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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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보다 느끼는 소설


폴 오스터 저,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를 읽고


퀸은 작가였다.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지금은 윌리엄 윌슨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쓰며 산다. 추리소설의 주인공 탐정 이름은 맥스 워크이다. 퀸은 윌슨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한편으로 그는 워크가 되어 여전히 세상에 발을 걸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워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하고 미행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퀸에게는 허구일 뿐이다. 이쯤에서 나는 궁금해진다. 퀸이 사는 세상은 실재하는 것일까? 허구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퀸에게 실재와 허구는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구분이 되기는 할까?


어느 날 전화가 걸려온다. 잘못 걸려온 전화다. 퀸도 윌슨도 아닌, 폴 오스터라는 탐정을 찾는 전화다 (알다시피 폴 오스터는 퀸과 윌슨과 워크를 창조한 이 책의 작가 이름이다). 윌슨이기도 워크이기도 한 퀸은 자기는 폴 오스터가 아니라며 전화를 끊는다. 다음날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만 받지 못한 채 끊어지고 만다. 퀸은 호기심이 일었다. 운명 같은 걸 느낀 듯했다. 이젠 그 전화가 다시 걸려오길 기다린다. 며칠 뒤 놓치지 않고 전화를 받은 퀸은 즉흥적으로 (아니 이미 계획된 것일지도) 오스터가 되어 사건을 의뢰받는다. 여기서도 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전화를 받았던 오스터가 된 퀸은 윌슨이었을까, 워크였을까? 어쨌거나 퀸은 그 전화 이후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스터가 된 퀸은 사건 의뢰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듣는다. 경도된 이단적 사상에 심취한 엘리트 교수 아버지로부터 어릴 적 9년간 감금 당해 정신은 물론 몸까지 망가져버린 한 성인 남자가 피해자이자 의뢰인이었다. 문제는 아들 감금으로 인해 13년간 감옥 생활을 하던 아버지 (스틸먼)가 내일 출소하여 뉴욕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의뢰자의 아내는 그 아버지가 돌아와 남편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두려워 퀸에게 아버지를 감시하며 남편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퀸은 알겠다며 착수금까지 폴 오스터 이름으로 수표 500달러를 받는다 (미국에서 수표는 받는 사람만 현금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퀸은 수표를 현금화할 수 없다). 마침내 퀸은 폴 오스터까지 된 것이었다. 돈과 상관없이 사건을 맡아 버린 것이었다.


스틸먼은 예상대로 도착했고, 비슷한 사람과 헷갈릴 뻔했으나 퀸은 실수하지 않고 그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의뢰자나 퀸의 우려와는 달리 스틸먼은 그저 노인으로 보일 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는 허름한 여관에 숙박하면서 매일 뉴욕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잡동사니들을 주워 모았다. 퀸은 지루해졌고 미행을 멈추고 스틸먼을 직접 만나 대화해 보기로 작전을 바꾼다. 스틸먼은 경도된 사상에 여전히 심취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변혁을 일으킬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날 대화를 했지만 스틸먼은 퀸을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퀸이 스틸먼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대화를 했던 날도 있었는데, 스틸먼은 전혀 아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안에 갇히고 자기 사상에 갇힌 자일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틸먼이 사라진다. 그가 머문 여관에 가보니 체크아웃을 했다고 했다. 아뿔싸. 퀸은 스틸먼을 완전히 놓쳐버린 것이었다. 


