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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쨋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단히 명료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저서를 읽을 때 오는 그 '싸늘함'과는 별개로, 그의 저서에는 어떤 종류의 '따듯한 친절함'이 뭍어나오는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대단치 못한 리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게다가 평소에 그닥 관심이 없었던 그의 '공동체주의'이지만, 졸렬하고 단편적인 독서를 통해 필자가 과연 샌델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과연 '도덕'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이해'되어야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모든 오해와 오독을 무릅쓰고 짧은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물론 이 저서 전체의 구체적 리뷰는 필자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칸트와 롤즈에 대한 독서가 끝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그가 펼치는 일정 부분의 논리적 사고는 非아시권의 현실을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교육'에 관한 부분을 다룰 때 거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내용에 대한 '주석달기'를 감행해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좀 '불완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도덕법의 근거는 실천이성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 즉 자율 의지를 가진 주체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적 목적이 아니라 "목적의 주체, 즉 그 자체로 이성적인 존재가 모든 행동 원리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오직 칸트가 말하는 "가능한 모든 목적의 주체"만이 권리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이 주체만이 자율 의지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주체만이 감각적 존재를 보다 더 높은 존재로 격상시켜주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독립적이고 이상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처럼 철저한 독립성만이 상황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초연함을 부여한다." (p.180-181) 

예컨대 고진은 <윤리 21>의 서문에서 이런말을 했다. 

"나는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하려고 했다. 칸트는 일관되게 도덕적=실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가 도덕적이라든가 실천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통상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도덕이라는 말은 통상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즉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오히려 더 헷갈릴 수도 있지만, 고진은 샌델을 읽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또한 '칸트'를 통해 그의 '윤리'에 대한 생각을 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독서가 선행/후행 한다면 더욱 좋을듯 싶다.)생각해보니, 이 주제로 세미나 같은게 열리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고진과 샌델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고 보는 필자이지만, 인용한 두 내용은, 롤즈를 넘어서기 위한 샌델의 '분석'이며, 또한 칸트를 재해석하기 위한 고진의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참고해볼만 할 듯 싶다.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인문학적 사유의 '주변부'라고 인식되는 우리, 여기, 한국에서, 이렇게 고진만큼 샌델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 게다가 이렇게 '물밀듯' 저서가 쏟아져나오고 있으니 - 어떤 의미에서 썩 달갑지만은 않은 부분이다. '정의'와 '하버드'가 세트로 묶여 '시너지'를 만들어냈다면, 사실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왔던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이제서야 '제대로' 번역된다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게다가 이제 그는 그러한 공동체주의의 한계와 수정을 가하고 있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서는 '도덕'과 '정의', 혹은 '윤리'에 대한 '정초'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칸트 전공자는 무수히 많으며, 롤즈, 밀, 듀이, 게다가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무수히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 또한 이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물론 어려워서 던져놓기 일쑤지만) 아둥바둥 거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어떤 '기시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것이며, 인문학도로(특히 철학도로) 자신의 미래를 전유함으로 얻을 수 있는 초라한 경제적 지표를 상상해볼 때이며, 혹은 그러한 현실을 박차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지금 이 순간도 어떤 '목적'을 향해 투쟁하고 있는 홍대 인근이며, 국회 의사당 앞이며 하는 곳의 '운동'의 모습이 바로 그에 대한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도덕'(혹은 윤리)의 '이름들'을 읽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의 동어반복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바로 '도덕=실천'이라는 비공식적 공식에 대한 우리의 '움직임'을 촉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쨋든, '신호등의 빛'은 그 자체로 '도덕률'이 아니다. 칸트에 대한 답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빛은 그 자체로 도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도덕에 대한 관념의 '형이상'이다. 여기서 신호등의 빛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빛이 아니며,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어슴프레 빛나고 있는 그것, 우리가 '자율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어떤 '공백'에서 삐져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도덕률이란 바로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 차원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에 가깝다. 그것은 무의식과 의식을 함께 '꿰뚫고' 삐져나오는 것이며, 샌델의 말처럼 어떤 '자아상'과 관련되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상주의적 견해라기보다, 이것은 확실히 '법(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가운 점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대한 샌델의 이 엄격한 '공격'들이, 충분히 정당하다는 데에 있다. 정치(철학) 담론에 대해 그가 말하는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넘어서기'는,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공동체'가 단지, 개인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했던 '공백의 영역들'을 채우는 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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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바다에서 자랐고, 바다에서의 기억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바다의 기억은 분열되어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다다, 라고 내가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분열된 기억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바닷가 태생과 같이, 나는 바닷내음이라는 걸 모르면서 지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의 냄새는 나의 냄새이므로, 나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나 보다.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삶이란, 그렇게 '정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모르고' 지나쳐가게 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바다를 떠나 서울에 와 두 평 남짓한 원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냄새이자, 바다의 냄새였던 것 같다. 글쎄, 믿으련가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야 바다내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유년시절의 나를 휘감았던 추억의 냄새라는 것도.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풍경일 경우가 가장 많다. 특히 겨울의 바다를 거닐어 본 이라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을씨년스러움과 부피만 큰 고독, 혹은 끝없이 침잠하는 외로움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슐레가 바라본 바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매우 '생물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때로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내어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백사장을 거닐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수평선의 풍경과 나는 얼마만큼의 '시차'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 옆에서 보든, 위에서 보든, 때로 물속에서 보든, 바다는 바다다. 그것은 그저 '흘러 넘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인간을 보듬고,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간혹 인간을 그 누구보다 무섭게 위협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끝없이 침묵하기도 한다.  

