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코담뱃갑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8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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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존 딕슨 카
- 존 딕슨 카, [해골성]/[세 개의 관]/[황제의 코담뱃갑]/[제3의 총탄], 1931~1954.


마을도서관이 대량으로 새로 들여놓은 <동서미스터리북스(DMB)> 시리즈 덕분에 요즘 잠시 '미스터리소설'에 빠져 지내고 있는 중에, 어린 시절 영국의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미국의 엘러리 퀸(그리고 바너비 로스)만 읽어대면서 말로만 들었던 S.S. 반 다인까지 읽게 되었다.

그렇게 요즘 휴일이면 어김없이 동네 뒷산인 초안산을 종주하고는 마을도서관에 들러 지난 주에 빌린 책을 반납하고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를 둘러보다가 또 빌려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미스터리소설'과 '탐정소설'의 원조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중단편집도 다시 읽고 짧았던 '미스터리북스' 여정을 접으려고 했더랬다.

그런데 도서관 책장에 늘어선 수십 권의 '미스터리북스' 책들이 휴일의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반 다인에서 에드거 앨런 포로 거슬러 오르게 했다가 다시 곁가지로 뻗어가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만난 작가가 바로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탐정들이 구사하는 이른바 '연역소거법'은 내가 읽기로는, 
탐정소설의 시조새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그의 후예인 영국의 코넌 도일과 길버트 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린' 추리에서 이후 20세기 중반 미국의 닫힌 '밀실추리'로 이행하는 일종의 과도기로 보이는데, 도일과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귀납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쫓아간다는 점에서 '열린' 개방형인데 반해 '밀실추리'는 엄격히 한정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과 추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방된 공간인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전자는 소위 '리얼리즘' 또는 '현실파' 추리소설인 것이고, 
'밀실'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시작하여 오로지 그곳에서 마무리되는 후자는 이른바 '본격파' 추리소설로 분류된다고 한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연역소거' 추리기법은 내가 보기엔 열린 '현실' 추리소설에서 밀실로 대표되는 '본격' 추리소설로 넘어가는 가교와도 같다는 말이다.
'연역소거법'과 '밀실살인'은 현실에는 없는 제한된 공간과 그 속의 사실관계만을 모두 제시하고는 독자들에게 '문제(수수께끼/미스터리)'를 내고는 대놓고 풀어보라 제안한다. 그래서 이 '밀실살인' 추리소설은 '현실'적이지 않은 '본격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것이며, 그 정점에 바로 '존 딕슨 카'가 있었던 거다.

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은 실로 여러 명인데, 대표적인 인물은 '앙리 방코랑', '기디언 펠', '다모트 킨로스', '마키스 대령' 등이 있다.


1. [해골성(The Castle Skull)](1931) : 앙리 방코랑

"제프, 내가 예언을 해주지. 폰 아른하임 남작은 나를 앞지르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네. 자기의 계획대로 일찍이 명배우 마일런 아리슨(피살자)이 화려했을 무렵 무대에서 관중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어하는 걸세. 그의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는 우리 앞에서 연극을 한 거라네. 튜턴 인종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그 훌륭한 연극을 구경하고 싶은 기분도 없지는 않네. 그러나 내게도 반항심이라는 것이 있거든. 멍하니 그의 연기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 [해골성], 존 딕슨 카, 1931.

1930년에 작가로 데뷔한 딕슨 카의 초기작인 [해골성](1931)은 실제 살인범으로서 마술사가 등장하고 그의 '조수'인 여성 등장인물을 배치하여 오래된 성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내용으로, 프랑스인 예심판사인 '앙리 방코랑(Henry Bencolin)'이 활약한다. 

그에게는 에드거 앨런 포의 탐정 뒤팽과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와 같이 역시 '조수'인 소설가 제프리 마르가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가 묘사한 아마추어 탐정이자 천재인 방코랑 판사는 이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 알고 있다. 다만, 누구에게도 본인이 이미 아는 것을 발설하지 않고 하나하나 증거를 수집하면서 본인의 가설을 '연역법'으로 증명하고 완성해 나간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적국인 독일과의 스파이 전쟁에서 만난 경쟁자 폰 아른하임 남작(현직 독일 고위급 경관)을 라인강변의 해골성' 사건현장에서 다시 만나 새삼 두뇌경쟁을 하면서도 방코랑은 느긋하다. 반 다인의 파일로 번스와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처럼 범인이 누군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딕슨 카의 초기작에서 활약하는 탐정 '앙리 방코랑'은 아직까지 반 다인의 탐정 '파일로 번스'와 엘러리 퀸의 탐정 '엘러리 퀸' 같은 '연역소거법' 탐정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2. [세 개의 관(The Three Coffins)](1935) : 기디언 펠

"그 세 가지 요점이란 이런 거네. (1) 동생 '앙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있는 건 두 형제 뿐이라는 것, (2) 그 형제는 둘 다 진실을 말했다는 것, (3) 시간 문제가 사건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것, 등이네.
이 사건에서는 많은 일들이 매우 짧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었네. 참으로 짧은 시간이지. 사건의 난관이 시간 착오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살인범을 '그림자 없는 남자'라고 명명한 것과 같은 아이러니의 일부였어."
-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1935.

'본격파 밀실살인' 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세 개의 관](1935)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두 개의 살인사건을 얽히고 설키게 만들어 결말에서 명쾌하게 풀어 설명한다. 

이 작품의 탐정 '기디언 펠(Gideon Fell)' 박사는 영국인 법학박사로서 런던경시청의 '자문' 역할을 하는 인물안데, 동료와도 같이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런던경시청 해드리 경감과의 경쟁 과정에서 뜻밖의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물론 '본격파' 추리소설인 '밀실살인'은 추리소설을 위한 소설이라 전혀 현실적일 수가 없다. 범인은 항상 제한된 공간에 있는 제한된 인물 중 하나다. 소설의 전개과정은 이미 작가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퍼즐이 초반에는 전부 해체되어 있다가 원래의 구성대로 재조립되는 '연역법'의 증명과정 실현에 불과하다. 독자는 '귀납적' 또는 과학적으로 이 퍼즐을 풀어보고 싶겠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작가의 머릿속을 알 수 없으니 하나하나 메모하고 사간표를 작성해서 수학문제 풀듯이 읽을 열정이 없다면 수수께끼는 끝까지 미궁이다.

고장난 시계, 인물의 숨겨진 과거 같은 예상하지 못한 사실들을 간과하면 이 수수께끼는 절대로 풀 수 없는데, 기디온 펠 박사 같은 천재들은 귀신같이 이 복잡한 문제를 결말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으면서 사건을 해결해 보인다. 
특히, [세 개의 관]은 기디언 펠 박사의 '밀실강의'로 유명하단다.

영국에 정착하여 활동했던 미국 출신 작가 딕슨 카는 마치 유럽 작가 같이 무대도 유럽, 등장인물들도 유럽 각국의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 '밀실살인'을 자유자재로 만들고 풀어낸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할 수 있을 거네. 하지만 풀릴 가망이 없는 수수께끼도 있어. 이해하겠지? (피살자) 그리모와 뒤몽은 나(펠 박사)와 같은 프랑스인이 아니네. 그런 광대뼈를 가진 여자, 정직하다(honest)는 말의 묵음인 'h'를 발음하는 여자는 절대로 라틴 민족일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네. 그 두 사람은 '마지르' 인일세.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모는 원래 헝가리 출신이고, 진짜 이름은 카롤리, 다른 이름은 샤를 그리모 호바트. 이 남자의 어머니는 아마 프랑스인이었을 거네. 원래는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뒤 루마니아에 병합된 트란실바니아 공화국 출신이지. 1890년대 말이나 1900년대 초에 두 형제와 함께 카롤리 그리모 호바트는 형무소에 들어갔네. 두 형제가 있었던 것을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 한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다른 한 사람은 지금 피에르 플레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남자일세."
-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1935.


