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 폭력이 펼쳐지는 시대마다 누가 숨은 이득을 챙기는가
던컨 웰던 지음, 윤종은 옮김 / 윌북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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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과 '제도'로 풀어 낸 전쟁의 역사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던컨 웰던, 2025.


세상 모든 것이 '역사'로 수렴된다고 믿는 내게, 
미술과 전쟁 또한 '역사' 이야기가 된다. 

'역사'를 고리타분하다 생각하고 책을 잘 팔리게 하기 위해 달지 말아야 할 제목 속 단어 중 하나로 '역사'가 포함되는 슬픈 문명의 시대에,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그러므로 대중적일 방도가 없다. 시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이를 넘어서니, 당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경제학에서는 특히 전쟁과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유인(incentives)'과 '제도(institutions)'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들어가며>, 던컨 웰던, 2025.


경제학을 '사회적 생산'과 '개인의 교환' 중 하나로 당파를 정하여 선택적으로 이해하는 또 한편의 나는 '정치경제학'은 선호하지만 주류 경제학은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은 없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작가인 던컨 웰던(Duncan Weldon:1982~)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해석해 내는데, 
그의 키워드는 '유인(incentives)'과 '제도(institutions)'다.

국역 제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다. 실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풀어쓴 전쟁의 '역사' 이야기지만, 재미없는 '역사'를 제목에 넣은 대신 사람들의 주목을 확 잡아끄는 '돈'이라는 단어로 상쇄하고자 한 느낌이다. 내용은 '돈의 역사'도 '역사' 속 '돈'이야기도 아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학살극을 일으킨 다양한 '유인' 중에는 '돈'도 있을 수 있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다. '역사' 속 폭력 전문가 집단의 조직화된 권력형태인 '국가'의 '제도'의 본질적 토대는 경제적 관계이겠지만 역시 '돈'이 다는 아니다.


"영국 역사에서는 '보물'이 집중적으로 묻힌 시기가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로마의 통치가 끝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이며, 두 번째는 그보다도 훨씬 많은 '보물'이 묻힌 17세기 중반이다. 17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렸다. 오늘날 전쟁의 대가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이는 '피와 보물(blood and treasure)'이라는 표현도 이 시기에 널리 퍼졌다. 당시에는 말 그대로 사방에서 '피'가 낭자한 가운데, 많은 사람이 '보물'을 땅에다 묻어 재산을 지키고자 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들어가며>, 던컨 웰던, 2025.


던컨 웰던의 '경제학적 전쟁사'인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2026)의 원제는 [피와 보물(Blood and Treasure)](2025)이다.

경제적 '유인'으로 '전쟁'이 발생되고 이 전쟁의 대가로 남는 '피와 보물'은 '제도'로 발현되며, 이 '제도'는 또 다른 '유인'을 낳으며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이 '전쟁의 역사'가 된다. 
17세기 중반 영국 내전 중에 사람들은 '피'의 전쟁 후를 기약하며 수많은 '보물'을 땅에 묻었지만, 결국 대부분의 묻힌 '보물'들은 전쟁의 승자가 차지했을 것이다. 이들은 '보물'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유인'으로 '피'의 전쟁을 치렀고, '피와 보물'을 가지고 '제도'를 만들고는 이 '제도'를 무기로 다시금 '전쟁의 역사'를 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제1장 바이킹부터 마지막 17장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펼쳐내며 저자 던컨 웰던이 말하는 '유인(incentives)'은 '경제적'인 것만 뜻하지 않고, '제도(institutions)'는 국가기구 등의 물적 기반 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 등도 포함한다. 

경제학자인 저자가 풀어내는 '전쟁의 역사'에서 '유인'과 '제도'는 '전쟁'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숙련된 장궁병을 다수 보유하기 위해서는 잉글랜드처럼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상명하달식으로 정책을 추진해 궁술을 장려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했다. 통치자들은 사실상 장궁병을 보유할지 말지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 궁술을 익히는 문화를 주입할지 말지를 놓고 선택해야 했던 셈이다... 이 사례에서 한 국가가 특정 기술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좌우한 것은 그 국가의 '제도(institutions)'였다.
...
대외 안보와 대내 안보 중 어느 쪽을 우선할지는 통치자가 어떤 '유인(incentives)'에 따라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통치자는 누구를 가장 두려워했는가? 자국의 귀족들이었는가, 아니면 이웃 나라들이었는가?"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3. 군사력의 모순 - 왜 일부러 질 낮은 무기를 사용했을까 1066~1450>, 던컨 웰던, 2025.


11~15세기 유럽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했던 영국(잉글랜드)은 중앙집권적 국가제도를 통해 모든 장정들에게 쇠뇌보다 장궁을 훈련시키면서 효율적으로 많은 전쟁을 이겼다. 반면 국내 귀족들의 군사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던 당시 유럽 대륙의 프랑스를 위시한 국가들은 영국과의 전투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질(효율성) 낮은 무기'인 쇠뇌를 고수했다. 왕권에게는 대외 전투보다 반란과 내전이 더 무서웠던 거다. 조선 말 고종도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외세보다 동학농민혁명군을 더 두려워하여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자국의 민중반란을 진압했다.


"... 군인들이 전장에서 얻은 부로 인간의 지식을 확장하게끔 이끈 것은 이러한 '제도(institutions)'적 틀에 기반한 '유인(incentives)' 체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
부유한 군인들은 전쟁에서 얻은 부로 자적 활동이 꽃피우도록 자금을 댔고, 그 결과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6. 르네상스 - 이탈리아 전쟁의 진정한 승자들 1422~1559>, 던컨 웰든, 2025.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인'과 '제도'로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승전의 대가로 전취한 '피와 보물'로써 또 다른 '제도'를 지향한 지식과 학문의 발전이 견인한 결과다. 
귀족군부 가문정권의 과시욕과 사치욕이 새로운 인문학을 후원하고 르네상스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흔히 그래왔듯, 전쟁은 국가의 주요 결정권자들을 움직이는 '유인(incentives)'의 구조를 바꿔놓았으며 새로운 '제도(institutions)'들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11. 미국 남북전쟁 - 해밀턴 모멘트와 달러의 탄생 1790~1865>, 던컨 웰던, 2025.


18~19세기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과정에서도 지금의 미합중국을 만든 중앙은행과 국가부채 통합 등의 노력으로 점차로 다져지는 미국 달러화 또한 전쟁의 주요한 '유인'과 '제도'였다.


"경제학은 잘만 활용하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유인(incentives)'의 역할과 '제도(institutions)'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제학'의 관점을 받아들이면, 어떤 사건이 벌어진 원인을 설명하고, 겉보기에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의 의미를 적절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16. 베트남전쟁 - 경제학자의 그릇된 판단이 끼친 폐해 1955~1975>, 던컨 웰던, 2025.


미국의 월트 휘트먼 로스토라는 경제학자는 도식화된 주류경제학을 주장했던 인물로서 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폭격과 대학살만을 고집한 군사정책을 주장했고 그와 같은 군사전략은 결국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패전으로 귀결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부터 본격화된 대규모 폭격의 '총력전'의 역사로 진화했고, 현대 '총력전'은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 산업발전의 힘을 배경으로 한 국가를 대폭격 한 방으로 끝장낼 수 없게 했다. 제2차 대전 일본의 원자폭탄 투하는 일제 항복의 계기가 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현대전에서 로스토 식의 대폭격은 국가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건과 국제원조의 계기로 작용했고 전쟁은 오히려 장기화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정부가 경제 전반에 새로운 권한을 행사했다는 점은 같았지만, 두 나라는 민간이 주도하는 '민주 국가'의 틀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독일에서는 군의 요구를 무엇보다 우선했으며, 민간의 요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
이렇듯 '총력전'은 단순히 군수물자 생산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총력전'의 핵심은 더 많은 군사 자원을 확보하면서도 민간 경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13. 세계대전 - 승패는 더 이상 무력이 결정하지 않는다 1914~1945>, 던컨 웰던, 2025.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후 전국민 개병제를 토대로 진행된 '총력전'에서, 자본주의 산업혁명과 결합한 경제력은 현대전 승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전쟁의 승패는 더 이상 무력이 아닌 경제력(재건력)이 좌우한다.

경제학적 '유인(incentives)'과 '제도(institutions)'는 '전쟁'의 원인이자 결과다. 

경제학자 던컨 웰던은 이를 '피와 보물(Blood and Treasure)'로 은유하고 있다.

***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Blood and Treasure)](2025), Duncan Weldon, 윤종은 옮김, <윌북>,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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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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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소설'의 원조, 아시모프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아이, 로봇]/[흑거미 클럽], 아이작 아시모프, 1940~1973.


"'당신은 '초자연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오, 핸리?'
헨리는 대답했다.
'이렇다 할 일정한 견해는 없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 있으면 믿고 있을 뿐입니다.'
'좋아! 당신은 신뢰할 수 있겠소. 여기 있는 편견과 선입관에 젖은 '합리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소.'"
- [흑거미 클럽], <뚜렷한 요소(The Obvious Factor)>, 아이작 아시모프, 1972.


