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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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이전의 도스토옙스키 맛보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꼬마 영웅’을 읽고

단편소설이라 그런 걸까? 다시 푸시킨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는 장편으로 읽어야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는 아무래도 분량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갈망한다. 벽돌이라도 좋다. 아직 목이 마르다. 

이 작품은 꽤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도스토옙스키답지 못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도스토옙스키로 되어가는 과정의 단면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할 듯싶다. 

평면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기에 도스토옙스키라는 칼은 너무 예리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칼은 아무래도 무언가 비딱한 부분이 도드라져야 빛을 발한다. 파헤치고 드러내야 할 것이 존재해야 그 칼은 더 날이 선다. 

어쩌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야 유형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이 초기작들의 연장선 수준에 머문 채 훗날 대문호라 불리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입지전적인 작품을 남기는 데엔 실패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누군가에겐 불행이자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겐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야 유형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겐 소중한 변곡점 같은 지점이리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열한 살 소년의 이야기이자 회고록이다. 약간의 도스토옙스키다운 부분이라고 한다면 이 소년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두 귀족 부인 사이에서 소년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부적절하다고 느껴지겠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이 인간에게 하게 만드는 행위, 이를테면 질투, 수치, 허세, 배려, 연민, 분노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소년에게서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진 후 혼자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과 몸의 반응들이 소년의 경우에서도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꼬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먹기도 한다. 물론 그 한계 때문에 사랑이 생각과 마음에만 머문 채 가슴앓이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 작품은 회고록 형식을 빌려오고 있고, 어른이 되고 난 이후의 관점이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거르면서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M 부인을 사모하는 우리의 꼬마 주인공은 어느 날 그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인 N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둘 사이의 밀회를 목격하게 된다. 서둘러 자리를 비운 N 청년이나 황급히 누군가가 불러 자리를 이동한 M 부인은 N 청년으로부터 받은, 겉봉투에 아무것도 안 적힌 편지를 그만 땅에 떨어뜨린 채 잃어버리고 만다. 그 편지가 발각되면 큰일인 것이다. 바로 이때다. 우리의 꼬마 주인공이 꼬마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는 시기가. 소년은 그 편지를 주웠고 은근슬쩍 자기가 밀회의 목격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M 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 끝에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꽃다발 안에 편지를 보이지 않게 숨겨두어 전달하는 것이었다. M 부인은 소년의 꽃다발을 받고 옆에 두기만 했는데, 마침 벌 한 마리가 날아오고 부인은 꽃다발로 벌을 쫓다가 그 안에 숨겨진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소년은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부인은 모든 것을 짐작했고, 구원을 받은 기쁨과 감동으로 우리의 꼬마 영웅에게 키스를 해준다. 

이제 막 청소년으로 접어드는 한 소년이 유부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다니.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건 것일까. 혹시 스스로가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은 아닐까. 또래 아이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성숙한 편이었다고 적혀 있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틀린 짐작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베리야 유형을 다녀오기 전까지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했던 여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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