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정광호 지음 / 눌와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세계 어디를 가도 가족의 죽음은 아주 큰 비극이다. 사람이 죽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천운이다. 생물로 태어나면 생명은 사라지고, 사라진 생명을 대신할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영겁의 순환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아가나, 인간은 조금 다른 식으로 전환된다. 동물에게 문화라는 조건이 없다. 인간만이 지구에서 문화라는 매체로 살아간다. 동물은 필요한 수요만큼 생명을 죽이나 인간은 필요한 수요 이상으로 생물은 죽인다.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동족까지 공격하는 부류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은 문화라는 매체를 가지고 있고, 그런 문화적 문제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후반이 되자 한국은 민주주의 체계가 정립되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지하고문실로 끌려가서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의문의 실족사나 행방불명도 되는 일도 드물게 되었다. 민주주의체계를 보자면 정치사회적인 여건이나, 이것도 하나의 문화적 요건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우리 역사를 유교문화국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가 종교이며 정치이며, 철학이며 하나의 삶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나, 거대한 시스템이란 체계구조에서 유교가 하나의 큰 틀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사회의 지배계층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에 남기는 존재는 대부분 양반 사대부들이다. 사대부들의 역할을 두고 공자의 <논어>와 관한 책을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가지만, 그래도 공자의 사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가 죽는다는 것은 엄청 큰 불운이었고, 특히 집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더욱 큰 불운이었다.

 

가부장 사회라는 점도 있지만, 한국에서 역사적으로나 혹은 신화학적 연구에서 제일 심한 욕이 후레자식이다. 아비 없는 놈이라는 의미이다. 아비 없이 자란 인물도 많고, 큰 업적도 남긴 분도 많다. 단지 아비가 없는 것은 경제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아비가 자식의 장성하는 모습을 본 후 세상을 떠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비를 잃은 자식에겐 큰 숙제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죽으면 묘비를 남기는데, 그 묘비를 새기는 일은 아무나 맡기는 게 아니라 주변에 큰 인물이나 대단한 명사에게 맡기는 것이 예의였다.

 

집안의 내력이 그래서인가? 아니면 개인적 성향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으나, 역사서적을 읽으면 한국 향교에 배향된 인물에서 사림집단의 시작점을 지난 후 인물 대부분이 서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노론계통이 많았다. 한국의 유학자를 보면 서인이 아니라도 동인(북인과 남인)도 제법 올릴 사람이 많다. 남명 조식 같은 학자나 문도공 다산 정약용도 그렇다. 그러나 항교에 배향된 인물은 그렇지 못한 느낌이 다소 많이 든다.

 

어떻게 보면 어느 후손들에게 다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선비는 그런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생애를 좌우했다. 왜 아비의 묘비가 중요한가? 광해군 이후 북인들이 득세 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득세하였는데, 서인들이 숙종 시절 남인을 무고하게 도륙한 이유로 소론과 노론으로 구분되었다. 이때 소론의 영수가 윤증, 그의 아버지는 윤선거이었다. 윤서거가 우암 송시열과 친한 사이였으나, 어느 순간 약간 미묘한 관계가 되었고, 윤증이 남인 영수인 백호 윤휴와 사이좋은 이유로 송시열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윤증의 아버지가 윤선거가 별세하자, 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했으나, 당시 송시열의 주자학의 절대적 신봉에 의해 윤선거의 묘비명은 조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소신이 중요한 이유는 조선은 물질적 조건을 중시하는 현대가 아닌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관념적 유교사회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그 자식에게 위로하지 못할망정, 아비를 욕되게 하는 것은 원수로 지내자는 말과 같은 것이다. 소신의 시작은 미묘하게 틀어진다. 죽음과 배신, 그리고 거대한 피바람을 부는 숙청까지 이어진다. 노론과 소론은 숙종과 영조까지 이어지고, 경종의 독살설까지 이어진다. 하다못해 사도세자의 비극에도 이런 씨앗이 움트고 있을 줄 누가 아리랴?

