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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헤르만 헤세 지음, 김윤미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2월
평점 :
노벨상 수상자인 헤르만 헤세가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는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니 더욱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헤세가 평생을 쓴 글 중에서 음악에 대한 글들만 골라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는 편집자의 말처럼 이 책은 헤세가 좋아했던, 그리고 그의 작품에 영감을 준 다양한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책은 총 2부로 나누어져 있고 들어가는 말없이 바로 헤세의 글로 이어진다.
오르간 음은 점차 커지면서 어마어마한 공간을 채우더니 음 스스로가 공간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휘감는다. 음은 자라나 편안히 쉰다. 다른 음들이 합류한다. 별안간 모든 음이 다급히 도망치며 추락하고 몸을 숙여 경배하며, 문득 치솟다가 제지되어서는 조화로운 베이스 음 속에 꿈쩍 않고 머문다. 이제 음들은 침묵한다. p.13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이제 시작인데, 글을 읽었을 뿐인데.... 멋진 음악을 한곡 들은듯하다.
내 눈은 글을 따라갔을 뿐인데 마음속에선 무언가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가득 찼다가, 뭉클했다가 온몸을 전율하게 한다.
평소 음악을 즐기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헤세의 음악을 대하는 자세와 글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그냥 음악 무지렁이였다.
그런데 헤세는 자신을 악보를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 음악 문외한이라 평가하고, 연주회를 가거나 음악을 즐기기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삶에 늘 함께였던 음악이 없다면 어땠을까?
글로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 같은 헤세는 음악을 통해 작품에 영감을 얻었고 나는 그런 헤세의 글로 힐링을 얻는다.
예전 세계문학 속 명문장들을 필사하다가 [유리알 유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아직도 [유리알 유희] 와 [황야의 이리]를 읽어보진 못했다.
책 속 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이 책에서 다시 한번 언급되니 뭔가 운명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개인적으로 내가 알던 지식이 아닌 새로운 지식과 숙제를 주는 책들을 좋아한다. 이 책을 읽으며 헤세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고 그의 다른 작품을 만나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설레었다.
헤르만 헤세는 음악에 위로를 받았고 나는 또 그의 글에 위안을 얻는다.
그의 시와 에세이, 편지와 일기에 이르는 다양한 글들로 구성한 편집 능력도 너무나 훌륭하다. 무엇인가 이 책 한 권에 무척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랄까? 3분 요리나, 라면처럼 후루룩 끓여서 빠르게 먹고 치워버리기엔 아까운 책이다.
읽고, 또 읽고, 곱씹어가며 읽고, 소중히 아껴야 할 책이 오늘도 한 권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음악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일차적으로 감각적인 것에 대한 기쁨, 숨결의 흐름, 박자의 두드림, 목소리들의 어우러짐, 합주에서 나오는 음색과 마찰과 매혹에 대한 기쁨에서 생겨난 것이다. 물론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악기의 발명과 옛 악기의 변화, 새로운 조성과 구조적 화성적 법칙 혹은 금지의 도입은 언제나 하나의 제스처이자 외적 요소일 따름이다. 민족의 복식과 패션이 외적 요소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대들과 양식들을 그것들 자체로 이해하려면 이 외적이고 감각적인 특징들을 감각적이고 집중적으로 포착해 맛보아야 한다. 음악은 손과 손가락과 입과 허파로 하는 것이지, 두뇌만 활용해 해나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악보는 읽을 수 있지만 악기를 완전하게 연주할 수 없는 사람은 음악에 대해 이야기 나누지 않아야 한다. 음악의 역사 역시 추상적 양식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음악의 쇠락기에는 정신적인 것보다 감각적이고 양적인 부분이 더 비중 있게 내세워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 쇠락기는 일절 납득할 수 없는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유리알 유희] 中에서........ p.278
[출판사로부터 지원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