의뢰자의 아내에게 보고를 하려고 전화를 해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어떻게 해도 연락이 불가능했다. 그날 이후 퀸은 의뢰자의 아파트 앞에 노숙자 신분으로 살아가며 몇 달간 의뢰자가 아파트를 나가는지 살피기 시작한다. 먹고살 돈이 바닥나자 퀸은 노숙자로 살기 시작하기 전 잠시 찾아갔던 폴 오스터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수표를 현금화해서 자기에게 준다고 했던 일은 어떻게 됐냐고 묻는다 (폴 오스터를 직접 찾아갔던 이유는 그가 진짜 탐정일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작가일 뿐이었다. 대신 이름이 같기 때문에 수표를 현금화할 수 있었고, 퀸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이후 현금화해서 돈을 부쳐준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때 진짜 폴 오스터는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묻는다. 수표는 부도가 나 현금화할 수 없었고, 그가 미행하던 스틸먼은 두 달 반 전에 브루클린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말했다. 퀸은 전화를 끊고 의뢰자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번호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노숙자 신분으로 살 필요가 없어진 걸 깨닫고 퀸은 집으로 찾아가지만 그 집엔 전혀 모르는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퀸이 몇 달간 집을 비워 아파트 주인이 짐을 모두 처리하고 새로운 세입자에게 아파트를 임대했던 것이다. 퀸은 집까지 잃게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퀸은 의뢰자가 살던, 이제는 텅 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 공간에서 퀸은 자고 쓰고 먹고 (누가 음식을 준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환상일지도) 하다가 자취를 감춘다. 


이 작품의 화자가 누군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작품 끝에서야 알게 되는데, 화자는 퀸도 아니고 전지적 작가도 아니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친구이다. 퀸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오스터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퀸이 빼곡하게 적어놓고 아파트에 남기고 간 빨간 공책에 써진 글로 미루어 작성된 것이다 (즉 이 책의 써진 글은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없다. 동시에, 읽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도 독자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는 논리적 일관성이나 개연성의 결핍을 보완할 수 있는 일종의 탈출구로 작용한다). 


퀸은 무엇을 쫓았던 것일까? 유령을 쫓았던 건 아닐까? 모든 게 누군가의 설계로 인해 진행된 연극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누구의 설계였을까? 왜 그는 퀸을 파괴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한 사람의 운명이 기구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긴 작품인 것일까? 


언뜻 복잡해 보이기도 하고 헷갈릴 여지도 충분히 있는 작품이지만, 저자의 글쓰기는 내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스틸먼의 경도된 사상을 써놓은 부분을 읽을 땐 움베르토 에코를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오로지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소유물인 것으로 보였다. 이야기 전개에서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는 부분도 보이고 엉성한 구성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그다음 작품을 읽어봐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다. 글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가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뉴욕 3부작'의 나머지 두 편, '유령들'과 '잠겨 있는 방'도 마저 읽어봐야겠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느끼려고 하며 읽어볼 생각이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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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열다 -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비아 시선들
토마스 머튼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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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기 위한 정직한 자세


토마스 머튼 저, '성서를 열다'를 읽고


제목이 '성서를 읽다'가 아닌 '성서를 열다'라는 점에 주목한다. 읽기 위해서는 먼저 열어야 하는 법. 그렇다. 이 책은 성서를 본격적으로 읽는 단계가 아닌 그 전단계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는 어떤 책인지, 성서를 읽는 나는 누구인지, 성서를 읽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성서를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저자의 탁월한 통찰과 뛰어난 필력은 덤이다. 


