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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어떤 잘못은 저지르면 그것에 대한 책임감이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경우는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가끔 세상을 보면 그런 당연한 인간의 의무는 관심 없이 그저 개인적 이기심을 위해 모든 진실을 속이려 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오로지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면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끔 세상을 보면 국민의 눈과 마음은 의심하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진실을 은폐하는 자들이 많다. 진실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그 이상의 자신의 명예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는 매우 이기적이고 고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지, 때로는 우리 일상에서도 어이없는 일들로 다른 사람의 길을 막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엄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소설 내용에 대해 주변 반응을 보자면 충격적이거나 혹은 대단하다고 하나, 내가 느끼는 바로는 상당히 표현이 뛰어나거나 또는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이다. 작가는 현재 영미소설가로 노년의 남성이고, 작가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린 소녀 브리오니, 그리고 마지막에선 77세 생일을 맞이한 할머니 브리오니이다.
그녀가 소설을 내는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고, 작가는 소설가 브리오니를 만들어내었다. 예전에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막상 독서모임에서 다른 분의 말을 들어보면 소설은 브리오니 중심이나, 영화는 로비와 세실리아 중심으로 간다고 했다. 문학과 영화는 단지 비교하면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이지만, 문학서사인 소설은 작가 개인의 영역에서 창조되어 출판사 편집부의 검토를 받은 후에 대중에게 공개된다. 이에 반해 영화는 영화제작진과 투자자들이 모여 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까지 섭외한다.
문학과 달리 영화에 엔터테인먼트를 강하게 두는 것은 상업적 성공이 받쳐주지 않으면 제대로 앞일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안 봐도 결국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을 중점으로 갔다는 것은 소설 <속죄>가 연애와 치정이 하나의 중요소재에서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이 된 점이다. 소설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은 1999년 런던에서 브리오니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1부는 연애와 치정, 2부는 영국병사가 바라보는 전쟁, 3부는 18세로 성장한 한 소녀가 자신의 죄를 두고 성찰과 반성을 해간다.
흐름을 보면 1부는 연애물, 2부는 전쟁물, 3부는 성장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할리무드 스타일 영화로 사용하기는 2부가 좋고, 한국드라마로는 1부가 가장 좋을 것이다. <속죄>에서 말하는 것은 브리오니가 이때까지 살아온 생애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회고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은폐하려는 공범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순간적 감정, 일시적인 관찰로 이어진 어린 소녀의 추리는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언니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정작 그 상황에서 진실을 밝힐 사람들은 오히려 브리오니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인간의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운명의 전환점이 추락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소설을 읽으면 우연한 목격과 순간적인 착각으로 비극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보면 불행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연애의 주인공은 터너와 세실리아이나, 그 연애에 대한 질투는 브리오니였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준 편지를 언니인 세실리아에게 주지 않고 자신이 먼저 읽었고, 롤라가 성폭행 당했을 때 자신이 받은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공개했다.
그 편지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성적인 본능이 폭발하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단지 그 대상은 로비가 세실리아게 향한 것이었지, 그 누구도 아니었다. 롤라에게 가해진 잔인한 행위는 터로비 터너와 관계없었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순간 터너는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로비도 경찰에게 순수히 따라간 이유는 세실리아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파티에 일어난 잭슨과 피에르의 실종, 롤라의 고통, 이제는 세실리아까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게다가 로비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그가 세실리아와 오빠 레온과는 친구처럼 어린 시절을 보내도, 영국은 보이지 않은 신분의 벽이 존재했다. 현재의 영국 왕족이 가진 권력이 공고했다면 1930년대 영국은 더 공고했다. 서프러제트 운동 후 영국에서 1920년대 말부터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도 아직까지 모든 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은 세계명문 대학 중에 하나이다. 여자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던 점에서 여성의 인권 현실은 또 다른 요소로 본다면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권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점과 같다. 경찰을 대해 세실리아 어머니 에밀리는 마치 귀족이 자신의 집 근방에 있는 영지주민을 부리는 것처럼 대한 점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대준비생이 영락없이 최악의 범죄가 소녀 성폭행자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소설의 시작을 보면 히틀러가 나온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앞이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서 전쟁의 아픔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하나뿐인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에 세실리아의 아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삼촌에게 남은 유일한 꽃병, 인간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를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공간과 물건들이 있다. 세실리아에겐 삼촌의 죽음과 삼촌처럼 죽을 수 있는 연인 로비에 대한 마음이 운명의 장난처럼 보여준다. 그 장난 같은 운명을 브리오니가 만들었고, 세실리아는 가족과 인연을 끊고 혼자 살아간다.
작품을 보면 아라벨라는 브리오니의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아라벨라는 나중에 왕자에게 구원받는데, 그 왕자는 의사였다. 인간은 주변의 조건과 상황적 인지에 따라 사고한다. 상상력조차 거기에 의존하는데, 의사왕자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예비의대생인 로비였다. 로비를 좋아하던 브리오니에게 로비와 세실리아의 성행위를 본 것은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가졌던 마음에 대한 배신이었다. 인간은 이성으로 인지해도, 무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감정은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한다. 다른 사람을 믿고 싶은 것도 있지만, 자기가 가진 마음을 믿고 싶은 욕구도 있다. 브리오니의 배신은 자신이 가진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매우 비쌌다. 터너는 죄 없이 3년 반 동안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고, 형벌을 감형 받는 대신 전쟁에 나가야 했다. 브리오니가 언제 그의 무죄를 안 것인지 그리고 롤라를 범한 사람의 정체가 언제 알았는지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알 수 있는 것은 어릴 적에 브리오니는 터너를 좋아했지만, 브라오니의 소설 속에 보인 터너 역시 잘 생겼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마른 얼굴이나 몸은 다져진 점에서 성장한 소녀 브라오니는 터너에게서 남자의 매력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터너는 프랑스에서 부상을 입은 후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1부에서 이미 폭격에 의한 파편조각에 의해 부상을 입어도 그것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사망한 것이다. 언니인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사망한다. 가장 사랑했던 남자와 가장 사랑하던 가족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던 브리오니,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터너의 명예는 회복해야 했다. 롤라의 부모가 이혼할 때 영국신문에 나왔다면, 터너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친구의 부모가 돌봐주고 학교까지 보냈는데, 그 가족을 범했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다른 사람이고, 롤라는 그 범죄자와 결혼하여 풍족하게 살고 있다.
속죄의 방법에서 양심이 없는 인간이라면 더 이상 상대피해자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마지막 순간까지도 용서를 구할 기회가 있다. 기회가 없다는 것은 용서할 사람도 없다는 점이고,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브리오니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 안에 존재하는 양심과 의무감이었다. 60년 넘게 짊어온 죄책감과 후회는 노령의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변함이 없다. 소설을 보면서 큰 감흥보다는 적어도 인간은 순간적 판단실수가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점이고, 특히 그 대상이 가까운 가족과 친구라면 상처받은 슬픔만큼 실수를 저지른 사람 역시 고통 받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원히 양심의 가책이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항상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점이다.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방해가 되면 부자에 유명인사인 마셜 부부처럼 되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이니 내가 이 책을 보고 좋게 느낀 것은 현실감 넘치는 상황묘사다. 리얼한 상황을 알기 위해 소설에서 전쟁박물관에서 병사의 편지와 간호사들의 수기들을 잘 이용했다. 소설 내 터너와 세실리아는 가공인물이나,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던 것은 죽음으로 파시스트를 막아준 젊은 병사들과 그런 죽음을 지켜봐주던 그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