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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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
- [주홍빛 베네치아] / [은빛 피렌체] /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89~1992.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던 건 다음에 읽을 책을 찾지 못해서였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이념성향은 매우 달랐지만 나는 어릴적 아주 가끔 아버지의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도 했더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도 최근에 아버지 방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낸 책이었다.

아니, 책보다는 그냥 오랫만에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여태 미루고 있는 아버지 일기 찾기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 방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좀더 내 마음에 담아두기로 생각하고 만다.

아버지가 말기 폐암 선고를 받기 얼마전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큰 누나와 함께 유럽 여행을 보내드렸었다. 1970~80년대에 중동 산업역군으로 다녀오신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했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지만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해외여행을 가보신 적이 없었는데, 여든이 넘어 가셨던 보름간의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는 참으로 열심히 돌아다니셨단다. 그나마 내가 아들로서 했던 몇 안되는 효도행위였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유럽 여행을 회상하셨고, 그 여행 전후로 구입하신 책이 양정무의 [난처한 미술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로 추정된다.

난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심정으로 한 손에 딱 들어오는 그 책들을 한 권씩 쥐고 지난 며칠간 출퇴근을 했다.


1. [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나나미, 1989.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즘의 공화국 치고는 강력한 공화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상시에는 공화국 국회나 원로원에서의 일반 토의를 거치지 않고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 위원들의 토의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공화국의 경우, 종래와 같은 정치체제를 지키려 들면 나라가 망해버릴테고, 국가의 멸망을 피하려면 정치체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정략론]에서 인용, [주홍빛 피렌체], <10인 위원회>, 시오노 나나미, 1989.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1960년대에 홀로 이탈리아로 넘어가 어느 소속도 없이 독학하면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유럽의 이야기를 소설 같은 작법으로 풀어냈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씌어진 그녀의 작품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기반한 '역사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는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고, [십자군 이야기](2010-2011)를 통해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은 잠시 구경해보았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를 돌아다니며 풀어내는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는 아마도 1992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편씩 발표한 그녀의 초기 '역사소설' 작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엄정한 역사 고증까지는 아닐테지만 주인공인 베네치아 귀족정치인 마르코 단돌로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다. 각 권마다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피렌체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빼고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양념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한다.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기관인 '10인 위원회'에 속한 주요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정세 속 관망자에 불과하다. 그의 애인으로 나오는 로마 여인 올림피아는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에 나오는 고급 창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로서 실제 인물처럼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역사 속 인물이라기 보다는 가상인물인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와 다른 역사적 실제인물들을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가상인물에 가깝다. 티치아노의 그림 속 여인은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로 되어 있지만 이후 300년 이상 지나 에두아르드 마네가 티치아노의 이 그림을 모태로 하여 그린 [올랭피아(올림피아)](1863)를 모티브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올림피아'가 탄생한 듯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주홍빛 베네치아](1989)에서 물의 도시이자 해양교역국 베네치아의 공화국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지중해 지역 유럽과 서아시아 정세를 이야기한다. 당시는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당대 최강대국 에스파냐 왕인 합스부르크가의 카를5세의 가톨릭 세계와 서아시아의 술탄 쉴레이만이 통치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계가 충돌하던 시대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해양교역과 무역으로 살아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왕이나 술탄이 없는 공화정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소수 의결체제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바로 '10인 위원회'였다. 오늘날의 중앙정보기관이자 국무회의급 기관인 10인위원회는 2천명 귀족국회(하원)와 2백명의 원로원(상원), 공화국의 최고통치자인 통령(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비공식 의결기관으로서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10인 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베네치아와 투르크의 협력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그의 애인인 로마 출신 고급 창녀 올림피아가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첩자로 드러나면서 공직에서 3년간 휴직을 명받는다.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을 맞아 이웃국가 피렌체로 여행을 간 이야기가 '세 도시 이야기'의 두번째 이야기 [은빛 피렌체](1991)로 이어진다.

피렌체 출신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는 물론 [세 도시 이야기]에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자 구경꾼인 마르코 단돌로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가다. [군주론]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이라는 [정략론]에서는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적 절차는 참으로 완만한 것이 보통이다. 입법에서나 행정에서나 무엇이든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대개의 일은 다른 몇 사람과 공동으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의사를 통일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완만한 방법은 한시의 유예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따라서 공화국은 이런 경우를 위해 (고대 로마의) 임시 독재집정관 같은 제도를 반드시 만들어두어야 한다."

집단의결이라는 공화국의 단점을 보완하는 '독재집정관' 제도는 베네치아에서는 '10인 위원회'였고, 18세기까지 굳건히 '공화정'을 유지한 [주홍빛 베네치아]는 전제정으로 변해간 이웃 '공화국' 피렌체와 달리 이런 제도를 통해 당분간 공화정을 지켜나간다.


2. [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 1991.

"아름다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단테의 유려한 글과 보티첼리의 섬세한 삽화, 브루투스의 어두운 정열과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리얼리즘. 이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로렌치노의 본심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 [은빛 피렌체], <프리마베라>, 시오노 나나미, 1991.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기간에 여행간 피렌체는 겉으로는 공화정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사위인 메디치가의 사생아 알렉산드로가 왕처럼 전제정치를 펼치다가 역시 메디치가의 방계혈족인 로렌치노에 의해 암살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메디치가는 그 선대인 15세기의 코시모부터 로렌초 일 마니피코까지의 지배자들이 르네상스 전성기 문명을 이끌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들의 활약은 메디치가 후원의 피렌체가 주무대였다.

알렉산드로 대공을 암살하게 되는 메디치가 귀족 로렌치노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라마베라(봄)] 및 보티첼리의 삽화가 담긴 단테의 [신곡]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근대 정치사상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려지나 그가 독재자를 암살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알 수 없다.

