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살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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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와 공포 - 2
- [잠자는 살인]/[복수의 여신]/[카리브해의 비밀], 애거서 크리스티, 1964~1976.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저라면 '잠자는 살인'을 그대로 묻어 두겠습니다. 살인을 들쑤시는 건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헤이독 박사의 조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다시,
나의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돌아왔다.

올해 3월부터 시작한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여정을 좀더 연장해보기 위해 '여성' 추리소설 작가를 테마로 잡았을 때, 
새삼 '애거서 크리스티'가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에 애거서 크리스티를 통해 첫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만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는 내게 '여성' 추리소설 작가는 아니었다. 
​
그러던 중 최근 새삼스레 '여성' 작가 크리스티를 읽고 싶어졌던 거다.


"언제나 지켜 온 내 신조는, '우선 가장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을 찾는다'라는 거랍니다."
- [잠자는 살인], <헬렌?>,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상식적인 해석이 정답인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탐정은 벨기에 출신 프로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와 영국의 가상 시골 세인트 메리 미드에 사는 아마추어 탐정 미스(Ms.) 마플 할머니인데, '여성'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읽어보려면 수다스러운 미혼의 할머니 '마플 양(미스 마플)'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보는 게 좋겠다 싶어 다시금 찾아본 이야기가 1976년 애거서 크리스티의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
미스 마플이 처음 등장한 작품은 [목사관 살인사건](1930)으로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뜨개질로 소일하던 마을의 할머니가 소문과 수다를 통해 정보를 캐고 추리하면서 해결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1976)과의 단순 시차로 보면 첫 작품이 1930년대이고 마지막 활약이 1970년대이니, 첫 '할머니' 아마추어 탐정의 등장이 오십대로 쳐도 마지막에 거의 아흔살 가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다 보니 창작 시점이 꼭 극 중 시점과 동일하다고는 볼 수는 없겠다. 
그러니 그냥 6~80대 정도의 폭넓은 할머니 연령대에 탐정으로서 활약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
그렇게 나는 '미스 마플'을 [목사관 살인사건]부터 [서재의 시체](1942), [움직이는 손가락](1943), [예고살인](1950), [마술살인](1952), [주머니 속의 죽음](1953), [패딩턴 발 4시 50분](1957) 등의 기라성 같은 작품들을 통해 만났었다.
​
미스 마플은 '할머니'이다 보니 기동성 없이 머리로만 추리하는 '안락의자 탐정'으로 보이겠지민, 나름대로 사고 현장이나 관련자를 찾아다니며 필요하면 거짓말 연기도 서슴치 않는 활동을 전개한다. 물론 전반적인 상황은 대부분 동네 여인들의 규수방 수다와 같이 조용하고 은밀하개 전개된다.
​
'여성'스럽게 수다스럽지만 매우 고요한 상황 모순 또한 내가 보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특징이다.
​
복잡하게 얽힌 듯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방식은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에서 주인공 미스 마플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데, 
복잡할수록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이 핵심이다.

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선배 격 되시는 영국 단편 추리소설 작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1874~1936)의 추리소설 이론에서도 중요하게 주장되는 내용이다. 
어찌보면, '복잡할수록 단순화시켜라'라는 조언은 비단 '살인사건'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에도 관철되는 덕목 되시겠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해야만 했어요. 그게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봐요. 18년이 흘렀는데 당신(그웬다)과 자일스가 찾아와 여러가지로 물으며 ('잠자는 살인'에 관한) 조사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로써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살인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은 거죠... '회상 속의 살인'을 흔들어 깨우려는 당신들의 행동은 정말 무서울 만큼 위험했어요. 그래서 저는 몹시 걱정했던 거예요."
- [잠자는 살인], <토키에서의 후일담>, '미스 마플의 총평',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잠자는 살인]은 그웬다 핼리데이가 어린 시절 회상 속에 떠올려진 살인의 현장을 우연히 다시 찾아가게 되는 기이한 상황이 설정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남편 자일스 리드와 함께 그 우연한 상황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 18년 전 벌어진 새어머니 '헬렌'의 피살사건을 들추게 되고 이 '회상 속의 살인' 또는 '잠자는 살인'을 들쑤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마플 양의 충고를 듣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던 중 당시의 목격자였던 한 여인의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 내용이다. 마플 양은 또 다른 새로운 살인을 불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잠자는 살인'을 묻어두라고 했지만 그들 리드 부부를 도와 종국에는 범인을 찾아낸다. 18년 전 살인사건은 아마도 소멸시효가 지났을 수도 있어 묻어둘 수 있겠지만 '잠자는 살인'이 새삼 깨어나면서 초래한 현재의 살인사건은 오래전 범인을 단죄할 계기가 되고 만다.
​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은 '회상'과 우연 속에서 유령과 환상처럼 떠오르는 상념들을 하나의 미스터리 이야기로 흥미롭게 엮어간다.
​
그녀의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당신(미스 마플)이 '복수의 여신(Nemesis)'이란 말이오?'
래필 씨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그렇게 되길 바라요, 당신(래필 씨)의 도움을 빌려서.'
'대체 이런 한밤중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얘기 좀 해주시겠소?'
'급박하게 행동을 취해야 해요. 시간이 없으니까. 난 너무나 어리석었어요.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처음부터 일의 진상을 명백히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것을...'"
- [카리브해의 비밀], <제24장. 복수의 여신>, 애거서 크리스티, 1964.
​
​
사실, [잠자는 살인]이 그녀의 마지막 발표작이기는 하지만 극 중 시점은 '미스 마플 연작 3부작'에 앞서거나 그 중간에 일어난 이야기다. 미스 마플의 실질적인 '마지막' 활약은 1971년에 발표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이기 때문이다.
​
애거서 크리스티는 1964년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 이야기에 이어 한참 후 연작 형식으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을 썼다고 한다. 이후 [여인의 왕국(Woman's Realm)]까지 3부작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어가지 못했으므로, 실제로는 [복수의 여신]이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 그녀들의 마지막 작품이 된 것이다.
​
래필 씨에게 우연히 '복수의 여신'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엮이게 된 미스 마플이 그와 함께 카리브해 호텔의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할머니 미스 마플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던 래필 씨의 죽음과 유언을 통해 다시 연결되는 이 이야기에서는 전작에서 언급된 '복수의 여신'이 일종의 '암호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은 래필 씨 차례였다. 그는 그녀(미스 마플)의 손을 감싸쥐었다.
'Ave Caesar, nos morituri te salutamus(황제 폐하, 죽음을 목전에 둔 우리가 삼가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죽음을 앞둔 검투사들이 검술시합 전에 하는 말).'
'유감스럽지만 라틴어는 잘 모른답니다.' 마플 양이 말했다.
'하지만 이 말뜻은 알지 않소?'
'예.' 그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려는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무척 기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활주로를 가로질러 걸어가서 비행기에 올랐다."
- [카리브해의 비밀], <에필로그>, 애거서 크리스티, 1964.
​
​
카리브해의 어떤 섬으로 휴양간, 이제는 명탐정이 된 마플 양과 대부호 래필 씨는 이렇게 짧은 인연으로 살인사건을 공조하여 해결했고 서로에 대한 깊은 경의를 남긴 채 헤어졌다.
​
그리고는 래필 씨의 죽음과 마플 양의 인연은 '복수의 여신'이라는 코드명으로 다시금 이어진다.


