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인 요소를 일상적으로 말하기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직장 사무실에서 직원들끼리 식사하면서 반드시 남자끼리만 혹은 여자끼리만 먹는 것은 아니다. 도중에 남녀가 섞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은근히 의도하지 않게 야한 이야기로 나타날 수 있다. 점심(나까지 4사람이 먹음) 때 피팅 모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모델을 하는 여성이 상당히 몸매가 좋고 얼굴도 예쁘지만, 그게 반드시 오리지널이 아니라 포토샵으로 수정하고, 사진촬영기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얼굴도 예쁘다고 하여 몸매에서 허리가 저렇게 잘록한데 어떻게 가슴까지 큰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말이다.

 

이야기하면서 저런 모델은 성형외과에서 수술 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신체적인 구조상 허리와 가슴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가슴을 수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가 추가로 이야기했다.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면서 2차원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신체구조가 많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 근골계와 해부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게 없다면 움직임이 이상하고, 캐릭터의 모습이 이상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해부학을 배우고, 만화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것은 아니나, 집에 만화애니메이션 개론학문을 들어가면 분명히 해부학적인 지식이 등장한다.

 

게다가 과거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독학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하여 공부했다. 페미니즘을 연구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차별이겠지만,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신체적 구조다. 신체적 구조에 의해 사회적인 갈등이 부가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을 동시에 접어 들어가면 여성의 해부학적인 구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척추가 몸을 지탱하는 토대이다. 그런데 여자의 가슴이 너무 크면, 목과 어깨를 앞에서 누르기 때문에 경완통이 발생하고, 흉추 쪽으로 무게부담이 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보통 피팅 모델이 그렇게 날씬한 허리인데도 가슴이 큰 이유는 가슴을 수술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직원이 나는 가슴이 작은데 라는 말을 했다. 순간적으로 내가 기본적인 지식이 기반 된 발언이 묘하게 분위기를 만들었다. 가끔 밥 먹다가 이런 이야기를 몇 번 나오지만, 조금은 이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뭔가 야한 이야기주제는 일상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왜 야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가에서 조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문화에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것이 있다. 기원 전 2만 년 전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맨몸의 여성의 만든 상으로 석상의 의미는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즉 인간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관심을 가진 셈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남녀의 문제를 조선시대로 올라가면 무조건 답답할 것이라 여기나, 남성의 남근을 상징하는 거대한 나무 조각상이 마을 사당에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야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파렴치한 요소가 등장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파렴치하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그 파렴치한 행위가 있기에 가능했다.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으면 태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수정관이나 정자 및 난자이식 수술이 성공해도, 그 정자와 난자조차도 분명히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이 사회적 혹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동물이란 조건이 따르는 것만큼 동물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은 사회적인 조건과 제도적인 요소에 따라 인간은 동물적 요소가 강하게 억제되었다. 하지만 본래의 인간이 가진 본성을 모조리 통제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적 도착과 변태적인 행위들은 단순히 인간의 개인적인 의지와 판단력에서 발생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 세계에 가해진 억압과 통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억압된 심리의 증세는 성적인 변태행위도 일으키지만, 다른 정신적 착란, 도착, 편집증 등 다양한 심리적 증세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모든 성적인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고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153분기를 지나면서 내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이다. 상당히 야한 단어와 저질스러운 표현에 따라 성적인 요소가 강한 이 작품은 적나라한 강도가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일반적으로 성적인 호기심 및 욕구는 남성이 강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여성이 더 강하게 나온 편이다.

 

남녀 모두 성적인 관심과 욕구를 모두 거세당하면, 당연히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은 남녀를 떠나 호기심이 강하거나, 어느 계기로 인해 충동을 주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작품에서 성적인 욕구와 흥분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공평한 수준까지 보여준다. 왜 그런 것인가? 작품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여 학생을 보내고 사회로 나가면서도 성적인 단속을 받는다. 목에 달고 있는 PM은 조금이라도 야한 단어가 나오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정부의 기관이 직접 찾아가서 벌칙을 적용한다.

