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우리 당내의 위기 - 러시아어판 완역 레닌 에센스 3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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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걸음 정도 뒤척거리던 시간 : 1995~1997년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레닌, 1904.


"One step forward, Two steps backward."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사무실 책상 메모지에 필기체로 적은 문장이었다.
우리말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 적어놓으면 적어도 기무대 중사는 알아볼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1.

-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여단 사령부 민심처장이 첫 면담에서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해 보다가 독일 철학자 '헤겔'이라고 둘러댔다. 당시 내 머리에 서양철학을 '완성'한 사람은 그래도 존경할만 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민심처장은 별 대꾸가 없었는데 그 노회한 소령 장교는 아마도 헤겔을 모르는 듯 했고, 나는 근대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기갑여단의 '민사심리전'을 맡은 '민심처'의 책임자가 새로 배속된 신병의 사상을 '검증'하는 2차 면접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후에 병사들의 '정신훈련'을 뜻하는 '정훈처'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민심처'는 우리 군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지고 있었는데 민심처 기간병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로 국방일보를 배포하고 방송을 틀었다. 소령인 처장과 중위인 보좌관, 중사인 행정관과 기간병 두 명이 구성원이었고, 신입 이등병이었던 나를 2개월 먼저 입대한 동갑내기 이등병 선임이 매의 눈으로 항시 감시했다. 결국 그 선임은 얼마 안가 이유없이 내 목을 조르며 겁을 주려다가 후임인 내게 호되게 얻어맞고 나서 전역할 때까지 나에게 감히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고 내 군생활은 뜻하지 않게 피고 말았다.

1995년 10월에 입대하여 1996년 10월에 상병휴가 나가서 후배 미선이와 사귀게 된 나는 거의 매일 열 장이 넘는 장문의 연애편지를 썼다. 당시 나의 꿈은 '소설가'였고 1996년은 내가 좋아하던 '90년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가' 김소진이 요절한 해였다. 민심처에서 아침에 신문을 분류하고 스크랩하던 나는 그의 부고기사를 보다가 잠깐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그의 화려하지 못한 비루한 지식인 리얼리즘은 역시 잘나지 못한 내가 따라가기에도 벅찼지만, 그는 당시 나에게 최고의 '리얼리즘(사실주의/현실주의)' 소설가였다. 내가 쓰던 장문의 연애편지는 사실, 단편소설의 습작이었다. 미선이도 비슷하게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그렇게 1년 동안 받은 200여 통의 손편지는 그녀와 헤어진 후로도 오랫동안 내 방 구석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답장들이 담긴 가방을 내다 버린 게 결혼 전후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이제 더 이상 나의 '첫사랑'을 떠올리지 말자고 결심한 어느날이었을게다. 

군입대는, 나에게 "두 걸음 후퇴"였지만,
세상과 격리된 채 습작을 일삼던 그 시기는 어쩌면, "한 걸음 전진"이었다.


2.

"진정한 변증법은 개인적 오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 전향들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 발전을 구체성 속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연구한 것에 근거하여 그러한 전향의 필연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변증법의 기본명제는 추상적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이는 개개인의 생활에서도, 민족의 역사에서도, 당의 발전에서도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강령과 전술의 영역에서 그런 것처럼 조직의 영역에서도 부르주아 심리에 무력하게 굴복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취하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무기를 무디게 만드는 기회주의의 파멸성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권력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당)조직 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다."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R. 변증법에 대한 몇 마디. 두 변혁>, 레닌, 1904.


