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역사 - 지식을 향한 욕망의 문화사 Philos 시리즈 36
앤드루 페티그리.아르트휘르 데르베뒤언 지음, 배동근.장은수 옮김, 장은수 해제 / arte(아르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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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도서관의 '반전(irony)'
- [도서관의 역사], 앤드류 페테그리 외, 2021.


1.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 둘째딸과 토요일마다 마을 도서관에 온다. 
여름방학에도 학교 갈 시간 즈음에 깨워 마치 학교 가듯이 데리고 오려고 했으나 매번 쉽지는 않다. 토요일 오전의 동네 도서관에서 며칠 전 빌린 책을 반납하기 전에 서평을 쓰고 또 다른 책을 빌리는 내게는 이 더운 여름에 도서관만한 피서지가 없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마다 미적거리는 나의 둘째딸은 이 '피서지'로 영 가기 싫은 눈치다.

하긴, 도서관을 좋아라 하는 내게도 한때 해야 하는 '공부'를 위해 찾았던 도서관은 답답하기 그지없던 장소였으니, 열아홉 인생 최초로 갑갑한 일상을 버텨야 하는 고3 수험생에게 도서관이 반가울리 만무할게다.

그러던 중 근대적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룬 괴테의 [파우스트]를 반납하고는 잠시, 
'도서관'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던 나의 눈에 들어온 책이 마침, 
[도서관의 역사]였다.


2.

"지식축적의 욕망은 지식접근권을 통제하려는 욕망 또는 독자 '계몽'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려는 욕망과 경합했다."
- [도서관의 역사], <프롤로그>, 앤드류 페테그리 외, 2021.


커뮤니케이션의 역사가 주요 연구대상인 영국의 역사학자 앤드류 페테그리(Andrew Pettegree)가 설립한 '국제약식서명목록(USTC;Universal Short Title Catalogue)'은 17세기 이전 유럽의 인쇄출판물을 연구하는 단체인데, 창립자 앤드류 페테그리와 USTC의 부소장 아르트휘르 데르베뒤언(Arthur der Weduwen)이 2021년에 출간한 [도서관의 역사(The Library)]의 노란색 표지가 그 때 나의 눈에 띄었던 거다.


[도서관의 역사 - 지식을 향한 욕망의 문화사](2025)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는 [The Library - A Fragile History](2021)다. 직역하면, '도서관의 세밀한 역사' 또는 '도서관 정밀사' 정도 되겠다. 그만큼 6백 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의 이 책에는 인류의 역사에서 '도서관'을 발전시켜 온 수많은 인물들의 노고가 가득 소개되고 있다. 19세기 대서양 양안에서 영미 공공 도서관 문화가 만개할 수 있게 한 그 유명한 카네기 뿐만 아니라 근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이후의 유명한 도서관 사서 관료들의 활약은 물론, 각종 대학도서관을 키워낸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아르헨티나의 국립도서관장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의 [독서의 역사](1996)를 통해 '책'과 '읽기'의 역사를 충분히 일별했다고 생각하던 내게 '도서관의 역사'는 좀더 넓은 '책'과 '도서관'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도서관의 역사]의 공동 번역자인 장은수 전 민음사 대표는 국역판 <해제>에서, 이 책에 가장 빈번히 나오는 단어가 '반전(irony)'이라고 쓰고 있다. 
즉, 도서관은 인류 지식을 독점하려는 당대 권력의지의 소산으로서 지식통제와 지식계몽의 모순된 목표를 향했고, 권력이동 과정에서 철저히 파괴되곤 했지만 오히려 기존에 탄압당하던 공간을 통해 은신하기도 했다는, 온갖 '반전(irony)'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의 동력이 그렇듯,
'도서관의 역사' 또한 '모순'과 '반전'이 그 동력이다.


"... 그러나 전쟁의 승패가 바뀌면 불가피하게 그 도서관은 정당한 제거대상이 됐다. 승리자들은 도서관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패배집단의 정당성도 함께 무너뜨렸다. 약탈당한 책은 전리품으로 정복자의 고국에 있는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 모든 '반전(irony)'의 반전은 비록 난폭한 방식이었으나 '책'의 힘을 입증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툼의 주역 중에 누구도 '책'에 사람을 바꾸고 삶을 이끌며 의문을 해결하는 힘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책'들은 종종 성스러운 권력에 대항했다가 오히려 의심을 사서 의식적 수모와 함께 죽임을 당했던 선교사들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 전쟁을 위한 무기는 다양하다. 어떤 무기는 무시무시한 모습만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그 은밀함이 무기가 된다. 17세기와 18세기에 '도서관'을 둘러싼 전쟁도 그랬다."
- [도서관의 역사], <3-9. 선교의 장>, 앤드류 페테그리 외, 2021.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고대 기원전 아시리아를 무너뜨린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 니네베 도서관의 모든 점토판을 파괴하면서 이전 권력의 미래를 빼앗고자 했다. 고대 로마는 초기 기독교의 양피지를 탄압했다. 중세 가톨릭은 '이단'의 책(코덱스)들을 역시 불태웠고, 그 후 '종교개혁' 시기와 숱한 전쟁, 특히 20세기 세계대전 총력전은 셀 수 없는 책들을 파괴하고 훼손시켰으며 약탈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도서관의 역사]는 위와 같은 "전쟁이나 악의보다 방치가 더 무서운 적"(같은책, <1-1>)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로마의 박해에도 책은 수도원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종교전쟁 속에서도 책은 반대파의 서재 궤짝에서 잠을 잤다.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의 수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특수부대가 약탈한 수많은 책들 대신 소련을 비롯한 승전국들은 그 이상의 책들을 패전국 독일로부터 빼앗아 복수했다. 또한 인쇄기술 및 출판산업의 발달과 독자들로의 권력이동으로 인해 전쟁과 재난으로 파괴된 책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이 생산되고 유통 및 공유되기도 했다. 반면, 오래된 고서와 기록은 '이단'이라는 이유로, 하찮다는 이유로,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방치되면서 세월의 궤짝 속에 묻힌 채 사라지거나 훼손된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이다. 

17세기 영국 옥스포드 대학도서관의 기반을 닦은 토머스 보들리는 라틴어나 고어가 아닌  셰익스피어 같은 당대 영어책은 '고상한' 지식의 보고가 아닌 '하찮은' 책이라서 도서관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미국의 어느 사업가는 상상 이상의 거금을 들여 셰익스피어 희귀본만을 수집하여 보존해 왔단다. 이후 프랑스의 독서클럽이나 독일의 독서협회 또한 어느 정도 고지식한 틀을 고집했고 18세기 미국의 회원제 도서관이나 대여 도서관도 처음은 그랬으나 점차로 로맨스 소설과 여성 독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도서관의 역사' 또한 독자층의 저변이 확대되는 '책'의 민주화 과정과 궤를 함께 한다. 

지금은 없어지고 다른 형태로 존속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근세에 콜럼버스의 아들 페르난도 콜론이 한 차례 재건하려고 했는데, 한 때 그 도서관이 전성기를 맞은 이유도 '팸플릿' 같이 '하찮은' 인쇄물 취급은 받았지만 대중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읽을거리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의 사서 가브리엘 노데는 [도서관 설립을 위한 의견서]에서 도서관은 전통적 학문의 모든 분과를 포함하는 한편 '하찮은' 인쇄물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데는 이탈리아와 스웨덴에서도 고급 사서로 일했는데 밀린 급여를 귀중한 장서들로 대신 받아 챙기고는 고국에 들여와 리슐리외의 후계자 쥘 마쟈랭의 공공도서관을 채우기도 했다.