저자는 우리가 종종 성서를 일방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성서를 현실과 상관없이 영적인 세계의 이야기로만 여긴다든지, 거룩하고 독실한 신자들의 전유물로 여긴다든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상식에 반하는 책으로 여기는 경우도 왕왕 벌어지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성서가 어떤 책인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뼈아픈 말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그리스도교가 광신으로, 어리석은 종교성으로 왜곡될 때 우리의 지성은 모욕당합니다'라고.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최근 들어 특히 심해진 것 같은, 창조과학을 내세우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그것도 선택적으로) 읽는 근본주의자들의 반지성적인 주장과 활동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복음과 상황' 2024년 5월호에 실린, 최근 창조과학 비판으로 징계 위기에 처한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의 인터뷰 기사 제목, '두려움은 근본주의를 만들지만, 참된 신앙은 두려움을 이긴다'라는 문장도 연이어 생각났다. 쓰인 지 50년이 넘게 지난 토마스 머튼의 통찰과 우려는 지금 이 시대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존재는 성서 해석의 자세와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실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성서를 향해 묻기 시작하면 성서 역시 우리를 향해 묻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성서를 읽는 것은 단지 읽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서 읽기는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고 상호적인 대화여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성서에서 물으면, 성서는 우리에게 언제쯤 그렇게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서 읽기는 지식과 경험의 축적, 혹은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마치 예수가 성육신하신 것처럼, 마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우리의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인지를 위한 목적을 띠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서를 읽는 우리들은 불편하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성서를 한 번 이상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목사의 설교에 인용되는 구절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성서 읽기일 정도다. 성서 안에 모든 답이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서를 잘 읽지 않는다는 모순은 성서 읽기가 현실 신자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님을 반증한다. 성서는 결코 편한 책이 아니다. 친절하지도 쉽지도 않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어본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깊이 우려하는 점이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결코 편안한 책이 아닌 성서를 우리는 익숙해지다 못해 편안하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읽어보지도 않고, 마치 신앙생활을 오래 한 열매인 듯 우린 경건의 모양만 갖춘 채 성서와 별문제 없이 지내는 법을 터득해 버린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성서를 잘 안다고 확신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말한다.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분투의 여정이라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성서 안의 극명한 걸림돌과 모순을 정직하게 마주하려 분투하는 길이며, 우린 그 길로 나아가려 애써야 한다고.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모순을 손쉽게 해결해 치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넘어선, 그러면서도 때로 우리와 불가사의하게 얽혀 있는, 기이하고 역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나는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뼈 때리는 통찰을 진행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명제에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성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며, 성서에 인격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성서에 대한 참여는 그분과 기꺼이 논쟁하고, 때로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분명한 잘못을 깨닫고 마침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그 전 과정을 포함한다고. 성서는 부정직한 순종보다 정직한 항변을 더 높이 본다고 (아, 명문이지 않은가!). 


저자는 우리가 종종 편향되게 성서를 해석한 뒤 그 한 가지 관점을 '신앙'이라 부른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어서 선포한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오히려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우리의 편향은 우리가 성숙해질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을 배제하고, 그것을 몰이해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나아가, 우리의 선입견, 우리의 한계로 쪼그라들지 않도록, 정해진 답을 가지고 성서를 열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성서를 대함에 있어 지름길로 가고픈 유혹, 절반의 진실에 안주하고픈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우리의 편견에 안성맞춤인 편안한 해석으로 성서를 협소하게 만들면 결국 우리는 성서를 오해하다 못해 진리를 위조하는 데 이르게 될 거라고 경고하면서 말이다 (두렵지 않은가? 창조과학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여). 


두 시간 정도 집중해서 이 책을 읽으며 통쾌함과 동시에 착잡함을 느꼈다. 답을 얻었다는 데에서 통쾌함을 느꼈고, 이런 저자의 가르침을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수십 년 전에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착잡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신앙은 성서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때론 무속적이기도 한 것 같은 뉘앙스가 많이 묻어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 신앙을 배운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경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성서를 제대로 알고, 성서를 읽는 우리를 제대로 알고, 성서의 가르침을 하나씩 배우며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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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말하다 - 비극으로, 희극으로, 동화로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오현미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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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싶은 설교


프레드릭 비크너 저, '진리를 말하다'를 읽고


설교자들이 주요 독자층인 듯한 이 책은 설교를 주로 듣기만 하는 나에게 다시 설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에 잠시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설교를 들어본 횟수가 손꼽을 정도인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시대 이 한국 교회에 목사는 참으로 많은데 참 설교자가 요원하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


진부할 정도로 너무 당연해서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명제 중 하나는 '설교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비슷한 여정을 겪는다. 특히 늙어가는 중엔 비틀거리면서도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오랜 시간 길을 잃거나, 완전히 길을 벗어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꽤 오래 길을 벗어났었다 (어쩌면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른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고, 의심의 어두운 숲을 지나야 했다. 그때 내게 가장 갈급했던 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하나도 몰랐었다). 깨닫기 위해선 먼저 들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그것을 듣지 못했다. 내 귀가 가려져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무도 내게 진리를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어두운 옛 기억의 저장고를 방문해 본다. 그리고 가정문으로나마 이렇게 바라게 된다. '그때 내 옆에 복음의 진리를 담백하게 들려주는 설교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하고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 비크너는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아니 어쩌면 유일한, 설교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그는 복음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비극의 소식이라고 한다. 반면, 복음은 누군가가 그 인간을 위해 희생하여 그 인간은 어쨌든 사랑받고 죄 사함 받으며 구원을 경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희극의 소식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 비극과 희극의 만남은 너무 좋아서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 같은, 즉 동화 같은 소식이라고도 한다. 복음은 비극이기도, 희극이기도, 또 동화이기도 한 진리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싶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임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깨우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 은혜 이전에 죄에 빠진 상태를,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 이전에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임했던 흑암과 공허와 혼돈을 직시하게 도와주는 것, 그러니까 희극의 소식 이전에 비극의 소식을 먼저 들려주는 게 설교의 바른 순서라는 생각이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은 채, 다시 말해 비극의 소식이 거세된 희극의 소식만이 설교라는 타이틀로 전해지면, 그 소식은 영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엉뚱한 말로 소망과 위로와 힘을 주려는 가식과 위선의 말장난에 그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많은 설교가 이런 모습을 띠고 있다!). 


