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승전기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 지음, 이주연 옮김 / 사계절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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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힙키란'의 전설이 된 '티무르'
- [티무르 승전기], 샤라프 야즈디, 1424.


"'사힙키란(티무르)'은 그간 여러 왕과 하킴의 갈등과 반목, 노상 강도와 악당들의 선동으로 인해 혼돈에 빠진 이 세계를 바꾸고 치료하기 위해 여러 왕국을 정복했다. 이에 세계가 평안과 안정의 상태에 접어들어 동서간의 왕래가 편안하고 안전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해를 입고 흩어졌다. 이에 그는 이교도의 땅인 중국으로 가서 불교 사찰과 조로아스터교 성전을 모스크로 대체하면 죄악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 [티무르 승전기], <에필로그: 중국 정벌의 꿈과 사후의 혼란>, 샤라프 야즈디, 1424.


1404년 '라마단월 14일 수요일(3월 26일), '세계정복자'인 '사힙키란(Sahib-Qiran)' 티무르(Timur:1336~1405)가 동방의 중국 명(明)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서방의 이란 '7년 원정'을 마무리하고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출발했을 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칭기스 칸 사후 12~14세기 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던 몽골 제국은 북쪽의 '주치울루스(킵차크-칸국)', 남서쪽의 '훌레구울루스(일-칸국)', 동쪽의 '원나라(오고타이-칸국)', 그리고 중앙의 '차카타이울루스(차카타이-칸국)'로 크게 분열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울루스 키시에서 1336년에 태어난 티무르는 당시의 수많은 이슬람 장군 '아미르' 중 하나였지만, 1370년 34세에 차카타이울루스 일대를 장악하고 통일했다.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한 티무르 왕은 주변 영토를 공략하는 단기 정복 전쟁(1370~1386) 이후 서방의 이라크 바그다드와 이란(페르시아) 지역으로 '3년 원정(1386~1388)'과 '5년 원정(1392~1396)'을 수행하고, 칭기스 칸도 건너지 못했던 북인도 인더스 강을 건너 델리를 장악했으며, 그의 마지막 장기 원정인 이란 '7년 원정(1399~1405)' 이후 동쪽의 중국 명나라 영락제와 일전을 치르기 직전 사망한다.

'7년 원정' 기간에 '앙카라 전투'에서 '유럽의 적'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 1세를 포로로 잡은 티무르는 유럽인(프랑크)들에게 칭기스 칸의 뒤를 잇는 동방에서 온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된다. 페르시아어 기록에는 없어 실제로 절름발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투 중 숱하게 부상을 입었던 듯한 티무르는 유럽인에게 '절름발이 티무르(Tamerlane)'로 더욱 기이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단다. 

오랜 시간이 지난 20세기, '강철(Steel)'을 뜻하는 가명의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Stalin)'이, 역시 '세계정복자'를 꿈꾸었는지, 5백년 전에 죽은 '티무르'의 무덤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고 전해진다. 결국 스탈린이 티무르의 무덤을 파내어 그의 시신을 보고 말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칭기스 칸은 물론 알렉산더와 예수 못지 않게 강력한 '세계정복자' 중 하나로 꼽히는 '티무르'라는 이름 역시 '강철'을 의미한다.

실제로 티무르 제국은 몽골 제국의 뒤를 잇는 아시아의 거대 제국을 표방하며 14~15세기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역할을 했고,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의 사신들은 실제로는 교역을 하는 상인들이었는데, 티무르의 정복 후 각국에 보낸 편지들은 '교역의 자유'를 강요하는 내용 일색이었다고 한다. '키타이(거란)'로 부르던 중국 명나라 정벌도 사실은 '이교도 정벌'이 아니라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1328~1398)이 중국 서쪽에서 교역하던 '회회족(무슬림)'을 박해했기 때문에 결의한 것이었다.

역시, 
역사에서 모든 정치 행위의 토대는 경제 관계다.


"당시 티무르가 정복한 최대 영역은, 동쪽으로는 현 중국 신장 카리호자와 이르티시강 유역,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서단의 이즈미르, 북쪽으로는 모스크바와 키예프, 남쪽으로는 북인도 델리에 이른다. 놀라운 것은 이 광대한 영역이 티무르 생전에 전부 정복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광대한 영역을 차지한 후, 티무르는 여러 지식인에게 명을 내려 자신의 공적을 담은 사서(史書)를 저술하게 했다. 그의 후손들도 국가의 시조인 티무르의 '승전(勝戰)'을 담은 사서 저술을 후원했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의 [승전기(勝戰記/Zafar-nama)]이다."
- [티무르 승전기], <해제: 쿠레겐과 사힙키란, 티무르의 두 칭호>, 이주연, 2025.


서아시아(페르시아) 이슬람사를 전공한 학자 이주연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이 티무르의 일생을 담은 [승전기]에 관한 연구였다는데, 이 책은 티무르의 손자 이브라힘 술탄의 명을 받아 티무르 왕조의 정당성을 기록한 어용 역사서로서, 15세기 이란 중서부 '야즈드' 출신의 학자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in Ali Yazdi)가 저술한 [티무르 승전기](1424)였다.

이주연 선생은 야즈디의 [승전기]를 대중적으로 편역한 [티무르 승전기](<사계절>, 2025)의 <해제>를 통해, 14세기 '세계정복자'로서의 '사힙키란' 티무르와 그의 일생에 걸친 '정복기'로서 15세기 샤라프 야즈디의 [승전기]의 사료적 가치를 설명해 준다.

이에 의하면, 티무르는 수십년 간의 정복 과정에서 약 1,700만 명을 살육함으로써 칭기스 칸 못지 않게 잔혹한 정벌을 했지만, 칭기스 칸처럼 미리 알아서 항복한 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학문과 예술 등 문화 발전을 지지했다. 

'역사학'을 사회과학적으로서 처음으로 다루었다는 [무깟디마(역사서설)]의 저자인 저명한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할둔을 한 번 불러 독대하기도 했다는 티무르는 예언가 학자 '사이드(sayyid)'인 베케르를 평생 존경했고 '키탑하나'라는 '도서관'에 지식인들을 모아 역사 저술을 장려했단다. 
그의 원정을 따라다닌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실록'을 기록한 '1차 사료'를 남겼고, 티무르 당대의 '2차 사료'로서 집단적 편집발췌를 거친 니잠 앗딘 샤미의 [승전기](1402)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티무르 왕조의 역사서라고 한다.

샤라프 야즈디의 [승전기](1424)는 티무르 사후 그의 손자인 이브라힘 술탄의 지시로, 전술한 샤미의 [승전기](1402)를 저본으로 삼아 더욱 구체적으로 보완한 '3차 사료'에 해당한다. 

