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변현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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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자만심의 실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다시 읽고


재독이 주는 유익은 깊이와 풍성함에서 찾을 수 있다. 초독과 재독 사이에 바뀌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일 뿐 책은 그대로다. 그러나 재독 할 때마다 나는 책의 동일함보다는 상이함을 더 크게 느낀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풍성함), 이미 보았던 것들은 재해석되어 (깊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는 데에서 경험하는 익숙함과 반가움,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는 낯섦과의 뜻밖의 조우.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놀이가 바로 재독, 곧 깊이와 풍성함의 향연이다. 


현재 나에게 그 대상은 도스토옙스키이고, 나는 가능한 멀리 보면서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평생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두 번 읽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도 꽤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 그 끝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나에게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기념을 할 테다. 그러나 지금은 느리지만 부지런히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글로 남기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함께 읽어나가는 독서모임 가족들 덕분에 나는 재독의 즐거움과 '함께 읽기'의 기쁨을 한꺼번에 누리고 있다. 나중에 지금을 돌아보면, 살면서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소중한 나날들로 기억하게 되리라.


초독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나는 이 작품을 빠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재독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나 두 번째 작품, '분신'보다 분량은 증가했으나 페이지 당 머무는 시간은 오히려 더 짧았다. 읽기도 훨씬 수월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 작가로 재기하기 위해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 그래서 중기 작품으로 구분된다는 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가 '분신'으로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의 극적인 과거 이력을 감안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대중적이고 기본적인 코드를 많이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보다 서사가 돋보인다. '놀랍게도' 이 소설에는 뚜렷한 줄거리가 존재한다 (초기작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고 어쩌면 진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어지는 소설의 기본적인 구성이 보인다. 문제가 주어지고 갈등과 위기가 닥치지만 마침내 해소가 되고 결국 문제도 해결되고 마는 소설의 전형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당시 재기를 노리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가짐을 짐작해 본다. 그에게는 아마도 '타협'이라 부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고려한 결단이지 않았을까. 그의 초상화를 보니 그의 얼굴에서 왠지 초조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다른 하나는 앞선 특징 때문에 부득이하게 맞이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대중성이 고려된 작품은 예술성 측면에서는 긴장이 풀어질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날 것 그대로 해부하여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낀이나 '분신'의 골랴드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당황스러움의 정도가 약하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해부를 덜 마친 채로 수술대 위에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치밀한 분석과 통찰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주 코믹한 상황이나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가려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은 아마도 '분신'의 골랴드낀이 도스토옙스키에게 남긴 상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도스토옙스키적인 소설이다. 주절주절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도스토옙스키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광대 같은 인물, 그리고 그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소가 깃들고 뼈가 심긴 독특한 유머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처럼 입체적으로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어찌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의 전개와 수습, 그리고 그 이면에 흐르는 인물들 내면의 변화 역시 지극히 도스토옙스키적인 명불허전의 터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다운 면이 도드라지는 부분은 포마 포비치라는 인물의 캐릭터 설정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포마 포비치는 작품 속에서 가시적인 문제의 핵심으로 소개된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 소설 화자인 '나'는 성인이 되어 어릴 적 자랐던, 쓰쩨빤치꼬보 마을에 위치한 아저씨의 집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포마 포비치라는 식객으로 인해 아저씨와 아저씨의 집이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었고, 난데없이 아저씨가 자기 가정교사교사와 결혼을 하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확실했고 '나'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문제를 확인하고 포마 포비치의 실체를 알아낸 후 쫓아버리는 방식을 써서라도 아저씨를 구하고 싶었다. 아저씨가 말한 가정교사라는 여자가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었고, 갑작스러운 결혼 제안의 배경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나'가 아저씨 집을 다시 방문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스토옙스키가 표현한 대로, 포마 포비치는 '기형적인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라고 소개하면 아마도 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독 땐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저씨와 포마 사이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재독 땐 포마의 캐릭터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포마에게서 ‘분신’의 골랴드낀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분신’은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사람들’로 단번에 얻은 대중적 명성을 다 갉아먹은 장본인이지만, 향후 거의 모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신병적인 인물들의 원형이 탄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분신’이 더 중요한 위치를 선점한 것으로 보인다. 베스트셀러가 아니지만 도스토옙스키 문학사에서 근원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품인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포마에게서 골랴드낀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나는 믿는다.


