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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평점 :

스웨덴은 이제 우리한테는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이지요?
아동문학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말입니다.
<삐삐> 할머니 린드그렌과 <꼬마 바이킹 비케>를 배출한 나라, 스웨덴!
노벨과 에릭손, 라르손만 있는 줄 알았지요?
라르손은 또 누구냐구요?
스웨덴 출신 유명 축구 선수!
얼마 전에는 베리만이라는 사냥꾼이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를 훑고 지나갔지요?

작지만 강한 나라, 스웨덴!
이 스웨덴에서 출판된 한국 관련 저작이 또 한 권 있네요.
종군기자 아손이 쓴 <I Korea>!
이 책을 김상열이 번역했습니다.
김상열은 우리가 또 잘 아는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요?
만연체 문장의 진수를 보여주는 1909년 노벨상 수상작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김상열인데,
오늘 소개하는 책은 <닐스>보다는 번역 수준이 좀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읽는 데에는 큰 불편은 없을 겁니다.

"탐구심이란 원래 타고난 본능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혹자는 세상의 아름다운 면만을 보기 위해
한쪽 눈을 감고 인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쉼표는 필요 없는 자리) 삶에 대한 이런 사람의 이해는
밝고 아름다운 것은 될 수 있을지언정 바른 것은 될 수 없다(287페이지)."
저자는 1905년에 조선 감옥에서 한 죄인이 사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
위와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 장면은 주리를 틀어서 먼저 종아리뼈를 부러뜨리고 나서 계속 이어집니다.
"죄수의 팔뼈와 갈비뼈 사이에 대막대기를 집어넣어
이 뼈들을 차례차례로 부러뜨린 다음,
마지막으로 비단 끈을 사용하여 죄수의 목을 졸라 죽여
시체를 질질 끌고 나갔다(286페이지)."
스웨덴 기자 아손은 1904-1905년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일본에 갔다가 도쿄에 발이 묶여서는
일본을 '탈출'하여 조선으로 넘어온 사람이랍니다.
러일 전쟁기 종군 기자들에 대한 일본의 <야만 행각>에 대해서는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에 아주 실감나게 잘 묘사가 돼 있습니다.

어쨌거나,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일본에 왔던 스웨덴 기자 아손은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문화인류학 관점에서 조선에 대한 책을 남깁니다.
일본 당국에는 상인이라고 속이고 조선으로 온 아손은
고종 황제도 직접 알현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바로 이때 찍은 것인 모양입니다(219페이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4/h2010040221570084210.htm
이 사진은 최근에 출판된 <제국의 렌즈>에 실려 있다고 했지요?
누가 찍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웨덴 기자 아손도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았고,
다만 고종과 순종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황제의 얼굴은 개성이 없었으나
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
조그만 눈은 상냥스러워 보였고 약간 사팔뜨기였다.
그의 시선은 한 곳으로 고정되지 못하고 노상 허공을 헤매었다.
...
황제의 옆에 서 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입술은 두꺼워 육감적이었고, 코는 납작했으며,
넓은 눈썹 사이로 주름살이 움푹 파여 있었다.
놀란 두 눈을 신경질적으로 연방 깜빡거리면서
한시도 쉴 새 없이 이곳저곳에 시선을 돌려대었다.
...(218-219페이지)."
이 스웨덴 기자가 고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태자였던 순종의 비가 죽어서 벌어진 장례식 참가했기 때문이랍니다.
기자는 이 자리에 스웨덴 장교라고 속이고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종과 순종에 대한 인상이
사진과 함께 역사 기록으로 남게 된 겁니다.
기자는 이 장례식을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라며
"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동양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210페이지)"고 썼습니다.
기자가 묘사한 바로는 대강 1개 연대 병력에다가
내시 500명과 궁에서 생활하는 수많은 아이들,
태자비의 상여를 메고 가던 장정 150명,
여기에 정부 관리, 서울에 있던 외교 사절단, 일반 백성까지 해서
규모가 엄청났던 모양입니다.
일본쪽에서는 관현악단까지 동원돼서 <쇼팽의 장송곡>을 연주했고,
조선 쪽에서도 음악은 연주가 됐겠지요?
중요한 건 태자비가 죽은 원인인데,
스웨덴 기자는 독일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분쉬라는 의사한테서
자초지종을 다 들었다고 합니다.