마을 도서관의 <동서미스터리북스> 숲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길버트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전집]을 선택했더랬고, 그 '전집'을 따라 다른 출판사인 <북하우스>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 전편을 읽었다.

그러나 솔직해 지자면 지난 6개월 동안,
난 아직 군대간 아들이 없는 자리가 허전하여 다른 복잡한 책이 읽혀지지 않고 있고,
격주 토요일 마을 뒷산 종주 후 마을 도서관에 들러 '미스터리' 숲을 마저 거니는 게 아직 좋다.

SF와 '미스터리' 소설의 '가교'라는 생각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 1920~1992)의 '본격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흑거미 클럽(Tales of the Black Wodowers)](1972~1973)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대출했건만, 또 다시 나는 마을 도서관의 <동서미스터리북스> 책장 앞을 서성인다.

어쨌거나,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른바 '로봇 3원칙'을 담은 SF 로봇소설 시리즈로 유명하다. 

난 그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먼저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 그 공력으로 나중에 SF 로봇소설을 쓴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던 만 19세 청년이었던 아시모프가 1940년대 초 당시 처음 발표한 소설 <로비>가 최초의 로봇소설이었고 이후 글쓰기에만 매진하던 천재 아시모프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심심풀이' 삼아 추리소설을 써봤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되었다.

왜 '심심풀이'라 생각했느냐면,
그의 1970년대 추리소설 [흑거미 클럽]은 여타 미스터리 추리소설처럼 심각한 '살인사건'이나 복잡한 트릭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매우 '단순'하면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가벼운 사건들을 실험적으로 다루는 단편소설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와 닮아 있다.

'흑거미(The Black Widowers) 클럽'은 부인들은 배제한 채 매달 전문직 남성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인데, '홀아비들(widowers)' 모임으로 자칭하며 매월 돌아가며 '호스트'를 지정하여 그가 초대손님을 초청하고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 모임은 저녁 만찬과 디저트 시간을 곁들이는데, 회원 여섯 명에게 그림자처럼 식사 시중을 드는 '헨리'라는 정체불명의 급사가 매번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는 방식이다.

[흑거미 클럽]의 12가지 에피소드 중 살인사건은 한 번 나오는데(<일요일 아침 일찍>), 나머지 이야기들은 초대손님이 소개하는 이야기 중 '거짓말'(<회심의 미소>, <사실을 말한다면>, <뚜렷한 요소> 등), 시험 부정행위(<가짜 Ph>)와 성서 또는 문학(셰익스피어 전집)과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을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어느 나라 대표?>, <가리키는 손가락>, <이상한 생략> 등)에 관한 회원들의 자유분방한 해석 이후 급사 헨리가 연역해내는 추리의 결과물이다. 즉, 회원들의 복잡한 추리들이 대부분 소거되고 남은 힌트 중 헨리가 '단순'한 핵심 포인트를 잡아내어 등장인물과 독자들의 허를 찌른다.

첫 단편 <회심의 미소(The Acquisitive Chuckle)>(1972)에서 사기꾼 같은 동업자를 속이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인물로 소개되는 급사 헨리는 회원 중 누구도 그의 정체는 모르지만, 본인은 '탐정'도 했었음을 암시하는 60대 초로의 신사로 추정된다. 그는 모임 시간 내내 음식을 세팅하면서 초대손님과 회원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항상 마지막에 질문 몇 가지를 하고는 그 동안 펼쳐진 추리의 곁가지들을 소거하면서 '단순'하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그렇다면 이로써 킹, 퀸, 룩, 나이트, 폰이 나온 셈이로군요. 여섯 종류의 말 가운데 남은 건 비숍(주교) 뿐입니다...'
...
헨리는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애트웃 씨가 가지고 계신 체스의 네 비숍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샌더슨 씨는 애트웃 씨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시어 팔거나 버리거나 또는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마 마이크로 필름은 비숍들 가운데 하나 속에 들어 있을 겁니다..."
- [흑거미 클럽], <이상한 생략(The Curious Omission)>, 아이작 아시모프, 1972.


아시모프의 추리는 복잡하지 않다.
SF 로봇소설의 선구자답게 '마술'이나 '미신', '초자연'이나 '신비주의'는 배격하는 '합리주의자'다.


"나로서는, 모든 '불가능성'이 제거된 다음에 남는 게 '초자연'이라면 그것은 누군가가 허위주장을 하고 있다고 본다."
- [흑거미 클럽], <뚜렷한 요소>, '후기', 아이작 아시모프, 1973.


급사 헨리의 겸손한 자세 배후에는 아시모프의 철저한 '합리주의'가 도사리고 있고, 이 관점은 그의 로봇소설의 근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지구에서만 사용하는 로봇을 판매했어요. 내가 일하기 전에 말이에요. 물론 말을 못하는 로봇이었죠. 그 후에 인간과 좀더 비슷한 로봇이 나오면서 반대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노동조합은 일자리를 놓고 로봇과 경쟁하는 걸 당연히 반대하고, 이런저런 종교집단들은 미신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반대했지요. 어리석고 생각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었지만, 분명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 [아이, 로봇], <이야기의 시작>, '수잔 캘빈 박사 회고', 아이작 아시모프, 1950.


19세 또는 20세의 아시모프가 처음 쓴 소설은 <로비(Robbie)>(1940)라는 로봇소설이다. 

SF작가로 데뷔한 아시모프는 그러므로 철저한 '합리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생화학를 전공한 그는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과학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첫 작품은 한참 동안 발표되지 않았다지만, 그의 유명한 '로봇 3원칙'을 담고 있으며, 1950년까지 단편소설로 씌여진 연작 로봇소설 [아이, 로봇(I, Robot)]의 첫 단편이 된다. 

1982년생 수잔 캘빈 박사가 75세가 되는 2057년이 이 로봇 연작소설의 첫 장 <이야기의 시작>이다.

로봇 생산업체 'U.S.로보틱스'의 주요인사로서 로봇심리학자인 그녀는 로봇의 역사에 관해 취재 중인 유력언론인 '행성 신문'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이 로봇 연작 이야기를 이어간다.

* '로봇 3원칙' + '제0원칙'
-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 해서도 안 된다.
- 제2원칙 :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 제3원칙 :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 제0원칙 : 로봇은 '인류(인간 개개인보다는)'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류'를 모른 척 해서도 안 된다. (제1원칙보다 우선)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의 역할은 위 '로봇 3원칙'이 제대로 적용되는지 문제적 상황에 빠진 각각의 로봇을 조사하는 일이다. 
2050년대 당시는 이미 첫 이야기 <로비_소녀를 사랑한 로봇>(1940) 당시처럼 아이의 보모 역할을 했던 로봇 초창기와 달리 지구에서는 로봇을 사용하지 못하게 세계적 법제화가 된지 오래된 시점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지구만이 아니라 전 우주적으로 식민지 확대가 진행되는 중으로 외계행성의 광물과 에너지 등을 수집하는 어려운 작업에 로봇을 투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곳곳의 로봇들이 위의 '로봇 3원칙'과 충돌하는 행동을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서 'U.S.로보틱스'의 임원진인 수학자 및 공학자와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 박사가 투입되어 각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가 연작으로 서술된다. 


"... 자료를 입력하고 계산에 들어간 결과, 초공간 이동에 대비한 최소한의 휴지기, 즉 인간의 죽음에 대한 방정식이 나온 거예요. 연합 측 기계는 바로 여기서 완전히 부서진 겁니다. 하지만 전(수잔 캘빈) 브레인(로봇)에게 죽음의 중요성을 이미 많이 낮춰 놓았어요. '제1원칙'은 절대 어길 수 없기 때문에 전부 없앤 건 아니지만 브레인이 방정식을 다시 보게 할 정도는 되었습니다. 브레인에게는 휴지기가 끝나면 인간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죠. 우주선이라는 물질과 에너지 자체가 온전하게 돌아온 것처럼 말이에요. 바로 이게 흔히 말하는 '죽음'이고, 극히 순간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거예요. 모두 이해하시겠어요?"
- [아이, 로봇], <브레인 - 개구쟁이 천재(Escape!)>, 아이작 아시모프, 1950.


아시모프의 SF 로봇 연작소설 [아이, 로봇]은 그의 첫 작품인 1940년작 <로비(Robbie)_소녀를 사랑한 로봇>부터 마지막 작품 <피할 수 있는 갈등(The Evitable Problem)>이 발표된 1950년까지 10년간의 단편집이다.