야즈디는 본인이 저술한 이 [티무르 승전기]를 선대 역사가 이븐 할둔을 따라 '무깟디마(서론)'로 일컫는데, 티무르의 후계자인 넷째 아들 샤루흐의 '승전기'와 그의 아들 이브라힘 술탄의 '승전기'를 각 '2권'과 '3권'으로 이어서 저술했다고 한다. 
'2권'은 사본 하나가 남았고, '3권'은 야즈디 [승전기]의 러시아 연구자 바실리 바르톨트가 읽었다는 기록만이 남았다.


"행정체계를 갖지 못한 아랍계 무슬림 지배자 정권에서 페르시아의 체계적 행정 시스템을 무기로 독보적 지위를 유지한 페르시아의 서기 계층과, 독자적 기록체계가 없던 몽골인들을 대상으로 위구르 문자 및 행정능력을 이용하여 각종 실무를 담당했던 위구르 서기 계층, 아시아의 동과 서에서 '식자(識者:Men of Letter/Ahl-i Kalam)'이자 문인(文人)이던 이들이 티무르 제국이라는 국가 안에 공존하며 역사기록을 담당한 것이다."
- [티무르 승전기], <해제: 야즈디 [승전기]의 사료적 가치 재고>, 이주연, 2025.


칭기스 칸의 몽골 제국은 독자적 기록체계가 없었는데 중국 서부의 신장 지역 위구르인들이 몽골 제국의 지식인 역할을 했다. 한편, 이슬람 '성전(聖戰)'을 앞세운 무슬림 군벌(아미르)들 또한 독립적 행정체계가 부족하여 오랜 문명 전통을 가진 페르시아인들이 무슬림 정권의 지식인 역할을 했다. 
이란 중서부 '야즈드(Yazd)' 출신의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Yazdi)' 또한 페르시아 출신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슬람 스승들로부터 천문학과 수비술(숫자신비술), 문자학(기호신비학), 메시아니즘(구세주주의) 등의 당대 신비주의 '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이슬람 신의 가호를 입은 티무르의 '세계정복'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과연 [승전기] 속 티무르는 신의 힘으로 연전연승을 거듭하는 천하무적의 신장(神將)이다.


"티무르가 스스로를 '몽골제국의 부마'를 의미하는 '쿠레겐'이라 칭한 것도, 유럽인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몽골 제국에 대한 인상을 이용한 전략이라 볼 수 있다...
티무르가 군주적 정통성(사서)을 선전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은, 반대로 이전 군주들이 내세운 정통성의 근거를 통해서는 적법한 군주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반증한다. 티무르조가 성립된 14세기 후반은 '칼리프가 임명한 군주'라는 이슬람적 정통성이나, '황금씨족의 후손'이라는 몽골 제국의 정통성이 모두 쇠퇴하는 시점이다. 바로 이때 칭기스 일족도 아니고, 칼리프에게 승인받을 수도 없던 티무르가 내세운 새로운 유형의 정통성이 곧 '사힙키란(Sahib-Qiran:세계정복자)'이다."
- [티무르 승전기], <해제: 쿠레겐과 사힙키란, 티무르의 두 칭호>, 이주연, 2025.


그렇게 티무르는 야즈디의 [승전기] 내내 '사힙키란(Sahib-Qiran)'으로 불린다.

본래 고대로부터 이슬람 군주들이 표방해 왔다는 '사힙키란'은 신비주의 천문학인 점성술에 따라 목성과 토성이 합쳐지는 날에 태어난 최적 '합(合:Qiran)'의 군주를 의미하는데, '사힙키란'은 '세계정복자'의 이슬람적 보통명사였지만 야즈디의 [승전기]에 의해 '세계정복자' 티무르 왕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차카타이울루스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영역을 급속도로 넓힌 티무르 초기에는 예전 몽골 제국의 후광이 필요했기에, 초기의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앞에 내세우고 본인은 이 '황금씨족'의 '부마(쿠레겐:외척)'가 되어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몽골 세계제국의 전 영역을 장악한 후 티무르는 더 이상 '쿠레겐(부마)'이 아닌 '세계정복자'로서 '사힙키란'이 되어 티무르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사힙키란'으로 본인을 저술하게 하는 역사서술을 통해 비로소 티무르 왕은 칭기스 칸의 현신이 되는 '사힙키란(세계정복자)'의 전설을 시작한다.

샤라프 야즈디의 [티무르 전승기](1424)가 그린 새계정복자 '사힙키란'으로서의 티무르의 특성을 이주연 선생은 <해제>의 두번째 장 '야즈디가 그린 사힙키란 티무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승전기]의 주내용인 티무르의 광대한 영토 정복 사실
2) 천문학과 점성술, 수비학과 문자학, 메시아니즘 등의 당대 신비주의 '과학'적 증거
3) '정의로운 군주상'에 부합하는 이슬람 율법에 의한 징세와 공정한 판결의 정치

150여 년 티무르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고자 했던 야즈디 [승전기]의 궁극적인 저술 목적이기도 했다.

샤라프 야즈디의 [티무르 승전기](무깟디마)를 읽고난 지금,
이븐 할둔의 '무깟디마'적 역사서술 방법 이전의 몽골 제국의 연대기적 역사서술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2025년도의 아마도 마지막 책인 [티무르 승전기]는 '수비학'에 따라 티무르의 재위기간이자 자손의 숫자인 '36'처럼 올해 '36'번째 책으로서 마무리하고,
2026년의 새해 벽두는 13~14세기 몽골 제국의 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id al-Din:?~1319)의 [집사(集史)]로 시작하고자 한다.

***

1. [티무르 승전기(자파르나마/Zafar-nama)](1424),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in Ali Yazdi), 이주연 편역, <사계절>, 2025.
2. [몽골제국 연대기(집사/集史)](1317), 라시드 앗딘(Rashid al-Din), 김호동 편역, <사계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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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읽는 그림 - 수천 년 세계사를 담은 기록의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블랙피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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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시간'
- [시간을 읽는 그림], 김선지, 2025.


"버팔로는 거의 멸종되었다... 
버팔로 사냥이 끝나자, 사람들은 곧 아프리카의 상아, 남태평양의 해양 자원, 남극의 고래로 손을 뻗었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숲은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사라졌고, 전통문화는 관광 자원으로 가공되었으며, 지역의 자원과 노동은 글로벌 시장에 흡수되었다. 우리는 지금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의 상실, 생태계 붕괴라는 전 지구적 위기 속에 살고 있다. 그 뿌리 깊은 위기의 출발점에는 19세기 세계화가 보여 준 무분별한 자연 소비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버팔로 사냥은 그 파괴적 흐름을 예고한 첫 경고장이었다."
- [시간을 읽는 그림], <6-1. 세계화의 희생양, 버팔로와 북미 원주민 : 미국 서부 개척 신화의 진실>, 김선지, 2025.


