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1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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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랴드낀: 인간의 다른 이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다시 읽고
서사의 부재는 종종 묘사의 풍요로 발현된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읽어내기란 버거운 일일 때가 많다. 특히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매력, 즉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한 독자에겐 커다란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겨도 넘겨도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책이라는 늪에 빠져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랄까. 이 작품의 경우 차라리 풍성한 묘사가 외부환경, 이를테면 아름다운 자연이나 여행지의 풍경, 혹은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풀어냈다면 완독 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참히 그런 기대를 저버린다. 시종일관 ‘골랴드낀’이라는 한 사람의 내면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골랴드낀은 웬만한 독자에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책을 절반도 넘기지 못한 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골랴드낀은 소설 초반에도 암시되지만 말미에 강제적으로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임이 분명해 보인다. 정신분열증 환자 내면의 속삭임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으로 가득 찬 250 페이지 짜리 중편소설이라니! 여기에 한 가지 더. 골랴드낀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딱지를 명확하게 달고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그의 분신 (작은 골랴드낀)이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했는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마지막 장까지 전진해야 한다. 실로 지난한 여정이다. 더군다나 무엇 하나 똑바로 얘기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우유부단하고 답답한 말투와 더불어, 자기 자랑과 자기 비하, 오만함과 열등감 사이를 시시때때로 오가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따라가고 있노라면 섬뜩하다가도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너무 불쌍해서 동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기도 하기 때문에 큰 서사가 없는 이 중편소설을 끝까지 읽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 작품 ‘분신’은 독자를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덫 (늪이라고 해야 할까?)에 빠뜨리고 가두어버리는 마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 작품을 3년 전에 이어 재독을 하게 되었는가? 먼저는 나만의 ‘재독 프로젝트’ 첫 대상으로 도스토옙스키 전집이 선택되었고, 두 달 전부터 생긴 독서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과 함께 출간 순으로 한 달에 한 작품씩 읽어나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는 이 작품이 갖는 고유한 가치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두 번째 이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첫 번째 이유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겠다.
도스토옙스키를 등단시킨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화려한 데뷔 직후 쓰인 두 번째 소설이자 앞으로 쏟아져 나올 다른 엄청난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모체가 되는 인물의 탄생이 그려진 작품이 바로 이 작품 ‘분신’이다. 분열된 자아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심리를 작중 인물을 통해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위상은 독보적이라고 나는 평하고 싶다. 이미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대부분 섭렵한 내게도 골랴드낀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분신’의 주인공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 사이에는 18년이라는 세월이 있고 그중 절반은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이 있기 때문에 심리묘사의 깊이랄까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랄까 하는 것이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말이다 (골랴드낀은 상대적으로 약한(?) 혹은 순수한(?) 편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 속에는 주인공 골랴드낀의 분신이 등장한다. 이름도 똑같고 생김새도 똑같다. 작은 골랴드낀이라고 표현된다. 작품을 읽어나가는 중이나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이 작은 골랴드낀이 실제로 독립된 인격체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도록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열어놓는다. 독자들이 개입하여 마음껏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이런 식으로 마련해 두었다고 어설프게나마 짐작해 본다. 그러나 분신이 실재했는지 아닌지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분신이 실재하지 않고 환각에 의한 환상이었다면 의심할 나위 없이 골랴드낀을 정신병자라고 진단 내릴 수 있겠으나, 작은 골랴드낀이 실재하는 독립된 다른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분신이라고 혼자서 착각했다 하더라도 큰 골랴드낀을 정신병자라고 진단하기엔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작은 골랴드낀은 큰 골랴드낀과 단 둘이 대화할 뿐 아니라 큰 골랴드낀의 지인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큰 골랴드낀의 일상 곳곳에 침투하여 현존할 뿐 아니라 사사건건 좋은 것을 가로채고 큰 골랴드낀을 난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세상에 모든 것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그런 인격체가 느닷없이 어느 순간 나타나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마치 무소부재한 신처럼, 존재하고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어찌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독립된 다른 인격체가 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혹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즉 나의 여집합으로 이뤄진 존재일 수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작은 골랴드낀은 큰 골랴드낀이 만들어낸 환상 속 분신으로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마지막 페이지에서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가는 상황에서조차 큰 골랴드낀은 작은 골랴드낀을 보고 인지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재독 하면서 한 가지 새롭게 해석하게 된 부분이 있다. 정신병원으로 호송되는 마차 안에서 끝까지 큰 골랴드낀은 작은 골랴드낀을 보지만, 작은 골랴드낀은 결국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이를 정신분열증이 호전되리라는 희망의 신호로 굳이 확대 해석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나는 연민의 마음으로 그저 바라게 된다. 그의 앞날에는 분신 따위는 보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길 말이다. 하지만, 하필 분신이 사라지는 순간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길 위에서 라니! 하루만 더 빨랐다면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나는 큰 골랴드낀이 작은 골랴드낀을 마차에 태워 저 세상 어딘가로 보내버리는 이 책 이후의 장면을 혼자서 실없이 상상해보기도 했다.
초독 때완 달리 재독 땐 골랴드낀을 타자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도 내겐 흥미로운 점이었다. 섬뜩하지만 나는 골랴드낀의 모습에 내 모습을 투영시켜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도 해보았다. 하루 종일 cctv로 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음을 소거하는 대신 내 마음에 스피커를 달아 녹화를 하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말이다. 어렵지 않게 나는 그 모습이 골랴드낀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합리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나 자신을 정상 인간 범위 내에 유지하려고 애쓸 뿐 정반대 되는 두 입장을 물 흐르듯 오가며 살아가지 않는가. 나 역시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자족하다가도 한순간에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이 정도면 정도만 다를 뿐 나도 골랴드’킴’이라고 불러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어떻게 이 작품을 썼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추리까지 해보았다. 혹시 도스토옙스키도 내가 했던 사고실험을 비슷하게 하면서 여러 날 녹화된 테이프들을 보고 이 작품을 써냈던 건 아닐까. 골랴드낀의 모체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아니었을까. 이 정신병자의 이야기가, 겉으로는 읽기 어려워 보이지만, 의외로 술술 읽을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나도 당신도,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도 또 다른 골랴드낀이기 때문이 아닐까. 초독 때보다 재독 때 골랴드낀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이 연장선에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골랴드낀은 인간을 보편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고, 분신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분열된 자아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골랴드낀은 인간의 다른 이름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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