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눈앞의 현실 - 엇갈리고 교차하는 인간의 욕망과 배반에 대하여
탕누어 지음, 김영문 옮김 / 378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좌전(左傳)]의 '안전(眼前)'
- [역사, 눈앞의 현실], 탕누어/김영문, 2016.


"... 모든 사람의 시선이 각각 한 줄기, '도(道)의 빛'... 춘추시대 사람들의 '눈앞(眼前)', [좌전(左傳)] 저자의 '눈앞', 나의 '눈앞'에서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기를... 사방으로 종횡하는 직선이 서로 교차할 수 있기를...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하나의 고귀한 교차지점을 보고 자신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또한 가장 가본적이고 가장 간단한 '위치측정' 방식이다."
- [역사, 눈앞의 현실], <서문>, 탕누어, 2016.


중국의 춘추시대는 기원전 8세기 주나라의 분봉국들이 각자 수세대 세습을 하는 과정에서 독립국이 되어 중국 전체가 열국(列國)의 쟁패장이 되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기원전 6세기(노양공 27년), 춘추시대 송나라의 주선으로 북방의 전통강국 진(晉)나라와 남방의 신흥강국 초(楚)나라가 각자의 종속국(송/노/정/채/위 등)을 거느리고 맺었던 거대한 '정전( 평화)협정'인 '미병지회(弭兵之會)'는 동방의 제(齊)나라와 서방의 진(秦)나라 등의 대국들을 아우르면서 이후 전국시대 7대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미병지회 후 1세기가 지나면서 진(晉)나라가 한/위/조씨 가문의 삼국으로 분열하고 동북방 끝 연나라까지 가세하면 '진/초/제/연/한/위/조'의 '전국칠웅'이 된다.

공자가 주로 활동한 노나라는 춘추시대 소국이었지만 중국 문명의 기초를 놓은 주공 단의 후예국이라 당대의 '문화국'이자 '도서관'과도 같았다.

이에 공자는 노나라 약 2백년의 역사를 [춘추]라는 역사책으로 죽간에 기록했다.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고,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닌 '대의'를 품은 사건을 발췌편집하고 강조한 '춘추필법' 또한 공자의 [춘추]로부터 시작되었다.

공자의 역사책, [춘추]에 주석을 달고 해설한 또 하나의 역사책이 [좌전(左傳)] 또는 [춘추좌씨전]이다.


"[좌전(左傳)]은 세월의 '뱃전에 새긴(刻舟)' [춘추(春秋)]의 흔적을 하나하나 해체하여 시간 순서와 구체적인 디테일과 인간의 이야기를 복원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의 서술을 회복한 책이다."
- [역사, 눈앞의 현실], <8장. 뱃전에 새긴 흔적>, 탕누어, 2016.


[좌전]의 저자는 공자와 동시대인이자 노나라의 관방 역사가 좌구명이었다고 전해지나 사실 정확하지는 않다. 노나라의 사관인 '좌(左)'씨 집안 전체가 저자일 수도 있는 것이, 우선 노나라의 어용역사책 '좌구명춘추'가 있었고, 한편으로 이를 발췌편집한 민간역사책 '공자춘추'가 있었으며, 이 텍스트를 '좌씨' 집안에서 계속 수정보완한 역사책이 '좌씨춘추전' 즉 [좌전]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제 진정한 [좌전]의 저자가 존재했던 가장 적절한 시점을 말해야 한다. 공자 사후에 11년만 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좌전]의 저자는 진(晉)나라의 한씨, 조씨, 위씨가 지씨를 멸망시키는 걸 분명하게 목격했고, 춘추시대를 지탱한 진(晉)나라의 멸망도 예언에 그치지 않았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즉, 진정으로 춘추라는 시대의 종말이 닥치자 그는 이 역사의 단애 끝에 서서 그 시대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추억하기도 했다."
- [역사, 눈앞의 현실], <2장. 저자를 상상하다>, 탕누어, 2016.


대만의 문화기획자이며 전문 독서가이자 서평가인 탕누어(唐諾:1958~)는 [좌전]을 읽고 꽤 긴 서평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춘추시대의 소국 노나라의 200여 년 역사를 배경으로 한 [춘추]와 [좌전]은 소국의 역사서이니 만큼 역시 또 하나의 소국 정나라의 현실정치가인 자산을 자주 등장시켰다는데, 이는 중국권의 소국인 대만의 인문학자 탕누어의 역사관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탕누어의 역사관이란,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는 대국이 아니라 변방인 소국에서 나온다는 관점이다. 
당대 현실 사람들의 '눈앞'에서는 '중심'이 현실을 이끌지만, 역사의 '눈'으로 본 기록에서는 다양한 변방의 '눈앞'과 시선이 교차하고 겹치면서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다.

탕누어의 [좌전] 해설서 또는 긴 서평책의 원 제목이 [안전(眼前)](2016), 즉 '눈앞'이다. 모든 사람들의 '안전', 즉 '눈앞의 현실'들이 교차하고 겹치면서 의미있는 역사책이 된다는 의미라는데, 우리 말로는 좀 생경하다. 그래서 번역자인 인문학자 김영문 선생님의 국역본 제목은 [역사, 눈앞의 현실](2018)이 되었다. 

나는 [좌전]을 직접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좌전]을 많이 참고했다는 사마천의 기전체 역사서 [사기(史記)]를 최고의 역사책으로 생각하는 독자로서의 나는, 국역본 제목에 [좌전]을 넣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옮긴이 김영문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탕누어의 [안전]의 부제목이 <좌전을 읽다(讀左傳)>라고 하니, 우리말 번역본에도 [좌전]을 명시하였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탕누어의 [안전]을 읽은 나의 서평 제목이라도 '좌전(左傳)의 안전(眼前)'으로 지어본다. 즉, [좌전]의 저자와 등장인물들의 집단적 '눈앞(眼前)'들이 만들어낸 역사에 관한 의견이다.


"춘추시대 '의전(義戰)'은 없었다(춘추무의전/春秋無義戰)."
- [역사, 눈앞의 현실], <6장. 아주 황당한 전쟁>, 탕누어, 2016.


춘추시대는 주나라 천자의 호위를 자처하는 강대국의 '맹주(패자)'가 여기저기 나대고 있는 타국과 소국을 혼내주는 것이 곧 전쟁이었다. 제나라 환공부터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등의 '춘추5패'는 바로 돌아가며 열국들을 소집시킨 이 '맹주'들을 이른다. 
춘추시대 전쟁은 자원약탈의 본심은 여전했으나 상대방을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한/위씨가 진(晉)나라의 지씨를 몰락시키고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멸망시켜버린 이후의 전국시대 전쟁은 대의명분은 뒷전이고 상대방이 죽어야 내가 사는 세상이 되었다. 탕누어에 의하면 전국시대는 이런 '전쟁'의 시대 이전에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인간의 변화된 문화의 산물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의전(義戰)', 즉 '정의로운 전쟁'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있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탕누어는 "춘추시대 '의전(義戰)'은 없었다(春秋無義戰)"고 단언하지만, 상대적으로 전국시대 이후 지금껏 끊이지 않고 있는 인류의 대규모 살상에 비하면 춘추시대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義戰)'의 '이상'이 그나마 남아있었다고 말한다(이상 [안전], <6장>).