"'그리고 마플 양과 라피엘(래필) 씨께서 그 사건을 해결하셨고요?'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어요. 라피엘 씨는 그 성격 덕에, 그리고 나는 한두 가지 명확한 증거를 발견한 덕에 코앞에 닥친 두 번째(세 번째?) 살인을 성공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어요. 나 혼자서는 몸이 너무 허약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라피엘 씨 또한 다리가 불편하셔서 혼자서는 해낼 수 없으셨을 거고요. 우리는 한 팀이 되어서 행동했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마플 양, 혹시 '네메시스'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네메시스.'
마플 양이 되뇌었다. 그건 질문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아주 서서히, 예기치 못하게 미소가 번졌다.
'예, 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도 그렇고 라피엘 씨도요. 내가 스스로를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라고 묘사한 말에 라피엘 씨가 아주 즐거워하셨죠.'"
- [복수의 여신], <암호명 '네메시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마플 양과 함께 연쇄살인범을 잡은 대부호 금융업자 래필(라피엘) 씨가 유언을 남긴다.
​
애인을 잔인하게 살인했다는 혐의로 10여 년간 복역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의 누명을 풀어줄 '복수의 여신'으로 미스 마플을 지목한 것이다. 1년 내 그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히면 2만 달러의 유산을 남긴다는 조건과 함께. 
오래 전 서인도 제도 카리브해에서 미스 마플에게 우연히 명명된 별명인 '복수의 여신(네메시스)'을 암호명으로 해서 말이다.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재력과 고집 말고는 별 활약이 없던 라피엘(래필) 씨가 후속작 [복수의 여신](1971)에서는 매우 치밀한 장치를 곳곳에 배치하고는 '복수의 여신' 미스 마플이 사악한 살인자를 잡아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재력을 통해 여러 조력자들을 곳곳에 심어놓고 마플 양이 '정의'의 길을 열어가도록 돕는다.


"'왜 이곳에 머물려 하십니까? 단순히 지치고 피곤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이유죠. 난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아요. 물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변명거리지만요.'
'정말이지 제가 이곳에 남아 마플 양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예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교수님께서는 다른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어떤 것들 말씀이십니까? 혹시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시거나, 뭐 아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는 마플 양을 바라보았다.
'뭔가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걸 입증해야 해요. 그리고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어요. 교수님께서는 연줄이 있으시니 그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 [복수의 여신], <작별인사를 나누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처음에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던 마플 양은 할머니 특유의 수다스런 잠행과 능청맞은 연기를 통해 소설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오래전 사건의 갈피를 잡아낸다. 그리고는 정의로운 '복수의 여신'답게 과감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진범을 잡아낸다. 결국 진짜 살인자는 미스 마플까지 제거하기 위해 본인이 탄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게 되고 누명을 쓴 라피엘(래필) 씨의 아들 마이클은 자유의 몸이 된다.

[복수의 여신](1971)은 [잠자는 살인](1976)보다 먼저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진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여성' 탐정 미스 마플도, 자살로 막을 내린 '여성' 살인자 모두 어쩐지 '신비'에 싸인 느낌이다. 그녀들이 전개한 조용하지만 긴박한 상황의 수다와 심리전 또한 고요한 '공포'의 분위기를 한껏 남긴다.
​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의 눈으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
[복수의 여신]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타고난 '사악함'의 존재를 암시한다. 미스 마플은 이 '사악함'을 끈질기게 탐지해 내고 결국 단죄하도록 길을 여는 말 그대로 '복수의 여신(Nemesis)'가 이 된다.
​
이제,
내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인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
내친 김에 오래 전 중학교 시절에 읽던 <해문출판사> 판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 다른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을 읽어봐야겠다.

마을도서관 <동서미스터리북스>의 '여성' 추리소설가 탐색을 잠시 접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를 먼저 펼쳐 든다.
​
***
​
1.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 Agatha Christie, 김윤정 옮김, <황금가지>, 2013.
2. [복수의 여신(Nemesis)](1971), Agatha Christie,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2013.
3.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1964), Agatha Christie, 정성희 옮김, <해문출판사>, 1989~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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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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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와 공포 - 2
- [잠자는 살인]/[복수의 여신]/[카리브해의 비밀], 애거서 크리스티, 1964~1976.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저라면 '잠자는 살인'을 그대로 묻어 두겠습니다. 살인을 들쑤시는 건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헤이독 박사의 조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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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돌아왔다.

올해 3월부터 시작한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여정을 좀더 연장해보기 위해 '여성' 추리소설 작가를 테마로 잡았을 때, 
새삼 '애거서 크리스티'가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에 애거서 크리스티를 통해 첫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만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는 내게 '여성' 추리소설 작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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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최근 새삼스레 '여성' 작가 크리스티를 읽고 싶어졌던 거다.


"언제나 지켜 온 내 신조는, '우선 가장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을 찾는다'라는 거랍니다."
- [잠자는 살인], <헬렌?>, 애거서 크리스티,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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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인 해석이 정답인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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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탐정은 벨기에 출신 프로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와 영국의 가상 시골 세인트 메리 미드에 사는 아마추어 탐정 미스(Ms.) 마플 할머니인데, '여성'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읽어보려면 수다스러운 미혼의 할머니 '마플 양(미스 마플)'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보는 게 좋겠다 싶어 다시금 찾아본 이야기가 1976년 애거서 크리스티의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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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마플이 처음 등장한 작품은 [목사관 살인사건](1930)으로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뜨개질로 소일하던 마을의 할머니가 소문과 수다를 통해 정보를 캐고 추리하면서 해결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1976)과의 단순 시차로 보면 첫 작품이 1930년대이고 마지막 활약이 1970년대이니, 첫 '할머니' 아마추어 탐정의 등장이 오십대로 쳐도 마지막에 거의 아흔살 가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다 보니 창작 시점이 꼭 극 중 시점과 동일하다고는 볼 수는 없겠다. 
그러니 그냥 6~80대 정도의 폭넓은 할머니 연령대에 탐정으로서 활약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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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미스 마플'을 [목사관 살인사건]부터 [서재의 시체](1942), [움직이는 손가락](1943), [예고살인](1950), [마술살인](1952), [주머니 속의 죽음](1953), [패딩턴 발 4시 50분](1957) 등의 기라성 같은 작품들을 통해 만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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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마플은 '할머니'이다 보니 기동성 없이 머리로만 추리하는 '안락의자 탐정'으로 보이겠지민, 나름대로 사고 현장이나 관련자를 찾아다니며 필요하면 거짓말 연기도 서슴치 않는 활동을 전개한다. 물론 전반적인 상황은 대부분 동네 여인들의 규수방 수다와 같이 조용하고 은밀하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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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스럽게 수다스럽지만 매우 고요한 상황 모순 또한 내가 보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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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얽힌 듯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방식은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에서 주인공 미스 마플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데, 
복잡할수록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이 핵심이다.

