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1~5 세트 - 전5권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조사연 옮김 / 한경arte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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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역사'를 읽는 이유
-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부르봉/영국/로마노프/프로이센 역사], 나카노 교코, 2008~2021.


혁명가들을 동경했지만,
그 중 제일은 왕을 암살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종교적으로 공고한 기득권에 도전한 수많은 '이단자'들처럼,
당대 속세의 신격화된 특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현실적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왕의 암살자는 새로운 세상을 외쳤지만 실은 본인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14세기 여말선초의 삼봉 정도전 조차도 '인군(人君)', 즉 '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사람 임금'은 부정할 수 없었다.
18세기 자유와 평등 개념과 함께 민중의 인권이 역사에 등장하기 전 '공공성'은 다수 민중이 아닌 군주정, 즉 '왕조'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 민중이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는 나는 사실 조선왕들의 순서를 마흔 넘어서야 다 외웠다. 이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이고 뭐고 다 쓰잘데기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역사기록과 문헌의 중요성을 알게된 이후로 그토록 싫어하던 '왕조의 역사'도 역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수 '왕조'에서 다수 '민중'으로 전환된 '공공성' 변천의 역사도 인류의 무시못할 역사라는 것을 이제 안다. 
내가 지금 '왕조의 역사'를 읽는 이유다.

일본의 대중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2007년 [무서운 그림]이라는 책으로 명화를 통해 인간의 무서움을 묘사하고자 했는데, 책이 잘 팔리지 않아 걱정했단다. 그러다가 이듬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를 명화를 통해 설명하는 책을 내고는 비로소 작가로 독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왕조의 역사가 아직까지 여전히 잘 팔리는 아이템이라는 증거다.

그렇게 독일에서 유학한 일본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는 일반 민중이 주인공인 [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계속 펴내는 한편으로 유럽 왕조의 역사를 연이어 써서 출간한다.

2008년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부터, 프랑스 [부르봉](2010), [영국](2017), 러시아 [로마노프](2014), 독일 [프로이센](2021) 시리즈다.


1. 합스부르크 :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 막시밀리안1세

"하지만 달이 차면 이지러지는 법, 최전성기(펠리페2세)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몰락의 예감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5장>.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하여 에스파냐와 헝가리 제국까지, 동양의 중국이나 오스만 투르크 등 최후의 다민족 제국의 한 축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공식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원래 스위스 한 구석에서 시작한 합스부르크(Habsburg) 일족은 '사냥매'라는 뜻의 '하비히트(Habicht)'와 '요새'나 '성채'를 뜻하는 '부르크(burg)'의 합성어인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가 그 기원으로 추정된다. 12세기경 이 성을 근거지로 삼은 후손이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단다. 

13세기 이 가문의 루돌프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교황이 배후로서 가톨릭 제국을 로마제국처럼 광활하게 열고자 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실상 명목상 황제였지 실권은 없었다. 실력있는 제후나 왕들은 다들 고사하는 자리에 가톨릭 교황 눈치보기로 허수아비처럼 세운 자리였지만 황제 즉위 당시 55세의 노년이었던 루돌프1세는 1278년 빈의 북동쪽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당대 최고 실력자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2세를 물리치고 합스부르크 왕조를 유럽의 대가로 세웠다. 루돌프1세는 당시의 '기사도'적인 전투규칙을 어기고 매복과 변칙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신군(神君)으로 불렸단다.

이후 15~16세기 막시밀리안1세에 이르러서는 전쟁 뿐만이 아닌 각국과의 혼인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른다지만,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가훈은 막시밀리안1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남왕 펠리페가 에스파냐 후아나 공주와 결혼하여 낳은 카를(카를로스)5세부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가 시작된다.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는 16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무적 함대'의 펠리페2세에서 정점을 찍다가 영국 스튜어트가의 엘리자베스1세에게 패하고 이후 사촌남매간의 폐쇄적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후대가 끊기고 만다. 17세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2세는 피가 아주 진해진 근친혼으로 인해 후세를 낳을 수 없었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화 [시녀들](1656)의 주인공격으로 중앙에 서있던 다섯살 마르가리타 공주는 나중에 어머니의 친동생이자 아버지의 사촌동생과 결혼 후 난산을 거듭하다가 21세에 죽었다.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조 또한 모든 제국이 그랬듯 최전성기에 가문의 순혈을 지키려던 시절에 이미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순수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에 집착할 수록 그들의 주걱턱은 더 길어졌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부정교합은 더욱 심해졌단다.

이후 17세기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는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정점인 '태양왕' 루이14세에게 마리아 테레사라는 왕비를 보내어 피를 이었고, 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부르봉왕가 루이16세의 왕비로 보냈다. 

역시, 혼인을 통한 영토와 가문 확장의 대가문이다. 
오죽하면, [성혈과 성배](1982)라는 책은 예수의 '성혈(후손)'을 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성배')'가 유럽 합스부르크가까지 흘러가 이어지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주장했다. 4세기 고트족의 일족으로 흘러든 '유대왕' 예수와 마리아의 후예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합스부르크의 피에도 섞여 있어 결국 '유럽왕'이 되었다는 설이다. 유럽 서구에서 암약하는 '시온수도회'와 '장미십자단' 및 신비로운 '성당기사단'들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왕을 계속 꿈꾼단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650년간 유럽을 지배했다.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촉발되었다던 제1차 세계대전은 실은 알고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독일 호엔촐레른, 영국 하노버 왕가 등 오랜 시간 혈연으로 맺어진 '사촌들'간의 전쟁이기도 했다.


2. 부르봉 : 짐이 곧 국가다 - 루이14세

"폐허는 과거의 영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 영광의 기억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 <9장>.