이는 춘추시대 전쟁의 실상을 많이 기록하고 묘사한다는 [좌전]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이기도 하겠다. 당장의 현실인 '눈앞(眼前)'에서는 '원한'과 복수', '살상'의 현실이지만, 다수의 '눈앞'이 집단적으로 교차하는 '대의(大義)'의 관점에서는 '정의로운 전쟁'의 '이상'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런 '춘추필법'은 바로 공자의 역사기록 취지이기도 했다.


"문자는... 어떤 완전한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뱃전에 새긴(刻舟) 흔적'일 뿐이다. 그러나 문자는 '시간'에 의해 흘러가고 죽음에 의해 중지되는 기억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특수한 능력으로 마침내 인간의 기억과 언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처럼 천천히 완성되어가고 항거할 수 없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춘추시대 조금 뒤의 시기는 바로 역사의 기록이 분명하게 눈에 띄게 늘어나는 시대, 즉 기록의 폭발이라고 형용할 만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 시작 지점이 '공자' 문하에서 비롯되었다는 합리적인 믿음이 내게는 있다."
- [역사, 눈앞의 현실], <8장. 뱃전에 새긴 흔적>, 탕누어, 2016.


강에 빠뜨린 보검을 돌아오는 길에 찾고자 배의 앞머리에 물높이를 새겨 두었다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가 있다. 
탕누어는 [안전]의 결론인 <8장>의 제목으로 '뱃전에 새긴 흔적'을 삼았다.

'각주구검'의 고사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풍자였지만, 탕누어를 따라 결국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당장의 '눈앞(眼前)' 현실을 '뱃머리에 새겨(刻舟)' 왔고 또 부단하게 새기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의 가록은 '각주구검'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시간'이라는 물결은 어제 우리가 보검을 잃어버린 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데, 지나간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 동일할 수 없겠지만, 역사를 통과하는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자로 '뱃전에 새기는' 것이 아직은 최선이다. 

우리의 인문학자 유시민 선생은 '역사의 역사'를 '역사기록의 역사(History of Writting history)'로 보기도 했다. 
사실들은 '시간'의 강물을 따라 무심히 지나가고,
우리에게는 문자로 '뱃전에 새긴' 기록이 남는다.

그러다 보면 누가 알겠는가.
혹시나 잊었거나 잃었던 '보검'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에릭 홉스봄이 찾고자 했다던 '역사의 일반법칙'(같은책, <8장>)은 고대 중국 공자의 [춘추]와 지금은 원전으로 전하지는 않는다는 이 [춘추]를 지속 수정보완하면서 책으로 전해져 왔다는 [좌전]이 인간사 '눈앞(眼前)'의 관찰과 '뱃전에 새긴' 문자 기록을 통해 이미 수행하기 시작한 것 아닐는지.

***

1. [역사, 눈앞의 현실 / 안전(眼前): 만유재 '좌전'적 세계(漫遊在 '左傳'的 世界](2016), 탕누어(唐諾), 김영문 옮김, <흐름출판>, 2018.
2. [창시자(奠基者;전기자) - 이중톈 중국사 3](2013), 이중톈(易中天),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4.
3. [역사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돌베개>, 20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냉면의 역사 -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그릇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삼 '냉면주의자'로의 귀환
- [냉면의 역사], 강명관, 2025.


"어떤 국수를 가리켜 '냉면'이라 하는가?"
- [냉면의 역사], <1장>, 강명관, 2025.


누군가 내게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며 뭘 먹고 싶은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1초만에 '횟집'을 가자고 말할 것이다. 사시사철 언제 물어도 똑같다.

또한 점심에 뭘 먹겠느냐 묻는다면,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단연 '냉면'이다. 역시 언제든 그렇다.

모두, 나의 취향이자 나의 '이념'과도 같은,
'차가운 음식'이다.

한반도 북쪽에서 오래전부터 먹어왔을 '냉면(冷麵)'은 말 그대로 차가운 국수인데, 우리의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냉면'은 고려말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시에 나오는 '괴엽냉도(槐葉冷淘)'가 최초일 것으로 추정된단다. 실제로는 더 오래 되었겠으나,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고려말에도 이미 '냉면'을 먹었다는 거다.


"... 국수와 동치밋국... 이것이 '냉면'의 핵심요소다... '냉면'은 국수틀을 눌러 뽑아만든 메밀국수를 동치밋국에 말고 김치(무와 배추)를 얹고, 거기에 돼지고기 편육을 올려서 만든 차가운 국수다."
- [냉면의 역사], <1장. 냉면이란 무엇인가>, 강명관, 2025.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명예교수는 냉면을 좋아하여 스스로를 '냉면주의자'로 자칭하다가 2025년 [냉면의 역사]로 책을 엮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냉면'에 대한 '썰'을 풀어내는 게 아니다. 15세기 세종 연간의 [산가요록]과 16세기 이문건의 [묵재일기], 17~18세기 [음식디미방]이나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의 고문헌을 근거로 설명하는 '냉면'에 관한 '역사책'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 같은 식민지 시대의 근대적 기술서와 신문, 잡지 등의 언론기사 역시 주요 근거자료가 된다. 
역사학의 1차 사료는 역시 '문헌' 자료다.

중종과 인종 대 중앙 관료를 역임하다가 을사사화를 겪으며 귀양살던 이문건의 [묵재일기]에서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1558년 4월 20일의 일기에서 이문건이 쓴 "낮잠을 자다 깨어 곧 '냉면'을 먹었더니 발바닥이 차가워졌다"는 문장이 그 출처다.

신라 진흥왕 대에 '차가운 국수'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출처 불문의 전설에 불과하고 고려시대 이색이 먹은 '괴엽냉도'와 조선 중기 이문건이 자다 일어나 먹었다는 '냉면' 또한 차가운 국수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나 과연 어떤 형태의 국수였는지 알 수 없다. 이후 [음식디미방] 등의 한글 조리서는 '세면'과 '창면'의 이름으로 신맛을 내는 오미자 국물에 말아먹는 '냉면'을 추정케 하는데, 이후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냉면'이란 국수틀로 뽑은 '메밀국수(세면)'를 차가운 '동치밋국'에 만 형태로 확인된다.
걸레 빤 물 같고 심심한 물냉면이 평양냉면이고 '비빔국수'의 시조새인 골동면이 조상일 듯한 비빔국수는 함흥냉면이라는 구분은 현대 이후 정착한 형태에 불과하다. 

즉, 원래부터 평안도 중심으로 확산된 '냉면' 또는 '평양냉면'은 '메밀국수를 동치밋국에 말고 배추/무김치와 돼지고기 편육을 고명으로 올린 차가운 국수'를 이르는 말이었고, 당시 보통 '국수'라 하면 이러한 '냉면'을 이르는 보통명사였다.


"국수틀을 눌러 뽑은 메밀국수는 처음에는 간장으로 만든 국물에 말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유구가 말했듯 그것은 장물에 끓여서 내는 온면의 형태였을 것이다. '메밀국수+동치밋국=냉면'은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문헌에 출현한다."
- [냉면의 역사], <끝맺음>, 강명관, 2025.