19세기 말 미국의 철도와 전신이 아메리카 전역을 연결하기 시작했고, 철도 자본이 한 때 돈벌이로 개시한 '철도 사파리'는 당시까지 수천만 마리에 달하던 버팔로를 사냥하는 관광 상품이었다. 기차를 탄 백인들이 미국 서부를 달리며 버팔로 떼에 총을 쏴서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이었다. 토착 원주민 인디언들도 버팔로를 사냥하며 살았지만 그들은 버팔로를 숭배하면서 꼭 필요한 만큼만 잡아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생필품을 만들었다. 원주민과 버팔로는 공존했다. 그러나 '철도 사파리'를 탄 정복자 백인들은 버팔로를 재미로 살육하면서 단시간 만에 거의 멸종시켰다. 

18세기 유럽의 자본주의는 석탄 산업을 시작하기는 했으되 아직은 주로 인간의 노동 착취를 통해 산업을 발전시켰고, 
19세기 미국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지구와 자연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버팔로 멸종은 그 상징적 시작이었다. 

'성장'과 '퇴보'를 동시에 보여주는,
현대 자본주의의 두 얼굴이다.


"우리는 두 개의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관점이다. 이 시선은 왕조의 교체, 전쟁과 조약, 혁명과 제국의 부침 같은 거대한 사건들에 집중한다.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정치, 사회, 경제의 큰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조감도와 같다... 
그러나 그 거대한 강물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물방울이 있다.... 곤충의 눈으로 들여다본 세계는 왕조의 역사 대신 보통 사람들의 삶과 일상, 대제국의 흥망성쇠 대신 마을 축제와 박람회 풍경,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 대신 그것으로 고통받는 시민들의 생존과 먹거리 같은 것들로 채워진다. 곤충의 관점은 작은 것 속에 담긴 삶을 포착하며, 미시적인 관점을 통해 인간 역사의 내밀한 얼굴을 드러낸다."
- [시간을 읽는 그림], <시작하며 :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의 풍경>, 김선지, 2025.


[그림 속 천문학](2020)과 [그림 속 별자리 신화](2021), [뜻밖의 미술관](2023)과 [사유하는 미술관](2024)의 작가 김선지 선생은 '그림', 즉 명화들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작가다. 대학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작가는 전공을 잘 살려 '그림'으로 '역사' 이야기를 쓴다.

나 또한 모든 것이 '역사책'이라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그 중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가 '미술사'라고 생각하기에,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만난 김선지 선생의 글이 반갑기 그지 없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마치 '미술사'라는 같은 '놀이터'에서 만난 소꿉친구를 대하는 듯, 그녀의 책이 나오면 꼭 읽게 된다.

2025년에 [시간을 읽는 그림]을 들고 다시 '미술사'의 놀이터로 찾아온 김선지 선생은 여전하다. 
변함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일직선의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나열이 아닌 인류의 역사 이면에 존재하는 양면성과 이중성을 일관되게 서술한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믿음으로 다수 민중편향의 역사관을 지닌 나와는 조금 결이 다르겠지만, 김선지 선생은 어렵고 난해한 글이 아니라 출퇴근 전철 안에서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친밀한 글로 균형 잡힌 역사관을 서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와 나는 '소외'된 사람들 또는 주류 역사의 이면에 가려지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미술사'의 놀이터에서 만나 왔다. 
'미술사'를 매개로 '별자리'([그림 속 천문학])를 올려다 볼 때나, 
'그리스 신화'([그림 속 별자리 신화]) 속에 들어갈 때도, 
'미술관'([뜻밖의 미술관] / [사유하는 미술관])을 돌아다닐 때도, 
공간은 달랐지만, 역사의 '모순'과 '이중성'을 일관되고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주고 설명해 주었던 거다.

김선지 작가의 신간 [시간을 읽는 그림](2025)도 역시 그런 역사관의 연속이다. 

<1장>에서는 고대 역사 이야기, 
<2장>은 중세의 동서양과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 말리제국까지, 
<3장>의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 
<4장>의 근대 '혁명'과 계몽주의, 그러나 여전한 문명의 '야만성'
<5장> 현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지나, 
마지막 <6장>에서는 양차 세계대전과 '맥도날드'식 효율화 자본주의 문명을 담은 명화와 각종 그림, 사진, 만화, 기사 등의 시각예술적 기록들을 통해 인류의 세계사적 사건들을 선별하여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역사 교과서처럼 시간의 모든 흐름을 다룰 필요는 없다. 각 시기별 특별한 미시적 사건들을 담아낸 '그림'들을 매개로 인류 역사라는 '시간'의 보편성을 설명할 수 있으면 된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라는 모든 '시간' 속에 흐르고 있는 '일반 법칙' 같은 무언가를 간파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한편으로, '미술사'라는 '놀이터'에서 가끔 만나 놀던 김선지 작가가 한 뼘 더 커서 어느덧 이 해 지는 '놀이터'를 떠날 시간이 와 버린 건 아닐까 싶다. 

역사의 '시간'을 통해 미술사의 '그림'을 이야기하던 '놀이터'의 '작은 아이'에서 어느덧,
미술사를 넘어 '그림'을 통해 인류 역사의 거대한 '시간'을 이야기하는 '어른'이 되어,
'미술사'라는 '놀이터'를 떠나게 되는 그런 시간.

그래서 '미술사'라는 해 저무는 석양의 '놀이터'에 홀로 남겨진 듯한 독자로서 나는 김선지 작가의 신간 [시간을 읽는 그림]이라는 제목을 이렇게 허락없이 뒤집어 읽어 본다.

'그림'으로 읽는 '시간'이라고.

역사의 '시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조용히 혹은 격동적으로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영원할 것이다.

'그림'은 유한할 수 있으나,
'시간'은 이렇게도 무한한 것처럼.

역사 이야기 작가 김선지 선생의 '시간'이 무한하기를 기대해 본다.

***

1. [시간을 읽는 그림], 김선지, <블랙피쉬>, 2025.
2. [그림 속 천문학], 김선지/김현구, <아날로그>, 2020.
3. [그림 속 별자리 신화], 김선지, <아날로그>, 2021.
4. [뜻밖의 미술관], 김선지, <다산북스>, 2023.
5. [사유하는 미술관], 김선지, <알에이치코리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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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눈앞의 현실 - 엇갈리고 교차하는 인간의 욕망과 배반에 대하여
탕누어 지음, 김영문 옮김 / 378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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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전(左傳)]의 '안전(眼前)'
- [역사, 눈앞의 현실], 탕누어/김영문, 2016.