3. [황제의 코담뱃갑(The Emperor's Snuff-box)](1942) : 다모트 킨로스

"아투드는 갈색 장갑을 낀 사람은 토비였다고 증언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몹시 열심이었죠.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고 라이벌을 형무소에 밀어 넣겠다 그것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중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시청으로 바톨 검사를 만나러 가겠다고 나섰으니까요. 그것을 그 사나이는 해냈습니다. 꼭 가겠다고 고집을 세워서요... 
... 심리학의 문제...
...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그 사나이를 죽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 죽이지 말지어다. 그러나 억지로 살해할 필요는 없도다.' 결국은 들쑤셔서 그 사나이를 죽게 한 것이나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사나이는 건강을 되찾고 단두대가 적절히 결말을 지었겠죠. 그러나 나는 별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소."
- [황제의 코담뱃갑], 존 딕슨 카, 1942.

일설에 의하면 '추리소설의 여왕'이자 그 역시 '밀실살인'의 내용과 같은 [오리엔트 특급살인](1934)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939)를 쓴 애거서 크리스티조차도 속았다는 또 하나의 '밀실살인'의 정점인 작품, [황제의 코담배갑](1942)에는 '다모트 킨로스'라는 정신분석의사가 등장한다. 

제목이 왜 '나폴레옹 1세(황제)'가 아꼈다던 작은 '코담배갑(snuff-box)'이었는지 좀더 세심하게 알고 간파했다면 독자는 초반에 이미 살인범을 킨로스 박사처럼 알 수 있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전개시키는 의문의 살인사건만을 쫓아가다 보면 십중팔구 실마리를 놓치고 만다.

그리고는 결국 '본격파' 추리소설 작가 존 딕슨 카의 농간이 놀아나고 마는 거다.

물론, 반 다인과 엘러리 퀸처럼 확실한 법적, 물적 증거 없이 '연역법'으로만 접근하게 될 때는 범인을 스스로 또는 우연한 계기를 만들어 죽게 만드는 방법으로 단죄하기도 한다. 

'다모트 킨로스' 박사는 이러한 심리전을 통해 누명을 쓰게 된 미녀를 구하고 악당인 범인을 심판하는 반 다인의 고전적 수법을 쓰고 있다.


4. [제3의 총탄(The Third Bullet)](1954) : 마키스 대령

"'전 (마키스) 국장보님께서 진상을 좀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페이지 경위가 완곡하게 말했다. 전혀 악의가 없는 말이었지만 이 말이 마키스 (대령)의 감정을 건드렸다.
'자네 말은 전적으로 옳아. 난 살인범이 누구인지도 알고, 범행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겐 사실과 증거가 필요해. 그러니 사실을 밝혀 보자구. 오늘 새 사실을 알아낸 게 있는가?'"
- [제3의 총탄], 존 딕슨 카, 1954.

내 개인적으로 그 중 가장 깔끔한 결말의 작품은 [황제의 코담배갑]에 같이 실린 [제3의  총탄](1952)이라는 중편이다. 개중 나중에 발표된 작품이라 완성도가 더 있을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경찰국장보로 나오는 퇴역군인 '마키스 대령'이 군더더기가 없다. 물론 장편보다 분량이 적은 중편소설이라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틀레이크 판사를 별채라는 '밀실'에서 죽인 총탄은 각기 다른 세 개의 권총에서 발사되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한정된 공간의 제한적 인물들 사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인물을 구제하는 방식, 용의자의 숨겨진 과거와 그를 돕는 묘령의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존 딕슨 카의 모든 전작 소설들에 나오는 각종 요소들이 적절하게 작동하는 완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존 딕슨 카의 '밀실살인' 작품 하나를 읽으라 한다면,
나는 [제3의 총탄](1954)을 권하고 싶다.


5.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딕슨 카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으로서,
'본격파' 추리소설의 대가로 평가받는,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를 만나 '밀실살인'의 정점을 읽었으니,
이제 다시 마을도서관에 들러 '밀실살인'의 고전이라는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수수께끼](1907)를 빌려와야겠다.

그리고 시간 나면 딕슨 카의 다른 '밀실살인' 추리소설을 또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역시 내게는,
시간 보내기에 '추리소설'만한 게 없고,
'현실파'든 '본격파'든 뭐니뭐니 해도 역시나 '고전'을 따를 게 없다.

아마도,
나의 '미스터리소설' 고전 여행은 좀더 지속될 것 같다.

***

1. [해골성(The Castle Skull)](1931), John Dickson Carr, 전형기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세 개의 관(The Three Coffins)](1935), John Dickson Carr, 김민영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황제의 코담뱃갑(The Emperor's Snuff-box)](1942)/[제3의 총탄(The Third Bullet)](1954), John Dickson Carr, 전형기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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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존 딕슨 카
- 존 딕슨 카, [해골성]/[세 개의 관]/[황제의 코담뱃갑]/[제3의 총탄], 1931~1954.


마을도서관이 대량으로 새로 들여놓은 <동서미스터리북스(DMB)> 시리즈 덕분에 요즘 잠시 '미스터리소설'에 빠져 지내고 있는 중에, 어린 시절 영국의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미국의 엘러리 퀸(그리고 바너비 로스)만 읽어대면서 말로만 들었던 S.S. 반 다인까지 읽게 되었다.

그렇게 요즘 휴일이면 어김없이 동네 뒷산인 초안산을 종주하고는 마을도서관에 들러 지난 주에 빌린 책을 반납하고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를 둘러보다가 또 빌려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미스터리소설'과 '탐정소설'의 원조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중단편집도 다시 읽고 짧았던 '미스터리북스' 여정을 접으려고 했더랬다.

그런데 도서관 책장에 늘어선 수십 권의 '미스터리북스' 책들이 휴일의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반 다인에서 에드거 앨런 포로 거슬러 오르게 했다가 다시 곁가지로 뻗어가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만난 작가가 바로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탐정들이 구사하는 이른바 '연역소거법'은 내가 읽기로는, 
탐정소설의 시조새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그의 후예인 영국의 코넌 도일과 길버트 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린' 추리에서 이후 20세기 중반 미국의 닫힌 '밀실추리'로 이행하는 일종의 과도기로 보이는데, 도일과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귀납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쫓아간다는 점에서 '열린' 개방형인데 반해 '밀실추리'는 엄격히 한정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과 추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방된 공간인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전자는 소위 '리얼리즘' 또는 '현실파' 추리소설인 것이고, 
'밀실'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시작하여 오로지 그곳에서 마무리되는 후자는 이른바 '본격파' 추리소설로 분류된다고 한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연역소거' 추리기법은 내가 보기엔 열린 '현실' 추리소설에서 밀실로 대표되는 '본격' 추리소설로 넘어가는 가교와도 같다는 말이다.
'연역소거법'과 '밀실살인'은 현실에는 없는 제한된 공간과 그 속의 사실관계만을 모두 제시하고는 독자들에게 '문제(수수께끼/미스터리)'를 내고는 대놓고 풀어보라 제안한다. 그래서 이 '밀실살인' 추리소설은 '현실'적이지 않은 '본격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것이며, 그 정점에 바로 '존 딕슨 카'가 있었던 거다.

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은 실로 여러 명인데, 대표적인 인물은 '앙리 방코랑', '기디언 펠', '다모트 킨로스', '마키스 대령' 등이 있다.


1. [해골성(The Castle Skull)](1931) : 앙리 방코랑

"제프, 내가 예언을 해주지. 폰 아른하임 남작은 나를 앞지르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네. 자기의 계획대로 일찍이 명배우 마일런 아리슨(피살자)이 화려했을 무렵 무대에서 관중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어하는 걸세. 그의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는 우리 앞에서 연극을 한 거라네. 튜턴 인종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그 훌륭한 연극을 구경하고 싶은 기분도 없지는 않네. 그러나 내게도 반항심이라는 것이 있거든. 멍하니 그의 연기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 [해골성], 존 딕슨 카, 1931.

1930년에 작가로 데뷔한 딕슨 카의 초기작인 [해골성](1931)은 실제 살인범으로서 마술사가 등장하고 그의 '조수'인 여성 등장인물을 배치하여 오래된 성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내용으로, 프랑스인 예심판사인 '앙리 방코랑(Henry Bencolin)'이 활약한다. 