1950년에 엮어서 출간한 이 연작소설은 그럼에도 20세기 중반에 창작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미래'적이다. AI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지금을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생생하나, 과학 전공자의 이야기답게 '신비주의'적이지 않고 매우 '합리주의'적인 사고와 예측에 기반하고 있다. 로봇 두뇌의 주요 구성방식인 '양전자' 같은 건 그 실체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로봇 3원칙'의 철저한 주입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로봇 두뇌 제조 방식을 전제로, 우주 각 곳에서 활약하는 로봇들의 자생적 '고민'과 갈등을 묘사한다. 천재 로봇 '브레인'이 제작한 우주선에 탄 인간은 은하계 너머 공간이동까지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시공을 초월하며 일시적 '죽음'까지 경험하게 된다. 
양자역학적이기도 한데, 무려 1950년에 아시모프가 발휘한 대단한 상상력이다.

마치 2020년대 AI 로봇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1940~1950년대의 아시모프는 생생하게 묻고 있는 듯 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창조한 무한능력의 피조물과 잘 어울려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고 말이다.


"... (바이어리 검사가 로봇이라는) 심리적인 증거를 대려면 그 사람의 언행을 연구해야 하는데, 만일 그 사람이 양전자 로봇이라면 '로봇공학 3원칙'에 따라야 합니다. 양전자 두뇌는 '세 가지 원칙' 없이는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아이, 로봇], <바이어리_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Evidence)>, 아이작 아시모프, 1946.


아이작 아시모프는 [흑거미 클럽](1972~1973) 같은 실험적 추리소설도 쓰기는 했지만 '미스터리' 작가는 아니다. 

그래도 SF 과학소설 류인 [아이, 로봇](1940~1950)에는 여러 로봇들이 처한 문제적 행동의 원인을 추적하는 일종의 '미스터리'적 상황들이 계속 전개된다. 그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미스터리적 요소는 바로 <바이어리_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1946)에서 대도시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스테판 바이어리 지방검사가 정교하게 인간과 똑같이 만들어진 '로봇'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등장하는 설정이다. 물론 단편의 제목처럼 그는 '로봇'으로 추정되지만, 소설 어디에도 그가 로봇이라는 '증거(원제;evidence)'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정적들의 의혹에 찬 흑색선전을 꺾고 '뉴욕'으로 보이는 대도시의 시장으로 당선된 스테판 바이어리 검사는 연작 소설의 마지막 단편인 <피할 수 있는 갈등>(1950)에서는 더 큰 지도자인 '세계 조정자'가 되어 '동부'와 '열대', '유럽'과 '북부'의 4개 영역을 아우르는 세계 중앙정부의 수장 역할을 한다. 


"해답은 당신도 알고 있어요.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슈퍼 컴퓨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세요, 바이어리 씨. 그들 역시 로봇이고, 따라서 '제1원칙'을 지켜야 해요. 하지만 '슈퍼 컴퓨터'는 한 인간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일해요. 따라서 '제1원칙'은 이렇게('제0원칙'이) 되겠지요.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류를 모른 척 해서도 안된다.' 바로 이거예요, 바이어리 씨...
...
사실 인류는 주도권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잘 알지도 못하는 다양한 사회현상과 경제현상, 변덕스런 날씨와 전쟁의 운에 따라 늘 죄지우지되었지요. 그런데 '슈퍼 컴퓨터'는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있고,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슈퍼 컴퓨터'가 '인간을 위한 사회'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처럼 이 모든 요소를 처리할 테니까요. 인류 경제의 완벽한 통제라는 가장 거대한 무기를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으니까요."
- [아이, 로봇], <피할 수 있는 갈등(The Evitable Conflict)>, 아이작 아시모프, 1950.


지구의 운영을 수학적 계산과 예측 모델을 통해 조정하는 궁극의 로봇 '슈퍼 컴퓨터'의 '오류'처럼 보였던 문제들은 사실 거대한 두뇌 '슈퍼 컴퓨터'가 로봇 문명진보와 이에 저항하는 인류의 저항('인간을 위한 사회')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여태껏 도달한 궁극의 로봇 문명이 단 번에 뒤집어지는 일이 없도록 적절히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노회해진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에 의해 밝혀진다.

인류는 로봇의 창조자로서 '전지전능'한 '주인' 또는 '신'과 같은 '주도권'의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그리하여 피조물인 로봇에게 그 '주인'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다분히 투쟁해야 하는 것 같지만, 
역시 사실 인류는 이 지구 또는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쥔 '주인'도 '신'도 된 적이 없었던 것이라고 수잔 캘빈 박사는 회고한다. 

그리고 이제, 1950년대에 내다 본 백년 후의 미래인 2050년대가 되면 이 '슈퍼 컴퓨터'라는 종결자 형태로 진화한 로봇 문명이 세계를 결국 지배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수잔 캘빈 박사가 인터뷰의 마지막에 예고한 미래 예측으로서, 그로부터 몇 년 후 82세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된다.

[아이, 로봇](1940~1950)의 마지막 장을 덮고는 생각해 본다.

AI 로봇 문명이 급속도로 진보하고 있는 2026년 현재의 인류에게 던지고 있는 듯한,
20세기 중반의 '로봇소설'의 원조, 아이작 아시모프의 질문에 지금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

1. [흑거미 클럽(Tales of the Black Widowers)](1972~1973), Isaac Asimov, 강영길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14.
2. [아이, 로봇(I, Robot)](1940~1950), Isaac Asimov, 김옥수 옮김, 오동 그림, <우리교육>,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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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거미 클럽 동서 미스터리 북스 92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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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소설'의 원조, 아시모프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아이, 로봇]/[흑거미 클럽], 아이작 아시모프, 1940~1973.


"'당신은 '초자연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오, 핸리?'
헨리는 대답했다.
'이렇다 할 일정한 견해는 없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 있으면 믿고 있을 뿐입니다.'
'좋아! 당신은 신뢰할 수 있겠소. 여기 있는 편견과 선입관에 젖은 '합리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소.'"
- [흑거미 클럽], <뚜렷한 요소(The Obvious Factor)>, 아이작 아시모프, 1972.


마을 도서관의 <동서미스터리북스> 숲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길버트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전집]을 선택했더랬고, 그 '전집'을 따라 다른 출판사인 <북하우스>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 전편을 읽었다.

그러나 솔직해 지자면 지난 6개월 동안,
난 아직 군대간 아들이 없는 자리가 허전하여 다른 복잡한 책이 읽혀지지 않고 있고,
격주 토요일 마을 뒷산 종주 후 마을 도서관에 들러 '미스터리' 숲을 마저 거니는 게 아직 좋다.

SF와 '미스터리' 소설의 '가교'라는 생각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 1920~1992)의 '본격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흑거미 클럽(Tales of the Black Wodowers)](1972~1973)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대출했건만, 또 다시 나는 마을 도서관의 <동서미스터리북스> 책장 앞을 서성인다.

어쨌거나,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른바 '로봇 3원칙'을 담은 SF 로봇소설 시리즈로 유명하다. 

난 그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먼저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 그 공력으로 나중에 SF 로봇소설을 쓴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던 만 19세 청년이었던 아시모프가 1940년대 초 당시 처음 발표한 소설 <로비>가 최초의 로봇소설이었고 이후 글쓰기에만 매진하던 천재 아시모프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심심풀이' 삼아 추리소설을 써봤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되었다.

왜 '심심풀이'라 생각했느냐면,
그의 1970년대 추리소설 [흑거미 클럽]은 여타 미스터리 추리소설처럼 심각한 '살인사건'이나 복잡한 트릭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매우 '단순'하면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가벼운 사건들을 실험적으로 다루는 단편소설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와 닮아 있다.

'흑거미(The Black Widowers) 클럽'은 부인들은 배제한 채 매달 전문직 남성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인데, '홀아비들(widowers)' 모임으로 자칭하며 매월 돌아가며 '호스트'를 지정하여 그가 초대손님을 초청하고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 모임은 저녁 만찬과 디저트 시간을 곁들이는데, 회원 여섯 명에게 그림자처럼 식사 시중을 드는 '헨리'라는 정체불명의 급사가 매번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는 방식이다.

[흑거미 클럽]의 12가지 에피소드 중 살인사건은 한 번 나오는데(<일요일 아침 일찍>), 나머지 이야기들은 초대손님이 소개하는 이야기 중 '거짓말'(<회심의 미소>, <사실을 말한다면>, <뚜렷한 요소> 등), 시험 부정행위(<가짜 Ph>)와 성서 또는 문학(셰익스피어 전집)과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을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어느 나라 대표?>, <가리키는 손가락>, <이상한 생략> 등)에 관한 회원들의 자유분방한 해석 이후 급사 헨리가 연역해내는 추리의 결과물이다. 즉, 회원들의 복잡한 추리들이 대부분 소거되고 남은 힌트 중 헨리가 '단순'한 핵심 포인트를 잡아내어 등장인물과 독자들의 허를 찌른다.

