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42
앙드레 지드 지음, 조정훈 옮김 / 더클래식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과나 혹은 예술 관련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문학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조금 다른 도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현대소설과 달리 고전 소설들은 그 시대적 특성과 작품세계가 다소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상과 전혀 다른 그 시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생활의식이 너무나 다르다. 그 시대만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작가가 자신의 시대상과 자신의 인생관 그리고 자신의 인생관을 펼치지 못한 그 작가만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내용이 문학소설에 담겨있다. 이야기의 결과론적으로 그 시대의 흐름에 부합되거나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작가의 의도는 그 시대에 부합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에 읽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작가는 19세기와 20세기를 스쳐가는 흐름에서 이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 발표 시기는 1909년 아직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이다. 소설의 내용을 본다면 프랑스와 유럽에서 인상파 화가가 떠오른다.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라는 화가는 이탈리아 초상화가로 그가 그린 작품에 많은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제롬이 사랑했던 알리사에게 아름다운 어머니 뤼실 뷔콜랭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경건하고 엄숙한 청교도 집안의 여자가 아니라 자유롭고 분방함을 추구했던 여성이었다.

 

제롬의 시각에서 바라본 외숙모 뤼실은 마치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그림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여자와 같았다. 왜냐하면 이와 대비한 모습으로 제롬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게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로 하여금 상복을 입도록 했으며, 엄숙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추가되어진 상복은 인간의 생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죽음의 정적과 삶의 동력이 반대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좁은 문>에서 보이는 경건함이란 마치 위대하고 성스러움을 추구하기보단 인간에게 무단한 슬픔만을 강조하는 굴레와 같았다.

 

작품을 번역한 번역자의 후기에도 그렇지만, <좁은 문>은 인간에게 죄의식이란 과연 어디까지 통용되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리사는 어머니가 다른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린 점, 나중에 자신이 소파에 누워 잠시 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알리사에게 어머니 뤼실과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소설 초반에서도 알리사와 뤼실은 처음에 몰랐지만, 동공의 색만 다르지 외모는 상당히 닮았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닮은 큰 딸, 그 딸은 어머니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평생을 죄의식을 갖고 산다.

 

자신의 죄가 아닌 어머니의 죄를 가족 사이에서 평생 지고 산 것이다. 그녀의 죄의식은 옳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 청교도적 윤리관을 어떻게 제시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종교관에 대해 무교(無敎)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다고 신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신은 그저 우리를 방관한다고 여긴다. 만약 신이 정말 있어서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준다면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인과응보를 베풀어 주실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세상은 합리적인 이성보단 비합리적이고 오만한 힘에 의해 돌아간다. 의미를 찾아가는 신앙생활은 삶을 윤택하게 하겠지만, 의미를 찾지 않고 맹목적인 신앙생활은 폭력과 오만을 합리적으로 만든다.

 

<좁은 문>에서 후자에 속하는 부류가 아마 알리사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인생, 그녀의 행복, 그녀의 주변 이 모두가 뤼실에 의한 비극이다. 비극의 운명은 자신만 파멸로 이끌지 않는다. 비극의 운명을 가진 주인공들은 주변을 말려들게 만든다. 비극이란 당사자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당사자 주변 모두를 운명을 비틀게 만든다. 알리사의 현세적 행복과 신앙적 의지는 자신의 사촌 제롬에 대한 비극적 사랑을 잉태한다. 알리사 역시 제롬이 좋으나,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죄의식이 그를 떠밀게 만들었다.

 

쥘리에트라는 여동생이 제롬을 사랑한 것을 알기에 여동생에게 그 사랑을 양보했으나, 제롬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제롬의 친구 아벨은 쥘리에트를 좋아했으나 그것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 읽다가 생각한 점은 <좁은 문>에서 처음 뤼실의 모습은 인상파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 낭만주의를 볼 수 있다. 중간에 12세기 수도원의 수도사와 수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이 소설에서 차용했다. 그런데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시대에 계몽주의자이면서도 반(反)계몽주의자로 등장한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란 소설이 있다.

 

<신 엘로이즈>에서 주인공은 남자는 생 프뢰, 여자는 쥘리였다. 쥘리에트와 쥘리, 아벨라르와 아벨, 소설에서 보면 연극 중에 <신 아벨라르>라는 작품이 있다. 이름의 차용과 등장하는 소설 이름은 루소의 것이 나온 것은 아니나, 루소가 기획한 의도한 게 제법 등장한다. 루소의 소설에서 특이한 점은 모든 이야기의 진행을 편지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좁은 문>에서는 편지로 대화하는 것만은 아니다, 제법 편지로 대화하는 편이 많이 나온다. 특히 알리사의 편지는 작품에서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할 정도로 의미가 깊다.

 

작품에서도 독일작가 괴테의 작품을 인용한 점에서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하여, 종교적 가치관을 두고 고민을 한다. 사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본다면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슬픈 사랑은 현실적 도덕관에서 용납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의 <신 엘로이즈>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좌절된 사랑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약간 위치가 아래에 있었고, 그 여성은 주인공 남성을 사랑하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남성과 결혼한다. 결혼 후에도 남성은 그 여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기 위해 멀리가거나 아니면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부에 어느 누구 하나의 죽음으로 비극적 사랑은 막이 내린다. <좁은 문>은 루소와 괴테의 소설과는 달리 현실적 벽이 아니라 그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 내면에서 벽을 만든다. 알리사가 만들어내는 벽은 자기 자신조차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보고 싶은 제롬이나, 막상 만나도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할지 난감해하는 알리사만이 나온다. 이야기의 결론부에도 역시 비극적 사랑으로 끝이 난다. 알리사가 병으로 죽는다. <신 엘로이즈>에서 쥘리 역시 병으로 죽는다. 병으로 죽은 히로인을 두고 남자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독신의 길로 걸어간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어디가 옳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단지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어느 길만이 정답이라 말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지난 과거의 축척에 의해 존재되는 생명이며, 과거의 축척은 기억에 의해 남는다. 지난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그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앞으로 살아갈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알리사가 보여준 삶과 알리사 죽음 이후 보여준 제롬의 삶은 책 제목처럼 <좁은 문>이란 선택을 한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그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 <좁은 문>은 진실적인 삶을 찾기보단 그저 자신을 속박하는 삶을 억지로 붙들어대는 망령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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