.


아들을 국가에 바친 허전함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던 요즘,
출퇴근 시간 전철 안에서 천천히 읽느라 더디고 재미는 좀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좀 아쉽다.
내친 김에 다시금 책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라도 마을 도서관을 뒤져서 반 다인을 좀더 만나봐야겠다.

[그린살인사건](1928)과,
[비숍살인사건](1929)으로.

일련의 '살인사건'을 둘러싼 주변 용의자들의 베일에 싸인 복잡한 알리바이들의 고요한 신비의 안개 속에서 나는,
번뜩이는 반 다인과 번스의 심리분석 위주의 '연역소거법' 추리를 조금 더 쫓아가 보기로 한다.

반 다인 최고의 베스트셀러 [그린살인사건]은 도서관에도 없고 알라딘 서점에서도 품절이니 중고서적을 주문하여 반 다인의 대표작으로 한 권 소장하기로 하고,
그의 네번째 작품 [비숍살인사건]은 마을 도서관에서 찾아 바로 대출하여 다음 책으로 우선 읽는 것으로.

내가 그토록 좋아해 마지 않는,
'엘러리 퀸'의 '이전(以前)'으로 거슬러 올라서 말이다.


"기억하게나, 매컴. 자네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이번 범죄에 대한 구상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진행시켜야 하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네가 힘차게 쌓아올리는 고층 누각은 모두 자네 머리 위로 무너지고 말걸세."
- [카나리아 살인사건], <번스, 이론을 펴다>, 반 다인, 1927.

***

1. [벤슨살인사건(The Benson Murder Case)](1926), S.S. Van Dine, 정광섭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카나리아살인사건(The Canary Murder Case)](1927), S.S. Van Dine, 안동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딱정벌레살인사건(The Scarab Murder Case)](1930), S.S. Van Dine, 신상웅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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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2
S.S. 반 다인 지음, 안동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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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리 퀸'의 '이전(以前)'으로 거슬러 올라
- S.S. 반 다인, [벤슨살인사건]/[카나리아살인사건]/[딱정벌레살인사건], 1926~1930.


"(파일로) 번스는 35살로 차갑고 조각적인 용모가 훌륭하고 인상적이었다. 갸름한 얼굴의 표정이 풍부했으나 어쩐지 엄격하고 냉소적인 기색이 깃들어 있어 친구들 사이에 울타리를 치는 근원이 되었다. 그는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감정은 주로 지적인 것이었다. 금욕적이라고 곧잘 비난받곤 했으나 나는 미학이나 심리학 문제에 이따금 그가 정열을 쏟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사와는 일체 멀리 떠나온 듯한 인상을 풍겼는데, 사실 정열도 없는 비인격적인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인생을 내려다 보면서 모든 일들이 부질없음을 소리없이 비웃고 있었다. 한편 지식에 대해서는 욕심이 많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인간 희극의 아무리 하찮은 점이라도 그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번스가 비공식적으로 매컴의 범죄수사에 적극 관여하게 된 것은 결국 이 지적 탐구심 때문이었다."
- [카나리아살인사건], <카나리아>, 반 다인, 1927.


결국,
'반 다인'에게까지 오고 말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단편소설의 강물에 떠 있을 수 있게 된 건 친구 집에 있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추리소설 단편집이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오락실만 전전하다가 우연히 동네 형의 방에서 발견한 영국의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국의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 몇 권을 통해 장편소설의 바다에서 헤엄을 칠 수 있게 된 내게,
독서의 근원은 역시 '추리소설'인가 보았다.

지난달 말부터 아들의 군입대를 앞두고 허전함에 그랬는지 그렇게 좋아라 하는 독서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니 서평도 쓸 게 없었고 오로지 종이접기나 하며 쉬는 시간을 보냈는데, 매주 토요일 초안산 산책 후 찾아가는 마을 도서관에서 <동서문화사>의 '동서 미스터리 북스' 시리즈 전집이 새로 들어온 것을 보게 되었다.