부산경남의 밀면이나 해산물육수의 진주냉면, 강원도의 막국수, 대중적인 콩국수도 넓게 보면 모두 '냉면'이지만, 문헌상으로 추적되는 엄밀한 '냉면'의 정의와 분류에 의하면, 오로지 국수틀로 뽑아낸 '메밀국수'와 겨울의 '동치밋국', 동치미가 바닥난 여름에 끓여낸 소와 돼지 또는 닭과 꿩고기(생치) 육수인 '장국'이 결합해야 비로소 '냉면'이 된다.

학자인 강명관 교수의 책 [냉면의 역사]에서는 1차 사료인 문헌적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밀면이나 진주냉면, 막국수까지 '냉면'의 엄밀한 정의 밖의 영역이다.


"... 18세기 후반 국수가 팔리고 있었고 서울 시정에 국수를 파는 가게가 등장... 서울만이 아니다. 평안도의 경우 유득공의 <서경잡설>에 '냉면'이 팔리는 정황이 담겨 있어, 이 작품이 지어진 1773년에 이미 '냉면'이 상업화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냉면의 역사], <6장. 냉면의 확산 - 냉면의 상업화>, 강명관, 2025.


10~12세기 북송 시대 인구 100만 명의 '메트로시티' 개봉(카이펑) 중심가를 그린 <청명상하도>를 보면 당시 이미 시장에서 사먹던 외식의 주류는 '국수'였다. 물론 '냉면'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주로 뜨거운 '탕면'이었을 것이지만.

그러다가 중국을 다녀가는 조선 사신단이 한양에서 평양과 의주를 지나 만주를 통과하면서 지역 음식인 국수, 그 중에도 차가운 국수인 '냉면'을 접했을 테고, 사신단에 합류한 상인과 기술자들이 북방에서 본 국수틀을 한양까지 모방하여 들여왔을 게다. 조선 철종이 시켜먹은 '냉면'도 칼국수 같은 '절면'이 아닌 북방의 기술을 모방한 '메밀세면'을 겨울에는 '동치밋국'에, 여름에는 고기장국인 '육수'에, 또는 동치밋국과 고기장국을 섞은 육수에 말아먹던 국수였을 것이다.


"냉면값은 1925년 15전 내외에서 1943년 22전까지 올랐으니 그리 빠르게 인상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소설에 등장한 식민지시대의 급여를 정리한 논문에 의하면, 보통학교 교사가 40~60원, 중학교와 고등보통학교 교사가 60~70원, 기자가 60~80원, 은행원이 60~80원, 기수가 30~40원 정도였다고 한다. 1원은 100전이므로 15~20전 정도의 냉면가격은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 [냉면의 역사], <7장. 근대 이후,냉면의 시대 - 총독부, 가격과 양을 정하다>, 강명관, 2025.


나는 '라면'을 비롯한 모든 국수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역시 '냉면'이다. 회와 냉면 모두 차가운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회냉면 보다는 물냉면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냉면의 역사] <후기>에서 저자 강명관 교수는 20대에 물냉면 한 그릇을 '35초'만에 먹었단다. 
나 또한 즐기면서 먹고 싶어서 그런 거지 50대인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물냉면 한 그릇 쯤이야 1분 내로 다 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매주 토요일 처와 함께 걷는 서울과 경기 인근 나들이길에도 나는 늘 처에게 '냉면'을 먹자고 조른다. 그리고 차가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처는 싫다면서도 같이 냉면을 먹어준다. 나는 항상 물냉면 곱배기, 처는 비빔냉면 보통을 먹는데 처가 남기는 반 그릇도 전부 내 차지니 한 번 나가면 나는 물과 비빔 섞어 2인분을 먹게 된다. 한편, 맛은 어떨지 모르지만 라면과 김치볶음밥 외에 내가 집에서 해 먹는 음식 또한 역시 인스턴트이긴 해도 '냉면'이다. 

냉면을 서울과 평양 등지의 시장에서 팔던 시기는 18세기 중후반 부터라지만, 1895년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수도 서울과 개항지였던 인천 등지에서 냉면을 비롯한 음식점이 성행했다. 이유는 관공서와 현대적 기업의 등장, 전화와 자전거의 발전으로 사작된 배달문화를 통해 직장인과 상류층 가정집의 점심식사 해결의 수요 때문이기도 했다. 
차가운 육수 또는 돼지고기 고명의 부패로 인한 냉면 식중독의 위험은 식초를 쳐서 먹는 관행의 이유였지만, 식중독의 확률이 적어진 지금은 식초와 겨자가 오로지 풍미를 위한 향료가 되었다.
메밀을 반죽하고('반죽꾼'), 국수틀로 뽑아내고('발대꾼'), 찬물로 씻어 그릇에 담고('앞자리'), 육수와 고명으로 포장하고('고명꾼'), 자전거로 하루 19시간 동안 배달을 했던('배달인')-어느 진정한 배달의 달인은 믿거나 말거나 한 번에 80그릇을 나르기도 했다던- 냉면집(면옥)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 스스로의 처우개선를 위한 1920년대 면옥노동조합의 결성과 사용자측인 면옥조합과의 산별교섭 및 파업 등의 역사 또한 [냉면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이야기다. 
과연 '냉면'의 역사는 우리의 중요한 미시사 중 하나가 된다.


"1925년 1월 25일 냉면의 성지인 평양에서 최초의 노조가 만들어졌다... 면옥노동조합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임금인상이었다... 12개의 요구조건... 1) 임금인상(50전 이하는 10전, 50전 이상은 5전을 인상할 것-하후상박), 2) 노동시간은 어후 11시까지로 할 것, 3) 노동조합 회원 이외의 사람은 고용하지 말 것, 4) 해고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노동조합의 승낙을 받을 것 등..."
- [냉면의 역사], <7장. 근대 이후 냉면의 시대 - 면옥노동조합의 활동>, 강명관, 2025.


실제로는 점심메뉴에 대한 동료들과의 의견이 '냉면'으로 일치된 경우가 없어 나의 직장생활 중 점심에 '냉면'을 먹은 적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점심식사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냉면'은 내게 음식이란 이래야('차가워야') 한다는 모종의 '이념' 또는 '강령'과도 같다.

이 정도면 나도 '냉면주의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명관 교수의 [냉면의 역사](2025) 덕분에 나는 새삼 '냉면주의자'로 귀환한다.


"1945~1950년 서울의 냉면점들이 이렇게 평양냉면을 내세운 것은, 일제강점기 서울의 냉면이 이미 평양냉면화되어 있었음을 의미할 터이다. 이 냉면점들은 또 다동, 충무로, 광화문, 명동, 남대문, 관철동, 예지동, 낙원동, 을지로, 시청 앞, 종로 등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서울의 좁은 중심지대 안에 있었다."
- [냉면의 역사], <8장. 8.15 해방 이후의 냉면 - 각지의 냉면점>, 강명관, 2025.