레닌은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의 2차 당대회에서부터 '다수파'인 '볼셰비키'를 이끌게 된다. 1898년 창당대회인 1차 당대회 후 1902년에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정치 팜플렛을 통해 러시아 차르의 억압적인 전제체제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은 비합법 전위정당이 되어야 하며 이 선진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수 노동계급을 의식화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조직을 결속하는 도구는 당기관지 <이스크라(불꽃)>였고, 이 혁명적 전위정당은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의 '무기'였다. 이 '전위정당파'는 '불꽃파'라는 이념서클이었고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는 '불꽃파'를 비롯하여 '대중정당파'인 지식인 서클과 농민 중심 '인민주의자'들, 시베리아 노동그룹과 배타적 유대인 노동자동맹(분트), 국외사회주의자연맹 등의 '서클'들이 모여 혁명적 정치정당의 강령을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자리였다. 레닌이 지도하던 '전위정당파(불꽃파)'는 엄격한 당원 기준을 명시하고자 했던 반면, 마르토프로 대표되던 후의 '멘셰비키(소수파)'는 '대중정당'으로서 당원의 자격을 대중일반에게 널리 열어놓자고 주장했다. 표결에서는 기권자로 인해 레닌이 '다수파'가 되고, 마르토프가 '소수파'가 되었지만, 원래 대의원표로 보면 볼셰비키의 즉각적 혁명보다는 다수 대중운동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우선 강화하자는 멘셰비키의 일반 민주주의론이 우세했다. 지금의 인식은 물론 당시 서유럽 독일의 사회민주당 강령 또한 그런 '대중주의정당' 노선이었다. 그만큼 레닌주의는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부류였지만, 마르크스가 혁명적이지 못한 대중정당 강령을 비판했듯 레닌은 마르크스를 따라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민주적 대중정당론'을 공격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 [자본론]을 소개한 당대회 의장 플레하노프도 레닌의 편에 섰지만 레닌은 승리를 위해 반대파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결국 일부 반대파와 중간파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면서 '멘셰비키'는 표결에서 패배했다. 승리한 레닌은 '전위정당파'를 '볼셰비키(다수파)'로 규정했고 마르토프와 '불꽃파'의 소수파였던 트로츠키마저 본의 아니게 '멘셰비키(소수파)'가 되고 말았다. 졸지에 '소수파'가 된 마르토프는 소수파의 반격을 개시했지만 레닌은 당대회 분석자료를 방대하고도 세밀하게 저술하면서까지 이 '소수파'를 꼬투리잡고 깔아뭉갰다. 레닌에 동조하던 '중앙파' 플레하노프조차 멘셰비키로 돌아서는 이 집요한 과정에서도 레닌의 중앙식 '민주집중주의'는 마르토프의 '대중민주주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결국 레닌파는 당대회 결정에 따라 당기관지 <불꽃>으로부터도 배제되고 말지만 '전위정당' 강령투쟁에서 승리한 레닌의 '민주집중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명실상부한 혁명적 전위정당으로 자리매김해 버린다. 레닌이 당내의 온갖 '기회주의'와 '경제주의', '대중추수주의(꽁무니주의)' 및 '무정부주의' 경향들과 결연히 투쟁하고자 정리한 저작이 바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1904)인 것이다. 즉, '서클운동'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사회주의운동이 하나의 혁명적 전위정당으로 단결한 것은 운동의 역사에서 "한 걸음 전진"이었고, '기회주의'와 '무정부주의'로 규정된 '대중민주주의'와 분열되어 길고긴 운동내 권력투쟁을 확인한 것은 '두 걸음 후퇴"였다는 의미다. 집요한 권력투쟁의 화신이었던 레닌은 결국 차르체제를 끝장낸 케렌스키의 부르주아 임시정부까지 뒤집어엎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건설하고야 만다. 레닌이 전진했던 "한 걸음"은 러시아 사회주의운동이 후퇴했던 "두 걸음"보다 훨씬 큰 걸음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가장 주요한 명제를 꼽으라면 나는,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라는 한 줄을 뽑는다. 레닌이 보기에 '멘셰비키'가 내건 대중민주주의는 추상적이고 서유럽에나 맞는 주장이었다. 1917년 2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에서나 물러난 수백년 역사의 러시아 차르체제는 1903년 당시만 해도 서슬이 퍼랬고 그런 러시아에서 대중적 민주주의 일반론이 적용될 여지는 없었다. 레닌의 중앙식 민주집중주의는 소수의 전위정당이 다수 노동계급을 선도하고 지도하며 철옹성 같은 차르체제를 일거에 폭력적으로 뒤집는 혁명만이 유일하고도 '구체적'인 전략이라 본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구체적 진리'의 실체였다.

