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근본 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 역사적 갈등
타카다 모토무 지음, 최미선 옮김 / 책갈피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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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의 전장 속 거대한 두 개의 진영
- [유물론 vs. 관념론], 타카다 모토무, 1974.


1.

결국, 
그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

1993년도에 스무살 대학 신입생이 되었을 때 나는 곧바로 영자신문사에 들어갔는데, '문민정권'임에도 신문사에 버젓이 잔존하던 군사문화가 싫어서 일주일만에 때려치우고 영문과 학생회의 철학학회에 가입했다. 
이름하여, '현대철학반'.

오로지 술 얻어마시고 놀고 싶어 들어갔는데, 역시 '현대철학'을 내건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 철학까지가 커리큘럼이었다. '문학사랑반'이나 '문학이론반' 또는 '영미희곡반'처럼 학회원이 많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떠밀려서 맡은 우리보다 1년 선배 태범이형이 교사 역할을 했고 지도고문 역할의 보현이형과 종선이형, 60년대생 회근옹 같은 몇 안되는 복학생 선배들이 다였다.
신입회원은 나(벅스터)를 포함한 진욱이(정박아), 진영이(지진아) 남학생 3명과 홍일점 여학생 윤주 1명이었다.

옥토끼 같이 귀엽고 싶어서 스스로 지은 별명이 '벅스터(The Buckster)'였던 나와 마산에서 얼굴 철판깔고 올라온 '정박아', 그리고 나름 8학군 반포동 토박이 '지진아', '현철반' 남자 신입생 3인방은 하라는 '철학'은 안 하고 거의 매일 '정박아'의 자취방 인근에서 술추렴하고 차비가 없어 외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철학학회의 커리큘럼에 맞는 주교재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도 내 고등학생 시절 [성문 기본영어]보다 더 많이 봐서 책 두께가 세 배는 불었고 공자의 '위편삼절'처럼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을 정도로 펼쳐보던 책이기는 했다. 자주 읽기도 했다지만 실은 하도 들고 다니며 함께 풍찬노숙하고 술을 마셔대서 걸레짝이 된 책이라는 게 맞다.

그 교재는 제목이 무려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 우리들끼리 줄여서 '철.철.사'였다.
2학년이 된 나는 학회장을 한 번 하고 근엄한 척, 진지한 척, 철학자인 척은 혼자 다 하다가 3학년 1학기 고문까지 하고는 그 해 늦가을에 입대를 했다. 보충대 입소 전날 난 나의 가보와 같던 '철.철.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1년 후 상병 휴가를 나와서 내가 군대 가던 해 1학년 신입회원이었던 여자 후배 미선이를 꼬셨다. 그리고는 다 낡아빠져 그지 같은 '철.철.사'를 그녀에게 맡기고는 홀연히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그렇게 그녀는 군복무 중인 나 대신 '현철반'의 후배들을 지도해야 했다. 닳고 닳은 '철.철.사'를 들고.

그리고는 몇 년 후,
그녀와 헤어지면서 수많았던 다른 책들에 묻혀 나의 '철.철.사'를 돌려받지 못했던 거다.

그녀가 '현철반' 복학생 선배 종선이형 집에 내가 준 책들을 다 맡겼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그 땐 이미 아마도 그 형이 책들을 다 처분한 후였을 게다.

스무살 초반, 
나의 3년간 철학적 투혼이 담긴 '철.철.사'는 그렇게 잊혀졌다.


2.

"철학사의 출발을 장식한 이오니아 자연학의 자생적 '유물론'과 자생적 '변증법'은 관념론과 형이상학의 도전으로 단련되면서 갈지자 행보를 거쳐, 한편으로는 프랑스 '유물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헤겔의 '변증법'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운 새로운 세계관은 이런 약점과 일그러짐을 걷어내고 '유물론'과 '변증법'을 처음으로, 의식적이고 내적으로 결합시켰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5장. 과학적 세계관의 등장: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형성>, 타카다 모토무, 1974.