"그래 괴물아, 뭘 원하는 거냐? 사방에 보이는 난파에 취했구나. 뭘 더 바라느냐? - "너와 세계의 죽음을, 지구의 멸망을, 카오스로의 회귀를." (p.84) 

우리의 시각이 어떤 면에서 '아웃 포커싱'과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시각을 가장 집중시키는 것 또한 바다의 한 특징이다. 태풍이 오는 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방파제를 뚫고 올라오는 파도를 보노라면, 저 수평선 너머의 세상은 한없이 멀어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춤추는 바다의 앞에 선 인간은, 결국 한없는 존재의 나약함과 부질없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미슐레의 물음에 대한 바다의 답변처럼, 바다는 어쩌면 태초의 카오스, 그 자신이 약동하던 시대의 카오스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아무리 큰 배와, 육지매립과, 4대강 사업을 넘은 4대양 사업을 통해서도, 심지어 '조니 뎁'이 100명쯤 있어도 결코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가 가진 '광범위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본능' 때문이다.

"본능은 한동안 잠이 든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다. 그렇지만 잠들었는 붙잡힌 채 갇혀 있든, 마술에 취했든, 이런 상태가 곧 죽음은 아니다. 본능은 살아있다. 규석으로 짠 거친 해면 상태로. 움직이지도 숨쉬지도 않고, 순환기도 없이, 아무런 감각 기관도 없이 살아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까?" (p.125)

땅거미는 바닷가에도 찾아온다. 한동안 횟집들이 켜놓은 울긋불긋한 불빛들이 하나 둘씩 일렁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황량한 바닷가 마을에도 저녁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문득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백열전구가 빛나고, 어슴프레하게 달빛이 얼굴을 내민다. 바다의 저녁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다. 그리곤 바람이 분다. 언제나.  

"바다의 생명에 꿈이요 소망이자 복잡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착이다."(p.208) 

그렇게 해질 무렵의 바닷바람은, 우리를 한동안 머물게 한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은, 대게 그 광경 앞에 잠시 그 바닷가의 풍경속에 무겁게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바다는 거울일까? 미슐레의 말처럼 바다가 가진 하나의 '욕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닷바람이 만드는 '주체로의 회귀'인 듯 보인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정착이며, 반대로 떠나갈 수밖에 없는 바다와 인간의 운명이다. 운명의 굴레는 그렇게 바닷바람과 함께 오는 듯하다. 

늦은 저녁, 백사장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는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같이 등대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등대가 비추는 바다 위의 동심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보며 다름 아닌, 자신에게 덧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해가 저물었다. 바닷새는 늦게 날아와 파도를 부추기다가 다시 땅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절벽과 어둑한 정원 너머로 날카롭고 섬뜩한 밤새의 첫 울음이 들려온다. 그러나 새장은 벌써 닫혔다. 새들은 날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잠들었다. 그녀도 안심하고 안도한다. 이윽고 깊은 숨을 토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를 품에 끌어안는다."(p.330) 

바다가 잠들면, 인간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텅 빈' 집의 문은 닫혔다. 그것은 주체의 공간이다. 공허함을 가득 안고,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떠난다. 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바다에서 태어난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자신과 바다를 끝없이 '포옹'하는 일이다. 그것이 깊이 잠들 수 있도록. 혹여 밤새가 날아와 울거나, 아득한 심연의 악몽을 꾸게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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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어능력시험에 꼭 나오는 최우선 필수단어장 N4.N5
유선희 지음 / 시사일본어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필수단어장' 하면 마치 학창시절에 '달달' 외우던 영어단어장이 생각나서 왠지 부담스러운 경우가 있다. 게다가 필자처럼 JLPT 시험을 '한 번도' 쳐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욱 더 그런 암기가 힘겹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구성은, 단어 암기에 대한 내 부담을 많이 줄여주었다~ ^_^