내가 레닌의 혁명을 우러러 보았다면 이유는 바로, 이런 그의 '구체적'인 철학이었고 변증법적 사유였다.


3.

"마르크스, 무인년(1818) 호랑이해 초여름에 독일 라인주 트리어시에서 출생함... 엥겔스... 경진년(1820) 용해, 라인주 바르멘싱 한 자본가 가정에서 태어나다... 레닌... 경오년(1870) 말해,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다... 정사년(1917) 뱀해, 소련의 시월혁명이 성공하고, 47세의 레닌이 소련공산당 총서기가 되다... 스탈린... 기묘년(1879) 토끼해, 스탈린이 조지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다... 마오쩌뚱... 계사년(1893) 뱀해, 마오주석이 사오산층의 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나다."
- [레닌의 키스], <7-9. 해설-경앙당>, 옌롄커, 2003.


내가 군대 사무실 책상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영어 필기체로 소심하게 휘갈겨 썼던 1995년은 사실 러시아 차르체제와 같이 철옹성 같던 80년대 군사독재는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민심처에는 사노맹 자료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선전물이 인용된 책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내가 싫어하던 부대내 사복입은 기무대 중사는 가끔 사무실에 오기는 했지만 일개 사병의 책상 메모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던 시절이었다. 군대내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영창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나는 불침번을 서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1장과 4장을 마치 성경처럼 외웠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두뇌가 정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회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군대내 '성경'과 '불경'이 허용되듯 모든 사상과 이념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나 혼자만의 '자유주의' 사상 때문이었을게다. 어느날 여단 사령부 대회의실을 청소하다가 본 방공대 신임장교가 우리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왔다가 떨어진 '주사파' 후보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지만 한참 후 베네수엘라 사회주의자 차베스 대통령이 군대 장교 재직당시 좌파혁명을 시도했다는 이야기 등으로 보았을 때, 국가를 지키는 군대의 사상이 '자유민주주의' 하나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군대의 이념은 결국 해당 국가 정체성의 물적 표현이었다. 
그렇게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다.


중국의 소설가 옌롄커도 27년간 군대에서 복무한 작가였다. 그는 지속적으로 중국사회의 획일성을 문학적으로 폭로해 왔는데, 2003년 소설 [레닌의 키스]로 인해 아예 군복을 벗는다. 원제가 '수활(受活)'인 이 장편소설은 중국어로 '서우훠(受活)'라는 북부 오지 장애인마을이 중국의 '사회주의혁명'의 역사에서 겪는 고초를 큰 줄기로 하여, 류잉췌라는 당고급간부의 욕망과 몰락을 함께 그린다. 결국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민중들은 '혁명'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배신을 당했고, '혁명'의 역사 속에서 영욕을 누리려는 개인 또한 체제 속에서 고사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흡사 '제3세계'인 콜럼비아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자유민주주의' 미국의 샐린저처럼 '환상적(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문체로 묘사한다. 인민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서우훠'의 장애인묘기공연단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더 이상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국가가 아닌 1998년의 러시아로부터 레닌의 유해를 사들여 레닌 기념관을 세우고 더 큰 돈을 벌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이 무산되는 과정을 매우 장황하고 지루하게 서술하고 있다. 작가 옌롄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옌안의 대장정에 참여했던 혁명가 마오즈 할머니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당고위관료 류잉췌 또한 이 '혁명'의 희생양이라는 것인데, 작가는 '현실주의' 또는 '리얼리즘'이나 '사실주의' 모두가 허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그런 '진실'은 없으며 그의 작업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폭로인 것이다. 결국 그 또한 마르케스나 샐린저처럼 '사실주의'의 한 형태로 보이지만 옌롄커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진실'을 써내는 '현실주의'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레닌의 유해를 구해와서 승진하고자 하는 욕망에 미쳐가는 류잉췌는 본인의 성당과 같은 '경앙당'에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뚱과 김일성까지 모시면서 그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영전 앞줄에 본인의 사진을 앞세우기까지 하는데 '혁명'으로 치장된 '욕망'의 정신병적 현상의 단면이다.

