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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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이전의 도스토옙스키 맛보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꼬마 영웅’을 읽고

단편소설이라 그런 걸까? 다시 푸시킨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는 장편으로 읽어야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는 아무래도 분량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갈망한다. 벽돌이라도 좋다. 아직 목이 마르다. 

이 작품은 꽤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도스토옙스키답지 못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도스토옙스키로 되어가는 과정의 단면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할 듯싶다. 

평면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기에 도스토옙스키라는 칼은 너무 예리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칼은 아무래도 무언가 비딱한 부분이 도드라져야 빛을 발한다. 파헤치고 드러내야 할 것이 존재해야 그 칼은 더 날이 선다. 

어쩌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야 유형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이 초기작들의 연장선 수준에 머문 채 훗날 대문호라 불리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입지전적인 작품을 남기는 데엔 실패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누군가에겐 불행이자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겐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야 유형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겐 소중한 변곡점 같은 지점이리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열한 살 소년의 이야기이자 회고록이다. 약간의 도스토옙스키다운 부분이라고 한다면 이 소년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두 귀족 부인 사이에서 소년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부적절하다고 느껴지겠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이 인간에게 하게 만드는 행위, 이를테면 질투, 수치, 허세, 배려, 연민, 분노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소년에게서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진 후 혼자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과 몸의 반응들이 소년의 경우에서도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꼬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먹기도 한다. 물론 그 한계 때문에 사랑이 생각과 마음에만 머문 채 가슴앓이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 작품은 회고록 형식을 빌려오고 있고, 어른이 되고 난 이후의 관점이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거르면서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M 부인을 사모하는 우리의 꼬마 주인공은 어느 날 그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인 N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둘 사이의 밀회를 목격하게 된다. 서둘러 자리를 비운 N 청년이나 황급히 누군가가 불러 자리를 이동한 M 부인은 N 청년으로부터 받은, 겉봉투에 아무것도 안 적힌 편지를 그만 땅에 떨어뜨린 채 잃어버리고 만다. 그 편지가 발각되면 큰일인 것이다. 바로 이때다. 우리의 꼬마 주인공이 꼬마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는 시기가. 소년은 그 편지를 주웠고 은근슬쩍 자기가 밀회의 목격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M 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 끝에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꽃다발 안에 편지를 보이지 않게 숨겨두어 전달하는 것이었다. M 부인은 소년의 꽃다발을 받고 옆에 두기만 했는데, 마침 벌 한 마리가 날아오고 부인은 꽃다발로 벌을 쫓다가 그 안에 숨겨진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소년은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부인은 모든 것을 짐작했고, 구원을 받은 기쁨과 감동으로 우리의 꼬마 영웅에게 키스를 해준다. 

이제 막 청소년으로 접어드는 한 소년이 유부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다니.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건 것일까. 혹시 스스로가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은 아닐까. 또래 아이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성숙한 편이었다고 적혀 있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틀린 짐작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베리야 유형을 다녀오기 전까지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했던 여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진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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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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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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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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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옷을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구전동화 같은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을 읽고


감상문 (특히 문학 작품에 대한)을 남길 때 나는 작품의 제목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저자 (혹은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실패다. ‘결혼식’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작품을 다 읽어도 왜 크리스마스나 송년회가 아닌 ‘크리스마스 트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별 뜻 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연말이라는 시기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했겠거니 하며 넘어가려 한다 (재독 하면 혹시 알게 될까? 내가 이 작품을 다시 읽긴 할까?).


내러티브에서는 도스토옙스키보다 푸시킨이 더 많이 느껴진다. 여태껏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 비해 평면적이다. 구전동화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 짧지만 웃지 못할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내가 아는 전형적인 도스토옙스키가 느껴지는 부분은 소설 초반 작중 화자의 캐릭터를 묘사할 때 (병적으로 외톨이인 듯한 캐릭터는 꽤나 익숙하다), 그리고 결혼식 신랑 율리안 마스따꼬비치의 5년 전 모습을 묘사할 때라고 할 수 있겠다. 나머지는 죄다 푸시킨인 것만 같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 열여섯 살 소녀, 그리고 그녀의 부모가 가진 재력을 미리 알고 5년 전 한 어린이 무도회에서 열한 살이었던 그녀를 미리 점찍어 두고 결국 자기 신부로 만들어버리는 교활한 기회주의자 율리안 마스따꼬비치. 이 둘의 5년 전과 후의 모습을 모두 알고 우연히 어떤 교회 옆을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게 되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작중 화자. 이것이 이 작품의 전부인 것만 같은 이 기괴한 기분.