먼저, N4,N5는 가장 쉬운 난이도의 시험이다. 이에 걸맞게 단어 또한 비교적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중급 단어들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그리고 각 단원 사이사이에 있는 '어휘력 체크'와 '확인 문제'들을 통해서 자신의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그리고 학습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부분도 마련되어 더욱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1+1 단어' 학습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이란 단어 옆에, '세일' 이란 단어를 같이 제시해서 유사, 대조, 관련 단어를 '함께' 외우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하나의 단어를 외우면, 같이 관련된 단어도 같이 생각나게 된다는 점에서 정말 효과적이라고 본다. 더불어 관련 단어 뿐만 아니라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 예컨대 '빌딩ビル'과 '맥주ビㅡル' 는 발음이 유사하여 착각하기 쉬운 단어이므로 1+1 단어 학습을 통해 확실하게 구별하여 공부할 수 있다! 

또한 MP3 무료 다운로드를 통해 모든 표제어와 예문을 '일본어능력시험 전문 성우'의 목소리로 생생히 들으며 학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청해실력까지 잡는 혜택도 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 

점점 어려워지는 일본어능력시험에 대비하고, 시험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일본어 단어암기를 어려워하는 모든 이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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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 라깡, 사유의 모험 

  

다시, 라캉이다. 요즘 정신분석학계/철학계/비평계 등에서 라캉의 인기는 가요계로 치자면, '카라'쯤 될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라캉이 이렇게 '사유'되고 있다는 점이고, 나는 그것이 긍정적이라고 본다. 어쨋든 이렇게 '난해한' 철학자도 드물기 때문이다. 칸트와 헤겔이 '높은 산'을 오르는 길이라면, 라캉은 '암벽등반'에 가깝다. 몇 권의 책을 읽고, 지젝이 풀어쓴 그의 '해설서'를 읽고, 그에 대한 '좌절'을 맛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라캉의 유행이 조금 더 지속되기를 바란다. 아니, 그가 조금 더 '새롭게' 보여줄 만한 모습이 충분히 더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 교수가 라캉에 대한 글까지 쓰시다니.. 대단.(나만 모른건가..ㅠㅠ)  

2. 푸코 

  

들뢰즈의 푸코다. 들뢰즈의 스피노자, 들뢰즈의 니체.. 역시 어려운 이야기들이며, 유명한 이의 유명한 이야기라 할 만하다.  들뢰즈에 대한 지식도 일천하므로, 다만 '모험'을 강행하는 입장에서 골라보도록 한다. 탈구조주의자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며, '현대'라는 안개에 대한 지침서가 될지도 모르니까.  

3. 엥겔스 평전 

 

사실 (필자에겐) '자본'에 대한 철저한 '독서'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엥겔스(자체)에 대한 독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레닌주의적 제스쳐가 다시금 호명되는 이때에, 엥겔스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4. 전을 범하다 

 

이책, 굉장히 흥미로울것 같다. 저자는 익숙한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우리에게 통쾌한 가치관의 '전복'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사실 전래동화나 이솝우화의 비틀기, 비평은 꽤 많이 진행되어 왔지만, 우리 고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분석'은 별로 접해본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더욱 기대가 된다.  프롤로그의 제목도 '박제된 고전을 위한 하이킥'이다. 하하하.

 

5.  세속화 예찬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왜 '종교 그 자체'인지를 말하고 있는 책이라 하겠다. 지젝이 어딘가에서 언급한 다른 말이 생각나는데,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꿈을 꾸자'라는 체의 말을 비꼬아, '현실주의자'가 됨에 있어, 불가능한 꿈을 꾸는, 즉 유토피아를 상상해야만 하는 현실적 조건들을 사유해보자는 것. 어쨋든 종교란, 세속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아감벤은 지젝이나, 테리 이글턴과 구별된다고 한다.  탐독해보면 좋을듯.

역시 철학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원래는 '접점'을 찾아보려 다른 분들의 페이퍼를 참조했는데, 이번 달 부터는 그냥 개인 취향에 따라 고르기로 했다. 어쩌다 간혹 그 접점이라는게 생길 수도 있으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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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뷰'로 작성해야 하지만, 리뷰작성시 '상품검색'이 안되는 문제로 '페이퍼'로 작성하여 올립니다.) 


