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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 1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달궁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초한지(楚漢誌)'의 고전적 '심리극'
- [항우와 유방], 시바 료타로, 1977~1979.
제갈량이 '융중대책'(기원후 206년)을 통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출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4백여 년전 한신의 '한중대책'과 장량의 '하읍대책'이 있었기에, 더 나아가 제왕이 된 한신에게 대책을 강권하던 모사 괴철의 고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항우에 의해 관중과 파촉으로 쫓겨나 '한중'의 왕이 된 유방의 대장군 한신이 정세를 분석하며 공을 세울테니 봉토를 나눠달라고 했던 한신의 '한중대책'(기원전 206년).
팽성전투에서 항우의 3만 정예군에게 56만 군웅연합군이 대패하고 자식까지 수레 밖으로 밀어내며 유방이 도망친 하읍에서 제왕 한신과 양왕 팽월 등에게 봉토를 하사하여 독립시키고 그 힘으로 항우를 포위하자고 제출한 장량의 '하읍대책'(기원전 205년).
제나라 정벌 후 평정을 위해 제나라 왕위를 내려달라고 유방을 협박한 한신에게 종횡가적 책사 괴철(괴통)이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 양국의 전쟁을 한신의 독립된 제나라가 합세한 '삼국'의 전쟁으로 만들어 오랜 전란을 끝내자고 제안한 '천하삼분지계'(기원전 203년).
이처럼, '초한지'는 '삼국지'의 주요 모티브다.
정사로서 사마천의 [사기](기원전 1~2세기)와 진수의 [삼국지](기원후 3세기)의 관계가 우선 그렇다.
이는 먼저 씌어진 나관중의 [삼국연의](14세기)와 나중에 발표된 견위의 [서한연의](17세기)의 관계에서도 증명된다.
물론, 이문열은 2000년대 초반에 [초한지]를 새로 쓰면서 명나라 말 종산거사 견위의 [서한연의]가 역사적 사실을 너무 비틀어버린 완전 허구라고 비판하지만.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의 기원은 분명 '초한전쟁'이었다.
또한 촉한황제 유비의 '백절불굴'의 정신 또한 서민황제 한고조 유방의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삼국지'의 '고전'적 원형은 '초한지'라 생각한다.
카프(KAPF)의 젊은 사회주의 작가였다가 일제 말기 친일문인이 된 소설가 팔봉 김기진은 1980년대까지 살아남았는데, 한국전쟁 후인 1954년에 종산거사 견위의 [서한연의]를 토대로 우리 현대사 최초로 '초한지'를 소개했다. 사마천의 [사기]라는 '정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해하결전에서 한신의 '구리산 십면매복'을 배치한 대중민담적 [서한연의]를 토대로 한 것이다. '초한전쟁' 민담이 조선 선조 때부터 우리나라에 유행했다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초한지'의 고전은 어쨌든 팔봉 김기진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초한지-통일천하](1954)라 할 수 있겠다.
이후 1983년에 역시 일제말 친일 문인의 경력이 있던 소설가 정비석의 [소설 초한지]가 또 한 번 신문연재 후 출간되었고, 2008년에는 보수우익 소설가 이문열이 2000년대 초반 다시금 <동아일보>에 연재한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대풍기운비장/大風起雲飛揚)]를 '초한지'로 엮었다. 아마도 정비석은 '구리산 십면매복'을 삽입한 [김팔봉 초한지]와 [서한연의]를 토대로 했을 것이고, 이문열은 그의 작풍대로 '정사'에 기초한 엄밀한 '평역'식 서술을 따랐기에 '구리산 십면매복'을 사실로 고증할 수 없다며 삭제했다.
견위의 [서한연의]를 최초로 완역한 중국고전 전문가 김영문 선생께서는 세상에 '초한지'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초한전쟁을 결정적으로 끝장낸 '구리산 십면매복'이 있는 '초한지'와 그렇지 않은 '초한지' 두 종류라고 한다.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1954)와 정비석 [초한지](1983), 이문열 [초한지](2003~2008), 그리고 김영문 선생 완역 [원본 초한지(서한연의)](2019)는 그 주장과 관점은 다를지라도 우리 '초한지'의 '고전'들이다.
그리고 이 중간 어디 쯤에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1923~1996)의 '초한지'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 몽골어를 전공하고 신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인의 근원'을 찾는 작업을 역사소설로 수행하고자 했다는 시바 료타로는 한 작품을 쓰기 위해 '한 트럭'의 자료를 섭렵하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그런 작가가 '초한지' 또한 썼다.