***

1. [냉면(冷麵)의 역사 -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그릇], 강명관, <푸른역사>, 2025.
2.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래를 위한 '실존적 보수(보존)주의' 혹은 '보수(보존)적 실존주의'
- [통섭(統攝/Consilience)], 에드워드 윌슨, 1998.


'통섭(統攝/consilience)' :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
- [통섭](1998), <옮긴이 서문>,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옮김, 2005.


유발 하라리로 촉발된 '빅 히스토리'는 인류의 역사를 '역사학' 자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진화생물학과 기후생태학, 그리고 특히 하라리에게는 '신'의 창조적 영역에 도전하는 미래적 인류의 과학기술과 접목해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관점이었다.
언어와 신화에 의한 1차 '인지혁명'과 밀의 기생유전자에 속은 인류가 정착을 하게 된 2차 '농업혁명', 그리고 현대의 3차 '과학혁명'을 통해 진화해 온 '(호모) 사피엔스'는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미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고대로부터 '신(神)'만이 기획하던 '영생'의 길을 인간 스스로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게 유발 하라리의 '빅 히스토리'적 전망이다.

우리의 지리학자 박정재 교수 또한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진행되어 온 진화사 일체를 기후생태적 지리학의 관점에서 돌아보며, [총,균,쇠](1997)의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사피엔스](2011)의 유발 하라리가 이끄는 '빅 히스토리'가 '인문학'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의 한 분과로서의 역사학 외에도 천문학, 지질학, 기상학, 해상학, 생물학, 인류학, 고고학, 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이 서로 얽혀 진행되는 학제 간 연구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준다"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인류의 역사는 '역사학'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안 된다.

21세기 초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빅 히스토리'의 열풍은 일정 정도는 20세기 말인 1997년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생리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 1937~)의 [총,균,쇠]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사회과학적 '사회문화사' 또는 인문학적 '역사학'의 관점을 넘어 생태학과 기후학, 지리학 등의 관점에서 방대하게 서술하기 시작했다.

생물학, 기후학, 지리학 등의 '자연과학'이 사회학, 정치경제학 등의 '사회과학'과 교차하고, 철학, 문학, 역사학 등의 '인문학'의 차원에서 융합되는 이 과정이 바로 '통섭(統攝/Consilience)'이다. 


우리의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스승인 미국의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 Wilson : 1929~2021)은 1998년의 저서 [통섭]을 통해 이 과정을 '지식의 대통합(The Unity of Knowledge)'이라 규정했다.

[통섭]에서 에드워드 윌슨이 정의하는 '통섭' 관련 대표적 문장들을 몇 가지 인용해 본다.


"'통섭(統攝/consilience)'은 '통일(統一/unification)'의 열쇠이다. 나는 이 용어를 '정합(整合/coherence)'보다 더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통섭'은 '정합'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하나만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섭'이라는 용어는 그 '희귀성' 때문에 그 의미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용어는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이 1840년에 [귀납적 과학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 [통섭], <2장. 학문의 거대한 가지들>, 에드워드 윌슨, 1998.

"... '통섭(統攝/consilience)'... 다른 분야에서 탄탄하게 검증된 지식에 순응하는 어떤 분야의 단위와 과정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일관성'의 측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입증되었다."
- [통섭], <9장. 사회과학>, 에드워드 윌슨, 1998.

"... 한 가지 부류의 설명... 그 설명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수준의 시공간과 복잡성을 넘나들어 결국에 '통섭'이라는 방법으로 여러 분과들의 흩어진 사실들을 통일한다. '통섭'은 '봉합선이 없는 인과관계의 망'이다."
- [통섭],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에드워드 윌슨, 1998.

"'통섭(統攝/Consilience)' 세계관의 요점은 인간 종의 고유한 특성인 문화가 자연과학과 인과적인 설명으로 연결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여러 과학 분과들 중에서 특히 '생물학'은 이런 연결의 최전선에 있다."
- [통섭], <12장>, 에드워드 윌슨, 2005.


지금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을 안겨주었다던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 1794~1866)이 처음 사용했다는 '통섭'은 원어로 'consilience'인데,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지식의 대통합'을 'unification(통일)'이나 'coherence(정합)'보다 'consilience(통섭)'으로 선택했다. 이유는 우리말로 잘 이해가 어렵기는 하나,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하나만을 뜻하기 때문"이며 '희귀성'으로 "그 의미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 쓰고 있다([통섭], <2장>).

아마도 일반 용어로 '합일(合一)'이라고 번역될 수 있을 'consilience'가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한국 제자인 최재천 교수에 의해 '통섭(統攝)'으로 번역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통섭]의 <옮긴이 서문>에서 저자 윌슨의 위와 같은 용어선택 사상을 이어받아 고심 끝에 '통일'이나 '정합'이 아닌 '통섭'으로 정한 듯 한데, 과연 '통섭'이라는 단어 자체가 '희귀성'을 갖고 있기는 하다.

'통섭'에 관한 위 인용문들을 통해 내가 이해하는 '지식의 대통합'으로서 '통섭'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희귀성'으로 인한 의미 보존.
둘째, 자연과학적 '귀납추론'을 통한 엄밀성.
셋째,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영역에서도 여전히 탄탄하게 검증되는 '일관성'.

위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에드워드 윌슨이 정의하는 '통섭'은 "설명의 공통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대)통합'하는 것"([통섭], <2장>)이 된다.


"과학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류가 뽑아든 마지막 검(劍)이다."
- [통섭], <4장. 자연과학>, 에드워드 윌슨, 1998.


'통섭'을 주장하면서 생물학자로서 에드워드 윌슨은 자연과학의 한 분야인 '생물학'을 '최전선'([통섭], <12장>)에 둔다. 

그에게 '사회과학'은 그 자신의 영역에만 머무는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더욱 매몰된 결과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여러 수준들을 관통하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이 실패로 인해 '사회과학'은 "진정한 과학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통섭], <9장. 사회과학>). 
자연과학자 윌슨에게 그나마 '과학'적으로 간주되는 사회과학 분야는 고도의 수학적 모델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다. 물론 이런 경제학 또한 자신의 영역에만 머무는 '환원주의'로는 안되고 인간의 '뇌'와 '유전자'를 연구하는 '생물학'과 '마음'을 연구하는 '마음의 과학'인 '심리학'과 융합되어야 진정한 과학이론이 된다. 
현재 주류 경제학에서도 요원한 길이다.

'생물학', 세부적으로 '뇌과학', '진화생물학' 등의 귀납적인 과학의 연구방법을 우선시하지만, 다소 부족한 사회과학도 위와 같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통해 일관된 인과관계의 연결망을 구성하면서 과학이 이룬 이 지식의 성과들을 인류사에 적용하는 '인문학'의 지휘 하에 '일관성'의 이름으로 대통합되는 지식의 본연이 바로 에드워드 윌슨이 주장하는 '통섭'이다.


"수십만 년의 구석기 역사 속에서 인간의 특정한 '후성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점점 증가해 종 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수고 덕분에 '인간 본성'이 탄생한 것이다."
- [통섭],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 에드워드 윌슨, 1998.


