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의 모험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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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는 과연 '은퇴'할 수 있었을까
- [헤라클레스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1947.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1901~1909.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가.
내 어릴적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된 게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였다지만, 실은 엄밀히 말해 코넌 도일은 '단편'이라기 보다는 '중편'에 가까웠다.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복잡한 플롯과 대반전이 특징이라, '단편'으로 담기엔 물리적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영국의 코넌 도일(1859~1930)과 비슷한 시기 역시 영국 추리소설 작가였던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1874~1936)의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시리즈야말로 진짜 '단편'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겠다.

'단편' 추리소설이라 함은 비단 분량만으로 따지는 게 아니다. 추리소설 특유의 '반전'적 플롯 또한 매우 '단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주인공 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한 사람이 단 한 가지 단서로 인해 범인임이 갑자기 밝혀진다거나, 피해자로 간주되던 주요 등장인물이 알고보니 몇 가지 단서로 인해 그를 살해하고 범인이 변장한 것으로 급반전되는 내용 등이다. 
'단편' 추리소설에게는 짧은 분량 만큼이나 시간이 없다. 복잡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급반전'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피해자와 가장 가깝고,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등장인물을 범인으로 보면 거의 비슷하게 들어 맞을 수도 있다.
​
1950년대에 이미 작금과 같은 AI 로봇 문명을 대부분 예측했던 시대적 천재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도 [흑거미 클럽](1972~1973)이라는 '단편' 추리소설을 썼는데, 그의 '단편'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계속 읽어대는 통에 다른 분야로는 가지 못한 채, 나의 중학교 시절 '장편'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로까지 거슬러 역주행하게 되었다.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특성을 찾아보기 위해 크리스티의 '분신' 같은 독거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까지 보았고, 내처 크리스티의 '연인'과 같은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Hercule Poirot)'의 '마지막'까지 읽었다.


"어젯밤 (고전학자) 버턴 박사는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자네 일은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아닐세.'
하지만 그건 늙다리 친구(버턴 박사)가 잘못 생각한 거야.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란 말은, '현대판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고 고쳐 말했어야 했어. 이 얼마나 재미있고 기발한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열두 사건'만 맡아 해결하고 난 뒤에 '은퇴'해야겠어. 그리고 그 '열두 사건'을 고대 헤라클레스가 겪은 '열두 개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과 특별히 관계있는 것으로 골라야지. 그래, 그건 정말 재미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인 고상함도 맛볼 수 있겠는데 그래.
포와로는 고전 사전을 집어들고서 다시 고대신화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 첫 번째 모험은 '네메아의 사자'사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진짜 살아있는 사자와 관계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 [헤라클레스의 모험], <머리말>, 애거서 크리스티, 1947.


'세계 최고의 두뇌'이자 '회색 뇌세포'를 자랑하는 포와로의 적지 않은 활약상을 읽었지만, 그의 이름(세례명) '에르퀼(에르큘)'이 '헤라클레스(허큘리스;Hercules)'의 불어식 발음이었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되었다.
중학시절 보았던 추억의 <해문출판사> 판으로 '포와로'가 등장하는 작품을 검색하다가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1947)을 주문하고 읽던 중 비로소 인식하게 된 거다.
​
[헤라클레스의 모험]은 고대 그리스 신화 최강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자식들을 살해한 광란 후 회개를 위해 티린스 왕 에우리스테우스를 12년간 섬기는 형벌을 받던 중 수행한 '12가지 과업(The Labours)'과 비유될 수 있는 포와로의 12가지 사건들을 '단편'으로 엮은 단편집이다.
​
서두인 <머리말>에서 포와로는 친구인 고전학자 버턴 박사로부터 이름(세례명)이 왜 '이교도'인 '헤라클레스(에르퀼)'냐며 비웃음을 받고는, 이 참에 오래전 고대의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위대한 '12가지 과업'을 완수하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과업(The Labours of Hercules)'은 다음과 같다.
​
1. 네메아의 사자 퇴치
2. 래르네의 히드라 퇴치
3. 아르카디아의 사슴 생포
4.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생포
5.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청소
6. 스팀팔로스의 새들 퇴치
7. 크레타 섬의 황소 생포
8. 티오메네스 왕 소유의 식인 암말 생포
9.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 탈취
10. 괴물 게리온 소유의 소 생포
11. 님프 헤스페리스들이 지키는 동산의 황금사과 수확
12.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 생포

고대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반신반인으로 힘은 세계 최강이지만 지성은 세계 최하라 할 수 있겠는데, '현대의 헤라클레스'인 '에르퀼 포와로'는 완력이 아닌 오로지 지능으로 승부한다. 물론, '12가지 과업'에 비견되는 사건을 찾다보니 억지도 있다. 잘라도 다시 돋아나는 수많은 머리의 '히드라'를 일파만파 퍼지는 무성한 '소문'에 비유하고 이를 잠재우는 두번째 이야기는 그럴 듯 하지만, 강아지 유괴범을 잡는 과정에서 이용된 영리한 강아지를 '네메아의 사자'에 비유한 첫번째 이야기와 다른 몇 편은 억지스럽게 끼워맞춘 느낌이다.
​
애거서 크리스티는 60편 이상의 '장편'과 20여 편의 '단편'을 썼다는데, 포와로의 '헤라클레스의 모험' 12편은 그녀의 몇 안되는 대표적 '단편'들에 해당되겠다. '장편' 소설 위주였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또한 위에서 언급한 '단편' 추리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
그렇다면,
과연 '에르퀼 포와로'는 이 '12가지 과업'을 수행한 후 그의 선언처럼 '은퇴'했을까?
​
소설이란 발표 시점과 이야기 속 시대적 배경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독일군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사립탐정 역할을 본격 시작했던 포와로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추정되는데, 포와로가 죽게 되는 [커튼](1975)에서도 희대의 살인마를 직접 처치한 것을 보면, [헤라클레스의 모험]인 '12가지 과업' 이후에도 그가 '은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놀기 좋아하는 젊은 아내, 남자 친구와의 바람기... 이러한 것은 모두 사람들의 눈을 못 뜨게 하는 재였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오. 나는 경찰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해보았소. 헤이젤딘 집안의 재산 상태를 조사해 본 거요. '돈'이란 십중팔구 범죄의 '동기'가 되니까..."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지하철 괴사건>,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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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주간지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 그의 수많은 경쟁자들 중 유일한 '여성' 라이벌 작가로 등장했다는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1865~1947)의 이름없는 '구석의 노인' 시리즈 또한 당대의 대표적 '단편' 추리소설이다.
​
여기자 폴리 버튼이 자주 가는 식당 ABC숍에 늘 나타나 그녀에게 최근의 미스터리 사건들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나름의 추리를 통해 범인을 지목하고는 사라지는 '구석의 노인(The Old Man in the Corner)'은 이름도, 그 정체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
주간 매거진을 통해 '셜록 홈즈'와 동시대에 '단편' 추리소설의 전장에서 경쟁했던 무명의 '구석의 노인' 연작은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가 매거진에 게재한 역시 매우 단순한 반전으로 구성된 '단편'들을 모아 1901년의 '제1단편집'과 1909년의 '제2단편집'으로 묶였다. 
마을도서관의 <동서미스터리북스> 서가에서 대출한 [구석의 노인 사건집]은 이 중 몇 편을 우리말로 엮은 책이었다.