첫 단편 <회심의 미소(The Acquisitive Chuckle)>(1972)에서 사기꾼 같은 동업자를 속이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인물로 소개되는 급사 헨리는 회원 중 누구도 그의 정체는 모르지만, 본인은 '탐정'도 했었음을 암시하는 60대 초로의 신사로 추정된다. 그는 모임 시간 내내 음식을 세팅하면서 초대손님과 회원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항상 마지막에 질문 몇 가지를 하고는 그 동안 펼쳐진 추리의 곁가지들을 소거하면서 '단순'하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그렇다면 이로써 킹, 퀸, 룩, 나이트, 폰이 나온 셈이로군요. 여섯 종류의 말 가운데 남은 건 비숍(주교) 뿐입니다...'
...
헨리는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애트웃 씨가 가지고 계신 체스의 네 비숍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샌더슨 씨는 애트웃 씨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시어 팔거나 버리거나 또는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마 마이크로 필름은 비숍들 가운데 하나 속에 들어 있을 겁니다..."
- [흑거미 클럽], <이상한 생략(The Curious Omission)>, 아이작 아시모프, 1972.


아시모프의 추리는 복잡하지 않다.
SF 로봇소설의 선구자답게 '마술'이나 '미신', '초자연'이나 '신비주의'는 배격하는 '합리주의자'다.


"나로서는, 모든 '불가능성'이 제거된 다음에 남는 게 '초자연'이라면 그것은 누군가가 허위주장을 하고 있다고 본다."
- [흑거미 클럽], <뚜렷한 요소>, '후기', 아이작 아시모프, 1973.


급사 헨리의 겸손한 자세 배후에는 아시모프의 철저한 '합리주의'가 도사리고 있고, 이 관점은 그의 로봇소설의 근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지구에서만 사용하는 로봇을 판매했어요. 내가 일하기 전에 말이에요. 물론 말을 못하는 로봇이었죠. 그 후에 인간과 좀더 비슷한 로봇이 나오면서 반대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노동조합은 일자리를 놓고 로봇과 경쟁하는 걸 당연히 반대하고, 이런저런 종교집단들은 미신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반대했지요. 어리석고 생각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었지만, 분명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 [아이, 로봇], <이야기의 시작>, '수잔 캘빈 박사 회고', 아이작 아시모프, 1950.


19세 또는 20세의 아시모프가 처음 쓴 소설은 <로비(Robbie)>(1940)라는 로봇소설이다. 

SF작가로 데뷔한 아시모프는 그러므로 철저한 '합리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생화학를 전공한 그는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과학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첫 작품은 한참 동안 발표되지 않았다지만, 그의 유명한 '로봇 3원칙'을 담고 있으며, 1950년까지 단편소설로 씌여진 연작 로봇소설 [아이, 로봇(I, Robot)]의 첫 단편이 된다. 

1982년생 수잔 캘빈 박사가 75세가 되는 2057년이 이 로봇 연작소설의 첫 장 <이야기의 시작>이다.

로봇 생산업체 'U.S.로보틱스'의 주요인사로서 로봇심리학자인 그녀는 로봇의 역사에 관해 취재 중인 유력언론인 '행성 신문'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이 로봇 연작 이야기를 이어간다.

* '로봇 3원칙' + '제0원칙'
-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 해서도 안 된다.
- 제2원칙 :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 제3원칙 :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 제0원칙 : 로봇은 '인류(인간 개개인보다는)'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류'를 모른 척 해서도 안 된다. (제1원칙보다 우선)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의 역할은 위 '로봇 3원칙'이 제대로 적용되는지 문제적 상황에 빠진 각각의 로봇을 조사하는 일이다. 
2050년대 당시는 이미 첫 이야기 <로비_소녀를 사랑한 로봇>(1940) 당시처럼 아이의 보모 역할을 했던 로봇 초창기와 달리 지구에서는 로봇을 사용하지 못하게 세계적 법제화가 된지 오래된 시점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지구만이 아니라 전 우주적으로 식민지 확대가 진행되는 중으로 외계행성의 광물과 에너지 등을 수집하는 어려운 작업에 로봇을 투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곳곳의 로봇들이 위의 '로봇 3원칙'과 충돌하는 행동을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서 'U.S.로보틱스'의 임원진인 수학자 및 공학자와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 박사가 투입되어 각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가 연작으로 서술된다. 


"... 자료를 입력하고 계산에 들어간 결과, 초공간 이동에 대비한 최소한의 휴지기, 즉 인간의 죽음에 대한 방정식이 나온 거예요. 연합 측 기계는 바로 여기서 완전히 부서진 겁니다. 하지만 전(수잔 캘빈) 브레인(로봇)에게 죽음의 중요성을 이미 많이 낮춰 놓았어요. '제1원칙'은 절대 어길 수 없기 때문에 전부 없앤 건 아니지만 브레인이 방정식을 다시 보게 할 정도는 되었습니다. 브레인에게는 휴지기가 끝나면 인간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죠. 우주선이라는 물질과 에너지 자체가 온전하게 돌아온 것처럼 말이에요. 바로 이게 흔히 말하는 '죽음'이고, 극히 순간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거예요. 모두 이해하시겠어요?"
- [아이, 로봇], <브레인 - 개구쟁이 천재(Escape!)>, 아이작 아시모프, 1950.


아시모프의 SF 로봇 연작소설 [아이, 로봇]은 그의 첫 작품인 1940년작 <로비(Robbie)_소녀를 사랑한 로봇>부터 마지막 작품 <피할 수 있는 갈등(The Evitable Problem)>이 발표된 1950년까지 10년간의 단편집이다.

1950년에 엮어서 출간한 이 연작소설은 그럼에도 20세기 중반에 창작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미래'적이다. AI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지금을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생생하나, 과학 전공자의 이야기답게 '신비주의'적이지 않고 매우 '합리주의'적인 사고와 예측에 기반하고 있다. 로봇 두뇌의 주요 구성방식인 '양전자' 같은 건 그 실체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로봇 3원칙'의 철저한 주입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로봇 두뇌 제조 방식을 전제로, 우주 각 곳에서 활약하는 로봇들의 자생적 '고민'과 갈등을 묘사한다. 천재 로봇 '브레인'이 제작한 우주선에 탄 인간은 은하계 너머 공간이동까지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시공을 초월하며 일시적 '죽음'까지 경험하게 된다. 
양자역학적이기도 한데, 무려 1950년에 아시모프가 발휘한 대단한 상상력이다.

마치 2020년대 AI 로봇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1940~1950년대의 아시모프는 생생하게 묻고 있는 듯 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창조한 무한능력의 피조물과 잘 어울려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고 말이다.


"... (바이어리 검사가 로봇이라는) 심리적인 증거를 대려면 그 사람의 언행을 연구해야 하는데, 만일 그 사람이 양전자 로봇이라면 '로봇공학 3원칙'에 따라야 합니다. 양전자 두뇌는 '세 가지 원칙' 없이는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아이, 로봇], <바이어리_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Evidence)>, 아이작 아시모프, 1946.


아이작 아시모프는 [흑거미 클럽](1972~1973) 같은 실험적 추리소설도 쓰기는 했지만 '미스터리' 작가는 아니다. 

그래도 SF 과학소설 류인 [아이, 로봇](1940~1950)에는 여러 로봇들이 처한 문제적 행동의 원인을 추적하는 일종의 '미스터리'적 상황들이 계속 전개된다. 그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미스터리적 요소는 바로 <바이어리_대도시 시장이 된 로봇>(1946)에서 대도시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스테판 바이어리 지방검사가 정교하게 인간과 똑같이 만들어진 '로봇'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등장하는 설정이다. 물론 단편의 제목처럼 그는 '로봇'으로 추정되지만, 소설 어디에도 그가 로봇이라는 '증거(원제;evidence)'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정적들의 의혹에 찬 흑색선전을 꺾고 '뉴욕'으로 보이는 대도시의 시장으로 당선된 스테판 바이어리 검사는 연작 소설의 마지막 단편인 <피할 수 있는 갈등>(1950)에서는 더 큰 지도자인 '세계 조정자'가 되어 '동부'와 '열대', '유럽'과 '북부'의 4개 영역을 아우르는 세계 중앙정부의 수장 역할을 한다. 


"해답은 당신도 알고 있어요.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슈퍼 컴퓨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세요, 바이어리 씨. 그들 역시 로봇이고, 따라서 '제1원칙'을 지켜야 해요. 하지만 '슈퍼 컴퓨터'는 한 인간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일해요. 따라서 '제1원칙'은 이렇게('제0원칙'이) 되겠지요.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류를 모른 척 해서도 안된다.' 바로 이거예요, 바이어리 씨...
...
사실 인류는 주도권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잘 알지도 못하는 다양한 사회현상과 경제현상, 변덕스런 날씨와 전쟁의 운에 따라 늘 죄지우지되었지요. 그런데 '슈퍼 컴퓨터'는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있고,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슈퍼 컴퓨터'가 '인간을 위한 사회'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처럼 이 모든 요소를 처리할 테니까요. 인류 경제의 완벽한 통제라는 가장 거대한 무기를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으니까요."
- [아이, 로봇], <피할 수 있는 갈등(The Evitable Conflict)>, 아이작 아시모프, 1950.