17~18세기 대학도서관 같은 근대적 공공도서관의 발전 시기에도 귀족과 군주의 개인도서관은 권력의 사치와 향유를 위한 공간으로 남았지만 이곳에 모인 작가와 예술가들은 이 개인도서관을 활발한 사교의 장으로 만들면서 문화발전을 촉진하는 매개체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이후 도서관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쟁이나 화재 같은 재난으로 인해 파괴된 공공도서관의 책들은 상류계층의 개인도서관으로부터 기부되거나 책에 관심없는 상속인들에 의해 쉽게 처분되면서 다시 채워지기도 했단다. 
유럽 지배층의 사치품에서 공공재로, 미국 악덕자본가의 폼내기 기부에서 역시 공공재로 전환되는 이 '반전' 또한 '도서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 '책'은 튼튼하고 복원력이 뛰어난 데다 사후서비스나 부품교체가 필요하지 않고, 집이나 사무실을 꾸미는 데 쓰이기도 하고, 공유하고 대여하고 소장할 수도 있는 '문화자본'을 제공한다.
...
'도서관'이 다양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돌아다니고, '책'을 읽다가 내킬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장소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책'의 '무작위성'과 사람들 취향과 호기심의 '무작위성'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다른 공공 공간과 구별하는 점도 이 '무작위성'이다. '도서관'은 사람들이 무얼 바라든지 간에, 그 바람을 북돋우는 모든 것을 마음껏 탐색할 수 있는 장소이다."
- [도서관의 역사], <에필로그>, 앤드류 페테그리 외, 2021.


그러나 사실, 이 '도서관의 역사'는 또 하나의 '반전'과 '배반'(같은책, <5-15>)을 보여주는데, 항상 그 '고상한'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에 세워진 공공도서관은 식민통치의 정당성와 식민지인들에 대한 효율적 착취가 그 설립의 주요 목표였지만, 공공도서관을 통해 지식을 깨우친 사람들은 어느덧 식민지 해방투쟁의 전사가 되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독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주도로 세워진 노동자 도서관 네트워크에서는 정치사회적 도서나 노동조합 관련 책들은 거의 대출되지 않았고 문학이나 희곡 작품이 수천 배나 더 많이 대출되었다. 대신 노동시간 단축으로 여가를 보내기 위한 노동계급의 활발한 사교공간으로서 유감없는 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18~19세기에 '하찮은 금서' 취급을 받던 소설이 20세기의 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아 그 금서 자리를 공산주의와 포르노 서적들에게 물려주고는 비로소 공공도서관의 주역급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제 도서관은 예전의 '하찮은' 것들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되었다.

[도서관의 역사]의 저자들은 말한다.
'책'과 '도서관'은 없어질 것 같았으면 아주 오래전에 이미 없어졌을 거라고.

아직까지 유효한 '문화자본'으로서 '책'이 있고, 
그 책들을 공유하는 독자대중과 시대를 함께 하는 한,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도서관' 또한 그런 '책'의 끊임없는 '반전(irony)' 속에서 다양한 독자대중 취향의 '무작위성'과 만나면서 오래도록 진화하고 남을 것이라고 말이다.


3.

이제 알 것 같다.
고3 딸이야 답답하건 말건 내가 더 도서관을 찾는 이유를.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우연히 책들과 만나게 되는 그 '무작위성'(같은책, <에필로그>)이 바로 그 이유였다.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이 있든 없든, 
무시로 드나드는 생각의 꼬리를 따라 만나게 되는 뜻하지 않은 세상, 
도서관은 적어도 내게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거다. 

게다가, 근대의 공공도서관은 보일러를 놓지 않아 겨울난방이 안되었다고 하는데, 현대의 마을도서관은 겨울난방은 물론 한여름 냉방까지 매우 훌륭하지 않은가.

***

1. [도서관의 역사(The Library - A Fragile History)](2021), Andrew Pettegree/Arthur der Weduwen, 배동근/장은수 옮김, <Arte>, 2025.
2.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Alberto Manguel,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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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2 펭귄클래식 13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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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존재'로 향한 근대적 '자유의지'의 여정
- [파우스트], 괴테, 1790~1831.


"...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서기 1~3세기경에 로마제국의 많은 지역에서 연금술사들, 점성술사들, 주술사들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지만, 훗날 기독교 작가들에게는 '악마'로 인식되었고, 16~17세기에 악마론을 다룬 문헌들에서는 '오피엘'과 '메피스토-오피엘'로 호칭되는 악마로 묘사된다."
- [데모니쿠스], <3-1>, 토머스 데이비슨 외, 19세기.

19세기 미국 철학자 토머스 데이비슨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근원을 추적하던 중,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전령사이자 마술사와 사기꾼, 도박꾼 등의 상징인 '헤르메스'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 세계관에서 '악마' 또는 '마귀'의 이름 중 하나인 '오피엘'의 어원을 파헤치면서 '메피스토-오피엘' 혹은 '메기스토-오피엘'이라는 존재로까지 소개하고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 일생의 역작인 [파우스트(Faust)](1790~1831)는 괴테가 41세에 <1부>를 내놓았다지만, 실은 그의 나이 17세부터 구상했던 이야기로서 괴테가 70년 동안 집필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17세의 괴테가 보았던 연극 [파우스트 박사]의 주인공 '요한 게오르크 파우스트'는 16세기 독일 라이프치히와 하르츠 지방의 연금술사였다고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독일 시민들은 중세 말기 흑사병을 '고쳐준' 의사이자 마술사인 파우스트의 아버지를 높이 칭송하고 있다. 이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는 토로한다. 사실 아버지와 본인이 했던 일은 흑사병을 고치기는 커녕 사람들을 기망했던 사기였을 뿐이라고. 물론 당시 의학 및 과학의 지식이나 기술로는 '신의 징벌'로 여겨진 흑사병에 대처할 수 없었지만, 이처럼 파우스트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지상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는 법을 익히고,
우리 모두 계시를 갈망하면 된다.
이런 계시야 그 어디에서보다
신 앞에서 가장 멋지게 빛난다.
어서 원전을 펼쳐놓고
나의 온 정성을 담아
이 성스러운 원문([성경])을
사랑하는 독일어로 옮겨보고 싶다.

(책을 펼치고 펜을 손에 든다)

이런 말이 적혀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처음부터 막히는군! 누가 좀 도와주었으면!
'말씀'이 그리 높은 뜻을 지닐 수는 없다,
번역을 달리 해야 한다.
성령의 높은 감화를 받은 내가 아닌가.
이렇게 적혀있다. '태초에 뜻이 있었다.'
이 첫 행을 조심해야 한다.
펜을 너무 서두르면 안된다.
'뜻'이 모든 행동과 창조의 근원인가?
이렇게 쓰자. '태초에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쓰는 사이
거기서 멈추지 말라. 경고의 소리 들린다.
정신이 돕는구나! 묘안이 떠오른다.
나는 당당히 적는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 [파우스트], <비극 1부. 서재(1)>, 괴테, 1790.


부친의 명성과 당대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파우스트 박사는 마르틴 루터처럼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하다가 결국 '보편적 존재'를 꿈꾸는 인간의 지식적 한계를 체감하고는 대학교수직에도 회의를 느끼면서 모종의 '행동'을 하고자 하는데, 바로 '자살'이었다.