 

고도로 통제된 사회에서 성적인 지식이 사라진 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에 각인된 성적 욕망이 무참하게 거세당한 것이다. 야한 내용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어떤 상황에 닥칠 경우 그것에 대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 과거의 인간은 (문명이 시작 전) 자연 속의 인간이었다면, 현대는 문명 속에 인간이다. 문명 속에 인간은 성적인 반응이 생물학적 반응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문명적인 소산물에 의해 자극되기도 한다.SOX단을 위기로 빠뜨린 군집한 피륙을 보면, 그들은 상대방의 성적인 접촉이나 자극을 원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의 온기가 남아있는 속옷을 원한다.

 

특히 상의보단 체취가 강하게 남는 하의 쪽을 선호한 점에서 그들은 행동은 변태적 행동에서 물적인 집착인 패티시즘을 보인다. 이런 문제가 등장한 이유는 바로 성적인 억압과 통제에 의해서다. 건장한 남녀라면 서로의 신체를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성적인 충동은 남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기존 구세대에서는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고, 남성이 주도하는 점에서 성적인 불평등을 강조했다. 한국사회에서 과거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청국으로 끌려가 돌아온 여성들이 환향녀에서 화냥년으로 바뀌거나 남편이 죽으면 시댁 가족들의 눈총에 의해 자살하는 만들어진 열녀들도 많다.

 

그러나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는 오히려 남녀 모두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회장 안나의 경우, 오쿠마에 대한 애정공세는 사랑을 넘어 스토커 이상의 공포감을 안겨준다. 문제는 안나의 행동은 분명히 충동적으로 성적인 욕구에 의해 행동하나, 정작 본인은 외설을 모조리 단속하고 분서갱유하는 학생회장이다. 주체와 대상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이 하는 행동과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서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 의복을 착용하게 되면서 사회적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가려진 자신 안의 숨겨진 본성이 사회적인 규율에 의해 통제받는 것이다. 물론 그런 통제성이 없다면 성범죄와 각종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자체를 모조리 통제하는 것은 그 사회에 다양한 표현과 개성을 죽이는 것이 된다. 애니메이션에서 오쿠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물건을 들고 온천에 가서 그 비밀을 찾는다. 분명 그것은 야한 것은 맞지만, 야한 것이 들어가서 외설적인 물건이 아니라 예술로서 만들어진 것들도 있었다. 인간은 과거 오래전부터 성적인 요소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했다.

 

단지 직설적으로 성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그 상대 이성에 대한 환상성이 빚어진 것이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비너스란 아프로디테, 즉 미의 여신이다. 아름다운 여신의 몸은 보면 현대적인 미녀와 다르지만, 그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적인 대상이었고, 성적인 환상력을 불어넣은 존재인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기 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본 따서 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신화에서 인간들의 욕망이 그림체의 이미지로 등장할 때, 거기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당시 인간에게 야한 것을 그리고자하는 의지보다는 야하게 보이는 그 자체가 모두 공유하고 있던 인식이란 점이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 국가정부는 그런 예술작품조차도 부정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의 문화유산을 보면 신성성을 강조하거나 주술적인 요소를 반영한 것들이 현대로 와서 예술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생활양식이 남은 물건조차도 예술품 내지 문화재로 남는다. 작품에서 그런 것들이 모조리 부정되는 점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두고 우리는 외설적이거나 혹은 불건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르네상스에서 발생한 미적 양식과 더불어 그리스신화에 대한 인류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거기에 야한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제외된다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역사와 함께 동반한 유산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인간의 예술과 문학은 결국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발견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이다. 그런 창조적인 공간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예술로서는 승화가 된다는 점이다. 예술은 인간에게 다양한 사고와 의미를 부여하며, 거기에 따른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한다. 만약 야한 이야기와 장면이 현실에서 등장하면 보통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성적 욕구 Libido적인 욕망도 느끼겠지만, 한편으로 그 야한 것이 단순히 적나라한 나체와 노골적 행위가 아닌 어떤 의미를 두고 있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성적인 요소로서 기호적인 의미도 담고 있어, 어떤 의상이나 물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한편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창출하기도 한다. 도가 지나친 영역에서 분명 독이 되겠지만, 그 조차도 없다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는 점이다. 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사회를 원하는 것인가? 작품에서는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패러디를 한 안드로이드는 전기 안마의 꿈을 꾸는가라는 편으로 보여준다. 학교에 새로 온 선도부 엘리트 츠키미구사 오보로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안나의 아버지에 의해 반강제로 세뇌된 생활을 해오던 그는 자신이 남자지만, 만약 위에서 명령하면 남자인 자신이라도 여자로서 살 수 있고, 다시 남자로 살아가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여되고, 성정체성마저도 외부권력에 의해 좌우된 점을 본다면 정말 끔찍한 현실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의 의지와 정체성을 부정하게 된다는 점은 그로 인해 누군가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사회적 통제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그 사회가 감시와 통제조차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나 작품에서 보여주는 목에 달려 있는 PM은 파놉티콘이란 일망원형감시 체계를 다중적으로 관리함으로서 24시간 연속적 감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감시로 인해 조금이라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입건 후 사회의 격리로 통해 위험인자를 제거한다. 다른 생각과 다른 방향성을 거절하게 되면 그 사회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하게 된다. 문제는 전체주의적 발상은 대중의 인식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프로파간다라는 선전방식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다. 실시간적으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진 점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생각하게 만든다.