100명 가까운 의사들이 사기를 치고는 줄행랑을 쳤답니다.
사례금만 챙겨서 도망을 친 것이지요?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태자비가 죽은 책임을 져야 했겠지요?
또 의사들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기자가 독일 출신 의사 분쉬 덕분에
조선의 의료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물론 위의 책이 훨씬 더 도움이 될 텐데,
의사분들께서는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스웨덴 기자의 책에는 조선의 의학 문제에 대한 많은 얘기가 있는데,
대체로 합리성과 이성이 없는 조선 의학 시스템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주먹구구 수준을 넘어서는 조선 의학에 대해서는 좀 연구를 해야 할 겁니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20세기 초 조선의 정치와 문화인류학을
절묘하게 결합한 것입니다.
이런 걸 두고 한철호라는 역사학 교수는
고등학교 국사 선생처럼 러일 전쟁 전후의 한국 상황을 얘기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정치로만 가두려고 했네요.
책이란 좀 크게 봐야 합니다.
자, 스웨덴 기자의 한국 방문 기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 20세기 초 서울의 도시 사회사
2) 조선 여성사
3) 20세기 초 조선인의 체격과 체력 문제
1) 도시 사회사
솔직히 20세기 초 모스크바의 역사를 전공한 꼬마작가로서는
20세기 초 서울의 모습을 도시 사회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굉장한 흥미를 느낍니다.
먼저, 지난 번에 1936년의 식민지 조선을 묘사한 책
<한국의 야생동물지>를 소개하면서
그 무렵 서울 인구가 40만 명이었다고 했지요?
오늘 소개하는 스웨덴 기자의 책에는 1905년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었답니다.
엄청나지 않나요?
잘 모르겠다구요?
1900년 무렵에 인구 순위로 1등은 200만 명을 자랑하던 뉴욕이었습니다.
10등 정도가 100만 명이었던 모스크바!
다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점은 1등 뉴욕부터 10등 모스크바까지는
거의 모두가 산업 발전을 기반으로 인구가 급성장했다는 점입니다.
쉬운 예로 모스크바를 들 수 있는데,
도시의 산업이 발전하고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10년 정도 지난 1913년에는
인구가 200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중요한 건 서울은 기차, 전차를 비롯한 몇 가지를 빼고나면
근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근대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도시 안에서 30만 명이 살았다는 점이고,
그것도 4대문 안의 인구가 그랬다는 사실입니다.
몇몇 기록으로 볼 때,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성을 벗어나면 주민들은 거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좁은 면적 안에서 1905년에 30만 명이 살았던 겁니다.
"쓰레기 더미 사이사이를 꾸불꾸불 흐르면서 온갖 불순물을 실어내어
그렇게 향긋하다고는 할 수 없는 냄새를 풍기는 하수도나 도랑 가에는,
아낙네들이 줄을 짓고 앉아서 열심히 빨래를 한다.
이들은 더러운 물에 빨랫감들을 억척스럽게 주무르고 문질러,
결국은 두 눈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해놓는다(167-168페이지)."
"여인네들은 우물 바로 주위에서 빨래를 하고 채소나 생선도 다듬었다.
이때 나온 찌꺼기들이 다시 우물로 흘러 내려가 우물물을 더럽혔다.
식수에 대한 부주의와 무관심이 바로 서울에
그렇게 자주 만연되는 콜레라와 기타 유행병의 원인이라 한다(144페이지)."
근대 사회에서 도시 발전이란 대개 산업 발전을 뜻하고,
동시에 교통과 통신을 비롯한 대중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흔히 놓치는 것이 바로 상하수도를 비롯한 공공 위생 시설의 발전인데,
이 문제는 전염병을 비롯한 시민들의 건강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19-20세기 전환기에 선진국의 대도시들은 바로 이 상하수도를 비롯한
<공공 위생 투쟁>에도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외국을 여행하면서 보는 현대 도시란
바로 이런 노력과 함께 기틀이 잡히게 되는 겁니다.
반면에 스웨덴 기자가 묘사한 바로는
서울에서는 이런 노력을 찾기 어려울 것 같지요?
이게 바로 후진국의 모습이고,
현대 도시의 상하수도 노릇은 '북청 물장수들'이 담당하는 거지요?