"... 모든 사람의 시선이 각각 한 줄기, '도(道)의 빛'... 춘추시대 사람들의 '눈앞(眼前)', [좌전(左傳)] 저자의 '눈앞', 나의 '눈앞'에서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기를... 사방으로 종횡하는 직선이 서로 교차할 수 있기를...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하나의 고귀한 교차지점을 보고 자신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또한 가장 가본적이고 가장 간단한 '위치측정' 방식이다."
- [역사, 눈앞의 현실], <서문>, 탕누어, 2016.


중국의 춘추시대는 기원전 8세기 주나라의 분봉국들이 각자 수세대 세습을 하는 과정에서 독립국이 되어 중국 전체가 열국(列國)의 쟁패장이 되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기원전 6세기(노양공 27년), 춘추시대 송나라의 주선으로 북방의 전통강국 진(晉)나라와 남방의 신흥강국 초(楚)나라가 각자의 종속국(송/노/정/채/위 등)을 거느리고 맺었던 거대한 '정전( 평화)협정'인 '미병지회(弭兵之會)'는 동방의 제(齊)나라와 서방의 진(秦)나라 등의 대국들을 아우르면서 이후 전국시대 7대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미병지회 후 1세기가 지나면서 진(晉)나라가 한/위/조씨 가문의 삼국으로 분열하고 동북방 끝 연나라까지 가세하면 '진/초/제/연/한/위/조'의 '전국칠웅'이 된다.

공자가 주로 활동한 노나라는 춘추시대 소국이었지만 중국 문명의 기초를 놓은 주공 단의 후예국이라 당대의 '문화국'이자 '도서관'과도 같았다.

이에 공자는 노나라 약 2백년의 역사를 [춘추]라는 역사책으로 죽간에 기록했다.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고,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닌 '대의'를 품은 사건을 발췌편집하고 강조한 '춘추필법' 또한 공자의 [춘추]로부터 시작되었다.

공자의 역사책, [춘추]에 주석을 달고 해설한 또 하나의 역사책이 [좌전(左傳)] 또는 [춘추좌씨전]이다.


"[좌전(左傳)]은 세월의 '뱃전에 새긴(刻舟)' [춘추(春秋)]의 흔적을 하나하나 해체하여 시간 순서와 구체적인 디테일과 인간의 이야기를 복원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의 서술을 회복한 책이다."
- [역사, 눈앞의 현실], <8장. 뱃전에 새긴 흔적>, 탕누어, 2016.


[좌전]의 저자는 공자와 동시대인이자 노나라의 관방 역사가 좌구명이었다고 전해지나 사실 정확하지는 않다. 노나라의 사관인 '좌(左)'씨 집안 전체가 저자일 수도 있는 것이, 우선 노나라의 어용역사책 '좌구명춘추'가 있었고, 한편으로 이를 발췌편집한 민간역사책 '공자춘추'가 있었으며, 이 텍스트를 '좌씨' 집안에서 계속 수정보완한 역사책이 '좌씨춘추전' 즉 [좌전]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제 진정한 [좌전]의 저자가 존재했던 가장 적절한 시점을 말해야 한다. 공자 사후에 11년만 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좌전]의 저자는 진(晉)나라의 한씨, 조씨, 위씨가 지씨를 멸망시키는 걸 분명하게 목격했고, 춘추시대를 지탱한 진(晉)나라의 멸망도 예언에 그치지 않았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즉, 진정으로 춘추라는 시대의 종말이 닥치자 그는 이 역사의 단애 끝에 서서 그 시대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추억하기도 했다."
- [역사, 눈앞의 현실], <2장. 저자를 상상하다>, 탕누어, 2016.


대만의 문화기획자이며 전문 독서가이자 서평가인 탕누어(唐諾:1958~)는 [좌전]을 읽고 꽤 긴 서평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춘추시대의 소국 노나라의 200여 년 역사를 배경으로 한 [춘추]와 [좌전]은 소국의 역사서이니 만큼 역시 또 하나의 소국 정나라의 현실정치가인 자산을 자주 등장시켰다는데, 이는 중국권의 소국인 대만의 인문학자 탕누어의 역사관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탕누어의 역사관이란,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는 대국이 아니라 변방인 소국에서 나온다는 관점이다. 
당대 현실 사람들의 '눈앞'에서는 '중심'이 현실을 이끌지만, 역사의 '눈'으로 본 기록에서는 다양한 변방의 '눈앞'과 시선이 교차하고 겹치면서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다.

탕누어의 [좌전] 해설서 또는 긴 서평책의 원 제목이 [안전(眼前)](2016), 즉 '눈앞'이다. 모든 사람들의 '안전', 즉 '눈앞의 현실'들이 교차하고 겹치면서 의미있는 역사책이 된다는 의미라는데, 우리 말로는 좀 생경하다. 그래서 번역자인 인문학자 김영문 선생님의 국역본 제목은 [역사, 눈앞의 현실](2018)이 되었다. 

나는 [좌전]을 직접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좌전]을 많이 참고했다는 사마천의 기전체 역사서 [사기(史記)]를 최고의 역사책으로 생각하는 독자로서의 나는, 국역본 제목에 [좌전]을 넣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옮긴이 김영문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탕누어의 [안전]의 부제목이 <좌전을 읽다(讀左傳)>라고 하니, 우리말 번역본에도 [좌전]을 명시하였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탕누어의 [안전]을 읽은 나의 서평 제목이라도 '좌전(左傳)의 안전(眼前)'으로 지어본다. 즉, [좌전]의 저자와 등장인물들의 집단적 '눈앞(眼前)'들이 만들어낸 역사에 관한 의견이다.


"춘추시대 '의전(義戰)'은 없었다(춘추무의전/春秋無義戰)."
- [역사, 눈앞의 현실], <6장. 아주 황당한 전쟁>, 탕누어, 2016.


춘추시대는 주나라 천자의 호위를 자처하는 강대국의 '맹주(패자)'가 여기저기 나대고 있는 타국과 소국을 혼내주는 것이 곧 전쟁이었다. 제나라 환공부터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등의 '춘추5패'는 바로 돌아가며 열국들을 소집시킨 이 '맹주'들을 이른다. 
춘추시대 전쟁은 자원약탈의 본심은 여전했으나 상대방을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한/위씨가 진(晉)나라의 지씨를 몰락시키고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멸망시켜버린 이후의 전국시대 전쟁은 대의명분은 뒷전이고 상대방이 죽어야 내가 사는 세상이 되었다. 탕누어에 의하면 전국시대는 이런 '전쟁'의 시대 이전에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인간의 변화된 문화의 산물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의전(義戰)', 즉 '정의로운 전쟁'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있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탕누어는 "춘추시대 '의전(義戰)'은 없었다(春秋無義戰)"고 단언하지만, 상대적으로 전국시대 이후 지금껏 끊이지 않고 있는 인류의 대규모 살상에 비하면 춘추시대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義戰)'의 '이상'이 그나마 남아있었다고 말한다(이상 [안전], <6장>).

