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 -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
정윤섭 지음, 서헌강 사진 / 열화당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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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소 시대유행에 따라가는 것보다 그냥 내가 좋아서 선택하여 취향 및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진보적이고, 때로는 보수적이고, 혹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전통과 관련하여 21세기 중국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아래 기존 중국의 전통문물 및 사상을 파괴했다. 공자의 출신이 중국이나, 중국은 공자를 묻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공자의 사상은 다시금 세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공자의 위패를 모조리 없앤 바람에 그나마 공자의 위패가 있고 향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에 와서 다시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 공자의 사상이 왜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하면 답은 나온다.

 

근대화란 이름 아래 서구화를 이룬 것은 좋으나, 결국 자기정체성이란 이름 아래 문화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중국이 그동안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으나, 정작 마르크스가 가르친 교훈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관료주의 사회주의 체계만 존재한다. 거기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중국은 자본주의형 사회주의 국가로 된 것인가? 그런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 이름 아래 과거에 버렸던 공자를 찾고, 유학을 찾는다. 우리는 유학 하면 고리타분한 것으로 알겠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유교의 문화, 아니라면 조선의 문화가 강하게 숨 쉬고 있다.

 

하다못해 우리 언어라고 하는 한글조차 사실 그 기원은 조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과품이다. 유교문화 국가에서 나온 성과품이 계속 이용하고 있다. 과거의 훈민정음이 한자를 읽지 못하는 백성을 위한 언어라고 해도, 결국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정치사회를 이끌어간 왕조와 사대부들이 창조한 하나의 체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20세 말에 시작되어 한국에서 21세기 초반에 담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사상을 해체 및 보완을 하는 것도 있지만, 3세계의 문화가 소외되지 않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나 남미, 중동아시아 등 비서구화된 세계가 있는 공간에도 그들만의 문화와 사회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처럼 서구화된 국가조차 서구화 이전의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한국 전통문화가 예전에는 별 소득이 없는 것으로 봤지만, 이제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매년 관광객이 찾아온다. 20세기까지 중공업이 주요한 산업경쟁력이면, 이제는 탈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관점, 즉 취미와 취향, 그리고 문화유산인 것이다. 한국이 김치가 유명하다면, 그 김치의 기원은 조선에서 시작된다.

 

조선이 전근대사회이고, 조선은 일제침략과 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해체를 겪는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주요경제활동은 농업이고,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기존 향약체계에 따른 문화적 전통이 남아있었다. 조선의 시작은 훈구대신이란 공신들이 있었지만, 차후에 사림 선비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림의 선비는 권력을 잡기도 했지만, 권력에 소외되면 향리에 남아 농사를 짓거나 글공부를 하였다. 그런 선비들 중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현세의 문제를 찾아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책으로 남겨 실학적 면모를 남겼다. 한국의 실학사에서 지봉 이수광, 반계 유형원 등이 시작하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란 거대한 학맥을 이룬다. 지금 한국의 유교를 보면 길재와 정몽주, 김종직과 정여창, 김광필과 조광조를 내세우고, 이언적과 이황, 율곡과 송시열, 조식과 서경덕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유교연구에서 가장 많이 검토되는 대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다. 그들이 그나마 앞자리에 있던 선배들보다 뒤에 있는 점도 있지만, 그들은 단순히 조선을 사대부들만의 국가가 아니라 그 이상의 국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유교의 학문은 성리학에서 많은 장점과 단점을 만들었다. 공자의 유학은 정치적 도를 추구하나, 죽음과 세상만물 이치에 대한 부분에서 부족했다. 이것을 보완한 게 주자의 성리학이다. 문제는 성리학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만들어진 학문체계이고, 그것이 그대로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보았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예송논쟁 같은 거대한 혈쟁을 펼쳤지만, 그 이면에 생각하면 통치술이란 어떻게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사유지만, 성리학은 그 원래 취지를 벗어난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에서 광해군 시대를 막을 내리게 만든 인조반종에 따라 서인들이 집권하고, 서인들이 정치적 암투로 인해 소론과 노론으로 분리되고, 조선이 망하는 그 마지막까지 노론이 지배했다. 을사조약에 서명하고, 동참한 대신 중에 거의 대부분 노론이라 한다. 조선을 말아먹은 노론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면 조선의 유학은 정말 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의 유학은 노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그 중에서 오히려 21세기에도 위대한 세계적 위인으로 칭송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012년 유네스코 기념 세계인물로 장 자크 루소, 로드 드뷔시, 헤르만 헤세와 같이 올라갔다. 세계적인 음악가 드뷔시, 문학가 헤세,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에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확립한 루소, 이 거대한 인물 속에 정약용이란 이름이 당당히 올라갔다. <왜 조선유학인가>란 책을 보면 정약용에 대한 부분이 책자의 1/3에 이른다. 정약용이란 이가 있기에 조선의 유학은 세계적으로 큰 학문으로 인정받았고, 세계 유학 학술에서도 당당히 그의 사상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다산이 역사적 조명을 되찾기 위해서 아주 기나긴 시간을 참아야 했다. 그의 명성을 다시 찾은 것은 100년 뒤다. 18362월 고향 마재에서 회혼식을 맞이하던 중 눈을 감은 그는 평생 정치적 박해로 시달렸다. 형제와 가족, 일가친척, 친구들의 목이 형리의 칼에 무참히 베어졌다. 그가 유배를 마치고 와도 아무도 그를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열수가 무너지면 수만권의 서고가 무너질 것은 알아도, 그 서고를 아무도 이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는 정약용 선생은 벽파노론이 아니라 시파남인이었다.