서로마가 멸망한 5세기 유럽을 '프랑크'라고 불렀다는데, 게르만족의 손도끼를 뜻하는 '프란시스카'가 어원인 '프랑크'는 현재 '프랑스' 국명의 어원이다. 그만큼 프랑스는 유럽의 대표 문명을 이끌었고 18세기까지도 영국이나 독일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절대군주제 또는 절대왕정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대표격이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피가 섞인 발루아 왕조를 끝내고 1589년 앙리4세가 문을 연 부르봉 왕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16세가 퇴위한 시기까지 200년을 끊김없이 이어갔지만 역시 최전성기였던 '태양왕' 루이14세부터 이미 '폐허'를 암시하고 있었다. 잘생긴 루이15세는 절대권력과 함께 막대한 전쟁부채를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사치스럽게 놀고먹을만 했고, 더이상 예정된 폐허를 미룰 수 없었던 루이16세는 합스부르크가와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단두대(기요틴)의 이슬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근대화는 절대왕정의 '폐허'를 딛고 올라서야 했고, 이 '폐허'는 부르봉 왕가의 사치스러운 영광의 기억을 통해 더욱 굳건하게 존재한다.


3. 영국 :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 빅토리아 여왕

"가혹한 세금에 허덕이던 민중은 왕이 나쁘다는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막연히 동조해 왔지만, 막상 왕이 재판에 회부돼 목이 잘리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자 기겁하며 공포에 휩싸였다. 신과 동격인 국왕을 죽이다니! 이 순간 찰스1세는 순교자가 됐다. 사람들은 처형대로 몰려와 흐르는 왕의 피를 천에 적시고 성물로 간직했다."
- [명화로 읽는 영국 역사], <5장>.

폭군 헨리8세와 두 딸 '블러디 메리', 엘리자베스1세의 튜더 가문, 17세기 청교도혁명으로 목이 달아난 찰스1세의 스튜어드 가문, 현재 영국왕실인 독일계 하버가로 이어지는 영국의 왕실은 19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20세기 제국주의 전쟁 통에서도 살아남았다. 

18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영국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며 16세기 엘리자베스1세 때처럼 영국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찰스 디킨스 소설이나 왕족도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연쇄살인마 잭 사건 등에서 보듯 명암이 함께 극단적으로 존재하던 시기였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1858)의 첫 문장인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은 혁명의 시기가 아니라 혁명을 불러온 빅토리아 시절의 유럽을 묘사한 말이었다. 

전승국이 되어 왕실이 유지되었든, 왕(찰스1세)의 목을 처음으로 날린 경험 때문이었든, 왕실의 목숨이 근근히 붙어있는 영국 하노버 왕가의 가훈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현명함 아닐까. 빅토리아 여왕은 통치하지는 않고 자손만 낳고 퍼뜨리다가 혈우병 유전자를 러사아 로마노프 가문에 전해주면서 라스푸틴이라는 요승의 등장을 부른다.

하긴,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왕실이 살아남았으니 영국보다 더 신기하기도, 한심하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4. 로마노프 :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었다 - 케렌스키

"부르봉 욍조의 예를 볼 것까지도 없이 '왕가는 살아남은 자가 있는 한 아무리 쓰러뜨려도 끈질기게 부활한다', '그들 전부를 말살하지 않는 한 혁명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볼셰비키의 생각이었다."
- [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 <12장>.

1917년 2월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정부의 총리 케렌스키는 라스푸틴이라는 괴상한 인물을 부른 차르체제가 레닌주의 같은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을 했단다. 맞는 말이다. 시대착오적인 차르체제는 19세기까지도 17~18세기 프랑스 절대왕정 같은 억압적 체제를 고수하다가 다수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에 의한 폭력혁명을 야기했다. 시대정신을 모른채 억압만 일삼는 정권에게는 폭력혁명 단 한 길 밖에 없다.

로마노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 일가족의 암살과 그 와중에 살아남았다고 전해진 아나스타샤 공주 이야기 등은 오랜 세월 비밀과 음모, 진짜와 가짜가 난무했던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실의 역사 자체다.

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마지막 황태자 알렉세이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알렉산드라 황후의 자녀로서 박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 받았다. 그 고질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홀연히 나타난 괴승 라스푸틴의 등장 또한 러시아 차르체제의 필연적 결과였다.


5. 프로이센 :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다 - 프리드리히 대왕

"... 만약 프랑스가 왕정복고하지 않으면 유럽의 모든 군주가 가만있지 않겠다는 내용... 이른바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향한 단순 경고 차원의 선언문이었지만, 오히려 쌍방의 긴장감을 높여 왕과 왕비의 처형을 재촉했고, 혁명전쟁의 원인이 됐다. 또 나폴레옹이라는 악당이 세상에 나오는 계기가 된 셈이니 거센 부메랑이 되어 프로이센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 <5장>.

앞서 보았듯, 유럽 왕실은 합스부르크가를 시작으로 20세기까지도 서로 '사촌친적'이었다. 그러니 유럽 각국 왕실간에 서로 선전포고를 해댔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은 '사촌전쟁'이었고, 그만큼 이들은 이미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서로 혈연지간이었으며, 1789년 근대 프랑스 대혁명부터 그 이후 1848년으로 시작된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 혁명을 맞을 때마다 유럽 각국의 왕실들은 굳게 단결했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에 대항한 '필니츠 선언', 1848년 민주주의 혁명의 물결을 막으려는 '신성동맹' 등의 실질적 배후는 귀족과 대지주 또는 산업자본가 등의 각 시기 지배계급이었지만, 공식적 후원자는 서로 '사촌지간'이었던 유럽의 왕가들이었다

그러나 다수 민중들의 저항이 부각되지 않은 시절에는 영토분할을 위한 사촌간 집안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프로이센 호엔촐레른가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라며 프로이센의 부국강병을 이끌었지만, 어쨌든 왕실의 유지가 최우선 임무였고 이에 대항한 '3각 페티코트(여성속옷) 연대'인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와 러시아 엘리자베타, 프랑스의 퐁파두르(루이15세 애첩으로 신흥자본가 계급출신)의 3자 동맹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을 지켜내고 이후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독일 호엔촐레른 왕조는 사치와 향락 보다는 검소와 부국강병으로 제국의 기반을 다지면서 이윽고 19세기 불세출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이르러 독일제국으로 확장된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1918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면서 마지막 황제 빌헬름2세는 왕가의 문을 닫고 망명지에서 천수를 누리다 죽는다.