이는 춘추시대 전쟁의 실상을 많이 기록하고 묘사한다는 [좌전]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이기도 하겠다. 당장의 현실인 '눈앞(眼前)'에서는 '원한'과 복수', '살상'의 현실이지만, 다수의 '눈앞'이 집단적으로 교차하는 '대의(大義)'의 관점에서는 '정의로운 전쟁'의 '이상'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런 '춘추필법'은 바로 공자의 역사기록 취지이기도 했다.


"문자는... 어떤 완전한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뱃전에 새긴(刻舟) 흔적'일 뿐이다. 그러나 문자는 '시간'에 의해 흘러가고 죽음에 의해 중지되는 기억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특수한 능력으로 마침내 인간의 기억과 언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처럼 천천히 완성되어가고 항거할 수 없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춘추시대 조금 뒤의 시기는 바로 역사의 기록이 분명하게 눈에 띄게 늘어나는 시대, 즉 기록의 폭발이라고 형용할 만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 시작 지점이 '공자' 문하에서 비롯되었다는 합리적인 믿음이 내게는 있다."
- [역사, 눈앞의 현실], <8장. 뱃전에 새긴 흔적>, 탕누어, 2016.


강에 빠뜨린 보검을 돌아오는 길에 찾고자 배의 앞머리에 물높이를 새겨 두었다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가 있다. 
탕누어는 [안전]의 결론인 <8장>의 제목으로 '뱃전에 새긴 흔적'을 삼았다.

'각주구검'의 고사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풍자였지만, 탕누어를 따라 결국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당장의 '눈앞(眼前)' 현실을 '뱃머리에 새겨(刻舟)' 왔고 또 부단하게 새기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의 가록은 '각주구검'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시간'이라는 물결은 어제 우리가 보검을 잃어버린 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데, 지나간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 동일할 수 없겠지만, 역사를 통과하는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자로 '뱃전에 새기는' 것이 아직은 최선이다. 

우리의 인문학자 유시민 선생은 '역사의 역사'를 '역사기록의 역사(History of Writting history)'로 보기도 했다. 
사실들은 '시간'의 강물을 따라 무심히 지나가고,
우리에게는 문자로 '뱃전에 새긴' 기록이 남는다.

그러다 보면 누가 알겠는가.
혹시나 잊었거나 잃었던 '보검'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에릭 홉스봄이 찾고자 했다던 '역사의 일반법칙'(같은책, <8장>)은 고대 중국 공자의 [춘추]와 지금은 원전으로 전하지는 않는다는 이 [춘추]를 지속 수정보완하면서 책으로 전해져 왔다는 [좌전]이 인간사 '눈앞(眼前)'의 관찰과 '뱃전에 새긴' 문자 기록을 통해 이미 수행하기 시작한 것 아닐는지.

***

1. [역사, 눈앞의 현실 / 안전(眼前): 만유재 '좌전'적 세계(漫遊在 '左傳'的 世界](2016), 탕누어(唐諾), 김영문 옮김, <흐름출판>, 2018.
2. [창시자(奠基者;전기자) - 이중톈 중국사 3](2013), 이중톈(易中天),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4.
3. [역사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돌베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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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의 역사 -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그릇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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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냉면주의자'로의 귀환
- [냉면의 역사], 강명관, 2025.


"어떤 국수를 가리켜 '냉면'이라 하는가?"
- [냉면의 역사], <1장>, 강명관, 2025.


누군가 내게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며 뭘 먹고 싶은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1초만에 '횟집'을 가자고 말할 것이다. 사시사철 언제 물어도 똑같다.

또한 점심에 뭘 먹겠느냐 묻는다면,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단연 '냉면'이다. 역시 언제든 그렇다.

모두, 나의 취향이자 나의 '이념'과도 같은,
'차가운 음식'이다.

한반도 북쪽에서 오래전부터 먹어왔을 '냉면(冷麵)'은 말 그대로 차가운 국수인데, 우리의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냉면'은 고려말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시에 나오는 '괴엽냉도(槐葉冷淘)'가 최초일 것으로 추정된단다. 실제로는 더 오래 되었겠으나,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고려말에도 이미 '냉면'을 먹었다는 거다.


"... 국수와 동치밋국... 이것이 '냉면'의 핵심요소다... '냉면'은 국수틀을 눌러 뽑아만든 메밀국수를 동치밋국에 말고 김치(무와 배추)를 얹고, 거기에 돼지고기 편육을 올려서 만든 차가운 국수다."
- [냉면의 역사], <1장. 냉면이란 무엇인가>, 강명관, 2025.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명예교수는 냉면을 좋아하여 스스로를 '냉면주의자'로 자칭하다가 2025년 [냉면의 역사]로 책을 엮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냉면'에 대한 '썰'을 풀어내는 게 아니다. 15세기 세종 연간의 [산가요록]과 16세기 이문건의 [묵재일기], 17~18세기 [음식디미방]이나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의 고문헌을 근거로 설명하는 '냉면'에 관한 '역사책'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 같은 식민지 시대의 근대적 기술서와 신문, 잡지 등의 언론기사 역시 주요 근거자료가 된다. 
역사학의 1차 사료는 역시 '문헌' 자료다.

중종과 인종 대 중앙 관료를 역임하다가 을사사화를 겪으며 귀양살던 이문건의 [묵재일기]에서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1558년 4월 20일의 일기에서 이문건이 쓴 "낮잠을 자다 깨어 곧 '냉면'을 먹었더니 발바닥이 차가워졌다"는 문장이 그 출처다.

신라 진흥왕 대에 '차가운 국수'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출처 불문의 전설에 불과하고 고려시대 이색이 먹은 '괴엽냉도'와 조선 중기 이문건이 자다 일어나 먹었다는 '냉면' 또한 차가운 국수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나 과연 어떤 형태의 국수였는지 알 수 없다. 이후 [음식디미방] 등의 한글 조리서는 '세면'과 '창면'의 이름으로 신맛을 내는 오미자 국물에 말아먹는 '냉면'을 추정케 하는데, 이후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냉면'이란 국수틀로 뽑은 '메밀국수(세면)'를 차가운 '동치밋국'에 만 형태로 확인된다.
걸레 빤 물 같고 심심한 물냉면이 평양냉면이고 '비빔국수'의 시조새인 골동면이 조상일 듯한 비빔국수는 함흥냉면이라는 구분은 현대 이후 정착한 형태에 불과하다. 