로렌치노는 마르코 단돌로를 당대 피렌체 예술계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만나게도 하는데, 소설 속 마르코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현장을 직접 보기도 한다. 
나는 [천지창조] 등이 포함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비밀을 담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다음에 읽을 책으로 골랐는데, 이 또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후에 공화정을 완전 탈피하여 토스카나 공국이 된 피렌체는 로렌치노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이후 새롭게 대공이 된 코시모에 의해 다시금 전제정치를 강화하게 되는데 이 역설적인 일련의 과정은 르네상스 말기 귀족공화정의 필연적 몰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로마 시대 브루투스의 공화주의적 열정이 독재자 카이사르를 죽였으나, 시대는 역설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제국'을 불러왔던 것처럼.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을 철학이나 윤리학 등으로부터 분리시킨 사상가로서 전제정이든 공화정이든 고정된 체제가 아닌 부국강병과 권력의 생존이라는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근대 정치사상을 정립했지만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자와 맹자,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 등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철학을 당장의 시대는 따라갈 '동력'을 갖지를 못하니, 그럼에도 선진사상들은 항상 나중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은빛의 피렌체]는 사라져 가지만, 르네상스 전성기와 함께했던 한 시대의 쇠퇴와 새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


3.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92.

"남을 배척하면서까지 자기 신앙을 지키려드는 광신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 고대 유적의 해체도 다시금 시작될 걸세. 꺼림칙한 기분 따위는 조금도 없이, 대낮에 당당히 하겠지. 지금은 고대 유물의 보호자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고대 유적을 해체해서 전용하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지 않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니까, 그래도 명분은 있네. 이렇게 닫힌 사회가 다시 한 번 열린 사회로 변할 때까지. 고대 유적은 인간과 비와 바람을 끈질기게 견뎌내겠지."
- [황금빛 로마], <아피아 가도>, 시오노 나나미, 1992.

마르코 단돌로가 피렌체에서 올림피아를 우연히 만난 건 시오노 나나미의 작위적 설정이기는 해도, 결국 로마로의 여정을 이끄는 촉매제였다. 베네치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첩자 노릇을 하던 올림피아가 '10인 위원회'에게 베네치아의 이중첩자를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는 마르코보다 피렌체로 먼저 옮겨간 것인데, 피렌체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제는 함께 올림피아의 고향이자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간다.

16세기 로마는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다르다. 로마에는 어디를 가나 '고대'가 늘 함께 한다. 공직을 떠난 마르코 단돌로가 로마 지역 어디를 가나 항상 '고대'가 따라 다닌다. 로마에서의 모든 여정은 '고대로의 여행'인 것이다.

로마에서 마르코의 고대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고대유적지 발굴인부 출신 엔초 노인은 학식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탄 경험을 담아 말한다. "로마인은 제국이 멸망하기 2백년 전부터 조금씩 죽기 시작했고 그들이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제국도 멸망한 것"([황금빛 로마], <고대로의 여행>)이라고. 
문명은 도시와 그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그 문명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명은 언제나 그 전성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명의 필연적 변화 과정이다.

마르코 단돌로와 올림피아,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의 세 도시를 누비던 두 연인,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가상인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창 무르익은 사랑의 절정에서 이미 쇠퇴의 기운을 내포한 채 비극적 이별로 막을 내린다.

공화정인지 왕정인지의 정치체제적 구분은 다수 민중의 인권과 민주적 시민권력이 등장한 근현대 정치사회부터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의 16세기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에서도 '공화정'과 '왕정' 또는 '제국'은 그 구분이 모호했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진심이든 아니든 줄곧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현대 정치에서 민중권력은 여전히 '공화국'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수 민중의 권익을 위한 정치체제는 역시 고대로부터 흘러온 숱한 문명들의 참고가 필요하겠다.

모든 만물은 전성기와 함께 곧 쇠퇴할 운명이지만 과거로 표현되는 역사를 곳곳에 품고 있는 한, 늘 '르네상스(부흥)'를 가능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말하고자 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말기의 [황금빛 로마]였다.

또한 그녀의 [세 도시 이야기]는 나하고는 정치사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만년에는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나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이기도 하다.

다시금,
[세 도시 이야기]를 아버지 방의 책장에 조용히 되돌려놓는다.

***

1. [주홍빛 베네치아](1989),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2. [은빛 피렌체](1991),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3. [황금빛 로마](1992),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4. [십자군 이야기 1~3](2010~2011),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2012.
5.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6.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7.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8.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4.
9.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10. [미켈란젤로의 복수], 필리프 반덴베르크,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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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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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
- [주홍빛 베네치아] / [은빛 피렌체] /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89~1992.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던 건 다음에 읽을 책을 찾지 못해서였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이념성향은 매우 달랐지만 나는 어릴적 아주 가끔 아버지의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도 했더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도 최근에 아버지 방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낸 책이었다.

아니, 책보다는 그냥 오랫만에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여태 미루고 있는 아버지 일기 찾기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 방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좀더 내 마음에 담아두기로 생각하고 만다.

아버지가 말기 폐암 선고를 받기 얼마전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큰 누나와 함께 유럽 여행을 보내드렸었다. 1970~80년대에 중동 산업역군으로 다녀오신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했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지만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해외여행을 가보신 적이 없었는데, 여든이 넘어 가셨던 보름간의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는 참으로 열심히 돌아다니셨단다. 그나마 내가 아들로서 했던 몇 안되는 효도행위였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유럽 여행을 회상하셨고, 그 여행 전후로 구입하신 책이 양정무의 [난처한 미술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로 추정된다.