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선배 격 되시는 영국 단편 추리소설 작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1874~1936)의 추리소설 이론에서도 중요하게 주장되는 내용이다. 
어찌보면, '복잡할수록 단순화시켜라'라는 조언은 비단 '살인사건'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에도 관철되는 덕목 되시겠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해야만 했어요. 그게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봐요. 18년이 흘렀는데 당신(그웬다)과 자일스가 찾아와 여러가지로 물으며 ('잠자는 살인'에 관한) 조사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로써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살인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은 거죠... '회상 속의 살인'을 흔들어 깨우려는 당신들의 행동은 정말 무서울 만큼 위험했어요. 그래서 저는 몹시 걱정했던 거예요."
- [잠자는 살인], <토키에서의 후일담>, '미스 마플의 총평',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잠자는 살인]은 그웬다 핼리데이가 어린 시절 회상 속에 떠올려진 살인의 현장을 우연히 다시 찾아가게 되는 기이한 상황이 설정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남편 자일스 리드와 함께 그 우연한 상황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 18년 전 벌어진 새어머니 '헬렌'의 피살사건을 들추게 되고 이 '회상 속의 살인' 또는 '잠자는 살인'을 들쑤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마플 양의 충고를 듣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던 중 당시의 목격자였던 한 여인의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 내용이다. 마플 양은 또 다른 새로운 살인을 불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잠자는 살인'을 묻어두라고 했지만 그들 리드 부부를 도와 종국에는 범인을 찾아낸다. 18년 전 살인사건은 아마도 소멸시효가 지났을 수도 있어 묻어둘 수 있겠지만 '잠자는 살인'이 새삼 깨어나면서 초래한 현재의 살인사건은 오래전 범인을 단죄할 계기가 되고 만다.
​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은 '회상'과 우연 속에서 유령과 환상처럼 떠오르는 상념들을 하나의 미스터리 이야기로 흥미롭게 엮어간다.
​
그녀의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당신(미스 마플)이 '복수의 여신(Nemesis)'이란 말이오?'
래필 씨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그렇게 되길 바라요, 당신(래필 씨)의 도움을 빌려서.'
'대체 이런 한밤중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얘기 좀 해주시겠소?'
'급박하게 행동을 취해야 해요. 시간이 없으니까. 난 너무나 어리석었어요.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처음부터 일의 진상을 명백히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것을...'"
- [카리브해의 비밀], <제24장. 복수의 여신>, 애거서 크리스티, 1964.
​
​
사실, [잠자는 살인]이 그녀의 마지막 발표작이기는 하지만 극 중 시점은 '미스 마플 연작 3부작'에 앞서거나 그 중간에 일어난 이야기다. 미스 마플의 실질적인 '마지막' 활약은 1971년에 발표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이기 때문이다.
​
애거서 크리스티는 1964년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 이야기에 이어 한참 후 연작 형식으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을 썼다고 한다. 이후 [여인의 왕국(Woman's Realm)]까지 3부작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어가지 못했으므로, 실제로는 [복수의 여신]이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 그녀들의 마지막 작품이 된 것이다.
​
래필 씨에게 우연히 '복수의 여신'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엮이게 된 미스 마플이 그와 함께 카리브해 호텔의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할머니 미스 마플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던 래필 씨의 죽음과 유언을 통해 다시 연결되는 이 이야기에서는 전작에서 언급된 '복수의 여신'이 일종의 '암호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은 래필 씨 차례였다. 그는 그녀(미스 마플)의 손을 감싸쥐었다.
'Ave Caesar, nos morituri te salutamus(황제 폐하, 죽음을 목전에 둔 우리가 삼가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죽음을 앞둔 검투사들이 검술시합 전에 하는 말).'
'유감스럽지만 라틴어는 잘 모른답니다.' 마플 양이 말했다.
'하지만 이 말뜻은 알지 않소?'
'예.' 그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려는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무척 기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활주로를 가로질러 걸어가서 비행기에 올랐다."
- [카리브해의 비밀], <에필로그>, 애거서 크리스티, 1964.
​
​
카리브해의 어떤 섬으로 휴양간, 이제는 명탐정이 된 마플 양과 대부호 래필 씨는 이렇게 짧은 인연으로 살인사건을 공조하여 해결했고 서로에 대한 깊은 경의를 남긴 채 헤어졌다.
​
그리고는 래필 씨의 죽음과 마플 양의 인연은 '복수의 여신'이라는 코드명으로 다시금 이어진다.


"'그리고 마플 양과 라피엘(래필) 씨께서 그 사건을 해결하셨고요?'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어요. 라피엘 씨는 그 성격 덕에, 그리고 나는 한두 가지 명확한 증거를 발견한 덕에 코앞에 닥친 두 번째(세 번째?) 살인을 성공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어요. 나 혼자서는 몸이 너무 허약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라피엘 씨 또한 다리가 불편하셔서 혼자서는 해낼 수 없으셨을 거고요. 우리는 한 팀이 되어서 행동했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마플 양, 혹시 '네메시스'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네메시스.'
마플 양이 되뇌었다. 그건 질문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아주 서서히, 예기치 못하게 미소가 번졌다.
'예, 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도 그렇고 라피엘 씨도요. 내가 스스로를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라고 묘사한 말에 라피엘 씨가 아주 즐거워하셨죠.'"
- [복수의 여신], <암호명 '네메시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마플 양과 함께 연쇄살인범을 잡은 대부호 금융업자 래필(라피엘) 씨가 유언을 남긴다.
​
애인을 잔인하게 살인했다는 혐의로 10여 년간 복역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의 누명을 풀어줄 '복수의 여신'으로 미스 마플을 지목한 것이다. 1년 내 그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히면 2만 달러의 유산을 남긴다는 조건과 함께. 
오래 전 서인도 제도 카리브해에서 미스 마플에게 우연히 명명된 별명인 '복수의 여신(네메시스)'을 암호명으로 해서 말이다.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재력과 고집 말고는 별 활약이 없던 라피엘(래필) 씨가 후속작 [복수의 여신](1971)에서는 매우 치밀한 장치를 곳곳에 배치하고는 '복수의 여신' 미스 마플이 사악한 살인자를 잡아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재력을 통해 여러 조력자들을 곳곳에 심어놓고 마플 양이 '정의'의 길을 열어가도록 돕는다.


"'왜 이곳에 머물려 하십니까? 단순히 지치고 피곤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이유죠. 난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아요. 물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변명거리지만요.'
'정말이지 제가 이곳에 남아 마플 양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예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교수님께서는 다른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어떤 것들 말씀이십니까? 혹시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시거나, 뭐 아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는 마플 양을 바라보았다.
'뭔가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걸 입증해야 해요. 그리고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어요. 교수님께서는 연줄이 있으시니 그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 [복수의 여신], <작별인사를 나누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처음에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던 마플 양은 할머니 특유의 수다스런 잠행과 능청맞은 연기를 통해 소설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오래전 사건의 갈피를 잡아낸다. 그리고는 정의로운 '복수의 여신'답게 과감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진범을 잡아낸다. 결국 진짜 살인자는 미스 마플까지 제거하기 위해 본인이 탄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게 되고 누명을 쓴 라피엘(래필) 씨의 아들 마이클은 자유의 몸이 된다.