 

조선의 선비는 참으로 바보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장미가 승화될 정도였다. 조선의 양반은 지배계급이기도 하나, 어떻게 보면 피지배계급보다 못한 경우도 많다. 심한 착취, 무능한 탐관오리만 아니면 백성은 그렇게 살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삶은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 이어진 점이다. 백성이 어려우면 사대부의 역할은 백성에게 편한 삶을 살도록 열어주는 게 임무이다. 여기서 권력을 잡은 자들이 계속 이윤을 추구하면 문제가 발생된다. 소신과 처신, 권력과 막대한 경계점과 마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중종반정 후 사림의 집권은 하지만, 기묘사화는 씻을 수 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다소 비극적인 게, 기묘사회로 친척들이 화를 당한 동고 이준경이 나중에 중종에 의해 기용되어 선조까지 보필한 사례이다. 동고 이준경은 연산군에 의해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목숨을 잃게 되었다. 기묘사회에서 화를 당한 사촌형 탄수 이연경에게 글을 배운 이준경은 추후에 영의정까지 올라간다. 그런 그가 아주 침착한 처신을 하지만, 한편으로 마지막은 극렬한 반응을 보여준다.

 

이준경은 죽기 전 선조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당시 명사인 율곡 이이가 붕당의 문제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고, 이이와 서인들은 이준경을 공격하지만, 죽기 전 고령의 대신이 남기는 상소이기에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마무리 지었다. 이때 그를 도운 사람으로 서애 유성룡이 있었다. 유성룡은 이준경에 의해 천거되고, 유성룡은 충무공 이순신의 친구이다. 이준경은 이미 을묘왜변 때 왜구를 격퇴한 문관이기도 하니, 참으로 운명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준경은 가족들의 화를 당해도 참고 참아 국정을 수행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예언대로 붕당의 폐단은 일어나고, 이 책의 주인공인 송강 정철의 기축옥사를 발견한다.

 

이 책이 작가 분은 다소 나하고 성향은 다를지 모른다. 기축옥사에서 정개청은 반역을 주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사료를 다시 뒤집어보면 변방의 외적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하나의 방어구축체계를 따랐으며, 그 체계는 궁술연습하다 반역으로 몰렸다. 기축옥사가 임진왜란 3년 전에 일어난 일에서 만일 기축옥사를 제대로 간파했다면 임진왜란의 양상이 다르게 갔을지 모른다. 임진왜란과 호란, 숙종에 이르러 임금은 권력이 약해지면서 권신을 이용하여 피바람을 일으킨다. 남인이라 해도 정약용이나 이가환, 채제공 같은 명재가 있는 것만은 아니고, 서인이라 해도 권력에 빠진 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의 복수심과 증오로 피를 계속 피로 씻어 내릴 뿐이다. 연좌제로 걸려 귀양 가거나 사형 당하거나, 심지어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자신은 참수, 아들은 교수형, 며느리와 딸들은 관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멀쩡히 산이나 변방에서 글을 읽다가 귀양 가거나 곤장을 맞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 운명은 선비만이 아니다. 왕족은 더욱 심했다. 조선시대 가장 슬픈 왕자를 상기한다면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자들은 시파,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벽파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있지만, 정조의 형제도 있었다. 아니 정조의 조카도 있었지만, 대부분 귀양 내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솔직히 이 책에서 보고 놀라지만, 흥성대원군 고종의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후손이란 점은 더욱 놀란다. 사도세자의 죽은 노론과의 정쟁으로 희생된 것이다. 자신의 종친들이 죽는 모습을 본 이하응은 자신이 왕족처럼 행동하기보단 거리의 건달 내지 바보처럼 행동했다. 그 덕분에 이항은 죽지 않고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되었다. 처신 중의 처신이 아닐 수가 없다. 소신을 내세운 왕족들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소신과 처신 모두 다 지니어야 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정약용은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자, 다음 해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옥고를 당한다. 작은형 정약종은 한국만 아니라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매형 이승훈과 같이 참수되기 전 정약용은 국문에 나와 천주교와 관한 심문을 받는다. 이때 유명한 말로 자신은 나라의 신하이니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자신은 형님의 동생이니 형님을 고발할 수 없으니 결국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상당히 모순된 발언이나 상당히 뛰어난 재치가 숨은 말이며, 때로는 자신의 소신이 담긴 발언이다. 정약용은 귀양 전 삶은 오로지 소신을 위한 삶이었다. 정조를 위해, 백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정약용은 너무 완벽한 천재였다. 군자인 그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사도세자의 업적을 기른 것은 벽파에게 큰 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어느 권력자는 왜 정약용을 죽일 수 없느냐고 다른 대신에게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대신은 하늘이 그러니 어찌 하겠소? 라고 할 정도이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오자 오로지 한 일은 학문의 연구이다. 해배된 후에도 학문의 연구이지만, 여유당이란 이름처럼 살얼음을 걷는 삶처럼 그는 소신과 처신의 사이에서 아주 절묘한 균형을 찾은 것이다. 당시에 역모들의 주범이라 들었던 정약용은 21세기에는 한국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에 하나이며,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이다(유네스코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이니). 그분의 삶이 소신을 숨기기 위한 처신이니 참으로 선비의 운명은 기구했다. 21세기 한국에서 그 당시 권력을 위한 소신을 삶을 산 자들은 비난의 대상이, 백성을 위해 소신으로 죽은 자에게 다시 평가가 이루어진다.