난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심정으로 한 손에 딱 들어오는 그 책들을 한 권씩 쥐고 지난 며칠간 출퇴근을 했다.


1. [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나나미, 1989.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즘의 공화국 치고는 강력한 공화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상시에는 공화국 국회나 원로원에서의 일반 토의를 거치지 않고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 위원들의 토의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공화국의 경우, 종래와 같은 정치체제를 지키려 들면 나라가 망해버릴테고, 국가의 멸망을 피하려면 정치체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정략론]에서 인용, [주홍빛 피렌체], <10인 위원회>, 시오노 나나미, 1989.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1960년대에 홀로 이탈리아로 넘어가 어느 소속도 없이 독학하면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유럽의 이야기를 소설 같은 작법으로 풀어냈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씌어진 그녀의 작품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기반한 '역사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는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고, [십자군 이야기](2010-2011)를 통해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은 잠시 구경해보았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를 돌아다니며 풀어내는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는 아마도 1992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편씩 발표한 그녀의 초기 '역사소설' 작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엄정한 역사 고증까지는 아닐테지만 주인공인 베네치아 귀족정치인 마르코 단돌로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다. 각 권마다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피렌체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빼고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양념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한다.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기관인 '10인 위원회'에 속한 주요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정세 속 관망자에 불과하다. 그의 애인으로 나오는 로마 여인 올림피아는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에 나오는 고급 창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로서 실제 인물처럼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역사 속 인물이라기 보다는 가상인물인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와 다른 역사적 실제인물들을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가상인물에 가깝다. 티치아노의 그림 속 여인은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로 되어 있지만 이후 300년 이상 지나 에두아르드 마네가 티치아노의 이 그림을 모태로 하여 그린 [올랭피아(올림피아)](1863)를 모티브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올림피아'가 탄생한 듯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주홍빛 베네치아](1989)에서 물의 도시이자 해양교역국 베네치아의 공화국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지중해 지역 유럽과 서아시아 정세를 이야기한다. 당시는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당대 최강대국 에스파냐 왕인 합스부르크가의 카를5세의 가톨릭 세계와 서아시아의 술탄 쉴레이만이 통치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계가 충돌하던 시대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해양교역과 무역으로 살아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왕이나 술탄이 없는 공화정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소수 의결체제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바로 '10인 위원회'였다. 오늘날의 중앙정보기관이자 국무회의급 기관인 10인위원회는 2천명 귀족국회(하원)와 2백명의 원로원(상원), 공화국의 최고통치자인 통령(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비공식 의결기관으로서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10인 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베네치아와 투르크의 협력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그의 애인인 로마 출신 고급 창녀 올림피아가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첩자로 드러나면서 공직에서 3년간 휴직을 명받는다.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을 맞아 이웃국가 피렌체로 여행을 간 이야기가 '세 도시 이야기'의 두번째 이야기 [은빛 피렌체](1991)로 이어진다.

피렌체 출신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는 물론 [세 도시 이야기]에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자 구경꾼인 마르코 단돌로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가다. [군주론]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이라는 [정략론]에서는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적 절차는 참으로 완만한 것이 보통이다. 입법에서나 행정에서나 무엇이든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대개의 일은 다른 몇 사람과 공동으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의사를 통일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완만한 방법은 한시의 유예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따라서 공화국은 이런 경우를 위해 (고대 로마의) 임시 독재집정관 같은 제도를 반드시 만들어두어야 한다."

집단의결이라는 공화국의 단점을 보완하는 '독재집정관' 제도는 베네치아에서는 '10인 위원회'였고, 18세기까지 굳건히 '공화정'을 유지한 [주홍빛 베네치아]는 전제정으로 변해간 이웃 '공화국' 피렌체와 달리 이런 제도를 통해 당분간 공화정을 지켜나간다.


2. [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 1991.

"아름다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단테의 유려한 글과 보티첼리의 섬세한 삽화, 브루투스의 어두운 정열과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리얼리즘. 이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로렌치노의 본심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 [은빛 피렌체], <프리마베라>, 시오노 나나미, 1991.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기간에 여행간 피렌체는 겉으로는 공화정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사위인 메디치가의 사생아 알렉산드로가 왕처럼 전제정치를 펼치다가 역시 메디치가의 방계혈족인 로렌치노에 의해 암살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메디치가는 그 선대인 15세기의 코시모부터 로렌초 일 마니피코까지의 지배자들이 르네상스 전성기 문명을 이끌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들의 활약은 메디치가 후원의 피렌체가 주무대였다.

알렉산드로 대공을 암살하게 되는 메디치가 귀족 로렌치노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라마베라(봄)] 및 보티첼리의 삽화가 담긴 단테의 [신곡]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근대 정치사상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려지나 그가 독재자를 암살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알 수 없다.

로렌치노는 마르코 단돌로를 당대 피렌체 예술계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만나게도 하는데, 소설 속 마르코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현장을 직접 보기도 한다. 
나는 [천지창조] 등이 포함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비밀을 담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다음에 읽을 책으로 골랐는데, 이 또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후에 공화정을 완전 탈피하여 토스카나 공국이 된 피렌체는 로렌치노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이후 새롭게 대공이 된 코시모에 의해 다시금 전제정치를 강화하게 되는데 이 역설적인 일련의 과정은 르네상스 말기 귀족공화정의 필연적 몰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로마 시대 브루투스의 공화주의적 열정이 독재자 카이사르를 죽였으나, 시대는 역설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제국'을 불러왔던 것처럼.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을 철학이나 윤리학 등으로부터 분리시킨 사상가로서 전제정이든 공화정이든 고정된 체제가 아닌 부국강병과 권력의 생존이라는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근대 정치사상을 정립했지만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자와 맹자,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 등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철학을 당장의 시대는 따라갈 '동력'을 갖지를 못하니, 그럼에도 선진사상들은 항상 나중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은빛의 피렌체]는 사라져 가지만, 르네상스 전성기와 함께했던 한 시대의 쇠퇴와 새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


3.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92.

