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4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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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중심으로 보는 조선이란 왜란과 호란에 따른 전쟁의 역사다. 조선 군주 중에서 전쟁의 핵심 가운데 있었던 자로써 광해군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에 읽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에서 다소 여러 가지 생각이 변화되기도 했다. 우선 선조가 참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군주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외교 전략이 있었다는 점이다. 광해군이 가진 독특한 외교능력은 선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고 광해군은 그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 상당히 교묘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이란 서적을 보았다. 그가 폭군인지 혹은 명군인지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는 그러하나, 적어도 그를 한 가지로 본다는 것은 엄청난 무리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번에 한명기 교수는 나름 광해군을 평가했다. 외치적인 부분에서 완벽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전략은 현실적 상황을 제대로 간파한 점이고, 내치적으로 명에 대한 군사원조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원인이 조선의 궁핍한 사정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란으로 소실된 궁을 복원해야할 이유는 없고, 궁궐 내 수많은 은을 몰래 매장할 필요도 없다.

 

결국 그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를 세우기 위해 혹은 자신의 왕권을 위해 매우 논리정연하고 날카로운 임금이 되었다. 그런다고 하여 광해군만 욕만 할 수 없다. 광해군의 의외의 모습은 그가 대북의 권력자들을 손을 잡고 있었지만, 대북의 영수 이이첨과 마지막에 갈등이 있었던 점, 남인과 서인 등 다른 파벌과 같이 정국을 운영하려 했던 점이다. 조선시대 남인과 서인의 갈등은 역시 정여립 옥사부터 시작된다. 정여립 옥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로 있었던 이발은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발의 80세 노모와 10세의 어린 아이까지 모진 고문으로 옥사했다(그래서 아버지가 왜 송강 정철을 나쁘다고 말하는지 이해간다).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선조는 정철을 속아 넘어가주었는지 아니면 선조가 그런 찬스를 노린 것인지를 생각하면, 기축옥사는 매우 무서운 일이다. 선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당파전쟁의 피 냄새가 진동했고, 조광조를 비롯한 선비를 죽임과 낙향을 만든 기묘사화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부분은 임진왜란을 시작하여 정묘호란의 열쇠로 이어진다. 역사란 항상 한 가지로 볼 수 없고, 다변적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적인 연구도서를 보면 이른바 변증법적인 관계성이 보인다. 어느 누군가 반응을 보이면 다른 누군가의 반응에 이르고, 그것이 하나의 갈등으로 누적되면, 피할 수 없는 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학봉 김성일이 남인으로 일본에 갈 때, 그와 같이 간 인물 간의 갈등이 조정의 보고에서 희비가 엇갈리며, 율곡 이이의 있지도 않은 10만 양병설이 김장생에 의해 만들어진다. 서애 유성룡은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막상 임진왜란 시 명나라 장군이 와서 양명학을 조정에 이야기하자 선조는 주자 성리학에만 치우쳐 이야기한다. 갈등과 아이러니는 결국 또 다른 갈등과 폭발로 이어지고, 결국에 참극을 일으키는 열쇠가 된다. 이런 내정의 문제는 외교적인 문제로 확장되고, 전쟁 중에는 서로 손발이 맞지 않을 수가 있다. 동인(남인과 북인)과 서인 계열 장수가 서로 갈리고, 동인(남인) 계열의 지지를 받던 이순신은 서인의 지지를 받던 원균에 비해 혹독한 대우를 받는다.

 

사실 임진왜란 의병장 중에 곽재우 같은 경우 북인 계열이고, 충무공 이순신은 남인이었으나 사실 공훈과 비교하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유성룡이 조정에서 내려올 때 이순신의 서거라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왜국과의 전쟁이기도 하나, 사실 내부적으로 정치권력의 다툼도 보였다. 그것의 시발점이 기축옥사이고, 광해군 시대에도 은근 잠재하였으며, 효종의 죽음에 이르러 크게 폭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적 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성은 매우 재미있다. 이미 한명기 교수의 책에서 명나라가 원군을 보낼 때 우리나라의 실정에 무척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눈에 확 온다.

 

한국은 당시 베나 포 같은 옷을 만드는 원자재로 화폐가치를 했다면, 중국은 은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다. 은은 중국만 아니라 일본, 포르투갈, 세계 다른 국가하고 무역하기가 편했으며, 은 자체가 녹이 슬지 않는 특성에서 은화로 결재하기가 편했다. 중국의 병사월급은 은으로 주고, 군량의 구매와 죽은 병사의 장례조차 은으로 처리한다. 자본주의시대 이전이긴 해도 자본주의 경제구조 이전의 중상주의적 가치는 이미 실현된 셈이다. 은의 이용은 조선에서 용이하지 않고, 은을 받기를 원하는 중국사신에게는 조선은 어떻게든 흔들어야 했던 존재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을 왕위를 올리는데, 많은 은을 뇌물로 받쳐야 했고, 인조반정 후에도 인조의 책봉을 위해 또 다시 은을 바쳐야 했다.

