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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케어
구사카베 요 지음, 현정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현대사회는 조선시대의 농경사회처럼 마을공동체 사회가 아니다. 조선시대 내 선조들이 살던 곳은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산과 강이 흐르고 바다가 앞에 있어 낚시를 하던 곳이었다. 그런 문화적 유산은 20세기 말까지 남아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시골에 있는 마을회관이었고, 지금처럼 병원 장례식장이 아니다. 과거에 노인의 죽음은 마치 당연한 자연의 순리였다.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죽은 자는 죽어가는 순간 가족에 대한 애정(물론 사이가 좋다면)과 유족들은 가족의 죽음 앞에 비통에 젖는다.
집에 족보를 보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탄생년도와 별세한 날을 계산해보았다. 나의 증조부는 80세 이상을 살았고, 고조부는 30세 전후로 돌아가셨다. 친할아버지는 70대 중반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의 제일 큰형이신 큰할아버지는 36세 돌아가셨다. 한국사회가 근대화로 접어들면서 근대화의 영역은 산업과 경제만이 아니라 의료와 공중보건에 미쳤다. 근대화에 따라 인간의 생명이 마을공동체나 대가족 아래 관리되는 게 아니라 정부 보건정책에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면, 조선시대 때 60세 이상만 되어도 큰 경사였고, 100세 이상 노인이 있으면 그 집안이 양반이 아니면 양반신분과 더불어 큰 벼슬을 임금이 내렸다고 한다.
인간의 생명이 길지 않고, 온갖 전쟁과 사화(士禍), 옥사(獄死) 등은 지배계층부터 피지배계층까지 모두 가혹한 일들이 발생했다. 흉년과 재해까지 몇 년마다 있으니 살아있는 것이 기적인 일도 많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서 노인들이 장수하기란 어렵다. 내가 어릴 적에도 60세에서 70세 정도 되는 어른들은 다들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60세도 젊다고 말할 수 있고, 70세 역시 아직 더 움직일 수 있다. 80세부터는 조금 말이 다르다. 인간의 삶이 긴 것인가? 짧은 것인가?
철학적 질문에서 보자면, 나로서는 괴로움은 길고, 즐거움은 짧다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느끼는 인간의 오감은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은 잘 가지 않을 터니 말이다. 인구 수명이 증강되어 그것이 축복일까? 불행인가? 나는 그것이 축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에 불과하다. 한국에 인구비율에서 노년층이 대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젊고 어린 계층의 비율은 줄고 있다. 미래에 우리 일상은 어떨까?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심각하다. <에이케어>에 나온 일본 노인의료 현실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인 우루시하라 다다스 의사, 그리고 그 의사와 같이 뜻을 펼치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우루시하라의 유고를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한 야구라 슌타로, 이 책을 읽는 순간, 여러 가지로 내 머리 안을 스치고 간 것들이 많다. 노인문제와 인구문제, 앞으로 한국 사회도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세대교체에 따른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급격한 산업화시대에 노동력을 크게 발휘했으나, 이제 그들은 현재 노인층이 되었다. 전쟁 후에 급격히 출산율이 올라가는 양산이 보이는데, 이제 그들이 출산한 아이들은 한 집안에 1~3명 내외로 이루었다. 그리고 그 뒤의 세대들은 보통 아이를 1~2명이고, 이제는 거의 1명 정도 출산하려 한다. <에이케어>에서 지적한 문제로 다른 것은 둘째치더라도, 우루시하라 의사는 사회적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재생산의 문제를 알았던 것이다.
경제적인 활동이 성립되기 위해서 우리는 생산이라는 행위를 거치어야 한다. 하지만 생산에는 어느 1가지의 조건이 달려있다. 그것은 바로 재생산이다. 재생산이 되지 않으면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재생산에서 서비스산업이나 혹은 그 외의 기본적인 산업체계에서도 그 수요와 공급을 위한 일정 인구가 수반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된다. 과잉인구였던 한국이 갑자기 어느 순간 과소인구로 치닫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노인계층이 늘어나면 제일 필요한 것은 재원과 인력이다. 재원은 이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재정이다.
재정을 거둘 수 있는 것은 노동으로 이루어진 생산력이다. 그리고 그 재정을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이다.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기타 수많은 의료인 재원에 거기에 운전사, 요리사, 상담사 등 다양한 직렬이 있어야 가능하다. <에이케어> 멀지도 않은 미래 일본사회는 1.5인의 젊음이가 1인의 노인을 부양(잘못 봤다면 1인이 젊은이가 1.5인의 노인일지도)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인구곡선은 정해진 것이다. 인구통계와 현재 상황여건에 따라 필요악적인 형태로 되어버린 것이다.
