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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타이 -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리처드 A. 가브리엘 지음, 박리라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칭기스 칸의 위대한 장수, '수부타이'
- [수부타이], 리처드 가브리엘, 2004.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수부타이(Subotai)'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2개 민족을 정복했고 65차례 대격전에서 승리했다고 말한다."
- [수부타이], <머리말>, 리처드 가브리엘, 2004.
다수 민중들이 만들어 간 시간의 기록이 역사라 생각하는 나는,
'1등', 즉 '1인자'만 기억하는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건을 극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필요하긴 한데,
12~14세기 아시아를 지배했던 '몽골 대제국'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칭기스 칸(테무진 : 1162~1227)'과 그 일족이라는 '주인공'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황금 씨족'인 칭기스 칸 일족의 세습 '울루스(칸국)'의 '세계정복'을 가능하게 했던 '2인자'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칭기스 칸의 용장(勇將)',
'수부타이(수부데이/Subotai : 1175~1248)'다.
"... 확실한 것은 다만 1187년 이른 봄 '테무진(칭기스 칸)'과 대장장이 자르치우다이의 두 아들(젤메/수부타이)과의 만남이 세상을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1206년에는 몽골 부족 대표가 다 모인 대회의('쿠릴타이')에서 지도자로 뽑힌 테무진이 새 칭호('칭기스 칸')를 얻어 세계를 두려움으로 몰아넣게 된다. 오래전 그 5월의 들판에서 한때 도망자였던 테무진은 '칭기스 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르치우다이의 둘째 아들('수부타이')도 훗날 세계를 뒤흔들게 된다. 자르치우다이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몽골 소년이 무사가 되는 열네 살이 되자, 우랑카이족의 보금자리를 떠나 테무진의 군대로 들어간 뒤 군인이 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수부타이(Subotai)'로 훗날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장군으로 명성을 떨쳤다."
- [수부타이], <1장. 용장 수부타이>, 리처드 가브리엘, 2004.
초원 유목민들에게 시베리아 지역의 순록과 산속 동물의 모피를 공급하던 산림 부족인 '우랑카이족'에 속한 대장장이었던 자르치우다이는 갓 태어난 자신의 첫째 아들 젤메를 위탁하기 위해 '몽골족'의 족장이자 훗날 '칭기스 칸'이 된 테무진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를 찾아갔으나, 마침 테무진이 태어나는 바람에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간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187년 5월, 늙은 대장장이 자르치우다이는 어느덧 스무살이 넘은 큰아들 젤메와 그의 동생 수부타이를 데리고 예수게이를 다시금 찾았다. 그러나 이미 예수게이는 죽었고 이십대인 그의 아들 테무진이 곤경에 처한 채 몽골족을 이끌고 있었다. 오랜 약조라도 반드시 지키는 유목민답게 자르치우다이는 우랑카이족인 큰아들 젤메를 몽골족에 맡긴다. 둘째아들 수부타이는 자르치우다이 본인의 가업인 대장장이를 잇기 위해 다시 데리고 오지만 수부타이는 몽골족이 군인이 되는 열네살이 되자 가업을 버리고는 테무진의 군영으로 들어가게 된다.
몽골족은 초원 유목민으로서 12세기 당시 북아시아를 누비던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족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초원 부족 일체를 통일한다. 1206년 초원 유목민족의 대회의인 '쿠릴타이'를 통해 '칭기스 칸'(위대한 칸 중의 대칸)으로 등극한 테무진의 몽골부족을 따라 이 대통합 유목민족은 '몽골족'으로 칭해졌다.
몽골족은 세살부터 말을 타고 다섯살이면 활을 쏘기 시작했다는데, 수부타이가 속한 우랑카이족은 광범위하게는 '몽골족'에 부속되기는 했다지만 초원 유목민이 아닌 산림 부족이었기에 어쩌면 수부타이는 테무진의 군영에 들어갔을 때까지 말도 못타고 활도 제대로 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12~13살에 거대한 풍체의 당당한 스무살 테무진을 만나 감명을 받았을 수부타이가 곧 몽골의 군영에 합류했을 초기에는 군사적으로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테무진의 천막지기 또는 문지기 등의 심부름꾼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부타이는 전형적인 몽골인이었다. 전쟁과 모험으로 삶을 채워 온 그는 지도자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같은 삶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한 몽골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사는 제국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국(들)을 '정복'하는 것 뿐이었다."
