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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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 첫 책은 인어공주였다. 온전히 내 것이던 책이었고 한글을 뗀 기념으로 외삼촌이 사주셨던 책으로 기억한다.

얼마나 좋았는지 잠이 들어야 할 시간에도 이불 속에 손전등을 들고 들어가 읽고 또 읽어서 책이 너덜너덜해지고 페이지가 한 장씩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책을 읽고 좋아했지만 풍족하게 가지지 못해서였는지 어른이 된 지금도 난 책 욕심이 많다. 읽어도 또 가지고 싶고, 다 내 거였으면 좋겠고, 같은 책도 리뉴얼 되면 또 사고 싶은 그런 책 욕심 말이다. 명품보단 저렴하고 고상한 취미려니 위안 삼지만 읽기보다 소유에 더 집중된 것은 아닌가 자꾸 돌아보게 되던 찰나에 읽기와 쓰기에 대해서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책 한 권을 만났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고 하면 엄청 대단하게 느껴지고 나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 것만 같은 느낌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인데, 2018년 수상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가 독자에게 건네는 다정함이라니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은 책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 다정함이란 정이 많다는 느낌인데 이 책에서 올가는 다정하기도 하지만 뭔가 상냥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곰살스런 느낌이다. 글쓰기나 독서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은 이런 책이고, 그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과 생각들은 이러하다.'라는 식으로 친절하게 이야기하듯 적은 글이라 느껴지니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올가는 무엇이든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자신의 뇌 속에 있는 기존의 지식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떠올리는 것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다니다 먹게 된 요리와도, 길을 걷다 듣는 행인의 말소리나 새의 지저귐도, 누군가의 움직임과 미소들과 같은 낯섦도 그녀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하는 의식이고 친해지는 과정 중 한 가지 정도인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닐까?


최근 고전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이 책 [다정한 서술자]에서 올가가 글로 정리해 놓은 것을 보니 책에 대한 애정이 더욱 샘솟고, 고전문학을 지속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독서를 통한 타인의 감정과 경험을 알게 되는 과정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인데, 독서의 희열에 대한 부분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와 평범한 독서가인 내 생각이 일치하다니 전율이 일기도 한다.

그녀의 독서 이력에 서가의 왕국을 통치하는 왕과 다름없었다고 표현된 아버지(전직 사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글을 보다가 '우리 아들은 엄마를 따라 그리 도서관을 다니는데 왜 책을 밀어놓는데 진심인 걸까' 생각하는 나는 역시 자녀교육에 진심인 대한민국 부모라는 사실에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언젠가는 아들도 자신만의 북컬렉션을 가질 수 있게 되길... 그 정도만으로도 좋겠다고 바라보기도 한다.



동물과의 교감이나 공감력, 여행에 대한 그녀의 생각, 번역의 힘과 중요성이라든지 번역가와 헤르메스와의 연결고리 등에 공감하며 작가의 독서 목록을 가지고 싶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일화에 왜 난 공감이 되었는지...

독서로 인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졌음을,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버전의 삶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다정함에 난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책을 읽기 위해서다. p.133

그녀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 중에서 글쓰기보다 읽기에 더 집중해서 읽었고, 공감했는데, 글쓰기란 타고난 능력도 있어야겠지만 그만큼 많은 경험과 노력 묵직한 엉덩이가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닐까? 마음속에 영혼을 심어주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서술자를 선물한 엄마와, 서가 왕국의 왕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딸은 훗날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로 자라나고, 그렇게 성장한 그녀는 많은 이야기들이 소멸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도록 엮어내는 작가로 성공했으니 부모의 역할도 무시하진 못할듯싶다.

"내가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날 그리워할 수 있어요?

"때로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어.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되는 거란다." p.334

작가는 글쓰기에 대하여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트렌드를 쫓는 분위기를 지양하고,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쌓아서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자고, 진실과 허구를 굳이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인어공주를 읽으며 [사람이 어떻게 바다에서 숨을 쉬고 물거품이 돼?]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른이 된 이후의 독서는 눈으로 사실만을 쫓고 있었다. 허구와 판타지, 상상 속 이야기들을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을까? 올가의 다정한 서술자를 읽으며 다시금 나의 독서를 되돌아보게 된다. 차원을 넘나들고 시간을 가로질러 다양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책 속 세상과의 소통은 늘 옳다. 그리고 사심이 없는 다정함이라는 도구로 소통하는 세상도 늘 옳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이야기하는 다정한 서술자나 사인칭 시점이라는 새로운 관점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글쓰기와 읽기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에서도 강조되는 다정함에 대한 그녀의 생각들을 12편의 에세이와 강연들에서 읽어보았으니 이제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만나보아야겠다.

[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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