13세기 교황이 프로이센 지역 가톨릭 수호를 위해 튜턴기사단(독일기사단)의 일파로 파견한 호엔촐레른 일족이 오히려 루터의 종교개혁 세력과 결탁하여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면서 프로이센 일대를 점령한 역사는 아마도, 실용적이고 검소한 독일 민족성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

이왕에 '왕조의 역사'도 역사라고 인정한 이상,
그 동안 미뤄왔던 오스트리아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베르사유의 장미]를 이제 읽어보려 한다.

***

1.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2008),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2.
2.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2010),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3.
3. [명화로 읽는 영국 역사](2017), 나카노 교코, 조사연 옮김, <한경arte>, 2023.
4. [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2014), 나카노 교코, 이유라 옮김, <한경arte>, 2023.
5. [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2021), 나카노 교코, 조사연 옮김, <한경arte>, 2023.
6. [성혈과 성배](1982), 헨리 링컨/마이클 베이전트/리처드 레이 지음, 이정임/정미나 옮김, <자음과모음>, 2005.
7.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1932), 슈테판 츠바이크, 박광자/전영애 옮김, <청미래>,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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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오멘 : 스틸북 한정판
리처드 도너 감독, 그레고리 펙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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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컬트의 시작, [오멘]
- [오멘, 저주의 시작], 아카샤 스티븐슨, 2024.


1.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알고 보니 영화가 먼저였다.

영어 과목을 좋아해서 세상 모든 단어들을 우리말과 영어로 함께 외워대던 시절이었으니, 분명 중고등학교 청소년기였을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디오 테잎을 빌려 영화를 보았던 것 같으니,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거다.
내가 '오멘(omen;징조)'이라는 영어단어 뜻을 그 소설과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을테니 고등학생이었던 1990~1992년 사이의 일이었을 게다.

당시 고등학교 '철봉파' 친구들은 토요일 학교 끝나면 철봉대 밑에서 놀다가 가끔 집이 비는 친구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먹고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빌려 보기도 했다. 
쟝르는 주로 공포영화였는데, 미성년자인 우리들은 대놓고 성인영화를 빌릴 깜냥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13일의 금요일'이나 '나이트메어' 같은 미국 슬래셔 무비들에는 불문율처럼 섹스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20세기 소년이었던 우리들 어릴 적에는 워낙 관련 자료(사진/영상 등)를 구하기 어렵기도 해서 그랬는지 적나라한 거보다 살짝 나오는 게 더 좋다더라 하는,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위안이 돌기도 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섹스를 심지어 우리와 같은 나이에 마친 미국의 7080 슬래셔 무비 속 남녀는 여지 없이 영화 속 주인공 악마한테 처단당했다. 우리들이 그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유는, 순결을 해친 자들을 저주하는 종교적 엄숙함은 아니었고 아주 심플한 질투심이었을 뿐이었지만.

어느 토요일 오후에 내가 영화 [오멘](1976)을 빌려보자 했던 건 그러나 동정남의 시기심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역시 종교적 경건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마 얼마 전 우연히 빌려 읽었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라 영화로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거고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남녀상열지사가 나오지 않아 실망했을 친구들과 달리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이유인 즉슨, 영화 내용이 소설과 정확히 똑같았기 때문이었는데, 본래 소설이 원작인 영화는 각색이 되어 세부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고, 그 때는 몰랐지만 소설 [오멘]의 원작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아직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설 [오멘]은 영화의 원작이 아니라,
영화 [오멘]의 극본을 소설화했던 거였다.


2.

소설을 읽던 당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 장면은 주인공인 악마의 아버지인 로버트 쏜을 도와 악마 데미안을 제거하려던 기자 제닝스가 죽던 장면이었다.
유리가 깨지는 장면과 그 중 한 유리조각으로 목이 잘리는 상황인데 소설과 영화가 겹쳐지면서 내게는 유리로 된 온실 같은 곳에 갇혀 무너지는 하우스의 유리 조각 세례를 받다가 목이 잘리는 이미지로 오래도록 기억된다. [오멘] 1편(1976)을 다시 보니 공사장에서 화물차가 밀려 날아든 유리가 제닝스의 목을 먼저 치고 뒷쪽의 유리창을 박살내면서 유리 파편이 흩날리는 장면이었지만, 아무튼 오래전 당시의 내 기억에 영화가 소설 속 그 상황을 영상으로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더랬다. 물론 원래는 그 영화 장면 또는 극본을 나중에 소설로 묘사한 것이었지만.

영화 [오멘(The Omen)]은 1976년에 리처드 도너 감독과 극작가 데이비드 셀쳐가 함께 만들었고, 이후 셀쳐는 영화를 소설화했다. 내가 먼저 읽은 게 그 소설이었던 것 같다.

원작 [오멘]은 사탄의 아들을 미국 정부의 유력 정치인의 아들로 만들려는 악의 세력과 서서히 주변을 죽음으로 뒤덮고 파멸시키면서 자라는 순수해 보이는 아이를 제거하려는 세속의 아버지(로버트 쏜)와 신부(브레넌), 기자(제닝스) 등의 희생을 그린다. 물론 사탄의 자식 데미안을 없애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데미안은 10대([오멘2])와 청장년([오멘3])을 거쳐 세계를 장악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선악의 구분이 다소 불분명한 지금의 현세가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건 나의 말이 아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 <요한 계시록>의 환상과 예언은 수천년 동안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으나, 각 시대별로 그 특성을 지닌 채 끊임없이 반복되고 소환된다.

2024년에 영화 [오멘]도 다른 수많은 작품들처럼 '프리퀄'로 재탄생한다. 
1976년의 [오멘] 1편은 악마의 징표인 '666'을 암시하며 6월 6일 6시에 데미안이 태어나면서 시작하는데, 2024년의 [오멘]은 '저주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하여 데미안이 태어나는 과정과 아이가 바뀌는 경위를 밝히며 끝난다. 
[오멘, 저주의 시작(The First Omen)](2024)의 마지막 대사는, 사탄으로 태어날 그 아이의 이름을 처음으로 밝히는, "데미안"이다.
[배트맨 비긴즈]와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 [킹스맨, 퍼스트 에이젼트] 등을 생각하면 된다.