[복수의 여신](1971)은 [잠자는 살인](1976)보다 먼저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진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여성' 탐정 미스 마플도, 자살로 막을 내린 '여성' 살인자 모두 어쩐지 '신비'에 싸인 느낌이다. 그녀들이 전개한 조용하지만 긴박한 상황의 수다와 심리전 또한 고요한 '공포'의 분위기를 한껏 남긴다.
​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의 눈으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
[복수의 여신]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타고난 '사악함'의 존재를 암시한다. 미스 마플은 이 '사악함'을 끈질기게 탐지해 내고 결국 단죄하도록 길을 여는 말 그대로 '복수의 여신(Nemesis)'가 이 된다.
​
이제,
내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인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
내친 김에 오래 전 중학교 시절에 읽던 <해문출판사> 판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 다른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을 읽어봐야겠다.

마을도서관 <동서미스터리북스>의 '여성' 추리소설가 탐색을 잠시 접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를 먼저 펼쳐 든다.
​
***
​
1.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 Agatha Christie, 김윤정 옮김, <황금가지>, 2013.
2. [복수의 여신(Nemesis)](1971), Agatha Christie,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2013.
3.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1964), Agatha Christie, 정성희 옮김, <해문출판사>, 1989~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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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의 비밀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7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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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와 공포 - 2
- [잠자는 살인]/[복수의 여신]/[카리브해의 비밀], 애거서 크리스티, 1964~1976.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저라면 '잠자는 살인'을 그대로 묻어 두겠습니다. 살인을 들쑤시는 건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헤이독 박사의 조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다시,
나의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돌아왔다.

올해 3월부터 시작한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여정을 좀더 연장해보기 위해 '여성' 추리소설 작가를 테마로 잡았을 때, 
새삼 '애거서 크리스티'가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에 애거서 크리스티를 통해 첫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만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는 내게 '여성' 추리소설 작가는 아니었다. 
​
그러던 중 최근 새삼스레 '여성' 작가 크리스티를 읽고 싶어졌던 거다.


"언제나 지켜 온 내 신조는, '우선 가장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을 찾는다'라는 거랍니다."
- [잠자는 살인], <헬렌?>,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상식적인 해석이 정답인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탐정은 벨기에 출신 프로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와 영국의 가상 시골 세인트 메리 미드에 사는 아마추어 탐정 미스(Ms.) 마플 할머니인데, '여성'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읽어보려면 수다스러운 미혼의 할머니 '마플 양(미스 마플)'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보는 게 좋겠다 싶어 다시금 찾아본 이야기가 1976년 애거서 크리스티의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
미스 마플이 처음 등장한 작품은 [목사관 살인사건](1930)으로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뜨개질로 소일하던 마을의 할머니가 소문과 수다를 통해 정보를 캐고 추리하면서 해결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1976)과의 단순 시차로 보면 첫 작품이 1930년대이고 마지막 활약이 1970년대이니, 첫 '할머니' 아마추어 탐정의 등장이 오십대로 쳐도 마지막에 거의 아흔살 가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다 보니 창작 시점이 꼭 극 중 시점과 동일하다고는 볼 수는 없겠다. 
그러니 그냥 6~80대 정도의 폭넓은 할머니 연령대에 탐정으로서 활약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
그렇게 나는 '미스 마플'을 [목사관 살인사건]부터 [서재의 시체](1942), [움직이는 손가락](1943), [예고살인](1950), [마술살인](1952), [주머니 속의 죽음](1953), [패딩턴 발 4시 50분](1957) 등의 기라성 같은 작품들을 통해 만났었다.
​
미스 마플은 '할머니'이다 보니 기동성 없이 머리로만 추리하는 '안락의자 탐정'으로 보이겠지민, 나름대로 사고 현장이나 관련자를 찾아다니며 필요하면 거짓말 연기도 서슴치 않는 활동을 전개한다. 물론 전반적인 상황은 대부분 동네 여인들의 규수방 수다와 같이 조용하고 은밀하개 전개된다.
​
'여성'스럽게 수다스럽지만 매우 고요한 상황 모순 또한 내가 보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특징이다.
​
복잡하게 얽힌 듯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방식은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에서 주인공 미스 마플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데, 
복잡할수록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이 핵심이다.

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선배 격 되시는 영국 단편 추리소설 작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1874~1936)의 추리소설 이론에서도 중요하게 주장되는 내용이다. 
어찌보면, '복잡할수록 단순화시켜라'라는 조언은 비단 '살인사건'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에도 관철되는 덕목 되시겠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해야만 했어요. 그게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봐요. 18년이 흘렀는데 당신(그웬다)과 자일스가 찾아와 여러가지로 물으며 ('잠자는 살인'에 관한) 조사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로써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살인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은 거죠... '회상 속의 살인'을 흔들어 깨우려는 당신들의 행동은 정말 무서울 만큼 위험했어요. 그래서 저는 몹시 걱정했던 거예요."
- [잠자는 살인], <토키에서의 후일담>, '미스 마플의 총평', 애거서 크리스티,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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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살인]은 그웬다 핼리데이가 어린 시절 회상 속에 떠올려진 살인의 현장을 우연히 다시 찾아가게 되는 기이한 상황이 설정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남편 자일스 리드와 함께 그 우연한 상황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 18년 전 벌어진 새어머니 '헬렌'의 피살사건을 들추게 되고 이 '회상 속의 살인' 또는 '잠자는 살인'을 들쑤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마플 양의 충고를 듣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던 중 당시의 목격자였던 한 여인의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 내용이다. 마플 양은 또 다른 새로운 살인을 불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잠자는 살인'을 묻어두라고 했지만 그들 리드 부부를 도와 종국에는 범인을 찾아낸다. 18년 전 살인사건은 아마도 소멸시효가 지났을 수도 있어 묻어둘 수 있겠지만 '잠자는 살인'이 새삼 깨어나면서 초래한 현재의 살인사건은 오래전 범인을 단죄할 계기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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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은 '회상'과 우연 속에서 유령과 환상처럼 떠오르는 상념들을 하나의 미스터리 이야기로 흥미롭게 엮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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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당신(미스 마플)이 '복수의 여신(Nemesis)'이란 말이오?'
래필 씨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그렇게 되길 바라요, 당신(래필 씨)의 도움을 빌려서.'
'대체 이런 한밤중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얘기 좀 해주시겠소?'
'급박하게 행동을 취해야 해요. 시간이 없으니까. 난 너무나 어리석었어요.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처음부터 일의 진상을 명백히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것을...'"
- [카리브해의 비밀], <제24장. 복수의 여신>, 애거서 크리스티,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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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잠자는 살인]이 그녀의 마지막 발표작이기는 하지만 극 중 시점은 '미스 마플 연작 3부작'에 앞서거나 그 중간에 일어난 이야기다. 미스 마플의 실질적인 '마지막' 활약은 1971년에 발표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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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는 1964년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 이야기에 이어 한참 후 연작 형식으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을 썼다고 한다. 이후 [여인의 왕국(Woman's Realm)]까지 3부작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어가지 못했으므로, 실제로는 [복수의 여신]이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 그녀들의 마지막 작품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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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필 씨에게 우연히 '복수의 여신'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엮이게 된 미스 마플이 그와 함께 카리브해 호텔의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할머니 미스 마플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던 래필 씨의 죽음과 유언을 통해 다시 연결되는 이 이야기에서는 전작에서 언급된 '복수의 여신'이 일종의 '암호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은 래필 씨 차례였다. 그는 그녀(미스 마플)의 손을 감싸쥐었다.
'Ave Caesar, nos morituri te salutamus(황제 폐하, 죽음을 목전에 둔 우리가 삼가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죽음을 앞둔 검투사들이 검술시합 전에 하는 말).'
'유감스럽지만 라틴어는 잘 모른답니다.' 마플 양이 말했다.
'하지만 이 말뜻은 알지 않소?'
'예.' 그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려는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무척 기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활주로를 가로질러 걸어가서 비행기에 올랐다."
- [카리브해의 비밀], <에필로그>, 애거서 크리스티, 1964.
​
​
카리브해의 어떤 섬으로 휴양간, 이제는 명탐정이 된 마플 양과 대부호 래필 씨는 이렇게 짧은 인연으로 살인사건을 공조하여 해결했고 서로에 대한 깊은 경의를 남긴 채 헤어졌다.
​
그리고는 래필 씨의 죽음과 마플 양의 인연은 '복수의 여신'이라는 코드명으로 다시금 이어진다.