일본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린다는 타카다 모토무(高田求)는 내가 태어났던 1974년에 일찍이 [유물론 vs. 관념론]이라는 책을 써서 노동계급에게 '철학사(哲學史)'를 쉽게 설명했다. 원시 사회로부터 고대 및 봉건을 거쳐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넘어 마르크스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이 성립되는 철학의 역사를 소개한다. 마르크스의 영원한 동지인 엥겔스의 선언처럼 '철학사의 전장은 유물론과 관념론 양대 진영 사이의 거대한 투쟁'이라는 전제 아래 철학의 역사 속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해 온 유물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몰랐다.
최근 우연히 읽게 된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의 내용은 오래전 우리 '현대철학반'의 교재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의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과 '현철반'은 적어도 1990년도 이전부터 '철.철.사'를 교재로 사용했을 텐데, 마르크스주의 철학서인 '철.철.사'는 민주화의 격동기였던 1987년도에 출간되었다.
오랫만에 검색해 보니 오래전 공저자 중 하나였던 우리학교 선배 철학강사 우기동 선생은 빠져있었다. '80년대 좌파 운동권 냄새 풀풀 풍기며 외국 유학 없이 국내에서만 서양철학을 공부했다던 우직한 우기동 선생이 분명히 '철.철.사'의 공저자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난 우기동 선생의 철학강의를 찾아서 듣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는,
타카다 모토무의 [유물론 vs. 관념론](1974)을 통해 오랫만에 나의 첫 철학교재인 우기동 선생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1987)를 다시 만났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의 철저한 관점에서 2천년 철학의 역사를 '유물론'과 '관념론' 양대 진영의 투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의 엥겔스와 [철학노트](1914)의 레닌이 일관되게 견지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
세상의 운동 원리를 규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세계관의 역사가 정신이 일차적이라는 '관념론'보다는 물질이 일차적 근원이라는 '유물론'의 승리의 역사라는 시각이다.


3.

"... 이런 문제제기와 답변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세계관이 탄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립된 새로운 형식의 세계관, 그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던진 물음에 내놓은 답은 그 내용상 '원초적이고 자생적인 유물론'이라고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2장. 고대 사회: 철학적 세계관의 형성,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 타카다 모토무, 1974.

철학은 고대 인류로부터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출발했다. 원시 사회에서 언어와 말의 발전과 함께 성립된 '관념론'과 종교는 자연과학과 인류인식이 발전하면서 '유물론'에게 도전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시대 구분 없이 모든 철학적 투쟁에서 '관념론'적 경향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유물론'적 경향에 의해 패퇴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4년에 공저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한 '자생적 유물론'은 과학의 발전을 동반하면서 점점 더 '유물론'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간다. 고대의 원자론이나 중세의 유명론 등은 직관에 기초한 '자생적 유물론이었지만, 근대 부르주아 혁명 시대의 과학 발전 과정에서는 진정한 '유물론'의 형태가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역사를 나선형 진보로 엮어내는 '변증법'과의 결합이다.
바로 '유물변증법'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2천년 철학사가 총결산되는 과정이다.
유물론의 진영에서는 '유물변증법'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세계관이 즉 '현대철학'인 것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1913)이라는 소논문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원천을,
1) 영국의 정치경제학, 
2)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3) 독일의 관념론, 
이상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영국의 정치경제학은 '노동가치론'이고, 
2)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는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 대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몽철학의 '유물론'적 경향의 전통이며,
3) 독일의 관념론은 '변증법'적 나선형 진보의 사고방식을 자연과 인류사에 적용시킨 독일 고전철학의 거대한 사상체계로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관념적 사변철학의 집대성체인 독일 고전철학을 '유물론'적으로 바로 세웠다는 의미다. 
이 철학의 정수가 바로 '유물변증법'이다.

'유물변증법'의 관점으로 본다면,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관념론'적 도전은 언제나 과학의 발견 및 진보와 함께 '유물론'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 여기서 다시, '어떤 관념론자가 다른 관념론자의 근거를 비판할 때 그 투쟁으로 성과를 올리는 것은 언제나 유물론이다'라는 레닌의 지적을 떠올려야 합니다."
- [유물론 vs. 관념론], <3장. 봉건 사회와 그 해체기의 유물론과 관념론>, 타카다 모토무, 1974.

