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 원리 2 - 사회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7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 대한 서평을 적으면서 어느 분이 재미있는 의견과 조언을 주셨다. 그분이 주신 코멘트 중에서 인상 깊은 것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남겼다. 생각해보면 밀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근식 교수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같이 일반적인 자유주의하고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정치경제학 원리> 2권째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아내인 해리어트 테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자유주와 페미니스트적인 자유주의자로 될 수 있던 원인은 해리어트 테일러의 영향이 컸다. <자유론>이나 <여성의 종속> 같은 책을 읽어봐도 밀의 자유주의 논조는 단순히 개인만의 자유를 강조한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했다. 어느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자가 속한 사회는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이상으로 그가 다시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과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즉 한국처럼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회적 단절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으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바라며 좋은 삶을 원할 경우 사회에서 도움과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밀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관은 공리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의 동료인 벤담과 다르다. 벤담은 양적인 공리주의, 누군가 다름이 없이 모두 같은 것을 줘야 한다면, 밀의 경우 그 상대방이 처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사회에서 전부 국가적으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누군가에 따라 필요한 인프라나 서비스는 다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영역을 공공성의 여부를 가려 정책을 펼친다면 결국 국가나 민간에서는 자본이 이용된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경제적 조건을 따라가기에 경제학은 단순히 수학식으로만 볼 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과 여건을 보는 것이 옳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그의 경제에 대한 관점은 바로 대다수로 이루어진 농민이나 노동자의 생활 그리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자본과 토지 등을 판단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에 영국 런던에 카를 마르크스가 와 있었고, 마르크스는 코뮤니즘 즉 공산주의 이론을 1848<공산당 선언>으로 통해 발표했다. 물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마르크스 말고도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을 말한 것을 보면 마르크스 혼자 공산주의를 논한 것도 아니고, 당시 생시몽, 오웬, 푸리에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활동했다. 마르크스가 아마도 밀의 경제학에 대해 다소 공격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정치경제학 원리> 2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밀은 생시몽과 친분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시몽의 이론을 제법 책 시작부에서 많은 고찰을 했으며, 국민경제와 관련하여 어느 경제적 관점이 좋은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어느 것만이 좋고 나쁘다고 밀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 효용성에 대해 언젠가는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밀이 살고 있을 무렵은 경제학은 전형적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이었다. 즉 자본가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제도, 경제적 구조가 있었던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 밀의 정치사상이 어느 정도 이해가게 된다.

 

밀은 인간의 비참한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인구에 대한 고찰과 인구조절을 위해서는 식량이 중요한 점을 검토했다. 그리고 식량과 더불어 인구증가를 단순히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구정책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밀은 주장한다. 밀이 페미니즘 관점에서 적시한 부분은 너무 많은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들을 양육할 능력이 되지 않아 일부 아이들은 병으로 죽게 되거나 먼 미래 아이들은 가난으로 인해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다. 가난으로 인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약을 구할 수 없으며, 재산이 없으면 자식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

 

아이들은 2명 정도, 혹은 병이나 사고로 죽을지도 몰라 3명까지만 존재하는 게 맞는 것이다. 밀의 생각은 현재 한국이나 일본 사회에서도 놀랍게도 적용된다. 한국의 인구출산 비율이 1.2인에서 다운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여성 2명 중 1명만 자녀를 가질 것이고, 출산을 해도 몇몇은 사고나 병으로 죽는다면 인구유지는 1.1인으로 될 것이다. 인구의 감소는 경제적 생산력 축소와 경제활동 영역이 축소된다. 경제력이 축소되어 시장경기가 퇴보하면 나라는 극심한 빈곤으로 치닫게 된다.

 

밀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고, 교육을 위해서라면 사적인 투자와 공적인 투자가 있지만, 공적인 투자는 누가나 지원할 수 있기에 그런 직업을 가진 자는 넉넉한 임금이 오지 않은 점을 말했다. 이에 반면 사적인 투자, 즉 집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의사나 법조인으로 선택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변호사 수임료가 그토록 비싼 이유는 변호사가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한 사람의 몫까지 챙기기 때문에 비싸다고 했다. 결국 직업의 선택적 사항이 상황적 유리함과 불리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정치경제학 원리>는 경제학에 대한 책이기도 하나, 사실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부분도 강하게 반영되었다. 솔직히 책 앞부분을 보면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학문과 예술에 대하여>가 생각나기도 했다. 정치경제학자인 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민들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하고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분명 심각한 문제다. 그 모든 것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농사를 짓는 농민의 상황을 제대로 고찰했기 때문이다.

 

본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현재 수준 이상의 인구가 필요하고, 재생산이 되려면 결혼 내지 남녀 간의 동의 아래 자녀가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양육비와 교육비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을 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재생산의 기능을 위해서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충분한 생활비가 받아야 하고, 농민은 자신에게 돌아갈 수확물이 있어야 한다.