[성경]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로 재해석한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난 이후 학문을 떠나 자살'은 미뤄두고는 그 '악마'와 함께 일련의 '행동'에 나선다.

이것이 '파우스트'로 대표되는 근대 시민적 '자유의지' 여행의 시작이다.


"결국 그러다 보니 우리는 다시 정신력의 한계에 이르렀네요.
이 지점에 이르면 당신들 인간들은 늘 이성을 잃어버려요.
감당할 능력도 안되면서 우리와 손을 잡는거요?
날고는 싶은데 현기증 때문에 겁이 난다는 격이네요.
대체 우리가 당신을 끌어들인거요, 아니면 당신이 우리를 끌어들인거요?
...
그녀를 구해내라고요? 아니 그 여자애(그레트헨/마르가르테)를 파멸에 빠뜨린 게 대체 누구요? 나요? 아니면 당신이오?"
- [파우스트], <비극 1부. 우중충한 날, 들판>, 괴테, 1790.


'자살'이라는, 기독교적 신에 반(反)하는 '행동'을 시도하려던 파우스트 박사는 최초 개의 형상으로 자신을 따라붙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대화를 시작한다. 신학은 물론 고대의 철학 등 인류의 지적 유산을 모두 섭렵했다고 생각하는 파우스트는 시종일관 메피스토펠레스를 존대하지도, 마냥 끌려다니지만도  않는다. 마치 자신의 종처럼 부리면서 '자살'이라는 당시 세계관에 대한 소극적 반항 '행동' 대신,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악마를 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790년에 일단락된 괴테 [파우스트] <비극 1부>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피의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가 대학의 서재를 떠나 거리로 나와 젊은 소녀를 후리고 청년들과 술집에서 난잡토론을 하는 일련의 사회적 교류를 통해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를 실험하는 적극적인 '행동'의 무대로 이어진다.

비록 악마에게 영혼을 판 계약이었지만, 파우스트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단을 통해 악마를 부리고 그 힘으로 사회적 '행동'을 결행했다. 마지막에 파우스트가 꼬셨던 소녀 마르가르테(또는 그레트헨)의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소녀 또한 감옥에 갇히지만 파우스트는 역시 악마의 힘을 다시 빌려 소녀를 탈출시키고자 한다.

후회스러워 하는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저주하지만, 악마의 대꾸는 의미심장하다.

"대체 우리가 당신을 끌어들인거요,
아니면 당신이 우리를 끌어들인거요?"

근대적 '자유의지'의 실험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 때 썼던
그 펜도 그대로 여기에 있다.
그래! 깃펜 안쪽에는 그의 핏줄에서
내가 옭아냈던 피 한 방울도 들어있다."
- [파우스트], <비극 2부. 2막>, 괴테, 1831.


1815년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임명된 괴테가 이듬해부터 구상을 다시 시작한 [파우스트] <비극 2부>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현실을 떠난 파우스트가 온갖 고대 인물들과 다니는 연극무대와도 같다. 여기서부터는 트로이 전쟁 후 다시 스파르타로 돌아온 헬레네도 등장하고, <비극 1부>에서 파우스트로 변장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현혹된 조교 바그너가 대학을 떠난 파우스트의 공백을 채우면서 만들어낸 '호문쿨루스'라는 실험적이고 이상적 인간형태도 나온다. 그리스 신화의 마녀 세자매 '포르키아스'는 물론 각종 신화적 보조출연자로 변신한 메피스토펠레스는 <비극 1부>에서 파우스트를 타락시킨 것처럼 <비극 2부>에서도 인류역사의 모든 추상적 현상들을 동원하여 그를 파멸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외도 중에도 파우스트가 떠난 대학의 서재에는 여전히 악마에게 영혼를 판 파우스트의 '피'가 묻은 펜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파우스트)는 자신에게 표면적이고 형식적 허울을 강요하는 모든 학문, 모든 인간관계, 모든 제도, 모든 보편적 인간의 관심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 인류의 모든 경험을 축적하려고 전심전력한다. 그는 애초에 충동적으로 개시한 이런 노력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런 노력은 '보편적 존재'가 되려고 염원하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열망의 발로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보편적 존재'만이 언제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데모니쿠스], <3-4>, 토머스 데이비슨, 19세기.


그러나 결론은 역시 '악마'가 아닌 '인간'의 몫이었다.

애초에 파우스트가 결행한 '행동'은 중세에서 근세를 거쳐 근대적 인간으로서 깨어나려는 '개인'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세계관 또한 당대 유럽의 기독교적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지막에 악마와의 계약을 무력회시키면서 파우스트가 안긴 곳 또한 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신과 종교의 테두리에서 찾는 '보편성'이 아니라, 때로는 '악마'와도 계약할 수 있는 근대적 시민 '개인'의 '자유의지'에 주목하며 개별과 추상 모두를 여행하면서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괴테의 [파우스트]는 전형화하고 있다.
'자유의지'의 화신, '파우스트(Faust)' 이름의 의미는 '주먹(fist)'이기도 하단다.

19세기 괴테의 [파우스트]는 과연, '보편적 존재'로 향한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의 긴 여정을 담은 서사시이기도 하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기원을 추적하려던 19세기 미국 철학자 토머스 데이비슨에 의하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개인들 각자를 '보편적' 인간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개인주의'"를 보여주는 인류의 '고전'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호메로스와 존 밀턴 등의 서사시가 우리말로 온전히 번역되기 어려운 것처럼, 괴테의 '비극'적 '희곡' [파우스트] 또한 번역본으로는 원문의 감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존 밀턴의 [실락원]조차 원문으로 읽을 마음이 없는 '영문학' 전공자인 내가 괴테의 독일어 원문을 읽어볼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원문은 아니지만 우리말로라도 인류의 근대적 '자유의지'를 다른 고전은 비록 그것이 서사시라 해도 계속 읽어볼까 한다.

그렇게 어찌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시(詩)는 역사보다 더 엄중하고 철학적"일 수 있으니 말이다.

***

1. [파우스트(Faust)](1790~1831), Johann Wolfgang von Goethe,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2.
2. [데모니쿠스(Demonicus)](19세기), Thomas Davison 외, 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25.
3.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1667), John Milton, 김흥숙 옮김, <서해문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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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펭귄클래식 1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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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존재'로 향한 근대적 '자유의지'의 여정
- [파우스트], 괴테, 1790~1831.


"...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서기 1~3세기경에 로마제국의 많은 지역에서 연금술사들, 점성술사들, 주술사들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지만, 훗날 기독교 작가들에게는 '악마'로 인식되었고, 16~17세기에 악마론을 다룬 문헌들에서는 '오피엘'과 '메피스토-오피엘'로 호칭되는 악마로 묘사된다."
- [데모니쿠스], <3-1>, 토머스 데이비슨 외, 19세기.