1977~1979년에 역시 신문에 연재한 [항우와 유방]이다. 신문 연재 시 원제목은 [한의 바람, 초의 비]였다는데, 1980년에 출간하면서 제목을 [항우와 유방]이라 고쳤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80) 또한 소설 '초한지'의 '고전'이라 생각하게 된 건,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적으로 '초한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심리극'으로서의 '고전'적 면모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항우, 유방이 본격적인 활약을 펼친 시대는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춘추와 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고대문명이 형이상학적 사상과 기술문명을 숙성시켰을 때였다. 성숙기에 든 그 문명에는 근대적인 요소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상들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제각기 교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다.
'사(士)'라는 개인도 성립하였다. 사는 사상과 뜻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개인을 가리켰다...
중국사는 참으로 이상하다. 후대에 갈수록 문화의 균일성이 높아지면서 지적 호기심이 약해진다. 후한 말부터 이른바 아시아적 정체가 시작되어, 그 정체가 놀랍게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 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선진(先秦)'시대부터 이 시기까지의 중국은 전혀 다른 민족이 산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팔팔 살아 숨쉬는 사회였다. 진 제국은 사상적으로 보면 '법가'의 실험국가였다. 마치 은밀한 '법가사상'의 비밀결사가 그 성립과정의 이면에서 암약을 펼쳐 궁정을 장악하고, 제국의 원리를 구성하고, 체제를 만들어, 중앙과 지방의 관료조직을 구석구석까지 설계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진 제국을 붕괴시킨 힘은 '유민(流民)'이었다. 그 힘에 방향성을 부여하고 추진시킨 지도자들의 측근에는 '노장사상'의 후예와 '병가', '유가'의 후예, 또는 '종횡가'라는 외교기술자들이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법가'가 없었던 것은 '법가주의'를 쓰러뜨리겠다는 의식이 잠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항우와 유방], <저자 후기>, 시바 료타로, 1980.8.
1980년 [항우와 유방]의 <저자 후기>에서 시바 료타로는 춘추전국시대 농업생산력 발전을 토대로 전개된 정치세력간 권력투쟁과 정치외교술의 발전, 그 속에서 '사(士)', 즉 자신을 써달라고 '상품화'하던 '개인'의 등장을 조명하고 있다. 모두 '사'는 아니지만 사마천 [사기]의 <본기>와 <세가>, 그리고 <열전>에서 그리는 것처럼 등장인물 각자의 개성에 집중한다. 이들 영웅들은 '병가'로서 무인은 물론 '도가'와 '유가', '종횡가'의 모습으로 단결하여 진시황이 남긴 '법가주의' 폐해를 없애고자 했다. 또한 1천 년 정도 지나야 중국 역사에서 정착될 수 있었을 '중앙집권' 체제라는 '신문명'에 저항하던 다수 민중의 지지를 얻은 정치지도자 유방의 궁극적인 승리를 그려내고 있다.
유방은 혁명으로 진나라를 무너뜨렸지만 그가 세운 한나라는 진의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답습함으로써, 이후 오래 지속되는 중국사에서 '천하통일' 군주의 롤모델이 된다.
"진(秦) 제국의 (중앙집권)체제는 분명히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1,000년이 넘는 역사의 성숙이 필요했다. 거기에다 '사(士)'나 서민들이 진 제국 체제의 선악을 논할 여유도 없을 만큼 세금은 과중하였고, 노역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가혹했다. 사람들은 그냥 왕후(王侯)를 모시기만 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옛날을 그리워했다. 그런 기분으로 본다면, (초)회왕의 장엄한 행렬은 (초나라)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는 광경이었다."
- [항우와 유방 1], <항우, 팽성에서 전군을 장악하다>, 시바 료타로, 1977~1979.
백전백패하고 도망만 치다가 운 좋게 황제가 되는 유방보다는 전투에서 백전백승했던 항우의 죽음으로 소설을 끝내는 것을 보면,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주인공은 항우로 볼 수도 있겠다.
실례로 시바 료타로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역동적인 시대의 마지막 이민족으로 '초(楚)' 나라를 지목한다. 오래전 오와 월은 사라졌고 화북의 중원 문명에 대항했던 마지막 이민족이 초나라였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그는 펼치기도 하는데, 아마도 고대 일본 문명에 영향을 끼친 지방으로 중국 동남부 일대를 추정하고 일본 작가로서 '일본 문명의 근원' 같은 걸 염두에 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초한전쟁에서 초나라의 항우가 패배한 후 중원에 도전하는 남방 '이민족'은 사라졌기에, 항우의 죽음이 더욱 비장하다는 식으로 읽힌다.