열린책들 판으로 14 페이지 밖에 안 되기 때문이리라. 무언가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보여주기에는 너무도 짧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꿋꿋하게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가리라.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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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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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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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서 찾아낸 정직함과 인간다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정직한 도둑’을 읽고


‘정직한 도둑’이라니. 형용 모순인가 싶다. 도둑은 정직보다 거짓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작품을 보기 좋게 관통하고 함축한다. 나는 이 작품 속 정직한 도둑을 인간이라 읽는다. 


이 작품을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두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가난’과 ‘연민’이다. ‘가난’은 ‘정직‘과 ’도둑’을 ‘연민’이라는 통로를 이용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이끈다. 


작품은 조촐한 독신자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난한 일인칭 화자의 일상에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라는 더 가난한 세입자가 침대 하나 놓을 공간 없는 작은 방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어느 날 누군가 현관으로 들어와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훔쳐가는 일이 벌어진다. 화자도 세입자도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대낮에, 그것도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을 가뿐히 뛰어넘는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는 곧 그 도둑을 뒤따라갔으나 10분 만에 빈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유별나게 흥분했던 아스따피 이바노비치와의 대화는 그의 2년 전 과거 기억을 소환해 낸다. 에멜리얀 일리치라는 이름을 가진, 아스따피 이바노비치보다 훨씬 더 가난한 식객이자 술주정뱅이와 함께 보낸 나날들이다. 그리고 이자가 바로 ‘정직한 도둑’이다.


아스따피가 소중히 아끼던 승마용 바지가 있었다. 가난한 그에겐 소유물 중 가장 값비싼 물건이었다. 어느 날 그 바지가 사라진다. 그날은 그 누구도 집에 들어온 적 없었고, 오직 에멜리얀만 외출을 하고 돌아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초자연적인 일의 발생을 고려하지 않는 한 범인은 에멜리얀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에멜리얀은 수차례의 추궁과 의심의 눈초리 끝에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듯한 뉘앙스로 집을 나가고 만다. 증오가 사라지고 미안한 마음이 든 아스따피는 에멜리얀을 기다리고 찾아 나서기까지 한다. 닷새째 되는 날, 형편없는 몰골로 에멜리얀이 돌아오고, 아스따피는 죄책감에 그를 위로하고 다시 보살피기 시작한다. 제발 끊으라고 노래를 부르던 술을 권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에멜리얀은 고열과 오한을 동반한 채 몸상태가 좋지 않아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앓아누운 지 닷새째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작품의 마지막 두 페이지엔 에멜리얀의 마지막 날 아스따피와 나눈 대화가 실려있다. 자기의 낡고 구멍이 뚫린 허름한 외투를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아스따피에게 묻는 에멜리얀. 누더기 같은 옷을 누가 사겠냐마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에멜리얀에게 3 루블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아스따피. 자신이 죽으면 꼭 외투를 팔아 가계에 보태라고 말하는 에멜리얀. 그 순진무구한 말에 마음이 아파 아무 말도 못 하는 아스따피. 그리고 마침내 그 바지를 자기가 훔쳤노라고 고백하는 에멜리얀. 이미 용서를 한 지 오래였던 아스따피.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결국 창백한 상태로 고꾸라져 마지막 숨을 쉬게 되는 에멜리얀. 이렇게 작품은 조금은 허무한 상태로 끝을 맺는다.