죽은 것으로부터 병적인 '키스'를 갈구하는 한, '혁명'은 없다. '레닌의 키스'는 '혁명의 몰락'이었다. 
'혁명'은 살아있는 현실에 대한 솔직함이다. 비록 레닌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진리는 구체적"이라는 테제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시, '혁명'은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4.

한편, 내가 속한 여단 사령부의 끝자락 '민심처' 옆 언덕 위에는 '군수처'가 있었는데 나는 타자실력을 테스트받고 자전거 잘 탄다고 사기쳐서 뽑혔지만 내 훈련소 입대동기 기준이는 타자실력조차 사기쳐서 '군수처'에 들어갔다. 왕주먹에 인천에서 좀 놀았다던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그 동기 또한 내가 새벽에 자전거를 붙잡고 고생 좀 했듯, 밤새 컴퓨터를 붙잡고 애를 먹었다. 두꺼운 손가락으로 문서를 작성하던 기준이는 그래도 제대할 때 즈음에는 '파워포인트 97'의 대가가 되었다. 아무튼, 아마도 내가 자전거 테스트를 받고 동기 기준이가 컴퓨터 테스트를 받았더라면 우린 애줄없이 본부대가 아닌 공병대나 예하 전차부대로 가서 고생 좀 더 했을 테지만 90년대의 행정병 면접은 허술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매우 '인간적'이기도 했다. 내가 알 수 없는 혹시 모를 '연줄' 같은 게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여튼 내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다.

2개월 위 고참을 만난 나의 첫 군생활이 꼬였다면, 군수처 동기 기준이는 한달 아래 후임을 받아서 활짝 피고 말았다. 물론 나도 얼마 안가 모지리 같은 선임을 몰래 두들겨 패주고 바로 군생활이 이등병 때부터 같이 피고 말았지만. 기준이가 받은 우리보다 한달 늦은 이재환 이병은 나보다 한살 많았고 내 동기 고기준보다 옆 부서의 나와 더 친했다. 학보사 편집장을 했다던 그는 나와 대화가 좀 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단 둘 뿐인 각자의 사무실에서 한두달 밖에 차이 안나는 선임병을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나의 민심처 고참은 표정만 험악했지 약골이었던 반면 가엾은 이재환 이병의 군수처 고참인 내 동기 고기준 이병은 얼굴은 착했으나 주먹이 내 얼굴만했다. 이등병 말호봉 때부터 사무실 생활이 편해진 나는 방송 틀고 어슬렁대다가 커다란 기름 드럼통을 굴리던 재환이 형을 자주 보았는데 난 괜스레 돕는답시고 이재환 이병 옆에서 끝까지 꼬일 그의 군생활을 계속 상기시켜 주곤 했다. 같은 군수처였지만 전역할 때까지 한달 고참 기준이는 사무직이었고 한달 쫄따구 재환이 형은 끝까지 쌩 노가다였다. 어쩌다가 가끔 함께 보초를 서게 되면 나는 한달 후임인 재환이 형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고 여단 사령부 C.P. 뒤를 하릴없이 지키던 우리는 평소 군대에서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학보사를 도구로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도 개입하며 지역 '좌파의 아성'이었다던 재환이 형의 대학 이야기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학회운동을 중심으로 한 나의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 이야기는 군대에서 아무하고나 나눌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상대가 아무리 친한 군수처 동기 기준이라 해도 말이다.