레닌은 1914년 [철학노트]에서 모든 철학적 투쟁의 승리와 진보는 '유물론'적 성과라고 반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면서 유럽 노동운동이 반동의 파도에 휩쓸려가던 1914년의 침체기에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거대한 '관념론' 사상체계 속에서 빛나는 '유물론'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이에 역사의 나선형 운동과 변화,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을 결합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서 '유물변증법'의 정당성을 이론은 물론 실천적으로 입증하고자 한다.

현대철학 아닌 '현대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유물변증법'을 대중에게 설명해 주려던 타카다 모토무와 '철.철.사'의 목적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철.철.사', 
나의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4.

"공부 쫌 해라!"

신입생 시절 '현철반' 찌질이 벅스터와 정박아, 지진아 3인방이 여전히 돈이 없어 새우깡과 깡소주를 정박아 자취방 앞 골목에서 까고 있을 때, 지나가던 '87학번 복학생 찬우형이 일갈했다.

같지도 않은 철학 개념들을 남발하며 3인방이 서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한 잔 걸치고 근처 하숙집으로 올라가던 선배가 '니들, 파쇼와 독재의 차이 아나?'라고 경주 사투리로 물었고, 우리는 침묵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선배는 '폭력'이 있냐 없냐의 차이라고 개념적으로 간결히 정리해 주고는 영문과 철학떨거지 3인방을 일일이 쥐어박고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갔다.

멋졌다.
나도 열심히 철학공부를 해서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순간이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항상 부족하지만 끝까지 철학책들을 읽게 된 중요한 계기 중 한 장면이다.

그래서, 타카다 모토무의 오래된 철학책을 읽고, 
오래전 우리의 '철.철.사'를 추억하게 된 김에, 
'철학은 개념을 통해 공통의 이해를 형성'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며 진짜로 '현대철학'까지의 고전들을요약하고 소개해 준다는 일본의 젊은 철학자 히라하라 스그루의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철학 베스트 50](2016)을 다음 책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우연하게도 역시 또 일본 철학자의 책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난 전혀 '친일파'가 아니며,
일본의 좌파 지성계는 그래도 건전하면서 극우 천왕파시즘과 무관하다는 위안을 스스로 하면서 말이다.

마르크스주의 원전을 심도깊게 분석하는 일본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만 해도 나보다 젊지만 매우 뛰어난 내공과 식견을 자랑한다.

배움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지 않겠는가.


5.

책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유물변증법'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짧은 한 시절 사랑하던 후배 미선이에게 '현철반'의 운명과 함께 '철.철.사'를 맡겼지만 시대는 더 이상, '유물변증법'의 편이 아니었다.

전역을 했고 학교로 돌아가 그녀와 이후 잠시 더 만났지만, 이미 '현철반'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철학'을 내걸었음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머물렀던 학회는 20세기 말 대학 내 학회운동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소설을 써서 사라져 가던 '유물변증법', 당시의 용어로 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파하고 싶었다. '현대철학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싶었다.

내겐 지금도, 
'문사철'의 궁극적 세계관이 '유물론'과 '변증법'의 결합인 '유물변증법'이다.

내겐 여전히,
철학의 전장에서 거대한 양대 진영의 투쟁이 보인다.

'유물론' 대 '관념론'의 투쟁이.

***

1. [유물론 vs. 관념론 - 철학의 근본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역사적 갈등](1974), 타카다 모토무, 최미선 옮김, <책갈피>, 2024.
2.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이병수/우기동, <돌베개>, 1987.
3. [세계관 - 당신 지식의 한계](2018), 리처드 드위트, 김희주 옮김, <세종>, 2020.
4. [독일 이데올로기](1844), 마르크스/엥겔스, 박재희 옮김, <청년사>, 1988.
5.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6. [반뒤링론(Anti-During)](1878), F. Engels, 김민석 옮김, <새길>, 1987.
7.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8.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9.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1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11. [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 철학 베스트 50](2016), 히라하라 스구루, 이아랑 옮김, <더디퍼런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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