나아가 비극과 희극이 만난다는 것, 빛이 어둠에 최종 승리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동화라는 비크너의 말이 지금도 내 귓전에 맴돈다. 그리고 그 동화는 허구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는 실제 역사라는 말도 큰 감동이 된다. 현실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런저런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세상 풍파에 살아남는 처세의 달인, 즉 어른의 모습으로 서려고 나도 모르게 애쓰던 내 모습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이에 찬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복음의 진리를 계속 듣고 싶어 하고 그 진리의 성취를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며 실제로 동참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된다. 매주마다 기대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설교, 하나님 백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설교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꼬박꼬박 듣고 싶다. 나 자신을 직시하여 깨어지고 회개하고 참회하게 되는 설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이 감사와 축복으로 충만하게 여겨지는 설교,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설교, 그런 설교가 모든 교회에서 들려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 프레드릭 비크너 읽기

1. 주목할 만한 일상: https://rtmodel.tistory.com/762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https://rtmodel.tistory.com/1059

3. 진리를 말하다: https://rtmodel.tistory.com/1783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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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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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인식의 다리


파스칼 메르시어 저, '언어의 무게'를 읽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그는 그저 하나의 몸짓일 뿐 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자에 의해 이름이 불리는 존재만이 비로소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말일까? 나는 이 시에서 '이름'을 '언어'로 바꿔본다. 그러면 언어는 자연스레 무게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잇는 다리의 무게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겠지만, 작품 속 주인공 레이랜드의 시간도 여러 번 재부팅된다. 그럴 때마다 언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인생의 여러 막을 닫고 다시 여는 무대 커튼 같은 것이었다. 커튼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순간이 그에게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재인식하는 순간이었던 걸까. 일상에 흩어진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빛을 잃어가는 동안 우리는 점점 무뎌져간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구원을 맞이하고, 우린 그제야 빛바랜 사진을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바라보듯 잃었던 의미를 재발견하며,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곤 하는 것이다. 언어는 잃었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재해석하게 해 주며 인생의 새 막을 여는 구원의 열쇠이기도 하다.  


레이랜드는 과거에 옥스포드를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러나 그에게 옥스포드는 몸에 안 맞는 옷이었다. 여러 언어를 알던 동양학자였던 삼촌 집을 찾은 어느 날, 거실에 붙어있는 지중해 연안의 지도를 보며 레이랜드는 남다른 꿈을 갖게 된다. 지중해에 접한 모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것. 언어에 재능과 애착이 있던 그는 도망 나오듯 대학을 그만두고 주먹구구식으로 여러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무모한 일처럼 보였다. 이 작품의 저자 파스칼 메르시어의 전작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떠오를 만큼 말이다. 그 역시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한 여자를 만나 포르투갈어를 들은 뒤 모든 걸 내려놓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노년의 그레고리우스가 행했던 무모한 일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레이랜드의 무모한 일이 그의 인생을 더 크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삶이나 남들의 시선에 맞춘 삶이 아닌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던 레이랜드는 낡은 호텔의 종업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고,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틈타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 연장선의 삶에서 운명처럼 리비아를 만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 당시 기자였던 리비아는 출판사 사장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면서 그녀가 출판사를 물려받게 된다. 영국에서 만난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갑작스레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로 이사하게 된 이유였다. 트리에스테는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였다.