즉, 원래부터 평안도 중심으로 확산된 '냉면' 또는 '평양냉면'은 '메밀국수를 동치밋국에 말고 배추/무김치와 돼지고기 편육을 고명으로 올린 차가운 국수'를 이르는 말이었고, 당시 보통 '국수'라 하면 이러한 '냉면'을 이르는 보통명사였다.


"국수틀을 눌러 뽑은 메밀국수는 처음에는 간장으로 만든 국물에 말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유구가 말했듯 그것은 장물에 끓여서 내는 온면의 형태였을 것이다. '메밀국수+동치밋국=냉면'은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문헌에 출현한다."
- [냉면의 역사], <끝맺음>, 강명관, 2025.


부산경남의 밀면이나 해산물육수의 진주냉면, 강원도의 막국수, 대중적인 콩국수도 넓게 보면 모두 '냉면'이지만, 문헌상으로 추적되는 엄밀한 '냉면'의 정의와 분류에 의하면, 오로지 국수틀로 뽑아낸 '메밀국수'와 겨울의 '동치밋국', 동치미가 바닥난 여름에 끓여낸 소와 돼지 또는 닭과 꿩고기(생치) 육수인 '장국'이 결합해야 비로소 '냉면'이 된다.

학자인 강명관 교수의 책 [냉면의 역사]에서는 1차 사료인 문헌적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밀면이나 진주냉면, 막국수까지 '냉면'의 엄밀한 정의 밖의 영역이다.


"... 18세기 후반 국수가 팔리고 있었고 서울 시정에 국수를 파는 가게가 등장... 서울만이 아니다. 평안도의 경우 유득공의 <서경잡설>에 '냉면'이 팔리는 정황이 담겨 있어, 이 작품이 지어진 1773년에 이미 '냉면'이 상업화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냉면의 역사], <6장. 냉면의 확산 - 냉면의 상업화>, 강명관, 2025.


10~12세기 북송 시대 인구 100만 명의 '메트로시티' 개봉(카이펑) 중심가를 그린 <청명상하도>를 보면 당시 이미 시장에서 사먹던 외식의 주류는 '국수'였다. 물론 '냉면'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주로 뜨거운 '탕면'이었을 것이지만.

그러다가 중국을 다녀가는 조선 사신단이 한양에서 평양과 의주를 지나 만주를 통과하면서 지역 음식인 국수, 그 중에도 차가운 국수인 '냉면'을 접했을 테고, 사신단에 합류한 상인과 기술자들이 북방에서 본 국수틀을 한양까지 모방하여 들여왔을 게다. 조선 철종이 시켜먹은 '냉면'도 칼국수 같은 '절면'이 아닌 북방의 기술을 모방한 '메밀세면'을 겨울에는 '동치밋국'에, 여름에는 고기장국인 '육수'에, 또는 동치밋국과 고기장국을 섞은 육수에 말아먹던 국수였을 것이다.


"냉면값은 1925년 15전 내외에서 1943년 22전까지 올랐으니 그리 빠르게 인상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소설에 등장한 식민지시대의 급여를 정리한 논문에 의하면, 보통학교 교사가 40~60원, 중학교와 고등보통학교 교사가 60~70원, 기자가 60~80원, 은행원이 60~80원, 기수가 30~40원 정도였다고 한다. 1원은 100전이므로 15~20전 정도의 냉면가격은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 [냉면의 역사], <7장. 근대 이후,냉면의 시대 - 총독부, 가격과 양을 정하다>, 강명관, 2025.


나는 '라면'을 비롯한 모든 국수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역시 '냉면'이다. 회와 냉면 모두 차가운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회냉면 보다는 물냉면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냉면의 역사] <후기>에서 저자 강명관 교수는 20대에 물냉면 한 그릇을 '35초'만에 먹었단다. 
나 또한 즐기면서 먹고 싶어서 그런 거지 50대인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물냉면 한 그릇 쯤이야 1분 내로 다 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매주 토요일 처와 함께 걷는 서울과 경기 인근 나들이길에도 나는 늘 처에게 '냉면'을 먹자고 조른다. 그리고 차가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처는 싫다면서도 같이 냉면을 먹어준다. 나는 항상 물냉면 곱배기, 처는 비빔냉면 보통을 먹는데 처가 남기는 반 그릇도 전부 내 차지니 한 번 나가면 나는 물과 비빔 섞어 2인분을 먹게 된다. 한편, 맛은 어떨지 모르지만 라면과 김치볶음밥 외에 내가 집에서 해 먹는 음식 또한 역시 인스턴트이긴 해도 '냉면'이다. 

냉면을 서울과 평양 등지의 시장에서 팔던 시기는 18세기 중후반 부터라지만, 1895년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수도 서울과 개항지였던 인천 등지에서 냉면을 비롯한 음식점이 성행했다. 이유는 관공서와 현대적 기업의 등장, 전화와 자전거의 발전으로 사작된 배달문화를 통해 직장인과 상류층 가정집의 점심식사 해결의 수요 때문이기도 했다. 
차가운 육수 또는 돼지고기 고명의 부패로 인한 냉면 식중독의 위험은 식초를 쳐서 먹는 관행의 이유였지만, 식중독의 확률이 적어진 지금은 식초와 겨자가 오로지 풍미를 위한 향료가 되었다.
메밀을 반죽하고('반죽꾼'), 국수틀로 뽑아내고('발대꾼'), 찬물로 씻어 그릇에 담고('앞자리'), 육수와 고명으로 포장하고('고명꾼'), 자전거로 하루 19시간 동안 배달을 했던('배달인')-어느 진정한 배달의 달인은 믿거나 말거나 한 번에 80그릇을 나르기도 했다던- 냉면집(면옥)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 스스로의 처우개선를 위한 1920년대 면옥노동조합의 결성과 사용자측인 면옥조합과의 산별교섭 및 파업 등의 역사 또한 [냉면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이야기다. 
과연 '냉면'의 역사는 우리의 중요한 미시사 중 하나가 된다.


"1925년 1월 25일 냉면의 성지인 평양에서 최초의 노조가 만들어졌다... 면옥노동조합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임금인상이었다... 12개의 요구조건... 1) 임금인상(50전 이하는 10전, 50전 이상은 5전을 인상할 것-하후상박), 2) 노동시간은 어후 11시까지로 할 것, 3) 노동조합 회원 이외의 사람은 고용하지 말 것, 4) 해고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노동조합의 승낙을 받을 것 등..."
- [냉면의 역사], <7장. 근대 이후 냉면의 시대 - 면옥노동조합의 활동>, 강명관, 2025.