그에게는 에드거 앨런 포의 탐정 뒤팽과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와 같이 역시 '조수'인 소설가 제프리 마르가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가 묘사한 아마추어 탐정이자 천재인 방코랑 판사는 이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 알고 있다. 다만, 누구에게도 본인이 이미 아는 것을 발설하지 않고 하나하나 증거를 수집하면서 본인의 가설을 '연역법'으로 증명하고 완성해 나간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적국인 독일과의 스파이 전쟁에서 만난 경쟁자 폰 아른하임 남작(현직 독일 고위급 경관)을 라인강변의 해골성' 사건현장에서 다시 만나 새삼 두뇌경쟁을 하면서도 방코랑은 느긋하다. 반 다인의 파일로 번스와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처럼 범인이 누군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딕슨 카의 초기작에서 활약하는 탐정 '앙리 방코랑'은 아직까지 반 다인의 탐정 '파일로 번스'와 엘러리 퀸의 탐정 '엘러리 퀸' 같은 '연역소거법' 탐정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2. [세 개의 관(The Three Coffins)](1935) : 기디언 펠

"그 세 가지 요점이란 이런 거네. (1) 동생 '앙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있는 건 두 형제 뿐이라는 것, (2) 그 형제는 둘 다 진실을 말했다는 것, (3) 시간 문제가 사건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것, 등이네.
이 사건에서는 많은 일들이 매우 짧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었네. 참으로 짧은 시간이지. 사건의 난관이 시간 착오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살인범을 '그림자 없는 남자'라고 명명한 것과 같은 아이러니의 일부였어."
-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1935.

'본격파 밀실살인' 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세 개의 관](1935)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두 개의 살인사건을 얽히고 설키게 만들어 결말에서 명쾌하게 풀어 설명한다. 

이 작품의 탐정 '기디언 펠(Gideon Fell)' 박사는 영국인 법학박사로서 런던경시청의 '자문' 역할을 하는 인물안데, 동료와도 같이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런던경시청 해드리 경감과의 경쟁 과정에서 뜻밖의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물론 '본격파' 추리소설인 '밀실살인'은 추리소설을 위한 소설이라 전혀 현실적일 수가 없다. 범인은 항상 제한된 공간에 있는 제한된 인물 중 하나다. 소설의 전개과정은 이미 작가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퍼즐이 초반에는 전부 해체되어 있다가 원래의 구성대로 재조립되는 '연역법'의 증명과정 실현에 불과하다. 독자는 '귀납적' 또는 과학적으로 이 퍼즐을 풀어보고 싶겠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작가의 머릿속을 알 수 없으니 하나하나 메모하고 사간표를 작성해서 수학문제 풀듯이 읽을 열정이 없다면 수수께끼는 끝까지 미궁이다.

고장난 시계, 인물의 숨겨진 과거 같은 예상하지 못한 사실들을 간과하면 이 수수께끼는 절대로 풀 수 없는데, 기디온 펠 박사 같은 천재들은 귀신같이 이 복잡한 문제를 결말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으면서 사건을 해결해 보인다. 
특히, [세 개의 관]은 기디언 펠 박사의 '밀실강의'로 유명하단다.

영국에 정착하여 활동했던 미국 출신 작가 딕슨 카는 마치 유럽 작가 같이 무대도 유럽, 등장인물들도 유럽 각국의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 '밀실살인'을 자유자재로 만들고 풀어낸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할 수 있을 거네. 하지만 풀릴 가망이 없는 수수께끼도 있어. 이해하겠지? (피살자) 그리모와 뒤몽은 나(펠 박사)와 같은 프랑스인이 아니네. 그런 광대뼈를 가진 여자, 정직하다(honest)는 말의 묵음인 'h'를 발음하는 여자는 절대로 라틴 민족일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네. 그 두 사람은 '마지르' 인일세.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모는 원래 헝가리 출신이고, 진짜 이름은 카롤리, 다른 이름은 샤를 그리모 호바트. 이 남자의 어머니는 아마 프랑스인이었을 거네. 원래는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뒤 루마니아에 병합된 트란실바니아 공화국 출신이지. 1890년대 말이나 1900년대 초에 두 형제와 함께 카롤리 그리모 호바트는 형무소에 들어갔네. 두 형제가 있었던 것을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 한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다른 한 사람은 지금 피에르 플레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남자일세."
-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1935.


3. [황제의 코담뱃갑(The Emperor's Snuff-box)](1942) : 다모트 킨로스

"아투드는 갈색 장갑을 낀 사람은 토비였다고 증언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몹시 열심이었죠.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고 라이벌을 형무소에 밀어 넣겠다 그것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중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시청으로 바톨 검사를 만나러 가겠다고 나섰으니까요. 그것을 그 사나이는 해냈습니다. 꼭 가겠다고 고집을 세워서요... 
... 심리학의 문제...
...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그 사나이를 죽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 죽이지 말지어다. 그러나 억지로 살해할 필요는 없도다.' 결국은 들쑤셔서 그 사나이를 죽게 한 것이나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사나이는 건강을 되찾고 단두대가 적절히 결말을 지었겠죠. 그러나 나는 별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소."
- [황제의 코담뱃갑], 존 딕슨 카, 1942.

일설에 의하면 '추리소설의 여왕'이자 그 역시 '밀실살인'의 내용과 같은 [오리엔트 특급살인](1934)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939)를 쓴 애거서 크리스티조차도 속았다는 또 하나의 '밀실살인'의 정점인 작품, [황제의 코담배갑](1942)에는 '다모트 킨로스'라는 정신분석의사가 등장한다. 

제목이 왜 '나폴레옹 1세(황제)'가 아꼈다던 작은 '코담배갑(snuff-box)'이었는지 좀더 세심하게 알고 간파했다면 독자는 초반에 이미 살인범을 킨로스 박사처럼 알 수 있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전개시키는 의문의 살인사건만을 쫓아가다 보면 십중팔구 실마리를 놓치고 만다.

그리고는 결국 '본격파' 추리소설 작가 존 딕슨 카의 농간이 놀아나고 마는 거다.

물론, 반 다인과 엘러리 퀸처럼 확실한 법적, 물적 증거 없이 '연역법'으로만 접근하게 될 때는 범인을 스스로 또는 우연한 계기를 만들어 죽게 만드는 방법으로 단죄하기도 한다. 

'다모트 킨로스' 박사는 이러한 심리전을 통해 누명을 쓰게 된 미녀를 구하고 악당인 범인을 심판하는 반 다인의 고전적 수법을 쓰고 있다.


4. [제3의 총탄(The Third Bullet)](1954) : 마키스 대령

"'전 (마키스) 국장보님께서 진상을 좀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페이지 경위가 완곡하게 말했다. 전혀 악의가 없는 말이었지만 이 말이 마키스 (대령)의 감정을 건드렸다.
'자네 말은 전적으로 옳아. 난 살인범이 누구인지도 알고, 범행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겐 사실과 증거가 필요해. 그러니 사실을 밝혀 보자구. 오늘 새 사실을 알아낸 게 있는가?'"
- [제3의 총탄], 존 딕슨 카, 1954.

내 개인적으로 그 중 가장 깔끔한 결말의 작품은 [황제의 코담배갑]에 같이 실린 [제3의  총탄](1952)이라는 중편이다. 개중 나중에 발표된 작품이라 완성도가 더 있을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경찰국장보로 나오는 퇴역군인 '마키스 대령'이 군더더기가 없다. 물론 장편보다 분량이 적은 중편소설이라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틀레이크 판사를 별채라는 '밀실'에서 죽인 총탄은 각기 다른 세 개의 권총에서 발사되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한정된 공간의 제한적 인물들 사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인물을 구제하는 방식, 용의자의 숨겨진 과거와 그를 돕는 묘령의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존 딕슨 카의 모든 전작 소설들에 나오는 각종 요소들이 적절하게 작동하는 완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존 딕슨 카의 '밀실살인' 작품 하나를 읽으라 한다면,
나는 [제3의 총탄](1954)을 권하고 싶다.


