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먼 친척 한 분이 광주 북구에 위치한 518공원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나하고 촌수가 제법 멀기는 멀지만, 한편으로 시골에 가면 작은아버지(나하고 사이좋다)가 그 518묘지에 안치된 분의 주변 가족이나 친척하고 잘 아시고, 큰아버지도 집안제사로 시골에 오면 그쪽 계열 일가 사람들이랑 친하다. 그분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자, 그 분의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그 분의 누이들도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1980년 518이 있을 때는 요주의 인물로 수배되었으니 편안한 삶이 아닌 불운한 인생이 살았다.
영화 <자백>을 보았다. <자백>이란 단어처럼 한자어로 自白이다. 자기 스스로 죄를 토해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실 자백의 의미를 볼 때 대한민국헌법 제12조 제2항과 제7항을 보면 국민들에게 고문을 받으면 안 되고, 그 고문으로 이루어진 진술은 모두 증거로 삼을 수가 없다. 하지만 고문으로 인한 자백 진술은 그대로 인정되어 사법살인이 유신시절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자백>이란 영화를 보면 영화 시초는 몇 년 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몰다가 결국 중국 공안의 협조까리 받아 변호인단의 입증이 인정받아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동안 죄 없이 감옥에 갇히고, 언론과 미디어에서 유우성씨와 그의 주변인들은 크나큰 고통을 당했다. 영화라고 만든 <자백>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로 통해 전달되는 르포르타주식의 다큐멘터리이다. 시선의 관점이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각, 즉 약자의 시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시대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헌법처럼 거짓 진실을 얻기 위해 고문이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유우성 씨의 여동생은 국가기관의 통제아래 반년 가까이 구금되어 각종 폭력을 당해왔다.
폭행과 협박을 듣다가 갑자기 부드럽게 대하는 수사관들의 행위는 취조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고, 거짓진술을 유도하는 교묘한 전략이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헌법이란 이름 아래 헌법정치를 실시해야 할 국가정부가 오히려 헌법을 외면하고 오도하며 심지어 은폐한다. 이런 식의 자백을 받아낸 것은 1980년대로 끝이 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21세기 다시 부활했다.
20세기 한국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당위성을 가진 세계이다. 냉전이데올로기에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상이란 말처럼, 사상검증은 곧 모든 것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마저 파괴한다. 많은 이들이 정식재판을 받지 못한 채 혐의를 받고 1일 만에 사형선고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누군가는 아버지를 총에 맞아 죽어 어린 시절 고생했다고 하나, 수많은 사람들은 총에 맞은 그 누군가에 의해 아버지와 형들을 잃었다.
그 당시의 정부실세, 최근까지도 실세 역시 그 당시에 용공조작 사건을 주도했고, 그 증거자료가 있어도 “나는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도망치는 모습이 나온다. 지금 모르면 그 당시는 왜 그렇게 했다는 말인가? 당시 피해자들은 아직도 고문에 의해 온 몸이 망가졌으며, 정신적 충격과 지난날의 상처로 인생이 파괴되었다. 고문은 당하는 사람도 가하는 사람 모두 영혼이 파괴된다는 말이 있다. 육체와 영혼이 권력이란 이름 아래 무너진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내세우려면 그들의 과거를 풀어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최근까지 계속 1960~80년대 국가권력에 의해 사망하거나 징역을 살았던 이들이 명예회복을 위해 대법원을 들락거린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백로의 노인에게 자신의 한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가족에게 이어져 갔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이 중에 자신에게 자백서를 쓰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위해를 가한다고 협박을 하고, 심지어 그의 아내까지 성폭행하겠다고 말한다. 사람을 반죽음으로 만드니 그들의 말엔 일체의 허세는 없다. 남성에게 효과적인 것은 구타이고, 여성에게는 성추행과 성폭행이다.
현재 명지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는 권인숙 교수는 부천성고문사건 피해당사자로 당시 경찰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권인숙 교수가 그렇게 당해도 언론과 경찰은 계속 숨겼으며, 변호인단과 그 무엇보다 본인의 용기 있는 폭로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 문귀동 경찰관은 자신의 죄를 들켰을까? 이미 그런 방법이 하나의 고문이었으니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 시대 때 말단과 현장에서 활약하던 경찰관, 검사, 언론인들은 건장한 20~30대로 현장에서 움직였다면 이제는 60~70대로 돌아와 그 말단과 현장을 통솔한다.
약자를 몰아세워 폭행과 고문 그리고 협박으로 유지된 권력, 그 모든 수단은 오로지 권력만을 위한 방법이다. 영화는 21세기 현실에서 일어난 간첩조작사건을 통해 30~40년 전의 암울한 시대와의 연결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 최초의 간첩조작사건과 희생자 그리고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던 시점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하지만 이미 간첩이나 국가 반역자들도 아닌데도 지금도 계속 빨갱이 취급당하는 사람은 여전하다.
이 글 서두에 거론된 그 분도 역시 그렇다. 영화라는 것은 매체이다. 매체로 보여준 진실 찾기에서 정치적 권력은 역시 매체로 통한 언론플레이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저널리즘은 바로 여기서부터 사실성과 공정성의 관계에서 어둠에 가려진 모순과 부조리를 밝혀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규모 언론은 사실성과 공정성보단 권력과 이익에 치중했다. 그런 나라이니 얼마나 상처가 뿌리 깊이 곪아있었는가? 세상은 정의로운 사람보단, 정의롭지 못한 사람을 원한다. 그래야 그 대상을 공격할수록 부정의에 의해 탄생된 정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