건강하지 못한 자존심, 심각한 자존감의 결여, 지나친 열등감, 무기력한 패배감,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 등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의 원형이 골랴드낀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포마에게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골랴드낀과 포마는 다른 인물이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골랴드낀은 어느 곳을 가나 무시당하고 비웃음을 사는 인물이지만, 포마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환대 (어쩌면 경배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야 할 지도)를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애와 지나친 자기 비하가 모두 자기중심적인 교만에서 기인한다는 통찰에 입각한다면, 골랴드낀과 포마 역시 겉으로 드러난 표현형은 반대일지 모르나 그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나 중심적인 옹졸하고 편협한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같은 뿌리를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반대의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기생하려는 욕망’에서 찾는다. 포마와는 달리 골랴드낀은 비록 하급관리직이었지만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아파트도 있었고 거기에 딸린 하인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더라도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포마는 식객일 뿐이었다. 직장은 물론 거주할 집조차 없어 남의 집에 빌붙어 살며 매 끼니를 얻어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기생할 필요가 없던 골랴드낀과 그래야만 했던 포마의 근본적인 차이는 경제적 독립의 유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자존감이 결여되어 시종일관 모욕받는 순간을 살아가는 듯한 포마 포비치.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 그는 기생할 숙주를 찾아야 했고, 장군 부인이라고 소개되는, 아저씨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빨판을 들이대며 첫 번째 제물로 삼았다. 마침 이 장군 부인은 쓰쩨빤치꼬보 마을 지주인 아저씨를 근거 없이 미워하고 있었고, 마침 그렇게 미움받는 아저씨는 미련할 정도로 착했다. 아, 이 오묘한 조합이라니! 교활하고 영악한 포마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포마는 광대 짓을 시작으로 조금씩 자기 세력을 구축해 나갔고, 기어코 숙주보다 더 비대해지기에 이르렀다. 그 집의 모든 하인들까지 그의 세력 아래 무릎 꿇었고 그를 찬양하게 되었다. 그는 마치 신적 지위에 오른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품 속 화자인 ‘나’를 포함하여 실제로 포마의 거짓된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장군 부인의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지지는 포마에겐 천군만마였기에 그 집의 주인인 아저씨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포마의 기만적인 횡포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포마는 이런 기형적인 힘의 위계질서를 십분 활용하여 점점 더 기형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이런 기생충의 박멸은 숙주의 전적인 의지에 달렸다. 포마는 식객일 뿐 그 어떤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마라는 기생충이 거대해진 이유는 오로지 아저씨가 용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위기와 절정은 아저씨의 청혼과 맞물린 채 벌어지는 해프닝인데, 놀랍게도 아저씨의 분노와 무력으로 인해 쫓겨났던 포마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전환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포마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해결사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이 놀라운 발상을 다시 보며 나는 이번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포마가 기만으로 구축했던 그 모든 힘이 모든 문제를 야기했었지만, 그 힘이 그대로 역이용되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버린 것이다. 물론 포마에겐 이 문제의 해결도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의 연장선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 사건 해결을 두고 자신의 복수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문제는 해결되어 이 작품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황당하고 엽기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 빛나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쫓고 있노라면 나는 다시금 도스토옙스키의 통찰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흥미 위주의 소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고, 대중적인 시도를 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도스토옙스키라는 진한 향이 배어있지만, 나는 도스토옙스키 중기작의 문을 연 이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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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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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지


에밀리 브론테 저, '폭풍의 언덕'을 읽고


일주일 남짓 나는 거의 매일 한 시간 가까이 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초 영국 요크셔에 위치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로부터 4마일 정도 떨어진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다녀왔다. '워더링 (Wuthering)'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방언이고, '하이츠 (Heights)'는 '높은 곳'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그 뜻과는 별 상관없이 어떤 장소를 지칭할 때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참고로 내가 거주한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쉐이커 하이츠 (Shaker Heights)였고, 캘리포니아에 살 때 옆 동네는 아시엔다 하이츠 (Hacienda Heights), 라 하브라 하이츠 (La Habra Heights), 롤랜드 하이츠 (Rowland Heights)였다). 둘을 합친 '워더링 하이츠 (Wuthering Heights)'는 자연스레 '바람이 거세게 부는 높은 곳'으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작품의 원제가 되었다. 