- [수부타이], <3장. 금(金)과의 전쟁>, 리처드 가브리엘, 2004.
그러던 수부타이가 어떻게 '몽골 대제국'의 '2인자'인 '오를로크(원수)'가 되었을까.
미 육군대학원 교수였던 리처드 가브리엘(Richard A. Gabriel)은 서양인 최초로 수부타이의 전기를 썼다.
1240~1260년 사이에 집필된 몽골 대제국 역사를 노래한 대서사시 [몽골비사(Secret History of the Mongols)]를 토대로 한 이 책의 제목은 [칭기즈 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Genghis Khan's Greatest General, Subotai the Valiant)](2004)다.
몽골족장 테무진이 고난을 딛고 자신의 부족을 핍박하던 타타르족-케레이트족-나이만족-메르키트족을 파죽지세로 섬멸하는 과정에서 테무진의 '4대(네 마리) 충견' 중 하나였던 수부타이는 탁월한 정보력과 기만전술, 기습전과 심리전의 대가로서 용장(勇將/The Valiant) '바투르'가 된다. 칭기스 칸 등극 전 마지막으로 메르키트족을 말살할 때 수부타이는 적진에서 주군 칭기스 칸을 배반하는 척 하는 기만전술로 활약했다는데, '4대 충견' 중 나머지 장수들인 쿠빌라이와 제베, 젤메(수부타이의 형)와 같은 전사들에는 용맹함에서 다소 미치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정보전과 심리전, 기습전과 기만전술의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칭기스 칸의 후대 쿠빌라이 칸과 다른 인물인 쿠빌라이는 다른 민족의 왕자였고 후에 수부타이와 함께 오를로크(원수)로 진급한 맹장 제베는 타이치우트족의 전사로서 후에 카라 키타이(거란족 서요)를 멸망시켜 몽골과 흐와리즘(중앙아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를 없앴으며, 젤메는 동갑내기 테무진과 이십대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우랑카이족, 수부타이는 그런 젤메의 동생이었다. 이들 칭기스 칸의 '4대 충견'은 같은 몽골족이 아닌 오로지 실력과 능력으로만 발탁된 위인들이었다.
기라성 같은 이 맹장과 용장 중 수부타이의 특기는 바로 '정보전/심리전/기습전/기만전/외교전' 등 근현대 군사전략에서도 선구적인 전술들이었다.
리처드 가브리엘은 '칭기즈 칸의 위대한 장수' 수부타이의 전기를 통해 현대전에서도 참고할 만한 수부타이의 군사적 전략전술을 8개의 장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수부타이는 그의 군사적 능력을 변함없이 발휘하면서 칭기스 칸과 함께 동쪽의 금나라(알탄 칸)를 정벌했고(1211~1216), 중아아시아 흐와리즘 이슬람제국(무함마드 샤)을 멸망시켰으며(1219~1224), 칭기스 칸의 사후에도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우구데이) 칸의 치세 하에 서방의 헝가리(벨라4세)와 북방의 러시아 지역을 공략(1237~1242)했다.
수부타이는 칭기스 칸 사후 그 일족들의 세습 과정에서도 꾸준히 칭기스 칸의 창업정신을 지키며 제국의 '통치'보다 제국들의 '정복'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는 73세인 말년에 중앙의 권력투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는, 본인이 한때 누비던 서아시아의 다뉴브 강가(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 지배영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수부타이는 러시아와 유럽의 모든 형세를 꾸준히 파악하고자 첩자들과 비밀전령사들을 다수 남겨 두었다. 이들을 통해 얻는 정보는 몽골 정보부에 전달되었고 정보부는 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적, 종교적 대립관계 등을 문서로 기록해 두기 시작했다. 수부타이의 러시아 정찰은 3년여 동안 거의 1만 킬로미터(약 8천 km)를 이동한 역사상 가장 긴 기병 원정이 되었다."
- [수부타이], <5장. 위대한 기마공격>, 리처드 가브리엘, 2004.