5.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딕슨 카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으로서,
'본격파' 추리소설의 대가로 평가받는,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를 만나 '밀실살인'의 정점을 읽었으니,
이제 다시 마을도서관에 들러 '밀실살인'의 고전이라는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수수께끼](1907)를 빌려와야겠다.

그리고 시간 나면 딕슨 카의 다른 '밀실살인' 추리소설을 또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역시 내게는,
시간 보내기에 '추리소설'만한 게 없고,
'현실파'든 '본격파'든 뭐니뭐니 해도 역시나 '고전'을 따를 게 없다.

아마도,
나의 '미스터리소설' 고전 여행은 좀더 지속될 것 같다.

***

1. [해골성(The Castle Skull)](1931), John Dickson Carr, 전형기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세 개의 관(The Three Coffins)](1935), John Dickson Carr, 김민영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황제의 코담뱃갑(The Emperor's Snuff-box)](1942)/[제3의 총탄(The Third Bullet)](1954), John Dickson Carr, 전형기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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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해골성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0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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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존 딕슨 카
- 존 딕슨 카, [해골성]/[세 개의 관]/[황제의 코담뱃갑]/[제3의 총탄], 1931~1954.


마을도서관이 대량으로 새로 들여놓은 <동서미스터리북스(DMB)> 시리즈 덕분에 요즘 잠시 '미스터리소설'에 빠져 지내고 있는 중에, 어린 시절 영국의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미국의 엘러리 퀸(그리고 바너비 로스)만 읽어대면서 말로만 들었던 S.S. 반 다인까지 읽게 되었다.

그렇게 요즘 휴일이면 어김없이 동네 뒷산인 초안산을 종주하고는 마을도서관에 들러 지난 주에 빌린 책을 반납하고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를 둘러보다가 또 빌려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미스터리소설'과 '탐정소설'의 원조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중단편집도 다시 읽고 짧았던 '미스터리북스' 여정을 접으려고 했더랬다.

그런데 도서관 책장에 늘어선 수십 권의 '미스터리북스' 책들이 휴일의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반 다인에서 에드거 앨런 포로 거슬러 오르게 했다가 다시 곁가지로 뻗어가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만난 작가가 바로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탐정들이 구사하는 이른바 '연역소거법'은 내가 읽기로는, 
탐정소설의 시조새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그의 후예인 영국의 코넌 도일과 길버트 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린' 추리에서 이후 20세기 중반 미국의 닫힌 '밀실추리'로 이행하는 일종의 과도기로 보이는데, 도일과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귀납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쫓아간다는 점에서 '열린' 개방형인데 반해 '밀실추리'는 엄격히 한정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과 추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방된 공간인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전자는 소위 '리얼리즘' 또는 '현실파' 추리소설인 것이고, 
'밀실'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시작하여 오로지 그곳에서 마무리되는 후자는 이른바 '본격파' 추리소설로 분류된다고 한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연역소거' 추리기법은 내가 보기엔 열린 '현실' 추리소설에서 밀실로 대표되는 '본격' 추리소설로 넘어가는 가교와도 같다는 말이다.
'연역소거법'과 '밀실살인'은 현실에는 없는 제한된 공간과 그 속의 사실관계만을 모두 제시하고는 독자들에게 '문제(수수께끼/미스터리)'를 내고는 대놓고 풀어보라 제안한다. 그래서 이 '밀실살인' 추리소설은 '현실'적이지 않은 '본격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것이며, 그 정점에 바로 '존 딕슨 카'가 있었던 거다.

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은 실로 여러 명인데, 대표적인 인물은 '앙리 방코랑', '기디언 펠', '다모트 킨로스', '마키스 대령' 등이 있다.


1. [해골성(The Castle Skull)](1931) : 앙리 방코랑

"제프, 내가 예언을 해주지. 폰 아른하임 남작은 나를 앞지르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네. 자기의 계획대로 일찍이 명배우 마일런 아리슨(피살자)이 화려했을 무렵 무대에서 관중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어하는 걸세. 그의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는 우리 앞에서 연극을 한 거라네. 튜턴 인종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그 훌륭한 연극을 구경하고 싶은 기분도 없지는 않네. 그러나 내게도 반항심이라는 것이 있거든. 멍하니 그의 연기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 [해골성], 존 딕슨 카, 1931.

1930년에 작가로 데뷔한 딕슨 카의 초기작인 [해골성](1931)은 실제 살인범으로서 마술사가 등장하고 그의 '조수'인 여성 등장인물을 배치하여 오래된 성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내용으로, 프랑스인 예심판사인 '앙리 방코랑(Henry Bencolin)'이 활약한다. 

그에게는 에드거 앨런 포의 탐정 뒤팽과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와 같이 역시 '조수'인 소설가 제프리 마르가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가 묘사한 아마추어 탐정이자 천재인 방코랑 판사는 이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 알고 있다. 다만, 누구에게도 본인이 이미 아는 것을 발설하지 않고 하나하나 증거를 수집하면서 본인의 가설을 '연역법'으로 증명하고 완성해 나간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적국인 독일과의 스파이 전쟁에서 만난 경쟁자 폰 아른하임 남작(현직 독일 고위급 경관)을 라인강변의 해골성' 사건현장에서 다시 만나 새삼 두뇌경쟁을 하면서도 방코랑은 느긋하다. 반 다인의 파일로 번스와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처럼 범인이 누군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딕슨 카의 초기작에서 활약하는 탐정 '앙리 방코랑'은 아직까지 반 다인의 탐정 '파일로 번스'와 엘러리 퀸의 탐정 '엘러리 퀸' 같은 '연역소거법' 탐정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2. [세 개의 관(The Three Coffins)](1935) : 기디언 펠

"그 세 가지 요점이란 이런 거네. (1) 동생 '앙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있는 건 두 형제 뿐이라는 것, (2) 그 형제는 둘 다 진실을 말했다는 것, (3) 시간 문제가 사건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것, 등이네.
이 사건에서는 많은 일들이 매우 짧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었네. 참으로 짧은 시간이지. 사건의 난관이 시간 착오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살인범을 '그림자 없는 남자'라고 명명한 것과 같은 아이러니의 일부였어."
-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1935.

'본격파 밀실살인' 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세 개의 관](1935)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두 개의 살인사건을 얽히고 설키게 만들어 결말에서 명쾌하게 풀어 설명한다. 

이 작품의 탐정 '기디언 펠(Gideon Fell)' 박사는 영국인 법학박사로서 런던경시청의 '자문' 역할을 하는 인물안데, 동료와도 같이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런던경시청 해드리 경감과의 경쟁 과정에서 뜻밖의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물론 '본격파' 추리소설인 '밀실살인'은 추리소설을 위한 소설이라 전혀 현실적일 수가 없다. 범인은 항상 제한된 공간에 있는 제한된 인물 중 하나다. 소설의 전개과정은 이미 작가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퍼즐이 초반에는 전부 해체되어 있다가 원래의 구성대로 재조립되는 '연역법'의 증명과정 실현에 불과하다. 독자는 '귀납적' 또는 과학적으로 이 퍼즐을 풀어보고 싶겠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작가의 머릿속을 알 수 없으니 하나하나 메모하고 사간표를 작성해서 수학문제 풀듯이 읽을 열정이 없다면 수수께끼는 끝까지 미궁이다.

고장난 시계, 인물의 숨겨진 과거 같은 예상하지 못한 사실들을 간과하면 이 수수께끼는 절대로 풀 수 없는데, 기디온 펠 박사 같은 천재들은 귀신같이 이 복잡한 문제를 결말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으면서 사건을 해결해 보인다. 
특히, [세 개의 관]은 기디언 펠 박사의 '밀실강의'로 유명하단다.

