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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ㅣ 창비세계문학 34
찰스 디킨스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평점 :
'혁명'은 무엇으로 '상징'되는가
(What was the symbol of revolution)
-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1859.
1.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 [두 도시 이야기], <1-1. 시대>, 찰스 디킨스, 1859.
첫 문장으로 유명한 작품이라 하면,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Call me Ishmael)"라고 시작하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1851),
"어머니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로 시작하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1942),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면서 그 유명한 <서문>을 열고는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수천년의 인류 문명사를 과감하고 명료하게 요약하는 압축적인 문장으로 <1장>을 시작하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이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인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의 첫 문장 또한 이야기 서술의 경위를 소개하는 매우 평이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깊다.
"트렐로니 지주와 리브시 판사를 비롯한 몇몇 양반들이 나에게 보물섬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라고 요청했는데, 아직 가져오지 못한 보물이 남았으므로 보물섬의 위치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기록하라고 했고 나는 17백 몇년의 어느 때로 돌아가서 펜을 들어야 했다. 내 아버지가 남긴 '벤보우 제독' 여관 처마 아래로 뺨에 큰 칼자국이 있는 늙은 선원이 처음 들어섰던 바로 그 때 말이다."
- [보물섬], 로버트 스티븐슨, <1장, '벤보우 제독' 여관의 늙은 선원>, <Collins classics>에서 필자 번역.
해적 플린트 선장의 보물섬 지도를 훔쳐서 달아난 1등 항해사 빌리 본즈의 등장과 함께 시작하는 그 첫 문장은 어린 나를 미지의 추억과 모험의 세계로 바로 초대해 주었다.
여기 또 하나의 유명한 첫 문장을 자랑하는 소설이 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 1812~1870)의 1859년작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다.
한 시대를 짧으면서도 인상깊게 대비되는 문장으로 묘사한 대목이 압권이다. 번역하기에 따라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이었다"는 식의 병렬식 문장도 좋고, "최고의 시간이었지만(한편으로는), 최악의 시간이었다"는 식의 대비식 문장도 나쁘지 않다. 아마도 번역자에게는 두 가지 표현 중 무엇으로 할까 고민되는 첫 문장이기도 하겠으나, 원문은 단순한 한 줄 문장들의 나열이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 [A Tale of Two Cities], <1. Recalled to life>, Charles Dickens, 1859.
이 기념비적인 첫 문장들이 묘사한 시대가 언제일까 궁금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였을까.
소설은 <1권. 되살아나다(Recalled to life)>의 <1장. 시대>를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혁명이 일어나기 14년 전인 1775년이 그랬다고 적고 있다. 제목과 같은 공간적 배경인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는 '턱이 큰' 조지 3세와 역시 '턱이 큰' 루이 16세가 영국과 프랑스를 다스렸고, '평범한 얼굴'의 샬럿 소피아와 '아름다운 얼굴'의 마리 앙뜨와네뜨가 각 나라의 왕비로 있던 때였다. 중세를 지나 절대왕권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던 이 지배권력자들은 '혁명'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낡은 질서의 대표적인 '상징'들이다. 영국은 이미 한세기 전인 17세기에 의회혁명으로 왕권이 제한된 입헌군주국이었고, 프랑스는 왕정과 귀족 계급의 폭정과 착취로 인해 바야흐로 민중 대혁명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폭풍전야였다.
주지하다시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군주 개인의 국가가 아닌 다수 민중(인민) 주권의 국가의 건설, 이른바 '국민국가'의 시작이었다.
'국가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근대적 헌법정신의 기원이다.
[두 도시 이야기], <1권. 되살아나다(Recalled to life)>, '1장. 시대'에서 말하는,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은,
1775년의 왕족과 귀족 계급에게는 '최고'였던 반면, '제3신분'인 신흥 부르주아 계급과 농노를 비롯한 대다수 민중들에게는 '최악'의 시대였다.
한편으로 이 첫 문장들은,
'혁명'의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1789~1793년 대혁명의 '바다(같은책, <2-22>)'와 '불(<2-23>)', '폭풍(<3-4>)' 속에서는 다수 민중 계급에게 '최고'였던 반면, 소수의 낡은 지배계급에게는 '최악'의 시간이었을 테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1859)의 유명한 첫 문장은 다름아닌 바로 '계급투쟁'의 진실을 담아낸 표현이기도 했던 것이다.
2.
"'라 기요띤(La Guillotine)'이라 부르는 날카로운 여인...
그것은 대중적인 농담의 주제였다. 그것은 두통에 대한 최상의 치료약이고, 머리카락이 세는 것도 확실히 막아주며, 표정을 기묘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주는, 바짝 잘 깎이는 '국민 면도칼'이라는 거였다. '라 기요띤'에 입을 맞추고, 그 작은 구멍을 들여다 보고 자루 속에 재채기를 한(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람들 말이다. 그것은 인류가 갱생한다는 지표였다. 그것은 '십자가'의 지위를 빼앗았다. '십자가'를 내버린 가슴 위로 그것의 모형이 달렸고, '십자가'를 부정한 곳에서 사람들은 그것에 절하고 신봉했다."
- [두 도시 이야기], <3-4. 폭풍 속의 고요>, 찰스 디킨스, 1859.
미국 독립혁명 이데올로기를 기초한 근대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영국에 대항해 미국의 독립을 지원한 프랑스로 건너가 '자유, 평등, 우애(연대)'를 강조하면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철저히 옹호했을 때, 이미 한세기 전 '명예혁명'의 파고를 겪은 영국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완전한 인민 공화국을 건설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깎아내렸다.
[두 도시 이야기]의 '두 도시'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인데, 프랑스 대혁명 시기 런던과 파리 '두 도시'를 오고가는 '이야기'다.