"'그리고 마플 양과 라피엘(래필) 씨께서 그 사건을 해결하셨고요?'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어요. 라피엘 씨는 그 성격 덕에, 그리고 나는 한두 가지 명확한 증거를 발견한 덕에 코앞에 닥친 두 번째(세 번째?) 살인을 성공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어요. 나 혼자서는 몸이 너무 허약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라피엘 씨 또한 다리가 불편하셔서 혼자서는 해낼 수 없으셨을 거고요. 우리는 한 팀이 되어서 행동했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마플 양, 혹시 '네메시스'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네메시스.'
마플 양이 되뇌었다. 그건 질문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아주 서서히, 예기치 못하게 미소가 번졌다.
'예, 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도 그렇고 라피엘 씨도요. 내가 스스로를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라고 묘사한 말에 라피엘 씨가 아주 즐거워하셨죠.'"
- [복수의 여신], <암호명 '네메시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마플 양과 함께 연쇄살인범을 잡은 대부호 금융업자 래필(라피엘) 씨가 유언을 남긴다.
​
애인을 잔인하게 살인했다는 혐의로 10여 년간 복역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의 누명을 풀어줄 '복수의 여신'으로 미스 마플을 지목한 것이다. 1년 내 그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히면 2만 달러의 유산을 남긴다는 조건과 함께. 
오래 전 서인도 제도 카리브해에서 미스 마플에게 우연히 명명된 별명인 '복수의 여신(네메시스)'을 암호명으로 해서 말이다.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재력과 고집 말고는 별 활약이 없던 라피엘(래필) 씨가 후속작 [복수의 여신](1971)에서는 매우 치밀한 장치를 곳곳에 배치하고는 '복수의 여신' 미스 마플이 사악한 살인자를 잡아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재력을 통해 여러 조력자들을 곳곳에 심어놓고 마플 양이 '정의'의 길을 열어가도록 돕는다.


"'왜 이곳에 머물려 하십니까? 단순히 지치고 피곤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이유죠. 난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아요. 물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변명거리지만요.'
'정말이지 제가 이곳에 남아 마플 양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예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교수님께서는 다른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어떤 것들 말씀이십니까? 혹시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시거나, 뭐 아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는 마플 양을 바라보았다.
'뭔가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걸 입증해야 해요. 그리고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어요. 교수님께서는 연줄이 있으시니 그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 [복수의 여신], <작별인사를 나누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처음에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던 마플 양은 할머니 특유의 수다스런 잠행과 능청맞은 연기를 통해 소설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오래전 사건의 갈피를 잡아낸다. 그리고는 정의로운 '복수의 여신'답게 과감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진범을 잡아낸다. 결국 진짜 살인자는 미스 마플까지 제거하기 위해 본인이 탄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게 되고 누명을 쓴 라피엘(래필) 씨의 아들 마이클은 자유의 몸이 된다.

[복수의 여신](1971)은 [잠자는 살인](1976)보다 먼저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진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여성' 탐정 미스 마플도, 자살로 막을 내린 '여성' 살인자 모두 어쩐지 '신비'에 싸인 느낌이다. 그녀들이 전개한 조용하지만 긴박한 상황의 수다와 심리전 또한 고요한 '공포'의 분위기를 한껏 남긴다.
​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의 눈으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
[복수의 여신]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타고난 '사악함'의 존재를 암시한다. 미스 마플은 이 '사악함'을 끈질기게 탐지해 내고 결국 단죄하도록 길을 여는 말 그대로 '복수의 여신(Nemesis)'가 이 된다.
​
이제,
내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인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
내친 김에 오래 전 중학교 시절에 읽던 <해문출판사> 판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 다른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을 읽어봐야겠다.

마을도서관 <동서미스터리북스>의 '여성' 추리소설가 탐색을 잠시 접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를 먼저 펼쳐 든다.
​
***
​
1.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 Agatha Christie, 김윤정 옮김, <황금가지>, 2013.
2. [복수의 여신(Nemesis)](1971), Agatha Christie,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2013.
3.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1964), Agatha Christie, 정성희 옮김, <해문출판사>, 1989~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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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78
헬런 매클로이 지음, 강성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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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와 공포 - 1
- [어두운 거울 속에], 헬런 매클로이 / [지푸라기 여자] 외, 까뜨린느 아를레이, 1949~1960.
​
​
'미스터리' 소설을 더 빌려보기 위해 이번에 떠오른 키워드는 '여성' 작가였다.