"팔레트 씨의 증언은 실로 놀라운 것으로, 그로 인해 지금까지 다이크 노인의 살해 사건을 덮고 있던 수수께끼의 비밀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것 같았소. 즉 그의 증언이 이 사건에 '동기'를 제공해준 것이오. '돈'이라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강력한 '동기'를."
- [구석의 노인 사건집], <리슨 그로브의 수수께끼>,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1단편집', 1901.
​
​
살인의 근본적 '동기'는 '돈'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수차례 강조하고, 역시 처음에 용의자로 '억울'하게 지명되어 검시 법정에 세워졌으나 알리바이가 밝혀져 풀려난 인물들에 대해 '구석의 노인'은 해당 알리바이가 마술처럼 가능토록 했던 '공범'이나 헛점 등을 추리하고 밝혀내면서 ABC숍 식당 안 맞은편에 앉은 여기자 폴리에게 답을 건네고는 사라지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건 내 경험에서 하는 말이지만, 범인이 지나치게 얼빠지고 서툴게 보이며, 증거가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을 때일수록 경찰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거요."
- [구석의 노인 사건집], <리젠트 파크의 살인>,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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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무엇을 하든 손으로는 항상 종이접기를 하듯, '구석의 노인'은 추리과정에 대한 썰을 여기자 폴리에게 끊임없이 주절거리면서 손으로는 끈으로 복잡한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안락의자 탐정' 같아 보여도 그는 살인사건 피살자를 둘러싼 검시 법정의 맨앞자리에 꼭 참석하고 용의자들의 사진을 찍으며 관련자들의 공방을 주의깊게 시청하고 정리하며 추리하는 활약을 전개한다. 
정체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는 탐정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듯 해도 결국 '단순'한 요점을 놓치기 일쑤인 경찰 당국을 비웃어대며 그럴듯하게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있다.
​
즉, '단편' 추리소설의 특징대로, 피해자와 가까울수록, 행동이 어설플수록, 가장 범인에 그럴듯하지 않을수록, 반대로 처음부터 범인이라는 누명을 썼다가 풀려날수록 경찰들처럼 단순한 '반전'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구석의 노인'은 독자들의 대표자인 여기자 폴리에게 경고한다.


"처음 만났을 때(<펜처치 거리의 수수께끼>, 1901) 당신(구석의 노인)이 하신 말씀, '세상에 수수께끼란 없다'고 하신 말씀이 반드시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이 사건은 분명히 수수께끼예요. 파시 거리(Percy St.)의 이 괴사건은, 당신은 경찰과 마찬가지로 그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는 거예요."
- [구석의 노인 사건집],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
​
이렇듯, 무능한 경찰이 보지 못하는 '반전'의 비밀을 밝히는 이 '구석의 노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1909)에서는 살인 현장에서 창문을 임시로 묶어둔 복잡한 '매듭'을 통해 이 '탐정'인 채 하는 '구석의 노인'이 정작 살인자 본인이 아닐까 하는 여운을 남기며 ABC숍에서 그 노인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데, 나름의 추리과정을 일방적으로 여기자 폴리에게 읊어대는 이전의 대부분 사건의 진범 또한 이 '구석의 노인'이 아닐까 독자들이 추정을 하게끔도 한다.
​
그렇게 "세상에 수수께끼란 없다"고 공언하며 거만하게 추리를 해대던 정체불명의 '구석의 노인'은 본인이 '범죄자'일 수 있다는 의혹과 함께 '은퇴'하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
만일 '구석의 노인'이 이 모든 사건의 진범이자 배후 조종자 또는 공작자라면, 
그는 엄청난 '희대의 살인마'라 할 수 있겠다.

에르퀼 포와로가 '12가지 과업'인 [헤라클레스의 모험](1947)을 마친 후에도 결국 '은퇴'를 하지 못하고, 그의 진정 '마지막' 활약인 [커튼](1975)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이 '마지막' 사건을 풀고 나서야 '은퇴'하는 이유 또한 포와로가 오랜 시절 쫓던 희대의 살인마 '스티븐 노튼'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
포와로의 진정한 '은퇴'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을 마친 후가 아니라,
'희대의 살인마'를 영원히 '은퇴'시킴과 동시에,
포와로 본인 삶의 '커튼'을 내리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아주 '단순'한 급반전을 무기로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단편' 추리소설들을 읽으며 두 인물을 만났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영원한 '연인' 에르퀼(헤라클레스) 포와로 탐정과,
에무스카 오르치의 연작과도 같은 '단편' 사건들 속 어쩌면 진범으로 추정되는 '구석의 노인'.

이 둘이 '단편'의 단순한 반전을 넘어 '장편'의 무대에서 만났다면 과연 누가 먼저 '은퇴'하게 되었을까.
​
뜬금없이 궁금해진다.

***

1.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1947), Agatha Christie, 황해선 옮김, <해문출판사>, 1990~2009.
2. [구석의 노인 사건집((The Case Book of the Old Man in the Corner)](1901~1909), Emmuska Baroness Orczy, 이정태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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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63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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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는 과연 '은퇴'할 수 있었을까
- [헤라클레스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1947.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1901~1909.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가.
내 어릴적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된 게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였다지만, 실은 엄밀히 말해 코넌 도일은 '단편'이라기 보다는 '중편'에 가까웠다.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복잡한 플롯과 대반전이 특징이라, '단편'으로 담기엔 물리적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영국의 코넌 도일(1859~1930)과 비슷한 시기 역시 영국 추리소설 작가였던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1874~1936)의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시리즈야말로 진짜 '단편'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겠다.

'단편' 추리소설이라 함은 비단 분량만으로 따지는 게 아니다. 추리소설 특유의 '반전'적 플롯 또한 매우 '단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주인공 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한 사람이 단 한 가지 단서로 인해 범인임이 갑자기 밝혀진다거나, 피해자로 간주되던 주요 등장인물이 알고보니 몇 가지 단서로 인해 그를 살해하고 범인이 변장한 것으로 급반전되는 내용 등이다. 
'단편' 추리소설에게는 짧은 분량 만큼이나 시간이 없다. 복잡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급반전'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피해자와 가장 가깝고,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등장인물을 범인으로 보면 거의 비슷하게 들어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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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이미 작금과 같은 AI 로봇 문명을 대부분 예측했던 시대적 천재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도 [흑거미 클럽](1972~1973)이라는 '단편' 추리소설을 썼는데, 그의 '단편'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계속 읽어대는 통에 다른 분야로는 가지 못한 채, 나의 중학교 시절 '장편'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로까지 거슬러 역주행하게 되었다.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특성을 찾아보기 위해 크리스티의 '분신' 같은 독거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까지 보았고, 내처 크리스티의 '연인'과 같은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Hercule Poirot)'의 '마지막'까지 읽었다.