재미있게도, 세 명의 등장인물은 도난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한다. 현재의 화자는 눈앞에서 외투를 도난당했지만 큰 분노까지 치닫지 않는다. 비록 두 벌의 외투밖에 없는 가난한 처지였지만, 외투 하나가 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긴다. 한편, 현재의 아스따피는 비록 도난당한 외투가 자기 것이 아니었지만 마치 자기 것인 듯 외투 주인보다 더 속상해한다. 과거의 아스따피 역시 도난당한 승마 바지 때문에 분노했다. 에멜리얀을 원망하고 책망했다. 그리고 정작 도둑이었던 에멜리얀은 자신이 범했던 도둑질에 대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을 만큼 마음 아파했던 것 같다. 아스따피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에서도 나는 뻔뻔함 보다는 측은함을 느꼈다. 어쩌면 아스따피가 에멜리얀이 범인임을 알면서 그를 용서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연민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화자가 눈앞에서 자기 외투를 도난당했을 때 극심한 분노에 빠지지 않았던 이유도 어쩌면 그 도둑에 대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기도 충분히 가난하지만 자기보다 더 가난해 보이는 사람에 대한 연민. 이런 자들 사이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행위를 단순히 범죄라고 매도하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그 훔치는 행위 이면에서 나는 사람의 ‘악함’보다는 ‘약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가진 자들의 그것보다 내겐 더 인간답게 보인다. 동일한 일이 가진 자와 더 가진 자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거기에는 법과 심판과 처벌과 복수 등의 단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여 결국 도난당한 자조차도 인간다운 면을 상실할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왜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 속 도둑에게 ‘정직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다시 묻는다. 그리고 나는 그 정직함은 곧 인간다움이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답해본다. 나아가 그 인간다움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의 본성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가 고찰하고 얻어내고 싶은 궁극의 열매가 아니었을까 하고 조용히 생각해 본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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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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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속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뽈준꼬프’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캐릭터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낯선 인물로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친근하고 익숙한 내 분신으로 자리매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깊숙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가끔은 소름도 끼친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그 모습이 나일 리가 없다고 극구 부인하는 시기도 종종 도래하는데, 이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다 보면 정신분열이란 게 어떤 것인지 왠지 알아버린 것 같은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타자화된 인물의 동기화, 결코 합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어지는 분열과 붕괴, 그리고 결국 마주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 (도스토옙스키의 후기작들에서는 이 막다른 골목에 서광이 비친다. 철저히 외부로부터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묘미 중 하나이자, ‘도스토옙스키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관찰을 성찰로, 성찰을 통찰로 이끌어내는 탁월함을 진지하게 맛보고 싶다면 당장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혹은 책장 깊숙이 꽂혀 있는) 도스토옙스키를 들라. 그리고 읽으라. 몰아와 탈아를 경험하면서 나와 타자와 인간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열릴 것이다. 


뽈준꼬프에게선 마까르도 보이고 골랴드낀도 보인다. 그러나 뽈준꼬프는 마까르도 골랴드낀도 아니다. 뽈준꼬프는 뽈준꼬프일 뿐이다. 이렇게 인물들이 중첩되는 현상은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과정이다. 미래의 도스토옙스키 독자들도 분명히 겪게 될. 도스토옙스키의 많은 작품 속엔 동일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뽈준꼬프’ 같은 단편소설 속 주인공조차 고유성을 띤다. 현재 내 머릿속엔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산재되어 있다. 재미난 것은 모두가 다르면서도 어떤 공통된 속성을 띤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인간이라는 이유이리라. 작품을 읽는 나도 인간이기에, 인간이라는 이유는 작가나 작품 속 등장인물이나 독자가 모두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궁극의 공통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건 결국 인간을 읽는 것이다. 


공통된 인간의 속성 중에서도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파헤치는 속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속성의 진하기에 따라 등장인물들을 일렬로 줄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언젠간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을 한데 모아 이러한 관점으로 비교대조하며 책 한 권을 써도 좋겠다). 그 속성은 ‘스스로를 극단으로 몰아가기’라고 할 수 있을 그 무엇인데, 이 작품 속에서 뽈준꼬프는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도 더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어쩔!). 여기서 ‘우습다’라는 표현은 유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조롱’이나 ‘수치’ 혹은 ‘가소로움’이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표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상황을 뽈준꼬프를 시기 질투하는 악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낼 뿐 아니라 증폭까지 시킨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뽈준꼬프는 직장을 잃게 된다. 