물론, 중학교 시절 내게 '장편'을 읽을 수 있는 힘을 준 게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였다지만, 
내게 그녀는 그냥 '추리소설' 작가였다. 
그녀 작품의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와 함께 유명한 등장인물인 미스(Miss) 제인 마플(마플 양)이 사건을 해결하는 소설 속에서도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여성' 작가로서 따로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동서미스터리북스> 책장 앞을 여전히 서성이던 중 내가 아직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거다.
​
​
"당신에게 말해 두겠는데요, 기젤라 폰 호헤넴즈 선생님, 만일 당신이 그 정신과 의사 친구(베이질 윌링)에게 포스티나 클레일 선생에 대한 말을 써보냈다면 틀림없이 후회할 거예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2장>, 헬런 매클로이, 1949.
​
​
나는 미스터리 또는 추리소설 자체의 신비롭고 비밀스러우며 고요한 상황설정을 좋아한다. 
사건의 전개와 그 실마리를 푸는 과정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겠지만, 그 사건의 발생과 상황은 꼭 고요한 신비주의적 설정으로 독자를 이끌어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어본 미국 여성 '미스터리' 작가 헬런 매클로이(Helen McCloy:1904~1994)의 대표작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1949)의 분위기 또한 상당히 그러하다.
​
​
"라이트훗 교장이 도전적으로 베이질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당신이 짐작하시지도 못했던 일이지요?'
'정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알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
베이질은 사려깊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괴테지요. 괴테의 회상록 제1권. 금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회색 슈트. 에밀리 사제(트)와 토드 래플레이크 이야기. 독일어로는 '도플갱어(살아있는 영혼)', 그리스어로는 '에이돌론', 고대 이집트어의 '카', 영국 민화에 나오는 '페치'. 그러니까 당신이 방에 들어왔을 때, 또는 거리나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당신 앞쪽에 버젓이 오체를 갖춘 제3차원의 색채가 명확한 사람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움직이기도 하고, 광학의 법칙에 따라 명암과 그림자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6장>, 헬런 매클로이, 1949.
​
​
신비주의와 마술적 요소의 미스터리 소설 대가라고 하면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가 유명하기는 하나, 최근 나는 그의 작품들에서 흥미롭고 재미지기는 해도 다소 억지스런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주 조금 실망하기도 했더랬다.

헬런 매클로이 또한 그런 신비주의적 요소 중 하나인 '도플갱어'를 주제로 하여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독후감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그 진행과정이 내게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어느 기숙여학교에서 벌어진 '도플갱어' 사건은 그 자체로도 미스터리다. 
​
18세기 이십대 초반부터 괴테가 우연히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여러 번 봤다고 썼다는 그의 '회상록',
19세기 본인과 똑같은 분신이 자주, 그리고 동시에 등장하면서 학교를 열여덟 번이나 옮겨 다니다가 자취를 감췄다던 프랑스어 교사 에밀리 사제(트) 이야기(1845년, 리보니아의 에밀리 사제 전설, [어두운 거울 속에], <제11장>).
그 이후 독일어로 '동시에 걷는 사람'을 뜻한다는 '도플갱어'는 고대 그리스의 '에이돌론'(Idol의어원)이나 이집트의 '카'처럼 육신과 별도로 동시에 공존하는 '생령' 또는 '영혼'의 의미와 같다는데, 우연히 나타난 '도플갱어'를 만나게 될 경우 불행한 사고를 당하거나 죽게 된다는 불길한 징조로 알려져 왔다.
물론, 괴테는 본인을 꼭 닮은 도플갱어'와 몇 번 마주쳤음에도 불행하게 죽지는 않았다지만.

헬런 매클로이의 대표작 [어두운 거울 속에](1949)의 줄거리를 보면, 이와 같은 '도플갱어' 현상으로 기숙여학교에서 두 번째 쫓겨나는 미술교사 포스티나 클레일 선생이 자신과는 악연과 같은 관계로 엮인 동료 여교사 앨리스 에이티슨의 살인사건에 먼 거리를 두고 나타난 '도플갱어' 현상으로 인해 이상하게 연루되고, 종국에는 모종의 계략에 의해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 비치도록 설계된 자신의 '도플갱어' 생령 현상의 환상을 보고는 심장마비로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내용이다.
​
기숙여학교 동료교사인 독일어 선생 기젤라 폰 호헤넴즈의 연인인 정신과 의사 베이질 윌링은 기젤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고 일련의 '도플갱어' 사건을 파헤치던 중, 상속으로 얽힌 '도플갱어' 조작 사건을 들춰내지만 용의자는 마지막까지 혐의를 부인한다. 
즉, 정신과 의사 탐정 베이질 윌링은 독자에게 사건의 전모를 '범인'에게 설명하면서 풀어내는 한편, '범인'은 그러한 상황증거로만은 본인을 법정에서 기소당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 항변한다. 
​
소설은 마지막까지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도록 미스터리 가득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미국인 베이질 윌링)은 그런(초자연적 도플갱어 생령) 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래도 승복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나(기젤라 폰 호헤넴즈)는 유럽에서 자랐기 때문에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우리의 고대문명은 모든 신앙에 회의적이에요. 미국사람이 거의 종교에 가깝도록 숭배하는 현대과학에 대해서까지도. 우리의 문명은 수많은 지적인 혁명을 거쳐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어떤 세대의 '과학'이 다음 세대에는 '신화'가 되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몇 번이나 보아왔어요. 전기의 역사는 이제 겨우 2백 년 밖에 안 돼요. 겨우 10년 전만 해도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원자의 핵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지요. 오래된 격언 가운데 가장 슬픈 구절이 있잖아요? '이것도 또한 지나가리(Hoc quoque transibit).'
과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바로 가까이에 있어요. 책 속에뿐만 아니라 풍습이며 가정에도, 낡은 성이나 성채는 역사책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대부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곳에 있어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12장>, 헬런 매클로이, 1949.
​
​
결국, '도플갱어'와 같은 '초자연적' 생령 현상은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소설의 결말일 수는 있겠지만, 유럽의 오랜 지적 전통에 따르면 과학과 합리주의로 점철된 이 모든 문명은 어쩌면 인간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회의주의로 회귀하는 것일 수도 있다.
​
'도플갱어'가 범인의 계략이라는 주인공인 미국인 베이질 윌링 박사의 '합리주의'와, 이에 반해 그 일련의 살인사건이 실제 '생령 현상' 때문일 수 있다는 용의자 레이먼드 배이닝의 '초자연주의'가 마치 이야기 속 '도플갱어'처럼 미스터리하게 공존한다.
​
[어두운 거울 속에](1949)는 여성 작가 헬런 매클로이의 묘사와 설정이 끝까지 신비롭게 전개되는 소설이다.


한편, 매클로이의 소설을 마을 도서관에 반납하고는 그냥 돌아서지 못하고 계획에도 없게 다시 대출한 책도 또 다른 '여성' 작가의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
바로 프랑스 작가 까뜨린느 아를레이(Catherine Arley : 1935~?)의 [지푸라기 여자](1957)와 [눈에는 눈](1960)이다.