19세기 미국 철학자 토머스 데이비슨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근원을 추적하던 중,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전령사이자 마술사와 사기꾼, 도박꾼 등의 상징인 '헤르메스'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 세계관에서 '악마' 또는 '마귀'의 이름 중 하나인 '오피엘'의 어원을 파헤치면서 '메피스토-오피엘' 혹은 '메기스토-오피엘'이라는 존재로까지 소개하고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 일생의 역작인 [파우스트(Faust)](1790~1831)는 괴테가 41세에 <1부>를 내놓았다지만, 실은 그의 나이 17세부터 구상했던 이야기로서 괴테가 70년 동안 집필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17세의 괴테가 보았던 연극 [파우스트 박사]의 주인공 '요한 게오르크 파우스트'는 16세기 독일 라이프치히와 하르츠 지방의 연금술사였다고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독일 시민들은 중세 말기 흑사병을 '고쳐준' 의사이자 마술사인 파우스트의 아버지를 높이 칭송하고 있다. 이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는 토로한다. 사실 아버지와 본인이 했던 일은 흑사병을 고치기는 커녕 사람들을 기망했던 사기였을 뿐이라고. 물론 당시 의학 및 과학의 지식이나 기술로는 '신의 징벌'로 여겨진 흑사병에 대처할 수 없었지만, 이처럼 파우스트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지상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는 법을 익히고,
우리 모두 계시를 갈망하면 된다.
이런 계시야 그 어디에서보다
신 앞에서 가장 멋지게 빛난다.
어서 원전을 펼쳐놓고
나의 온 정성을 담아
이 성스러운 원문([성경])을
사랑하는 독일어로 옮겨보고 싶다.

(책을 펼치고 펜을 손에 든다)

이런 말이 적혀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처음부터 막히는군! 누가 좀 도와주었으면!
'말씀'이 그리 높은 뜻을 지닐 수는 없다,
번역을 달리 해야 한다.
성령의 높은 감화를 받은 내가 아닌가.
이렇게 적혀있다. '태초에 뜻이 있었다.'
이 첫 행을 조심해야 한다.
펜을 너무 서두르면 안된다.
'뜻'이 모든 행동과 창조의 근원인가?
이렇게 쓰자. '태초에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쓰는 사이
거기서 멈추지 말라. 경고의 소리 들린다.
정신이 돕는구나! 묘안이 떠오른다.
나는 당당히 적는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 [파우스트], <비극 1부. 서재(1)>, 괴테, 1790.


부친의 명성과 당대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파우스트 박사는 마르틴 루터처럼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하다가 결국 '보편적 존재'를 꿈꾸는 인간의 지식적 한계를 체감하고는 대학교수직에도 회의를 느끼면서 모종의 '행동'을 하고자 하는데, 바로 '자살'이었다.

[성경]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로 재해석한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난 이후 학문을 떠나 자살'은 미뤄두고는 그 '악마'와 함께 일련의 '행동'에 나선다.

이것이 '파우스트'로 대표되는 근대 시민적 '자유의지' 여행의 시작이다.


"결국 그러다 보니 우리는 다시 정신력의 한계에 이르렀네요.
이 지점에 이르면 당신들 인간들은 늘 이성을 잃어버려요.
감당할 능력도 안되면서 우리와 손을 잡는거요?
날고는 싶은데 현기증 때문에 겁이 난다는 격이네요.
대체 우리가 당신을 끌어들인거요, 아니면 당신이 우리를 끌어들인거요?
...
그녀를 구해내라고요? 아니 그 여자애(그레트헨/마르가르테)를 파멸에 빠뜨린 게 대체 누구요? 나요? 아니면 당신이오?"
- [파우스트], <비극 1부. 우중충한 날, 들판>, 괴테, 1790.


'자살'이라는, 기독교적 신에 반(反)하는 '행동'을 시도하려던 파우스트 박사는 최초 개의 형상으로 자신을 따라붙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대화를 시작한다. 신학은 물론 고대의 철학 등 인류의 지적 유산을 모두 섭렵했다고 생각하는 파우스트는 시종일관 메피스토펠레스를 존대하지도, 마냥 끌려다니지만도  않는다. 마치 자신의 종처럼 부리면서 '자살'이라는 당시 세계관에 대한 소극적 반항 '행동' 대신,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악마를 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790년에 일단락된 괴테 [파우스트] <비극 1부>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피의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가 대학의 서재를 떠나 거리로 나와 젊은 소녀를 후리고 청년들과 술집에서 난잡토론을 하는 일련의 사회적 교류를 통해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를 실험하는 적극적인 '행동'의 무대로 이어진다.

비록 악마에게 영혼을 판 계약이었지만, 파우스트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단을 통해 악마를 부리고 그 힘으로 사회적 '행동'을 결행했다. 마지막에 파우스트가 꼬셨던 소녀 마르가르테(또는 그레트헨)의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소녀 또한 감옥에 갇히지만 파우스트는 역시 악마의 힘을 다시 빌려 소녀를 탈출시키고자 한다.

후회스러워 하는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저주하지만, 악마의 대꾸는 의미심장하다.

"대체 우리가 당신을 끌어들인거요,
아니면 당신이 우리를 끌어들인거요?"

근대적 '자유의지'의 실험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 때 썼던
그 펜도 그대로 여기에 있다.
그래! 깃펜 안쪽에는 그의 핏줄에서
내가 옭아냈던 피 한 방울도 들어있다."
- [파우스트], <비극 2부. 2막>, 괴테, 1831.


1815년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임명된 괴테가 이듬해부터 구상을 다시 시작한 [파우스트] <비극 2부>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현실을 떠난 파우스트가 온갖 고대 인물들과 다니는 연극무대와도 같다. 여기서부터는 트로이 전쟁 후 다시 스파르타로 돌아온 헬레네도 등장하고, <비극 1부>에서 파우스트로 변장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현혹된 조교 바그너가 대학을 떠난 파우스트의 공백을 채우면서 만들어낸 '호문쿨루스'라는 실험적이고 이상적 인간형태도 나온다. 그리스 신화의 마녀 세자매 '포르키아스'는 물론 각종 신화적 보조출연자로 변신한 메피스토펠레스는 <비극 1부>에서 파우스트를 타락시킨 것처럼 <비극 2부>에서도 인류역사의 모든 추상적 현상들을 동원하여 그를 파멸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외도 중에도 파우스트가 떠난 대학의 서재에는 여전히 악마에게 영혼를 판 파우스트의 '피'가 묻은 펜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파우스트)는 자신에게 표면적이고 형식적 허울을 강요하는 모든 학문, 모든 인간관계, 모든 제도, 모든 보편적 인간의 관심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 인류의 모든 경험을 축적하려고 전심전력한다. 그는 애초에 충동적으로 개시한 이런 노력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런 노력은 '보편적 존재'가 되려고 염원하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열망의 발로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보편적 존재'만이 언제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데모니쿠스], <3-4>, 토머스 데이비슨, 19세기.


그러나 결론은 역시 '악마'가 아닌 '인간'의 몫이었다.

애초에 파우스트가 결행한 '행동'은 중세에서 근세를 거쳐 근대적 인간으로서 깨어나려는 '개인'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의 세계관 또한 당대 유럽의 기독교적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지막에 악마와의 계약을 무력회시키면서 파우스트가 안긴 곳 또한 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신과 종교의 테두리에서 찾는 '보편성'이 아니라, 때로는 '악마'와도 계약할 수 있는 근대적 시민 '개인'의 '자유의지'에 주목하며 개별과 추상 모두를 여행하면서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괴테의 [파우스트]는 전형화하고 있다.
'자유의지'의 화신, '파우스트(Faust)' 이름의 의미는 '주먹(fist)'이기도 하단다.