‘설마’ 했던 마음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역시나’ 그 일이 수순대로 벌어지고 나면 ‘이를 어쩌지?’ 하는 생각과 더불어 허탈함에 책을 쉽게 놓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묻게 된다. ‘왜 뽈준꼬프는 저런 걸까?’, ‘무엇이 그를 저렇게 유도한 걸까?’ 하고 말이다. 무엇이든 결과를 보면 원인이 궁금해지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처사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그렇지만,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원인은 증발되고 없다. 허탈한 결과와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품을 다시 읽는 것뿐인데, 그래봤자 또다시 마주하는 건 사건의 결과로 치닫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다가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나 사건의 기원과 발생과정을 따져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는 원인 따윈 관심도 없어 보이니까. 한편으로 나는 이를 다행이라 여긴다. 도스토옙스키가 프로이트가 아니라서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현실도 마찬가지 아닌가. 언제나 이미 벌어진 결과와 현상만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원인은 해석의 영역 아니던가. 


뽈준꼬프의 장난 아닌 장난의 의미를 하필 그날이 4월 1일 만우절이라는 이유로 희석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우절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뽈준꼬프는 같은 일을 저질렀으리라고 보는 편이 어쩌면 도스토옙스키의 의도 (만약 의도란 게 있었다면)에 조금 더 충실한, 혹은 도스토옙스키스러운 해석이 아닐까 싶다. 만우절은 원인이 아니라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해석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일이 잘 풀리다가도 막히고, 막히다가도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다시 잘 풀리는 게 우리의 현실 속 일상이다. 개연성 따윈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소설에서나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보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다른 작가들의 소설과 차이를 내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너무 현실 같아서, 너무 날 것 그대로라서. 그래서 우린 철저한 낯섦 속에서 익숙한 친근함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아, 이런 이율배반성이라니.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이유는 정말 차고도 넘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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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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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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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1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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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랴드낀: 인간의 다른 이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다시 읽고
서사의 부재는 종종 묘사의 풍요로 발현된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읽어내기란 버거운 일일 때가 많다. 특히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매력, 즉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한 독자에겐 커다란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책이라는 늪에 빠져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랄까. 이 작품의 경우 차라리 풍성한 묘사가 외부환경, 이를테면 아름다운 자연이나 여행지의 풍경, 혹은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풀어냈다면 완독 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참히 그런 기대를 저버린다. 시종일관 ‘골랴드낀’이라는 한 사람의 내면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골랴드낀은 웬만한 독자에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책을 절반도 넘기지 못한 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골랴드낀은 소설 초반에도 암시되지만 말미에 강제적으로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임이 분명해 보인다. 정신분열증 환자 내면의 속삭임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으로 가득 찬 250 페이지 짜리 중편소설이라니! 여기에 한 가지 더. 골랴드낀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딱지를 명확하게 달고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그의 분신 (작은 골랴드낀)이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했는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마지막 장까지 전진해야 한다. 실로 지난한 여정이다. 더군다나 무엇 하나 똑바로 얘기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우유부단하고 답답한 말투와 더불어, 자기 자랑과 자기 비하, 오만함과 열등감 사이를 시시때때로 오가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따라가고 있노라면 섬뜩하다가도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너무 불쌍해서 동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기도 하기 때문에 큰 서사가 없는 이 중편소설을 끝까지 읽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 작품 ‘분신’은 독자를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덫 (늪이라고 해야 할까?)에 빠뜨리고 가두어버리는 마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 작품을 3년 전에 이어 재독을 하게 되었는가? 먼저는 나만의 ‘재독 프로젝트’ 첫 대상으로 도스토옙스키 전집이 선택되었고, 두 달 전부터 생긴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과 함께 출간 순으로 한 달에 한 작품씩 읽어나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는 이 작품이 갖는 고유한 가치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두 번째 이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첫 번째 이유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겠다.
