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박 경 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그루가

어느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쓰신 박경리 선생의 타계를 신문에서 보았다.

그 분의 책은 <김약국집 딸들> <토지>만 읽었지만, 마음으로 존경하던 작가의 죽음은 편안했으리라, 이 시로 짐작해 본다.

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게 나이든 것이라고 말해야겠지만, 젊은 날의 외로움이 이렇게 승화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욕의 세월을 보내었을지, 가슴이 찡하다.

부디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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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5-07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늑대, 여우 하나도 안무서워요.
소쩍새, 쑥쑥새, 두꺼비, 개구리...
다 우리 동네 얘기네요.
선생 펜과 원고지로 가난과 투병과 외로움을 의지하는 삶이 느껴져서
한참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혜덕화님, 봄꽃잎이 바람따라 훌훌 떠나가고 초록 새순이 돋았어요.
선생께선 참 예쁜 계절에 가셔서 좋습니다.

혜덕화 2008-05-07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늑대, 여우보다 무서운 것은 사나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겠죠.
세상엔 정말 사나운 사람도 있구나, 본성은 그렇지 않을텐데 어쩌다 저렇게 사나워졌을까 싶은 사람들......

1학년 꼬마들과 행복하게 지내다보니, 새순보다 예쁜 봄도 훌쩍 가버렸네요.
팔은 괜찮으신지?
하루하루 다르게 옷갈아 입는 산천에서 대통령이 누가 되든 상관않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꿈꾼다면, 정말 황당한 꿈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