노인문제에서 심각한 것은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우 불편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며,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된 것이다. 집에 계신 부모님과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점은 자식들에게 자신으로 인해 앞길이 막히거나 혹은 고생할까 하는 우려감을 읽어낼 수 있다. 노인들은 기본적으로 척추관련 질환, 소화기 관련 질환, 관절 약화 등을 달고 있다. 나이가 들면 신체가 병이 나고, 일상생활이 어려워져 남의 도움 없이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이 많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뇌척수의 손상이다.
뇌척수의 손상으로 치매현상이 우선 문제고, 그 다음으로 사지의 마비다. 폐용신이란 단어가 나온다. 즉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다. 신경이 마비되고 움직일 수 없어도 혈액은 계속 공급되고 있다. 신체가 움직일 때 컨트롤이 되지 않아 상당히 불편하고, 인간의 대부분 혈액이 뇌로 공급되어야 하나, 필요 없는 신체기관에 혈액이 가는 것은 여러모로 효율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또한 사용하지 못한 신체가 늘어나는 것은 인간의 인식감각에서 매우 불안한 요소로 작용한다. 대부분 폐용신 노인들은 불편한 신체 때문에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며, 불안한 심리는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 그것을 넘어설 경우 가족에게 행패부리고, 옆에 간호하는 간호사들까지 큰 피해를 준다.
노인 호스피스 간호가 최근 늘어나고, 나하고 친분이 깊은 내 모교 출신 의무실 선생님에게 이래저래 노인 간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완치가 아니라 편안 마음을 가지게 하여 눈 감는 날까지 힘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인 간호는 쉽지 않음은 그들이 늙고 병들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완치될 가망성도 없고 신체기능 감퇴로 의욕이 상실한다는 점이다. 특히 말기 암 환자들은 더 이상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보단 통증의 아픔이 더 괴롭다.
이런 고통을 두고 어떻게 해결하나? 대학교 때 접했던 문제로 자살이 아닌 자살, 안락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인도적인가? 비인도적인가? 의료계와 법조계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나 나는 찬성한다(왜냐하면 유산문제에 고의적인 죽음은 편한 수단이 되니 말이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자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프면 주변 가족들은 모두가 고생한다. 그 고생은 병수발과 개인적인 일상이 파괴되겠지만, 나중에 병원에서 청구되는 계산서는 이미 한도를 초과한다. 가족의 병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허다한 경우다.
의료법 때문인지 몰라도 마지막까지 생물학적인 죽음을 확인되지 않은 이상 의료행위는 멈출 수가 없고, 그것이 고스란히 계산서로 반영된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고,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노인들이 병에 걸리면 그 영향은 막강하다. 노년빈곤에 가장 큰 적은 병마이다. 한 달에 얼마 되지 않은 지원금으로 병원에 가면 남는 게 없다. 물론 노인의 증가는 의료재정 소요증가로 세금부담까지 이어진다. 그런 현실에서 빈곤계층으로 떨어진 그들에게 억지로 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는 인도적이란 이름 아래 가려진 파탄은 더욱 심각한 과제로 남아있다.
무조건 폐용신 혹은 안락사만이 답이거나 옳은 것은 아니나, 언젠가는 우리는 이런 현실에 더 깊은 딜레마에 빠질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냉정하고도 냉소적이다. 우루시하라라는 인간은 빛과 어둠이 너무 강한 인간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분법적인 시선이 강했다. 좋은 인간이란 평판과 더불어 너무 기계적이고 냉혹한 인간이란 부분도 있었다. 폐용신의 신체일부를 포르말린 액을 넣어 보관한 것을 보면 과연 제대로 된 인간일까? 라는 생각도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에 책임을 다했던 의사이다.
눈앞에 사람을 두고 수수방관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이제 새로운 가십거리가 탄생하여 썩은 고기에 무수히 달려드는 구더기들에 비해 우루시하라 의사의 행동이 더 인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계속 몰아넣었고, 결국 철길에 자신의 머리를 폐용신으로 취급했고, 아내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고 하나, 인간의 진정한 죽음이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사람들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이다. <에이케어>에 만들어진 인물 의사 우루시하라로 통해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마주쳐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루시하라가 하고자 했던 행동들에서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현실적 상황과 미래에 대한 걱정은 우리도 1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인간은 현재의 조건에 따라 움직이고, 눈앞의 이익과 재미에 의해 운명 앞에 조롱당한다. 미래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 당시 인간들을 평가하고 자신들의 상황을 생각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계속 대화하는 것이고, 대화는 인류가 망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을 보고 짜증나는 것은 있다.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나 대안을 제시할 생각도 없이 가십거리 만들기에 집착하는 미디어이다. 비록 소설이라 하지만, 그 행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미디어들이 하는 짓거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