"남을 배척하면서까지 자기 신앙을 지키려드는 광신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 고대 유적의 해체도 다시금 시작될 걸세. 꺼림칙한 기분 따위는 조금도 없이, 대낮에 당당히 하겠지. 지금은 고대 유물의 보호자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고대 유적을 해체해서 전용하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지 않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니까, 그래도 명분은 있네. 이렇게 닫힌 사회가 다시 한 번 열린 사회로 변할 때까지. 고대 유적은 인간과 비와 바람을 끈질기게 견뎌내겠지."
- [황금빛 로마], <아피아 가도>, 시오노 나나미, 1992.

마르코 단돌로가 피렌체에서 올림피아를 우연히 만난 건 시오노 나나미의 작위적 설정이기는 해도, 결국 로마로의 여정을 이끄는 촉매제였다. 베네치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첩자 노릇을 하던 올림피아가 '10인 위원회'에게 베네치아의 이중첩자를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는 마르코보다 피렌체로 먼저 옮겨간 것인데, 피렌체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제는 함께 올림피아의 고향이자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간다.

16세기 로마는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다르다. 로마에는 어디를 가나 '고대'가 늘 함께 한다. 공직을 떠난 마르코 단돌로가 로마 지역 어디를 가나 항상 '고대'가 따라 다닌다. 로마에서의 모든 여정은 '고대로의 여행'인 것이다.

로마에서 마르코의 고대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고대유적지 발굴인부 출신 엔초 노인은 학식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탄 경험을 담아 말한다. "로마인은 제국이 멸망하기 2백년 전부터 조금씩 죽기 시작했고 그들이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제국도 멸망한 것"([황금빛 로마], <고대로의 여행>)이라고. 
문명은 도시와 그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그 문명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명은 언제나 그 전성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명의 필연적 변화 과정이다.

마르코 단돌로와 올림피아,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의 세 도시를 누비던 두 연인,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가상인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창 무르익은 사랑의 절정에서 이미 쇠퇴의 기운을 내포한 채 비극적 이별로 막을 내린다.

공화정인지 왕정인지의 정치체제적 구분은 다수 민중의 인권과 민주적 시민권력이 등장한 근현대 정치사회부터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의 16세기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에서도 '공화정'과 '왕정' 또는 '제국'은 그 구분이 모호했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진심이든 아니든 줄곧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현대 정치에서 민중권력은 여전히 '공화국'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수 민중의 권익을 위한 정치체제는 역시 고대로부터 흘러온 숱한 문명들의 참고가 필요하겠다.

모든 만물은 전성기와 함께 곧 쇠퇴할 운명이지만 과거로 표현되는 역사를 곳곳에 품고 있는 한, 늘 '르네상스(부흥)'를 가능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말하고자 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말기의 [황금빛 로마]였다.

또한 그녀의 [세 도시 이야기]는 나하고는 정치사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만년에는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나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이기도 하다.

다시금,
[세 도시 이야기]를 아버지 방의 책장에 조용히 되돌려놓는다.

***

1. [주홍빛 베네치아](1989),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2. [은빛 피렌체](1991),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3. [황금빛 로마](1992),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4. [십자군 이야기 1~3](2010~2011),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2012.
5.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6.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7.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8.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4.
9.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10. [미켈란젤로의 복수], 필리프 반덴베르크,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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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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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
- [주홍빛 베네치아] / [은빛 피렌체] /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89~1992.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던 건 다음에 읽을 책을 찾지 못해서였다. 

보수적인 아버지와 이념성향은 매우 달랐지만 나는 어릴적 아주 가끔 아버지의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도 했더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도 최근에 아버지 방에서 뜻하지 않게 찾아낸 책이었다.

아니, 책보다는 그냥 오랫만에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여태 미루고 있는 아버지 일기 찾기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 방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좀더 내 마음에 담아두기로 생각하고 만다.

아버지가 말기 폐암 선고를 받기 얼마전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큰 누나와 함께 유럽 여행을 보내드렸었다. 1970~80년대에 중동 산업역군으로 다녀오신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했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지만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해외여행을 가보신 적이 없었는데, 여든이 넘어 가셨던 보름간의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는 참으로 열심히 돌아다니셨단다. 그나마 내가 아들로서 했던 몇 안되는 효도행위였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유럽 여행을 회상하셨고, 그 여행 전후로 구입하신 책이 양정무의 [난처한 미술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로 추정된다.

난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심정으로 한 손에 딱 들어오는 그 책들을 한 권씩 쥐고 지난 며칠간 출퇴근을 했다.