"어젯밤 (고전학자) 버턴 박사는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자네 일은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아닐세.'
하지만 그건 늙다리 친구(버턴 박사)가 잘못 생각한 거야.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란 말은, '현대판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고 고쳐 말했어야 했어. 이 얼마나 재미있고 기발한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열두 사건'만 맡아 해결하고 난 뒤에 '은퇴'해야겠어. 그리고 그 '열두 사건'을 고대 헤라클레스가 겪은 '열두 개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과 특별히 관계있는 것으로 골라야지. 그래, 그건 정말 재미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인 고상함도 맛볼 수 있겠는데 그래.
포와로는 고전 사전을 집어들고서 다시 고대신화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 첫 번째 모험은 '네메아의 사자'사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진짜 살아있는 사자와 관계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 [헤라클레스의 모험], <머리말>, 애거서 크리스티, 1947.


'세계 최고의 두뇌'이자 '회색 뇌세포'를 자랑하는 포와로의 적지 않은 활약상을 읽었지만, 그의 이름(세례명) '에르퀼(에르큘)'이 '헤라클레스(허큘리스;Hercules)'의 불어식 발음이었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되었다.
중학시절 보았던 추억의 <해문출판사> 판으로 '포와로'가 등장하는 작품을 검색하다가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1947)을 주문하고 읽던 중 비로소 인식하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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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모험]은 고대 그리스 신화 최강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자식들을 살해한 광란 후 회개를 위해 티린스 왕 에우리스테우스를 12년간 섬기는 형벌을 받던 중 수행한 '12가지 과업(The Labours)'과 비유될 수 있는 포와로의 12가지 사건들을 '단편'으로 엮은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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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인 <머리말>에서 포와로는 친구인 고전학자 버턴 박사로부터 이름(세례명)이 왜 '이교도'인 '헤라클레스(에르퀼)'냐며 비웃음을 받고는, 이 참에 오래전 고대의 영웅 '헤라클레스'처럼 위대한 '12가지 과업'을 완수하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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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과업(The Labours of Hercules)'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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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메아의 사자 퇴치
2. 래르네의 히드라 퇴치
3. 아르카디아의 사슴 생포
4.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생포
5.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청소
6. 스팀팔로스의 새들 퇴치
7. 크레타 섬의 황소 생포
8. 티오메네스 왕 소유의 식인 암말 생포
9.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 탈취
10. 괴물 게리온 소유의 소 생포
11. 님프 헤스페리스들이 지키는 동산의 황금사과 수확
12.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 생포

고대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반신반인으로 힘은 세계 최강이지만 지성은 세계 최하라 할 수 있겠는데, '현대의 헤라클레스'인 '에르퀼 포와로'는 완력이 아닌 오로지 지능으로 승부한다. 물론, '12가지 과업'에 비견되는 사건을 찾다보니 억지도 있다. 잘라도 다시 돋아나는 수많은 머리의 '히드라'를 일파만파 퍼지는 무성한 '소문'에 비유하고 이를 잠재우는 두번째 이야기는 그럴 듯 하지만, 강아지 유괴범을 잡는 과정에서 이용된 영리한 강아지를 '네메아의 사자'에 비유한 첫번째 이야기와 다른 몇 편은 억지스럽게 끼워맞춘 느낌이다.
​
애거서 크리스티는 60편 이상의 '장편'과 20여 편의 '단편'을 썼다는데, 포와로의 '헤라클레스의 모험' 12편은 그녀의 몇 안되는 대표적 '단편'들에 해당되겠다. '장편' 소설 위주였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또한 위에서 언급한 '단편' 추리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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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에르퀼 포와로'는 이 '12가지 과업'을 수행한 후 그의 선언처럼 '은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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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발표 시점과 이야기 속 시대적 배경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독일군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사립탐정 역할을 본격 시작했던 포와로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추정되는데, 포와로가 죽게 되는 [커튼](1975)에서도 희대의 살인마를 직접 처치한 것을 보면, [헤라클레스의 모험]인 '12가지 과업' 이후에도 그가 '은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놀기 좋아하는 젊은 아내, 남자 친구와의 바람기... 이러한 것은 모두 사람들의 눈을 못 뜨게 하는 재였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오. 나는 경찰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해보았소. 헤이젤딘 집안의 재산 상태를 조사해 본 거요. '돈'이란 십중팔구 범죄의 '동기'가 되니까..."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지하철 괴사건>,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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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주간지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 그의 수많은 경쟁자들 중 유일한 '여성' 라이벌 작가로 등장했다는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1865~1947)의 이름없는 '구석의 노인' 시리즈 또한 당대의 대표적 '단편'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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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 폴리 버튼이 자주 가는 식당 ABC숍에 늘 나타나 그녀에게 최근의 미스터리 사건들을 분석하고 설명하면서 나름의 추리를 통해 범인을 지목하고는 사라지는 '구석의 노인(The Old Man in the Corner)'은 이름도, 그 정체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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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매거진을 통해 '셜록 홈즈'와 동시대에 '단편' 추리소설의 전장에서 경쟁했던 무명의 '구석의 노인' 연작은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가 매거진에 게재한 역시 매우 단순한 반전으로 구성된 '단편'들을 모아 1901년의 '제1단편집'과 1909년의 '제2단편집'으로 묶였다. 
마을도서관의 <동서미스터리북스> 서가에서 대출한 [구석의 노인 사건집]은 이 중 몇 편을 우리말로 엮은 책이었다.