기자는 외국의 영향 아래 이 물장수들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가볍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 사용되었던 나무 물통은 튼튼하긴 했지만
더 가볍고 용적이 큰 양철통에 완전히 밀려났다.
이렇게 되자 코레아에서 그 전통을 자랑하던 수공업 중
하나가 문을 닫게 되었다(147페이지)."
기자는 전통 사회에서 일어나는 작은 경제 변화까지 짚어내고 있는 것인데,
중요한 건 전염병을 둘러싼 조선의 관념입니다.
기자는 사형 장면을 목격하던 날 돌아오는 길에
성벽에 짚더미로 덮어놓은 시체 40구를 봤다며 사진까지 담았고,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코레아인들은, 이렇게 할 경우(쉼표가 필요한 자리)
천연두를 일으킨 병마가 시체를 따라 성벽까지 가서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고
그러면 그 병마는 자신이 침범했던 집을 찾을 수 없게 된다고 믿는다.
넉 달이 지난 후 시신은 다시 수습되어 모든 예우를 갖추어
죽은 자에 합당한 장례를 치르게 된다(289-290페이지)."
이 무슨 끔찍한 얘기랍니까, 그래?
드라마에 보면 역병이 돌 때 불 피우고 해서 난리가 아닌데,
스웨덴 기자의 설명으로는 다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전염병=바이러스라는 생각이 아닌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 바이러스를 귀신으로 생각해서 어디론가 끌고가겠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회에서 전염병이 한 번 돌면 대책이 없었을 텐데,
실제로 1857년에는 콜레라가 돌아서 40만 명이 사망했다(251페이지)고 합니다.
전근대에 걸맞는 도시 사회 환경과 위생 관념,
여기에 엉망진창인 의료 시스템과 의학 관념!
스웨덴 기자는 이런 문제를 아주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있습니다.
현대 역사학이란 이런 걸 연구해야 하는 겁니다.
기자의 얘기가 사실인가 아닌가부터 시작해서
사실이라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됐는가 하는 것을
조리에 맞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겁니다.
2) 조선 여성사
당시 조선의 여성 문제는
세계 문화인류학자들의 최대 관심사 중에 하나였던 모양입니다.
조선에 왔다 돌아가서 책을 남긴 사람들 중에
여성 문제를 얘기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의 목차만 훑어봐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일부다처제 문제가 가장 커다란 관심사였는데,
솔직히 제가 결혼할 때 러시아 장모한테서 '가벼운 태클'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 일부다처제 문제였습니다.
'혹시 지금도 그런 전통이 남아있는 건 아니냐?'는 의심이었는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서양 사람들한테는
아주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였을 겁니다.
이 문제에서 스웨덴 기자는 유럽 언어로 출판된
<조선 여성 문제>에 관한 자료까지도 읽고 조선에 왔다는 점을 밝히면서
계층에 따른 조선 여성 문제의 다양성을 얘기합니다.
"비천한 계급 내에서는 이혼 사태가 흔하기 짝이 없어
1년에 다섯 번이나 여섯 번씩 장가를 가는 남자가 있을 정도이다.
...
하층 계급에서도 첩을 두는 경우를 볼 수 있으나 상층 계급과는 달리
형식을 별로 따지지 않고 본부인과 거의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으면서
한 집에서 고락을 나눌 수도 있다(186페이지)."
이런 얘기는 우리 관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것이지요?
한국인한테 가족이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이고
또 소중하다는 관념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배웠는데,
"이혼 사태"가 벌어졌다고 하니,
참,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중요한 건 이 사람이 없는 얘기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럼, 역사학자라면 이런 걸 검증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국사 전공자들, 월급 받아서 뭣들 하는 거야,
우리는 이런 질책을 할 수 있는 겁니다.
3) 조선 사람들의 체격과 체력 문제
이 스웨덴 기자는 아주 대놓고 얘기합니다.
일본인 - 난쟁이족,
조선인 - 유럽인만큼이나 큰 사람들!
자기가 도쿄에 있을 때에는 보통의 일본 사람들보다는 머리 하나만큼 컸지만,
한국에 오니까 다 자기 만하다며
조선 사람들의 체격과 훤한 얼굴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다만 "흰 옷의 유령들"이라는 표현은 이 사람 책에서도 반복됩니다.
흰 옷 입은 유령들이라는 말이야 그냥 그런 인상을 받았다고 해도 됩니다.