이로 인해 인류사의 '빅 히스토리'는 '유전자'와 '문화'의 상호작용으로 '인간 본성'을 구명할 수 있게 된다. '인간 본성'이란 선험적이거나 '초월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유전자의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연선택'의 유구한 시간이 각인된 특질들이 수십만 년의 유전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전해지고 새겨지며 일정의 '대수의 법칙'처럼 예측되는 일종의 '후성규칙'이다. 이것이 과학자로서의 윌슨이 '인간 본성'에 관해 주장하는 '귀납적'이자 '유물론'적인 규정인 것이다.

'예술'은 인류의 오래된 '본성' 중 하나인데, 예술에 대한 '해석'은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이며, '유전자'와 '문화'의 '공(共)진화'는 윌슨이 보기에 '뇌과학', '심리학', '진화생물학'의 "연구결과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과정"([통섭], <10장>)이다.


"윤리적 격률은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신의 계시나 인간 세계 바깥에서 오는 천상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르다. 또 그것은 정신의 비물질적 차원에서 울려 퍼지는 독립적인 진리와도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뇌'와 '문화'의 '물리적 산물'에 가깝다. 자연과학들에 대한 '통섭(統攝/Consilience)'적 관점에서 보면 윤리적 격률은 사회 계약의 원리들이 규칙들과 명령들로 굳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원들이 다른 이들도 이에 따르기를 바라면서 기꺼이 공동선을 위해 받아들이는 행동 코드들인 것이다.'
- [통섭], <11장. 윤리와 종교>, 에드워드 윌슨, 1998.


이렇게 '생물학'과 '인문학'의 '통섭'으로 보는 '윤리적 격률' 또한 '뇌'와 '문화'의 "물리적 산물"([통섭], <11장>)이 된다. 
"관념은 인간 두뇌라는 물질이 만든 최고의 '물질적 산물'이다"라고 단언한 20세기 초의 혁명가이자 변증법적 유물론자였던 레닌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렇게 원래 '철학'의 이름으로 원시 '과학'들이 통합되어 있던 고대 그리스 사상은 현재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환원주의'를 거쳐 다시 미래의 '통섭'으로 '재통합'되는데, 윌슨은 이를 '이오니아의 마법(Ionian Enchantment)'이라고 부른다([통섭], <1장>).


"우리는 새로운 (보수적/보존적) '실존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나 사르트르의 (개인주의적) 낡은 부조리적 '실존주의'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통합된 지식'(통섭/統攝/Consilience)만이 정확한 예견과 현명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는 '실존주의' 말이다... '통합된 지식 체계'(통섭)는 아직 탐구되지 못한 실제 영역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 [통섭], <12장>, 에드워드 윌슨, 1998.


이제, 20세기 말의 '통섭'적 '빅 히스토리'를 주장하는 윌슨의 결론이다.

20세기 말의 그가 전망하는 인류의 미래는 기후생태 위기로 인해 다소 암울하지만, 21세기 초 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호모 데우스'를 가정하는 유발 하라리 못지 않게 낙관적이다. 
세계인구 60억 명이었던 20세기 말에 윌슨이 예상한 25년 후의 세계인구는 80억 명이었다. 지금 2025년의 세계 총인구는 결국 82억 명 이상이 되었고, 25년 전 윌슨의 결론은 인류가 '통섭'을 통해 기후위기를 제어해야 하고 또한 그럴 능력이 있다는 희망이었다.

에드워드 윌슨은 결론에서 '보수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보수주의'는 영미식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지상주의'가 아니다. 지구환경과 인류생존을 지키는 '보수주의', 즉 '보존주의'([통섭], <12장>)를 의미한다.

여기에 '개인주의적' 실존주의를 넘어 인류의 '실존'을 고민하는 인류의 철학으로서 집단적 '실존주의'가 이어서 등장한다. 

물리학과 화학이 오래전 생물학의 발전을 견인했듯,
이제는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유전자공학 같은 생물학이 사회과학을 견인하고,
궁극에는 인문학의 차원에서 '통섭'이라는 '지식의 대통합'을 이루는 세계관.

'통섭'의 이름으로 이렇게 결합된 '보수(보존)적 실존주의' 또는 '실존적 보수(보존)주의'가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1998)의 결론으로 말하는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는 사상이다.


"정말 자유로운 최초의 종인 호모 사피엔스는 우리를 만들어 낸 자연선택을 해제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의지 바깥에는 유전적 숙명도, 우리의 갈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별도 없다. 인간 본성과 인간 역량의 유전적 진보를 포함하는 진화는 이제부터 도덕적, 정치적 결정으로 조절되는 과학기술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고 어떻게 되고 싶은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은 끝났다. 이제 메피스토펠레스의 진짜 음성을 듣게 되리라."
- [통섭], <12장>, 에드워드 윌슨, 1998.

***

1. [통섭(統攝/Consilience) - 지식의 대통합](1998), Edward Osborne Wilson,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
2. [사피엔스](2011),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1.
3. [호모 데우스(Homo Deus)](2015), 유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문학과 사상사>, 2017.
4. [총,균,쇠](1997), 제러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역, <문학과 사상사>, 1998.
5. [기후의 힘], 박정재, <바다출판사>, 20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현실주의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지음, 김영선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셸 푸코의 '르네 마그리트論'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미셸 푸코, 1973.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공간 '부재', 글씨의 기호들과 이미지의 선들 사이의 '공통의 자리(진부한 상투어)'의 말소이리라. 파이프에 이름을 붙여주는 언표와 그것을 형상화해야 하는 데생의 공동 소유물이었던 '파이프', 형태의 윤곽과 말들의 섬유물을 교차시켜 놓고 있던 그 유령 파이프는 결정적으로 달아나 버렸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2. 흐트러진 칼리그람>, 미셸 푸코, 1973.


1990년에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 선생이 독학을 위해 번역해 둔 원고를 문학평론가 정과리 선생이 발문을 붙이고 다듬어서 낸 책이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lt : 1926~1984)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73)라는 짧은 미술 비평문이다.

고전 철학이 지향해 온 '본질'을 해부하고 분열시킨 현대철학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서, 미셸 푸코는 '본질'을 향한 '일자'와 '동일성'의 고전 철학을 해체하면서 그 '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식의 고고학](1969)을 선언했다. 근대 독일관념철학을 집대성한 철학자 헤겔의 말마따나 형식은 다를지라도 내용에서는 종교와도 같은 근대의 고전 철학에서 '말'과 '사물', '현상' 등은 궁극의 '본질'에 종속되고 근원으로서의 '본질'로부터 위계화되면서 하나(일자)로서 동일화되었다. 그러나 푸코 같은 20세기 프랑스 현대철학자에게 사물은 그 자체의 실체적인 '본질'은 알 수 없고 '말(언어)'이든 표면적 '현상'이든 이미지든 사물을 지시하는 모든 양태들은 그 자체로 독립된 위치에 있다. 푸코가 연구한 '지식의 고고학'은 바로 이 '동일성'의 고전 철학과 결별하는 해체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초기적 연구였고,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말과 사물](1966)은 그 형이상학적 연구의 준비 작업적인 사전 궤적이었다.