"팔레트 씨의 증언은 실로 놀라운 것으로, 그로 인해 지금까지 다이크 노인의 살해 사건을 덮고 있던 수수께끼의 비밀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것 같았소. 즉 그의 증언이 이 사건에 '동기'를 제공해준 것이오. '돈'이라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강력한 '동기'를."
- [구석의 노인 사건집], <리슨 그로브의 수수께끼>,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1단편집',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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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근본적 '동기'는 '돈'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수차례 강조하고, 역시 처음에 용의자로 '억울'하게 지명되어 검시 법정에 세워졌으나 알리바이가 밝혀져 풀려난 인물들에 대해 '구석의 노인'은 해당 알리바이가 마술처럼 가능토록 했던 '공범'이나 헛점 등을 추리하고 밝혀내면서 ABC숍 식당 안 맞은편에 앉은 여기자 폴리에게 답을 건네고는 사라지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건 내 경험에서 하는 말이지만, 범인이 지나치게 얼빠지고 서툴게 보이며, 증거가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을 때일수록 경찰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거요."
- [구석의 노인 사건집], <리젠트 파크의 살인>,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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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하든 손으로는 항상 종이접기를 하듯, '구석의 노인'은 추리과정에 대한 썰을 여기자 폴리에게 끊임없이 주절거리면서 손으로는 끈으로 복잡한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안락의자 탐정' 같아 보여도 그는 살인사건 피살자를 둘러싼 검시 법정의 맨앞자리에 꼭 참석하고 용의자들의 사진을 찍으며 관련자들의 공방을 주의깊게 시청하고 정리하며 추리하는 활약을 전개한다. 
정체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는 탐정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듯 해도 결국 '단순'한 요점을 놓치기 일쑤인 경찰 당국을 비웃어대며 그럴듯하게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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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단편' 추리소설의 특징대로, 피해자와 가까울수록, 행동이 어설플수록, 가장 범인에 그럴듯하지 않을수록, 반대로 처음부터 범인이라는 누명을 썼다가 풀려날수록 경찰들처럼 단순한 '반전'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구석의 노인'은 독자들의 대표자인 여기자 폴리에게 경고한다.


"처음 만났을 때(<펜처치 거리의 수수께끼>, 1901) 당신(구석의 노인)이 하신 말씀, '세상에 수수께끼란 없다'고 하신 말씀이 반드시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이 사건은 분명히 수수께끼예요. 파시 거리(Percy St.)의 이 괴사건은, 당신은 경찰과 마찬가지로 그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는 거예요."
- [구석의 노인 사건집],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제2단편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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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무능한 경찰이 보지 못하는 '반전'의 비밀을 밝히는 이 '구석의 노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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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1909)에서는 살인 현장에서 창문을 임시로 묶어둔 복잡한 '매듭'을 통해 이 '탐정'인 채 하는 '구석의 노인'이 정작 살인자 본인이 아닐까 하는 여운을 남기며 ABC숍에서 그 노인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데, 나름의 추리과정을 일방적으로 여기자 폴리에게 읊어대는 이전의 대부분 사건의 진범 또한 이 '구석의 노인'이 아닐까 독자들이 추정을 하게끔도 한다.
​
그렇게 "세상에 수수께끼란 없다"고 공언하며 거만하게 추리를 해대던 정체불명의 '구석의 노인'은 본인이 '범죄자'일 수 있다는 의혹과 함께 '은퇴'하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
만일 '구석의 노인'이 이 모든 사건의 진범이자 배후 조종자 또는 공작자라면, 
그는 엄청난 '희대의 살인마'라 할 수 있겠다.

에르퀼 포와로가 '12가지 과업'인 [헤라클레스의 모험](1947)을 마친 후에도 결국 '은퇴'를 하지 못하고, 그의 진정 '마지막' 활약인 [커튼](1975)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이 '마지막' 사건을 풀고 나서야 '은퇴'하는 이유 또한 포와로가 오랜 시절 쫓던 희대의 살인마 '스티븐 노튼'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
포와로의 진정한 '은퇴'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을 마친 후가 아니라,
'희대의 살인마'를 영원히 '은퇴'시킴과 동시에,
포와로 본인 삶의 '커튼'을 내리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아주 '단순'한 급반전을 무기로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단편' 추리소설들을 읽으며 두 인물을 만났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영원한 '연인' 에르퀼(헤라클레스) 포와로 탐정과,
에무스카 오르치의 연작과도 같은 '단편' 사건들 속 어쩌면 진범으로 추정되는 '구석의 노인'.

이 둘이 '단편'의 단순한 반전을 넘어 '장편'의 무대에서 만났다면 과연 누가 먼저 '은퇴'하게 되었을까.
​
뜬금없이 궁금해진다.

***

1. [헤라클레스의 모험(The Labours of Hercules)](1947), Agatha Christie, 황해선 옮김, <해문출판사>, 1990~2009.
2. [구석의 노인 사건집((The Case Book of the Old Man in the Corner)](1901~1909), Emmuska Baroness Orczy, 이정태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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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1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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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뇌세포'의 '처음'과 '마지막'
- [코끼리는 기억한다] / [커튼] /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1920~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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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는 말이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과거의 어느 곳으로부터 보금자리로 돌아올 가능성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런 걸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갖고 있다.'"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1부 9장. 코끼리 조사의 결과>, 애거서 크리스티,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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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스럽고 공포에 싸인 분위기를 추적하던 중, 잠시 나의 장편소설 읽기 원천이었던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의 분신과 같은 '여성' 탐정 '미스 마플(Ms. Marple)' 할머니의 '마지막' 활약까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미스 마플의 첫 번째 등장은 1930년 발표된 [목사관 살인사건]이었다. 마플 양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까지 살아서 활동했는데, '여성' 작가의 '여성' 주인공 탐정이라 해서 별 다른 특성은 없고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 같은 건 단지 내가 만들어낸 관념이었다는 걸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등단과 함께 등장했던 주요 명탐정이 '에르퀼 포와로(Hercule Poirot)'였으므로 나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 탐색을 멈추고 명탐정 포와로의 활약을 마저 확인하고 싶어졌다.

1920년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으로 첫 작품을 발표한 애거서 크리스티는 등단 후 10년이 지나서야 작가 자신의 '분신'과 같은 '미스 마플'을 창조했는데, 등단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부터 등장한 에르퀼 포와로는 어쩌면 작가 자신의 평생 '연인'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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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살인](1934)으로 유명하고, 그 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 [ABC 살인사건](1936), [테이블 위의 카드](1936), [메소포타미아의 죽음](1936), [나일강의 죽음](1937) 등 약 38편의 걸출한 작품에서 활약한 에르퀼 포와로는 평생 80편 이상의 장/단편 작품을 썼다던 애거서 크리스티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게 된다.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는 1920년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제1차 대전 중 독일군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영국으로 망명한 후로, 1975년 [커튼]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55년을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지냈으니, 현실에서는 두 번 결혼한 크리스티에게 포와로는 오랫동안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았던 이야기 속의 '진짜' 남편과도 같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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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랗고 큰 대머리에 우스꽝스런 콧수염과 작은 키(약 163cm)로 묘사되는 포와로는 벨기에 경찰에서 은퇴 후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군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여 본격 사립탐정 역할을 하는데, 자칭 세계 최고의 뛰어난 '회색 뇌세포'를 작동시켜 오래된 살인사건을 몇 건 밝혀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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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를 '세계 최고의 명탐정'이라 자부하고 본인의 '회색 뇌세포'를 자랑한다.