'꼭두각시'라는 의미인 [지푸라기 여자(The Woman of Straw / La Femme de Paille)]는 거대 부호와 결혼하여 인생역전을 꿈꾸는, 제2차 대전 전후 독일의 폐허 함부르크의 가난한 미혼여성 히르데갈데 마에나의 이야기인데, 종국에는 비극의 원인이 거부인 칼 리치몬드의 충실한 비서 안톤 콜프의 계략으로 밝혀지는 이야기다. 
소설 전반부 내내 '팜므 파탈' 연기를 훌륭하게 수행하며 목적을 달성한 듯한 여주인공이 결국 안톤 콜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반전을 남긴다. 
​
이 '지푸라기 여자' 히르데갈데는 악인에게 복수하는 또 한번의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하고는,
종국에 상속을 위해 부자 남편을 독살한 누명을 쓰게 되고 그 누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체념한 채 스스로 목를 맨다.
​
소설 초반에 비서 안톤 콜프와 짜고 늙은 부자를 꼬셔내는 다분히 연극적 상황부터 결혼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 대한 소설 전반부의 묘사가 상당히 섬세하고 흥미진진하다. 
마치 연속극처럼 다음 상황이 궁금하여 펼친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베일에 싸여 신상을 별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프랑스 '여성' 소설가 까뜨린느 아를레이의 소설은 '추리' 또는 '미스터리' 보다는 일종의 '서스펜스'에 가깝기도 하고, 여주인공의 세속적 욕망을 소재로 한 섬세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데 얼핏 읽다보면 현대극 막장 드라마의 본류 같다는 느낌도 든다.
​
1960년에 까뜨린느 아를레이가 발표한 또 다른 소설 [눈에는 눈(Le Talion)]은 모세 율법에서 '탈리오'라 불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을'이라는 원시적 법률 정신이 모티브다. 
​
이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 아가트는 [지푸라기 여자]의 히르데갈데 마에나와는 비할 수도 없이 '악녀'다. 아니, 정확하게는 '악마'라기 보다는 타고난 이기적 탐욕주의자인 여자의 본성이 '악인'에 가깝다는 소설적 메시지가 깔려 있다.
이런 경우 생래적 '악인'인 본인은 자신이 악당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타인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면서 애써 외면한다.
​
이 지점이 바로,
원시적인 고대 율법 '눈에는 눈'(Le Talion)이 작동되어야 하는 곳이다.
​
부자 사업가 남편 쟝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된 아가트가 살인 계획을 짜서 남편을 죽게 만들고 다른 부자 남자한테 환승결혼하는 과정은 하나의 '완전범죄'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눈에는 눈'의 율법 관념에 따라 주변 사람 모두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죽어나가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는 본격 막장 드라마의 감흥을 남긴다.
​
까뜨린느 아를레이 두 소설은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풍부한 묘사를 곁들인 막장극의 내용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랜시스 아일즈와 프리먼 크로프츠, 리처드 헐로 대표되는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의 형식을 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범인이 애초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완전범죄'를 실현하고 이에 자만에 빠지지만, 결국 스스로의 헛점을 모르다가 그로 인해 파멸한다는 '사필귀정'의 비극적 서사다.
물론 비극의 주인공 또한 '여성'이다.
​
'여성' 소설가 핼런 매클로이와 까뜨린느 아를레이의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들에서는 여타 추리소설에서보다 좀더 신비주의와 공포의 색채가 짙다.
​
그렇다면 이제 나는,
내 추리소설 여정의 원류와도 같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여사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
'여성'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작품이자, 여주인공'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부터 시작한다.

'여성' 추리소설 작가가 그려내는 소설 속 '신비'와 '공포'를 새삼 상기하면서 말이다.

***

1.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1949), Helen McCloy, 강성희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지푸라기 여자(La Femme de Paille)](1957) / [눈에는 눈(Le Talion)](1960), Catherine Arley, 이가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 Agatha Christie, 김윤정 옮김, <황금가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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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여자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56
까뜨리느 아를레이 지음, 이가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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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와 공포 - 1
- [어두운 거울 속에], 헬런 매클로이 / [지푸라기 여자] 외, 까뜨린느 아를레이, 1949~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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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을 더 빌려보기 위해 이번에 떠오른 키워드는 '여성' 작가였다.

물론, 중학교 시절 내게 '장편'을 읽을 수 있는 힘을 준 게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였다지만, 
내게 그녀는 그냥 '추리소설' 작가였다. 
그녀 작품의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와 함께 유명한 등장인물인 미스(Miss) 제인 마플(마플 양)이 사건을 해결하는 소설 속에서도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여성' 작가로서 따로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동서미스터리북스> 책장 앞을 여전히 서성이던 중 내가 아직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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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해 두겠는데요, 기젤라 폰 호헤넴즈 선생님, 만일 당신이 그 정신과 의사 친구(베이질 윌링)에게 포스티나 클레일 선생에 대한 말을 써보냈다면 틀림없이 후회할 거예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2장>, 헬런 매클로이,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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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스터리 또는 추리소설 자체의 신비롭고 비밀스러우며 고요한 상황설정을 좋아한다. 
사건의 전개와 그 실마리를 푸는 과정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겠지만, 그 사건의 발생과 상황은 꼭 고요한 신비주의적 설정으로 독자를 이끌어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어본 미국 여성 '미스터리' 작가 헬런 매클로이(Helen McCloy:1904~1994)의 대표작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1949)의 분위기 또한 상당히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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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훗 교장이 도전적으로 베이질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당신이 짐작하시지도 못했던 일이지요?'
'정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알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
베이질은 사려깊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괴테지요. 괴테의 회상록 제1권. 금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회색 슈트. 에밀리 사제(트)와 토드 래플레이크 이야기. 독일어로는 '도플갱어(살아있는 영혼)', 그리스어로는 '에이돌론', 고대 이집트어의 '카', 영국 민화에 나오는 '페치'. 그러니까 당신이 방에 들어왔을 때, 또는 거리나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당신 앞쪽에 버젓이 오체를 갖춘 제3차원의 색채가 명확한 사람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움직이기도 하고, 광학의 법칙에 따라 명암과 그림자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6장>, 헬런 매클로이,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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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 마술적 요소의 미스터리 소설 대가라고 하면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가 유명하기는 하나, 최근 나는 그의 작품들에서 흥미롭고 재미지기는 해도 다소 억지스런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주 조금 실망하기도 했더랬다.

헬런 매클로이 또한 그런 신비주의적 요소 중 하나인 '도플갱어'를 주제로 하여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독후감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그 진행과정이 내게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어느 기숙여학교에서 벌어진 '도플갱어' 사건은 그 자체로도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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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십대 초반부터 괴테가 우연히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여러 번 봤다고 썼다는 그의 '회상록',
19세기 본인과 똑같은 분신이 자주, 그리고 동시에 등장하면서 학교를 열여덟 번이나 옮겨 다니다가 자취를 감췄다던 프랑스어 교사 에밀리 사제(트) 이야기(1845년, 리보니아의 에밀리 사제 전설, [어두운 거울 속에], <제11장>).
그 이후 독일어로 '동시에 걷는 사람'을 뜻한다는 '도플갱어'는 고대 그리스의 '에이돌론'(Idol의어원)이나 이집트의 '카'처럼 육신과 별도로 동시에 공존하는 '생령' 또는 '영혼'의 의미와 같다는데, 우연히 나타난 '도플갱어'를 만나게 될 경우 불행한 사고를 당하거나 죽게 된다는 불길한 징조로 알려져 왔다.
물론, 괴테는 본인을 꼭 닮은 도플갱어'와 몇 번 마주쳤음에도 불행하게 죽지는 않았다지만.