지구의 운영을 수학적 계산과 예측 모델을 통해 조정하는 궁극의 로봇 '슈퍼 컴퓨터'의 '오류'처럼 보였던 문제들은 사실 거대한 두뇌 '슈퍼 컴퓨터'가 로봇 문명진보와 이에 저항하는 인류의 저항('인간을 위한 사회')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여태껏 도달한 궁극의 로봇 문명이 단 번에 뒤집어지는 일이 없도록 적절히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노회해진 로봇 심리학자 수잔 캘빈에 의해 밝혀진다.

인류는 로봇의 창조자로서 '전지전능'한 '주인' 또는 '신'과 같은 '주도권'의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그리하여 피조물인 로봇에게 그 '주인'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다분히 투쟁해야 하는 것 같지만, 
역시 사실 인류는 이 지구 또는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쥔 '주인'도 '신'도 된 적이 없었던 것이라고 수잔 캘빈 박사는 회고한다. 

그리고 이제, 1950년대에 내다 본 백년 후의 미래인 2050년대가 되면 이 '슈퍼 컴퓨터'라는 종결자 형태로 진화한 로봇 문명이 세계를 결국 지배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수잔 캘빈 박사가 인터뷰의 마지막에 예고한 미래 예측으로서, 그로부터 몇 년 후 82세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된다.

[아이, 로봇](1940~1950)의 마지막 장을 덮고는 생각해 본다.

AI 로봇 문명이 급속도로 진보하고 있는 2026년 현재의 인류에게 던지고 있는 듯한,
20세기 중반의 '로봇소설'의 원조, 아이작 아시모프의 질문에 지금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

1. [흑거미 클럽(Tales of the Black Widowers)](1972~1973), Isaac Asimov, 강영길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14.
2. [아이, 로봇(I, Robot)](1940~1950), Isaac Asimov, 김옥수 옮김, 오동 그림, <우리교육>,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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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신부의 지혜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1
G. K. 체스터튼 지음, 박용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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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은 언제나, '반전' - 4 : 체스터튼의 '반전' 원리들
-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전집 - 1~5], 길버트 체스터튼, 1911~1935.


추리소설 또는 미스터리 소설의 백미인 '대반전'을 '본격적'으로 즐겨 보고자, 추리소설만을 위한 추리소설을 쓴 '본격파' 미스터리 소설의 대가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를 다시 찾아 읽었으나, 실망을 남긴 채 19세기말~20세기 초 셜록 홈즈의 아서 코넌 도일(Arther Conan Doyle : 1859~1930)과 함께 영국 추리소설계의 쌍벽을 이루었다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Gilbert Keith Chesterton : 1874~1936)을 찾았다.

과연,
미스터리 소설 또는 추리소설의 '반전'은 어떠해야 하는가.


"지(知)적인 추리소설의 진짜 목적은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知)'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련의 진실들이 충격적으로 독자들에게 폭로되는 방법으로 알게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훨씬 더 고상한 추리물에서도 진실을 가리는 목적은 단순히 신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명(知)'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목적이 애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히는 데 있다. 그것도 섬광처럼 깜짝 놀랄 만한 형식으로."
- <추리소설의 오류들>, 길버트 체스터튼, 1920.8.28. 장유미 옮김, ([브라운 신부 전집 3 - 의심], <북하우스>, 2002.)


체스터튼의 단편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은 '브라운 신부(Father Brown)'다. 
영국 에섹스 시골 출신인 이 가톨릭 신부는 사제이므로 정식 '탐정'은 아닌데, 추리소설이 으레 그렇듯 사건(특히 '살인사건')의 현장에 어쩐 일인지 늘 등장하여 사법적 과학수사 보다는 심리와 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등장인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원래는 평론가이자 시인의 기질을 지닌 체스터튼은 이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주로 단편 형식으로 수십 편 썼다.
1911년 [동심(결백:Innocence)]이라는 첫번째 단편집을 냈고, 1914년에는 [지혜(Wisdom)], 1926~1927년에 [의심(Incredulity)]와 [비밀(Secret)]을, 1935년 마지막으로 [스캔들(Scandal)]을 발표한다.

내가 올해 3월 아들의 입대 후 마음이 허전하여 책이 잘 읽히지 않아 지금껏 6개월 동안 '미스터리 소설'의 고전적 계보를 나름대로 추적해 보고자 마을 도서관 서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동서문화사>의 '동서미스터리북스(DMB)' 전집에는 체스터튼이 192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발표한 [동심(결백)](1911)과 [지혜](1914)만 번역되어 나왔고, 가톨릭 개종 후 출간한 단편집 [의심](1926), [비밀](1927), [스캔들](1935)은 <북하우스> 출판사에서 앞의 두 단편집에 이어 총 다섯 권으로 완역되어 나왔다.

다시 평론가 체스터튼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는 '추리소설'에 관한 이론적 칼럼을 1920년대 이후 많이 발표했단다. <북하우스>의 [브라운 신부 전집 1~5]의 각 권 마지막 장에는 그의 추리소설 칼럼이 한 편씩 번역되어 있어서 추리소설의 '반전'에 관한 체스터튼의 이론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칙은 추리소설의 목적이 모든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밝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비밀'을 숨기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숨길 가치가 있는) '비밀' 자체도 필요하다...
두번째 중요한 원칙은 추리소설의 정수는 '간결성'에 있다는 것이다. 비밀은 복잡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단순'해야 한다...
셋째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사실이나 인물들은 가능한 한 '익숙'한 사실이나 인물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제시한 제1규칙들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매개체는 생소한 기능을 하는 아주 익숙한 대상이어야 한다. 우리가 깨닫는 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눈에 띄는 동시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
- <추리소설 쓰는 법>, 체스터튼, 1925.10. 'G.K.'s Weekly' 칼럼 중, 김은정 옮김, ([브라운 신부 전집 4 - 비밀], <북하우스>, 2002.)

정리하면 이렇다.

추리소설의 '반전'은,
1.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지만 말고 작가의 분명한 설명을 통해 지적으로 알게 할 것 (<추리소설의 오류들>, 1920.8.)
2. 범인과 그 발각 과정은 '단순성'과 명확성', '간결성', 그리고 '익숙함'일 것 (<추리소설 쓰는 법>, 1925.10.)
3. 인간 본성의 '모순'을 이용해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현상'이 먼저 제시된 후 나중에 모순된 '본질'을 이용해 뒤엎을 것 (<이상적인 추리소설>, 1930.10.)


"범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듯한 인물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일어난 범죄가, 앞서 말했던 설정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이후에는 물론, 심리적으로 납득을 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 인간 본성의 모순이란 사실, 최후 심판의 날이나 죽음의 순간 만큼이나 끔찍하고 충격적인 것이다... 범죄와 고백은 둘 다 낙뢰와도 같은 파국을 야기할 수 있다. 사실 '이상적인 추리소설'이란 사람들에게 세상이 속임수로만 가득찬 것이 아니라 번갯불처럼 들쭉날쭉한 것도 있으면 칼처럼 곧은 것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순기능을 하는 것이다."
- <이상적인 추리소설>, 체스터튼, 1930.10. 이수현 옮김,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 <북하우스>, 2002.)


이런 추리소설 '반전'의 원리들을 체스터튼은 1911년부터 1935년까지 수십편의 비슷비슷한 단편들을 통해 '브라운 신부'의 활약과 함께 실험하고 있다.


1. [동심(결백:The Innocence)] - 1911


"'범죄라는 것은 다른 모든 예술 작품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브라운) 신부는 천천히 말했다. '놀랄 것 없습니다. 결코 범죄만이 지옥의 아틀리에에서 생겨나는 유일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숭엄한 작품이거나 악마적인 작품이거나 예술 작품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에는 반드시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리 완성된 모습은 복잡해 보이더라도 그 중심은 언제나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 역시 '검정 옷'을 입은 사나이의 '간단 명료'한 비극입니다... 이 사건 전체가 한 벌의 검은 옷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요...'"
- [브라운 신부의 동심], <기묘한 발걸음 소리>, 체스터튼, 1911.

단편 <기묘한 발걸음 소리>를 보면, 추리소설 '반전'의 '단순성'과 '명료성'을 중심으로 사건 해결의 단초를 보여주는데, 첫 단편 <푸른 십자가>에서 회개시키기 시작한 희대의 세계적 대도둑 플랑보의 '단순성'에 기반한 변장술을 간파하고 재차 설득하나 또다시 회개시키는 데 실패한다. 물론, 절도사건은 간단히 해결하였고 머지 않아 대도 플랑보는 신부에게 설복당해 도둑질을 그만두고 탐정 사무소를 열고는 브라운 신부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된다.


"살라딘은 프랑스의 프리 메이슨(자유주의자)에 속하는 강렬한 무신론자였으므로 (브라운) 신부가 나서면 그의 마음을 흥분하게 할 뿐이었다. 한편 상대방 젊은이는 신부이건 속인이건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풍모와 다갈색 눈을 가진 이 젊은이는 청교도보다도 더 단호한 '이교도'였다. 이 지구의 여명기에 그대로 남아있는 단순한 참살자, 석기시대의 사람으로 돌같이 완고한 사람이었다."
- [브라운 신부의 동심], <살라딘 공작의 죄악>, 체스터튼, 1911.