도스토옙스키를 등단시킨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화려한 데뷔 직후 쓰인 두 번째 소설이자 앞으로 쏟아져 나올 다른 엄청난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모체가 되는 인물의 탄생이 그려진 작품이 바로 이 작품 ‘분신’이다. 분열된 자아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심리를 작중 인물을 통해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위상은 독보적이라고 나는 평하고 싶다. 이미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대부분 섭렵한 내게도 골랴드낀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분신’의 주인공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 사이에는 18년이라는 세월이 있고 그중 절반은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이 있기 때문에 심리묘사의 깊이랄까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랄까 하는 것이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 (골랴드낀은 상대적으로 약한(?) 혹은 순수한(?) 편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 속에는 주인공 골랴드낀의 분신이 등장한다. 이름도 똑같고 생김새도 똑같다. 작은 골랴드낀이라고 표현된다. 작품을 읽어나가는 중이나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이 작은 골랴드낀이 실제로 독립된 인격체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도록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열어놓는다. 독자들이 개입하여 마음껏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이런 식으로 마련해 두었다고 어설프게나마 짐작해 본다. 그러나 분신이 실재했는지 아닌지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분신이 실재하지 않고 환각에 의한 환상이었다면 의심할 나위 없이 골랴드낀을 정신병자라고 진단 내릴 수 있겠으나, 작은 골랴드낀이 실재하는 독립된 다른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분신이라고 혼자서 착각했다 하더라도 큰 골랴드낀을 정신병자라고 진단하기엔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작은 골랴드낀은 큰 골랴드낀과 단 둘이 대화할 뿐 아니라 큰 골랴드낀의 지인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큰 골랴드낀의 일상 곳곳에 침투하여 현존할 뿐 아니라 사사건건 좋은 것을 가로채고 큰 골랴드낀을 난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세상에 모든 것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그런 인격체가 느닷없이 어느 순간 나타나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마치 무소부재한 신처럼, 존재하고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어찌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독립된 다른 인격체가 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혹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즉 나의 여집합으로 이뤄진 존재일 수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작은 골랴드낀은 큰 골랴드낀이 만들어낸 환상 속 분신으로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마지막 페이지에서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가는 상황에서조차 큰 골랴드낀은 작은 골랴드낀을 보고 인지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재독 하면서 한 가지 새롭게 해석하게 된 부분이 있다. 정신병원으로 호송되는 마차 안에서 끝까지 큰 골랴드낀은 작은 골랴드낀을 보지만, 작은 골랴드낀은 결국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이를 정신분열증이 호전되리라는 희망의 신호로 굳이 확대 해석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나는 연민의 마음으로 그저 바라게 된다. 그의 앞날에는 분신 따위는 보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길 말이다. 하지만, 하필 분신이 사라지는 순간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길 위에서 라니! 하루만 더 빨랐다면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나는 큰 골랴드낀이 작은 골랴드낀을 마차에 태워 저 세상 어딘가로 보내버리는 이 책 이후의 장면을 혼자서 실없이 상상해보기도 했다.
초독 때완 달리 재독 땐 골랴드낀을 타자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도 내겐 흥미로운 점이었다. 섬뜩하지만 나는 골랴드낀의 모습에 내 모습을 투영시켜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도 해보았다. 하루 종일 cctv로 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음을 소거하는 대신 내 마음에 스피커를 달아 녹화를 하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말이다. 어렵지 않게 나는 그 모습이 골랴드낀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합리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나 자신을 정상 인간 범위 내에 유지하려고 애쓸 뿐 정반대 되는 두 입장을 물 흐르듯 오가며 살아가지 않는가. 나 역시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자족하다가도 한순간에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이 정도면 정도만 다를 뿐 나도 골랴드’킴’이라고 불러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어떻게 이 작품을 썼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추리까지 해보았다. 혹시 도스토옙스키도 내가 했던 사고실험을 비슷하게 하면서 여러 날 녹화된 테이프들을 보고 이 작품을 써냈던 건 아닐까. 골랴드낀의 모체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아니었을까. 이 정신병자의 이야기가, 겉으로는 읽기 어려워 보이지만, 의외로 술술 읽을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나도 당신도,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도 또 다른 골랴드낀이기 때문이 아닐까. 초독 때보다 재독 때 골랴드낀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이 연장선에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골랴드낀은 인간을 보편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고, 분신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분열된 자아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골랴드낀은 인간의 다른 이름일 수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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