헬런 매클로이의 대표작 [어두운 거울 속에](1949)의 줄거리를 보면, 이와 같은 '도플갱어' 현상으로 기숙여학교에서 두 번째 쫓겨나는 미술교사 포스티나 클레일 선생이 자신과는 악연과 같은 관계로 엮인 동료 여교사 앨리스 에이티슨의 살인사건에 먼 거리를 두고 나타난 '도플갱어' 현상으로 인해 이상하게 연루되고, 종국에는 모종의 계략에 의해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 비치도록 설계된 자신의 '도플갱어' 생령 현상의 환상을 보고는 심장마비로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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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여학교 동료교사인 독일어 선생 기젤라 폰 호헤넴즈의 연인인 정신과 의사 베이질 윌링은 기젤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고 일련의 '도플갱어' 사건을 파헤치던 중, 상속으로 얽힌 '도플갱어' 조작 사건을 들춰내지만 용의자는 마지막까지 혐의를 부인한다. 
즉, 정신과 의사 탐정 베이질 윌링은 독자에게 사건의 전모를 '범인'에게 설명하면서 풀어내는 한편, '범인'은 그러한 상황증거로만은 본인을 법정에서 기소당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 항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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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마지막까지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도록 미스터리 가득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미국인 베이질 윌링)은 그런(초자연적 도플갱어 생령) 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래도 승복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나(기젤라 폰 호헤넴즈)는 유럽에서 자랐기 때문에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우리의 고대문명은 모든 신앙에 회의적이에요. 미국사람이 거의 종교에 가깝도록 숭배하는 현대과학에 대해서까지도. 우리의 문명은 수많은 지적인 혁명을 거쳐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어떤 세대의 '과학'이 다음 세대에는 '신화'가 되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몇 번이나 보아왔어요. 전기의 역사는 이제 겨우 2백 년 밖에 안 돼요. 겨우 10년 전만 해도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원자의 핵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지요. 오래된 격언 가운데 가장 슬픈 구절이 있잖아요? '이것도 또한 지나가리(Hoc quoque transibit).'
과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바로 가까이에 있어요. 책 속에뿐만 아니라 풍습이며 가정에도, 낡은 성이나 성채는 역사책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대부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곳에 있어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12장>, 헬런 매클로이,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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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도플갱어'와 같은 '초자연적' 생령 현상은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소설의 결말일 수는 있겠지만, 유럽의 오랜 지적 전통에 따르면 과학과 합리주의로 점철된 이 모든 문명은 어쩌면 인간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회의주의로 회귀하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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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가 범인의 계략이라는 주인공인 미국인 베이질 윌링 박사의 '합리주의'와, 이에 반해 그 일련의 살인사건이 실제 '생령 현상' 때문일 수 있다는 용의자 레이먼드 배이닝의 '초자연주의'가 마치 이야기 속 '도플갱어'처럼 미스터리하게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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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1949)는 여성 작가 헬런 매클로이의 묘사와 설정이 끝까지 신비롭게 전개되는 소설이다.


한편, 매클로이의 소설을 마을 도서관에 반납하고는 그냥 돌아서지 못하고 계획에도 없게 다시 대출한 책도 또 다른 '여성' 작가의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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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프랑스 작가 까뜨린느 아를레이(Catherine Arley : 1935~?)의 [지푸라기 여자](1957)와 [눈에는 눈](1960)이다.

'꼭두각시'라는 의미인 [지푸라기 여자(The Woman of Straw / La Femme de Paille)]는 거대 부호와 결혼하여 인생역전을 꿈꾸는, 제2차 대전 전후 독일의 폐허 함부르크의 가난한 미혼여성 히르데갈데 마에나의 이야기인데, 종국에는 비극의 원인이 거부인 칼 리치몬드의 충실한 비서 안톤 콜프의 계략으로 밝혀지는 이야기다. 
소설 전반부 내내 '팜므 파탈' 연기를 훌륭하게 수행하며 목적을 달성한 듯한 여주인공이 결국 안톤 콜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반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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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푸라기 여자' 히르데갈데는 악인에게 복수하는 또 한번의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하고는,
종국에 상속을 위해 부자 남편을 독살한 누명을 쓰게 되고 그 누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체념한 채 스스로 목를 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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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반에 비서 안톤 콜프와 짜고 늙은 부자를 꼬셔내는 다분히 연극적 상황부터 결혼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 대한 소설 전반부의 묘사가 상당히 섬세하고 흥미진진하다. 
마치 연속극처럼 다음 상황이 궁금하여 펼친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베일에 싸여 신상을 별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프랑스 '여성' 소설가 까뜨린느 아를레이의 소설은 '추리' 또는 '미스터리' 보다는 일종의 '서스펜스'에 가깝기도 하고, 여주인공의 세속적 욕망을 소재로 한 섬세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데 얼핏 읽다보면 현대극 막장 드라마의 본류 같다는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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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까뜨린느 아를레이가 발표한 또 다른 소설 [눈에는 눈(Le Talion)]은 모세 율법에서 '탈리오'라 불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을'이라는 원시적 법률 정신이 모티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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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 아가트는 [지푸라기 여자]의 히르데갈데 마에나와는 비할 수도 없이 '악녀'다. 아니, 정확하게는 '악마'라기 보다는 타고난 이기적 탐욕주의자인 여자의 본성이 '악인'에 가깝다는 소설적 메시지가 깔려 있다.
이런 경우 생래적 '악인'인 본인은 자신이 악당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타인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면서 애써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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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이 바로,
원시적인 고대 율법 '눈에는 눈'(Le Talion)이 작동되어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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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사업가 남편 쟝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된 아가트가 살인 계획을 짜서 남편을 죽게 만들고 다른 부자 남자한테 환승결혼하는 과정은 하나의 '완전범죄'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눈에는 눈'의 율법 관념에 따라 주변 사람 모두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죽어나가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는 본격 막장 드라마의 감흥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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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뜨린느 아를레이 두 소설은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풍부한 묘사를 곁들인 막장극의 내용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랜시스 아일즈와 프리먼 크로프츠, 리처드 헐로 대표되는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의 형식을 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범인이 애초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완전범죄'를 실현하고 이에 자만에 빠지지만, 결국 스스로의 헛점을 모르다가 그로 인해 파멸한다는 '사필귀정'의 비극적 서사다.
물론 비극의 주인공 또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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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 핼런 매클로이와 까뜨린느 아를레이의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들에서는 여타 추리소설에서보다 좀더 신비주의와 공포의 색채가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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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나는,
내 추리소설 여정의 원류와도 같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여사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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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작품이자, 여주인공'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부터 시작한다.

'여성' 추리소설 작가가 그려내는 소설 속 '신비'와 '공포'를 새삼 상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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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1949), Helen McCloy, 강성희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지푸라기 여자(La Femme de Paille)](1957) / [눈에는 눈(Le Talion)](1960), Catherine Arley, 이가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 Agatha Christie, 김윤정 옮김, <황금가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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