<살라딘 공작의 죄악>에서는 누구나 당연시하는 현상을 뒤엎어 버리는 체스터튼 특유의 고전적 수법이 돋보인다. 즉, 다들 살라딘 공작으로 알고 있던 인물이 사실은 공작이 이니었다는 식. 
한편 가톨릭 사제인 브라운 신부를 통해 당시 '자유주의자'는 '무신론자'로, 가톨릭과 개신교 영역 밖의 종교와 관념들은 '이단' 또는 '이교도'로 명확히 하면서 말이다. 
물론, 모든 살인사건의 범인은 처음에는 그 '무신론자'와 '이단자'들인 것처럼 몰아가지만 단 한편도 그들이 범인인 적은 없다. 
이것 또한 체스터튼의 고전적 '반전' 트릭이다.


"'그러시다면?' 의사는 음험하게 말했다.
'첫째로,' 브라운 신부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 사건은 역시 당신의 관할입니다. 결코 형이상의 문제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장장이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일격이 신의 짓이라는 주장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기적에 의해 일어났다는 주장에서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 따위가 아니오... 대령의 머리를 때려부순 힘은 과학자가 벌써 알고 있는 힘입니다. 자연 법칙 가운데서도 특히 종종 논의의 대상이 되고 았는 힘....'"
- [브라운 신부의 동심], <신의 철퇴>, 체스터튼, 1911.

<신의 철퇴>에서는 모두가 믿는 신의 종교적 징벌인 듯한 살인사건을, 그런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과학적' 요인('중력')에 의한 사건임을 브라운 신부가 밝혀낸다. 
신의 종복인 사제이지만 사건을 종교적 관점이 아닌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플어나가는 또 다른 '반전' 포인트 되시겠다.


2. [지혜(The Wisdom)] - 1914


"브라운 신부는 두 사람을 한 몸에 합쳐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앵초처럼 겸허하며 괘종시계처럼 꼼꼼한 면이 있어 아무리 하찮은 의무사항들이라도 성실하게 이행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를 줄 생각 같은 것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사색가로서의 그는 단순하면서도 강인하여 일단 생각에 빠져들면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지적인 범위 안에서 그 생각은 늘 자유로운 방향으로 흘렀다. 그는 심지어 무의식 속에서조차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어본 후에 가능한 많은 대답들을 생각해보려고 했으며, 그에게 있어 그러한 사고의 과정은 숨쉬기나 혈액순환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렇게 다른 두 개의 면이 지금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2 - 지혜], <크레이 중령의 샐러드>, 체스터튼, 1914.

여러 단편에서 항상 동그랗고 큰 머리, 작고 꾸부정한 자세, 머저리 같은 커다란 검은 박쥐우산 등으로 묘사되며 우수꽝스러운 외모로 그려지는 브라운 신부는 외형과 내실이 상반된 '모순'을 통해 또 하나의 일관되게 전개되는 '반전'적 요소가 된다.


3. [의심(The Incredulity)] - 1926


"... 두 분은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되는 이야기를 해주신 겁니다... 죄가 없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급하고 수상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나중에 펄쩍 뛰면서 자기 스스로가 제시한 생각을 격렬하게 부인한 겁니다. 그런 행동은 자신이 제시한 내용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살인자의 자의식은 항상 과민하게 바짝 서 있어서 처음부터 사건과의 연관성을 잊는 법이 없고, 급기야는 부인하기 위해 모든 일을 기억하게 되죠. 그래서 저는 이 두 분을 제외했습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3 - 의심],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 체스터튼, 1926.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 같은 단편에서는 처음에 범인으로 지목되기애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인물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반전'적으로 보여준다.

추리소설의 중요한 '반전' 포인트.
처음에 누가 봐도 살인자 같은 인물들을 반드시 등장시키고, 심지어 누명까지 씌우라. 
그리고는 그 '무신론자'와 '이교도', '흑인'과 '인도인' 등의 피식민지인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반전'을 통해 폭로하라.


4. [비밀(The Secret)] - 1927


"강한 햇빛이 작은 초록 불꽃처럼 작고 흔들리는 잎사귀들의 얇은 베일에 비춰들고 있었다. 나무에 수백 개의 입이 달린 듯 나무 주변에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4 - 비밀], <보드리 경 실종사건>, 체스터튼, 1927.

원래 평론가였고 시인적 기질이 강했던 체스터튼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풍경과 배경,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시(詩)'적이다.
거의 모든 단편들의 처음은 지역 풍경과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세밀하고 '시(詩)'적인 묘사로 시작된다.


5. [스캔들(The Scandal)] - 1935.


"브라운 신부는 계속 그 (시체가 바닥에 묻힌) 방 안에서만 반복해서 맴돌던 것에 주목했었다. 헨리는 건설 작업을 중단시켜 놓고서, 그곳에서 허버트를 목졸라 죽이고 뚫을 수 없는 바닥 밑에 그 시체를 숨긴 것이었다. '핀'에 찔린 일이 그의 의심의 출발점이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긴 거짓말의 고리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핀 끝이 가리킨 것'은 그것이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 <핀 끝이 가리킨 것>, 체스터튼, 1935.

이제 주인공 '브라운 신부', 아니 작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의 '사상'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다. 

1935년에 발표한 '브라운 신부 전집' 마지막 5권은 [스캔들]이다. 
이미, 전집의 1~2권인 [동심(결백)](1911)과 [지혜](1914) 이후 [의심](1926)에 이르면 브라운 신부는 더 이상 영국만이 아니라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 신부는 더 이상 '회개'하고 사설 탐정을 하며 완력으로 그를 돕는 '플랑보'라는 든든한 보디가드 없이도 수많은 살인사건을 해결한 해외 '셀럽'이 되어 있다.

192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단편집 [의심](1926) 이후로는 가톨릭의 색채가 더욱 강해진 느낌이다. 
'무신론자'(자유주의자)들은 물론 '흑인' 또는 식민자 인도로 대표되는 아시아적 '이교도'들의 등장은 강화된다. 물론, 체스터튼의 '반전' 원리에 따라 이 '무신론자'와 '이단자'는 결코 살인자가 아니다. 
체스터튼의 당시 제국주의적 한계를 지닌 가톨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들 '이교도' 또는 '이단자'들은 편견의 대상일지언정, 어쨌든 그의 추리소설 '반전'의 원리에 따라 결코 살인자가 될 수 없다.

1935년의 전집 5권 [스캔들]에서는 소련 스탈린주의 영향이었는지, '노동조합' 운동과 '볼셰비키' 이야기도 등장한다.

단편 <핀 끝이 가리킨 것>에서는 건설산업 노동조합 운동의 부상과 이에 직장폐쇄로 맞대응하던 자본가 계급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예외없이 체스터튼의 '반전' 원리에 따라 자본가를 죽인 범인은 그를 단체행동으로 압박한 노동계급이 아니라, 믿었던 자본가 동업자(조카)였다.


"물론 공산주의는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이단'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건 자본주의지요. 혹은 사멸한 다윈주의로 가장한 '자본주의 악덕'이라고나 할까요... 자연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법칙이라는 말,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봉급을 받든 말든 상관없다는 얘기들 말입니다. 아, 그거야말로 사람들이 익숙해져버린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그거야말로 공산주의만큼이나 사악한 소리지요. 너무나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반기독교적인 도덕', 아니면 '부도덕'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늘 한 사내를 살인자로 만든 것도 그 '부도덕'입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 <공산주의자>, 체스터튼, 1935.

역시 [스캔들](1935)의 마지막 단편 <공산주의자>에서 또한 귀족, 자본가 같은 지배계급의 일원들을 독살한 범인은 누구나 의심할 만한 '공산주의자'(볼셰비키)가 아닌, 지배계급의 하수인인 회계사로 '반전'된다.

물론, 가톨릭 사상에 따라 당시 불평등의 주요 원인이었던 '악덕 자본주의'의 '부도덕'이 살인사건의 주요 원인이자 전말이었다.

가톨릭 사상답게 방점은,
'자본주의'가 아닌,
'불평등'의 '부도덕'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체스터튼 식의 추리소설 '반전'의 이론적 원리였다.

이제,
6개월 간의 내 나름대로 추리소설 또는 미스터리 소설 '계보 추적'도 끝나간다.

그리고, 
<동서미스터리북스> 전집들과도 진정 이별할 시간이 온 듯 하다.

그리하여 그 마지막은,
미스터리와 SF의 가교 같은,
아이작 아시모프(Isacc Asimov : 1920~1992)로 잡고 그의 단편집 [흑거미 클럽](1970년대)을 마지막 벗으로 삼아 마을 도서관을 나선다.