어쨌든,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의 대단원은 항우가 죽음으로써 장식하고 있다.
"사마천은 스무 살 나이에 역사가로서 그 인생의 초석이 될 여행을 하였다. 그 여행의 마지막에 초나라 땅으로 들어가 이 오강 주변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항우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 밖에 흐르지 않았을 때였기에, 마을 사람들의 기억도 선명했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항우의 마지막을 듣고, 또한 다섯 명의 천연기념물 같은 제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만년에 그는 [사기]를 저술함에 있어 그 제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인간의 추악한 욕망에 대한 요설을 절약해 버렸다.
또한 다섯 명의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초한의 전쟁이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하였다.
그 사건으로 유방의 본질도 사정없이 드러났다. 유방은 그 보잘 것 없는 다섯 명의 병졸에게 약속대로 상을 내렸다. 항우의 사체와 다섯 명의 이름의 배후에 있는 유방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항우는 BC 202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 [항우와 유방 3], <오강의 최후>, 시바 료타로, 1977~1979.
전투에서 진 적은 없으나 초한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게 된 항우가 하늘을 탓하며 오강에서 자결한 후 그의 사체를 하이에나처럼 뜯어가서 유방으로부터 작위와 식읍을 받은 다섯 제후의 이름을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하면서, 한고조 유방과 같은 역사의 '승리자'에게서 보이는 씁쓸한 잔영을 기록하고 있다.
소설 내내 시바 료타로는 각 개인의 심리 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는 '통속연의' 전통대로 상황과 전투장면 같은 배경을 중심으로 연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정비석 '초한지' 등과 차별되는 점이다. 시바 료타로는 그런 배경보다는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변화하는 각자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초한지'의 '고전'적 '심리극'을 시종일관 연출한다.
"... 장량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유방을 재료로 삼아 전투를 구상하고, 그것을 실시하여 결과를 얻는 과정에서 순수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재능은 늘 표현을 갈구한다. 장량은 그 표현의 재미를 알아버렸다. 이제 장량은 진(秦)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다고 해서 유방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유방의 미래를 두 눈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 [항우와 유방 2], <관중을 점령한 유방>, 시바 료타로, 1977~1979.
진나라에 대한 복수 일념으로 살다가 유방이라는 주군을 만난 후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는 최고의 책사로 거듭나는 장량의 심리 변화를 통해, 장량의 '도가'적 또는 '황로술'적 면모를 보여준다.
'노장사상(도가)'의 최고선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흐르는 물과 같은 '변화'다. 이에 따라 장량의 천하통일 계책은 고정되지 않고 물처럼 순리에 따라 흐른다. 평화시기 민중의 통치에는 '의(義)'가 필요하지만, 건곤일척의 초한전쟁에서는 항우라는 대적을 꺾기 위해 '의'를 배반할 수도 있다. 홍구를 경계로 휴전협정을 맺고 돌아가는 항우의 뒷통수를 친 장량의 계략은 그러므로 비열한 모략이 아니라 천하를 위한 상책이 된다.
"그 순간, 한신은 (예전의 장량과 같이) 유방에 대해 감격해야 마땅했다. 만일 항우가 그런 (솔직한) 말을 들었더라면,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신은 그런 순간에 감격할 만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장량과는 기본적으로 달랐다. 한신은 유방을 말하기 쉬운 상대로 파악했고, 그렇게 파악한 이상 그것은 하나의 기호가 되어 머리속에 새겨진다. 하나의 기호에 감격할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 [항우와 유방 2], <초한전쟁의 서막>, 시바 료타로, 1977~1979.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말지만, 제왕 시절 모사가 괴철의 꼬임에도 불구하고 한왕 유방에 대한 '의'를 지켰던 한신은 원래부터 군사천재였던 기질은 물론, 한편으로는 타인에 관한 공감능력이 결여된 일종의 '사이코패스' 또는 '일 중독자'로서의 심리로 줄곧 묘사된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은 본인의 영달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업무중독의 근원이 한신의 이러한 심리이며, 이 때문에 고뇌하는 한신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낸 '심리극'의 고전이다.