"'글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포와로는 좀 당황한 얼굴로 그녀(올리버 부인)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고요?'
'사실 전 '코끼리'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코끼리?'
...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코끼리를 만나겠다는 게 아니라, '코끼리'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거예요. 뛰어나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몇몇 있으니까요...'"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장. 코끼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 애거서 크리스티, 1972.
​
​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라는 작품이다.
​
[테이블 위의 카드]에서 함께 등장한 추리소설 작가 올리버 부인이 가져온 14년 전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이미 노신사가 되었을 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이 오래전 사건의 관계자들을 만나 오랜 기억들을 수집하는 것을 도우면서 진위가 불분명한 몇 가지 단서들(쌍둥이, 가발, 개, 가정교사 등)을 추적하며 의문에 싸였던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그(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에게 다가갔다.
'이젠 런던으로 돌아가야죠. 비극적인 사건과 애정에 얽힌 문제는 잊어버리고 평상시 생활로 돌아가야겠죠.'
'코끼리는 기억할 수 있어요.'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에요. 자비롭게도 우리 인간은 잊어버릴 수가 있죠.'"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부 20장. 사문회>, 애거서 크리스티, 1972.
​
​
이 작품에 '코끼리'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지능이 높고 기억력이 좋다는 '코끼리'를 오래전 관련자들에 은유하며, 그들의 '기억'이 '코끼리'의 '기억력'처럼 오랫 동안 잊혀지지 않고 진실을 가리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사한다는 뜻이다.
​
오래전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격언처럼 짙은 여운을 남기는데, 보통은 과거의 죄를 덮기 위해 현재의 새로운 살인을 초래하기 마련이지만,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살인자들이 이미 죽음으로 마무리된 사건으로 그 '긴 그림자'의 폐해가 그리 짙지는 않다.
​
그러므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래븐스크로프트 부부의 딸 실리아의 앞날에 포와로와 올리버 부인 콤비는 '코끼리'와 다르게 '망각'에 익숙한 '인간'의 장점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을 격려해주고 있다.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에서 에르퀼 포와로는 노신사가 되었지만 아직 팔팔하게 '마지막' 활약을 한다. 반면, 그의 진짜 '마지막' 작품에서 포와로는 거의 삶의 끝자락에서(나중에 이 또한 연기로 판명나게 되지만)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는데, 그 장소는 바로 포와로가 '처음' 등장하여 활약한 '스타일즈(Styles)' 저택으로 선택된다.


"'이곳의 분위기 말이에요. (헤이스팅스) 선생님은 그런 걸 느끼지 못하세요? 저는 느껴요. 어쩐지 '사악한' 분위기,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세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방금 말한 게 사실일까?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죽음. 살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죽음이 발생하게 되면 그 장소에 강한 인상이 남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심령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스타일즈 저택'은 그렇게 오래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흔적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 이 벽들, 이 정원 안에서 살인의 음모가 떠나지 않고 있다가 점점 강해져서 마침내는 결정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맺게 되었었지. 그것이 아직도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단 말인가?"
- [커튼], <제7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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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영국 런던 대공습이 한창일 때 대부분 영국인들이 그랬듯,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또한 내일 자신이 과연 살아 있을지를 오늘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담은 작품을 써 두었다고 한다. 자신의 영원한 '연인' 포와로와 끝까지 함께하기 위해서였겠다. 그 작품이 바로 [커튼]으로, 포와로의 죽음으로 머무리되는 이야기다.
​
제2차 대전 후 살아남은 애거서 크리스티는 [커튼]을 미발표작으로 유보하다가 작가의 만년인 1975년에 발표하면서 작가 본인보다 먼저 보내준다. 크리스티가 영원토록 사랑했던 '연인' 포와로는 1975년에 먼저 죽고 작가 자신의 '분신' 미스 마플은 그녀의 사후인 1976년에도 여전히 살아서 활약한다. 
그 작품이 바로 [잠자는 살인](1976)이다.

물론, 주인공 탐정의 '마지막' 활약 시점과 작품의 '마지막' 발표 시점의 차이는 있다.
​
즉,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은 [복수의 여신](1971)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발표작은 [잠자는 살인](1976)이고,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이지만 이 작품은 1940년대에 이미 창작되었으니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실제 그의 '마지막' 활약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
애거서 크리스티가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상정하고 오래 전에 써두었던 [커튼]을 한참 후에 발표한 것이니, 포와로의 실제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인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포와로 작품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로 보면 되겠다.
​
그러므로 첫 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 처음 등장한 망명객 포와로의 연령대가 5~60대라고 치면 [커튼](1975)의 발표 연도를 고려하면 포와로는 100살이 넘겠지만, 실제로 [커튼]이 1940년대에 씌어졌다니 80대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는 그 배경이 발표된 시기가 아니라 대략 제2차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생각해야겠다. 
​
[커튼](1975)에서 포와로는 명백히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첫 등장했던 '스타일즈 저택'에서 극악한 '살인자 X'를 본인 손으로 직접 처단하고는 마치 '자연사'와 같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것은 헤이스팅스, 나의 '마지막' 사건이 될 걸세. 또한, 가장 흥미있는 사건이지. 가장 관심있는 범죄가 될 거야. 우리가 다루고 있는 'X'는 고도의 기술을 갖추고 있는 녀석이어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네. 그만큼이나, 이 친구야, 이 'X'는 나를 패배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이 에르큘 포와로를 말이야! 그는 내가 전혀 해답을 찾아낼 수 없는 공격법을 개발했다네.'
'당신이 건강했다면...'
...
에르큘 포와로는 바로 화를 냈다.
...
'... 나의 사지가 못 쓰게 되었고 심장도 나를 농락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두뇌'만은, 헤이스팅스, 나의 '두뇌'는 고장 난 곳이 한 군데도 없이 그 기능을 다 발휘하고 있단 말이야. 아직도 최고로 우수하다고, 나의 '두뇌'는 말일세.'"
- [커튼], <제15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
​
[커튼]의 살인자 'X'는 본인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을 교묘하게 사주하여 수많은 살인을 해 온 자로, 에르퀼 포와로가 오랫 동안 추적해 왔고 결국 '사악한' 기운이 유령처럼 감도는 불길한 '스타일즈 저택'으로 살인자 'X'를 유인히여 결단낸 후 포와로 스스로도 죽는다는 내용이다.
​
이처럼 평생 '살인'을 증오하고 인간 생명을 귀하게 여겨온 포와로가 희대의 살인마와의 '마지막' 게임에서 승리하되 법의 처벌이 아닌 사적이고 인간적인 응징을 하면서 이젠 늙어버린 자신의 육신 속 아직 건재한 '회색 뇌세포'를 정지시키고 마는 [커튼](1975)은 확실한 포와로 '마지막' 작품이다.
​
이렇게 오래 전 애거서 크리스티와 그녀의 연인 에르퀼 포와로의 '처음'과 '마지막'을 새삼 읽었으나, 이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여왕과 그녀의 평생 연인 '세계 최고'의 '회색 뇌세포' 두뇌, 에르퀼 포와로를 이대로 떠나 보낼 수가 없다.
​
그가 활약한 소설 중 내가 안 읽은 작품 몇 권을,
역시 추억의 <해문출판사> 판으로 주문한다.
​
지금 바로 읽을지, 또 언제 읽어볼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
***
​
1.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 Agatha Christie, 권순홍 옮김, <해문출판사>, 1988~2010.
2. [커튼(Curtain)](1975),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9.
3.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1920),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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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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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뇌세포'의 '처음'과 '마지막'
- [코끼리는 기억한다] / [커튼] /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1920~1975.
​
​
"맞는 말이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과거의 어느 곳으로부터 보금자리로 돌아올 가능성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런 걸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갖고 있다.'"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1부 9장. 코끼리 조사의 결과>, 애거서 크리스티, 1972.
​
​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스럽고 공포에 싸인 분위기를 추적하던 중, 잠시 나의 장편소설 읽기 원천이었던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의 분신과 같은 '여성' 탐정 '미스 마플(Ms. Marple)' 할머니의 '마지막' 활약까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미스 마플의 첫 번째 등장은 1930년 발표된 [목사관 살인사건]이었다. 마플 양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까지 살아서 활동했는데, '여성' 작가의 '여성' 주인공 탐정이라 해서 별 다른 특성은 없고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 같은 건 단지 내가 만들어낸 관념이었다는 걸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등단과 함께 등장했던 주요 명탐정이 '에르퀼 포와로(Hercule Poirot)'였으므로 나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 탐색을 멈추고 명탐정 포와로의 활약을 마저 확인하고 싶어졌다.

