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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일 년 후 ㅣ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평점 :
'프랑수아즈 사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동그란 눈과 커트머리의 예쁘장한 얼굴인데 내게 사강의 문학은 그녀의 외모와 삶보다 조금은 관심 밖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보게 된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인공 이름이 조제였고 그녀가 닳아빠지게 읽었던 책이 사강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엔 절판이었던 [한 달 후, 일 년 후] 이 책을 최근 소담출판사에서 리커버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하며 드디어 읽을 수 있었다.
공중전화에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하며 받기를 바라다가 막상 부모님이 받으면 끊어버리던 그런 설렘이 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늦은 시간 외워둔 전화번호를 어렵게 누를 정도로 바보가 되어버린 베르나르는 결국 혼자 잠들어있는 아내에게 돌아간다.
50대인 말리그라스 부부는 젊은이들을 관찰하고 함께 즐기기 위해 매주 월요일 살롱을 개최하고,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바보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난폭한 베아트리스가 나는 무척 궁금해진다. 얼마나 매력적이길래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지... 궁금하다 이 여자...
라디에이터가 켜져 있지만 한기가 달려들었다. 그는 한기에 떠는 나이 든 남자였다.
그리고 문학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p.19
이 문장이 왜 그렇게 슬픈지.. 중년 남성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놓은 듯해서 괜히 찌르르하다.
한 달 후, 일 년 후, 우리는 어떤 고통을 느끼게 될까요?
주인님, 드넓은 바다가 저를 당신에게서 갈라놓고 있습니다.
티투스가 베레니스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그 얼마나 많은 날이 다시 시작되고 끝났는지요. p.20
베르나르는 니콜을 혼자 남겨두고 푸아티에로 떠나버렸다.
어찌 보면 철없는 그의 가출은 조제를 만나려 애쓰지 않기 위한 나름 그의 노력이었고, 쓰기 시작한 그의 소설은 형편없었다.
에두아르는 베아트리스와 밤을 지새운 이후 그녀에게 빠지며 맹목적인 사랑으로 변해버린다. 아마도 그 밤의 감미로운 기억들이 그를 그녀와의 사랑에 각성하게 만들었으리라.
니콜을 만나기로 했던 베아트리스는 조제에게 자기 대신 니콜을 만나달라고 부탁했고 니콜을 찾아간 조제는 살이 오른 니콜에게 베르나르의 아기를 가졌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손을 붙잡는 니콜의 간절한 목소리에 등을 두드려주며 그녀의 삶에 지독한 연민을 느끼는 조제다.
'당신 남편이 나를 사랑해요.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요. 난 당신에게서 그를 빼앗지 않을 거고, 그도 이 상황을 잘 넘길 거예요.'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제에겐 베르나르의 지성을 배반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또한 니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사형집행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p.91
남편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지 않는 니콜도, 베르나르에게 돌아오라고 이야기하기 위해 애쓰는 조제의 노력도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함께 베르나르에게 가자는 조제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는 자크는 뭔가 다 눈치채고 있는 듯했는데,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하고, 사랑에 너무 휘둘리지 않으면서 단호하고 침착한 자크가 나는 제일 마음에 들었다.
여자를 대할 때 서투르고 사랑의 표현이 어색해서 조제는 자크를 곰 같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투덜대며 재킷을 벗어주는 그가 나는 너무 사랑스러웠으므로 조제 곁을 떠났을 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50세의 야윈 몸을 가진 앙드레 졸리오는 매력적인 베아트리스를 자신의 정부로 삼기로 마음먹는데, 야망녀인 베아트리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는 약간의 역할만 주어주면 되는 것이기에 그에게는 너무 손쉬운 일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에두아르와의 사랑과 졸리오와의 권력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자신이 좀 더 비중을 두었던 권력에 이끌려 졸리오를 선택해서 다음 연극의 여주인공 역할까지 손에 넣게 된다.
젊은 에두아르의 잘생긴 외모는 함께 외출할 때만 행복감을 주었다는 그녀의 솔직함이 묻어난 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알랭은 아직도 베아트리스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문을 볼 때 공연 란부터 읽으며 베아트리스의 소식을 알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알랭에게 알코올만이 위로가 되었고 그의 삶은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아름답고 난폭한 여자 베아트리스는 알랭, 졸리오, 그리고 에두아르까지 세 남자의 삶을 그렇게 바꿔가고 있었다.
인물들이 모두 사랑을 하고 있다. 사랑을 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다.
조제는 베르나르와 자크를 모두 사랑했는데, 다만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덜 사랑하고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베아트리스의 사랑은 조제와 다른 필요에 의한 사랑이었다. 알랭, 에두아르, 그리고 졸리오도 그녀의 필요에 의한 선택과 만남이었을 뿐이다.
알랭의 아내 파니는 남편의 방황이 자신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를 달래보려고 했고 그가 돌아올 거라고 헛된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 기대도 사랑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가리고 진실을 외면하려는 것 그것도 모두 사랑인 것이다.
프랑스 하면 낭만이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책의 등장인물들의 사랑이 왜 낭만적인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감상적인 태도나 감정들.. 이들은 모두 사랑이 없으면 죽을 것처럼 보인다. 나에게 있어서의 사랑과 그들에게 있어서의 사랑은 분명 다르다고 생각이 든다. 사강의 글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