"폐하(유방)는 스스로를 '허공(虛空)'이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끝없는 '허공'이라 생각하기에 지자도 용자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허튼 지자들보다도 스스로를 어리석다 생각하시고, 힘 깨나 쓴다고 자만하는 자들보다도 스스로를 용기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시기에,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나 작은 용기를 가진 사람 모두가 폐하의 '허공' 속에서 기분좋게 숨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덕(德)'이라 하나이다."
- [항우와 유방 3], <영웅의 덕은 허공과 같은 것>, 시바 료타로, 1977~1979.
누구보다 초한지 '심리극'의 압권은 한왕 유방이다. 주지하다시피 서민건달 유방의 면모는 허접했고 패배자였으며 도망자였지만, 특이한 용모와 허술한 내면이 그의 주위에 인재들이 모이게 된 요인이었다.
시바 료타로에 의하면, 유방이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허공'과 같은 그의 심리와 그에 따른 포용력, 그리고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었다.
유방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방은 먹고 살기 위해 그의 수하로 모여든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그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매번 패배하고 도망치면서 전투능력은 사라질 지언정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인 식량에 대한 관심은 놓치 않았다. 귀족 출신 항우와 달리 유방은 난세의 '유협(流俠)' 정신의 끝판왕이었고, 결국 '유협'들의 대장으로서 새로운 세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방은 특히 식량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재능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수군의 늪지대에서 도적생활을 할 때도 늘 굶어야 했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싸움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경험만은 지겨울 정도로 쌓아온 사람이었다. 일군의 총사가 된 다음에도 늘 식량을 긁어모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여력이 있을 때 한해서 싸웠다."
- [항우와 유방 3], <항우와 우희>, 시바 료타로, 1977~1979.
장량이 본 것처럼, 그리고 시바 료타로가 평한 것과 같이, 이것이 진말한초의 난세에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결코 무시할 수 없이 주요한 이유였다.
"항우의 가장 큰 실패는 병사들의 배를 곯렸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유민 출신으로서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떠도는 사이에 항우의 병사가 되었던 만큼, 배가 고프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습성을 가진 것도 당연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항우에 대한 존경심 하나 때문이었다."
- [항우와 유방 3], <영웅의 덕은 허공과 같은 것>, 시바 료타로, 1977~1979.
항우는 사람들의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숙부인 항량을 따라 거병을 했고 초나라 의제를 내세운 책사 범증을 초반에 속으로 욕하며 스스로 패왕이 되고자 했던 항우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용력과 최후의 권력 뿐이었다. 실제로 항우의 군대는 그의 용맹한 개인기로 연명했지만 매번 굶으면서 끝내 파멸했다. 이에 비해 유방은 매번 지고 도망치면서도 동료들을 먹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병참기지를 끝까지 지켰으며 그로 인해 다수 민중의 지지를 놓치지 않았다.
'공허'하고 허풍쟁이 같은 유방의 '난세'의 '덕(德)'은 오히려 동지들과 다수 민중의 믿음을 강화시켰고, 이것이 바로 백전백패의 건달에서 천하통일의 황제로 변모하는 유방 '심리극'의 핵심이었다.
'구리산 십면매복'의 극적인 요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초한지'라는 정해진 역사를 작가마다 섭렵하는 이유는, 그만큼 작가마다 남기는 매력이 크기 때문이다.
견위의 [서한연의](17세기)는 고전연희 원문 자체의 매력이 있고,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통일천하](1954)는 현대 최초의 '초한지'로서 고전적 특징이 있으며,
정비석의 [소설 초한지](1983)는 대중판 '초한지'의 현대화로서,
이문열의 [초한지](2003~2008)는 정사에 입각한 '평역'의 고전으로서,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1977~1979)은 초한지 '심리극'의 단연 '고전'으로서,
각각의 마력으로 독자를 유인한다.
그렇게 '초한지' 매니아인 나는,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를 소장하기 위해 주문을 하고는,
시바 료타로의 '심리극' 역사소설 한 편을 더 읽어보기 위해 다시 도서관으로 간다.
다음 책은 시바 료타로의 마지막 일본 역사소설, [세키가하라 전투](1996)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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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우와 유방](1977~1979), 시바 료타로, 양억관 옮김, <달궁(북21)>, 2002.
2. [원본 초한지 - 서한연의](17세기), 견위,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3. [김팔봉 초한지 - 통일천하](1954), 견위, 팔봉 김기진 옮김, <문예춘추사>, 2020.
4. [소설 초한지](1983), 정비석, <범우사>, 2003.
5. [이문열의 사기 이야기 - 초한지](2003~2005), 이문열, <민음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