귀족 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고발하다가 바스띠유 감옥에 10년 동안 갇힌 프랑스 의사 마네뜨 박사가 '되살아나서(Recalled to life)' 영국에서 건너온 딸 루시와 상봉하는 <1권>부터 영국으로 건너가서 프랑스 간첩으로 기소되었다가 살아난 프랑스 귀족 찰스 다네이(에브레몽드 후작 가문)와 루시 마네뜨의 영국에서의 결혼 및 프랑스 대혁명의 복수혈전을 그린 <2권>, 역시 루시 마네뜨를 사랑했던 영국의 방탕한 변호사 시드니 카턴의 희생으로 끝나는 <3권>의 긴 이야기를 통해 찰스 디킨스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인간성'에 관한 것이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1943)와 함께 전세계에서 2억 부 이상 팔렸다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1859)는 결국 '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인간사의 그 어떤 파도와 폭풍, 그 어떤 혼돈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우정을 위해 바쳐지고 희생되며 그 진가를 발휘하는 도덕과 미덕의 '인간성'이 그 주제였다.
한편, 영국인으로서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영원한 숙적이자 '적국'인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보다는 '복수'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농노(소작인)들의 새신부의 정절은 물론 그들의 목숨까지도 무시로 빼앗고 착취하는 귀족 계급을 기어코 처단하면서 '애국시민'과 '공화국'을 배신하는 자들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목을 쳐대는 민중해방의 공간은 피의 '복수'로 점철된 '국민 이발소'로 비유된다.
그렇게 영국인 찰스 디킨스에게 '프랑스 대혁명'은 '기요띤(Guillotine:단두대)'으로 '상징'된다.
구태의 지배계급과 그 낡은 문명 일체의 모가지를 날려 버리는 '기요띤'은 만병통치약으로서 '국민 면도칼'로 불리면서 이 대혁명의 공간은 '국민 이발소'가 되는 것이다.
소설 말미에 시드니 카턴의 희생 덕분에 기요띤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한 찰스 다네이는 프랑스 귀족 에브레몽드 후작 가문의 상속자였지만 귀족의 압제에 신물을 느끼고는 일체의 기득권을 버린 채 영국으로 망명한 자의 영국식 이름이다. 알렉상드르 마네뜨 박사의 딸 루시 마네뜨와 영국에서 결혼하고 정착하였지만 프랑스인으로서 인도적 의무를 위해 파리로 건너갔다가 에브레몽드 가문과 철천지 원수였던 애국시민 포도주상 드파르주 부부로부터 고발을 당해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과정과 그런 다네이를 구하기 위해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사람들이 함께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찰스 디킨스의 '추리소설'식 서술의 면모도 충분히 보여주면서 읽어나가기에 일종의 박진감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성'의 '도덕'과 '미덕'을 강조하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그려내는 프랑스 '대혁명'이란 '국민 면도칼'인 '기요띤(단두대)'으로 상징되는 '복수혈전'의 대혼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찰스 디킨스는 '십자가'로 상징되던 구시대의 폐허 위에, '혁명'의 새로운 '상징'으로서 '기요띤'을 세웠다.
물론, 이 소설이 그러거나 말거나 '프랑스 대혁명'이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 '자유, 평등, 우애(연대)'라는 이념, 인민주권에 기초한 공화정인 '국민국가'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3.
"상상력이 기록된 이래 상상되어 온, 탐식하며 만족을 모르는 그 괴물들이 하나로 융합되어 실현되어 있다. '기요띤'. 그러나 풍요롭고 다양한 토양과 기후를 지닌 프랑스 어디에서도 이 공포를 낳은 것보다 더 확실한 조건 하에서 성장하는 풀잎, 나뭇잎, 뿌리, 가지, 열매는 하나도 없다. 비슷한 망치로 다시 한 번 더 '인간성'을 일그러뜨린다면, 그것 역시 똑같은 일그러진 모양으로 구부러질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탐욕스러운 방종과 억압을 다시 씨 뿌린다면, 그것은 분명 그 종류에 따라 똑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 [두 도시 이야기], <3-15. 발소리 영영 사라지다>, 찰스 디킨스, 1859.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낡은 질서에 대한 피의 '복수'에 불과한 '기요띤'으로 상징되고 마는 '프랑스 대혁명'은 결국 공포정치 지도자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마저 '기요띤'의 희생자가 되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티즘'에 의한 왕정복고로 되돌려졌다. 이 과정을 다 지켜봤을 1859년의 찰스 디킨스에게 역시 '혁명'의 '복수'는 무한하게 반복될 수 있는 '인간성'의 말살로 상징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대를 불문하고 '혁명'은,
18세기든, 19세기나 20세기든,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찰스 디킨스가 바라본 '상징'과 바로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이며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가 되는 '계급투쟁'의 현실이 존속하는 한,
'혁명'은 피해갈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이고,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이며,
'믿음과 불신',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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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1859), Charles Dickens, 성은애 옮김, <창비>, 2014.
2. [소설가의 첫 문장], 김대웅 엮음, <북플라자>, 2024.
3. [모비 딕(Moby Dick)](1851), Herman Melville,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4. [이방인(L'Etranger)](1942), Albert Camus, 박용철 옮김, <덕우출판사>, 1990.
5.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1848), Karl Marx/Friedrich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93.
6. [Treasure Island], Robert Louis Stevenson, <Collins classics>, 2010.
7. [상식(Common Sense), 인권(Rights of Man)](18세기), Thomas Paine, 박홍규 옮김, <필맥>, 2004.
8.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1956), Jean Massin, 양희영 옮김, <교양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