19세기 괴테의 [파우스트]는 과연, '보편적 존재'로 향한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의 긴 여정을 담은 서사시이기도 하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기원을 추적하려던 19세기 미국 철학자 토머스 데이비슨에 의하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개인들 각자를 '보편적' 인간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개인주의'"를 보여주는 인류의 '고전'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호메로스와 존 밀턴 등의 서사시가 우리말로 온전히 번역되기 어려운 것처럼, 괴테의 '비극'적 '희곡' [파우스트] 또한 번역본으로는 원문의 감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존 밀턴의 [실락원]조차 원문으로 읽을 마음이 없는 '영문학' 전공자인 내가 괴테의 독일어 원문을 읽어볼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원문은 아니지만 우리말로라도 인류의 근대적 '자유의지'를 다른 고전은 비록 그것이 서사시라 해도 계속 읽어볼까 한다.

그렇게 어찌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시(詩)는 역사보다 더 엄중하고 철학적"일 수 있으니 말이다.

***

1. [파우스트(Faust)](1790~1831), Johann Wolfgang von Goethe,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2.
2. [데모니쿠스(Demonicus)](19세기), Thomas Davison 외, 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25.
3.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1667), John Milton, 김흥숙 옮김, <서해문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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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 잃어버린 낙원에서 구원의 길 찾다 서해클래식 7
존 밀턴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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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결국 '자유의지'
- [실락원], 존 밀턴, 1667.


아주 어린 시절의 나는 '마징가'를 좋아했다.
작은 인간이 마치 자동차 운전하듯 조종하는 거대 로봇이 신비로운 힘에 의해 조종되는 악당 로봇을 물리치는 게 신기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가이 고의 [마징가](1972)는 강력한 힘이 주어졌을 때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주체적 고민에 관한 실존철학적 모티브를 지닌 심오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미처 거기까진 알지 못한채 어느덧 '마징가'를 잊게 된 고등학생의 나는 역시 일본만화 [공작왕](1985)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땐 이미 '독해력'이 생긴 후라, 작가 오기노 마코토가 그려내는 '타락천사'라는 모티브와 밀교적 배경에 깊이 끌렸던 터였다. '신(神)'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모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지키던 '천사(天使)'가 동서양을 넘나드는 밀교와 이단의 유혹에 의해 언제든 타락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청소년기의 내겐 매우 흥미로웠다.

"루터의 마귀는 전기에 기록된 현상이다.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문학의 소산들이다. 루터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기독교 경전의 악한 존재를 설명한다. 루터는 자신을 방해하려는 온갖 저항에 맞닥뜨렸고, 자신의 심중에서나 외부환경에서 발견한 신의 은총을 가로막는 온갖 사건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루터 시대의 교회에서는 갖가지 사악한 풍조나 분란마저 비일비재하게 돌발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루터는 오히려 그런 모든 것에서 악마의 개념을 더욱 선연하게 간취했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는 악마의 성격을 꿰뚫어보는 더욱 심오한 통찰력을 획득하느라 일평생 진력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 [데모니쿠스], <1-1. 서양의 3대 악마:사탄,메피스토펠레스,마귀-서론>, 데이비드 매슨, 19세기.

가톨릭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악마'적 행위로 규탄하고 반박했던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교황이라는 절대권력을 현세의 악마로 보고 성경의 대중화를 통해 민중적 종교의 길을 연 인물이다. 
19세기 영문학자 겸 문학비평가 데이비드 매슨(David Masson)은 루터가 [성경]의 여러 <전기(傳記)>가 전하던 온갖 '악마'적 현상들, 즉 주체 내부심리든 객관적 외부환경이든 '신의 은총'과 '복음 전도'를 가로막는 현상들을 목격하며 그 모든 것에서 '악마(惡魔)'의 개념을 평생 간취한 결과 한 평생 '악마'와 함께 살았고 말년에는 마귀에게 개그를 날리며 쫓아내기까지 했단다. 옛날에는 의외로 악마가 '개그'에 약할만큼 진지했나 보다.

데이비드 매슨 등이 악마에 관해 서술한 글들을 옮긴 [데모니쿠스](2025)에는 루터의 '마귀'와 존 밀턴의 [실락원](1667)에 등장하는 '사탄',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19세기)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에 관한 19세기적 설명들이 소개되고 있다. 

[성경]의 기록으로 전하는 현상으로서의 루터의 '악마'와 달리 존 밀턴이나 괴테가 말하는 '악마'는 당연히 '문학의 소산들'이다. 그 어원이나 형태에 관한 19세기적인 설명을 읽어볼 수 있는 책 제목 [데모니쿠스(Demonicus)]는 라틴어로 '악마적'이라는 뜻이며 영어 '데몬(Demon)'의 어원이겠다.


"... 땅에 이르자 강에서 일어난 저녁 안개가 늪 위를 유성처럼 미끄러져 집으로 돌아가는 일꾼들의 발꿈치에 모이듯 모여들었다. 선두엔 높이 하느님의 검이 혜성처럼 번득이고 타는 듯한 열이 온화하던 땅을 바짝 태우기 시작했다. 천사가 급히 양손으로 머뭇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붙잡아 동쪽 문으로 가더니 벼랑을 내려가 그 아래 펼쳐진 평원으로 갔고 그리곤 사라졌다. 두 사람이 낙원의 동쪽을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도 그들의 행복한 보금자리던 그곳에 불타는 검이 파도치고 문에는 무시무시한 얼굴들과 무기가 작열했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으나 곧 닦아냈다. 온 세상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으니 그들은 섭리를 인도자 삼아 안주할 곳을 택해야 했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느릿느릿 방랑의 빌걸음을 옮겨 에덴을 지나 그들만의 길을 갔다."
- [실락원], <12편. 미카엘, 아담과 이브를 낙원 밖으로 인도하다>, 존 밀턴, 1667.

어려서부터 '선악'의 모티브로 만화를 읽고 보았던 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존 밀턴(John Milton:1608~1674)의 장편 서사시 [실락원(Paradise Lost)](1667)은 읽지 않았다. 
이십대의 나는 '문학적 소산'인 '타락천사' 사탄보다는 인류의 '평등'을 저해하는 현실의 '악마'들을 타도하고 싶었다. 다수 민중을 압제하는 자들이 당시의 내게 현실의 '사탄'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마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데모니쿠스]를 읽은 나는 마침 오래전부터 영문학 전공자로서 당시 못 읽었던 문학고전들을 읽어보자고 생각해 왔던 터라 영문학 최고의 서사시라 불린 존 밀턴의 [실락원]을 빌려서 펼쳐들었던 것이다.

20세기까지야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문화현상에서 일본식 조어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1974년생인 나 또한 '마징가'와 '공작왕'에 심취했듯 일본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실락원(失樂園)]은 이제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세대의 기억을 담아 여전히 [실락원]으로 부르고자 한다. '황국신민'을 기르는 '국민학교' 같은 이념적 조어가 아닌 바에야 나의 추억을 굳이 폐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이라는 작명은 말 그대로 '잃어버린 낙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어 읽게 된 존 밀턴의 [실락원]의 주인공은 '사탄'이 아니었고, 그러므로 '낙원'은 천국이 아니었으며 '낙원'을 잃은 자도 천국에서 떨어진 '타락천사' 사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낙원'을 잃은 자는 그냥 [구약성경] 그대로 아담과 이브요, [실락원]의 주연도 굳이 따지자면 밀턴이 인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른 아담과 이브였다.

존 밀턴의 [실락원]은 아담과 이브를 중심으로 천사와 악마가 들려주는 [구약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이다. 즉, [구약성경]의 대중적 요약판이다.