김현 선생이 홀로 번역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73)라는 푸코의 '미술 비평'은 이런 초기 푸코 사상을 담은 책으로서, 이른바 미셸 푸코의 '르네 마그리트論'이다.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는 미셸 푸코와 편지도 주고받던 사이로 현실의 '재현' 속에서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신비스럽고 기묘한 그림으로 표현한 작가다. 그는 초현실주의 1차 선언 시절의 대표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 1888~1978)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신만의 독특하고 지적인 화풍을 오래도록 내내 이어갔다.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에서 규정한 '초현실주의'는 "순수한 심령의 '자동주의'를 통한... 사고활동에 의한 표현"으로서 "아무런 이성의 통제가 없는" 사고활동이었으나, 후반기 초현실주의 화가에 속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화풍은 다분히 지적이고 이성적 분석이 수반되는 일종의 '철학적 회화'였다.

그렇게 마그리트는 푸코와 철학의 지면에서 만난다.


"어디에도 파이프는 없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2>, 미셸 푸코, 1973.


푸코의 미술 비평 '마그리트론(論)'의 중심 소재는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이다. 1929년인가부터 반복적으로 수차례 그려진 이 그림에는 일반적 파이프 그림과 함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장이 일종의 '칼리그람(문자로 된 그림)'처럼 박혀있다. 그래서 원제목 <이미지의 배반>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종종 불리는데, 화가가 그린 파이프는 진정한 파이프가 아니라 그 이미지에 불과하며, 그 이미지는 해당 사물과 동일하지도 않고, 인간의 말 또는 글로 표현된 파이프 또한 그러하다는 '포스트-모던'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1966)이나 [지식의 고고학](1969)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철학적 메시지를 미술로서 표현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마그리트는 '유사(類似:ressemblance)'에서 '상사(相似:similitude)'를 분리해 내고, 후자(상사)를 전자(유사)와 반대로 작용하게 하는 것 같다. 유사에는 '주인'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 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하다('상사')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 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되풀이'에 쓰이며, '되풀이'는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모델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모델을 다시 이끌고 가 인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부터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모의(模擬:simulacre:시뮬라크르)'를 순환시킨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확언의 일곱 봉인>, 미셸 푸코, 1973.


그렇게 사물로서의 '파이프'도 아니고, 이미지(그림)로서 '파이프'에 불과하나, 이를 언어로 표현한 '파이프' 또한 그것들과 동일하지 않으니, 결론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본질'로서의 '파이프'를 그림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니 원래 '파이프'라는 사물의 '본질'은 알 수 없는 '불가지론'의 영역이고, 우리가 보거나 그리거나 표현한 현상과 행위들만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김현 선생이 '모의'라고 번역한 '시뮬라크르(표면적 현상)'를 강조하는 20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다.


"동일성을 뒤섞는 대신에 '상사'가 그것들을 깨뜨리는 힘을 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미셸 푸코, 1973.


'말'이든 '이미지'든 파이프는 '본질'로 동일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파이프는 어디에도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철학을 미술에서 아주 잘 표현해내고 있는 마그리트에 대한 헌사인 듯, 미셸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몇 가지 대표작을 이 책에서 함께 평론하고 있다.

<대화의 기술> - 1950.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사물의 형태 속에 담론이 새겨진 경우였다. 그것은 부정하고 분할하는 모호한 힘이었다. 반면, <대화의 기술>, 그것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들 고유의 말을 이루어 내고,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화를 그들의 일상적 수다 속에 심어 넣는 사물들의 자체 중력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4. 말들의 은밀한 작업>, 미셸 푸코, 1973.

<이미지의 배반>처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꿈(reve)'이라는 언어적 상징물 앞에서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설령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침묵 속에서 몽환적 상상력을 확산시킨다.
과연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떨어지는 저녁> - 1964.

"... 이미지와 말들의 풀릴 길 없이 얽힌 그물망, 그리고, 그것들을 받쳐줄 수 있을 공통 영역의 '부재'에 근거하고 있다. (마그리트에 의하면)... '그림에서 말들은 이미지와 마찬가지의 실체들이다. 그림에서의 이미지와 말들은 보통 때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4>, 미셸 푸코, 1973.

<떨어지는 저녁>(1964)과 <자유로 가는 문>(1933)에서는 깨져서 파편화된 유리창의 조각을 통해 새겨진 원래의 풍경이 엿보이는데, 유리창에 투영된 해와 나무의 사물과 풍경이 원래의 그 사물풍경인지 이미지인지, 그리고 나의 눈에 비친 그 영상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모호하다.
'본질'은 무엇인가? 
'현상'과 '이미지'는 또 무엇인가?

<레카미에 부인>, <발코니> - 1950~1951.

"... 그는 전통회화의 인물들을 관(棺)으로 바꿔 놓는다. 밀랍 먹인 떡갈나무 널빤지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담겨진 공허가 산 육체들의 부피, 드레스의 펼쳐짐, 시선의 방향, 막 말을 하려던 참의 그 모든 표정들이 이루고 있는 공간을 해체하면서, 그 '비-장소'가 '사람이나 되는 듯 제 스스로' 출현한다 - 인물들 대신에, 그리고 더 이상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그 장소에서."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4>, 미셸 푸코, 1973.

자크 루이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에서 부인의 초상과 에두아르 마네의 <발코니> 속 세 인물들은 마그리트에 와서 '관'으로 대체된다. 유한한 인물은 현재의 형상 뿐만 아니라 그의 미래가 투영된 삶의 궤적으로서 결국에는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관'을 통해 설명된다. 인물은 '부재'하지만, '관'은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보여준다.

<재현> - 1962.

"... 똑같은 화폭 위에, 이와 같이 '상사' 관계에 의해 옆으로 연결된 두 개의 이미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델을 바깥의 준거틀로 설정하는 것(유사성의 길을 통하는)은 곧장 불안해지고,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것이 되고 만다. 무엇이 무엇을 '재현'한단 말인가? 이미지의 정확성이 한 모델, 즉 외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고한 '주인'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는 반면, 상사체들의 (두 개 이상의) 계열은 이상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유사 재현의) 군주제를 폐지한다. 이때부터 '모의(시뮬라크르)'는 언제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표면 위를 달린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미셸 푸코, 1973.

같은 시공간에서 하나의 화면이 작은 화면으로 무한히 복제되고 '재현'된다. '유사'적 '재현'이 아닌 이 '상사'적 '되풀이'는 두 번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이 '상사'적 되풀이를 통해 무한히 증식되고 확장되는 '재현'의 가능성을 본다.

<데칼코마니> - 1966.

"... 유사성의 재생산은 아닌 것... '유사'에 대한 '상사'의 우월성... '유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인지하게 하지만, '상사'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는, 못 보게 하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한다. '유사'는 단일한, 언제나 똑같은 단언을 내포한다... '상사'는 상이한 확언들을 배가시킨다. 그 확언들은 함께 춤춘다. 서로 기대면서, 서로의 위에 넘어지면서."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미셸 푸코, 1973.

그리하여, '상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트롱프뢰유' 같은 붉은 커튼 배경과 대비하여, 사물과 비슷한 현상들을 표현하면서 사물의 이면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확장되는 '상사'적 재현은 무한하다.