꾸준히 번역가의 길을 걷던 레이랜드는 트리에스테에서 아내를 심장마비로 잃고 큰 충격에 휩싸인다. 다시 안 맞는 옷을 입듯 출판사를 인계받아 이끈다. 번역 일도 계속하면서 말이다. 이때부터 레이랜드는 죽은 아내에게 남몰래 꾸준히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리비아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리비아는 레이랜드의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그런 존재가 사라졌으니 레이랜드가 느끼는 하루하루는 그저 반복되고 견뎌내야 하는 빛바랜 일상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랜드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청천벽력이었다. 발작을 경험했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뇌 스캔 사진에는 눈부실 만큼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뇌종양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하루하루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레이랜드는 출판사를 매각한다. 큰 결단이었다. 매각한 이후에도 그는 그곳을 떠올리면 사장 자리에 자신이 아닌 리비아가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에게 출판사는 죽은 아내의 분신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이어서 그는 아내와 함께 살던, 그리고 아내가 죽었던, 그리고 성인이 된 딸과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위치한 집을 떠나 홀로 삼촌이 유산으로 남겨준 영국 런던 집으로 향한다. 같은 일상을 그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에겐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이 소설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이후에 소개된다. 그것은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출판사 매각 후 삼촌 집으로 향하는 장면 사이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당황스럽기도 한 그 사건은 바로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과 시한부 선고가 오진에 의한 판단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요컨대 사진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진 아래에 깨알만큼 작은 글씨로 적힌 다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새도 없이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충격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던 것이다. 


아, 오진이라니! 레이랜드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죽었다 살아난 심정이었을까? 감사로 충만한 마음이었을까? 혹시 분노에 사로잡히진 않았을까? 특히 그에게 남다른 의미였던 출판사를 매각까지 한 이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레이랜드는 나중에 여러 번 출판사를 손님으로 방문한다. 초반에는 돌이키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다. 단 열흘만 일찍 알았다면 출판사 매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랜드는 무너지지 않고 진화하고 성숙한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그 사건 때문에 그의 앞에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레이랜드의 성장기 혹은 성숙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모진 운명의 장난 같은 사건도 언어와 함께였다. 그는 발작을 겪을 때마다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읽을 수는 있는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지 두려워했다. 병이나 발작이 몸은 앗아갈 수 있어도 언어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처럼 레이랜드가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려고 했던 건 어쩌면 언어였다. 그는 결국 그의 언어를 지켜내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인생의 새 막을 다시 시작했다. 


레이랜드가 성숙해 가는 과정 역시 언어와 함께였다. 출판사를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런던의 집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사람들과 생기지 않았을 사건들로 인해 그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진다. 중요한 건 그 모든 만남 역시 언어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레이랜드라는 주인공 입장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여러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사 관련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다양한 삶의 굴곡과 명암을 훑어보는 것만 해도 이 작품은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이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모든 삶이 언어로 수렴된다는 점 또한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누군가 인간은 의미중독자라고 했다.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성장하고 성숙하며, 또 언어로 끝이 나는 인간의 삶. 정녕 인간의 내적 발생은 언어로 말미암는가. 인간답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언어를 빼고 인간다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언어의 무게는 결국 삶의 무게이자 모든 의미의 무게이고 결국 존재의 무게가 아닐까. 이 아름다운 작품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읽어온 나날들이 이제 저문다. 하지만 언어로 기록한 이 감상문은 나를 새로운 막으로 인도하리라 믿는다. 내 남은 삶에 하나의 잔상을 남기면서 아름다운 무게를 더하리라 믿는다.


* 파스칼 메르시어 읽기

1. 리스본행 야간열차: https://rtmodel.tistory.com/1203

2. 언어의 무게: https://rtmodel.tistory.com/1726


#비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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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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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지하 세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다시 읽고

차라리 골랴드낀이 나았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이 작품 속 일인칭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지하’라는 또 하나의 세상에서 잉태된 최종 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스로를 소외 혹은 고립시키면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조금 과장해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를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고안한 가상의 생체 실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다시 조용히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아무렴, 이 맛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그런데 왜 이 말을 하고도 나는 겸연쩍은 걸까!)

