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안경환 교수의 성의식 관련 기사가 신문에 떴다.
왠지 부도덕하더고, 신문을 보고난 뒤 다른 신문을 보았다.
그러나 전후맥락적으로 그 문제를 강조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르게 보았다. 인식과 관점의 차이는 정말 다른 것 같다.
최근 한국의 노동력을 보면서 노인분들이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육아와 관련하여 우리집은 엄마 혼자서 다 했다.
엄마 혼자서 하는 게 바람직하냐 아니냐를 떠나 우리집은
바람직했다. 우리 아버지는 배를 타고 최소 반 년을 외국에 있었다.
배를 탔던 아버지는 칠순 전후까지 배를 탔다.
배를 타는 곳이나 노가다하는 세계나 대부분 노인들이다. 이들이 세대를 지나면
한국의 노가다 내지 선원들은 거의 줄어들 것이다.
나도 엘리트들이 보는 책을 보지만, 나는 엘리트의식을 가진 자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현실에서 보는 엘랑강트한 모습에서
좋은 커피가게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그 건물은 건설노동자가 만들고, 그 커피를 만드는 원두와 기계는
배를 타고 온다.
가끔 여기서 지식인들이나 작자들이 적는 글을 보면 한 한계가 보인다.
현실의 토대, 그 기본베이스는 물질이다. 왜냐고? 이글을 보는 당신이
있는 곳은 집, 커피가게, 회사 등 어느 공간 속에 있다.
그 건물을 만드는 자가 누군인지? 하다못해 전기가 끊기면 덥다고
짜증을 부릴 것이다. 그런데 전기장비나 상하수도 설비를 고치는 사람은
건설노동자들이다.
자신은 사회적인 인프라를 다 누리고도, 그 순간적인 간극이 있다면 보통사람처럼
불평을 보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면 그런 인프라를 만들어낸 사람들을 그들은
가장 싫어할지 모른다. 갑자기 생각나다. 출근길에 버스기사가 눈을 부비며
"피곤하다"라고 혼잣말을 한 게 말이다.
지식인라기보다 엘리트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관점과 시선은 서로 다르다. 엘리트가 없어도 길가에 노가꾼은 알아서 살아가도
길가의 흔한 노가다꾼이 없으면 당장 아무 것도 못한다.
사회적 인프라인 교통, 항공, 병원, 철도, 수도 등은 물체로 존재하기 전에
그 물건을 만들어내야 하는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알라딘에서 제법 이달의 리뷰나 페이퍼로 당첨되어 제법 별사탕도 많이 받았다.
다른 분의 글들을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한다.
현실을 과연 제대로 들어다보고 있는지 말이다.
인터넷 세계는 자유로운 네트워크 세계이다. 그러나 세계는 네트워크만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대부분 고위관료 장관 및 차관은 엘리트 내지 지식인이 한다.
그리고 그 산하기관에 위원등은 교수나 전문가 같은 엘리트가 있다.
그 위원 중에 길가는 노가다꾼이나 3교대로 고생하는 간호사,
식당매점에서 밥하는 아주머니, 러시아워 시간의 버스기사 등등
이런 사람들이 위원으로 위촉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