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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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많은 소재가 되는 것이 영조와 정조의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는 사도세자라는 비운의 왕세자가 한에 맺혀있기 때문이다. 당시 급박한 상황들을 현대사회의 영상이나 이야기로 드러내려면 우선 그 기록이 필요하다. 모티브가 되는 역사적 사실에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러티브가 완결된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어보자 조금 나는 당혹스럽게 느꼈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도세자가 붕당정치에서 심각한 피해를 본 군주의 후예라는 점을 안다.

 

그런 점에서 예전에 본 <사도>라는 영화처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전과 갇힐 때 그리고 그가 죽은 후 정조가 즉위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생일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정조가 들고 있는 부채는 사도세자가 가지고 있던 부채이고, 부채를 들고 춤을 정조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무척 흐뭇하게 웃고 있다. 영화에서 혜경궁 홍씨는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주변 대신들이 맺어진 상황에서 큰 실의를 겪는 것으로 나온다. 마지막으로 왕세손 정조가 사도세자로 인해 폐위 내지 화를 당하지 않게 위해 사도의 형 아래로 입적을 올린다.

 

그녀는 정조가 생사에 대해 무척이나 고민하고, 부군의 죽음에 통곡하는 여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관점이나 권력성이 달린 문제였다. 정조가 처음 등관하여 정사를 볼 때 노론의 암살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암살의 주모자는 홍인한 외 여러 일가들이고, 홍인한의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동생이다. 형의 사위 아들을 왜 죽이려 했는가? 그런데 그들은 풍산 홍씨 혜경궁의 친족들이다. <역린>이란 영화를 보면 영조의 마지막 아내인 정순황후와 혜경궁 홍씨와 기 싸움을 보여준다.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정순황후가 혜경궁 홍씨는 항상 공손하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잘못 생각한 점이 있다. 정순황후는 지독한 노론 일당의 후예이고, 혜경궁 홍씨 역시 자신의 가족들이 남편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어도 수수방관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노론 일파의 2사람이 적보단 오히려 동지에 가까웠다. 1804년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가족들이 역모를 저지른 것에 대해 사면 받으려고 정조에게 부탁을 했다.

 

<한중록>이란 책도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정조 그리고 순조에게 변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자신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무런 관계는 없고, 단지 힘없이 자신의 부군을 잃어버린 것처럼 또는 사도세자가 미친 광인이 되어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적기도 했다. 그런 방식이 만들어진 <한중록>이라면 영화 <사도>는 그야말로 혜경궁 홍씨의 기억으로 조작되어진 작품이 된 것이다. 물론 감독이 어느 관점인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사도>는 인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예법이 중요한가라는 딜레마를 두고 영조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도는 황후의 자식이 아니라 후궁의 자식이다. 사도세자의 생모가 사도의 죽음 앞에 무력하게 좌절하나, 사실 <영조실록>을 정리한 내용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기여한 사람은 그의 생모와 아내이다. <한중록>과 영화 <사도>의 주변인물은 자신들이 가한 죄를 보여준 게 아니라 오히려 감정적으로 사도의 죽음을 애도한 것처럼 보여준다. 실록의 기록이나 정조가 남긴 자료나, 하다못해 노론이 아닌 소론이나 남인이 증언되는 자료에서도 그 기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족이 왕의 세자와 세손을 죽이려 했고, 실제 사도는 죽었다. 그런 점에서 역모로 풍산홍씨 일족 스물 명 넘는 사람이 죽고, 멸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그 죄에서 복귀시키기 원하는 혜경궁 홍씨가 그 모든 원흉의 조력자인 것이다. <정조실록>에서 정조가 역모사건을 다루면서 혜경궁 홍씨의 일족을 처단해야 할 때 그녀는 식사를 하지 않고, 정조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이 나온다. 실록은 사실을 기록하지만, 사실도 사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때 그 순간 일어난 일이나 나온 말들은 거짓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주워 담은 후 사관의 사견을 넣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관의 기록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심지어 노론의 사관 신료가 영조 옆에서 사도를 엄하게 대할 때 붙어있고, 홍씨 집안의 위선을 드러낸다. 사도가 죽을 때 뒤주를 내어놓은 것은 홍봉한이고, 사도가 죽을 때 배 위에서 놀고 있는 사람도 홍봉한이다. 사도에게 정조를 지켜달라고 했지만, 그 정조마저 나중에 불편한 것을 느끼던 홍봉한과 홍인한이다. 사도세자가 왜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을까? 책을 보면서 놀란 점은 택군이란 단어이다. 왕은 왕족과 대신의 합의가 아니라 대신들의 권력을 위해 선택된 점이다. 그런 점이 세도정치에서 철종과 고종황제가 그러하다.