[오멘](1976), [오멘 2](1979), [오멘 3](1981) 등은 사탄의 자식이 탄생한 배경 보다는 기왕의 이런 현실과 그 속에서 악마의 아들 데미안이 성장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다 보니 속편들은 절대로 1편을 넘어설 수 없었다. 나는 2편과 3편을 보았지만 지금은 내용이 0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단 하나, 악마의 자식답게 데미안은 본인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도 세계를 파멸시킨다는 것, 사탄의 신봉자들이 알아서 모이고 자발적으로 희생하며 스스로 악을 행하면서 데미안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오멘, 저주의 시작](2024)은 자체의 복잡한 플롯도 있다. 전술한 [오멘](1976)에서 기자 제닝스의 최후를 장식한 유리 파편 세례를 오마쥬 한 듯 영화 첫 장면에서 사탄의 자식 탄생을 고해한 신부의 죽음은 하늘로부터 스테인드 글래스의 파편 세례로 예견되고 지목된 사탄 자식의 어미는 반전을 통해 애초에 지목된 여자아이 카틀리나가 아니라 주인공 초급 수녀 마가릿임이 드러난다. 이 어미들의 특징은 무녀와 같이 각자의 '신기(神氣)'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애초에 가톨릭의 유일신(神)에게 의탁될 수 없거나 그러기를 끝내 거부하는 존재를 의미할 수 있겠다.

한편, [오멘, 저주의 시작]에서 사탄의 자식 탄생을 저지하려는 브레넌 신부는 주인공이자 궁극의 어미인 마거릿 신부에게 악마의 귀환 배경을 설명하면서 원작이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리퀄'의 연사가 되어준다.

아마도 데미안은 1971년생 돼지띠 되시겠는데, 로마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쏜의 아들이 사산되고 바로 데미안으로 바뀌는 시공간이 바로 1971년 로마였다. 1971년의 유럽은 아직 1968년 신좌파 혁명의 물결이 거세던 때였고 당시의 젊은 세대는 가톨릭을 포함한 기득권 일체의 권위를 거부하던 시절이었다. 영화는 파문당한 신부 브레넌의 입을 통해 시대의 혼돈이 아닌 기존의 가톨릭이 오히려 악마를 소환했다고 말한다. 즉, 기존 권위에 저항하는 세력의 '악마화'가 아니라, 기득권으로 다시 통합하기 위해 가톨릭 극단주의자들이 사탄의 자식을 불러 다시금 선악의 이분법 전쟁을 공고히 하면서 가톨릭의 안위를 꾀한다는 무서운 음모를 전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절대악으로서 적을 계속 생산해대는 거대 보수양당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멘], 그 '저주의 시작'은 지옥의 악마가 아니라 속세 또는 현세 가톨릭의 생존투쟁이었던 거다.


3.

[오멘]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장면은 소설 초반에 애기 데미안의 유모가 데미안의 생일날 잔치에서 '널 위한 선물'이라고 독백하면서 건물에서 목매어 공개자살하는 장면인데 소설에는 삽화가 아닌 실사 장면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어 있었다. 역시 영화가 먼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난 몰랐기에 상상이 아닌 실사로 접한 듯 생생했다.
1976년 [오멘] 원작에서 이미 나온 장면이었고, 2024년 [오멘, 저주의 시작]의 초반부에서 역시 미스터리한 한 수녀의 공개 분신자살로 오마쥬된다. 나중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이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리퀄'로서 나중의 유모 공개자살을 예견하기도 한다.

또한, 6월 6일 6시에 나오다가 사산된 아들을 대체한 아버지 로버트 쏜이 주변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면서 브레넌 신부의 경고를 듣기로 하고는 데미안의 머리통 가마에서 '666' 표식을 찾아본 후 직접 데미안을 죽이려 했던 외로운 고투와 인간적 고뇌도 인상깊고 성당에서 존속살해 현행범으로 사살되는 장면은 고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내게 큰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유력자 가문의 후세로 살아남은 데미안이 부친의 장례식에서 남기는 미소의 영화 마지막 장면은 역시 속편을 예고하는 장치였지만 내 인생 첫 오컬트 영화의 대미로서 손색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영화 쟝르가 '오컬트'다.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 [파묘](2024)는 아직도 내게는 최고의 영화다. 현문섭 감독의 [사흘](2024)이 아무리 나를 슬프게 했어도 오컬트 쟝르에 대한 나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내 오컬트의 시작,
단연 [오멘(The Omen)](1976~2024)이다.

***

1. [오멘, 저주의 시작(The First Omen)], 아카샤 스티븐슨, 2024.
2. [오멘(The Omen)], 리처드 도너 연출, 그레고리 펙 주연, <20세기폭스>, 1976.
3. [오멘 2], 돈 테일러, 1979.
4. [오멘 3], 그레이엄 베이커, 1981.
5. [일곱 봉인의 비밀 - 요한묵시록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배은주, <분도출판사>, 2022.
6. [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이재원/이종태 옮김, <이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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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현대인을 위한 고전 다시 읽기 1
김영 옮김 / 청아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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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김영 평역, 2014.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2024


"사회가 혼란해지자 몇몇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위한 대책과 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학파로 구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는 많은 스승을, '백가'는 다양한 학파를 뜻합니다. 이들 중에서 이른 시기에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으며 우뚝 선 사람이 '공자'였습니다. 공자가 유명세를 떨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학설을 주장하며 스승을 자처했습니다. 그 중에는 비상식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들을 '이단(異端)'으로 지칭했습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37>, 양승렬, 2024.