 

생각해보면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지만,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막상 이름만 남기고 죽으면 무슨 이유로 보람이 있을까 하나, 적어도 그 이름을 남긴 자들의 후예들에게 평생의 짐이 된다. 매국노 을사5적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에 부와 권력을 잡았고, 현재도 어느 정도 잡고 있지만, 점점 갈수록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오욕으로 남는다. E.H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다. 과거의 오점이 먼 미래의 후예에게 미치고, 현재의 상황이 과거를 바꾸기도 한다.

 

21세기 한국에서 소신의 삶을 살아가기 너무 힘든 것 같다. 바른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도 어렵다. 물론 처신도 더욱 힘든 것 같다. 처신은 자신의 몸만 무사하게 넘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족과 주변까지 돌아봐야 한다. 눈앞으로 이익에 눈이 멀어 처신을 잘못하면 그 화가 언젠가 자신이 아닌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일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주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 경우는 종종 없지만, 조선은 연좌제도 강했고, 상대방을 무고할 때 그만큼의 죄를 되받는 반좌죄도 역시 무서웠다. 내가 상대방을 죽일 것을 건의하면 나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권력만 믿고 행패를 부리다 능지처사 후 효수된다면, 죽기 전의 그 고통은 얼마나 괴로우며, 죽은 이후에 올 치욕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하지만 더 안타까운 일들은 그런 비극적인 일들은 권력자보단 권력자에 의해 희생된 자가 많았다. 백성들이 능지처사보단 그저 곤장이나 참수로 끝나지만, 선비사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신을 물리자니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배반하고, 소신에 너무 따르자니 화가 닥친다. 화를 받는 순간 목이 떨어지고, 화를 피하는 순간 화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경종의 독살에 의심한 소론 김일경은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라고 했는지 모른다.

 

지금 보면 너무 무모하지만, 다르게 보면 누군가 당산에게 소신이나 명분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자라고 듣는 것도 싫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걸핏하면 홧김에 하는 경우가 많으나 선비의 삶에서 소신과 현대인의 홧김에는 분명 차이는 있다. 어떻게 보면 소신의 삶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처신일지 모른다. 적어도 역사의 이름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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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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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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