 

택군되지 못한 왕은 그들에게 위험한 존재이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사도는 문학적 지식과 소양이 깊었지만, 힘이 장사였고 아주 훌륭한 용장이었다.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의 군주는 뛰어난 무장이고, 태종 이방원과 효종대왕과 헌종 역시 뛰어난 무장이었다. 사도는 건장한 장정도 들기 힘든 청룡도를 들고 수십 합을 말 위에서 휘두르고, 활을 쏠 때 명궁 중에 명궁이었다. 사도의 기운을 받아 정조 역시 명궁인 점에서 무장의 혈기가 흘렀고, 영조처럼 다혈질이 아니라 차분하여 군왕의 자질이 뛰어났다.

 

바로 이런 점이고, 경종의 독살설과 소론과 남인을 배제한 노론정치가들에게 매우 곤란한 존재이다. 조선 르네상스 정조시대, 정약용과 채제공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때 간신들을 축출할 때 쉽게 하지 못했던 것은 노론이 묻은 권력구조가 깊게 뿌리박힌 것이다. 책에서 사도는 백호 윤휴의 건의에 따라 북벌론을 제기한 효종을 이은 최후의 왕족이었다. 게다가 사도가 분조하여 지방에 나갈 때 많은 백성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원했고, 왕가의 행렬에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궁궐 안의 이야기는 쉽게 내놓지 못하나, 궁궐 밖의 백성들은 다 안다. 사도가 어진 임금이 될 것이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탐관오리에게 큰 벌을 내릴 것을 말이다. 사도의 죽음과 정조즉위 후 사도의 이장행렬에서 많은 백성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정조는 자신이 왕좌에 오르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공표한다. 정조가 만든 세상, 정조가 꿈꾼 세상은 사도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런 사도가 역사 속에는 미치광이 내지 문제 많은 세자로 등장한다. 사도에 대해 내가 접해본 것은 다산 정약용을 알아가면서이다.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이나, 한편으로 아버지 정재원은 사도의 죽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다. 아버지의 영향에서 남인이던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이미 자신의 집안에서부터 비극이란 점을 알았고, 사도세자가 머문 자리에 기리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란 바로 정조와 정약용처럼 군주의 나라, 군주는 백성을 사람을 임금이어야 했다. 정암 조광조 이후 소학(小學)이 매우 중요한 학문이 되었다. 소학의 가르침에서 작은 것을 실천하고, 그 작은 것이 모여 크고 큰 거대한 조류로 이어진다. 그 작은 실천에서 백성의 괴로움이 비록 소리가 작게 들리고, 사소한 일이라도 군주에게는 큰 고민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그렇게 하기엔 주변이 너무 힘들었다. 고독한 철장 안의 새는 억지로 미치광이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치명적인 병을 앓아도 영조 아래서 엎드린 채 며칠을 보내야 했다. 권력의 암투 속에서 생명의 불꽃이 꺼진 사도나, 역사의 기록에도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애도하고, 항의하는 자들까지 반역의 무리가 되어야 했다. 사도의 아들 정조가 죽자, 노론은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키고 남인의 많은 신료들을 사형 내지 귀양을 보냈다. 남인이 후에 등용되어도 언제나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정약용의 책은 일제강점기 때도 함부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사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조선시대 권력의 독점화가 결국 현실의 한국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축척된 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돌아보는 것이고, 현재는 과거의 시간이 축척된 하나의 과정이고, 미래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축척되어 만들어지는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를 다시 본다는 것은 지나간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또 다른 서사로 등장한다. 개인은 사라져도 개인이 속한 사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먼 미래의 내 후예들에게 물려줄 세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은 우리에게 답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나, 내놓지 않은 순간 우리는 역사의 죄인 내지 방조자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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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0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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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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