내 독서의 근원이 '추리소설'인지라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19세기 영국 소설가들의 작품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한때 잠시 20세기 초 미국 추리소설의 대가 엘러리 퀸을 잠시 몇 권 읽고 재미있어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몇 년 전 '엘러리 퀸'을 필명으로 데뷔한 그들 사촌형제들의 '미스터리(비밀)' 시리즈를 대거 구입하여 출퇴근길에 읽고는 둘째딸에게 물려주기도 했다.

법률적인 물적 증거가 아닌, 거대한 가설 아래 순전한 지적 논리전개를 통해 연역적으로 그 가설을 증명함으로써 용의자들을 하나씩 제외해 가는 이른바 '연역소거법'으로 유명한 엘러리 퀸 작품의 젊은 백수이자 아마추어 탐정 '엘러리 퀸'과 같은 작가 다른 필명의 바너비 로스 작품에 나오는 은퇴한 연극배우인 늙은 귀머거리 탐정 '드루리 레인'이 매우 인상 깊었는데, 1929년 미국 대공황기에 유행한 '엘러리 퀸 이전'의 모태가 바로 1926년부터 활동한 S.S. 반 다인(Van Dine:1888~1939)이었다.

그렇게 나는 의도적으로 가고자 했던 목표는 아니었지만, 여차저차 미국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대가인 '반 다인'에게까지 오게 된 거다. 
순전히 아들 덕분에 말이다.


"그것이 자네의 근본적인 잘못일세. 범죄는 모든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의해 목격되고 있네. 범죄자나 예술가가 실제로 작업하는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네. 예를 들어 루벤스가 안트워프의 대성당에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을 때 그가 어떤 외교적 용무로 다른 데 갔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유력한 상황증거가 있다면 현대의 범죄수사가들은 그것을 루벤스의 작품으로 믿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여보게. 그런 결론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네.
비록 부정적인 추론이 법률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유력하다 해도 그림 자체는 어디까지나 루벤스가 그렸음을 증명하겠지. 그 이유는 간단하네. 루벤스를 빼놓고는 누구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일세.  거기에는 루벤스의 개성과 천재가, 루벤스만이 지닌 뭔가가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네...
... 이 특수한 범죄를 해치운 사람은 자네나 경찰이 찾아낸 증거 쯤으로는 자기 신변이 위태로워질 염려가 전혀 없다고 꿰뚫어볼 만큼 간교한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네 눈이 범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걸세."
- [벤슨살인사건], 반 다인, 1926.


'반 다인'은 미국의 문예비평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Willard Huntingron Wright)가 어떤 계기를 통해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써서 발표하면서 지은 필명이다. 당시 추리소설은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부터 등장하여  영국에서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작가를 거치면서 유명세를 탔지만, 타고난 천재 지식인이었던 라이트는 '추리소설'을 문예비평문보다 낮은 급으로 생각했는지 필명 뒤에 숨어 익명으로 1년 넘게 활동하다가 정체가 드러났다고 한다. 이는 몇 년 후 반 다인의 후예였던 엘러리 퀸이 바너비 로스라는 다른 필명으로 드루리 레인이라는 같은 캐릭터의 다른 탐정을 앞세워 독자대중을 혼란케 한 것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문예비평이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에 비해 발표하자마자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소설 작품을 쓴 작가로서 더 이상 존재를 숨길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게다.

반 다인의 첫 작품은 [벤슨살인사건](1926)이다. 살인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추리소설은 그 구성의 중복성으로 세 편 이상 나올 수 없다고 반 다인은 선언했다는데, 과연 처녀작 [벤슨살인사건](1926)과 두번째 작품 [카나리아살인사건](1927)을 연달아 발표하여 흥행시켰고,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세번째 작품 [그린살인사건](1928)을 발표한 후 반년간 벌어들인 수익은 그의 전체 15년 작품생활 중 나머지 기간에 번 돈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 상업적 계기는 반 다인으로 하여금 총 12편의 'ㅇㅇ살인사건' 시리즈물을 계속 쓰게 만든 것이다. 