최초 '사탄'과 반역천사 무리들이 지옥에 떨어진 후 재기를 도모하지만 힘이 모자라니 신권에 대한 정면도전 보다는 신이 창조한 낙원인 '에덴'과 신의 현세적 대리자로서 태어난 최초 인류인 '아담과 이브'를 공략하여 신을 반역케 한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1편>부터 묘사된 천국의 대반역을 시작으로 대천사 라파엘이 '천지창조'의 <창세기>를 <7편>을 통해 상세히 아담에게 들려주고, 사탄이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로 불린 '지혜의 열매'를 먹게 한 <9편> 이후 대천사 미카엘이 신의 대리인으로 내려와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조상의 '원죄'로 인해 겪에 되는 고난, 즉 바벨탑과 노아의 대홍수, 모세의 이집트 탈출 등의 미래를 <11편>에서 역시 아담에게 보여주고는 그들을 낙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총 12편의 대서사시가 [실락원]의 줄거리다.

[실락원]의 주인공 아담과 이브는 그들만의 낙원이었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신의 대리자인 대천사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제 발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은 불멸의 처단검으로 낙원을 아예 불태워 폐쇄해 버리는데, 그럼으로써 인류의 '원죄'를 실현시킨 '사탄'의 무리들에게 결국 머물 곳은 '지옥'의 유황불구덩이만 남게 된다.


"아, 성스럽고 지혜로우며 지혜를 주는 나무여, 지식의 어머니여, 이제 나는 내 안에 있는 그대의 힘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사물의 근간을 구별할 뿐 아니라 지고한 행위자가 행동하는 방식도 밝혀낼 수 있다. 
우주의 여왕이시여, 그대들은 죽지 않으리니. 그 죽음의 협박을 믿지 마십시오. 어째서 죽으리오? 열매 때문에? 나를 보시오. 나는 그것에 손대었고 맛도 보았지만 살아있고 운명이 내게 준 것보다 더 완전한 삶을 얻었으니, 짐승에게 열린 것이 인간에게는 닫히겠습니까? 
... 선을 아는 것은 옳은 일이고 악이란 게 있다면 악을 알아야 피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그대들을 해친다면 의로울 수 없고 의롭지 않다면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복종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이걸 왜 금지했을까요? 그대들을 겁주어 비천하고 무지한 상태에 머물게 하려고? 그대들이 그것을 먹는 날 밝은 듯 하나 실은 어두운 그대들의 눈이 완전히 열리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신들처럼 되리라는 걸 하느님은 아십니다. 내가 내적인 인간처럼 되었듯이, 그대들은 인간적인 신들이 될 것입니다."
- [실락원], <9편. 사탄, 이브를 유혹해 지혜의 열매를 먹게 하다>, 존 밀턴, 1667.

히브리어 '사탄'은 보통 다른 말로는 '악마', '마귀', 라틴어 '루시퍼(Lucifer)' 등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존 밀턴은 [실락원]을 지어 'satanic(사악한)', 'pandemonium(복마전,대혼란)', 'self-esteem(자부심)', 'dreary(황량한)' 등의 신조어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역시 밀턴은 내용과 형식 모든 면으로 보아 영문학사에서 현대영어의 기초를 닦은 셰익스피어 못지 않은 작가인 것이다. 어쨌든 결국 '사탄'은 '루시퍼'인데 '루시퍼'는 라틴어로 '빛(Lux)'을 '가져오는(ferre)' 자, '루키페르(Lucifer)'로서 반역을 하기 전 그가 영향력 있는 대천사 중 하나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던 '루키페르(루시퍼)'는 신만이 독점하던 '지혜'의 '빛'을 가지면서 더 이상 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루시퍼'와 그가 선동한 군대의 규모는 천국의 1/3을 차지했지만 결국 패했다. 그러나 '사탄'이 된 '루시퍼'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낙원으로 침투하여 뱀의 형상을 하고는 이브에게 '지혜의 빛'과 지식의 힘을 전하며 신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신을 초월하려는 지식과 지혜, 인간 '자유의지'의 기원이다.

이렇게 '사탄', 즉 '루시퍼'는 인류에게 '지혜'를 맛보게 한 장본인이다.


"독생자여, 우리의 적이 얼마나 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지 보이는가? 모든 한계와 사슬과 심연에도 굴하지 않을만큼 지독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지만 그 복수심은 오직 그 자신과 반역의 무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그는 하늘에서 멀지 않은 빛의 주위 속으로 날아 곧바로 새로이 창조된 세계로 가서 힘이나 간교한 거짓으로 인간을 타락시켜 순종하기로 약속한 유일한 명령을 어기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인간의 믿음없는 자손들이 타락할 것이니 인간이 아니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나는 인간을 올바르게, 충분히 견딜 수 있게 만들었지만 타락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나는 모든 천사들과 영들을 그렇게 창조했으니 견딜 자는 자유롭게 견디고 타락할 자는 또한 '자유'로이 타락하리라. '자유'롭지 않다면, 그들이 하고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해야하는 일만 나타날테니, 진정한 충성과 변치않는 믿음과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식의 복종에서 내가 무슨 기쁨을 얻겠는가?... 나는 그들을 '자유'롭게 창조했으니 그들은 스스로 노예가 될 때까지 '자유'로울 것이다..."
- [실락원], <3편. 하느님,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언하다>, 존 밀턴, 1667.

그러면 '사탄'이 과연 인류에게 '악(惡)'일 뿐인가.

기독교적으로는 그렇다.
전지전능한 신의 의지를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존 밀턴은 [실락원] <3편>에서 천국의 신이 우측에 앉은 독생자,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될 자신의 외아들에게 본인이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즉, 신은 인류가 신을 따를 건지 악마를 따를 건지 갈등하고 선택할 수 있게 애초부터 설계했는데, 신에 대한 진정한 복종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지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정해졌다면 진정한 복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독립적 '지혜'와 '자유의지'의 화신 '루시퍼(사탄)'의 대반역 사건 이후 인류의 타락을 예견한다. 그리고 선악 결정의 기로에 서게 하고 인류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대한 합당한 댓가(낙원추방)를 주었으며 구원(메시아)의 여지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실락원]은 이렇게 '낙원을 잃고(失樂園)' 남자는 노동을, 여자는 출산을 힘들게 견뎌야 하는 인류에게 신은 그의 '독생자(외아들)'를 내려보내 오래된 '원죄'를 대신하여 희생케 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는 [신약성경]의 내용도 암시적으로 예고한다.
물론 이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후인 [구약]과 [신약]이 이미 보편화된지 오래인 17세기의 존 밀턴이기에 가능했던 대 서사시다.

그러나 역시 존 밀턴의 [실락원]에서 건져낼 개념 하나는 '자유의지' 밖에 없다. 

밀턴이 신의 입을 빌어 인류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말하고, 사탄의 대반역을 계기로 '지혜의 빛'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구약성경]을 요약해주는 종교적 서사만이 아닌 근대의 '인간 해방'을 시사한다. 그 배경은 존 밀턴이 영국의 청교도혁명(1642~1651) 과정에서 반왕정 의회 지지파인 올리버 크롬웰 정권에서 1649년 외국어 장관을 맡아 정치활동을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근대적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혁명적 인물로서 존 밀턴이 바라본 관점은 비단 종교만이 아닌 당대의 정치적 격변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문학작품에 녹아 있는 것이다. 
문학은 역시 현실의 특수한 반영이다.