결국, 마그리트의 <재현(복제) 금지>(1937)라는 작품은 거울을 보고 있음에도 사물이 '있는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절대 불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마그리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자화상'과 같은 중절모를 쓴 정장의 신사는 아마도 그의 '본질'을 담고 있을 듯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한다. 
<사람의 아들>(1964)로 지칭된 그 신사는 인류를 구원한 예수와도 같다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근대의 '신'이 부재한 현대의 자리에서 '사람의 아들'은 바로 '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언어 기호와 조형 요소들을 연결시키는데, 그러나, 어떠한 선행 동위소(동일성의 요소)도 설정하지 않는다. 그는 '유사'가 태연하게 근거하고 있는 (고전 회화의) 확언적 담론의 바탕을 회피한다. 그리고 그는 지표 없는 용적과 구도 없는 공간의 불안정 속에서 비확언적인 순수 '상사체'들과 '말의 언표'들을 놀이하게 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말하자면, 바로 그 작동 절차의 기본 형식을 제공한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6. 그림은 확언이 아니다>, 미셸 푸코, 1973.


르네 마그리트는 고전 회화의 전통인 '본질'에 위계적인 '유사'적 '재현'을 초월하여 '본질'과 '현상'이 위계화되지 않고 각 층위에서 동등하게 존재하는 '상사'의 상상력을 통해 무한한 '재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푸코가 '마그리트론'의 <6장>에서 결론으로 내세운 5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누구나 아는 '공통의 자리'에 칼리그람 실천
2. '유사'가 아닌 '상사'로서 칼리그람이 해체되어 빈 공간을 열기
3. 담론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적인 문자 형태를 얻어 그 자체로 불확실하고 무한하게 얽키고 설키며 '상식적'으로 보이던 공통의 공간 '부재'를 드러내기
4. 근원적 '본질'로 회귀되지 않는 '상사체'들이 자신으로부터 무한하게 증식
5. 유사의 재현 속에 감추어진 메시지가 순환하는 '상사체'로 되었는지 검증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위와 같이 '재현'되는 현실은 다음과 같은 푸코의 철학적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6>, 미셸 푸코, 1973.


현대철학과 함께 하는 초현실주의 회화의 '재현'은 그래서 더욱 무한하다.

***

1.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1973), Michel Foucault, 김현 옮김, 정과리 발문, <고려대학교출판부>, 2010.
2. [지식의 고고학](1969), 미셸 푸코,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3. [말과 사물 - 인문과학의 고고학](1966),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4. [초현실주의(Surrealism)](2008),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김영선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개정판
미셸 푸코 지음, 김현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셸 푸코의 '르네 마그리트論'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미셸 푸코, 1973.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공간 '부재', 글씨의 기호들과 이미지의 선들 사이의 '공통의 자리(진부한 상투어)'의 말소이리라. 파이프에 이름을 붙여주는 언표와 그것을 형상화해야 하는 데생의 공동 소유물이었던 '파이프', 형태의 윤곽과 말들의 섬유물을 교차시켜 놓고 있던 그 유령 파이프는 결정적으로 달아나 버렸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2. 흐트러진 칼리그람>, 미셸 푸코, 1973.


1990년에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 선생이 독학을 위해 번역해 둔 원고를 문학평론가 정과리 선생이 발문을 붙이고 다듬어서 낸 책이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lt : 1926~1984)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73)라는 짧은 미술 비평문이다.

고전 철학이 지향해 온 '본질'을 해부하고 분열시킨 현대철학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서, 미셸 푸코는 '본질'을 향한 '일자'와 '동일성'의 고전 철학을 해체하면서 그 '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식의 고고학](1969)을 선언했다. 근대 독일관념철학을 집대성한 철학자 헤겔의 말마따나 형식은 다를지라도 내용에서는 종교와도 같은 근대의 고전 철학에서 '말'과 '사물', '현상' 등은 궁극의 '본질'에 종속되고 근원으로서의 '본질'로부터 위계화되면서 하나(일자)로서 동일화되었다. 그러나 푸코 같은 20세기 프랑스 현대철학자에게 사물은 그 자체의 실체적인 '본질'은 알 수 없고 '말(언어)'이든 표면적 '현상'이든 이미지든 사물을 지시하는 모든 양태들은 그 자체로 독립된 위치에 있다. 푸코가 연구한 '지식의 고고학'은 바로 이 '동일성'의 고전 철학과 결별하는 해체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초기적 연구였고,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말과 사물](1966)은 그 형이상학적 연구의 준비 작업적인 사전 궤적이었다.

김현 선생이 홀로 번역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73)라는 푸코의 '미술 비평'은 이런 초기 푸코 사상을 담은 책으로서, 이른바 미셸 푸코의 '르네 마그리트論'이다.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는 미셸 푸코와 편지도 주고받던 사이로 현실의 '재현' 속에서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신비스럽고 기묘한 그림으로 표현한 작가다. 그는 초현실주의 1차 선언 시절의 대표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 1888~1978)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신만의 독특하고 지적인 화풍을 오래도록 내내 이어갔다.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에서 규정한 '초현실주의'는 "순수한 심령의 '자동주의'를 통한... 사고활동에 의한 표현"으로서 "아무런 이성의 통제가 없는" 사고활동이었으나, 후반기 초현실주의 화가에 속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화풍은 다분히 지적이고 이성적 분석이 수반되는 일종의 '철학적 회화'였다.

그렇게 마그리트는 푸코와 철학의 지면에서 만난다.


"어디에도 파이프는 없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2>, 미셸 푸코, 1973.


푸코의 미술 비평 '마그리트론(論)'의 중심 소재는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이다. 1929년인가부터 반복적으로 수차례 그려진 이 그림에는 일반적 파이프 그림과 함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장이 일종의 '칼리그람(문자로 된 그림)'처럼 박혀있다. 그래서 원제목 <이미지의 배반>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종종 불리는데, 화가가 그린 파이프는 진정한 파이프가 아니라 그 이미지에 불과하며, 그 이미지는 해당 사물과 동일하지도 않고, 인간의 말 또는 글로 표현된 파이프 또한 그러하다는 '포스트-모던'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1966)이나 [지식의 고고학](1969)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철학적 메시지를 미술로서 표현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마그리트는 '유사(類似:ressemblance)'에서 '상사(相似:similitude)'를 분리해 내고, 후자(상사)를 전자(유사)와 반대로 작용하게 하는 것 같다. 유사에는 '주인'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 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하다('상사')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 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되풀이'에 쓰이며, '되풀이'는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모델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모델을 다시 이끌고 가 인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부터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모의(模擬:simulacre:시뮬라크르)'를 순환시킨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확언의 일곱 봉인>, 미셸 푸코, 1973.


그렇게 사물로서의 '파이프'도 아니고, 이미지(그림)로서 '파이프'에 불과하나, 이를 언어로 표현한 '파이프' 또한 그것들과 동일하지 않으니, 결론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본질'로서의 '파이프'를 그림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니 원래 '파이프'라는 사물의 '본질'은 알 수 없는 '불가지론'의 영역이고, 우리가 보거나 그리거나 표현한 현상과 행위들만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김현 선생이 '모의'라고 번역한 '시뮬라크르(표면적 현상)'를 강조하는 20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다.


