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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림 - 세계 미술사의 획기적인 그림 51
박영택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10월
평점 :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
- [오직, 그림], 박영택, 2024.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시대마다 주도적인 예술형식이 존재했다며 17세기에는 문학이 우위에 있었으며 회화는 그것을 모방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린버그는 과거의 회화가 신화나 소설 속 사건을 평면에 옮기는 매체였기 때문에 회화가 그 자체의 고유성을 획득하기 위해 문학적인 요소를 화면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화가들은 그린버그의 강령을 따라 '추상회화(추상표현주의/추상인상주의)'를 발전시켰고 환영도, 이야기도 없는 회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보통 현대 회화를 '매체 특수성(Medium Specificity)'으로 규정한다. 모더니즘 페인팅에서 회화에 주어진 가장 주된 임무는 회화로서 스스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 무엇보다도 '평면성'이 우선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회화라는 '매체'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 '평면성'이기 때문이다."
- [오직, 그림], <40. 추상적 숭고를 안기는 화면>, 박영택, 2024.
어려서부터 나는 데생과 소묘에 자신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독서실에서 소피 마르소 책받침을 보고 똑같이 따라 그렸고,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드레곤볼] 같은 만화 장면을 정말 내가 보기에도 아주 똑같이 그려낼 수 있었다. 구도를 잡을 줄도 몰랐고 밑그림 없이도 그렇게 '사실' 그대로 '재현'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내게 그림은 사물의 '사실적 재현'이었다.
이후 어떻게 하다가 서양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도 그림 또는 회화를 이르는 '시각예술(Visual Art)'은 내게 '보이는 것(가시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사실주의'적으로 '그리는 것(재현)'에서 멈췄다. 사진은 사진대로, 그림은 또 그림 나름대로의 '사실적 재현'의 맛이 있었다.
경기대 교수인 미술사학자 박영택 교수의 책 [오직, 그림](2024)은 서양미술사에서 '사실주의'에 멈춘 내게 현대 미술의 개념을 소개해 주었다.
19세기 인상주의를 넘어 세기말 폴 세잔의 후기 인상주의를 기점으로 20세기 초의 야수파와 표현주의 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현대 미술사가 아닌 책 제목 그대로 오직, '그림'만을 보는 회화에 대한 이해다.
[오직, 그림]을 통해 '시각예술'로서 회화를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다.
이는 비단 추상주의를 표명한 현대 회화만이 아니라, 인류와 늘 함께 해 온 회화, 미술의 본질이다.
"'원근법'이라는 용어는 16세기 말이나 돼서야 나왔고, 소실선이 무한대에서 만난다는 개념을 증명한 것은 근대에 와서이다...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핵심은 외부세계의 '모방'이었다. 모든 문제는 원근법의 원칙을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로 귀결되었으며 '재현'의 기본형식은 불변했다. 반면 (프라) 안젤리코는 일찍이 원근법적 공간이 아닌 또 다른 공간구성을 통해 '비가시성'의 세계가 구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 중요한 작가였다."
- [오직, 그림], <4. 신의 무한성과 마주하는 인간>, 박영택, 2024.
14세기 르네상스 회화 이전의 주목할 만한 화가 조토 디 본도네는 서양미술사가 곰브리치가 가장 '혁명적'이었다고 인정한 인물이다. 조토는 중세의 평면적 종교화를 벗어나 처음으로 원근법적 구성을 통해 종교화를 그렸다. 조토의 그림 속 인물들은 기독교적 성상이 아닌 당장이라도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 처음 재현되었다.
15세기에 이르러 프라 안젤리코는 선배들이 기하학적 언어로 재현한 원근법을 한층 더 다양하게 실험한다. 근대 르네상스 초기의 과학적 발견으로서 3차원적 원근법의 원칙을 어떻게 2차원적 평면 속에서 구현하느냐가 근대 회화의 중요한 임무가 된 것이다.
역시, 근대 회화는 아직까지 '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재현)'에 복무하고 있다.