한국어판 제목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의역의 결과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한국어판 제목도 원제를 그대로 살렸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폭풍의 언덕'은 폭풍이 부는 그 어떤 언덕이라도 될 수 있지만, 그래서 낭만성과 막연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워더링 하이츠'는 작품의 주 배경이자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저택으로써 구체성과 고유성을 갖기 때문이다.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잔상도 '폭풍의 언덕'이 아닌 '워더링 하이츠’이고, 막연한 풍경이 아닌 그곳의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굳이 폭풍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석을 시도한다면, 그곳은 폭풍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분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제목이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폭풍이 외부에서 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 속 폭풍의 근원은 자연이 아닌 한 사람이다). 그 폭풍은 '사랑'보다는 '증오' 또는 '복수'에 가깝고, '선'보다는 '악'이, '낭만'보다는 '욕망'이 도드라진 실체로써 인간의 어떤 내면이나 특정한 감정을 나타내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진다. 그 이름은 '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이자 모든 불행과 악행의 시작인 사람.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히스클리프의 등장과 죽음으로 그려진다. '워더링 하이츠'의 본체는 곧 '히스클리프'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원제를 ‘히스클리프’라고 했다면 작품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마치 증오하고 복수할 대상이 존재할 때만 생기가 도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그 대상(들)이 존재했던 주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워더링 하이츠이기도 하고, 그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을 느낄 만큼 깊은 관계를 가졌던 캐서린 언쇼를 처음 만난 장소이자, 그가 기록된 삶을 살기 시작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던 장소 역시 워더링 하이츠이기에, 이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워더링 하이츠가 가장 적절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작품을 읽기 전에 짐작했던 막연한 인상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도 바로 이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리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작품을 절반 정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보기 좋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작품은 낭만과는 무관한, 오히려 광기어린 한 사람의 지독한 이기심 내지는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한 사람의 냉혹한 분노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한 사람은 히스클리프이다. 


작품 후반에 히스클리프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는 자신의 모든 분노, 증오, 복수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때문에 불행을 넘어 파멸에 이른 사람이 한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 것처럼 당당했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 고아이자 이방인으로 캐서린을 제외한 모두에게 푸대접을 받는 등 차별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불행으로 밀어 넣을 필요까진 없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순수한 표현들은 종종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19세기 초라는 시대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그는 그 시절 그 공간 덕분에 캐서린이라는 한 사람을 영혼 깊숙이 사랑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성숙하지 못했고 더욱 비뚤어져갔다. 캐서린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채 수년간 타지로 떠나버리고 만다. 


어느 날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이미 결혼해 거주지를 드러시크로스로 옮긴 캐서린에게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는 어린 시절 그를 가장 학대했던 힌들리가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가 살기 시작한다. 그가 그곳으로 간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복수. 피를 부르는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힌들리와 도박을 해서 야금야금 그로부터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빚더미에 앉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힌들리는 정신쇠약까지 걸리며 점점 자멸하게 되고, 히스클리프는 드디어 워더링 하이츠의 실제 주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가 계획한 복수가 가시적인 열매를 맺은 첫 번째 사례였다. 


히스클리프가 증오한 대상은 두 저택의 모든 어른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마치 복수를 위해 사는 사람 같았고, 늘 자신을 피해자로 여겼던 듯하다. 그의 과도한, 인정할 수 없지만 스스로는 절제하고 있는 듯한, 분노는 결국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캐서린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나는 이 시기가 리스클리프에겐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보란듯이 정반대의 길로 향한다. 더욱 비뚤어져간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르러 남은 거라곤 더욱 망가지는 길밖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히스클리프는 그 이후 어른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모두 파멸시키기로 작정한 듯한 사람으로 변모해 간다. 


이 작품을 히스클리프를 중심으로 보면 그의 복수극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장점도 많이 가진다. 물론 히스클리프를 제외하면 모든 등장인물들이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총 세 세대에 걸친 여러 다른 인물들 사이의 사랑과 일상 이야기는 이 작품을 충분히 매력적이게 한다. 특별히 캐서린 언쇼가 죽는 날 태어났던 그녀의 딸 캐서린과 힌들리가 남기고 간 아들 헤어튼, 그리고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워더링 하이츠의 하인 조셉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작품 역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상이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잘 그리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와는 달리 에밀리 브론테는 이 작품에서 서사와 대화 위주의 전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두 작가의 공통점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도스토옙스키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찰과 분석과 통찰로써, 에밀리 브론테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적인 흥미를 느끼며 책장을 넘기고 싶은 독자라면 나는 이 작품을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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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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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을 기꺼이 껴안는 삶

조르주 페렉 저, ‘보통 이하의 것들’을 읽고

처음 읽는 조르주 페렉. 그에게 ‘일상의 글쓰기’라는 타이틀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 소개된, 다분히 실험적이고 집요하여 당황스럽기조차 한 그의 글들은 넌지시, 그러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 대부분의 일상을 이루지만 익숙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어느새 일상에서 탈락되고 배제되어 버린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후반전이 빛날 수 있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일까.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 장소들, 공간들이 다르게 보였다. 