1. [주홍빛 베네치아], 시오노나나미, 1989.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즘의 공화국 치고는 강력한 공화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비상시에는 공화국 국회나 원로원에서의 일반 토의를 거치지 않고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 위원들의 토의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공화국의 경우, 종래와 같은 정치체제를 지키려 들면 나라가 망해버릴테고, 국가의 멸망을 피하려면 정치체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하는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정략론]에서 인용, [주홍빛 피렌체], <10인 위원회>, 시오노 나나미, 1989.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1960년대에 홀로 이탈리아로 넘어가 어느 소속도 없이 독학하면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유럽의 이야기를 소설 같은 작법으로 풀어냈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씌어진 그녀의 작품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기반한 '역사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나는 [로마인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고, [십자군 이야기](2010-2011)를 통해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은 잠시 구경해보았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를 돌아다니며 풀어내는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는 아마도 1992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편씩 발표한 그녀의 초기 '역사소설' 작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엄정한 역사 고증까지는 아닐테지만 주인공인 베네치아 귀족정치인 마르코 단돌로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이다. 각 권마다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피렌체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빼고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양념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한다.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기관인 '10인 위원회'에 속한 주요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정세 속 관망자에 불과하다. 그의 애인으로 나오는 로마 여인 올림피아는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에 나오는 고급 창녀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로서 실제 인물처럼 설정되어 있기는 하나 역사 속 인물이라기 보다는 가상인물인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와 다른 역사적 실제인물들을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가상인물에 가깝다. 티치아노의 그림 속 여인은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로 되어 있지만 이후 300년 이상 지나 에두아르드 마네가 티치아노의 이 그림을 모태로 하여 그린 [올랭피아(올림피아)](1863)를 모티브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올림피아'가 탄생한 듯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주홍빛 베네치아](1989)에서 물의 도시이자 해양교역국 베네치아의 공화국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16세기 르네상스 말기 지중해 지역 유럽과 서아시아 정세를 이야기한다. 당시는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당대 최강대국 에스파냐 왕인 합스부르크가의 카를5세의 가톨릭 세계와 서아시아의 술탄 쉴레이만이 통치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계가 충돌하던 시대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해양교역과 무역으로 살아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왕이나 술탄이 없는 공화정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소수 의결체제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바로 '10인 위원회'였다. 오늘날의 중앙정보기관이자 국무회의급 기관인 10인위원회는 2천명 귀족국회(하원)와 2백명의 원로원(상원), 공화국의 최고통치자인 통령(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비공식 의결기관으로서 주인공 마르코 단돌로는 10인 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베네치아와 투르크의 협력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그의 애인인 로마 출신 고급 창녀 올림피아가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첩자로 드러나면서 공직에서 3년간 휴직을 명받는다.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을 맞아 이웃국가 피렌체로 여행을 간 이야기가 '세 도시 이야기'의 두번째 이야기 [은빛 피렌체](1991)로 이어진다.

피렌체 출신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는 물론 [세 도시 이야기]에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자 구경꾼인 마르코 단돌로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가다. [군주론]과 함께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이라는 [정략론]에서는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화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적 절차는 참으로 완만한 것이 보통이다. 입법에서나 행정에서나 무엇이든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대개의 일은 다른 몇 사람과 공동으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의사를 통일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완만한 방법은 한시의 유예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따라서 공화국은 이런 경우를 위해 (고대 로마의) 임시 독재집정관 같은 제도를 반드시 만들어두어야 한다."

집단의결이라는 공화국의 단점을 보완하는 '독재집정관' 제도는 베네치아에서는 '10인 위원회'였고, 18세기까지 굳건히 '공화정'을 유지한 [주홍빛 베네치아]는 전제정으로 변해간 이웃 '공화국' 피렌체와 달리 이런 제도를 통해 당분간 공화정을 지켜나간다.


2. [은빛 피렌체], 시오노 나나미, 1991.

"아름다운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단테의 유려한 글과 보티첼리의 섬세한 삽화, 브루투스의 어두운 정열과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리얼리즘. 이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로렌치노의 본심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 [은빛 피렌체], <프리마베라>, 시오노 나나미, 1991.

마르코 단돌로가 휴직기간에 여행간 피렌체는 겉으로는 공화정이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 카를5세의 사위인 메디치가의 사생아 알렉산드로가 왕처럼 전제정치를 펼치다가 역시 메디치가의 방계혈족인 로렌치노에 의해 암살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메디치가는 그 선대인 15세기의 코시모부터 로렌초 일 마니피코까지의 지배자들이 르네상스 전성기 문명을 이끌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르네상스 전성기 예술가들의 활약은 메디치가 후원의 피렌체가 주무대였다.

알렉산드로 대공을 암살하게 되는 메디치가 귀족 로렌치노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라마베라(봄)] 및 보티첼리의 삽화가 담긴 단테의 [신곡]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근대 정치사상을 두루 갖춘 인물로 그려지나 그가 독재자를 암살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알 수 없다.

로렌치노는 마르코 단돌로를 당대 피렌체 예술계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만나게도 하는데, 소설 속 마르코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현장을 직접 보기도 한다. 
나는 [천지창조] 등이 포함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비밀을 담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의 소설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다음에 읽을 책으로 골랐는데, 이 또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후에 공화정을 완전 탈피하여 토스카나 공국이 된 피렌체는 로렌치노의 알렉산드로 대공 암살사건 이후 새롭게 대공이 된 코시모에 의해 다시금 전제정치를 강화하게 되는데 이 역설적인 일련의 과정은 르네상스 말기 귀족공화정의 필연적 몰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로마 시대 브루투스의 공화주의적 열정이 독재자 카이사르를 죽였으나, 시대는 역설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제국'을 불러왔던 것처럼.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을 철학이나 윤리학 등으로부터 분리시킨 사상가로서 전제정이든 공화정이든 고정된 체제가 아닌 부국강병과 권력의 생존이라는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근대 정치사상을 정립했지만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자와 맹자,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 등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철학을 당장의 시대는 따라갈 '동력'을 갖지를 못하니, 그럼에도 선진사상들은 항상 나중이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은빛의 피렌체]는 사라져 가지만, 르네상스 전성기와 함께했던 한 시대의 쇠퇴와 새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


3. [황금빛 로마], 시오노 나나미, 1992.