하지만 듬직한 체격을 갖춘 조선인들은 <약골>이라는 얘기는
이 스웨덴 기자의 입에서도 비슷한 뉘앙스로 나옵니다.
"그 무리들 중에서 제일 왜소한 일본인이 키 크고 떡 벌어진
한 코레아 사람의 멱살을 거머쥐고 흔들면서 발로 차고 때리다가
내동댕이치자, 곤두박질을 당한 그 큰 덩치의 코레아 사람이
땅에 누워 몰매 맞은 어린애처럼 징징 우는 모습(45페이지)."
이 장면은 기차역에서 벌어진 것이고,
덩친 큰 조선 사람을 때린 사람은 역무원이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부산에 내리자마자 이런 장면을 본 것이라서
아주 커다란 인상을 받았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뒤에 서울에 올라와서 보게 된 조선과 일본 정규군의 총격전!
이 사건은 일진회를 둘러싸고 고종은 진압 명령을 내리고
일본군은 일진회를 비호하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기자가 세세하게 목격했다는 이 전투는 아주 싱겁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일본군이 조선군의 방어진지로 돌격하면서
조선군은 모두 포로로 끌려나오게 됩니다.
그 뒤에 묘사된 조선군 지휘관들의 모습!
"어느 대위는 캐비닛 속에 숨어 있었고,
어느 대령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미국제 책상 밑에 질린 표정으로 쪼그리고 있었다.
중위 두 명은 다락방에 있는 군복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고,
계급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장교 한 명은
취사장의 밀가루 포대 속에 숨어 있었다(261-262페이지)."
조선군 총사령관이었던 고종의 군대는 이랬습니다.
단순히 일본군보다 병력이 부족하거나
또는 무기의 성능이 뒤떨어졌다는 점만이 아니라
용기, 사기, 군기라는 면에서도 형편없었던 겁니다.
스웨덴 기자가 목격했다는 조선군 방어진지 돌파 장면은
조선군 장교들의 우유부단함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러니 20세기 초에 조선을 방문했던 유럽인들이
'덩치만 커다란 약골(겁쟁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을 겁니다.
조선 사람에 대한 이미지에서 기자는 눈으로 직접 본 것 말고도
일본군 장교한테서도 영향을 받은 면도 있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이 장교하고는 부산에서부터 기차를 같이 타고 서울까지 올라오는데,
두 사람은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섞어가면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이 대화에서 일본군 장교는
조선 선비가 나라를 말아먹은 원인이라고 설명하면서
"예"를 중시하며
"어떤 까다로운 사람의 눈에 노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그 일을 멀리하는 것(55페이지)"이 예라고 했답니다.
분명히 스웨덴 기자는 조선에 대한 인상에서는 이 일본군 장교한테서
엄청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노동을 수치로 알며 게으르고 무식하고 걸인이 많은 나라(254페이지)"라고
책 끝머리에 가서 다시 한 번 조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 속에서 "조선의 백성들-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나태한-
은 그동안 속수무책인 채 손만 벌리고 서 있었다(255페이지)"며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스웨덴 기자의 책으로 볼 때,
그 무렵 유럽인들이 흔히 했던 '약골' 조선 사람들이라는 말은
<의지, 용기가 결핍된 민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 원인은 조선 양반들에게 있는 것이고,
그런 나약한 양반 계층에 기대고 있던 고종은
그 무렵에 조선을 찾은 유럽인들의 '조롱거리'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꼬마작가의 이런 해석은 키케로에서 기번으로 이어지는
서양인들의 도덕 관념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용기와 의지가 없는 나약한 민족 조선인과 그 조선인의 왕인 고종을 통해서
스웨덴 기자는 도덕 설교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이 기자는
일본과 일본인을 경멸하다시피 증오한다는 점입니다.
아래 글은 일본군이 죄 없는 조선 백성 3명을 십자가에 묶어놓고 총살해서는
6일 동안 전시한 만행을 보면서 쓴 것입니다.
"여기서야 비로소 일본의 잔인함과 냉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본은 서구식으로 개화된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록 일본인들이 빠른 두뇌 회전과 명석함을 무기 삼아
큰 힘을 과시하고는 있지만,
우리 서양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우리들이 자화자찬하면서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서구 문명이 도달해 있는 이 지점까지 쫓아오려면
그들은 아직도 수천 마일의 거리를 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267-26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