"... 성경을 그릴 때 내용을 주관적이고 개성적으로 해석해서 그린 화가는 카라바조가 최초에 해당한다. 카라바조는 종교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가톨릭 교회가 요구하는 반종교개혁적인 시대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다.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조망하는 그림을 그려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배경과 강렬한 빛의 극적인 대조(키아로스쿠로)로 감상자에게 심적 자극을 더하는 카라바조의 화풍은 17세기 이탈리아를 바롯해 유럽 전역을 휩쓸 '바로크 미술'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 [오직, 그림], <8. 빛과 어둠의 환상적인 조합>, 박영택, 2024.
16세기 무역도시 베네치아는 세계 각지로부터 온 물품들이 활발히 교류된 도시국가였다. 여기에는 각양각색의 안료들, 즉 물감의 재료들도 있었다. 화려한 색채화가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의 출현은 이런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다. 이제 회화는 선을 넘어 색채를 통해 현실을 모방하고 '재현'하게 된다.
티치아노를 지나 여기에 등장하는 극적인 화가가 바로 카라바조다. 그의 극적인 명암대비 표현은 '키아로스쿠로'라 부르는데, 그림의 구도는 물론 현실적이지 않은 빛과 어둠의 대비는 역설적으로 현실과 똑같다는 환시를 불러온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의 장면은 그렇지 않을텐데 티치아노나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왠지 살아있는 현실을 보는 것 같이 생생하다.
카라바조는 이렇게 17세기 웅장한 감격을 주는 '바로크 미술'의 서막을 열고 있다.
"서양화화는 렘브란트에 와서 실질적으로 완성되며 서구 '재현주의'는 렘브란트가 정점이다."
- [오직, 그림], <13. 얼굴에 내재한 삶의 굴곡과 주름>, 박영택, 2024.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은 [오직, 그림]의 저자 박영택에 의하면 서양미술사에서 '재현주의'의 정점이다. 그 말의 의미는 명암대비법 '키아로스쿠로'나 밑그림 없이 그리는 '알라 프리마', 윤곽을 흐리는 '스푸마토' 등 현실 '재현'의 온갖 기법과 실험을 모두 사용한 회화가 더 이상의 재현에 있어 그 한계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렇게 책은 18세기 프란시스코 고야로 넘어간다.
"인간의 심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고야는 서양회화사에서 거의 최초로 몽환적인 내면의 세계를 그린 작가로서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하다. 고야는 '재현주의'에 심리묘사와 비현실적 환상을 삽입했다. 그를 정점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서구 '재현주의'의 역사는 하락세로 돌아선다."
- [오직, 그림], <15. 재현될 수 없는 눈과 마음>, 박영택, 2024.
이제 더 이상 회화는 사실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오랜 시간 '재현'을 통해 지향해 온 '객관성'을 넘어 화가 개인의 '주체성'으로서 심리와 느낌이 본격적으로 개입된다. 박영택 교수는 고야를 이후 초현실주의의 기원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고야로부터 회화의 '재현주의'는 화가와 관객의 주관적 개입의 여지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마네는 불가해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우리의 인식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회화에서는 가능한 세계를 역설하고 있다."
- [오직, 그림], <19. 공간의 물질적 속성들을 이용하고 작동시킨 화가>, 박영택, 2024.
19세기 '인상주의'의 창시자격인 에두아르 마네는 빛의 우연성과 시각적 변화를 회화에 도입하면서 다시금 회화를 '사실적 재현'의 길로 새롭게 안내하고 있지만, 실은 자세히 보면 당최 사실 같지 않은 구도와 원근법 등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넘어 '비가시적인 것',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잔의 작품은 유럽회화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푸생의 견고한 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의 자유로운 색, 엘 그레코의 상상력 및 풍부한 과장이 모두 들어가 있다. 세잔의 그림은 '가시적' 세계의 기록에 전념했던 지난 여섯 세기(13~18세기) 동안의 유럽회화의 정점이다."
- [오직, 그림], <22. 자연과 지각의 관계에 관한 회화>, 박영택, 2024.
19세기말의 고독한 화가 폴 세잔은 미학자 진중권이 꼽는 가장 '혁명적'인 화가다.
세잔은 특이한 구도와 색채표현을 통해 하나의 관점에서 여러 각도의 정물을 처음으로 그려낸 화가다. 이른바 '후기 인상주의'로 규정되는 그의 화풍은 '인상주의'와 이후 피카소와 같은 '입체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현실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해석되거나 '재현'될 수 없으며,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여러 관점들이 2차원적인 평면 캔버스에 한꺼번에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그림]은 세잔이 '유럽 회화의 요약'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피카소의 입체주의, 마티스의 표현주의, 더 나아가 현대의 추상주의까지 전통적인 서양 회화사로부터의 그 분기점은 폴 세잔이 된다.