"남을 배척하면서까지 자기 신앙을 지키려드는 광신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 고대 유적의 해체도 다시금 시작될 걸세. 꺼림칙한 기분 따위는 조금도 없이, 대낮에 당당히 하겠지. 지금은 고대 유물의 보호자 같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고대 유적을 해체해서 전용하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지 않을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니까, 그래도 명분은 있네. 이렇게 닫힌 사회가 다시 한 번 열린 사회로 변할 때까지. 고대 유적은 인간과 비와 바람을 끈질기게 견뎌내겠지."
- [황금빛 로마], <아피아 가도>, 시오노 나나미, 1992.

마르코 단돌로가 피렌체에서 올림피아를 우연히 만난 건 시오노 나나미의 작위적 설정이기는 해도, 결국 로마로의 여정을 이끄는 촉매제였다. 베네치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첩자 노릇을 하던 올림피아가 '10인 위원회'에게 베네치아의 이중첩자를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는 마르코보다 피렌체로 먼저 옮겨간 것인데, 피렌체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이제는 함께 올림피아의 고향이자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간다.

16세기 로마는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다르다. 로마에는 어디를 가나 '고대'가 늘 함께 한다. 공직을 떠난 마르코 단돌로가 로마 지역 어디를 가나 항상 '고대'가 따라 다닌다. 로마에서의 모든 여정은 '고대로의 여행'인 것이다.

로마에서 마르코의 고대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고대유적지 발굴인부 출신 엔초 노인은 학식이 아닌 세월의 흐름을 탄 경험을 담아 말한다. "로마인은 제국이 멸망하기 2백년 전부터 조금씩 죽기 시작했고 그들이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제국도 멸망한 것"([황금빛 로마], <고대로의 여행>)이라고. 
문명은 도시와 그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그 문명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명은 언제나 그 전성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명의 필연적 변화 과정이다.

마르코 단돌로와 올림피아, 베네치아와 피렌체 그리고 로마의 세 도시를 누비던 두 연인, 사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가상인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창 무르익은 사랑의 절정에서 이미 쇠퇴의 기운을 내포한 채 비극적 이별로 막을 내린다.

공화정인지 왕정인지의 정치체제적 구분은 다수 민중의 인권과 민주적 시민권력이 등장한 근현대 정치사회부터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의 16세기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에서도 '공화정'과 '왕정' 또는 '제국'은 그 구분이 모호했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진심이든 아니든 줄곧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현대 정치에서 민중권력은 여전히 '공화국'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수 민중의 권익을 위한 정치체제는 역시 고대로부터 흘러온 숱한 문명들의 참고가 필요하겠다.

모든 만물은 전성기와 함께 곧 쇠퇴할 운명이지만 과거로 표현되는 역사를 곳곳에 품고 있는 한, 늘 '르네상스(부흥)'를 가능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말하고자 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말기의 [황금빛 로마]였다.

또한 그녀의 [세 도시 이야기]는 나하고는 정치사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만년에는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이기도 했던 나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이기도 하다.

다시금,
[세 도시 이야기]를 아버지 방의 책장에 조용히 되돌려놓는다.

***

1. [주홍빛 베네치아](1989),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2. [은빛 피렌체](1991),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3. [황금빛 로마](1992),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8.
4. [십자군 이야기 1~3](2010~2011),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2012.
5.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6.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7.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20.
8.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4.
9. [로마제국 쇠망사](1776~1788), 에드워드 기번 지음, 데로 손더스 편집, 황건 옮김, <까치>, 2010.
10. [미켈란젤로의 복수], 필리프 반덴베르크, 안인희 옮김, <한길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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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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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범한 여인'의 초상
- [마리 앙투아네트], 스테판 츠바이크, 1932.


"'평범한 인물'이 자신에게 가능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이전부터 예견하고 느끼고 있었던 것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 밖으로 내쳐져야 한다. 그 목적을 위해서 운명이 쥐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불행'이라는 채찍이다."
- [마리 앙투아네트], <서문>, 스테판 츠바이크, 1932.

의외의 '영웅론'을 접했다.

나카노 교코의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를 읽고 나서 이제 비로소 스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에서 뜻하지 않게 '영웅론'을 읽었던 거다.

오스트리아의 전기작가이자, 1920~1930년대 유럽 최고의 작가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로 불렸던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 1881~1942)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단두대(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 1755~1793)'의 전기소설를 쓰면서 그 <서문>에서 다룬 주제가 의외로 '영룽론'이다. 

문헌에 기반한 역사소설이라기 보다는 조작되지 않은 여러 서신 편지들을 근거로 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인물들의 심리를 파헤친 심리소설에 가까운 이 책의 부제는 '어느 평범한 여인의 초상'이라고 한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프랑스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족이라는 신분 외에는 역설적이지만 비범하거나 특출난 인물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역사의 격변이 아니었다면 남편 루이16세처럼 두드러질 것 하나 없었을 아주 '평범한 여인'에 불과했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역사는 '영웅' 뿐만 아니라 '불행'이라는 고난을 겪으며 고귀하게 성장하는 '평범한 인물'로 인해 더욱 '감동적인 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츠바이크의 생각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철딱서니 황녀로 태어나 14살에 프랑스 부르봉가와의 정략적 외교결혼으로 프랑스 왕세자비를 거쳐 결국 왕비가 된 이 '평범한 여인'이 역사의 대격변기를 맞아 어떻게 고결하고 위대한 최후를 맞게 되는지를 심리추적극처럼 그려내는 이 소설을 마치면서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화하는 일이 모든 창조적인 심리학의 최고 법칙이다. 인위적 논리로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명하는 것이 심리학이 이룩해야 할 과제이다. 이런 과제가 이 책에서는 한 '평범한 인물'을 통해서 시도되고 있다. 이 인물이 시대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오로지 비할 바 없는 운명의 덕택이며, 내적인 위대함을 얻게 된 것은 유별난 불행의 탓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지상에서의 어떤 조건이나 아무런 높임 없이도 현대인의 관심과 이해를 받게 되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 [마리 앙투아네트], <저자 후기>, 스테판 츠바이크, 1932.

