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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전투 1 - 히데요시의 죽음
시바 료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이에야스의 '모략'? 히데요시의 '유산'!
- [세키가하라 전투], 시바 료타로, 1966.
"이해관계만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2권. 이에야스의 모략>, 시바 료타로, 1966.
[초한지]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가 일본 역사소설작가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77)을 읽고 난 후, 시바 료타로의 '역사 심리소설'의 면모를 좀더 보고자 집어든 책이 [세키가하라 전투](1966)다.
내 비록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1950~) 12권은 읽을 생각을 안했지만, '일본인의 근원'을 탐색하기 위해 '역사 심리소설'을 쓴 시바 료타로의 작품을 통해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를 이 참에 조금 읽게 된 것이다.
시바 료타로가 15~16세기에 걸친 일본 전국시대를 통해 묘사한 일본인의 '심리'는 '이익'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사내는 워낙 기분의 변화가 별로 없는 성격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막힌 데 없이 쾌활한 사람... 쾌활함을 더욱 연출하여 인심을 수렴하는 데 쓰기도 했다. 이에야스의 성격에는 노부나가라든가 히데요시와 같은 선명한 색채감이 없었다... 어둡고 가라앉은 중간색... 워낙 기분의 변화가 별로 없는 성격이었지만 그 스스로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에게는 평생토록 어린애 같은 데가 있어서 기쁠 때는 몹시 들뜨기도 했지만, 이에야스는 나면서부터 애늙은이 같은 데가 좀 있었다. 점잖은 미소를 띠고 있는 정도의 상태이면 이 남자의 마음 속에 즐거움이 파도치고 있을 때였다."
- [세키가하라 전투], <3권. 미쓰나리, 일어서다>, 시바 료타로, 1966.
100년에 걸친 일본 전국시대를 최초로 통일한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였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아케치 미쓰히데로부터 기습을 받고 자결한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노부나가의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제패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1584년)에서 실질적으로 히데요시 군대를 무력에서 이겼다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를 잇는 전국시대 천하통일은 외교전략의 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몫이 된다.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오다 노부나가는 새를 죽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를 울게 만들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세 인물의 '심리' 대비는 유명하다.
이처럼,
노부나가는 까다롭고 무서웠고,
히데요시는 쾌활하고 자유자재였으며,
이에야스는 신중하고 너그러운 한편, '음흉'했다.
조선과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무리한 7년 전쟁으로 일본 내 민심을 잃은 도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6살 짜리 어린 후계자 히데요리를 제치고 다이코(대정대신) 쇼군이 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략'이 판치게 된다.
노부나가와 동급의 다이묘였음에도 무력에서 실력이 모자랐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이겼음에도 외교와 모략의 실력에서 히데요시에게 밀렸던 이에야스에게는 하데요시의 죽음이 바로 그가 천하를 차지할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나이,
이미 오십대 중반을 넘어섰을 때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측은 변함 없었다. 관측이라기 보다는 '신념'이었다. 아니, '신념'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지혜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 이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미쓰나리가 경모하는 히데요시나 노부나가의 경우에는 모든 정세와 조건들을 유연하게 계산하고 난 후에 얻어진 마지막 결론을 신념에 찬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미쓰나리는 항상 '고정관념'이 먼저였다. 그 '관념'은 모든 정세와 조건을 끼워 맞춰서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 [세키가하라 전투], <4권. 결전 전야>, 시바 료타로, 1966.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대망]의 주인공이 소설의 원제처럼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였다면,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의 주인공은 히데요시의 비서관(지부쇼유)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시절 시동으로 들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가토 기요마사 같이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이라기 보다는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관료'에 가까웠다. 히데요시의 천하쟁패 과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같은 맹장과 구로다 조스이 같은 책사가 필요했지만, 천하통일 이후에는 이시다 미쓰나리 같은 '경리/재정/인사'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낸 관료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책사 구로다 조스이는 히데요시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견제한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 본토에서 먼 남쪽의 규수 지방으로 지혜롭게 은거했고 역시 규수 지역 20만석의 다이묘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 최측근 비서관이자 오사카 인근의 고슈(사와 산성) 19만석의 미쓰나리와 대립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대에서 서로 대립한 가토 기요마사(무장)와 고니시 유키나카(관료) 간 갈등관계의 근원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비서관' 이시다 미쓰나리였다. 미쓰나리 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카는 세키가하라 전투 패전 후 미쓰나리와 함께 참수당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파고든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전국시대를 해쳐온 백전노장 이에야스가 '이익'을 앞세워 도요토미 가신들의 갈등을 조장하고 이간질시키며 가토 기요마사 등의 무장들을 자신의 편으로 사전포섭하는 '모략'의 대가였다면, 그의 적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주군인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의(義)'를 앞세워 간토(관동) 지역 250만석의 당시 최대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간적(奸賊)'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의 책사 혼다 마사노부의 간책에 따라 미쓰나리의 '심리'를 역이용하여 미쓰나리로 하여금 천하를 건 일대 대전투를 일으키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이에야스(에도-동군:7만5천명)와 미쓰나리(오사카-서군:10만명)의 양군이 건곤일척으로 벌인 대전투가 바로 1600년 9월의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였다.