페렉의 글이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들을 기억나게 해서 여기 소환해 본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의 ‘주목할 만한 일상‘을 읽고 쓴 감상문의 앞부분이다. 일상에 눈을 돌린 작가들의 글은 한결같이 조용히 마음 깊은 곳을 터치하는 것 같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는 일상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목하라고 외친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우리들의 삶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들의 현재가 살아 숨쉬는 곳, ‘지금, 여기’의 무대, 즉 우리들의 일상을 알아채고 느끼고 누리라고 말한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마치 자신의 인생을 재방문하듯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한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항상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는 삶의 터전. 비록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아무나 볼 수 없고, 또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조각들. 이는 곧 신비,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일 것이다.” 

문득 어른으로 성숙해졌다는 지표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눈이 깊은 자의 시선은 어디를 향할까.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 낯선 영화 같은 찰나가 아닌 묵직하게 삶을 차지하고 있는, 빛바랜 일상이 아닐까.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페렉의 낯선 글쓰기 덕분에 평범하고 익숙했던 내 삶을 낯설게, 하지만 더욱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미지의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내 손에 쥐어진 보석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다. 

페렉이 말한 대로 최소한의 경험과 적극성을 갖고 작은 행운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한가로이 산책을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로부터 배제되었던 익숙한 것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며 보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저 높고 빛나는 곳을 향한 눈을 낮추어 겸손하고 경건한 자의 마음으로 내 소소한 일상을 기꺼이 껴안는 삶을 살고 싶다. 페렉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을 결코 제대로 알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들과 친분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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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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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기


김진영 저,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한 장을 더 넘기면 차례가 나온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의 시간이 덩그러니 적혀있다. 1952년생인 저자 김진영은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2018년 8월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간은 이미 암덩어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공식적인 진단을 받았던 그날 그는 암 환자가 되었다. 그 후, 1년 하고도 1개월. 비록 건조한 문자로 적혀 있지만, 이 책의 차례는 저자가 암 환자가 되고 암에게 육체를 내어주기 직전까지 그의 숨과 그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작가의 말'을 제외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읽고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마음이 다시 무너졌다. 나는 죽기 3일 전에 과연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암 환자로 지낸 1년 1개월간 저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였던 것 같다. 총 234편의 짧은 일기 가운데 수 차례 언급되기도 했고, 이 책의 부제도 같은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직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선 면밀한 비교가 불가능하겠지만, 저자가 스스로 바르트와 비교한 바에 따르면, 바르트의 일기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인 반면, 저자의 일기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이다. 즉, 바르트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상황을 애도한 반면, 저자는 '사랑하는 주체'를 잃어가는 상황을 애도한 것이다. 요컨대, 사랑의 객체와 주체의 차이. 저자는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은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라고. 자신은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아, 이런 사유라니! 죽음을 앞둔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감정은 벅찬 가슴을 무너뜨리고, 이성은 맑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타자의 상실을 저울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주체의 상실보다 사랑받는 객체의 상실이 내게도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는 나를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는 싫은 마음. 공감이 된다. 특히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라는 존재자로서 나는 이 마음을 더 공감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의 근원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되면 사람은 이타적이 되는 걸까. 


이어령 선생님은 88세로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사랑을 언급한다. 복막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맹장과 대장, 간으로 전이되어 두 번째 수술을 받은 후 치료 중단을 선언하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친필로 쓰신 글의 요지가 '사랑'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고 했다. 김진영 선생님 역시 이 책에서 사랑을 언급한다.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거라고, 그것만이 자기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라고. 그런데 가만히 다시 보니, 이 다짐이 적힌 204번째 일기는 "병원에 다녀왔다. 결과가 안 좋다."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 나는 나의 미래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


이것 말고도 이 책에 담긴 문장들은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깊다. 활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이 책의 바른 독법은 여백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간이 더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로 다가간 순간들을 살아내는 저자의 일상도 활자가 아닌 여백에 더 많이 담겨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 가운데 매일 같이 도래한 아침의 숭고함을 알고 그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는 저자의 몸과 마음도 활자로 쓰인 문장이 아닌 쓰이지 않은 문장들에 훨씬 더 많이 녹아있을 것이다. 책을 덮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을 듯하다. 그러나 죽음을 깊은 묵상한 자로서 나는 다가오는 '오늘 하루'를 더 감사하며 더 소중하게 살아내리라. 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리라.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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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성경을 읽다
이상환 지음 / 도서출판 학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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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의 또 하나의 좋은 안내서