'선과 악'의 투쟁,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존 밀턴의 [실락원]은 19세기 프랑스 판화가 귀스타프 도레의 세밀화 삽화와 함께 읽어야 역시 제 맛일게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데모니쿠스]에서 추적한 '애초부터 돌이킬 수 없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고자,
괴테의 [파우스트](19세기)를 빌리러 도서관으로 간다.

***

1.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1667), John Milton, 김흥숙 옮김, <서해문집>, 2006.
2. [데모니쿠스(Demonicus)](19세기), David Masson 외, 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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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니쿠스
데이비드 매슨 외 지음, 김성균 옮김, 마스터칼리 삽화 / 우물이있는집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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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결국 '자유의지'
- [실락원], 존 밀턴, 1667.


아주 어린 시절의 나는 '마징가'를 좋아했다.
작은 인간이 마치 자동차 운전하듯 조종하는 거대 로봇이 신비로운 힘에 의해 조종되는 악당 로봇을 물리치는 게 신기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가이 고의 [마징가](1972)는 강력한 힘이 주어졌을 때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주체적 고민에 관한 실존철학적 모티브를 지닌 심오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미처 거기까진 알지 못한채 어느덧 '마징가'를 잊게 된 고등학생의 나는 역시 일본만화 [공작왕](1985)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땐 이미 '독해력'이 생긴 후라, 작가 오기노 마코토가 그려내는 '타락천사'라는 모티브와 밀교적 배경에 깊이 끌렸던 터였다. '신(神)'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모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지키던 '천사(天使)'가 동서양을 넘나드는 밀교와 이단의 유혹에 의해 언제든 타락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청소년기의 내겐 매우 흥미로웠다.

"루터의 마귀는 전기에 기록된 현상이다.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문학의 소산들이다. 루터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기독교 경전의 악한 존재를 설명한다. 루터는 자신을 방해하려는 온갖 저항에 맞닥뜨렸고, 자신의 심중에서나 외부환경에서 발견한 신의 은총을 가로막는 온갖 사건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루터 시대의 교회에서는 갖가지 사악한 풍조나 분란마저 비일비재하게 돌발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루터는 오히려 그런 모든 것에서 악마의 개념을 더욱 선연하게 간취했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는 악마의 성격을 꿰뚫어보는 더욱 심오한 통찰력을 획득하느라 일평생 진력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 [데모니쿠스], <1-1. 서양의 3대 악마:사탄,메피스토펠레스,마귀-서론>, 데이비드 매슨, 19세기.

가톨릭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악마'적 행위로 규탄하고 반박했던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교황이라는 절대권력을 현세의 악마로 보고 성경의 대중화를 통해 민중적 종교의 길을 연 인물이다. 
19세기 영문학자 겸 문학비평가 데이비드 매슨(David Masson)은 루터가 [성경]의 여러 <전기(傳記)>가 전하던 온갖 '악마'적 현상들, 즉 주체 내부심리든 객관적 외부환경이든 '신의 은총'과 '복음 전도'를 가로막는 현상들을 목격하며 그 모든 것에서 '악마(惡魔)'의 개념을 평생 간취한 결과 한 평생 '악마'와 함께 살았고 말년에는 마귀에게 개그를 날리며 쫓아내기까지 했단다. 옛날에는 의외로 악마가 '개그'에 약할만큼 진지했나 보다.

데이비드 매슨 등이 악마에 관해 서술한 글들을 옮긴 [데모니쿠스](2025)에는 루터의 '마귀'와 존 밀턴의 [실락원](1667)에 등장하는 '사탄',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19세기)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에 관한 19세기적 설명들이 소개되고 있다. 

[성경]의 기록으로 전하는 현상으로서의 루터의 '악마'와 달리 존 밀턴이나 괴테가 말하는 '악마'는 당연히 '문학의 소산들'이다. 그 어원이나 형태에 관한 19세기적인 설명을 읽어볼 수 있는 책 제목 [데모니쿠스(Demonicus)]는 라틴어로 '악마적'이라는 뜻이며 영어 '데몬(Demon)'의 어원이겠다.


"... 땅에 이르자 강에서 일어난 저녁 안개가 늪 위를 유성처럼 미끄러져 집으로 돌아가는 일꾼들의 발꿈치에 모이듯 모여들었다. 선두엔 높이 하느님의 검이 혜성처럼 번득이고 타는 듯한 열이 온화하던 땅을 바짝 태우기 시작했다. 천사가 급히 양손으로 머뭇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붙잡아 동쪽 문으로 가더니 벼랑을 내려가 그 아래 펼쳐진 평원으로 갔고 그리곤 사라졌다. 두 사람이 낙원의 동쪽을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도 그들의 행복한 보금자리던 그곳에 불타는 검이 파도치고 문에는 무시무시한 얼굴들과 무기가 작열했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으나 곧 닦아냈다. 온 세상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으니 그들은 섭리를 인도자 삼아 안주할 곳을 택해야 했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느릿느릿 방랑의 빌걸음을 옮겨 에덴을 지나 그들만의 길을 갔다."
- [실락원], <12편. 미카엘, 아담과 이브를 낙원 밖으로 인도하다>, 존 밀턴, 1667.

어려서부터 '선악'의 모티브로 만화를 읽고 보았던 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존 밀턴(John Milton:1608~1674)의 장편 서사시 [실락원(Paradise Lost)](1667)은 읽지 않았다. 
이십대의 나는 '문학적 소산'인 '타락천사' 사탄보다는 인류의 '평등'을 저해하는 현실의 '악마'들을 타도하고 싶었다. 다수 민중을 압제하는 자들이 당시의 내게 현실의 '사탄'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마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데모니쿠스]를 읽은 나는 마침 오래전부터 영문학 전공자로서 당시 못 읽었던 문학고전들을 읽어보자고 생각해 왔던 터라 영문학 최고의 서사시라 불린 존 밀턴의 [실락원]을 빌려서 펼쳐들었던 것이다.

20세기까지야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문화현상에서 일본식 조어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1974년생인 나 또한 '마징가'와 '공작왕'에 심취했듯 일본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실락원(失樂園)]은 이제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세대의 기억을 담아 여전히 [실락원]으로 부르고자 한다. '황국신민'을 기르는 '국민학교' 같은 이념적 조어가 아닌 바에야 나의 추억을 굳이 폐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이라는 작명은 말 그대로 '잃어버린 낙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어 읽게 된 존 밀턴의 [실락원]의 주인공은 '사탄'이 아니었고, 그러므로 '낙원'은 천국이 아니었으며 '낙원'을 잃은 자도 천국에서 떨어진 '타락천사' 사탄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낙원'을 잃은 자는 그냥 [구약성경] 그대로 아담과 이브요, [실락원]의 주연도 굳이 따지자면 밀턴이 인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른 아담과 이브였다.

존 밀턴의 [실락원]은 아담과 이브를 중심으로 천사와 악마가 들려주는 [구약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이다. 즉, [구약성경]의 대중적 요약판이다.

최초 '사탄'과 반역천사 무리들이 지옥에 떨어진 후 재기를 도모하지만 힘이 모자라니 신권에 대한 정면도전 보다는 신이 창조한 낙원인 '에덴'과 신의 현세적 대리자로서 태어난 최초 인류인 '아담과 이브'를 공략하여 신을 반역케 한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1편>부터 묘사된 천국의 대반역을 시작으로 대천사 라파엘이 '천지창조'의 <창세기>를 <7편>을 통해 상세히 아담에게 들려주고, 사탄이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로 불린 '지혜의 열매'를 먹게 한 <9편> 이후 대천사 미카엘이 신의 대리인으로 내려와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조상의 '원죄'로 인해 겪에 되는 고난, 즉 바벨탑과 노아의 대홍수, 모세의 이집트 탈출 등의 미래를 <11편>에서 역시 아담에게 보여주고는 그들을 낙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총 12편의 대서사시가 [실락원]의 줄거리다.