***

1. [브라운 신부의 동심](1911), 체스터튼, 박용숙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브라운 신부의 지혜](1914), 체스터튼, 박용숙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브라운 신부 전집 1 - 결백(The Innocence of Father Brown)](1911), G.K.Chesterton, 홍희정 옮김, <북하우스>, 2002~2016.
4. [브라운 신부 전집 2 - 지혜(The Wisdom of Father Brown)](1914), 체스터튼, 봉명화 옮김, <북하우스>, 2002~2017.
5. [브라운 신부 전집 3 - 의심(The Incredulity of Father Brown)](1926), 체스터튼, 장유미 옮김, <북하우스>, 2002~2012.
6. [브라운 신부 전집 4 - 비밀(The Secret of Father Brown)](1927), 체스터튼, 김은정 옮김, <북하우스>, 2002~2013.
7.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The Scandal of Father Brown)](1935), 체스터튼, 이수현 옮김, <북하우스>, 2002~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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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신부의 동심 동서 미스터리 북스 5
G. K. 체스터튼 지음, 박용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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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은 언제나, '반전' - 4 : 체스터튼의 '반전' 원리들
- [브라운 신부(Father Brown) 전집 - 1~5], 길버트 체스터튼, 1911~1935.


추리소설 또는 미스터리 소설의 백미인 '대반전'을 '본격적'으로 즐겨 보고자, 추리소설만을 위한 추리소설을 쓴 '본격파' 미스터리 소설의 대가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를 다시 찾아 읽었으나, 실망을 남긴 채 19세기말~20세기 초 셜록 홈즈의 아서 코넌 도일(Arther Conan Doyle : 1859~1930)과 함께 영국 추리소설계의 쌍벽을 이루었다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Gilbert Keith Chesterton : 1874~1936)을 찾았다.

과연,
미스터리 소설 또는 추리소설의 '반전'은 어떠해야 하는가.


"지(知)적인 추리소설의 진짜 목적은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知)'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련의 진실들이 충격적으로 독자들에게 폭로되는 방법으로 알게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훨씬 더 고상한 추리물에서도 진실을 가리는 목적은 단순히 신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명(知)'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목적이 애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히는 데 있다. 그것도 섬광처럼 깜짝 놀랄 만한 형식으로."
- <추리소설의 오류들>, 길버트 체스터튼, 1920.8.28. 장유미 옮김, ([브라운 신부 전집 3 - 의심], <북하우스>, 2002.)


체스터튼의 단편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은 '브라운 신부(Father Brown)'다. 
영국 에섹스 시골 출신인 이 가톨릭 신부는 사제이므로 정식 '탐정'은 아닌데, 추리소설이 으레 그렇듯 사건(특히 '살인사건')의 현장에 어쩐 일인지 늘 등장하여 사법적 과학수사 보다는 심리와 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등장인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원래는 평론가이자 시인의 기질을 지닌 체스터튼은 이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주로 단편 형식으로 수십 편 썼다.
1911년 [동심(결백:Innocence)]이라는 첫번째 단편집을 냈고, 1914년에는 [지혜(Wisdom)], 1926~1927년에 [의심(Incredulity)]와 [비밀(Secret)]을, 1935년 마지막으로 [스캔들(Scandal)]을 발표한다.

내가 올해 3월 아들의 입대 후 마음이 허전하여 책이 잘 읽히지 않아 지금껏 6개월 동안 '미스터리 소설'의 고전적 계보를 나름대로 추적해 보고자 마을 도서관 서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동서문화사>의 '동서미스터리북스(DMB)' 전집에는 체스터튼이 192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발표한 [동심(결백)](1911)과 [지혜](1914)만 번역되어 나왔고, 가톨릭 개종 후 출간한 단편집 [의심](1926), [비밀](1927), [스캔들](1935)은 <북하우스> 출판사에서 앞의 두 단편집에 이어 총 다섯 권으로 완역되어 나왔다.

다시 평론가 체스터튼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는 '추리소설'에 관한 이론적 칼럼을 1920년대 이후 많이 발표했단다. <북하우스>의 [브라운 신부 전집 1~5]의 각 권 마지막 장에는 그의 추리소설 칼럼이 한 편씩 번역되어 있어서 추리소설의 '반전'에 관한 체스터튼의 이론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칙은 추리소설의 목적이 모든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밝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비밀'을 숨기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숨길 가치가 있는) '비밀' 자체도 필요하다...
두번째 중요한 원칙은 추리소설의 정수는 '간결성'에 있다는 것이다. 비밀은 복잡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단순'해야 한다...
셋째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사실이나 인물들은 가능한 한 '익숙'한 사실이나 인물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제시한 제1규칙들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매개체는 생소한 기능을 하는 아주 익숙한 대상이어야 한다. 우리가 깨닫는 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눈에 띄는 동시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
- <추리소설 쓰는 법>, 체스터튼, 1925.10. 'G.K.'s Weekly' 칼럼 중, 김은정 옮김, ([브라운 신부 전집 4 - 비밀], <북하우스>, 2002.)

정리하면 이렇다.

추리소설의 '반전'은,
1.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지만 말고 작가의 분명한 설명을 통해 지적으로 알게 할 것 (<추리소설의 오류들>, 1920.8.)
2. 범인과 그 발각 과정은 '단순성'과 명확성', '간결성', 그리고 '익숙함'일 것 (<추리소설 쓰는 법>, 1925.10.)
3. 인간 본성의 '모순'을 이용해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현상'이 먼저 제시된 후 나중에 모순된 '본질'을 이용해 뒤엎을 것 (<이상적인 추리소설>, 1930.10.)


"범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듯한 인물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일어난 범죄가, 앞서 말했던 설정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이후에는 물론, 심리적으로 납득을 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 인간 본성의 모순이란 사실, 최후 심판의 날이나 죽음의 순간 만큼이나 끔찍하고 충격적인 것이다... 범죄와 고백은 둘 다 낙뢰와도 같은 파국을 야기할 수 있다. 사실 '이상적인 추리소설'이란 사람들에게 세상이 속임수로만 가득찬 것이 아니라 번갯불처럼 들쭉날쭉한 것도 있으면 칼처럼 곧은 것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순기능을 하는 것이다."
- <이상적인 추리소설>, 체스터튼, 1930.10. 이수현 옮김,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 <북하우스>, 2002.)


이런 추리소설 '반전'의 원리들을 체스터튼은 1911년부터 1935년까지 수십편의 비슷비슷한 단편들을 통해 '브라운 신부'의 활약과 함께 실험하고 있다.


1. [동심(결백:The Innocence)] - 1911


"'범죄라는 것은 다른 모든 예술 작품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브라운) 신부는 천천히 말했다. '놀랄 것 없습니다. 결코 범죄만이 지옥의 아틀리에에서 생겨나는 유일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숭엄한 작품이거나 악마적인 작품이거나 예술 작품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에는 반드시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아무리 완성된 모습은 복잡해 보이더라도 그 중심은 언제나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 역시 '검정 옷'을 입은 사나이의 '간단 명료'한 비극입니다... 이 사건 전체가 한 벌의 검은 옷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요...'"
- [브라운 신부의 동심], <기묘한 발걸음 소리>, 체스터튼, 1911.

단편 <기묘한 발걸음 소리>를 보면, 추리소설 '반전'의 '단순성'과 '명료성'을 중심으로 사건 해결의 단초를 보여주는데, 첫 단편 <푸른 십자가>에서 회개시키기 시작한 희대의 세계적 대도둑 플랑보의 '단순성'에 기반한 변장술을 간파하고 재차 설득하나 또다시 회개시키는 데 실패한다. 물론, 절도사건은 간단히 해결하였고 머지 않아 대도 플랑보는 신부에게 설복당해 도둑질을 그만두고 탐정 사무소를 열고는 브라운 신부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된다.


"살라딘은 프랑스의 프리 메이슨(자유주의자)에 속하는 강렬한 무신론자였으므로 (브라운) 신부가 나서면 그의 마음을 흥분하게 할 뿐이었다. 한편 상대방 젊은이는 신부이건 속인이건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풍모와 다갈색 눈을 가진 이 젊은이는 청교도보다도 더 단호한 '이교도'였다. 이 지구의 여명기에 그대로 남아있는 단순한 참살자, 석기시대의 사람으로 돌같이 완고한 사람이었다."
- [브라운 신부의 동심], <살라딘 공작의 죄악>, 체스터튼, 1911.

<살라딘 공작의 죄악>에서는 누구나 당연시하는 현상을 뒤엎어 버리는 체스터튼 특유의 고전적 수법이 돋보인다. 즉, 다들 살라딘 공작으로 알고 있던 인물이 사실은 공작이 이니었다는 식. 
한편 가톨릭 사제인 브라운 신부를 통해 당시 '자유주의자'는 '무신론자'로, 가톨릭과 개신교 영역 밖의 종교와 관념들은 '이단' 또는 '이교도'로 명확히 하면서 말이다. 
물론, 모든 살인사건의 범인은 처음에는 그 '무신론자'와 '이단자'들인 것처럼 몰아가지만 단 한편도 그들이 범인인 적은 없다. 
이것 또한 체스터튼의 고전적 '반전' 트릭이다.