이현우, <책을 읽을 자유>
   

로쟈,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순전히 ‘입소문’에 의한 것이었다. 군 시절, 모 커뮤니티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이후 그가 운영하는 알라딘 서재에 자주 출입하곤 했다. 특히, 그의 ‘지젝 읽기’는 필자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물론 지젝을 제외하고도 그는 정말 ‘인문학 서평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으며, 지금도 더욱 그러하니, 그의 명성에 대한 얘길랑 이쯤에서 접어도 무방할 듯싶다. 올해 여름에는 그의 첫 번째 저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어본 바, 과연 그가 ‘곁다리’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책벌레로서의 ‘열정’만큼은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그가 말했던 에세이스트로서의 김훈에 대한 사랑이나, 데리다주의자(?)로서의 면모, 국내 번역의 문제점들을 꼬집는 비판적/계몽적 시선에서 나아가, 이번의 저서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그러한 ‘논점’들이 좀 더 ‘확장’되고, 현실과의 절합을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다고 정의내리고 싶다. 물론, 필자는 그에게 ‘조금 더’의 ‘이론적 실천’을 요구하고는 싶지만, 그는 확실히 ‘혁명적 투사’의 역할보다는 끈질긴 책벌레의 역할이 어울린다는 생각은 든다. 그가 단순히 ‘좌파 지식인’ 등의 탈을 쉬이 쓰기보다는, 진지한 분석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 그의 글에 대해 무언가 ‘리뷰’를 쓴다는 것은, 필자에겐 꽤 어려운 일이다. 어떤 리뷰(비평)가 그러하지 않겠느냐만, 그의 글은 이미 하나의 정돈된 ‘리뷰’이므로, 그에 대한 ‘메타비평’은 그보다 더 나은 하나의 ‘창작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비평도 하나의 창작이라면.) 하지만 필자에게는 로쟈를 뛰어넘을 만한 지적 능력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평을 할 자유’ 따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하하. 하여간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을 한번 ‘훑어’보자. 다만 훑어보기에도 너무 방대하므로, 필자가 마음에 들었던 몇몇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로쟈와 한국(문단)문학

재미있는 것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어왔던 ‘문학의 종언’ 담론에 대해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가 굉장히 ‘시차적’이라는 점이다. 해서, 그가 문두에 제시하고 있는 ‘어느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자신이 낱알이라고 생각했던 환자) 한국문단문학에 대한 과잉이나 결핍된 사변에 대한 ‘동일성’을 피력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되는데, “하지만 닭이 그걸 알까요?”라는 황당한 물음은, 한국문단문학의 ‘대타자’로서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진 ‘믿음’의 ‘숭고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 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p.218)

더불어, 이와 함께 그가 제시한 인물은 당연하게도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수용한 ‘조영일’이다. “한국 문단문학은 창비, 문사, 문동이 장악하고 또 관리하고 있는 하나의 ‘생산관리 시스템’이다”라는 게 조영일의 분석 첫머리를 장식한다. 다만 로쟈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한국문학과 그 적들>)은 논쟁적이며 유익하지만, 가라타니의 종언테제와는 차별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영구혁명’이라는 사회적 의무, 도덕적 과제를 떠맡지 않게 된 문학의 시대적 현실을 말했다면, 조영일은 그러한 가라타니의 현실의식을 발판삼아 국내문단(학)의 ‘시스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조영일의 ‘쓴소리’는 개인적으로도 동감하는 바이다. 더불어 무엇보다 “문학은 끝났다!”라는 선언이 모종의 ‘결핍감’을 상징한다면, 우리에겐 그 결핍된 감정만큼이나 문학에 대한 ‘열정’이 표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것은 ‘문학’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반추된 비평정신’이 요구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문학은 언제나 과도기를 살아가는 분야이며, 또한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문에서 (비평계의 슈퍼스타 K ?!) 신형철이 말한 것과 같이 필자도 그의 ‘길고 이기적인’ 글 중의 하나, <기형도의 보편문법>은 정말 집중해서 읽은 글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로쟈만큼의 ‘기형도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면 참 기쁠 일이겠다.(물론, 백석이 먼저다.) 그리고 로쟈가 유년 시절의 ‘훌쩍거림’으로『엄마 걱정』을 꼽았다면, 필자는 ‘훌쩍거림 이후의 단잠’으로 『꽃』을 꼽아보고자 한다. 어쨌든 울고 난 뒤엔 잠이 오는 법이다. 게다가 그것이 기형도처럼 ‘영혼이 타오르는 날’, ‘영원한 잠’을 자게 된 사람이라면 더더욱.