1920년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으로 첫 작품을 발표한 애거서 크리스티는 등단 후 10년이 지나서야 작가 자신의 '분신'과 같은 '미스 마플'을 창조했는데, 등단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부터 등장한 에르퀼 포와로는 어쩌면 작가 자신의 평생 '연인'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
[오리엔트 특급살인](1934)으로 유명하고, 그 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 [ABC 살인사건](1936), [테이블 위의 카드](1936), [메소포타미아의 죽음](1936), [나일강의 죽음](1937) 등 약 38편의 걸출한 작품에서 활약한 에르퀼 포와로는 평생 80편 이상의 장/단편 작품을 썼다던 애거서 크리스티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게 된다.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는 1920년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제1차 대전 중 독일군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영국으로 망명한 후로, 1975년 [커튼]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55년을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지냈으니, 현실에서는 두 번 결혼한 크리스티에게 포와로는 오랫동안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았던 이야기 속의 '진짜' 남편과도 같다고 하겠다.
​
동그랗고 큰 대머리에 우스꽝스런 콧수염과 작은 키(약 163cm)로 묘사되는 포와로는 벨기에 경찰에서 은퇴 후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군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여 본격 사립탐정 역할을 하는데, 자칭 세계 최고의 뛰어난 '회색 뇌세포'를 작동시켜 오래된 살인사건을 몇 건 밝혀내기도 한다.
​
그는 스스로를 '세계 최고의 명탐정'이라 자부하고 본인의 '회색 뇌세포'를 자랑한다.


"'글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포와로는 좀 당황한 얼굴로 그녀(올리버 부인)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고요?'
'사실 전 '코끼리'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코끼리?'
...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코끼리를 만나겠다는 게 아니라, '코끼리'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거예요. 뛰어나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몇몇 있으니까요...'"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장. 코끼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 애거서 크리스티, 1972.
​
​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라는 작품이다.
​
[테이블 위의 카드]에서 함께 등장한 추리소설 작가 올리버 부인이 가져온 14년 전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이미 노신사가 되었을 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이 오래전 사건의 관계자들을 만나 오랜 기억들을 수집하는 것을 도우면서 진위가 불분명한 몇 가지 단서들(쌍둥이, 가발, 개, 가정교사 등)을 추적하며 의문에 싸였던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그(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에게 다가갔다.
'이젠 런던으로 돌아가야죠. 비극적인 사건과 애정에 얽힌 문제는 잊어버리고 평상시 생활로 돌아가야겠죠.'
'코끼리는 기억할 수 있어요.'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에요. 자비롭게도 우리 인간은 잊어버릴 수가 있죠.'"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부 20장. 사문회>, 애거서 크리스티, 1972.
​
​
이 작품에 '코끼리'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지능이 높고 기억력이 좋다는 '코끼리'를 오래전 관련자들에 은유하며, 그들의 '기억'이 '코끼리'의 '기억력'처럼 오랫 동안 잊혀지지 않고 진실을 가리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사한다는 뜻이다.
​
오래전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격언처럼 짙은 여운을 남기는데, 보통은 과거의 죄를 덮기 위해 현재의 새로운 살인을 초래하기 마련이지만,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살인자들이 이미 죽음으로 마무리된 사건으로 그 '긴 그림자'의 폐해가 그리 짙지는 않다.
​
그러므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래븐스크로프트 부부의 딸 실리아의 앞날에 포와로와 올리버 부인 콤비는 '코끼리'와 다르게 '망각'에 익숙한 '인간'의 장점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을 격려해주고 있다.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에서 에르퀼 포와로는 노신사가 되었지만 아직 팔팔하게 '마지막' 활약을 한다. 반면, 그의 진짜 '마지막' 작품에서 포와로는 거의 삶의 끝자락에서(나중에 이 또한 연기로 판명나게 되지만)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는데, 그 장소는 바로 포와로가 '처음' 등장하여 활약한 '스타일즈(Styles)' 저택으로 선택된다.


"'이곳의 분위기 말이에요. (헤이스팅스) 선생님은 그런 걸 느끼지 못하세요? 저는 느껴요. 어쩐지 '사악한' 분위기,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세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방금 말한 게 사실일까?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죽음. 살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죽음이 발생하게 되면 그 장소에 강한 인상이 남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심령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스타일즈 저택'은 그렇게 오래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흔적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 이 벽들, 이 정원 안에서 살인의 음모가 떠나지 않고 있다가 점점 강해져서 마침내는 결정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맺게 되었었지. 그것이 아직도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단 말인가?"
- [커튼], <제7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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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영국 런던 대공습이 한창일 때 대부분 영국인들이 그랬듯,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또한 내일 자신이 과연 살아 있을지를 오늘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담은 작품을 써 두었다고 한다. 자신의 영원한 '연인' 포와로와 끝까지 함께하기 위해서였겠다. 그 작품이 바로 [커튼]으로, 포와로의 죽음으로 머무리되는 이야기다.
​
제2차 대전 후 살아남은 애거서 크리스티는 [커튼]을 미발표작으로 유보하다가 작가의 만년인 1975년에 발표하면서 작가 본인보다 먼저 보내준다. 크리스티가 영원토록 사랑했던 '연인' 포와로는 1975년에 먼저 죽고 작가 자신의 '분신' 미스 마플은 그녀의 사후인 1976년에도 여전히 살아서 활약한다. 
그 작품이 바로 [잠자는 살인](1976)이다.