 

<1984>를 읽으면 텔레스크린이 오세아니아에 살고 있는 관료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들은 오세아니아 대부분 인구로 자리 잡은 프롤(프롤레타리아)보다 조금 더 우월한 생활조건을 가지고 있으나, 그래도 맛이 없는 음식과 질이 나쁜 보급품만 나올 뿐이다. 사무실에 가서 언제나 감시받으며, 감시자는 텔레스크린만 아니라 주변사람들까지다. <1984> 주인공 원스턴 스미스의 옆집에 살던 남자는 평소 열심히 당 활동을 하던 바보지만, 그의 자녀들은 더 무서운 파시스트의 후보생이었다. 자는 아버지가 잠꼬대로 빅브라더 타도!”를 듣자말자 국가에 신고하여 어두운 철창이 있는 고문실까지 보냈다.

 

인간의 윤리적 의식, 도덕적 판단력이 모조리 소멸된 것이다. <1984>의 악몽적인 현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국가에 의한 강력한 전체주의화적인 정책이다. 그런 세계는 자신과 타자의 경계는 없고, 인간은 오로지 그 조직과 사회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존재한다. 부품은 항상 여분 량이 존재하므로, 그들의 가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묘사되는 것이다. <1984>에서 인구를 유지를 위해 성행위를 하지만, 성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스미스는 마치 아내가 딱딱 굳어 있는 나무 같이 느꼈다.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다리만 벌리는 모습에 스미스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이혼을 선택한 이유란 바로 그런 것이고, 아무 교감 없는 성행위는 단순히 동물이 새끼를 낳기 위한 동물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1984>에서 더 무서운 음모는 국가가 나중에 성욕구조차도 없애기 위해 전기조작장치를 만들려고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신경은 전기적 신호로 이루어지므로 뇌척수에 전기적 조작을 하면 성적욕구가 불능으로 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은 남녀 간의 애정과 결혼이 아닌 시험관아기 내지 유전자조작 같은 비윤리적인 영역으로 가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바로 그런 시험관 아기들이 태어나 알파, 베타, 감마 등의 분류로 나누어지는데, 열등한 유전자는 저장에 의해 수정된 난자를 64등분까지 하여 한 번 수정된 태아들이 똑같은 얼굴과 모습으로 64명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세계가 과연 아름다울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성적인 욕망을 배제하는 것은 <1984><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것처럼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인간의 충동은 위험에 빠질 수 있겠지만, 그 충동이 없는 세계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세상이다. 잘못된 것이 없는 세상보단 잘못된 게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 기존 사회를 유지하고 인류의 영속을 위해서는 결국 남녀 간의 동의 아래 결혼하여 자녀를 생산한다. 자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성행위는 필수적이나, 만약 성행위 대신 <멋진 신세계>처럼 따로 정자와 난자를 뽑아내어 시험관에서 키워 출산시킨다면, 그 아이는 부모에게 과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부모의 사랑이란 것은 자신의 DNA를 유전 받았다는 동물적인 요소도 있지만, 같이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는 시간적 개념이 존재한다. 아니라면 남녀 간의 성행위가 부부가 된 이후에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조차도 난감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선택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 이성조차도 감정의 한 가지라고 한다면, 이성은 자신의 선험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외부의 감각에 의해 변화하게 될 것이다. 본 작품을 두고 한국 사회를 보자. 최근 뉴스기사에 한국의 게임업체가 상당히 어려워지고, 많은 업체들은 스스로 기업을 그만둘 정도로 심각해졌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게임이나 혹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산업은 이른바 콘텐츠사업이다. 콘텐츠사업은 인간에게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라 재미와 감동 같은 무형의 서비스의 제공한다.