꽃 / 기형도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2. 로쟈와 ‘정치적인 것’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p.443)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나’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p.446)

주로 뒷부분의 글들 - 정치나 철학 부분을 다룬 - 은 개인적으로는 좀 ‘길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물론, 원고 제한을 맞추느라 ‘노력한’ 로쟈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필자의 글처럼) 재미도 없이 긴 글을 좋아하는 변태적 취미를 가진 건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무페, 라클라우, 랑시에르에다 아감벤까지 죽죽 이어지는 ‘정치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2%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 정치철학에 대한 입문적 내용의 부족함이라기 보단, 마술쇼를 보고 난 후의 ‘좀 더!’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건, 그는 ‘정치철학’에 있어서도 필자가 본받아야 할 책벌레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서문에서 ‘책을 읽을 자유’라는 제목을 지은 이유를 설명하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의 한마디, “사랑스러운 여러분”을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을 고스란히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인 것’과 관련하여 가장 뜨겁게(?) 읽은 글은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설명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무페의 사상적 근원이 된 ‘칼 슈미트’에 대한 글을 한편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더불어 최근작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와의 접점도 존재하는 부분이라, 현재 ‘민주주의’가 처한 근본적 고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상탈 무페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감이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라는 말에 따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정치, 즉 분열하는 H당과, 갈길 잃은 M당 등에 대한 ‘치 떨리는 노여움’이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정치적 갈등’을 위한 ‘타는 목마름’일 것이다.

더불어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소개는, 유명한 ‘시라크와 미테랑의 대선’ 일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랑시에르는 이 일화를 통해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통치과정과 평등과정의 마주침으로 일어나는 사건-현장)과 비교하여 로쟈는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을 언급한다. 또한 “정치절학의 전통적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단언하는 아감벤의 사유를 따라간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이이며, 행복한 (정치적)삶인가?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번에 함께 읽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감벤에 의하면 오웰의 예술-정치적인 작가로서의 사상은 오늘날 정치-현실적으로는 ‘맞으면서 동시에 틀린’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글쓰기’라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아감벤은 긍정할 것이며, 반대로 “(정치 권력적)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바란다는 점에서 단순히 오웰의 ‘정치적 목적’이라는 ‘고루한’ 용어의 ‘무비판적 수용’을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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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그의 ‘가라타니 고진’론(<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했다>)은 거의 고진의 저서와 사상에 대한 ‘입문’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쉽게 쓰여 있다. 뭐, 로쟈의 말처럼 고진 자체가 이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간결하지만 핵심적인 저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데리다에 대해서는 지난 저작에서도 어느 정도 피력되었지만, 그가 데리다를 얼마나 ‘중요한’ 저자이자 철학자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필자도 로쟈 덕분에 최근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고 있으니, 왠지 물들어가는 기분이다.) 다만, 라캉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너무 ‘궁핍한’ 편이다. 라캉(만)에 대한 그의 글이 별로 없었는지, 아니면 지면상 데리다에 밀려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캉주의자의 발뒤꿈치를 따라가 보려는 필자에겐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째, 계속 그에게 모종의 ‘원고청탁’만 하는 꼴인 것 같다.)
더불어,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또한 벤야민을 잘 모르는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무엇보다 <“너 책이야? 나 장정일이야!”>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김훈’ 못지않은 장정일에 대한 애정도 느낄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다. 어쨌든 그의 글을 ‘훔쳐보고’난 후의 느낌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뭔가 ‘빚진 듯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이다. 게다가 훔쳐보았다는 관음증의 죄책감도 더불어.

그는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고 재인용하여 (그리고 힘주어)말한다. 공감되는 말이다. 다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책벌레의 아포리아’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것은 다른 용어로 ‘책벌레와 자유’의 관계를 의미한다. 책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책벌레와 먹이로서의 ‘책’의 관계망 말이다. 그렇다면 책벌레는 과연 ‘책을 읽을(먹을) 자유’가 있는 것일까? 책벌레는 책의 존재로부터 그 자신의 존재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책을 읽을(먹을) 의무’로 보이기도 한다. 즉 여기에는 ‘책’과 ‘책벌레’사이의 묘한 긴장, 그리고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관계 역전, 즉 헤겔이 말한 ‘주-노의 변증법’이 숨어있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반대로 “책은 한 인간의 인생 한 순간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병치된다. 즉 하나의 ‘텍스트’의 해석 대한 ‘시차적 다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예컨대 누군가에겐, 한 권의 책이 인생의 여러 순간에 걸쳐 각각 다양한 ‘경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책벌레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절반의 자유지만, 비로소 ‘완벽한’ 자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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