물론, 주인공 탐정의 '마지막' 활약 시점과 작품의 '마지막' 발표 시점의 차이는 있다.
​
즉,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은 [복수의 여신](1971)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발표작은 [잠자는 살인](1976)이고,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이지만 이 작품은 1940년대에 이미 창작되었으니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실제 그의 '마지막' 활약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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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가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상정하고 오래 전에 써두었던 [커튼]을 한참 후에 발표한 것이니, 포와로의 실제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인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포와로 작품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로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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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첫 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 처음 등장한 망명객 포와로의 연령대가 5~60대라고 치면 [커튼](1975)의 발표 연도를 고려하면 포와로는 100살이 넘겠지만, 실제로 [커튼]이 1940년대에 씌어졌다니 80대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는 그 배경이 발표된 시기가 아니라 대략 제2차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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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1975)에서 포와로는 명백히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첫 등장했던 '스타일즈 저택'에서 극악한 '살인자 X'를 본인 손으로 직접 처단하고는 마치 '자연사'와 같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것은 헤이스팅스, 나의 '마지막' 사건이 될 걸세. 또한, 가장 흥미있는 사건이지. 가장 관심있는 범죄가 될 거야. 우리가 다루고 있는 'X'는 고도의 기술을 갖추고 있는 녀석이어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네. 그만큼이나, 이 친구야, 이 'X'는 나를 패배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이 에르큘 포와로를 말이야! 그는 내가 전혀 해답을 찾아낼 수 없는 공격법을 개발했다네.'
'당신이 건강했다면...'
...
에르큘 포와로는 바로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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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지가 못 쓰게 되었고 심장도 나를 농락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두뇌'만은, 헤이스팅스, 나의 '두뇌'는 고장 난 곳이 한 군데도 없이 그 기능을 다 발휘하고 있단 말이야. 아직도 최고로 우수하다고, 나의 '두뇌'는 말일세.'"
- [커튼], <제15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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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의 살인자 'X'는 본인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을 교묘하게 사주하여 수많은 살인을 해 온 자로, 에르퀼 포와로가 오랫 동안 추적해 왔고 결국 '사악한' 기운이 유령처럼 감도는 불길한 '스타일즈 저택'으로 살인자 'X'를 유인히여 결단낸 후 포와로 스스로도 죽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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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생 '살인'을 증오하고 인간 생명을 귀하게 여겨온 포와로가 희대의 살인마와의 '마지막' 게임에서 승리하되 법의 처벌이 아닌 사적이고 인간적인 응징을 하면서 이젠 늙어버린 자신의 육신 속 아직 건재한 '회색 뇌세포'를 정지시키고 마는 [커튼](1975)은 확실한 포와로 '마지막'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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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래 전 애거서 크리스티와 그녀의 연인 에르퀼 포와로의 '처음'과 '마지막'을 새삼 읽었으나, 이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여왕과 그녀의 평생 연인 '세계 최고'의 '회색 뇌세포' 두뇌, 에르퀼 포와로를 이대로 떠나 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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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활약한 소설 중 내가 안 읽은 작품 몇 권을,
역시 추억의 <해문출판사> 판으로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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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읽을지, 또 언제 읽어볼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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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 Agatha Christie, 권순홍 옮김, <해문출판사>, 1988~2010.
2. [커튼(Curtain)](1975),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9.
3.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1920),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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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기억한다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6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권순홍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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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뇌세포'의 '처음'과 '마지막'
- [코끼리는 기억한다] / [커튼] /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1920~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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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과거의 어느 곳으로부터 보금자리로 돌아올 가능성 같은 것이 있지요. 그런 걸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갖고 있다.'"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1부 9장. 코끼리 조사의 결과>, 애거서 크리스티,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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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스럽고 공포에 싸인 분위기를 추적하던 중, 잠시 나의 장편소설 읽기 원천이었던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의 분신과 같은 '여성' 탐정 '미스 마플(Ms. Marple)' 할머니의 '마지막' 활약까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미스 마플의 첫 번째 등장은 1930년 발표된 [목사관 살인사건]이었다. 마플 양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까지 살아서 활동했는데, '여성' 작가의 '여성' 주인공 탐정이라 해서 별 다른 특성은 없고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 같은 건 단지 내가 만들어낸 관념이었다는 걸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등단과 함께 등장했던 주요 명탐정이 '에르퀼 포와로(Hercule Poirot)'였으므로 나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 탐색을 멈추고 명탐정 포와로의 활약을 마저 확인하고 싶어졌다.

1920년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으로 첫 작품을 발표한 애거서 크리스티는 등단 후 10년이 지나서야 작가 자신의 '분신'과 같은 '미스 마플'을 창조했는데, 등단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부터 등장한 에르퀼 포와로는 어쩌면 작가 자신의 평생 '연인'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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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살인](1934)으로 유명하고, 그 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 [ABC 살인사건](1936), [테이블 위의 카드](1936), [메소포타미아의 죽음](1936), [나일강의 죽음](1937) 등 약 38편의 걸출한 작품에서 활약한 에르퀼 포와로는 평생 80편 이상의 장/단편 작품을 썼다던 애거서 크리스티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게 된다.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는 1920년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제1차 대전 중 독일군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영국으로 망명한 후로, 1975년 [커튼]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55년을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지냈으니, 현실에서는 두 번 결혼한 크리스티에게 포와로는 오랫동안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았던 이야기 속의 '진짜' 남편과도 같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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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랗고 큰 대머리에 우스꽝스런 콧수염과 작은 키(약 163cm)로 묘사되는 포와로는 벨기에 경찰에서 은퇴 후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군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여 본격 사립탐정 역할을 하는데, 자칭 세계 최고의 뛰어난 '회색 뇌세포'를 작동시켜 오래된 살인사건을 몇 건 밝혀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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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를 '세계 최고의 명탐정'이라 자부하고 본인의 '회색 뇌세포'를 자랑한다.