[실락원]의 주인공 아담과 이브는 그들만의 낙원이었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신의 대리자인 대천사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제 발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은 불멸의 처단검으로 낙원을 아예 불태워 폐쇄해 버리는데, 그럼으로써 인류의 '원죄'를 실현시킨 '사탄'의 무리들에게 결국 머물 곳은 '지옥'의 유황불구덩이만 남게 된다.


"아, 성스럽고 지혜로우며 지혜를 주는 나무여, 지식의 어머니여, 이제 나는 내 안에 있는 그대의 힘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사물의 근간을 구별할 뿐 아니라 지고한 행위자가 행동하는 방식도 밝혀낼 수 있다. 
우주의 여왕이시여, 그대들은 죽지 않으리니. 그 죽음의 협박을 믿지 마십시오. 어째서 죽으리오? 열매 때문에? 나를 보시오. 나는 그것에 손대었고 맛도 보았지만 살아있고 운명이 내게 준 것보다 더 완전한 삶을 얻었으니, 짐승에게 열린 것이 인간에게는 닫히겠습니까? 
... 선을 아는 것은 옳은 일이고 악이란 게 있다면 악을 알아야 피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그대들을 해친다면 의로울 수 없고 의롭지 않다면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복종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이걸 왜 금지했을까요? 그대들을 겁주어 비천하고 무지한 상태에 머물게 하려고? 그대들이 그것을 먹는 날 밝은 듯 하나 실은 어두운 그대들의 눈이 완전히 열리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신들처럼 되리라는 걸 하느님은 아십니다. 내가 내적인 인간처럼 되었듯이, 그대들은 인간적인 신들이 될 것입니다."
- [실락원], <9편. 사탄, 이브를 유혹해 지혜의 열매를 먹게 하다>, 존 밀턴, 1667.

히브리어 '사탄'은 보통 다른 말로는 '악마', '마귀', 라틴어 '루시퍼(Lucifer)' 등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존 밀턴은 [실락원]을 지어 'satanic(사악한)', 'pandemonium(복마전,대혼란)', 'self-esteem(자부심)', 'dreary(황량한)' 등의 신조어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역시 밀턴은 내용과 형식 모든 면으로 보아 영문학사에서 현대영어의 기초를 닦은 셰익스피어 못지 않은 작가인 것이다. 어쨌든 결국 '사탄'은 '루시퍼'인데 '루시퍼'는 라틴어로 '빛(Lux)'을 '가져오는(ferre)' 자, '루키페르(Lucifer)'로서 반역을 하기 전 그가 영향력 있는 대천사 중 하나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던 '루키페르(루시퍼)'는 신만이 독점하던 '지혜'의 '빛'을 가지면서 더 이상 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루시퍼'와 그가 선동한 군대의 규모는 천국의 1/3을 차지했지만 결국 패했다. 그러나 '사탄'이 된 '루시퍼'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낙원으로 침투하여 뱀의 형상을 하고는 이브에게 '지혜의 빛'과 지식의 힘을 전하며 신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신을 초월하려는 지식과 지혜, 인간 '자유의지'의 기원이다.

이렇게 '사탄', 즉 '루시퍼'는 인류에게 '지혜'를 맛보게 한 장본인이다.


"독생자여, 우리의 적이 얼마나 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지 보이는가? 모든 한계와 사슬과 심연에도 굴하지 않을만큼 지독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지만 그 복수심은 오직 그 자신과 반역의 무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그는 하늘에서 멀지 않은 빛의 주위 속으로 날아 곧바로 새로이 창조된 세계로 가서 힘이나 간교한 거짓으로 인간을 타락시켜 순종하기로 약속한 유일한 명령을 어기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인간의 믿음없는 자손들이 타락할 것이니 인간이 아니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나는 인간을 올바르게, 충분히 견딜 수 있게 만들었지만 타락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나는 모든 천사들과 영들을 그렇게 창조했으니 견딜 자는 자유롭게 견디고 타락할 자는 또한 '자유'로이 타락하리라. '자유'롭지 않다면, 그들이 하고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해야하는 일만 나타날테니, 진정한 충성과 변치않는 믿음과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식의 복종에서 내가 무슨 기쁨을 얻겠는가?... 나는 그들을 '자유'롭게 창조했으니 그들은 스스로 노예가 될 때까지 '자유'로울 것이다..."
- [실락원], <3편. 하느님,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언하다>, 존 밀턴, 1667.

그러면 '사탄'이 과연 인류에게 '악(惡)'일 뿐인가.

기독교적으로는 그렇다.
전지전능한 신의 의지를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존 밀턴은 [실락원] <3편>에서 천국의 신이 우측에 앉은 독생자,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될 자신의 외아들에게 본인이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즉, 신은 인류가 신을 따를 건지 악마를 따를 건지 갈등하고 선택할 수 있게 애초부터 설계했는데, 신에 대한 진정한 복종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지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정해졌다면 진정한 복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독립적 '지혜'와 '자유의지'의 화신 '루시퍼(사탄)'의 대반역 사건 이후 인류의 타락을 예견한다. 그리고 선악 결정의 기로에 서게 하고 인류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대한 합당한 댓가(낙원추방)를 주었으며 구원(메시아)의 여지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실락원]은 이렇게 '낙원을 잃고(失樂園)' 남자는 노동을, 여자는 출산을 힘들게 견뎌야 하는 인류에게 신은 그의 '독생자(외아들)'를 내려보내 오래된 '원죄'를 대신하여 희생케 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는 [신약성경]의 내용도 암시적으로 예고한다.
물론 이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후인 [구약]과 [신약]이 이미 보편화된지 오래인 17세기의 존 밀턴이기에 가능했던 대 서사시다.

그러나 역시 존 밀턴의 [실락원]에서 건져낼 개념 하나는 '자유의지' 밖에 없다. 

밀턴이 신의 입을 빌어 인류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말하고, 사탄의 대반역을 계기로 '지혜의 빛'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구약성경]을 요약해주는 종교적 서사만이 아닌 근대의 '인간 해방'을 시사한다. 그 배경은 존 밀턴이 영국의 청교도혁명(1642~1651) 과정에서 반왕정 의회 지지파인 올리버 크롬웰 정권에서 1649년 외국어 장관을 맡아 정치활동을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근대적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혁명적 인물로서 존 밀턴이 바라본 관점은 비단 종교만이 아닌 당대의 정치적 격변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문학작품에 녹아 있는 것이다. 
문학은 역시 현실의 특수한 반영이다.

'선과 악'의 투쟁,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존 밀턴의 [실락원]은 19세기 프랑스 판화가 귀스타프 도레의 세밀화 삽화와 함께 읽어야 역시 제 맛일게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데모니쿠스]에서 추적한 '애초부터 돌이킬 수 없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고자,
괴테의 [파우스트](19세기)를 빌리러 도서관으로 간다.

***

1. [실락원(失樂園;Paradise Lost)](1667), John Milton, 김흥숙 옮김, <서해문집>, 2006.
2. [데모니쿠스(Demonicus)](19세기), David Masson 외, 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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