실제로는 점심메뉴에 대한 동료들과의 의견이 '냉면'으로 일치된 경우가 없어 나의 직장생활 중 점심에 '냉면'을 먹은 적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점심식사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냉면'은 내게 음식이란 이래야('차가워야') 한다는 모종의 '이념' 또는 '강령'과도 같다.

이 정도면 나도 '냉면주의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명관 교수의 [냉면의 역사](2025) 덕분에 나는 새삼 '냉면주의자'로 귀환한다.


"1945~1950년 서울의 냉면점들이 이렇게 평양냉면을 내세운 것은, 일제강점기 서울의 냉면이 이미 평양냉면화되어 있었음을 의미할 터이다. 이 냉면점들은 또 다동, 충무로, 광화문, 명동, 남대문, 관철동, 예지동, 낙원동, 을지로, 시청 앞, 종로 등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서울의 좁은 중심지대 안에 있었다."
- [냉면의 역사], <8장. 8.15 해방 이후의 냉면 - 각지의 냉면점>, 강명관, 2025.

***

1. [냉면(冷麵)의 역사 -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그릇], 강명관, <푸른역사>, 2025.
2.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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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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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실존적 보수(보존)주의' 혹은 '보수(보존)적 실존주의'
- [통섭(統攝/Consilience)], 에드워드 윌슨, 1998.


'통섭(統攝/consilience)' :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
- [통섭](1998), <옮긴이 서문>,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옮김, 2005.


유발 하라리로 촉발된 '빅 히스토리'는 인류의 역사를 '역사학' 자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진화생물학과 기후생태학, 그리고 특히 하라리에게는 '신'의 창조적 영역에 도전하는 미래적 인류의 과학기술과 접목해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관점이었다.
언어와 신화에 의한 1차 '인지혁명'과 밀의 기생유전자에 속은 인류가 정착을 하게 된 2차 '농업혁명', 그리고 현대의 3차 '과학혁명'을 통해 진화해 온 '(호모) 사피엔스'는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미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고대로부터 '신(神)'만이 기획하던 '영생'의 길을 인간 스스로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게 유발 하라리의 '빅 히스토리'적 전망이다.

우리의 지리학자 박정재 교수 또한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진행되어 온 진화사 일체를 기후생태적 지리학의 관점에서 돌아보며, [총,균,쇠](1997)의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사피엔스](2011)의 유발 하라리가 이끄는 '빅 히스토리'가 '인문학'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의 한 분과로서의 역사학 외에도 천문학, 지질학, 기상학, 해상학, 생물학, 인류학, 고고학,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이 서로 얽혀 진행되는 학제 간 연구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준다"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인류의 역사는 '역사학'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안 된다.

21세기 초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빅 히스토리'의 열풍은 일정 정도는 20세기 말인 1997년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생리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 1937~)의 [총,균,쇠]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사회과학적 '사회문화사' 또는 인문학적 '역사학'의 관점을 넘어 생태학과 기후학, 지리학 등의 관점에서 방대하게 서술하기 시작했다.

생물학, 기후학, 지리학 등의 '자연과학'이 사회학, 정치경제학 등의 '사회과학'과 교차하고, 철학, 문학, 역사학 등의 '인문학'의 차원에서 융합되는 이 과정이 바로 '통섭(統攝/Consilience)'이다. 


우리의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스승인 미국의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 Wilson : 1929~2021)은 1998년의 저서 [통섭]을 통해 이 과정을 '지식의 대통합(The Unity of Knowledge)'이라 규정했다.

[통섭]에서 에드워드 윌슨이 정의하는 '통섭' 관련 대표적 문장들을 몇 가지 인용해 본다.


"'통섭(統攝/consilience)'은 '통일(統一/unification)'의 열쇠이다. 나는 이 용어를 '정합(整合/coherence)'보다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통섭'은 '정합'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하나만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섭'이라는 용어는 그 '희귀성' 때문에 그 의미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용어는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이 1840년에 [귀납적 과학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 [통섭],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 에드워드 윌슨, 1998.

"... '통섭(統攝/consilience)'... 다른 분야에서 탄탄하게 검증된 지식에 순응하는 어떤 분야의 단위와 과정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일관성'의 측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입증되었다."
- [통섭], <9장. 사회과학>, 에드워드 윌슨, 1998.

"... 한 가지 부류의 설명... 그 설명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수준의 시공간과 복잡성을 넘나들어 결국에 '통섭'이라는 방법으로 여러 분과들의 흩어진 사실들을 통일한다. '통섭'은 '봉합선이 없는 인과관계의 망'이다."
- [통섭],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에드워드 윌슨, 1998.

"'통섭(統攝/Consilience)' 세계관의 요점은 인간 종의 고유한 특성인 문화가 자연과학과 인과적인 설명으로 연결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여러 과학 분과들 중에서 특히 '생물학'은 이런 연결의 최전선에 있다."
- [통섭], <12장>, 에드워드 윌슨, 2005.


지금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을 안겨주었다던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 1794~1866)이 처음 사용했다는 '통섭'은 원어로 'consilience'인데,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지식의 대통합'을 'unification(통일)'이나 'coherence(정합)'보다 'consilience(통섭)'으로 선택했다. 이유는 우리말로 잘 이해가 어렵기는 하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하나만을 뜻하기 때문"이며 '희귀성'으로 "그 의미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 쓰고 있다([통섭], <2장>).

아마도 일반 용어로 '합일(合一)'이라고 번역될 수 있을 'consilience'가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한국 제자인 최재천 교수에 의해 '통섭(統攝)'으로 번역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통섭]의 <옮긴이 서문>에서 저자 윌슨의 위와 같은 용어선택 사상을 이어받아 고심 끝에 '통일'이나 '정합'이 아닌 '통섭'으로 정한 듯 한데, 과연 '통섭'이라는 단어 자체가 '희귀성'을 갖고 있기는 하다.

'통섭'에 관한 위 인용문들을 통해 내가 이해하는 '지식의 대통합'으로서 '통섭'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희귀성'으로 인한 의미 보존.
둘째, 자연과학적 '귀납추론'을 통한 엄밀성.
셋째,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영역에서도 여전히 탄탄하게 검증되는 '일관성'.

위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에드워드 윌슨이 정의하는 '통섭'은 "설명의 공통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대)통합'하는 것"([통섭], <2장>)이 된다.


"과학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류가 뽑아든 마지막 검(劍)이다."
- [통섭], <4장. 자연과학>, 에드워드 윌슨, 1998.


'통섭'을 주장하면서 생물학자로서 에드워드 윌슨은 자연과학의 한 분야인 '생물학'을 '최전선'([통섭], <12장>)에 둔다. 