 

벽파와 시파의 차이는 사도세자, 정조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두고 애절함을 느끼는 자가 시파이고, 오히려 제거가 잘 되었다고 보는 자가 벽파이다. 정약용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 이때 정약용이 태어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에 지은 아명이 귀농(歸農)이었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윤씨이다.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현감에 있을 때 외갓집인 해남에 내려가 책을 읽기도 했다. 정약용의 사상은 단순히 그의 천재성이 아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조성된 집안 환경이 매우 컸다.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공재 윤두서이고,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종손이다. 또한 공재 윤두서의 아내는 지봉유설 저자 이수광의 후예이다. 지봉유설이 실학의 시작점이고, 그 뿌리는 다른 줄기로 타고 가서 정약용이란 거대한 대양(大洋)에 흘러간 것이다. 독립운동가 위광 정인보는 다산을 두고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라고 했다. 다산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다산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 및 기념관, 다산에 대한 책들은 계속 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 정약용은 역사기록에서 권력자에 의해 패배자로 기억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한국의 위대한 위인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기록이 지금까지 무사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약용 선생의 가족과 제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조선왕조 시절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의 사촌이었다. 2014811, 한국 천주교회사에 가장 성스러운 행사가 있었다. 교황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천주교 유적지를 방문하고, 명동성당에 미사를 봤다.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하신 업무 중에 한국 천주교 성인을 시복하는 일이었다. 그 시복대상자 중에 1791년 신해사옥 때 참수당한 윤지충이란 진사였다.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사촌이었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사촌동생 권상연도 천주교 문제로 참수를 당했다. 국가반역죄인과 동급으로 취급당한 윤지충의 죄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사른 후 천주교방식으로 장례식을 치룬 것이다. 관아에 고발되어 배교를 하지 않은 채 참수당한 그는 정약용 선생만 아니라 해남윤씨 일족까지 여파를 주게 되었다. 윤지충이 죽은 후 1801년 신유사옥에서 정약용의 친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이 참수를 당한다.

 

정약용의 유배 18년의 시작이 가족들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유배지 중에 가장 유명한 장소는 강진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외가의 먼 친척들의 소유물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귤정공댁이고, 다산초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행당공댁이었다. 다산의 주변을 보면 해남윤씨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다산은 학문을 쌓을 때 평생 성호 이익 선생을 흠모했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다산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와 아주 친했다. 게다가 이익의 형인 이잠과 이서 역시 윤두서와 매우 친한 친구였다.