영국에 정착하여 활동했던 미국 출신 작가 딕슨 카는 마치 유럽 작가 같이 무대도 유럽, 등장인물들도 유럽 각국의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 '밀실살인'을 자유자재로 만들고 풀어낸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할 수 있을 거네. 하지만 풀릴 가망이 없는 수수께끼도 있어. 이해하겠지? (피살자) 그리모와 뒤몽은 나(펠 박사)와 같은 프랑스인이 아니네. 그런 광대뼈를 가진 여자, 정직하다(honest)는 말의 묵음인 'h'를 발음하는 여자는 절대로 라틴 민족일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네. 그 두 사람은 '마지르' 인일세.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모는 원래 헝가리 출신이고, 진짜 이름은 카롤리, 다른 이름은 샤를 그리모 호바트. 이 남자의 어머니는 아마 프랑스인이었을 거네. 원래는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뒤 루마니아에 병합된 트란실바니아 공화국 출신이지. 1890년대 말이나 1900년대 초에 두 형제와 함께 카롤리 그리모 호바트는 형무소에 들어갔네. 두 형제가 있었던 것을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 한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다른 한 사람은 지금 피에르 플레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남자일세."
-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1935.


3. [황제의 코담뱃갑(The Emperor's Snuff-box)](1942) : 다모트 킨로스

"아투드는 갈색 장갑을 낀 사람은 토비였다고 증언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몹시 열심이었죠.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고 라이벌을 형무소에 밀어 넣겠다 그것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중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시청으로 바톨 검사를 만나러 가겠다고 나섰으니까요. 그것을 그 사나이는 해냈습니다. 꼭 가겠다고 고집을 세워서요... 
... 심리학의 문제...
...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그 사나이를 죽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 죽이지 말지어다. 그러나 억지로 살해할 필요는 없도다.' 결국은 들쑤셔서 그 사나이를 죽게 한 것이나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사나이는 건강을 되찾고 단두대가 적절히 결말을 지었겠죠. 그러나 나는 별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소."
- [황제의 코담뱃갑], 존 딕슨 카, 1942.

일설에 의하면 '추리소설의 여왕'이자 그 역시 '밀실살인'의 내용과 같은 [오리엔트 특급살인](1934)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1939)를 쓴 애거서 크리스티조차도 속았다는 또 하나의 '밀실살인'의 정점인 작품, [황제의 코담배갑](1942)에는 '다모트 킨로스'라는 정신분석의사가 등장한다. 

제목이 왜 '나폴레옹 1세(황제)'가 아꼈다던 작은 '코담배갑(snuff-box)'이었는지 좀더 세심하게 알고 간파했다면 독자는 초반에 이미 살인범을 킨로스 박사처럼 알 수 있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전개시키는 의문의 살인사건만을 쫓아가다 보면 십중팔구 실마리를 놓치고 만다.

그리고는 결국 '본격파' 추리소설 작가 존 딕슨 카의 농간이 놀아나고 마는 거다.

물론, 반 다인과 엘러리 퀸처럼 확실한 법적, 물적 증거 없이 '연역법'으로만 접근하게 될 때는 범인을 스스로 또는 우연한 계기를 만들어 죽게 만드는 방법으로 단죄하기도 한다. 

'다모트 킨로스' 박사는 이러한 심리전을 통해 누명을 쓰게 된 미녀를 구하고 악당인 범인을 심판하는 반 다인의 고전적 수법을 쓰고 있다.


4. [제3의 총탄(The Third Bullet)](1954) : 마키스 대령

"'전 (마키스) 국장보님께서 진상을 좀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페이지 경위가 완곡하게 말했다. 전혀 악의가 없는 말이었지만 이 말이 마키스 (대령)의 감정을 건드렸다.
'자네 말은 전적으로 옳아. 난 살인범이 누구인지도 알고, 범행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겐 사실과 증거가 필요해. 그러니 사실을 밝혀 보자구. 오늘 새 사실을 알아낸 게 있는가?'"
- [제3의 총탄], 존 딕슨 카, 1954.

내 개인적으로 그 중 가장 깔끔한 결말의 작품은 [황제의 코담배갑]에 같이 실린 [제3의  총탄](1952)이라는 중편이다. 개중 나중에 발표된 작품이라 완성도가 더 있을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경찰국장보로 나오는 퇴역군인 '마키스 대령'이 군더더기가 없다. 물론 장편보다 분량이 적은 중편소설이라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틀레이크 판사를 별채라는 '밀실'에서 죽인 총탄은 각기 다른 세 개의 권총에서 발사되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한정된 공간의 제한적 인물들 사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인물을 구제하는 방식, 용의자의 숨겨진 과거와 그를 돕는 묘령의 여인이 누구인가 하는 존 딕슨 카의 모든 전작 소설들에 나오는 각종 요소들이 적절하게 작동하는 완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존 딕슨 카의 '밀실살인' 작품 하나를 읽으라 한다면,
나는 [제3의 총탄](1954)을 권하고 싶다.


5.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 딕슨 카

'밀실살인' 미스터리소설의 거장으로서,
'본격파' 추리소설의 대가로 평가받는,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를 만나 '밀실살인'의 정점을 읽었으니,
이제 다시 마을도서관에 들러 '밀실살인'의 고전이라는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수수께끼](1907)를 빌려와야겠다.

그리고 시간 나면 딕슨 카의 다른 '밀실살인' 추리소설을 또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역시 내게는,
시간 보내기에 '추리소설'만한 게 없고,
'현실파'든 '본격파'든 뭐니뭐니 해도 역시나 '고전'을 따를 게 없다.

아마도,
나의 '미스터리소설' 고전 여행은 좀더 지속될 것 같다.

***

1. [해골성(The Castle Skull)](1931), John Dickson Carr, 전형기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세 개의 관(The Three Coffins)](1935), John Dickson Carr, 김민영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황제의 코담뱃갑(The Emperor's Snuff-box)](1942)/[제3의 총탄(The Third Bullet)](1954), John Dickson Carr, 전형기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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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그 가의 살인 - 추리.공포 단편선 시공 에드거 앨런 포 전집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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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탐정 추리소설의 원조
- [모르그가(街)의 살인]/[마리 로제 수수께끼]/[도둑맞은 편지], 에드거 앨런 포, 1841~1844.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었다.

그냥 1980년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경이 좋았고, 음울하지만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주제도 관객인 나에게는 극적이었으며, 심지어 내 어린 시절 한 때 한참 회자되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현실적 모티브를 통해 연상되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 뜬금없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던지, TV 영화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그 영화가 방영되면 무조건 끝까지 보았다.

한참 후 알게 된 일이었지만,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졌을 때 나는 소름 같은 게 돋았는데,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무죄로 놓친 그 자가 바로 범인이었다.

영화의 원작인 희곡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는 오리무중의 장기미제 살인사건의 범인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했던 거다.

과연,
영화적 '추리'의 쾌거라는 생각이 든다.

"분석력을 단순한 재간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분석가는 반드시 재간이 있지만, 재간 있는 사람은 종종 놀라울 정도로 분석력이 부족하다... '재간'과 '분석력'의 차이는 공상과 상상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지만 그 차이의 성격은 극히 유사하다. 사실 재간이 있는 사람은 항상 기발하지만 진정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분석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독자들이 보기에는 방금 제시한 주장에 대한 일종의 논평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18**년 봄과 여름 잠깐 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C. 오귀스트 뒤팽'이라는 신사를 알게 되었다..."
- [모르그가(街)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1841.


어린 시절 영국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 이야기와 애거서 크리스티, 미국의 엘러리 퀸의 장편들을 통해 추리소설을 배운 나는 한참 후 중년에 들어서서 우연한 기회로 엘러리 퀸의 원형이 되었다는 S.S.반 다인까지 거슬러 올라 읽게 되었다. 다섯 작품을 읽고는 더 이상 반 다인의 [OO살인사건] 시리즈를 구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차, 그럼 이 참에 '미스터리' 소설의 진짜 시조새라는 '에드거 앨런 포'까지 역주행해보자 싶었다. 워낙 유명한 고전작가라 [모르그가의 살인](1841)과 [검은 고양이](1843)는 어린 시절 읽기는 했더랬지만, 지금 다시 탐정 '뒤팽' 시리즈 단편을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 1809~1849)는 시인이자 문학비평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공포', '추리' 등 '미스터리' 소설의 원조로 유명하다. 