 

은을 두고 뇌물로 활용하는 점에서 지나친 은의 징발은 국가의 존속을 어렵게 했고, 명나라 사신은 은을 찾기 위해 민가를 약탈까지 했다. 일본군이 지나면 큰 빗이 지나가도, 명군이 지나가면 참빗이 지나간다는 말처럼 은의 약탈은 조선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관계성에서 조선에 놓인 상황은 참으로 기묘했다. 물론 광해군은 양쪽으로 외교를 보내는 것으로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지만, 막상 그것이 불만인 세력이 광해군을 뒤집자 자신들조차 그것에 얽매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명이 임진왜란을 구해준 재조지은, 8년의 전쟁을 8년 후부터 명나라가 망하는 그날까지 도리를 조선에게 말했다. 모문룡이 와서 행패부리고, 하다못해 명나라에서 도망친 유민까지 설쳐대며, 심지어 그들의 위세를 믿고 약탈을 일삼은 조선인들이 있다고 하니 정말 한숨만이 나온다. 역사의 기로에서 400년이 지난 일들이 현실에 무슨 일이라고 하나, 모문룡의 행동과 거기에 대한 모택동의 발언이 의구심이 든다. 모택동이 모(毛)를 가진 이유로 한국전쟁 시 중공군을 내보낸 이유가 임진왜란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모름지기 실리적인 이익도 중요하나, 실리에 대한 명분은 훨씬 중요하다. 실리만 추구할 경우 국가가 망하는 경우도 많고, 명분만 추구하도 망하는 경우도 많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정말 그렇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민을 양인으로 만들고, 우수한 무예가를 장수로 기용하는데, 많은 세력들이 반대했다. 중국은 재상만 가정을 거느리는데, 왜 조선은 너나 나나 모두 종을 부리는 것에 비판했다. 하인으로 메여 있으면 군적에 올릴 수 없고, 필요한 군사력을 보충이 불가능하다. 사대부들은 무관에 응해도 병역군무를 기피했다. 오늘날 고위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반정 이전과 반정이후에 대한 모습을 보면 그 구조가 특이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조광조의 죽음이 중종반정 공신들(진짜가 아닌 자까지)의 비리와 부패를 지적한 점, 서애 유성룡 역시 양반의 특권을 축소하려 했던 점도 눈에 보인다. 연산군 시절 폭군 옆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는 없어져도, 그가 누린 권력을 고스란히 타인에게 이양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백성의 삶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광해군이 물러나도 나아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못할 경우도 있었다. 외교적 관계성에서 전쟁으로 인한 여파와 그에 대한 대책과 정책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건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득권을 지닌 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자들의 문제다. 겉으로 명에 대한 재조지은 말하던 이들이 막상 인조정권에선 아무 말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명나라 멸망 후 청나라가 들어서자 겉으로 청나라를 몰아내자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오히려 그런 분노의 감정을 이용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심어두어 자신들의 이권에 방해되지 않으려 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바보 같은 한 사람의 말만 듣는다는 비판은 아마 이런 기류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리학의 주자가 내세운 말 한 자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시기를 계속 놓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계속 그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필요가 있고, 거기에 강홍립 도원수가 있었다. 강홍립의 항복은 대부분 광해군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 해도, 막상 그가 출천 당시 만 명이 넘은 병사 중에 9천 명이 사망한 점에서 그게 과연 약속된 항복이란 점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이 책에서 잘 집어주었다. 자기 혼자 살고자 해서 수하를 몰살시키는 것은 몰상식하고, 그런 몰상식한 자가 책임감을 느꼈다면 계속 광해군에게 서신을 보낼 이유도 없다. 강홍립 장군 진영에 양반 출신 무관들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양반으로서 자신의 수하무관을 죽는 것을 원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못한다.

 

역사의 기록은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전해온다. 이기지 못한 자들이 기록을 남길 수 없거나 혹은 이길 수 없었기에 변방에서 원한에 사무친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에서 다시 재조명되어 그 당시의 사료와 주변 국가의 사료까지 찾아 다시 재조립한다. 임진왜란이 대부분 많은 한국인들은 이순신의 활약만 있다고 보겠지만, 그 뒤로는 중국과의 외교문제가 엄청나게 많이 작용한 것을 잘 몰랐을 것이다. 중국이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은 맞으나, 실제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조금 어렵다.

 

선조는 의병장의 활약과 이순신의 승전을 좋은 표정을 받아들이면서 악의적인 감정을 품었다. 주상은 도망쳤으나 남은 재야신료와 자신에 의해 반죽음에 놓인 명장의 위세에 많은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명군에 의지하던 선조는 결국 재조지은을 강조함으로써 변방에서 목숨을 버린 의사자를 버린 채 자신의 안위를 챙기고, 위엄을 보이려 한 셈이다. 임진왜란 공신에서 사실 그보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잃었다. 그들의 죽음이 인정되지 못하고, 단지 정치적 이익에서 중국의 명군에 의지하려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 현실은 무엇인가? 광해군은 자신의 궁궐을 짓는데 예산이 부족한 것을 걱정했으나, 그가 명분으로 내세운 전쟁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하다.

 

전쟁이 나면 많은 인명이 손상당하고, 거기에 부족한 인원을 보충해야 하는데, 전쟁 후로 부족한 인구를 어떻게 메울지, 그리고 사람들의 식량을 어떻게 정리할지를 생각하면 골치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 한국에서도 군사 병력의 부족사태로 방위산업체 요원이나 혹은 해외 이중국적을 가진 남성을 현역으로 복무하고자 한다. 그런데 계속 인구가 감소하는 현실에서 국민들은 공익을 고려하여 삶을 살아야 하나 오히려 개인의 이기심을 추구하며,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다.

 

부조리에 대한 정리에서 분명 모순을 들추어 내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내세우나, 현실에서 반응을 엄청난 반발이 쏟아진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 하지만 일반의지를 대신한 사사로운 이기심은 하나의 공공성을 이루어 전체의지로 대변된다. 역사의 교훈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한다. 주변에 강대국과 38선을 경계로 군사가 대적하고 있는 상황에 외교 전략은 한국의 연속적 유지를 위한 방편이다. 극단적인 자세를 취하면 안 되나, 한편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그것은 한명기 교수의 서적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21세기가 도래하여 우리는 과연 선진국인가? 경제적 규모로 그 거품의 화려함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거품이 터지면 병속에 음료수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혹은 상해서 버려야 하는지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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