이 작품 속 화자는 '분신'의 주인공 골랴드낀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골랴드낀을 거뜬히 넘어서고, 나아가 골랴드낀을 향한 향수마저 들게 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는 인물로 내게 다가왔다. 단절, 소외, 고립 같은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열등감, 자존감 결여, 과장된 허세 등의 단어로도 결코 해석할 수 없는, 실로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정신 이상자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골랴드낀은 자신의 분신까지 보고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켜 결국 작품 끝에선 정신병원으로 호송된다. 그러나 이 작품 속 화자는 여전히 건실한 자기만의 세상인 지하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간다. 골랴드낀은 적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낀처럼 최하급 공무원도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도 받고 있었다. 비록 타자로부터 소외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반면, 이 작품 속 화자는 타자로부터 소외되는 단계를 이미 지난 상태다. 타자로부터의 소외는 여전히 지상의 일에 속한다. 화자는 그 세상을 뒤로하고 지하 세계의 시민이 된 지 오래다 (화자가 지상 생활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2부를 이룬다). 게다가 타자가 아닌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단계에 안착한 것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그는 그 속에서 마치 삶의 밸런스를 맞춘 것처럼 나름대로의 안정성을 영위해나가고 있는 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스스로를 소외시킨 결과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살인을 계획하는 기회를 무한히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상황까지 넉넉히 부여한다. 이런 면에서 작품 속 화자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는 (물론 화자 스스로는 자신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파악하고 있지만, 정신이 아픈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지상에 머물며 사람들의 눈에 발각되어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골랴드낀이 차라리 더 낫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다. 작품 속 화자가 골랴드낀처럼 차라리 자신의 분신을 보았더라면, 차라리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켜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더라면, 그래서 정신병원에 끌려갔더라면 나는 차라리 안심이 되었으리라.

작품 속 화자는 세상을 피해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먼 친척으로부터 그가 쉽게 벌 수 없는 큰돈을 유산으로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운명적이게도 그에겐 그 유산이 축복이 아닌 지하로부터의 초대장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지하 생활에서 그의 유일한 벗은 책이었다. 독서는 그에게 오로지 비뚤어진 자아를 증폭시킬 뿐이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 비딱한 자아를 더욱 비대하게 하고 강화시키기까지 하는 촉매제로 책은 그를 더 그의 내면으로 함몰시켰다. 책은 자아를 발전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타자와의 소통이 거세되면 자아를 파멸로 이끌기도 하는 것이다. 혼자 있는 세상에서 책을 읽고 사유하고, 또 책을 읽고 사유하는 지하 생활. 이 단순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제론 위험천만한 삶의 패턴이 바로 화자의 표면적인 일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세상을 피했지만 세상을 모두 아는 것 같은 뉘앙스로 무수한 말들을 지껄인다. 1부를 이루는 말들은 언뜻 보면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것 같으나, 내겐 분열된 자아의 조각나고 편향된 단상들로 가득 차 보였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그가 말하는 주제는 파악하기 쉽지 않았고 집중하기조차 어려웠다.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말하기보다 반복해서 가상의 독자 혹은 청자의 시선을 의식한 채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고 변명을 일삼는다.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유토피아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어느 독자라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나도 공감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화자를 신뢰할 수 있다는 전제가 마련될 때에 한해서다), 그 누구보다도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사람은 내겐 화자 자신인 것처럼 보였고, 자신만의 지하 세계를 수정궁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화자 자신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고로 비판이 힘을 얻기 위해선 비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법이다. 그리고 적당한 자기 검열은 성찰의 좋은 재료이나 지나치면 자기 의심, 비하, 포기, 낙심, 절망으로의 급행 티켓이 되기 마련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켜 관념적인 자아 안에 영원히 갇힌 신세로 전락해 버린, 치우친 공간에서 평형을 이루고 있는 왕이 아니었을까.