중국 춘추전국시대 분열의 역사적 시작점은 다양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바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과 사상, 시대개척의 대책들이 발전했다. 
중국의 긴 역사에서 대륙통일의 반복이 그들의 지향점이었다면, 그 시간의 1/3은 분열과 혼란의 시간들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를, 5호16국 시대는 '다문명'의 충돌과 혼합을, 5대10국은 한 단계 진보하는 거대문명의 중간 분열 과정을, 현대 국공내전은 진보사상의 승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 문명에서 '다양성'의 출발은 기원전의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였고, 그 시작은 바로 '공자'였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 [논어(論語)], <2편. 위정>

기원전 5세기 공자의 유가는 수세기 전 주나라의 예법에 따른 정치사회를 추구했고, 그 기본은 현실 정치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인간들의 내면적 성품인 '인의(仁義)'를 기반으로 '덕치(德治)'의 정치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이면서 한편으로 현실주의적 사상이었다. 이것이 '유교(儒敎)'가 아닌 '유가(儒家)'다. 이러한 '유가' 사상에 대한 반박으로 쟁명한 사상들이 '제자백가'였고, 공자는 '인의'와 '덕치'를 가볍게 여기는 다른 사상들을 '이단(異端)'이라 하여 "열심히 외쳐봐야 해로울 뿐(攻乎異端, 斯害也已)"이라고 하였다.


"[논어]는 공자가 제자 및 당시 사람들과 응답한 것, 제자들이 서로 나눈 대화와 스승의 말을 접해 들은 것을 제자들이 각기 기록하였다가 공자가 죽은 뒤 문인들이 서로 모아 논찬한 것인데, 그래서 이 책을 [논어(論語)]라 한다."
- [한서], <예문지>, 반고.


국문학자 김영 교수가 2014년 편역한 [논어] <서장>에 나오는 반고의 [한서] <예문지>가 설명한 [논어]다. 공자는 비슷한 시기 서양의 소크라테스처럼 글을 남기지 않고 '말'을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제자 플라톤의 저서로 남았듯, 공자의 말씀도 3천명에 이르렀다는 수많은 제자와 문인들의 기록인 [논어]로 남았다. 

[논어(論語)]는 스승이자 선현이며 군자의 모범으로서 공자의 '말(語)'을 후학들이 '논평(論)'한다는 의미로 총 20편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공자가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로 삼았던 배움에 관한 <1편. 학이>부터 그 다음의 중요한 실천인 정치를 <2편. 위정>에서 다룬다. 제자들과의 다양한 대화는 <3. 팔일>, <4. 이인>,<5. 공야장>, <6. 옹야>, <7. 술이>, <8. 태백>, <9. 자한>, <10. 향당>, <11. 선진>, <12. 안연>, <13. 자로>, <14. 헌문>, <15. 위령공>, <16. 계씨>, <17. 양화>, <18. 미자>, <19. 자장>을 거쳐 마지막편 <20. 요왈>로 마무리된다.


"[논어]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소재가 '말과 실천'입니다. 말은 늘 조심히 바르게 하고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논어]를 구조적으로 살펴 보면 가장 첫 문장은 배우고 익히는 실천의 즐거움을 말하고, 마지막 문장은 말의 중요성으로 끝납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57>, 양승렬, 2024.


[논어]에는 공자가 가장 앞세운 '인(仁)'이 100번 넘게 나온다고 하는데, 이를 기반으로 '지식'이나 '배움'을 아우르는 '학(學)'과, 그것이 경지에 오른 이상적 '군자(君子)', 이들의 '말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핵심 주제어라고 할 수 있겠다.

[논어]의 첫 문장은 다음의 유명한 글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논어], <1편. 학이>

때때로 혹은 수시로, 아니면 때에 알맞게 배우면 좋고, 친구가 멀다 않고 오면 즐거운데, 남이 몰라준다 서운해하지 않는 군자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後從之)"
- [논어], <2편. 위정>

그 다음으로 이 군자가 말을 앞세우지 않고 당당히 실천하면서 그에 따라 말을 하는 모습은 공자가 살던 혼란한 시대 '정치'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 [논어], <14편. 헌문>

이런 공자를 당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실천하려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칭한다.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12편. 안연>

이런 사람은 "자신을 이겨내고 '예'를 중시(克己復禮)"하면서 '인(仁)'을 실천한다.

"아욕인, 사인지의(我欲仁, 斯仁至矣)"
- [논어], <7편. 술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 속에서 바로 닿는" 것이 역시 '인'이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논어], <2편. 위정>

'군자'는 그렇다고 모든 걸 아는 척 하지 않는다. 공자는 고지식하다는 선입견과 달리 말을 아끼고 실천을 중시하며 겸손하게 평생  배움의 태도를 견지했다고 한다. 공자에게 '지식'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솔직히 모른다 하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이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 [논어], <1편. 학이>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 [논어], <15편. 위령공>

그러므로, 공자에게 '과오'는 "즉시 인정하고 고쳐야 하는 것(過則勿憚改)'이었으며, 그렇지 못한 것 자체가 '과오'였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 [논어], <15편. 위령공>

'극기복례' 못지 않게 유명한 [논어]의 가르침이 "내게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인데, 이 또한 '군자'의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그러나 공자 자신을 비롯하여 '군자'는 완성형이 아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늘 공부하고 배우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한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논어], <2편. 위정>

"생각없이 공부만 하면 어둡고(學而不思則罔), 배움없이 잔머리만 굴리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

"군자태이불교, 소인교이불태(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 [논어], <13편. 자로>

그렇게 '군자'는 언제 어디서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면서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게 되는데, 이런 '군자(君子)'와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은 '소인(小人)'이 된다.

"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 [논어], <4편. 이인>

'인'을 실천하는 군자는 항상 '의(義)'를 염두에 두고 깨우치려 애쓰는 반면, 소인배들은 항상 '이익(利)'만을 앞세운다.

안중근 의사가 잘린 손가락 인장을 찍은 [논어] 인용글은 "이익 앞에서 의로움을 보라(見利思義)"는 문장이었다. 그는 식민 현실에 처할 "나라의 위기를 보며 목숨을 바쳤다(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논어], <14편. 헌문>

어려운 가정형편에 15세에 공부를 시작했으나 30세에 인격적으로 독립(而立:이립)하고 40세에는 흔들림 없던(不惑:불혹) 공자, 50세 천명을 알고(知天命:지천명), 60세에는 유연함의 극치를 이룬(耳順:이순) 후 70세 인생 말년에 무엇을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은(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그가 했던 또 하나의 멋진 문장이 있다.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 [논어], <9편. 자한>

'지인용(知仁勇)'을 갖춘 '군자'는 '흔들림 없고(不惑)', '근심 없이(不憂)', 두려움 없는(不懼)' 사람이라는데, 참으로 이상주의적이다. 이는 맹자가 계승하고자 했던 공자 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 [논어], <16편. 계씨>

내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위 문장인데, 군자가 실천하는 정치는 결국 "부족함이 아닌 공평하지 못함을 근심(不患寡而患不均)"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다.