타고난 '몽골전사'는 아니었던 수부타이가 전장에 나갔을 초기에 칭기스 칸은 겨울에 쉬느라 말을 야위게 하지 말고 원거리 행군에서 사냥은 먹을 만큼만 적당히 하라는 등 초원 유목민 전투전술의 가장 기본적인 당부를 편지로 써주었단다. 같은 '오를리크(원수)'였던 제베 같은 군사 지휘력은 없었던 모양이나 '정보전'의 대가로서 그만큼 칭기스 칸으로부터 신임을 두텁게 얻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수보타이는 수만 명의 군대인 '만호'의 지휘관이었지만, 그의 군대는 정벌전 위주의 본대라기 보다는 '선발대' 또는 '정찰대'에 가까웠다.
'공성전'을 체득하게 된 금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그랬을 테고, 흐와리즘 이슬람 제국 정복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서북방의 러시아와 동유럽 정벌전쟁에서도 수부타이의 부대는 정복보다는 정찰과 정보전, 심리전과 외교전략으로 적국을 파악하고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는 바투 같은 칭기스 칸 일족이 이끄는 본대가 분열되고 소요하는 적을 정벌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수부타이 정찰부대는 서방공략 3년 간 항법장치나 길잡이, 그리고 증원부대도 없이 8천 ~ 1만 킬로미터를 내달렸다.
참고로 알랙산더 대왕의 기록은 4,800km였단다.
"몽골군이 군사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군 고유의 구조가 아닌 작전술이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군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승리를 결정짓는 요인은 군대의 특성 그 자체보다는 '능력있는 지휘관'이 군대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있었다. 결국 앞선 두 세기 동안 전장을 누볐던 그 어떤 유럽 지휘관 보다도 훨씬 더 우수한 지휘관이 '수부타이(Subotai)'라는 이름으로 몽골군에 몸담고 유럽 침공을 주도했던 것이다."
- [수부타이], <6장. 서양 공격>, 리처드 가브리엘, 2004.
몽골 대제국의 서방 공략은 2대 대칸 오고타이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더 진행되어 오스트리아 빈을 넘어 서유럽 일대까지 뻗어나갔을 수도 있었다는 후세의 평가를 받는다.
과연 '세계정복'으로 일컬어지는 몽골군대의 전방위적 기병 행군은 '칭기스 칸의 위대한 장수'이자 몽골제국의 실질적 '2인자'였던 '용장(勇將)' 수부타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정보전과 심리전으로 적국의 내부 정치를 파악하고 소요시키며, 외교전으로 적국들의 연합을 사전에 방해하거나 와해시킨다.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전과 기동전의 결합으로 1,2,3차 중층 방어진지인 적의 '종심(縱深) 방어선'을 붕괴시키는 '종심전투술'은 현대전에서도 유효한 전술로서 20세기 소비에트연방(소련)의 군대에 의해 계승된다.
끊임없이 분열하던 유럽 열국의 쟁투에 밀려 동방의 아시아 유목민들을 주로 상대하게 된 러시아는 정치로서나 전쟁으로서나 몽골제국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억압적 통치로 유명한 러시아 차르체제의 기원은 다름아닌 몽골제국이었다.
"근대 이후 군사작전 이론과 훈련법의 대다수는 '수부타이'와 그가 이끈 몽골군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오늘날 강조하는 '속도', '기동력', '기습', '포위공격', '후방전투', '종심(縱深)전투', '섬멸전' 등은 모두 수부타이가 지휘했던 군사작전에서 처음 등장한 수부타이 특유의 전술들이다."
- [수부타이], <머리말>, 리처드 가브리엘, 2004.
'흩어져 행군하고 뭉쳐서 싸운다'(같은책,<8>)는 몽골군대,
전략적 목표가 세워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는 절대적 재량권을 지닌 유능한 군사 지휘관(장수)이 이끄는 무적의 이 '악마의 기수들(Devil's Horsemen)'(같은책,<2>)을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은,
'언제나 상대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가는'(같은책,<8>) 수부타이의 대규모 정찰부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칭기스 칸에게 있어서 수보타이는,
한고조 유방의 대장군 한신과 같다.
수보타이와 한신의 최후가 비록 다르긴 하나,
역사에서 '2인자'가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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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칭기즈 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Genghis Khan's Greatest General, Subotai the Valiant)](2004), Richard A. Gabriel, 박리라 옮김, <글항아리>, 2014.
2. [몽골제국 연대기(집사/集史)](1317), 라시드 앗딘 하마다니(Rashid al-Din Hamadani), 김호동 편역, <사계절>, 2024.
3. [사기(史記)](기원전 1~2세기), <회음후열전>, 사마천(司馬遷),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