엘러리 퀸도 다작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기원과도 같은 반 다인 또한 거의 매년 한 작품씩 발표한 다작의 미스터리 추리소설 작가였다.

반 다인의 'ㅇㅇ살인사건' 시리즈 제목은 역시 그의 후예 엘러리 퀸으로 내려가면 '국적+사물+미스터리'('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그리스 관 미스터리, 로마 모자 미스터리 등) 형식의 제목으로 변형되어 추리소설의 유행을 이어간다.

반 다인이 창조한 비공식 탐정 '파일로 번스'는 작가 본인처럼 문예와 미술에 조예가 깊은 귀족풍의 35세 젊은이로서, 오로지 지적 호기심으로 친구인 뉴욕시의 4년 임기 선출직 지방검사 매컴이 지휘하는 살인사건 해결에 개입한다. 사실 정식 탐정도 경찰도 아닌 그냥 천재 백수건달 귀족이지만 지방검사 친구 빽으로 용의자들을 심문하고 사건현장을 어슬렁거리며 범인을 마음껏 추리한다. 이는 또한 아버지 퀸 경감 빽으로 설치는 엘러리 퀸의 원조 모델임을 보여준다.

[벤슨살인사건]은 첫 작품이라 주인공 파일로 본스와 화자인 번스의 고문변호사 '반 다인' 및 매컴 검사와 히스 형사 같은 주요 등장인물들에 관한 세밀한 묘사가 나오는데, 사실 번스는 오로지 '지적 호기심'으로 천재적 논리전개와 추적을 통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게 목적이지 친구인 지방검사 매컴처럼 범죄자를 전기의자 사형대로 보내는 사회적 정의 구현 따위는 관심이 없다. 번스는 법률가들이 법정에서 중시하는 물적 증거는 무시하며 오로지 용의자들의 심리분석과 살인동기 추적, 가설적 범죄자를 설정하고 나서 상황 증명을 통해 논리를 구성함으로써 용의자들을 차례로 소거해 나가는 방식을 중시한다. 그러면서 용의자들의 심리를 확인하기 위해 카드놀이와 골상학 등의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제들은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는 머리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봐도 현실의 사건에서는 적용되기 어려운 추리이기도 하다. 

현실적이지 않은 '연역소거' 추리를 혼자 머릿속으로 계속 그리면서 파일로 번스는 검사 매컴과 형사과 살인부 히스 부장을 놀리며 다음과 같은 현학적인 말로 계속 약올려 대는데, 거의 동일한 캐릭터인 엘러리 퀸도 그렇지만 모든 지능이 높아 모르는 게 없고 세상 못하는 것도 없는 천재들이 그렇듯 때로는 얄밉기도 하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보게. 나는 늘 데카르트의 자연주의적 철학에 마음이 끌린다네. 그것은 보편적인 회의에서 출발하여 자의식 속에서 실증적 지식을 추구하고 있지. 스피노자는 범신론에서, 버클리는 유심론에서 모두 그 선구자가 자신있어 하던 생략론법(연역소거법)의 의의를 크게 오해하고 있네. 데카르트는 그런 오류에서도 광채를 내뿜고 있지. 그의 추리법은 과학적으로는 아주 부정확하지만 분석학자의 신조에 새로운 의의를 주었다네. 정신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수학적 정확성과 천문학적인 순수 사색을 함께 갖추어야 하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소용돌이설은..."
- [벤슨살인사건], 반 다인, 1926.

"자네는 언제나 성급하군. 어째서 한꺼번에 뛰고 달리려는 거지? 온 세계의 훌륭한 철인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타이르고 있잖은가? 세자르는 Festina Iente(급하면 돌아가라)라고 했지. 아니, 루프스(신성로마제국 오토2세)가 말했듯이 Festinatio tarda est(서두르면 늦어진다)가 더 좋을지 모르겠군. 그리고 코란은 아주 간단한 말로 서두르는 것은 악마가 하는 짓이라고 했으며, 셰익스피어는 늘 스피드를 경멸했었지. '늦지 않으려고 너무 서두르면 막상 유사시에는 맥을 못 추고 만다'(리처드3세)라고 했네. '명심하고 천천히 가라. 빨리 가는 사람은 걸려 넘어진다'(로미오와 줄리엣)고도 말했지."
- [카나리아살인사건], <네 가지 가능성>, 반 다인, 1927.