전역을 하고 한참 후 졸업도 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우연히 이재환 병장을 종로 낙원동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소주 한 잔 하면서 나는 그를 형이라 불렀고 역시 편한 마음에 '국가독점자본주의' 이야기를 했다. '좌파의 아성' 출신이었던 재환이 형은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느냐 물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세계관이나 인식의 차이였다기 보다는 생활의 차이였겠다 싶었다. 사무직 노동자를 자처했지만 나는 시민운동과 거리가 있는 한가한 직장인이었고 재환이 형은 시민단체 신문기자였다.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따위를 한가하게 고담준론했고 그는 치열하게 생활로 고민했을 처지로 인한 차이였을 수도 있겠다.

21세기 벽두의 어느날 저녁 종로의 뒷골목에서 소주잔을 나누고 작별의 악수를 나눈 우리는 "또 보자"는 인사말과 달리 더는 만나지 못했다.

어쨌든 여전히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었기 때문이었겠다.


5.

'자유민주주의'의 성역인 대한민국 군대에서, 그것도 장병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던 민심처 소속 장병이었지만 내가 지원한 것은 행정병이었지 정훈병이 아니었다. 그런게 있는지 조차도 난 몰랐다. 나는 새벽에 기상나팔과 군가방송를 틀고는 자전거를 타고 나가 국방일보와 조간신문 수백부를 방송이 끝나기 전까지 가져왔고, 장교가 시키는 온갖 쓸데없는 문서를 작성했으며 가지가지의 허드렛일을 했다. 내가 자대배치 전 보충대에서 본부대로 뽑혀간 이유는 1분에 5백타 이상의 타자실력 및 한글문서편집능력의 사실과 그리고 자전거를 잘 탄다는 거짓말 덕분이었다. 나는 문서작성과 글쓰기는 자신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전거 잘 타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본부대 소속 여단 사령부 행정병과 자전거가 무슨 관계인가 되물어볼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가 택시에 살짝 친 이후로 스무살 넘도록 안 타봤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편한 군생활이었겠지만 실상 자전거를 거의 못 타던 나에게 무거운 신문을 싣고 새벽 빙판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정말로 고역이었다. 역시 "진리는 구체적"이었고, 나의 군생활은 구체적으로 자전거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자전거를 그리 잘 타는 편은 아니다. 이러한 '진실'은 슬프지만 오래도록 변함없다. 보험금 지급하는 노동으로 십수년 넘게 가정을 꾸려온 내가 지금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보험금 지급업무다.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매일 글쓴다고 끄적거리는 지금까지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 아마도 글쓰기인 것처럼.

하라는 국방은 안 하고 연애편지나 쓰다가 홀로 밤에 [공산당선언]이나 성경처럼 외우던 나는 다행히 영창은 안 갔다. 시대는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었고, 10년만 먼저 태어났다면 아마도 난 그럴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때그때마다 죽지않을 길을 찾아가는 법이다. 지금 와서는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던 1995~1997년 당시의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미쳐버릴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두 걸음" 뒤척거렸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한 걸음" 정도는 앞으로 내딛었을지도 모를 1995~1997년 나의 군시절 이야기다.


***

1.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 우리 당내의 위기](1904), 레닌, 최호정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6.
2.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최호정 옮김.
3. [레닌의 키스(受活)](2003), 옌롄커,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2020.
4.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5.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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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2-02-19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진 출판사의 책들을 읽던 시간이 생각 나네요... 책 잘 못 버리는데, 어느날 그 출판사 책은 버릴 책으로 제일 먼저 뽑게 되더라구요.... 잘 봤습니다~

beatrice1007 2022-02-1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출판사가 <전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책이 없어서 기억이 안났어요.

프레임 2022-07-1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9년에 군대간 뒷세대지만 군대에선 차마 레닌이나 맑스 책은 못 꺼내 읽었습니다. 항상 머릿속에서만 생각했죠. 전역하면 꼭 읽으리라. 하구요

beatrice1007 2022-07-2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군대 내에서는 절대 구할 수도, 소지할 수도 없는 책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