1833년 24세의 데뷔작 [병 속의 수기]는 난파를 당한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친 유령선에 올라타고는 함께 사라져 가는 기괴한 공포를 선사한다. 이후 19세기 초 무너져 가는 명문 귀족가문의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붕괴를 그린 [어셔가(家)의 몰락](1839), 엽기적 살인행각을 과감하게 1인칭으로 그린 [검은 고양이](1843)나, 해적 보물지도의 암호를 파헤치고 분석한 [황금벌레](1843) 등의 기괴하고 기묘한 단편소설들은 프랑스 작가 보들레르, 포스트모던 작가 보르헤스, 화가 르네 마그리트와 영국 록밴드 앨런 파슨즈 프로젝트 등의 예술가들에게 깊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포의 '공상'적 이야기는 쥘 베른, 웰스, 아시모프 등 후대의 'SF 공상과학' 소설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고 포의 <시공사> 전집 번역자인 권진아 교수는 해설한다([에드거 앨런 포 추리공포 단편선], <해설>, 권진아).

그리고 여기, 
에드거 앨런 포의 명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귀족으로 화자가 '슈발리에(기사)'라고도 부르는 뒤팽은 19세기까지 여전히 놀고먹는 한량으로, 아마도 선대부터 '기사(슈발리에)' 작위를 세습받은 귀족청년으로 추정된다. 막대한 유산을 기본으로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 한가롭고 게으르지만 머리가 비상하여 '분석력'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소설의 화자이자 뒤팽의 같이 놀고먹는 한량 친구인 나는 말한다.

뒤팽의 첫번째 활약극 데뷔작인 [모르그가(街)의 살인](1841)은 실제로 단순한 '재간'을 넘어서는 '분석력'의 대가로서의 이러한 뒤팽의 면모를 길고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뒤팽의 캐릭터와 그를 지켜보며 기록으로 남기는 친구로서 화자의 관계는 이후 코넌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와 친구 왓슨, 반 다인의 아마추어 탐정 파일로 번즈와 화자인 반 다인, 엘러리 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고 복사된다. 
그렇게 포의 원시적 탐정 '뒤팽'과 그의 '분석적' 추리결과를 듣고 받아적는 친구의 구도는 적어도 그후로 1백년 이상 동안 '탐정추리소설'의 진짜 원조이자 고전이 된다.

단, 단편소설 [모르그가의 살인] 속 파리에 사는 레스파나예 모녀를 '밀실'과도 같은 집에서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 다소 어처구니 없는 경악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가 요망된다. 
결과보다는 뒤팽의 분석추리를 쫓아가는 데 묘미를 두면 되겠다.


"... 모르그가 사건에서 내 친구(뒤팽)가 한 역할이 파리 경찰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 파리 경찰들 중 '뒤팽'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그 수수께끼(미스터리)를 푼 단순한 '귀납적' 추리 방법을 뒤팽이 나(화자) 말고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파리경찰국) G국장에게조차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놀랍지 않게도 그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이 간주되었고 '슈발리에(뒤팽)'의 '분석능력'은 직관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뒤팽은 솔직한 사람이라 사람들이 물어봤다면 그 편견을 바로잡아줬겠지만, 게으른 성격 탓에 이미 오래전 흥미를 잃은 일을 더 이상 들쑤시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보나 그는 경찰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의 도움을 받으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경우가 '마리 로제'라는 젊은 아가씨가 살해된 사건이었다."
- [마리 로제 수수께끼], 에드거 앨런 포, 1842.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이자 고전으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2백년도 훨씬 전에 발표된 소설임을 잊지 말고 포의 탐정 뒤팽을 만나야 한다.

[모르그가의 살인]으로 파리 경찰당국 사이에 유명해진 '명탐정 뒤팽'을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는데, 파리 시내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담배가게 젊은 아가씨 '마리 로제'의 살인사건 또한 미궁에 빠지면서 뒤팽이 소환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뉴욕의 '담배가게 아가씨'였던 메리 세실리아 로저스라는 젊은 여성의 살인사건을 전한 신문기사들을 에드거 앨런 포가 분석하면서 범인을 추적해 보는 내용이다. 
신문기사들의 선정적이지만 섣부른 추측과 과학적이지 못한 억측을 뒤팽은 낱낱이 분석하고 반박하면서, 당시 유력 용의자였던 마리 로제의 남자 친구의 무죄를 분석해내고, 파리 외곽 불량배들의 집단적 행위도 아님을 증명하면서, 비록 범인을 특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마리 로제가 비밀리에 만났을 외항 선원의 단독 범행임을 추리하고 있다. 만일 소설속 파리의 마리 로제, 현실의 메리 로저스 살인사건의 진범이 나중에라도 잡혔다면, 포의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에도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현실의 범인을 추적하고 밝혀낸 공을 돌릴 수 있지 않을는지.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The Mystery of Marie Rose)]의 제목에서 '수수께끼'의 원문이 '미스터리(Mystery)'다. 굳이 번역하자면, '수수께끼', '비밀', '추리' 등이 되겠는데, 포가 이후의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후예 작가 엘러리 퀸의 유명 시리즈의 제목은 [국적+사물+'미스터리'](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로마 모자 미스터리 등)였다. 그리고 엘러리 퀸은 모든 사실을 다 드러내 놓은 다음 독자들에게 '이제 범인을 맞춰보라'며 '수수께끼(미스터리)'를 내기도 한다.


"난 추상적 논리가 아닌 특수한 형태로 계발된 논리의 유효성과 가치가 의심스럽네. 특히 수학 연구를 통해 추출된 이성이 의심스러워. 수학은 형식과 수량의 과학이야. 수학적 추론이라는 것은 단지 형식과 수량의 관찰에 적용되는 논리에 불과하거든. 그런데 크나큰 오류는 이른바 순수 대수학의 진리를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진리로 간주하는 걸세. 이건 정말 너무 터무니없는 오류여서 그게 이렇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당혹스러울 지경이야. 수학적 공리는 일반적 진리의 공리가 아니야. 예를 들어, 형식과 수량의 관계 문제에서는 진리인 공리도 윤리 문제에서는 턱도 없이 틀리는 일이 종종 있거든. 윤리학에 있어서는 부분들의 합이 전체와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말일세."
- [도둑맞은 편지], 에드거 앨런 포, 1844.


뒤팽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편 [도둑맞은 편지](1844)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소설은 프랑스 왕족으로 추정되는 고위층 부인의 중요한 편지를 빼돌린 'D장관'의 집에서 그 '도둑맞은 편지'를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경찰 당국의 '수학적'이고 치밀한 추리와 탐색 과정의 헛점을 노린 범인의 관점에서 추리를 한 뒤팽이 어이없게도 아주 단순한 곳에 숨겨져 있던 편지를 찾아내 바꿔치기하는 결과로 끝이 난다.

편지를 훔친 장관은 수학자이자 시인이었다. 즉, 그가 '수학'적 사고를 통해 편지를 숨긴 것으로 보고 경찰이 '과학' 수사로 추적했지만, 범인은 오히려 '시인'의 기질을 활용해 경찰의 허를 찌르고는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장소에 편지를 숨겼다는 것.

뒤팽은 장관의 심리와 기질을 파악하고는 가위바위보에서 상대방을 읽으면서 매번 이기는 심리를 이용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도둑맞은 편지] 역시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결과가 좀 어이없기도 하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다. 19세기 중반 당시는 획기적 반전이었을지도.


뒤팽의 분석적 추리는 다분히 '귀납적'이다.
모든 사실관계를 나열하고 퍼즐처럼 짜맞춰 어디 있을지 모를 진실 또는 범인을 밝혀낸다. 이러한 '귀납적 추리'는 이후 같은 19세기 중후반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 등의 탐정들에게 전승된다. '과학수사'의 대원칙이다.