'사회정의 구현'에 관심 없으니, 번스는 첫 사건인 월스트리트의 사기꾼 주식중개인 벤슨이 살해된 [벤슨살인사건]에서는 매컴 검사와 히스 부장이 범인을 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돕지만, 유명 여배우가 살해당한 [카나리아살인사건]과 온갖 이집트 역사와 유물 이야기로 도배하는 [딱정벌레살인사건] 같은 케이스(Muder case)에서는 교활하고 용의주도한 범죄자가 법정 외에서 스스로 또는 타인에 의해 단죄당하도록 둔다.
이 방식은 또한 엘러리 퀸이 바너비 로스 필명으로 내세운 탐정 드루리 레인이 [Y의 비극] 같은 사건에서 채용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이 세속의 '법적 정의'를 경시하는 작가 반 다인과 탐정 파일로 번스가 판단하는 진정한 '정의의 복수'인 듯이 말이다.


"매컴, 나는 고대 이집트 신들이 솔론이나 유스티니아누스나 다른 모든 법률 편찬자를 한데 묶은 것보다 더 현명했다고 생각하네. 하니는 사크메트의 복수에 대해 사뭇 능청을 떨었지만, 요컨대 저 태양의 테를 머리에 두른 여신은 자네들의 어리석은 '법률' 못지않은 효력을 가지고 있지. 신화에 담긴 사상은 난센스지만, 현대 '법률'의 어리석음 이상으로 난센스인지 어떤지...
...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 발굴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박사는 모든 사실을 자백할지도 모르네. 그는 약삭빠른 이기주의자일세. 빠져나갈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진상을 털어놓고 자신의 우수한 두뇌를 과시할지도 모르네. 그리고 매컴, 저 늙은 여우를 사형집행인 앞으로 끌고 갈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살하게 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자네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네."
- [딱정벌레 살인사건], <아누비스의 심판>, 반 다인, 1930.


아들을 국가에 바친 허전함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던 요즘,
출퇴근 시간 전철 안에서 천천히 읽느라 더디고 재미는 좀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좀 아쉽다.
내친 김에 다시금 책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라도 마을 도서관을 뒤져서 반 다인을 좀더 만나봐야겠다.

[그린살인사건](1928)과,
[비숍살인사건](1929)으로.

일련의 '살인사건'을 둘러싼 주변 용의자들의 베일에 싸인 복잡한 알리바이들의 고요한 신비의 안개 속에서 나는,
번뜩이는 반 다인과 번스의 심리분석 위주의 '연역소거법' 추리를 조금 더 쫓아가 보기로 한다.

반 다인 최고의 베스트셀러 [그린살인사건]은 도서관에도 없고 알라딘 서점에서도 품절이니 중고서적을 주문하여 반 다인의 대표작으로 한 권 소장하기로 하고,
그의 네번째 작품 [비숍살인사건]은 마을 도서관에서 찾아 바로 대출하여 다음 책으로 우선 읽는 것으로.

내가 그토록 좋아해 마지 않는,
'엘러리 퀸'의 '이전(以前)'으로 거슬러 올라서 말이다.


"기억하게나, 매컴. 자네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이번 범죄에 대한 구상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진행시켜야 하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네가 힘차게 쌓아올리는 고층 누각은 모두 자네 머리 위로 무너지고 말걸세."
- [카나리아 살인사건], <번스, 이론을 펴다>, 반 다인, 1927.

***

1. [벤슨살인사건(The Benson Murder Case)](1926), S.S. Van Dine, 정광섭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카나리아살인사건(The Canary Murder Case)](1927), S.S. Van Dine, 안동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딱정벌레살인사건(The Scarab Murder Case)](1930), S.S. Van Dine, 신상웅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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