그에게 '사회과학'은 그 자신의 영역에만 머무는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더욱 매몰된 결과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여러 수준들을 관통하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이 실패로 인해 '사회과학'은 "진정한 과학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통섭], <9장. 사회과학>). 
자연과학자 윌슨에게 그나마 '과학'적으로 간주되는 사회과학 분야는 고도의 수학적 모델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다. 물론 이런 경제학 또한 자신의 영역에만 머무는 '환원주의'로는 안되고 인간의 '뇌'와 '유전자'를 연구하는 '생물학'과 '마음'을 연구하는 '마음의 과학'인 '심리학'과 융합되어야 진정한 과학이론이 된다. 
현재 주류 경제학에서도 요원한 길이다.

'생물학', 세부적으로 '뇌과학', '진화생물학' 등의 귀납적인 과학의 연구방법을 우선시하지만, 다소 부족한 사회과학도 위와 같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통해 일관된 인과관계의 연결망을 구성하면서 과학이 이룬 이 지식의 성과들을 인류사에 적용하는 '인문학'의 지휘 하에 '일관성'의 이름으로 대통합되는 지식의 본연이 바로 에드워드 윌슨이 주장하는 '통섭'이다.


"수십만 년의 구석기 역사 속에서 인간의 특정한 '후성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점점 증가해 종 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수고 덕분에 '인간 본성'이 탄생한 것이다."
- [통섭],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 에드워드 윌슨, 1998.


이로 인해 인류사의 '빅 히스토리'는 '유전자'와 '문화'의 상호작용으로 '인간 본성'을 구명할 수 있게 된다. '인간 본성'이란 선험적이거나 '초월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유전자의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연선택'의 유구한 시간이 각인된 특질들이 수십만 년의 유전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전해지고 새겨지며 일정의 '대수의 법칙'처럼 예측되는 일종의 '후성규칙'이다. 이것이 과학자로서의 윌슨이 '인간 본성'에 관해 주장하는 '귀납적'이자 '유물론'적인 규정인 것이다.

'예술'은 인류의 오래된 '본성' 중 하나인데, 예술에 대한 '해석'은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이며, '유전자'와 '문화'의 '공(共)진화'는 윌슨이 보기에 '뇌과학', '심리학', '진화생물학'의 "연구결과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과정"([통섭], <10장>)이다.


"윤리적 격률은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신의 계시나 인간 세계 바깥에서 오는 천상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르다. 또 그것은 정신의 비물질적 차원에서 울려 퍼지는 독립적인 진리와도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뇌'와 '문화'의 '물리적 산물'에 가깝다. 자연과학들에 대한 '통섭(統攝/Consilience)'적 관점에서 보면 윤리적 격률은 사회 계약의 원리들이 규칙들과 명령들로 굳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원들이 다른 이들도 이에 따르기를 바라면서 기꺼이 공동선을 위해 받아들이는 행동 코드들인 것이다.'
- [통섭], <11장. 윤리와 종교>, 에드워드 윌슨, 1998.


이렇게 '생물학'과 '인문학'의 '통섭'으로 보는 '윤리적 격률' 또한 '뇌'와 '문화'의 "물리적 산물"([통섭], <11장>)이 된다. 
"관념은 인간 두뇌라는 물질이 만든 최고의 '물질적 산물'이다"라고 단언한 20세기 초의 혁명가이자 변증법적 유물론자였던 레닌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렇게 원래 '철학'의 이름으로 원시 '과학'들이 통합되어 있던 고대 그리스 사상은 현재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환원주의'를 거쳐 다시 미래의 '통섭'으로 '재통합'되는데, 윌슨은 이를 '이오니아의 마법(Ionian Enchantment)'이라고 부른다([통섭], <1장>).


"우리는 새로운 (보수적/보존적) '실존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나 사르트르의 (개인주의적) 낡은 부조리적 '실존주의'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통합된 지식'(통섭/統攝/Consilience)만이 정확한 예견과 현명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는 '실존주의' 말이다... '통합된 지식 체계'(통섭)는 아직 탐구되지 못한 실제 영역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 [통섭], <12장>, 에드워드 윌슨, 1998.


이제, 20세기 말의 '통섭'적 '빅 히스토리'를 주장하는 윌슨의 결론이다.

20세기 말의 그가 전망하는 인류의 미래는 기후생태 위기로 인해 다소 암울하지만, 21세기 초 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호모 데우스'를 가정하는 유발 하라리 못지 않게 낙관적이다. 
세계인구 60억 명이었던 20세기 말에 윌슨이 예상한 25년 후의 세계인구는 80억 명이었다. 지금 2025년의 세계 총인구는 결국 82억 명 이상이 되었고, 25년 전 윌슨의 결론은 인류가 '통섭'을 통해 기후위기를 제어해야 하고 또한 그럴 능력이 있다는 희망이었다.

에드워드 윌슨은 결론에서 '보수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보수주의'는 영미식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지상주의'가 아니다. 지구환경과 인류생존을 지키는 '보수주의', 즉 '보존주의'([통섭], <12장>)를 의미한다.

여기에 '개인주의적' 실존주의를 넘어 인류의 '실존'을 고민하는 인류의 철학으로서 집단적 '실존주의'가 이어서 등장한다. 

물리학과 화학이 오래전 생물학의 발전을 견인했듯,
이제는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유전자공학 같은 생물학이 사회과학을 견인하고,
궁극에는 인문학의 차원에서 '통섭'이라는 '지식의 대통합'을 이루는 세계관.

'통섭'의 이름으로 이렇게 결합된 '보수(보존)적 실존주의' 또는 '실존적 보수(보존)주의'가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1998)의 결론으로 말하는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는 사상이다.


"정말 자유로운 최초의 종인 호모 사피엔스는 우리를 만들어 낸 자연선택을 해제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의지 바깥에는 유전적 숙명도, 우리의 갈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별도 없다. 인간 본성과 인간 역량의 유전적 진보를 포함하는 진화는 이제부터 도덕적, 정치적 결정으로 조절되는 과학기술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고 어떻게 되고 싶은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은 끝났다. 이제 메피스토펠레스의 진짜 음성을 듣게 되리라."
- [통섭], <12장>, 에드워드 윌슨, 1998.

***

1. [통섭(統攝/Consilience) - 지식의 대통합](1998), Edward Osborne Wilson,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
2. [사피엔스](2011),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1.
3. [호모 데우스(Homo Deus)](2015), 유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문학과 사상사>, 2017.
4. [총,균,쇠](1997), 제러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역, <문학과 사상사>, 1998.
5. [기후의 힘], 박정재, <바다출판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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