스테판 츠바이크의 전기소설 [마리 앙투아네트](1932)의 부제는 '어느 평범한 여인의 초상'이라고 하지만 현재 국역판의 부제는 '베르사유의 장미'로 되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을 그린 궁정화가 루이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의 그림에서 장미꽃을 든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가 있고, 대혁명 전야의 극한적 사치와 향락을 이끈 '로코코의 여왕' 또는 '로코코의 장미'로서 그녀의 강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으로 보인다. 실은 1972년 일본의 신좌파적 순정만화가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 제목에서 유래한다. 고등학교 시절 스테판 츠바이크의 이 소설을 읽은 이케다 리요코가 1968년 신좌파 혁명의 물결을 겪은 후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고른 인물이 마리 앙투아네트였고 그녀와 뒤바리 백작부인의 암투와 스웨덴 귀족군인 페르센과의 사랑, 그녀를 지키려는 남장여인 기사 오스칼의 활약과 비극을 그렸다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 만화가게에서 해적판으로 읽었던 기억이 아련하고 1993년인가 TV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것을 몇 편 보았던 기억이 있다.

1968년 일본의 신좌파 혁명 시기에 공산당원이기도 했다던 [베르사유의 장미] 작가 이케다 리요코는 순정만화의 표본을 통해 '혁명'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그녀가 감옥과 같은 '탕플'이라는 수도원에 처음 갇혔을 시기를 그린 장에서 다음과 같이 '혁명'을 묘사하고 있다.

"혁명이 정말 패배한 왕을 고의적으로 상처 입히고 학대했는지 아닌지 하는 이 결정적인 물음에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이미 상당히 폭넓은 의미를 내포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고한 이상주의에서부터 현실적인 잔악함에 이르기까지, 위대함에서부터 무자비함에 이르기까지, 정신에서부터 그것과는 반대인 폭력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여러 가지로 변색되며 변화한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에 의해서 그 빛깔을 바꾼다. 모든 '혁명'이 다 그렇지만 프랑스 혁명에서도 두 종류의 혁명가가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이런 것은 인간의 '이중성'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서 어느 시대에나 해당된다."
- [마리 앙투아네트], <탕플>, 스테판 츠바이크, 1932.

모든 '혁명'은 인간사의 '이중성'에 기반하여, 처음에는 이상주의적 기치를 올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폭력과 잔악함을 동반한다는 시각이다. 프랑스 대혁명도 마찬가지였다.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던 절대왕정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뒤집어 엎어졌지만 이 과정에서 부르봉 왕족에 대한 사형선고와 '오스트리아 첩자'이자 '창녀'와 같은 로코코의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인신공격과 인격살인은 필수적 요소였다.

천성이 무감각했던 루이16세는 무능한 국왕으로 단지 왕이었기에 새로운 공화국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는데, 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루이16세가 목이 잘린 1793년의 10월에 같은 길을 따라간다. 그녀는 혁명 과정에서 낡은 구체제의 상징으로서 모든 악의에 찬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스테판 츠바이크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철딱서니' 황녀가 얼마나 위대하고 고결하게 왕비로서의 품위를 당당하게 지키면서 최후를 맞았는지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공화주의자'인 현대의 나는 결코 왕정에 대한 동경 따위는 없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 - 어느 평범한 여인의 초상](1932)을 읽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오래전 일본 순정만화 작가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1972)를 보다가 느꼈던 비극적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나도 모르게 느낄까봐 그랬던 거다.

그런데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원래 나의 관심사였던 '혁명'은 뒤로 하고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불행한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 최후에 깊은 연민을 갖게 되었다.

비록 한때는 경멸할 만큼 천박하고 경박했던 왕비였지만 본인에게는 비극적 불행이었던 '혁명' 앞에서, 그 '혁명'의 이면인 폭력과 잔악함 앞에서, 늦기는 했지만 당당하고 고결하게 품위를 지키고자 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편으로 또 다른 인간의 '이중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기요틴으로 담담하게 걸어가던, 
비극적이지만 끝까지 꼿꼿하고자 했던 왕비의 이미지가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련하다.

***

-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1932), 스테판 츠바이크, 박광자/전영애 옮김, <청미래>, 1979~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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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베이비 (악마의 씨)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우 외 출연 / 필림21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反수태고지'의 '기원'
- [악마의 씨], 로만 폴란스키, 1968.


1.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5분 사(巳)시에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듣는 내내 단 하나의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피청구인측에 의해 항변되던 '계엄령' 발동은,
'전시'와 같은 실체적 요건도, 결의 과정의 절차적 요건도 모두 부정되었고,
다수 민중과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배반'의 혐의로 위헌이 되었다.
군통수권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군대는 더이상 45년 전의 그 군대가 아니었고, 
불의한 권력에 항거한 민중들은 더욱 더 강고한 민주주의 정신으로 무장했으며 그만큼 더 강해졌다.

내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5.18 광주민중항쟁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여전히,
다수 대중이 정치적 '리더십'을 획득해 온,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이다.


2.

모든 것에는 '기원'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별다른 걸 설명해내지 못한다. 인류의 노동과 창조의 역사는 이 조상들의 초원지대로의 이동과 직립보행으로 인한 양손의 자유를 그 '기원'으로 한다.

내가 생각하는 역사 속 모든 '기원'의 위상은 그런거다.

영화로 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쟝르는 종교적 '이단'을 주제로 하는 '오컬트'인데, 역시 그 '기원'이 궁금해졌다.