한편 20세기 초 미국에서 부활한 새로운 뒤팽인 반 다인의 파일로 번스와 앨러리 퀸의 앨러리 퀸 또는 바너비 로스의 드루리 레인 등의 사변적 탐정들은 게으른 귀족한량 같은 면모는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추리방식은 '귀납적'이지 않다. 이들은 뒤팽와 달리 범인을 먼저 심리적으로 지목한 후 수많은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대입하여 부실한 논리구조를 보이는 용의자들은 하나씩 소거해 나가면서 탄탄하고 완벽한 논리구조로 완성된 최종 용의자를 결국 범인으로 확정하는 '연역적' 방법를 구사한다. 소설로는 재미있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이른바 '연역소거법'이다. 심지어는 '법률적 정의'를 실현하는 법적 증거의 효력이 다소 떨어져 범인을 자살하게 만드는 '사적 복수'로 결말을 짓기도 한다.

반 다인과 엘러리 퀸의 살인사건 현장에서 범인은 늘 한정된 공간에 있다. 일본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주인공 김전일이 문을 잠그며 "범인은 이 안에 있어"라고 외치는 서사의 전형이다.

어쨌든 좋다.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에드거 앨런 포와 그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이제서야 제대로 만났으니.

그리고 아직 '미스터리' 안에 더 머무르고 싶어,
한정된 공간의 오로지 이야기만을 위한 이야기인 '밀실살인'의 대가,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의 소설을 두 권 더 마을도서관에서 빌려 간다.

***

- [모르그가(街)의 살인 외 - 에드거 앨런 포 추리공포 단편선](1833~1844), Edgar Allan Poe, 권진아 옮김, <시공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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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린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6
S.S. 반 다인 지음, 안동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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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이지 않아도, 머무르고 싶은.
- [그린살인사건]/[비숍살인사건], S.S.반 다인, 1928~1929.


엘러리 퀸의 원형적 모델인 S.S.반 다인의 화제작들을 마저 읽어보고자 마을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 [비숍살인사건](1929)이었다. 

반 다인의 세번째 작품이자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그린살인사건](1928)을 단연 먼저 읽어야 했으나 마을도서관에 없어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고, 알라딘 서점에서도 품절이었기에 중고서적으로 주문했으니, [그린살인사건]에 이은 그 다음 작품이었으나 반 다인 두번째로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라는 [비숍살인사건]을 [벤슨살인사건], [카나리아살인사건], [딱정벌레살인사건]에 이어서 펼쳤다. 

추리소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와 코넌 도일, 엘러리 퀸 등의 '미스터리소설'류는 빨리 읽고 싶어서 책을 펼친 후에 막상 그 책을 다 읽기 아까워서 다시 덮고는 책등만 어루만질 때가 자주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비록 어수선하고 긴박할지 몰라도 관객이자 독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현실과 동떨어져 고요하고 신비로운 인물들과 왠지 이불 속에서 읽을 법하게 고즈넉한 그 설정들 속에 더 남아 있고 싶어서다. 얼른 살인사건의 범인을 확인하고 싶은 한편, 그 추적과정의 밑그림들을 더 보고 싶어 다 읽어버리기를 머뭇거리는 모순된 관객이자 독자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가끔 읽는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그렇지 않고, 유독 엘러리 퀸과 최근 읽게 된 미국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반 다인의 작품들이 그렇다.

"실제로 (지방검사) 매컴이 4년 재직하는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범죄를 대부분 해결한 것은, 거의 모두 번스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인간 본질에 대한 지식', '뛰어난 박식과 교양', '예민한 논리 감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표정 뒤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후각과 같은, 이러한 자질은 모두 번스를 범죄 수사, 매컴의 소관인 여러 사건을 번스가 비공식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알맞은 것들이었다."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반 다인, 1929.


엘러리 퀸도 그렇지만, 반 다인 소설의 주인공 탐정 파일로 번스 또한 미국 하버드대를 다닌 수재다. 아니, 머리 좋고 싸움도 잘하고 하다 못해 운전실력까지도 뛰어난, 세상 못하는 것 없는 천재다. 영국 옥스포드대에서도 공부한 적 있고, 하는 일 없는 귀족 청년 같지만 '본업'을 굳이 따진다면, 미술 또는 예술 비평가로 추정된다. 작가인 '반 다인', 본명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가 바로 그렇다. 그의 추리소설 속 화자가 '반 다인'이기는 하나, 실제로 작가의 모습은 아마추어 탐정이자 미술 비평가인 귀족청년 파일로 번스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번스는 뉴욕시 지방검사 매컴, 화자인 반 다인과 하버드대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뉴욕 지방검사 매컴 재임 4년 동안의 굵직한 살인사건(Murder Case)들에 개입하려 번스 특유의 '연역소거법'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화자인 '반 다인'은 '파일로 번스'라는 가명의 탐정이 해결한 사건의 기록들을 [OO살인사건(Murder Case)]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사변적이고 지적인 탐정 파일로 번스는 '법률적'이고 '귀납적'인 과학적 수사과정을 경시한다. 오로지 용의자들을 먼저 설정하고 그에 얽힌 사실들을 큰 그림과 같은 거대한 논리구조로 구성한 후 일관성에 맞지 않은 사실과 논리를 소거해 나가면서 유력 용의자들을 배제시키고는 궁극에 완벽한 논리구조로 남겨진 최후의 용의자를 범인으로 가려내는 '연역소거법'으로 살인사건의 원인을 추적한다.

물론,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사건에 모두 '밀실'이나 '지인' 등 장소나 용의자가 한정된 상황만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고, 작가 반 다인과 주인공 번스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런 '연역소거' 추리만으로는 죄인을 법정에 세워 배심원과 판사를 설득할만큼 '법적 증거'와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러리 퀸과 파일로 번스의 '연역소거법'에서 오로지 확실한 '법적 증거'는 문명적이지 못하게도 범인의 '자백' 뿐이게 된다.

그리하여, 반 다인의 첫 작품 [벤슨살인사건](1926)과 세번째 작품 [그린살인사건](1928)은 범인의 최종 자백이 가능한 상황까지 몰고 가서 매컴 검사와 히스 형사가 수사종결 및 기소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었지만, [카나리아살인사건](1927), [비숍살인사건](1929), [딱정벌레살인사건](1930)의 범인들의 최후는 '자살'이 되고 만다.

이 중 [비숍살인사건]과 [딱정벌레살인사건]은 '법률적 정의'를 믿지 않는 주인공 파일로 번스의 직간접적 개입 하에 범인에게 '자살'이라는 극단적 최후를 선사한다.

이러한 결말 또한 이후 엘러리 퀸의 또 다른 필명 바너비 로스가 발표한 [Y의 비극](1932)에서 반복된다.

"지나치게 간단해, 매컴. 지나치게 간단하단 말일세. 아무래도 겉으로만 그럴 듯한 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과연 이론이긴 해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단 말이네. 나로서는 '비숍'이 그 끝없는 장난을 이렇게 '평범한 형태(자살)'로 끝을 맺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네. 뇌를 쏘아 버리다니. 그런 재치 없는 짓을 할 리가 없네. 진부하기 짝이 없어. 전혀 독창성이 없으며, '마더 구스 살인'을 고안한 사람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짓일세."
- [비숍살인사건], <카드로 지은 집>, 반 다인, 1929.


반 다인의 네번째 작품인 [비숍살인사건](1929)은 '마더구스' 동요에서 착안한 모티브로 물리학자와 수학자들, 체스 전문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나예요' 하고 참새가 말했다.
'내 활과 화살로
코크 로빈을 죽였어요.'
...
상주(喪主)는 누가 되나,
'나예요' 하고 비둘기가 말했다.
'잃어버린 사랑을 파묻겠어요,
상주는 내가 되지요.'
...
죽는 것을 본 건 누구인가,
'나예요' 하고 파리가 말했다.
'작은 내 눈으로
죽는 걸 보았어요.'"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활터에서>, 반 다인, 1929.

