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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사람의집 / 2022년 6월
평점 :
외상을 경험한 사람의 심리적 고통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하는 동시에 그 존재를 외면하게 만든다. p.10
나는 파충류를 무서워한다.
보기만 해도 끔찍함에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벌벌 떨고, 동물원을 가서 뱀 사육장만 지나쳐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빨리 가자고 재촉할 정도로 말이다. 왜 그런고 생각하며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그 이유가 바로 내가 가진 트라우마였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오빠를 따라 냇가에 놀러 가려고 좁은 논길을 지나는데 아주 조그마한 청개구리가 길 한가운데에 딱 버티고 앉아 비켜주질 않는 거다. '눈 딱 감고 점프하면 저 개구리를 지나가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두발 점프를 했는데 슬리퍼를 신은 내 발밑에서 뭔가 물컹~찌익 하는 느낌에 온몸이 떨리며 울면서 오빠~~ 하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 기껏 7~8살 기억일 텐데 지금도 어제 일처럼 아주 세세한 느낌과 감정 그리고 상황들이 선명하다.
트라우마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을 뜻한다. 어린 나이에 개구리로 인해 감정적 충격을 경험한 나는 잊고 지내다가도 개구리와 비슷한 파충류 종류만 봐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는 절대 잊지 못할 그런 기억이 말이다. 그때 이후로 파충류 종류는 내게 너무 큰 트라우마였고 40이 넘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사건도 트라우마로 평생 동안 기억되는데 성적 학대, 아동 학대, 전쟁의 공포, 폭력에 노출된 경험, 가정폭력 등 잔인한 사건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평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무섭고 잔혹한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뇌리에 박혀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은 평생 한 사람을 흔들어 놓기 마련이다.
히스테리가 여성의 자궁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믿었다는 옛사람들과, 성적인 장난감으로 자신의 딸을 친구들에게 제공한 도라의 아버지, 위대한 연구자이지만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탐구했던 프로이트를 비롯한 남성들이 여성의 심리적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고 무시하려 했던 과거의 이야기들이 무척 생경하게 느껴졌다. 여성들이 호소하던 성 학대적인 부분들을 학대가 아닌 음탕한 여인들이 바라고 원하다 일어난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그녀들의 내면의 깊은 곳에 그런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가 표출된 거라고 말하던 프로이트도 그 시대의 고착된 인식들을 그대로 연구에 반영한 게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전쟁 후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개념이 확립된 게 겨우 1980년대니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처의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았던 만큼 아직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일까?
심리적 외상은 무력한 이들의 고통이다. p.70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은 과각성과 침투, 억제라는 세 가지의 범주로 구분된다고 하는데 기본적인 인간관계마저 단절시키고 마는 트라우마는 역시 공포스럽고 힘든 장애라 생각된다. 최근 많은 이슈가 되었던 가스라이팅 사건들도 지속적인 속박에 의한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심리적으로 지배를 받다가 상대방에게 굴복해버리고 상황들을 회피하려고 하는 피해자들은 결국 점점 고립될 테니까 말이다.
[정서가 결여된 회상이 가져오는 효과는 아무것도 없다] p.349
최근에 읽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의 주인공은 평생을 무척 잔인한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살아가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과연 지워낼 수 있을까? 아니면 지웠다 생각하고 깊은 곳에 묻어두며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다 다시 떠오르게 되면 그 고통은 어떻게 감당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중에 이 책 트라우마를 만나게 되었고, 트라우마에 대한 궁금한 것들, 다양한 상황 속에서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겨내는지, 과연 치료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며 책을 펼쳤다가 그 속에 소개된 충격적이고 잔인한 많은 임상사례들에 몸서리치며 읽었다.
표지에도 쓰여있듯이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다양한 상황에서의 폭력과, 그 폭력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고통들에 대하여 알려주는 책이었다. 폭력을 당하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는데, 학대를 당한 아이들이나 여러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은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평생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치료도 힘들거니와 오랜 시간을 들여야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더욱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과거의 공포와 기억들을 직면하여 바라보고 이겨내서 살아남는 생존자들이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더욱 심도 있게 바라보길 원하는 이들 모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니 필히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