"'글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포와로는 좀 당황한 얼굴로 그녀(올리버 부인)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고요?'
'사실 전 '코끼리'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코끼리?'
...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코끼리를 만나겠다는 게 아니라, '코끼리'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거예요. 뛰어나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몇몇 있으니까요...'"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장. 코끼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 애거서 크리스티,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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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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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카드]에서 함께 등장한 추리소설 작가 올리버 부인이 가져온 14년 전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이미 노신사가 되었을 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이 오래전 사건의 관계자들을 만나 오랜 기억들을 수집하는 것을 도우면서 진위가 불분명한 몇 가지 단서들(쌍둥이, 가발, 개, 가정교사 등)을 추적하며 의문에 싸였던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그(포와로)는 올리버 부인에게 다가갔다.
'이젠 런던으로 돌아가야죠. 비극적인 사건과 애정에 얽힌 문제는 잊어버리고 평상시 생활로 돌아가야겠죠.'
'코끼리는 기억할 수 있어요.' 올리버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에요. 자비롭게도 우리 인간은 잊어버릴 수가 있죠.'"
- [코끼리는 기억한다], <제2부 20장. 사문회>, 애거서 크리스티,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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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코끼리'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지능이 높고 기억력이 좋다는 '코끼리'를 오래전 관련자들에 은유하며, 그들의 '기억'이 '코끼리'의 '기억력'처럼 오랫 동안 잊혀지지 않고 진실을 가리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사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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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과거의 죄는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격언처럼 짙은 여운을 남기는데, 보통은 과거의 죄를 덮기 위해 현재의 새로운 살인을 초래하기 마련이지만, 래븐스크로프트 부부 '동반자살' 또는 '살인사건'은 살인자들이 이미 죽음으로 마무리된 사건으로 그 '긴 그림자'의 폐해가 그리 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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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래븐스크로프트 부부의 딸 실리아의 앞날에 포와로와 올리버 부인 콤비는 '코끼리'와 다르게 '망각'에 익숙한 '인간'의 장점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을 격려해주고 있다.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에서 에르퀼 포와로는 노신사가 되었지만 아직 팔팔하게 '마지막' 활약을 한다. 반면, 그의 진짜 '마지막' 작품에서 포와로는 거의 삶의 끝자락에서(나중에 이 또한 연기로 판명나게 되지만)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는데, 그 장소는 바로 포와로가 '처음' 등장하여 활약한 '스타일즈(Styles)' 저택으로 선택된다.


"'이곳의 분위기 말이에요. (헤이스팅스) 선생님은 그런 걸 느끼지 못하세요? 저는 느껴요. 어쩐지 '사악한' 분위기,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세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방금 말한 게 사실일까?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죽음. 살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죽음이 발생하게 되면 그 장소에 강한 인상이 남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심령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스타일즈 저택'은 그렇게 오래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흔적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 이 벽들, 이 정원 안에서 살인의 음모가 떠나지 않고 있다가 점점 강해져서 마침내는 결정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맺게 되었었지. 그것이 아직도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단 말인가?"
- [커튼], <제7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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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영국 런던 대공습이 한창일 때 대부분 영국인들이 그랬듯,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또한 내일 자신이 과연 살아 있을지를 오늘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담은 작품을 써 두었다고 한다. 자신의 영원한 '연인' 포와로와 끝까지 함께하기 위해서였겠다. 그 작품이 바로 [커튼]으로, 포와로의 죽음으로 머무리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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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 후 살아남은 애거서 크리스티는 [커튼]을 미발표작으로 유보하다가 작가의 만년인 1975년에 발표하면서 작가 본인보다 먼저 보내준다. 크리스티가 영원토록 사랑했던 '연인' 포와로는 1975년에 먼저 죽고 작가 자신의 '분신' 미스 마플은 그녀의 사후인 1976년에도 여전히 살아서 활약한다. 
그 작품이 바로 [잠자는 살인](1976)이다.

물론, 주인공 탐정의 '마지막' 활약 시점과 작품의 '마지막' 발표 시점의 차이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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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은 [복수의 여신](1971)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발표작은 [잠자는 살인](1976)이고,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이지만 이 작품은 1940년대에 이미 창작되었으니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실제 그의 '마지막' 활약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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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가 에르퀼 포와로의  최후를 상정하고 오래 전에 써두었던 [커튼]을 한참 후에 발표한 것이니, 포와로의 실제 '마지막' 활약은 [커튼](1975)인 한편,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포와로 작품은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로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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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첫 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1920)에서 처음 등장한 망명객 포와로의 연령대가 5~60대라고 치면 [커튼](1975)의 발표 연도를 고려하면 포와로는 100살이 넘겠지만, 실제로 [커튼]이 1940년대에 씌어졌다니 80대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기억한다](1972)는 그 배경이 발표된 시기가 아니라 대략 제2차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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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1975)에서 포와로는 명백히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첫 등장했던 '스타일즈 저택'에서 극악한 '살인자 X'를 본인 손으로 직접 처단하고는 마치 '자연사'와 같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것은 헤이스팅스, 나의 '마지막' 사건이 될 걸세. 또한, 가장 흥미있는 사건이지. 가장 관심있는 범죄가 될 거야. 우리가 다루고 있는 'X'는 고도의 기술을 갖추고 있는 녀석이어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네. 그만큼이나, 이 친구야, 이 'X'는 나를 패배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이 에르큘 포와로를 말이야! 그는 내가 전혀 해답을 찾아낼 수 없는 공격법을 개발했다네.'
'당신이 건강했다면...'
...
에르큘 포와로는 바로 화를 냈다.
...
'... 나의 사지가 못 쓰게 되었고 심장도 나를 농락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두뇌'만은, 헤이스팅스, 나의 '두뇌'는 고장 난 곳이 한 군데도 없이 그 기능을 다 발휘하고 있단 말이야. 아직도 최고로 우수하다고, 나의 '두뇌'는 말일세.'"
- [커튼], <제15장>, 애거서 크리스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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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의 살인자 'X'는 본인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을 교묘하게 사주하여 수많은 살인을 해 온 자로, 에르퀼 포와로가 오랫 동안 추적해 왔고 결국 '사악한' 기운이 유령처럼 감도는 불길한 '스타일즈 저택'으로 살인자 'X'를 유인히여 결단낸 후 포와로 스스로도 죽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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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생 '살인'을 증오하고 인간 생명을 귀하게 여겨온 포와로가 희대의 살인마와의 '마지막' 게임에서 승리하되 법의 처벌이 아닌 사적이고 인간적인 응징을 하면서 이젠 늙어버린 자신의 육신 속 아직 건재한 '회색 뇌세포'를 정지시키고 마는 [커튼](1975)은 확실한 포와로 '마지막'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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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래 전 애거서 크리스티와 그녀의 연인 에르퀼 포와로의 '처음'과 '마지막'을 새삼 읽었으나, 이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여왕과 그녀의 평생 연인 '세계 최고'의 '회색 뇌세포' 두뇌, 에르퀼 포와로를 이대로 떠나 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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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활약한 소설 중 내가 안 읽은 작품 몇 권을,
역시 추억의 <해문출판사> 판으로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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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읽을지, 또 언제 읽어볼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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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 Agatha Christie, 권순홍 옮김, <해문출판사>, 1988~2010.
2. [커튼(Curtain)](1975),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9.
3.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1920), Agatha Christie,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198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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