작가 양승렬 선생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을 소재로 하여 [논어]의 가르침을 2부 20장 총 64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공자의 2,500년 동안의 가르침은 물론 조선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논어]를 깨우친 작가 본인의 교훈이 어우러져 홀로 머리맡에 두고 하루 한 편, 한 문장씩 곱씹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

***

1. [논어(論語)](기원전 5세기~), 김영 평역, <청아출판사>, 2014.
2.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한빛비즈>, 2024.
3.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4. [맹자(孟子)], 조관희 평역, <청아출판사>, 2014.
5.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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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 세상의 기준에 좌절하지 않는 어른의 생활법
양승렬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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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김영 평역, 2014.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2024


"사회가 혼란해지자 몇몇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위한 대책과 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학파로 구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는 많은 스승을, '백가'는 다양한 학파를 뜻합니다. 이들 중에서 이른 시기에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으며 우뚝 선 사람이 '공자'였습니다. 공자가 유명세를 떨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학설을 주장하며 스승을 자처했습니다. 그 중에는 비상식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들을 '이단(異端)'으로 지칭했습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37>, 양승렬, 2024.


중국 춘추전국시대 분열의 역사적 시작점은 다양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바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과 사상, 시대개척의 대책들이 발전했다. 
중국의 긴 역사에서 대륙통일의 반복이 그들의 지향점이었다면, 그 시간의 1/3은 분열과 혼란의 시간들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를, 5호16국 시대는 '다문명'의 충돌과 혼합을, 5대10국은 한 단계 진보하는 거대문명의 중간 분열 과정을, 현대 국공내전은 진보사상의 승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 문명에서 '다양성'의 출발은 기원전의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였고, 그 시작은 바로 '공자'였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 [논어(論語)], <2편. 위정>

기원전 5세기 공자의 유가는 수세기 전 주나라의 예법에 따른 정치사회를 추구했고, 그 기본은 현실 정치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인간들의 내면적 성품인 '인의(仁義)'를 기반으로 '덕치(德治)'의 정치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이면서 한편으로 현실주의적 사상이었다. 이것이 '유교(儒敎)'가 아닌 '유가(儒家)'다. 이러한 '유가' 사상에 대한 반박으로 쟁명한 사상들이 '제자백가'였고, 공자는 '인의'와 '덕치'를 가볍게 여기는 다른 사상들을 '이단(異端)'이라 하여 "열심히 외쳐봐야 해로울 뿐(攻乎異端, 斯害也已)"이라고 하였다.


"[논어]는 공자가 제자 및 당시 사람들과 응답한 것, 제자들이 서로 나눈 대화와 스승의 말을 접해 들은 것을 제자들이 각기 기록하였다가 공자가 죽은 뒤 문인들이 서로 모아 논찬한 것인데, 그래서 이 책을 [논어(論語)]라 한다."
- [한서], <예문지>, 반고.


국문학자 김영 교수가 2014년 편역한 [논어] <서장>에 나오는 반고의 [한서] <예문지>가 설명한 [논어]다. 공자는 비슷한 시기 서양의 소크라테스처럼 글을 남기지 않고 '말'을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제자 플라톤의 저서로 남았듯, 공자의 말씀도 3천명에 이르렀다는 수많은 제자와 문인들의 기록인 [논어]로 남았다. 

[논어(論語)]는 스승이자 선현이며 군자의 모범으로서 공자의 '말(語)'을 후학들이 '논평(論)'한다는 의미로 총 20편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공자가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로 삼았던 배움에 관한 <1편. 학이>부터 그 다음의 중요한 실천인 정치를 <2편. 위정>에서 다룬다. 제자들과의 다양한 대화는 <3. 팔일>, <4. 이인>,<5. 공야장>, <6. 옹야>, <7. 술이>, <8. 태백>, <9. 자한>, <10. 향당>, <11. 선진>, <12. 안연>, <13. 자로>, <14. 헌문>, <15. 위령공>, <16. 계씨>, <17. 양화>, <18. 미자>, <19. 자장>을 거쳐 마지막편 <20. 요왈>로 마무리된다.


"[논어]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소재가 '말과 실천'입니다. 말은 늘 조심히 바르게 하고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논어]를 구조적으로 살펴 보면 가장 첫 문장은 배우고 익히는 실천의 즐거움을 말하고, 마지막 문장은 말의 중요성으로 끝납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57>, 양승렬, 2024.


[논어]에는 공자가 가장 앞세운 '인(仁)'이 100번 넘게 나온다고 하는데, 이를 기반으로 '지식'이나 '배움'을 아우르는 '학(學)'과, 그것이 경지에 오른 이상적 '군자(君子)', 이들의 '말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핵심 주제어라고 할 수 있겠다.

[논어]의 첫 문장은 다음의 유명한 글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논어], <1편. 학이>

때때로 혹은 수시로, 아니면 때에 알맞게 배우면 좋고, 친구가 멀다 않고 오면 즐거운데, 남이 몰라준다 서운해하지 않는 군자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後從之)"
- [논어], <2편. 위정>

그 다음으로 이 군자가 말을 앞세우지 않고 당당히 실천하면서 그에 따라 말을 하는 모습은 공자가 살던 혼란한 시대 '정치'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 [논어], <14편. 헌문>

이런 공자를 당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실천하려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칭한다.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12편. 안연>

이런 사람은 "자신을 이겨내고 '예'를 중시(克己復禮)"하면서 '인(仁)'을 실천한다.