 

문제는 이들이 표현하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되어 있고, 멀티미디어로 이루어진 이것들은 매체로 통해 전달되므로, 매체의 검열과 통제는 게임콘텐츠산업에 치명적인 덫으로 작용한다. 그 검열의 원인은 폭력성이 있었지만, 그보다 선정성이었다. 아동 및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국회에서 법률로서 제정되더라도 시행령과 시행규칙, 훈령, 지침 등이 정부기관의 관료입장을 반영함에 따라 게임 산업의 쇠사슬로 되었다. 규제라는 가이드라인은 최소한의 경계를 막기 위해서지 모든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판단기준은 자신의 선험적인 영역이고, 그것을 개인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목적이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변의 상황과 권력관계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면 자신의 객관적 인지능력과 주관적 의지가 상실하여 수동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인간의 본연적으로 살아야할 능동적 가치관이 여기서부터 붕괴되는 것이다. 나쁘게 될지 모르는 것을 막는 것보다 나쁠 수 있어서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이 아닐까? 물론 SOX단을 보고 잘못된 길로 테러를 자행한 군집한 피륙을 본다면, 자유의지 대신 물질적인(인체의 온기가 스민 속옷) 성적쾌락은 성적욕망조차도 이성적으로 즐기지도 통제하지 못하고, 단순히 거기에 매달린 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욕망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성적본능과 더불어 사랑이란 감정과 이성적인 절제가 없다면 그것은 허무로 끝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만나면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히 집착에 불과하다. 오쿠마는 처음에 안나 학생회장을 동경했으나, 자신의 이성과 본능을 구분하지 못한 안나의 태도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상대에게 집착만 하는 스토커일 뿐이다. 이와 다르게 엉뚱하지만 중요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아야메에게 오쿠마가 이끌리고 사랑의 감정을 품는 것은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고, 너무 과도하게 지나치는 부분도 있다. 그런 문제점이 있다고 하여 인간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없게 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성적인 요소에서 서로 이성간에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모든 것만은 아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에서 사랑이란 형태가 정신적 행위로 육체적 행위로 나올 뿐이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는 성적인 억압으로 통제하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이 작품에서 따로 제기하는 질문이 사랑이다.

 

안나는 이때까지 사랑을 몰랐지만, 우연한 사고로 인해 입맞춤을 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고, 단순히 성적본능에 빠진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라 하지만, 사랑에 대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남녀 간의 사랑을 묻자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것은 안나가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 물어봤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상적인 인류애적인 사랑도 중요하나 그 토대가 바로 개인 일상생활에서 사랑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안나가 평소 건전한 사회, 맑은 세상은 인류애적인 가치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회적 슬로건으로 강제로 집행된 폭력이었다.

 

이성에 대해 잘 모르니 호기심이 생기고, 호기심이 생기다보니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호기심 자체를 없애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일까? 오히려 그런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다 보니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과 사회적 가치관과의 괴리성에서 모순과 부조리가 생긴다. 불온한 생각이나 행동이 나온다는 것은 그 사회가 건전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불온한 생각이나 행동조차 존재하지 않으면 그 사회만큼 죽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과연 무엇이라 할까? 처음에 돈과 지위, 명예를 말하겠지만, 마지막은 행복과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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