놀랍게도 열등감, 자기 비하, 자존감 결여, 과장된 허세 등 일련의 자기 파괴 과정의 끝에서 그는 쾌락을 발견한다.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그는 쾌락을 느낀다. 결핍을 느낄 때 인간의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이다. 그 거듭된 노력이 실패로 이어지면 그다음 반응으로써 포기를 선택하게 된다. 이 포기도 거듭되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불신하는 단계를 넘어서게 되고 얼굴엔 절망이 아닌 조용한 미소가 지어지게 되는데, 이때의 미소는 광기를 머금게 되는 법이다. 아마도 작품 속 화자 역시 이런 비슷한 과정을 거쳤던 탓에 열등감의 심연에서 쾌락을 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진정으로 지하 세계 시민이었고 왕이었던 것이다.

그의 지식과 사상이 글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현실과의 괴리를 피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내가 1부에서 그가 쓴 독백들을, 비록 공감이 가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창녀인 리자로부터 그가 그녀 앞에서 했던 설교가 책 읽는 것 같았다는 평을 듣게 된다. 그는 학창 시절 자기를 소외시킨 친구들에게 복수하고자 학업에 열심이었던 전력도 가지고 있다. 그가 책을 찾고 공부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아는 지식은 이론에 불과했다. 도저히 힘이 있으래야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자의 열변을 신뢰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열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각할 거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2부에서 소개되는 에피소드는 3개다. 첫 에피소드는 장교와 마주 보고 지나칠 때 먼저 피하지 않고 어깨를 과감하게 부딪혀 자존감의 회복을 도모하고자 애쓰는 웃픈 장면들인데,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화자의 캐릭터는 찌질하다는 표현밖에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감에 절어 있다. 놀랍고, 한편으론 가슴 아픈 것은 화자 스스로가 맨 정신으로 장교와 마주칠 땐 자신이 먼저 피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제정신으로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이 화자인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초대받지 못한, 학창 시절 친구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스스로를 초대하여 자발적으로 찾아간 장면들이다. 친구들은 이미 학창 시절 화자를 소외시키고 모욕했던 작자들이었다. 이 모임에 가면 그 과거가 재현 및 반복될 것임은 2 + 2 = 4 처럼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임에 찾아간다. 1부에서 지적한 인간의 비합리성과 모순됨을 그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화자의 캐릭터는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찌질하다는 표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아주 작은 일에 자존심을 부려 체면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또한 그런 시시콜콜한 일들로부터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요상한 지배욕까지 선보이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 요상한 지배욕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창녀 리자와의 만남에서 화자는 마치 자신이 깨우친 지식인이자 선도하는 계몽가 혹은 말로 사람 마음을 휘어잡고 교정하는 카리스마 있는 설교자로 분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리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화자가 연기한 말과 행동이 아닌, 화자가 미처 숨기지 못한 말과 행동이었다. 그녀만큼 그 역시 인생의 바닥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그녀의 모성애와 동정심과 측은지심 및 동병상련의 마음을 자극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한 가지 더 발견할 수 있는 화자의 모습은, 화자는 사랑받아 보지도 사랑을 베풀어 보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타자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고 단절되었던 과거의 상처 속에서 현재를 살아내고 있으며, 지하 세계에 숨어서 그 상처를 보이지 않게 하여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가 바로 화자 자신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지배받기보다 지배하는 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 하는 모순된 자아로 이뤄진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그의 비뚤어진 세계관은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인 인간관계도로 압축될 수도 있겠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자에게 구원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던, 어쩌면 그에겐 유일한 기회였던, 리자가 떠나게 되는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를 매개로 구원을 받는 자리로 나아간다. 자기 객관화의 유무에 따른 열매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작품 속 화자를 비판적으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골랴드낀에서 느끼지 못했던 측은지심을 그로부터 느꼈다. 인간 본성을 더 진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로부터 나의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자아를 발견해서일까. 나 역시 '나'라는 지하에 스스로를 가두고 비뚤어진 상태에서 평화나 정의를 운운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 역시 찌질할 뿐 아니라 요상한 지배욕에 가득 찬 채,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모순된다는 명제를 방패 삼아 그 아래에서 마치 나는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행동을 해도 되는 특권을 얻은 것처럼 종종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편안한 곳이, 내가 합리적이고 모순이 없다고 여기는 공간이 지상인지, 혹시 지하는 아닐지 다시 점검할 필요를 느낀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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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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