물리학자인 딜러드 교수의 집 활터에서 '로빈'이라는 사람을 '스팔로(참새)'라는 이름의 사람이 죽였다고 '자백'을 하는 사건이 첫번째 살인사건이다.
그리고는 '비숍(Bishp)'이라는 서명으로 '마더구스' 동요가 배달된다,

"조그만 남자가 있었습니다.
조그만 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총알은 납, 납으로 만든 총알로
'조니 스프리그'를 쏘았습니다.
가발 한복판을 쏘았습니다.
가발은 날아갔죠, 날아가는 머리에서."
- [비숍살인사건], <제2막>, 반 다인, 1929.

살인자가 '자백'을 했음에도, '비숍'의 동요가 유포되고, '존 스프리그'라는 수학전공 대학생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우울한 꼽추는 담 위에 앉아 있었다네.
우울한 꼽추는 높은 담 위에서 떨어졌네.
임금님의 말도 신하들도 모두 야단법석
우울한 꼽추는 그래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네."
- [비숍살인사건], <제3막>, 반 다인, 1929.

딜러드 교수의 이웃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던 꼽추 드래커 또한 의문 속에서 '마더구스' 동요처럼 죽게 되는데, 드래커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그린살인사건](1928)과 [비숍살인사건](1929)은 모두 연쇄살인사건인데, 범인의 치밀한 계획에 천재탐정 번스조차도 내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작들인 [벤슨살인사건](1926)과 [카나리아살인사건](1927)에서 번스는 최초 살인사건 현장에서 이미 범인을 속으로 지목해 놓고는 그에 맞는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구축한 후 나중에 다 밝히면서 엄청 잘난 척을 해대는 밉상을 보이고 있는데, 심지어 1930년에 발표한 다섯번째 작품인 [딱정벌레살인사건]에서조차 이미 점지한 범인을 속이기 위한 반전극을 스스로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1928~29년에 발표한 그린 가문과 비숍의 '마더구스' 연쇄살인사건에서는 번스 조차도 마지막 대반전에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모든 사건의 해결자는 결국 파일로 번스이며, 반전극의 종결자도 번스 자신이지만 말이다.

[비숍살인사건]에서는 범죄자에 대한 최고의 응징으로써 '자살'을 옹호하는 번스 조차도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면서도 용의자의 자살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결국 그 자살은 자살을 가장한 타살로 증명되지만 아직 당시의 번스는 범인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모든 걸 다 아는 그 잘난 번스답지 않게 엄청 헤매고 있는데, 역시 흥행을 위해서 주인공의 고난과 갈등은 반드시 필요한가 보다.


"마지막 암흑의 시간에 인간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
"그 점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겁니다. 그 어린아이(마패트)의 증언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나의 술책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고요. 아마 당신(아넷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생각에 대해 갑자기 반발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 [비숍살인사건], <막이 내리다>, 반 다인, 1929.


그럼에도 결국 번스는 '주교'와는 상관없는 연쇄살인마 '비숍'의 정체를 파악해내고, 살인마 비숍을 역으로 속이면서 그가 '자살'로 악행을 마감하도록 조치하고 만다.


"한심한 상류 가정이로군...
... 깊은 유서를 자랑하는 옛 가문도 안일과 나태를 탐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니 한 발 한 발 조락의 길을 더듬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인과응보의 불가사의여! 서(西)에 위텔스바하(비텔스바흐) 집안이 있고 동(東)에 로마노프 집안이 있으며, 저 로마의 줄리앙 클로디안 집안 또한 그렇잖나. 사라센의 압시드 왕조 역시 그렇지. 이 모두가 종족 붕괴의 표본이야... 사치와 궤도가 없는 방종이야말로 부패의 요인일세. 저 무장을 황제로 추대한 로마는 어떠했는가. 권세가 하늘에 닿은 앗시리아의 '사르다나파로스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이것은 모두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 [그린살인사건], <번스, 사건을 분석하다>, 반 다인, 1928.


반 다인 최고의 베스트셀러 [그린살인사건](1928)은 뉴욕의 명문가 '그린' 집안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또 하나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일종의 대저택 '밀실살인' 사건의 형태로 전개된다.

첫 장면은 흡사 미스터리소설의 원조인 애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1839)와도 같다. 오래된 근대적 명문가가 현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치와 부패, 방종으로 무너지는 상황 자체가 소설의 기괴한 배경이 된다.  

파일로 번스의 세번째 '살인사건(Murder Case)이 되는 그린 집안의 연쇄살인사건에서 번스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만큼 사건의 전개가 기괴하고 피해자의 규모도 크며 범인의 계획 또한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하여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연역소거 추리법에 맞는 사건 또한 현실적일 수 없다는 필연의 결론 아니겠는가.


"나는 마침내 그 문서의 각 항목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고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확고하게 지목할 수 있게 되었네. 일단 기초 도안이 세워진 뒤에는 각 세부가 전체 조형에 완전히 들어맞아 왔다네. 그런데도 범죄의 기법만은 여전히 애매모호하였지... 우리에게 그녀의 모략을 쳐부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해서 굳이 우리들의 우매성을 탓하지는 못할 걸세. 왜냐하면 우리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 그것은 그녀 하나가 아니었던 걸세. 그녀 이전의 모든 범죄자 계보, 몇 백을 헤아리는 간교한 범죄자가 한 경험의 축적에다 세계 최대의 범죄학자인 한스 그롯스 박사의 분석 과학의 성과가 덧붙여졌으니 말일세."
- [그린살인사건], <놀라운 진상>, 반 다인, 1929.


결국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또한 현실의 '법적 증거'가 아닌, 그린 저택의 밀폐된 서재에 있던 범죄학자의 고전서적에서 발견한 정황이다. 장서가 앨러리 퀸도 그렇지만 그의 원조 파일로 번스 탐정 또한 서지학과 문헌학의 대가답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천재답게 수천 쪽의 책, 그것도 독일어로 된 책들을 뒤져서 근거를 기어이 찾아낸다.

[그린살인사건](1928)을 통해 번스는 자신의 '연역소거법'의 아웃라인을 밝히는데, 역시 미술 비평가답고 또 그런 만큼 지극히 추상적이며 현학적이다. 


"매컴, 우리가 그린 집안 사건의 온갖 상황을 더듬어 온 수사 방법이 바로 사진처럼 대상의 통일이 없고 서로 관련점이 없었다는 말일세. 우리들은 하나하나의 사실을 그것이 떠올라 온 형태 그대로 음미했을 뿐, 이미 알려진 다른 사실과 관련시켜 분석해 보는 방법을 게을리했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이 사건 전체가 하나하나의 독립된 정수의 배열 또는 배합된 것처럼 다루는 착오를 범하고 말았네. 따라서 각 정수 자체의 의미는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어.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건 하나하나가 부분이 되어 이루고 있는 전체에 대해서 기초 도안(회화의 통일성/디자인)을 밝혀내는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여기까지는 알아듣겠나?"
- [그린살인사건], <빠뜨린 사실>, 반 다인, 1928.


즉,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사진'과 달리 '회화'가 논리적이든 상황적인 주제와 연결되는 '디자인(통일성)'으로 예술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의 '연쇄살인사건' 또한 백가지 사실들을 일관된 통일성으로 '다자인'해서 배치해 보아야 진실을 추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술사가 '열전'을 지은 조르조 바사리가 말한 미술가의 '디세뇨(디자인/design)'가 범죄학에 본격 적용되는 현장이다.

과연,
'범죄 미학론'의 결정체다.

S.S.반 다인의 12편 중 국내 번역된 다섯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내가 중고로나마 구입한 [그린살인사건]을 우리 마을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마을 도서관이 반 다인의 고전적인 다섯 작픔을 모두 소장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래도,
아쉽다.

비현실적인 사건전개는 그렇다 치고,
천재탐정 파일로 번스가 활약하는 이 미스터리 추리상황극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관객으로 그냥 계속 머무르고 싶은데,

아쉽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제대로된 현대 미국 뉴욕의 영어를 구사했다는 반 다인의 다른 작품을 영어로 읽어봐야 하나...

***

1. [그린살인사건(The Green Murder Case)](1928), S.S.Van Dine, 안동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7.
2. [비숍살인사건(The Bishop Murder Case)](1929), S.S.Van Dine, 김성종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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