 

이익의 아버지 이하친은 숙종 때 경신대척출로 귀양지에서 사망하고, 큰형 이잠은 상소문을 올리다 노론의 공격에 의해 장살되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이익과 윤두서는 벼슬을 포기한 채 학문에 매진했고, 단순히 성리학만 아니라 지리학, 천문학, 의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잡학가가 되었다. 잡학은 벼슬에 도움 되지 않으나, 조선의 백성에게 필요한 기술이었다. 기상을 알면 농사가 보이고, 지리를 알면 무역이 보이고, 의학을 알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기술을 쌓으면서 성호 이익은 박학다식한 학자가 되었고, 남인들 대부분은 성호 이익에게 가르침을 받아 성호학파란 거대한 실학학파가 탄생했다.

 

윤두서 역시 그런 실학적 가치관을 지녔고, 그의 관점은 백성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을 관찰했다. 이런 사상적 흐름이 다산에게 이어진 것이다. 다산의 외가 해남윤씨 녹우당,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자의 집, 한국 국문학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고산 윤선도, 녹우당 터는 해남윤씨가 기거한지 500년이 되었고, 고산이 효종에게 하사받은 가옥은 400년이 되었다. 한국 전통고택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는 녹우당, 한국 전통가옥 연구에서 녹우당은 매우 중요한 건축연구 대상이다.

 

몇 백 년 동안 전쟁과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그곳은 조선의 문화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세계이다. 예전에 전주 한복마을을 놀러간 적이 있었다. 한복마을 인근에 전동성당이 위치해 있다. 그곳은 정약용의 사촌 윤지충이 참수당한 곳이고, 그의 피가 서린 곳에 성당이 올라가있다. 해남윤씨 문중 홈페이지에 그동안 그늘에 숨어 있었던 윤지충의 초상화가 등장하고, 518 광주 민간인학살사건에서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도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남윤씨는 그렇게 바람 잘 곳이 없는 집안이다. 나의 아버지는 배를 타시고 몇 개월 동안 외국에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부자의 정을 깊게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어디를 놀러가는 일은 전혀 없었으며, 집에 오시면 집안 내부 수리일을 돕기만 했다. 그래서 대화의 주제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제대로 이야기한 부분이 정약용 선생과 고산 윤선도 고택에 대해서였다. 아버지는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강진 항촌마을에 시집을 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터져도 녹우당이 무사한 것은 국군과 북한군이 교대로 지켜주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해남윤씨 기원은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에 장가와서 생활하던 도중 나라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가뭄에 시달려 배고픔도 한탄스럽지만, 가난이란 이유만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많은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때 어초은공이 자신의 재산을 나라에 기부하여 옥문에 갇힌 백성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것도 1번도 아닌 3번이었다고 한다. 해남윤씨 종가와 관련하여 본관이 해남이라 해도 본래 해남윤씨 집성촌은 강진군이고 문중의 장손 역시 강진에서 터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무관직을 주로 역임하다 조선 후기로 가서는 문관을 주로 많이 배출했는데, 양반 사대부 집안이라 해도 일반적인 양반의 모습으로 살지 못했다. 어초은의 스승인 금남 최부는 윤효정의 아내 언니의 남편이었다. 최부는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화를 당해 죽임을 당하고,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해 유배가게 되었다. 개혁적인 정치세력에 따라 권력으로부터 견제를 당했고, 신해사옥과 신유사옥 시에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해남윤씨는 8대 종파가 있는데, 그중 어초은공파가 가장 많이 활약했지만, 그만큼 시련도 많았다.

 

선조시대 정여립 반역사건 시 동인의 영수 이발이 죽임을 당할 때, 그의 노모는 윤구의 딸이었고, 윤선도에게 고모할머니가 되었다. 고산 윤선도 역시 유배로 이루어진 삶이었고, 그런 비운의 삶은 한국의 국문학을 성장시켰고, 그의 흔적은 한국 대표 문화관광지가 되었다. 21세기 한국이 세계적으로 계속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한국이란 그 나라는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되묻게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방문하면 국가적으로 전통적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얼마 전 한국에 방문한 벨기에 여군대령은 그 나라의 공주였다. 벨기에의 공주라고 해도 그녀는 특권을 가진 권력자보단 시민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동안 멀리했지만, 다시금 찾아가게 되는 회귀현상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유교는 모조리 뿌리 뽑았지만, 지금의 유교는 전 세계에 공자학교가 세워질 정도로 다시 활약하고 있다. 조선유학에 대한 책을 보고 난 뒤 서양철학을 보면 그 말을 취지는 조금 상이할지어도 거기서 의미하는 맥락은 유사하다. 서구의 학문이 들어와 서구화된 것처럼, 그 서구화의 사상적 토대 역시 서양 철학가 내지 사상가에 의해 존립된 것이다. 그런 학문적 전통을 살리기 위해 각국에서는 그들 나라의 위인들의 역사적 기록과 업적을 기리며,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문화적 배경으로 삼는다.