"히데요시는 남들에게 '이익'을 주는 걸로 천하의 영웅호걸을 타락시켰어. 그러다 보니 천하의 인심이 오직 '이익'에만 급급하여 큰 '도리'를 생각하지 않지. '이익'으로 얻은 천하는 그것이 흩어지면 망할 수밖에. 지금 (세키가하라) 미노 평야에서 나이후(이에야스)를 위해 몰이꾼처럼 뛰어다니고 있는 것은 모조리 히데요시가 세운 다이묘들 아닌가? 그들의 정신은 히데요시의 '유산'일 뿐이야."
- [세키가하라 전투], <5권. 시대의 패자, 역사의 승자>, 시바 료타로, 1966.
'세키기하라 전투'의 결론은 전투에서의 '전술'보다 모략에 의한 '전략'에서 이미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의 승리였다.
아직 유학의 '인의(仁義)' 개념이 확립되기 전의 당시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미쓰나리 식의 '의(義)' 관념보다는 원초적인 가문의 생존본능과 '이익'이 우선이었다. '이익'으로 모인 동군은 무공의 경쟁으로 혼란스럽지만 강력하게 뭉쳤고, '이익'보다 '관념'으로 미쓰나리에 의해 강요받아 모인 서군은 군사의 수가 많았음에도 '세키가하라 대전투' 이전에 이미 사전와해된 상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략은,
'먼저 이겨놓고 싸움을 거는(先勝而後求戰)' 손자의 병법이기도 했다.
미쓰나리의 참모 시마 사콘의 패배를 알면서도 목숨걸고 싸우는 사무라이다운 죽음 이후 미쓰나리의 서군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서군의 실질적 주장 미쓰나리가 체포되어 참수당하면서 오랜 기간 '준비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상이 시작된다.
시바 료타로는 [세키가하라 전투] 다섯권의 소설 내내 그 특유의 '역사 심리소설'답게 각 인물들의 심리를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배신자와 양다리 걸친 자, 남의 공적을 가로채는 자와 관망하는 자 등.
사무라이 무사도에 따라 사나이다운 약조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자들도 있었던 반면, 결국에는 가문 또는 개인의 '이익'에 따라 자신의 편을 선택하는 인간 '심리'의 적나라한 본성의 대부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드러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훗날 2백년 이상 지속된 에도 막부의 포용력을 연 이면에 천하 최대권력을 훔치기 위한 음흉한 '모략'의 대가로 그려진다. 열도의 다이묘들을 '이익'으로 꼬셔서 이용해 먹는 한편 겉으로 드러나는 관대함과 온화함은 권력 앞에 선 인간의 무서움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유일한 유학자로 불린 후지와라 세이카의 세평에 의하면, 인간군상의 '이익' 우선주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략'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익'으로 다이묘들의 충성을 모집한 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던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분석에 의하면,
귀족 '적통'이 없던 히데요시는 '상인'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앞세웠고,
타고난 귀족이었던 이에야스는 '농민'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했으나 희대의 경쟁자들이 사라진 후 일생일대 마지막으로 눈앞에 보이는 천하의 권력 앞에서 '이익'을 매개로 한 '모략'의 대가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시바 료타로는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의 마지막 5권의 소제목을 <시대의 패자, 역사의 승자>로 지었다.
'실리'보다 '관념'만을 중시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한계는 있었으나 '의'를 지키고자 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비록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쟁에서는 '패자'였지만, 역사에서는 '승자'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소설의 결론은 현실로부터 도피했다가 다시금 미쓰나리-이에야스와 함께 '천하삼분지계'를 도모하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은둔하려는 히데요시의 예전 책사 구로다 조스이의 다음과 같은 세평으로 마무리된다.
"(구로다) 조스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의/불의'라는 것은 일을 만드는 명분은 될지언정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는 되지 못한다.
...
이번 (세키가하라 전투) 거사는 고 다이코(히데요시)에 대한 더없는 대접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멸망에 즈음하여 미쓰나리 같은 총신들 마저 이에야스에게 달려가 아양을 떤다면 세상은 망가지고 인간은 정절을 잃는다. 더구나 남겨두고 간 총신들에게 그렇게까지 배신을 당한다면 히데요시는 어찌해 볼 도리없이 비참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말한다면 그 사람(히데요시)은 충분히 성공한 것이라고 조스이는 말하고 있었다."
- [세키가하라 전투], <5권. 시대의 패자, 역사의 승자>, 시바 료타로,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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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1966), 시바 료타로, 서은혜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