"동일성을 뒤섞는 대신에 '상사'가 그것들을 깨뜨리는 힘을 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미셸 푸코, 1973.


'말'이든 '이미지'든 파이프는 '본질'로 동일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파이프는 어디에도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철학을 미술에서 아주 잘 표현해내고 있는 마그리트에 대한 헌사인 듯, 미셸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몇 가지 대표작을 이 책에서 함께 평론하고 있다.

<대화의 기술> - 1950.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사물의 형태 속에 담론이 새겨진 경우였다. 그것은 부정하고 분할하는 모호한 힘이었다. 반면, <대화의 기술>, 그것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들 고유의 말을 이루어 내고,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화를 그들의 일상적 수다 속에 심어 넣는 사물들의 자체 중력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4. 말들의 은밀한 작업>, 미셸 푸코, 1973.

<이미지의 배반>처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꿈(reve)'이라는 언어적 상징물 앞에서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설령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침묵 속에서 몽환적 상상력을 확산시킨다.
과연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떨어지는 저녁> - 1964.

"... 이미지와 말들의 풀릴 길 없이 얽힌 그물망, 그리고, 그것들을 받쳐줄 수 있을 공통 영역의 '부재'에 근거하고 있다. (마그리트에 의하면)... '그림에서 말들은 이미지와 마찬가지의 실체들이다. 그림에서의 이미지와 말들은 보통 때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4>, 미셸 푸코, 1973.

<떨어지는 저녁>(1964)과 <자유로 가는 문>(1933)에서는 깨져서 파편화된 유리창의 조각을 통해 새겨진 원래의 풍경이 엿보이는데, 유리창에 투영된 해와 나무의 사물과 풍경이 원래의 그 사물풍경인지 이미지인지, 그리고 나의 눈에 비친 그 영상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모호하다.
'본질'은 무엇인가? 
'현상'과 '이미지'는 또 무엇인가?

<레카미에 부인>, <발코니> - 1950~1951.

"... 그는 전통회화의 인물들을 관(棺)으로 바꿔 놓는다. 밀랍 먹인 떡갈나무 널빤지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담겨진 공허가 산 육체들의 부피, 드레스의 펼쳐짐, 시선의 방향, 막 말을 하려던 참의 그 모든 표정들이 이루고 있는 공간을 해체하면서, 그 '비-장소'가 '사람이나 되는 듯 제 스스로' 출현한다 - 인물들 대신에, 그리고 더 이상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그 장소에서."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4>, 미셸 푸코, 1973.

자크 루이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에서 부인의 초상과 에두아르 마네의 <발코니> 속 세 인물들은 마그리트에 와서 '관'으로 대체된다. 유한한 인물은 현재의 형상 뿐만 아니라 그의 미래가 투영된 삶의 궤적으로서 결국에는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관'을 통해 설명된다. 인물은 '부재'하지만, '관'은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보여준다.

<재현> - 1962.

"... 똑같은 화폭 위에, 이와 같이 '상사' 관계에 의해 옆으로 연결된 두 개의 이미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델을 바깥의 준거틀로 설정하는 것(유사성의 길을 통하는)은 곧장 불안해지고,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것이 되고 만다. 무엇이 무엇을 '재현'한단 말인가? 이미지의 정확성이 한 모델, 즉 외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고한 '주인'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는 반면, 상사체들의 (두 개 이상의) 계열은 이상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유사 재현의) 군주제를 폐지한다. 이때부터 '모의(시뮬라크르)'는 언제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표면 위를 달린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미셸 푸코, 1973.

같은 시공간에서 하나의 화면이 작은 화면으로 무한히 복제되고 '재현'된다. '유사'적 '재현'이 아닌 이 '상사'적 '되풀이'는 두 번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이 '상사'적 되풀이를 통해 무한히 증식되고 확장되는 '재현'의 가능성을 본다.

<데칼코마니> - 1966.

"... 유사성의 재생산은 아닌 것... '유사'에 대한 '상사'의 우월성... '유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인지하게 하지만, '상사'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는, 못 보게 하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한다. '유사'는 단일한, 언제나 똑같은 단언을 내포한다... '상사'는 상이한 확언들을 배가시킨다. 그 확언들은 함께 춤춘다. 서로 기대면서, 서로의 위에 넘어지면서."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5>, 미셸 푸코, 1973.

그리하여, '상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트롱프뢰유' 같은 붉은 커튼 배경과 대비하여, 사물과 비슷한 현상들을 표현하면서 사물의 이면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확장되는 '상사'적 재현은 무한하다.

결국, 마그리트의 <재현(복제) 금지>(1937)라는 작품은 거울을 보고 있음에도 사물이 '있는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절대 불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마그리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자화상'과 같은 중절모를 쓴 정장의 신사는 아마도 그의 '본질'을 담고 있을 듯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한다. 
<사람의 아들>(1964)로 지칭된 그 신사는 인류를 구원한 예수와도 같다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근대의 '신'이 부재한 현대의 자리에서 '사람의 아들'은 바로 '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언어 기호와 조형 요소들을 연결시키는데, 그러나, 어떠한 선행 동위소(동일성의 요소)도 설정하지 않는다. 그는 '유사'가 태연하게 근거하고 있는 (고전 회화의) 확언적 담론의 바탕을 회피한다. 그리고 그는 지표 없는 용적과 구도 없는 공간의 불안정 속에서 비확언적인 순수 '상사체'들과 '말의 언표'들을 놀이하게 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말하자면, 바로 그 작동 절차의 기본 형식을 제공한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6. 그림은 확언이 아니다>, 미셸 푸코, 1973.


르네 마그리트는 고전 회화의 전통인 '본질'에 위계적인 '유사'적 '재현'을 초월하여 '본질'과 '현상'이 위계화되지 않고 각 층위에서 동등하게 존재하는 '상사'의 상상력을 통해 무한한 '재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푸코가 '마그리트론'의 <6장>에서 결론으로 내세운 5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누구나 아는 '공통의 자리'에 칼리그람 실천
2. '유사'가 아닌 '상사'로서 칼리그람이 해체되어 빈 공간을 열기
3. 담론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적인 문자 형태를 얻어 그 자체로 불확실하고 무한하게 얽키고 설키며 '상식적'으로 보이던 공통의 공간 '부재'를 드러내기
4. 근원적 '본질'로 회귀되지 않는 '상사체'들이 자신으로부터 무한하게 증식
5. 유사의 재현 속에 감추어진 메시지가 순환하는 '상사체'로 되었는지 검증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위와 같이 '재현'되는 현실은 다음과 같은 푸코의 철학적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6>, 미셸 푸코, 1973.


현대철학과 함께 하는 초현실주의 회화의 '재현'은 그래서 더욱 무한하다.

***

1.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1973), Michel Foucault, 김현 옮김, 정과리 발문, <고려대학교출판부>, 2010.
2. [지식의 고고학](1969), 미셸 푸코,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3. [말과 사물 - 인문과학의 고고학](1966),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4. [초현실주의(Surrealism)](2008),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김영선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