"아욕인, 사인지의(我欲仁, 斯仁至矣)"
- [논어], <7편. 술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 속에서 바로 닿는" 것이 역시 '인'이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논어], <2편. 위정>

'군자'는 그렇다고 모든 걸 아는 척 하지 않는다. 공자는 고지식하다는 선입견과 달리 말을 아끼고 실천을 중시하며 겸손하게 평생  배움의 태도를 견지했다고 한다. 공자에게 '지식'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솔직히 모른다 하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이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 [논어], <1편. 학이>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 [논어], <15편. 위령공>

그러므로, 공자에게 '과오'는 "즉시 인정하고 고쳐야 하는 것(過則勿憚改)'이었으며, 그렇지 못한 것 자체가 '과오'였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 [논어], <15편. 위령공>

'극기복례' 못지 않게 유명한 [논어]의 가르침이 "내게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인데, 이 또한 '군자'의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그러나 공자 자신을 비롯하여 '군자'는 완성형이 아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늘 공부하고 배우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한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논어], <2편. 위정>

"생각없이 공부만 하면 어둡고(學而不思則罔), 배움없이 잔머리만 굴리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

"군자태이불교, 소인교이불태(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 [논어], <13편. 자로>

그렇게 '군자'는 언제 어디서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면서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게 되는데, 이런 '군자(君子)'와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은 '소인(小人)'이 된다.

"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 [논어], <4편. 이인>

'인'을 실천하는 군자는 항상 '의(義)'를 염두에 두고 깨우치려 애쓰는 반면, 소인배들은 항상 '이익(利)'만을 앞세운다.

안중근 의사가 잘린 손가락 인장을 찍은 [논어] 인용글은 "이익 앞에서 의로움을 보라(見利思義)"는 문장이었다. 그는 식민 현실에 처할 "나라의 위기를 보며 목숨을 바쳤다(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논어], <14편. 헌문>

어려운 가정형편에 15세에 공부를 시작했으나 30세에 인격적으로 독립(而立:이립)하고 40세에는 흔들림 없던(不惑:불혹) 공자, 50세 천명을 알고(知天命:지천명), 60세에는 유연함의 극치를 이룬(耳順:이순) 후 70세 인생 말년에 무엇을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은(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그가 했던 또 하나의 멋진 문장이 있다.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 [논어], <9편. 자한>

'지인용(知仁勇)'을 갖춘 '군자'는 '흔들림 없고(不惑)', '근심 없이(不憂)', 두려움 없는(不懼)' 사람이라는데, 참으로 이상주의적이다. 이는 맹자가 계승하고자 했던 공자 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 [논어], <16편. 계씨>

내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위 문장인데, 군자가 실천하는 정치는 결국 "부족함이 아닌 공평하지 못함을 근심(不患寡而患不均)"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다.

작가 양승렬 선생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을 소재로 하여 [논어]의 가르침을 2부 20장 총 64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공자의 2,500년 동안의 가르침은 물론 조선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논어]를 깨우친 작가 본인의 교훈이 어우러져 홀로 머리맡에 두고 하루 한 편, 한 문장씩 곱씹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


***

1. [논어(論語)](기원전 5세기~), 김영 평역, <청아출판사>, 2014.
2.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한빛비즈>, 2024.
3.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4. [맹자(孟子)], 조관희 평역, <청아출판사>, 2014.
5.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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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6 : 백가쟁명 이중톈 중국사 6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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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 비판'은 '비판의 무기'를 대신할 수 없다
- [백가쟁명], 이중톈, 2014.


"그런데 노선의 선택은 아주 분명했다. 대체적으로 도가는 천도(天道)를, 묵가는 제도(帝道)를, 유가는 왕도(王道)를, 법가는 패도(覇道)를 중시했다. 천도를 중시하여 태곳적으로 돌아가려 했고 제도를 중시하여 요순시대로 돌아가려 했으며 왕도를 중시하여 상나라, 주나라 시대로 돌아가려 했다. 이것들은 모두 과거로의 회귀였다. 오직 패도를 중시해야 다가오는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법가가 승리를 거뒀다."
- [백가쟁명], <6. 제도와 인성>, 이중톈, 2014.


중국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중국의 역사에서 '유년기'를 지난 '청춘기' 정도 될 수 있겠다. 주나라로부터 '국가' 문명을 매개로 덕치와 예치의 제도적 틀이 갖춰졌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사상이 다양해지고 혼란해지기도 했던 '사춘기' 같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낭만과 덕망은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눈에는 혼돈과 분열의 시대였기에 오래 전 통일의 시대 주나라를 이상으로 삼아 주공단이 정초한 '덕치(德治)'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이익'에 눈을 뜬 분열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기원전의 수백년에 걸친 이 치열한 사상투쟁이 공자 이후의 묵자와 노자 및 장자의 공자에 대한 반박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말이다.

공자는 '인(仁)', 즉 '사랑'에 기반한 인간관계와 '덕(德)'으로 다스려지는 사회를 꿈꾸었지만, 
노동과 자치를 중시한 묵자는 공자의 '인애'가 신분제 질서에 갇힌 '사랑'이라면서 남녀노소와 국경을 초월한 '겸애'로 대체하며 '평등'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이에 노자는 더 나아가 '물'과 같은 유연함과 '무위'로써 자연과 합일을 추구했고 장자는 '소요유'를 통해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극단의 '자유'를 중시했다.
맹자는 공자의 '인'에 더하여 '의(義)', 즉 정의로운 '대장부'의 삶을 통해 공자를 계승했다.
반면 순자는 전국시대 백가쟁명의 총아로서 인간의 악을 방비하는 '법가'를 예비하면서 공자를 이어가고자 했다.
그렇게 춘추전국시대 백가쟁명의 마무리는 '법가'의 대명사 한비자가 맡게 된다.