 

과거의 가치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나, 적어도 지켜갈 가치가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통문화 기념한 유적지 및 관광지를 찾아가면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 지금은 어느 정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꾸준히 잊지 않고 지켜온 것이다. 녹우당 외에도 많은 전통한옥에 오랫동안 지켜오고 살아온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로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지언정 자신의 인생철학에서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지켰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봐서는 답답할지 모르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은 휴가와 휴일을 이용하여 그런 장소를 찾아 떠난다는 점이다. 누군가 즐기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토대를 구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누군가 그것을 맡기기만 하면서 그것조차 비웃으면 참으로 바보가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해남과 강진의 관광문화지도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정약용의 외가만 아니라 정약용의 친구 겸 사돈, 그리고 사위의 집과 무덤도 올라간 것을 보았다.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가 해남윤씨지만, 자신의 딸도 해남윤씨 집안에 보냈다. 다산의 외가가 어초은공파라면, 다산의 따님이 시집간 곳은 해남윤씨 참봉공파 만호공댁 집안이다. 다산의 친구 윤서유,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의 친구 윤광택, 다산의 따님과 외손자가 같은 장소에 잠 들어 있다. 그들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들어준 것은 역시 그들의 후손들이다. 집안의 틀에 얽매여 거기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굴레지만, 그 굴레가 없다면 한국의 전통문화는 모조리 사라졌을 것이다.

 

<녹우당>이란 책을 보면서 다시 또 느낀 점은 조선시대 사대부는 남성중심이라 해도 여성들의 업적이 너무 감동스러웠다. 여성 국문학에서 규한록을 저술한 광산이씨의 기록에서 애한과 갈등 그리고 운명적 기로가 돋보인다. 나의 가까운 친족이 많지 않은데, 내 할아버지들이 독자로 내려왔기 때문이라 들었다. 나의 고조부는 30살 되기도 전에 운명했다. 아직 10살 채도 안 된 증조할아버지는 고조할머니 손에 이끌려 강진군 항촌마을에 왔다고 한다. 몰락한 가난한 양반에 시집와서 남편을 여의고 하나뿐인 아들을 키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온다.

 

집안 족보시작은 임오보라 하고, 그것은 고산 윤선도가 시작하여 그의 외손자가 마무리했다고 한다. 남자만이 아니라 딸의 생년월일도 기록하고, 어디에 시집간 것까지 기록했다. 제사문제는 유교문화 이전에 한국전통문화이기도 하지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점은 단순히 친척을 모이기 위한 문화적 장치만 아니라, 힘들게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으나, 아버지의 빈자리란 공백이 이렇게 만든 모양이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내 아버지와 나와 이야기한 것에 대한 각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소개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 가난과 배고픔, 서러움이란 한에 눈을 감은 내 아버지를 돌이켜본다면 내게 남은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들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 그런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책을 읽고 거기서 또 다른 이야기를 찾는다. 해남윤씨 집안에 태어나면 그 집안의 특성에 따른 문화적 영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그것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배제할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기에 해남 녹우당 뒷산에는 비파나무 숲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다산초당에 있는 정자에서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대는 계속 변화하고, 사회는 계속 이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다. 한국인이 한국 사람으로 남는 것은 문화적으로 계속 교류하는 것도 있지만,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계속 새롭게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실학자들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늘 받아들여 색다른 결과로 이어갔다. <녹우당>의 책에서 소개한 녹우당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그 기존의 그릇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 우리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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