1976년작 [오멘]은 사탄의 아이가 세계적 강국인 미국의 유력 정치인 로버트 쏜의 아들로 '지정'되는 '1편'을 시작으로,
1979년 '2편'에서는 유력 정치인의 집안인 쏜 가문의 경제적('쏜 인더스트리') 권력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는 성장기를 거쳐,
1981년에는 청장년의 사탄이 되는 '3편'으로그려졌다.

그 후 '1편'의 리메이크도 있었고 숨겨진 사탄의 여동생 이야기도 후속작으로 나왔다지만, 나는 그 속편들까지 굳이 찾아서 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2024년에 [오멘] 시리즈의 '프리퀄', 즉 '사탄의 아이'가 태어나는 근원적 내용, 전작들이 다루지 않은 이야기의 공백을 설명해주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바로, 사탄의 아들, 데미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날 영화 [오멘](1976~2024)에 관한 이야기를 마을의 '영화 전문가' 이진 형님과 술 한잔 하면서 나누던 나는, 내친 김에 이 '적(敵)그리스도(Anti-Christ)' 탄생의 영화적 '기원'까지도 추적하고 싶어졌더랬다.
그렇게 이진 형이 알려준 영화가 [악마의 씨](1968)였던 거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666)'이니라."
- [성경], <요한계시록 13:18>

[오멘] '1편'은 머리통에 '666'이 새겨진 사탄의 아이, 데미안의 유년 시절을,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 [성경], <고린도후서 11:13>

[오멘] '2편'은 사관학교에 들어간 청소년 데미안이 시나브로 본인이 사탄의 아들임을 인식해가는 과정과 그런 데미안을 위해 희생하는 수많은 '거짓 사도'들을 그려낸다.

"...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여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성경], <루가복음 1:26~38>.

그러다가 2024년의 [오멘] '프리퀄'은 이 '사탄의 자식'이자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탄생을 '혼돈의 시대'였던 1968년부터의 신좌파 혁명의 물결을 배경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인 만큼 동정녀와 같은 수녀를 통해 태어난다.

'수태고지(受胎告知)'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反)수태고지'인 것이다. 

[악마의 씨]는 역시 가톨릭 종교와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공고한 기득권에 균열을 냈던 1968년에 프랑스 감독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 1933~)가 만든 영화로, 원제는 [로즈마리의 아기(Rosemary's Baby)]다. 근본은 없지만, 영화 역사상 '사탄의 아이', 즉 '적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한 최초의 영화일 거라고 한다. 
자식을 갖기 위해 밥먹다가도 옷을 벗어 제끼고는 엉켜붙는 신혼부부의 이야기지만 아기는 그 숱한 성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사탄의 추종자들인 '거짓 사도'들의 환영 속 비밀의식을 통해 잉태된다. 
적그리스도의 엄마의 이름은 '로즈마리'인데, 순수의 '백합'이 아닌 하필 붉은색을 연상시키는 '장미(rose)'를 앞에 붙인 '마리아(Mary)'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신약성경]의 <루가복음>에서 기록한 '수태고지'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숫처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장면인데, 이 때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책이 있고 가브리엘에게는 순수의 상징인 백합이 있다.

한편, 영화 [악마의 씨](1968)와 [오멘]의 '프리퀄'로서 [오멘 -저주의 시작](2024)에서의 '반수태고지'는 정상적 생식 과정이 아닌 '거짓 사도'들의 비밀의식을 통한 잉태와 무당과 같은 '신기'를 품은 수녀의 일탈로 인한 잉태를 암시한다. 

[악마의 씨]는 오래된 영화인 만큼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지루하기도 하고 어딘가 악마적 본질이 근본 없어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영화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 그랬다는 말이지만 1968년도에 아마도 영화사상 처음으로 '이단'과 '사탄의 자식' 이야기를 담은 '오컬트' 쟝르의 '기원'으로 생각하면서 본다면, 어느 정도 영화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공고했던 가톨릭의 종교적 권위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이단'과 '사탄의 아들' 이야기의 '기원'으로서의 기념비적 의미 말이다.


3.

'영화'는 끝났다.

1968년의 '혼돈' 속에서 '오컬트' 영화의 '기원'으로서의 [악마의 씨]가 주인공 로즈마리가 악마같은 자신의 아기를 지키기 위한 모성애로 불타는 눈빛으로 끝남으로써,
이후 영화사에서 '이단'과 '사탄의 자식' 이야기를 계속 이었던 반면,

2025년의 대한민국의 일대 내전적 '혼돈' 속에서의 불의한 절대권력자의 '영화'는 '탄핵'과 '파면'이라는 희비극으로 끝남으로써,
이후 예측이 어려운 내전의 소용돌이로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통령이 누가 되었든 상관없이 말이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불러올 '메시아'가 '그리스도'일지 '적그리스도'일지는,
그를 만드는 다수 민중인 우리의 선택이다.
'수태고지'를 할지 '반수태고지'를 하게 될지 또한 천상의 하느님이나 대천사가 아닌,
현실의 다수 대중이 주체가 되는 선택 과정이 될 것이다.
현대 정치에서의 '리더십'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아닌, 다수 '대중'의 것으로 넘어온지 이미 오래다.

결과는 알 수 없이, 
여전히 '혼돈'이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

1. [악마의 씨(Rosemary's baby)], Roman Polanski 감독, 1968.
2. [오멘, 저주의 시작(The First Omen)], 아카샤 스티븐슨, 2024.
3. [오멘(The Omen)], 리처드 도너 연출, 그레고리 펙 주연, <20세기폭스>, 1976.
4. [오멘 2], 돈 테일러, 1979.
5. [어셈블리(Assembly)](2017),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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