'괴력난신'의 귀신도, 전지전능한 종교적 신도 믿지 않고 오로지 현세적 인간관계로서 정치만을 중시한 공자는 '인의'와 '덕치'를 강조한 '이상주의자'로서 "안되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실천하고자 했던(知其不可而爲之;지기불가이위지-[논어])" 불세출의 사상가였지만 제후귀족 중심의 신분제를 벗어나지 못한 다분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공자를 비판한 묵가의 묵자는 '노동'에 기반하며 차별없는 '겸애'를 실천하는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한 군주국가를 건설하자는 일종의 기원전의 '사회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당시로서 유일한 국가권력 형태로서 군주제를 역시 지향하되 '무위',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군주를 말한 노자와, 이런 것 저런 것 다 필요 없이 극단의 자유를 주장한 장자는 두 가지 형태의 '무정부주의'의 면모도 보인다.
공자를 두 방향으로 계승한 맹자와 순자를 거쳐 한비자는 세상 가장 못 믿을 것이 '인간'임을 설파하며 '법'과 '제도'로서 인간 사회의 처절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며 그 주체로서 강력한 군국주의를 강조한 '국가주의자'였다.


"법가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동은 커녕 소강도 이미 지나가버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단지 세상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만 있어도 성공이었다. 그러면 누가 다스릴 것인가? 군왕이 다스리는 것이 옳았다. 또한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법에 따라 다스려야 했다."
- [백가쟁명], <2. 이상적인 사회>, 이중톈, 2014.


'중국사 시리즈' 통사 36권을 집필 중인 중국의 대중역사가 이중톈도 중국의 '사춘기' 또는 '청춘기'로서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이중톈 답게 군더더기 없이 요점과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추리소설을 엮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제6권 [백가쟁명(百家爭鳴)](2014)은 유가는 무엇이고 묵가와 도가, 그리고 법가는 무엇인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그 사상들의 정의와 기원 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라 치면 수백수천 페이지를 써도 모자랄 것이며 대중역사서가 될 수도 없을게다. 이중톈은 다만, '백가쟁명'의 문을 연 공자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서 '인애'와 '덕치'의 사상을 주장했고, 이를 반박한 묵자의 '사회주의'는 '겸애'와 '노동'을, 다른 한편의 '무정부주의' 노자와 장자는 '무위'와 '자유'를 통해 공자가 시작한 유가 사상이라는 '무기'에 대한 '비판'을 행했다는 식으로 역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상대를 죽여야만 나의 생존이 보장되는 전국시대에 들어 선 후, 공자의 뒤를 이어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맹자는 '선을 지향'하는 사회를 꿈꾸는 정의로운 대장부였지만, 이런 맹자의 '이상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의 본래적인 '악을 방비'하는 사회제도를 주장하는 순자를 거친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백가쟁명], <6장>)로서 전국시대의 끝장과 함께 '백가쟁명'을 마무리한다.

기원전 6세기 공자의 유가가 '백가쟁명'의 시작이었다면, 기원전 3세기 법가의 '한비자'는 그 길고 긴 사상투쟁의 끝이었다.


"한비가 서민의 검을 든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비는 전국시대 말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때 역사는 이미 귀족과 군자의 시대에서 평민과 소인의 시대로 바뀐 상태였다. '이상주의'가 잦아들고 '공리주의'와 '실용주의'가 대두되었다, 상앙에서 한비를 거쳐 결국 법가가 우위를 점하고 새로운 시대의 대변인이 된 것은 그런 시대정신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이상주의'는 언제나 필수 불가결했다. 사실상 꼭 실현될 보장이 없었던 그 이상들이 역설적으로 중국 문명이 아시리아 문명과 로마 문명처럼 제국의 붕괴와 함께 쇠망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했다."
- [백가쟁명], <1. 세상을 구원하라>, 이중톈, 2014.


전국시대 분열의 종말과 함께 진시황의 중국 최초 통일과 한나라의 통일국가 문명 정초 과정에서, 그렇다면 법가의 '승리'가 과연 '덕치'와 '법치'의 대립으로 정리된 '백가쟁명'의 결론이었을까.

공자와 묵자, 노자/장자는 각자의 주장을 통해 오랜 옛날의 '좋은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묵자가 돌아가고 싶어했던 요순시대든, 공자가 꿈꾼 주공의 덕이든, 노장자의 자연적인 원시사회든, 이 모든 지향점들은 '과거'에 불과했다. 이익투쟁도 모르고 도둑도 없던 그 '대동사회'는 이중톈에 의하면 사회발전이 더디었으니 이익이랄 것도 없었고 물자도 부족했으니 훔칠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이었던 것이다.  반면, 서로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전국시대에는 극단적인 이익투쟁의 문명시대로서 당시의 형벌 위주의 '법치'로서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양면삼도(兩面三刀-[한비자])'가 필요한 시대였다. '양면삼도'의 '양면(兩面)'은 '상'과 '벌'이고, '삼도(三刀)'는 '권세'와 '권모술수', 그리고 '법'이다. 처절하고 잔혹한 전국시대를 끝낸 것은 유가와 묵가, 도가의 '과거'가 아니라 법가와 병가의 '현실'과 '미래'였다.

그러나 이중톈은 말한다.
'백가쟁명'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법가와 병가, 술가와 같은 '양면삼도'적 현실과 그들이 대비한 '미래'가 분명 존재하지만,
'인의예지'와 '덕치'라는 '이상주의'가 중국문화의 흐름 속에 도도히 흐른다고 말이다.

일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교환양식D'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역사로서, 평등하고 자유로웠던 원시 상태인 '교환양식A'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자본-네이션(민족/인민)-스테이트(국가)'의 교환양식 역사에서의 현재적 '삼위일체' 요소들이 융합된 '미래'의 형태로 복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식 사상투쟁 또한 그렇다.
현재의 구체적 치열함을 기반으로 하면서 인류 역사가 일궈온 과거의 '이상주의'를 복원하는 미래가 유보되는 한, '덕치(德治)'와 '법치(法治)'가 대립하는 '백가쟁명'의 결과 또한 아직 오지 않은 지속되는 미래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무기의 비판'도 '비판의 무기'를 대신할 수없다. 치국의 논쟁을 예로 든다면, (전제주의인) 진시황과 한무제가 제자백가의 칼과 권한을 빼앗았어도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안 그랬으면 훗날 (민권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났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300년 간의 '백가쟁명'은 사실상 결론을 내지 못했다."
- [백가쟁명], <6. 제도와 인성>, 이중톈, 2014.

***

1.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2.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길>, 2001.
3. [세계사의 구조 -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2015),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비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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