"'그러시다면?' 의사는 음험하게 말했다.
'첫째로,' 브라운 신부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 사건은 역시 당신의 관할입니다. 결코 형이상의 문제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장장이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일격이 신의 짓이라는 주장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기적에 의해 일어났다는 주장에서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 따위가 아니오... 대령의 머리를 때려부순 힘은 과학자가 벌써 알고 있는 힘입니다. 자연 법칙 가운데서도 특히 종종 논의의 대상이 되고 았는 힘....'"
- [브라운 신부의 동심], <신의 철퇴>, 체스터튼, 1911.

<신의 철퇴>에서는 모두가 믿는 신의 종교적 징벌인 듯한 살인사건을, 그런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과학적' 요인('중력')에 의한 사건임을 브라운 신부가 밝혀낸다. 
신의 종복인 사제이지만 사건을 종교적 관점이 아닌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플어나가는 또 다른 '반전' 포인트 되시겠다.


2. [지혜(The Wisdom)] - 1914


"브라운 신부는 두 사람을 한 몸에 합쳐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앵초처럼 겸허하며 괘종시계처럼 꼼꼼한 면이 있어 아무리 하찮은 의무사항들이라도 성실하게 이행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를 줄 생각 같은 것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사색가로서의 그는 단순하면서도 강인하여 일단 생각에 빠져들면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지적인 범위 안에서 그 생각은 늘 자유로운 방향으로 흘렀다. 그는 심지어 무의식 속에서조차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어본 후에 가능한 많은 대답들을 생각해보려고 했으며, 그에게 있어 그러한 사고의 과정은 숨쉬기나 혈액순환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렇게 다른 두 개의 면이 지금 그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2 - 지혜], <크레이 중령의 샐러드>, 체스터튼, 1914.

여러 단편에서 항상 동그랗고 큰 머리, 작고 꾸부정한 자세, 머저리 같은 커다란 검은 박쥐우산 등으로 묘사되며 우수꽝스러운 외모로 그려지는 브라운 신부는 외형과 내실이 상반된 '모순'을 통해 또 하나의 일관되게 전개되는 '반전'적 요소가 된다.


3. [의심(The Incredulity)] - 1926


"... 두 분은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되는 이야기를 해주신 겁니다... 죄가 없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급하고 수상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나중에 펄쩍 뛰면서 자기 스스로가 제시한 생각을 격렬하게 부인한 겁니다. 그런 행동은 자신이 제시한 내용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살인자의 자의식은 항상 과민하게 바짝 서 있어서 처음부터 사건과의 연관성을 잊는 법이 없고, 급기야는 부인하기 위해 모든 일을 기억하게 되죠. 그래서 저는 이 두 분을 제외했습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3 - 의심],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 체스터튼, 1926.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 같은 단편에서는 처음에 범인으로 지목되기애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인물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반전'적으로 보여준다.

추리소설의 중요한 '반전' 포인트.
처음에 누가 봐도 살인자 같은 인물들을 반드시 등장시키고, 심지어 누명까지 씌우라. 
그리고는 그 '무신론자'와 '이교도', '흑인'과 '인도인' 등의 피식민지인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반전'을 통해 폭로하라.


4. [비밀(The Secret)] - 1927


"강한 햇빛이 작은 초록 불꽃처럼 작고 흔들리는 잎사귀들의 얇은 베일에 비춰들고 있었다. 나무에 수백 개의 입이 달린 듯 나무 주변에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4 - 비밀], <보드리 경 실종사건>, 체스터튼, 1927.

원래 평론가였고 시인적 기질이 강했던 체스터튼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풍경과 배경,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시(詩)'적이다.
거의 모든 단편들의 처음은 지역 풍경과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세밀하고 '시(詩)'적인 묘사로 시작된다.


5. [스캔들(The Scandal)] - 1935.


"브라운 신부는 계속 그 (시체가 바닥에 묻힌) 방 안에서만 반복해서 맴돌던 것에 주목했었다. 헨리는 건설 작업을 중단시켜 놓고서, 그곳에서 허버트를 목졸라 죽이고 뚫을 수 없는 바닥 밑에 그 시체를 숨긴 것이었다. '핀'에 찔린 일이 그의 의심의 출발점이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긴 거짓말의 고리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핀 끝이 가리킨 것'은 그것이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 <핀 끝이 가리킨 것>, 체스터튼, 1935.

이제 주인공 '브라운 신부', 아니 작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의 '사상'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다. 

1935년에 발표한 '브라운 신부 전집' 마지막 5권은 [스캔들]이다. 
이미, 전집의 1~2권인 [동심(결백)](1911)과 [지혜](1914) 이후 [의심](1926)에 이르면 브라운 신부는 더 이상 영국만이 아니라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 신부는 더 이상 '회개'하고 사설 탐정을 하며 완력으로 그를 돕는 '플랑보'라는 든든한 보디가드 없이도 수많은 살인사건을 해결한 해외 '셀럽'이 되어 있다.

192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단편집 [의심](1926) 이후로는 가톨릭의 색채가 더욱 강해진 느낌이다. 
'무신론자'(자유주의자)들은 물론 '흑인' 또는 식민자 인도로 대표되는 아시아적 '이교도'들의 등장은 강화된다. 물론, 체스터튼의 '반전' 원리에 따라 이 '무신론자'와 '이단자'는 결코 살인자가 아니다. 
체스터튼의 당시 제국주의적 한계를 지닌 가톨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들 '이교도' 또는 '이단자'들은 편견의 대상일지언정, 어쨌든 그의 추리소설 '반전'의 원리에 따라 결코 살인자가 될 수 없다.

1935년의 전집 5권 [스캔들]에서는 소련 스탈린주의 영향이었는지, '노동조합' 운동과 '볼셰비키' 이야기도 등장한다.

단편 <핀 끝이 가리킨 것>에서는 건설산업 노동조합 운동의 부상과 이에 직장폐쇄로 맞대응하던 자본가 계급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예외없이 체스터튼의 '반전' 원리에 따라 자본가를 죽인 범인은 그를 단체행동으로 압박한 노동계급이 아니라, 믿었던 자본가 동업자(조카)였다.


"물론 공산주의는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이단'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건 자본주의지요. 혹은 사멸한 다윈주의로 가장한 '자본주의 악덕'이라고나 할까요... 자연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법칙이라는 말,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봉급을 받든 말든 상관없다는 얘기들 말입니다. 아, 그거야말로 사람들이 익숙해져버린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그거야말로 공산주의만큼이나 사악한 소리지요. 너무나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반기독교적인 도덕', 아니면 '부도덕'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늘 한 사내를 살인자로 만든 것도 그 '부도덕'입니다."
-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 <공산주의자>, 체스터튼, 1935.

역시 [스캔들](1935)의 마지막 단편 <공산주의자>에서 또한 귀족, 자본가 같은 지배계급의 일원들을 독살한 범인은 누구나 의심할 만한 '공산주의자'(볼셰비키)가 아닌, 지배계급의 하수인인 회계사로 '반전'된다.

물론, 가톨릭 사상에 따라 당시 불평등의 주요 원인이었던 '악덕 자본주의'의 '부도덕'이 살인사건의 주요 원인이자 전말이었다.

가톨릭 사상답게 방점은,
'자본주의'가 아닌,
'불평등'의 '부도덕'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체스터튼 식의 추리소설 '반전'의 이론적 원리였다.

이제,
6개월 간의 내 나름대로 추리소설 또는 미스터리 소설 '계보 추적'도 끝나간다.

그리고, 
<동서미스터리북스> 전집들과도 진정 이별할 시간이 온 듯 하다.

그리하여 그 마지막은,
미스터리와 SF의 가교 같은,
아이작 아시모프(Isacc Asimov : 1920~1992)로 잡고 그의 단편집 [흑거미 클럽](1970년대)을 마지막 벗으로 삼아 마을 도서관을 나선다.

***

1. [브라운 신부의 동심](1911), 체스터튼, 박용숙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브라운 신부의 지혜](1914), 체스터튼, 박용숙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브라운 신부 전집 1 - 결백(The Innocence of Father Brown)](1911), G.K.Chesterton, 홍희정 옮김, <북하우스>, 2002~2016.
4. [브라운 신부 전집 2 - 지혜(The Wisdom of Father Brown)](1914), 체스터튼, 봉명화 옮김, <북하우스>, 2002~2017.
5. [브라운 신부 전집 3 - 의심(The Incredulity of Father Brown)](1926), 체스터튼, 장유미 옮김, <북하우스>, 2002~2012.
6. [브라운 신부 전집 4 - 비밀(The Secret of Father Brown)](1927), 체스터튼, 김은정 옮김, <북하우스>, 2002~2013.
7. [브라운 신부 전집 5 - 스캔들(The Scandal of Father Brown)](1935), 체스터튼, 이수현 옮김, <북하우스>, 2002~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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