이상환 저, 'Re: 성경을 읽다'를 읽고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안내서로 나는 그동안 여러 번 더글라스 스튜어트와 고든 D. 피가 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김근주 교수가 쓴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추천하곤 했다. 이제 한 권 더 늘었다. 바로 이 책, 이상환 목사가 쓴 'Re: 성경을 읽다'이다. 이 세 권을 읽고 본격적인 성경 읽기에 들어간다면 주문 외우듯 수십 번 성경만 통독한 어르신들이 닿지 못한 깊이까지 이해하고 건전하고 건강하게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족과 함께 최근 4년간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나니 올해부터는 약간의 갈증이 생겼었다. 내년부터는 조금 더 깊고 넓게 성경을 읽고 싶어서 최근에 나는 그 해결책으로써 스터디 바이블 하나를 구매했다. 가족과 함께 읽어나가는 성경 읽기도 지속하겠지만, 내년엔 혼자서 매일 스터디 바이블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애써볼 작정이다. 이런 상황에 때마침 이 책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역시 하나님은 나의 시간표를 잘 아신다. 


이 책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다. 쉽고 간결하여 신학서적이라는 분류가 무색할 만큼 읽어나가기가 수월하다 (나는 3시간 채 걸리지 않아 다 읽어버렸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해석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의 진입 장벽을 낮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프로 생물학자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전공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진입 장벽이 낮다는 말은 결코 이 책이 가벼운 책이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과 오랜 연구가 만들어낸 열매일 것이다. 독자들은 그저 이 단 열매를 따먹으며 성경 해석에 대한 바르고 건전한 자세를 배우기만 하면 된다.


저자가 짚어 주듯이 성경은 양면성, 즉 역사성과 초월성을 가진다. 특정한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문서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만 귀속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니는 초월적 문서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지만, 유한한 인간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이 양면성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접근하려고 애써야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의사소통 모형을 소개한다. 이 책의 목적은 의사소통 모형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쉽게 풀어내는 일이다. 


의사소통 모형은 전통적인 해석학의 세 가지 접근법인 (1) 저자 중심 (텍스트 뒤에서 해석), (2) 텍스트 중심 (텍스트 안에서 해석), (3) 청중 중심 (텍스트 앞에서 해석)을 절충한 모형이다. 저자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텍스트와 청중이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저자가 미상인 경우엔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텍스트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저자의 의도를 놓치거나 그것과 무관한 해석을 하는 위험이 커진다. 무엇보다 텍스트 안에 갇혀 콘텍스트를 놓치기 쉽다. 청중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고정된 의미는 사라지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얄팍한 상대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커진다. 그러므로 건전하고 온전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이러한 세 가지 접근법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절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자가 소개하는 의사소통 모형인 것이다. 


다행히도 내가 수년 전부터 읽어온 성경 해석에 관련된 신학 서적들은 이미 이러한 의사소통 모형을 이용하여 집필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나 김근주 교수, 톰 라이트나 스캇 맥나이트의 책들을 떠올려보면 저자나 텍스트나 청중 중심으로만 치우쳐 쓰인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의사소통 모형은 이미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모형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특별하다기보다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성경 해석 접근법인 것이다. 


자주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지 우리에게 쓰이지 않았다."는 문장은 성경 해석학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일차 독자와 이차 독자 사이의 간격, 즉 수천 년 전의 원청중 (일차 독자)과 현재 우리 같은 이차 독자의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와 일차 독자 사이에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통하는 단어들이 시공간이 다른 이차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원청중 혹은 일차 독자에게 가서 저자가 쓴 단어의 의미와 맥락을 물어보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일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차 독자인 우리들에게 완전한 성경 해석은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성경 해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성경 텍스트만 공부하는 바이블 스터디를 넘어 성경의 다층적 측면까지 살피는 비블리컬 스터디즈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절대적 확실성을 지양하고 합리적 확실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웨슬리안 사변형의 네 요소인 성경, 경험, 전통, 이성 중 으뜸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모두가 평신도 신학자가 되길 요구하는 저자의 바람에 나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공부와 신학 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학영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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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사자 2024-03-13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좋네요. 리뷰 참 잘 쓰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