"세계는 시간적이며 모든 것은 '운동'의 한가운데에 있다.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결국 '운동' 속에, '변화' 속에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빌럼) 더코닝의 그림 역시 만물의 시간 속에, 사건 속에, 변화 속에, 생성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작가의 선험적인 의도, 주체성과 훈련된 손 등을 지우고 '우발성'과 과정 자체를 적극 끌어들이는 한편 자연의 법칙에 조응하고 남겨진 것을 포용한다고 볼 수 있다."
- [오직, 그림], <34. 처소 없는 재현>, 박영택, 2024.
1990년대 미국 퀸스미술관의 큐레이터 연수를 했다는 [오직, 그림]의 저자 박영택 교수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28번째 그림인 파울 클레의 <밤의 회색으로부터 나오자마자>를 설명하면서 이 책의 결론을 담아낸다. 즉, 서양 회화사는 '가시적인 것의 재현'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재현)'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제 20세기 들어 현대 회화는 미국의 '추상인상주의' 또는 '추상표현주의'로 수렴되고 있다.
수많은 화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화가들은 빌럼 더코닝과 조르조 모란디, 프랭크 스텔라와 마크 로스코, 그리고 루치안 프로이트 등이다.
빌럼 더코닝의 <여인 연작>은 추상화이면서도 구상(형태)를 섞어놓되 '사실적 재현'은 아니다. 그의 형태들은 추상 속에서 뭉개지면서 현실의 '비가시성'을 표현한다.
조르조 모란디는 평생 고요한 정물화만 그렸는데, 세잔의 입체성을 계승하는, "서양미술사에서 세잔의 진정한 추종자 중 하나"([오직, 그림], <36>)로 자리매김한다.
프랭크 스텔라의 <검은 연작>은 회화에서 3차원적 공간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2차원적 평면성만을 획득하면서 '극단적 추상표현'의 길을 열었다.
여기에 마크 로스코는 건물의 벽과도 같은 거대한 캔버스에 검은 물감의 '물질'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회화사에 있어서 모든 문학적 서사로부터 미술을 해방시키고 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 클레멘스 그린버그는 회화의 고유성 쟁취를 위해 미술에서의 문학적 요소를 추방하자고 선언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화가들은 추상인상주의든 추상표현주의든 일체의 '추상주의'로 달려나갔다. 현대 화가들은 이제 원근법적 실험 등의 전통은 버린지 오래였고, 회화의 '평면성'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
또한 무의식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루치안 프로이트는 할아버지의 무의식 관념을 미술로까지 밀고 올라가 날 것 그대로의 누드화를 주로 그렸다는데, 책의 설명은 사실 잘 모르겠고 조부의 성적 무의식을 미술로 발현한 것 아닌가 싶었다. 책 <48장>에서 소개한 아래의 <푸른색 발톱을 가진 플로라>는 그나마 그 중 '정상'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고른 것 같았는데, 궁금해서 프로이트의 작품들을 검색해보니 다른 누드화들은 별로 보고싶지 않은 '비가시적' 장면들을 괴기스러울 정도로 '가시화'하고 있었다.
'가시적'인 것, 즉 우리가 '본다'라는 것은 모종의 욕망을 투여한 행위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물의 이면, 즉 다른 측면 또는 볼 수 없는 '비가시적'인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직, 그림]에 의하면 예술은 이런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끝없이 날아가는 불나방이거나 끝내 그곳에 이르지 못하고 날개가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다. 그러나 예술가는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지속적으로 관습을 깨뜨리며 나아가는 니체와 같은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미술과 철학이 조우하는 지점인 것이다.
이렇게 '우연'한 "생소함의 '재현'과 '가시화'"([오직, 그림], <39>)가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미술인 것이다.
회화의 역사는 '비가시적'인 것들의 다양한 '가시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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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직, 그림 - 세계 미술사의 획기적인 그림 51], 박영택, <마음산책>, 2024.
2.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3. [서양미술사], 진중권, <휴머니스트>, 2008~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