 

특히 농민과 같은 경우 밀은 자작농의 활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자신이 밭의 규모가 작아도 그들 스스로가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기에 성실하게 일을 한다. 농지를 가꾸는 것은 어렵다. 유럽의 토지는 대부분 척박하고, 석회질이 많은 토질이 많기 때문에 시비관리나 수자원관리가 어렵다. 황무지개간을 하고 나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 그러나 농민이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애정을 가지고 농지를 개간하고 수확물을 거둔다.

 

지주가 있는 땅을 빌려 차지농으로 일을 한다면 그 농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 농지를 관리하려면 계속 땅을 갈아야 하고, 잡초를 뽑아야 하며, 시비관리도 해야 한다. 토지의 양분을 위해 가축을 사육하여 가축분뇨를 퇴비로 이용해야 한다. 만일 자기 땅이 없다면 굳이 농민을 농지를 개선해야 할 의무는 없다. 또한 농민이 지주에게 땅을 빌릴 경우 지대를 지불해야 하는데, 당시 영국에서 지대를 납부하면 농민에게 돌아오는 소득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내년 파종을 위한 씨앗까지 먹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이야 식량생산이 기계화 농업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고, 부족하면 수익 농산물을 대량 구매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때는 무역을 위한 교통수단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대량으로 운반하기에도 기술력이 부족했다. 자작농을 육성하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생활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충분한 생계유지를 통해 농업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차지농이나 농노의 경우 자신에게 돌아갈 양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할 수 없다. 같은 땅의 규모로 차지농과 자작농의 생산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이것을 현대에 두고 생각하면 굳이 농사만이 아니라 소규모 상업시장을 보면 생각할 수 있다. 각자의 가게를 가진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과 어느 큰 백화점 내 점포로 들어간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경제적 이용에서 소비자에게 나가는 금액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소비자가 사용한 금액이 배분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대규모상점 백화점에는 대기업에게 큰 이윤이 돌아가고, 직원으로 고용된 자에겐 단지 근무시간에 따른 임금만 지급된다. 만일 상점가의 개인상점들이 모인 곳에 같은 금액이 소비되었다면, 그 이익이 돌아가는 비율은 전혀 다르다.

 

소규모 운영되는 자작농이나 자영업자들이 줄어들면 그들은 임금노동자로 속해지고, 기존 임금노동자와 관계에서 임금인하에 따른 고통을 받게 된다. 즉 대규모 운영되는 상가에서는 인력을 최소운영인원만 필요하기에 많은 인원이 노동을 원할 경우 경쟁이 생기는 바람에 임금의 저하가 따른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론 원리>를 보면 영국에서도 농지에 대한 지대로 많은 농민들이 경쟁했다. 전임 차지농이 당초 자신이 대여한 가격과 비교하여 몇 배로 비싸게 다른 농민에게 파는 경우도 많았다.

 

밀이 경제적으로 자본을 얻는 경로는 임금, 이윤, 지대이다. 고전경제학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케인즈의 거시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도 통용되는 기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부동산이 기능하는 지대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농지에서 생산력이 증가해도 지대가 너무 높을 경우 농민에게 돌아가는 수확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에 EBS 자본주의 특별4부작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현대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어 마지막 고전주의 경제학자이면서 색다른 경제학을 보여주는 존 스튜어트 밀의 경제학 역시 마찬가지다(1권을 보면 20세기 초반에 경제학과 학생들의 교재로써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가 탁월하다고 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국가에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연구하는 도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먹고 잘 살려면 무엇을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스미스의 고민을 밀도 역시 똑같이 생각했을 뿐이다. 단지 추가한 부분으로 리카도와 멜서스의 이론을 접목했다. 마르크스는 멜서스를 경멸했지만, 후에 문화유물론을 내세운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중요하게 여겼다. 식량이나 혹은 현대로 따지면 식량 같은 재원이 인구를 조절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라는 것은 필요한 것을 구하고 이용해야 하는 것인데, 대다수 국민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임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경제학은 단지 숫자만으로 결정짓는다. 도서 모임에 경제경영학 전공자에게 경제학에 대해 전반적으로 물어봤다. 그 분이 말하기를 현대 경제학은 수학논리로 움직이는 반면 보통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움직이지 않기에 경제학의 공공성이 없는 것이 한계성이 높다고 했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서 왜 후대 학자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을 높이 평가했을까? 경제학 속에 철학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경제는 결국 어느 대통령의 성공신화에 군중은 매몰된다.

 

성공한 기업가는 나라의 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와 기업을 성장시킨 것이다. 물론 기업 활동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중요하지만, 기업의 목적은 기업이익증진이나 국가경제에서 국민생계수단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업화시대 자본주의 시장이 확실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경제규모가 성장했을 뿐이지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국민생활 현실을 지금 확인해보면 과연 우린 성장했을까? 철학이 없는 정치는 큰 죄악이다. 정치적 행위로서 정부의 운영은 예산이 움직이고, 예산은 경제성으로 움직인다. 아마 돈에 관심이 경제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는 아무 매력이 없을 책이나, 나라경제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접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