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사도세자→정조 이렇게 내려오는 영화나 드라마 소재는 참으로 많다. 조선왕조에서 많은 왕들이 있으나, 그 왕들의 수 이상으로 많은 왕족들이 죽임을 당했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형제와 부자 그리고 많은 인척 사이에 피의 숙청으로 이루어진 눈물의 역사다. 왜 피와 눈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영화 <사도>에서 이미 스포일러 사도가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하지만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사도의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할 점이다.

 

 

영화에서 영조와 사도는 처음에는 좋은 부자관계로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고, 글과 그림에 대한 재주가 남다르게 뛰어났다. 물론 정조 역시 명문에 그림도 잘 그렸다. 게다가 학문의 뜻도 높으니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 학자군주로서 세종과 어깨를 견줄만할 존재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로 불리던 정조 시대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사도의 죽음이 큰 공이 크다.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와 영조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이유가 부자 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처음 부분에서 루이15세를 암살하려던 하급관리 다미엥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왕의 신체는 자연적인 신체와 더불어 신분, 권력, 상징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 왕의 신체는 하나가 아니라 2중의 구조를 가진 것이다. 영조의 상징적인 왕이란 2중 구조에서 권력, 신분, 상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도의 죽음에서 왜 영조는 사도를 몰아갈 수밖에 없는가?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 넣을 때 영조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나온다. 아무도 뒤주에 사도를 가두고 못질을 하지 못하자, 직접 못을 가지고 망치질을 한다.

 

 

망치질 하던 영조의 손은 왠지 모르게 망설임이 보인다. 정성스럽지 못한 망치질은 그의 이중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라는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그린다고 하나, 그 역사적인 맥락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조는 숙종에 대해 사도에게 이야기를 한다. 숙종을 자신의 아내에게 사약을 내린 왕이다. 숙종이 등급 할 때는 나이가 아직 어린 시절이었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죽자 엄청난 파란이 일어난다. 바로 임금의 상에서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하는 예송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예송논쟁은 2번에 걸쳐 일어나고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왜 예송논쟁이 중요한가? <사도>라는 영화를 만약 제대로 보았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여기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효종이 즉위하고, 인조가 겪었던 청나라에 대한 모욕을 갖고자 북벌론을 제기했다. 이때 신하 중에서 가장 소신 있게 밀어 붙인 사람이 바로 백호 윤휴라는 선비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숙종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다. 그가 예송논쟁의 중심에 있었지만, 한편으로 또 논쟁의 자리에 있던 것이 국가예산과 운영에 대한 부분이었다.

 

 

윤휴는 군포세와 세금의 문제, 그리고 백성의 지나친 생활고를 한탄하며, 당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백성의 시름을 놓아주고자 했다. 백골징포 황구첨정이라 하여 죽은 시아비와 이제 갓 태어난 아들에게도 군적을 올려 세금을 받은 것이다. 많은 백성들이 여기에 눈물을 흘렸고,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살이 할 때는 군포세의 부당함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한 사내는 자신의 성기를 칼로 베어버렸다. 영화 <사도>는 단순히 사도의 죽음과 추후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나, 사도가 죽을 때 많은 사대부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윤은 사도가 뒤주에서 괴롭게 죽자,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때 태어난 분이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어릴 때 불리는 이름이 귀농(歸農)이었다. 사실 이것도 사도의 죽음과 깊은 상관이 있었다. 사도가 성품이 우수하여 많은 젊은 선비와 우호관계를 나누었다. 대부분 국가의 부정부패에 한탄하고, 배고프고 헐벗은 백성을 볼 때마다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도가 영조 아래 대리청정을 한다는 사실은 무엇은 말하는가? 영화는 부자관계로 보자고 했지만, 절대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것만 강조했다면 이 영화는 그저 부자갈등으로만 막을 내린다.

 

 

단지 부자갈등으로 보는 그 세상의 흐름,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 관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는 영조에게 말한다. 사람이 있어야 예법이 있지, 예법이 있어야 사람이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조선의 6조 행정에서 예조가 있다. 예를 다루는 것을 관리한다. 특히 왕족들의 행사나 체계를 다루는 부서다. 예조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예가 조선의 통치의 토대가 되었다. 왜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의 유학이 조선을 휘둘렀는가? 사도는 공자의 유학사상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은 조선을 잡은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란 주자의 성리학이 잡고 있었다.

 

 

공자의 유학은 인간을 위해 그 기본을 삼아 학문을 정비했지만, 주자의 학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에서 더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윤휴의 죽은 예송논쟁, 즉 상복착용 기간으로 문제가 되었다. 예송논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하고, 가문이 몰락했는가? 조선에서 예라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도 모자라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윤휴의 죽음 숙종에서 이어졌고, 당시 정권은 노론에게 돌아갔다. 영화에서 영조와 모종의 관계를 맺은 신하들이 병권에 대한 문제를 운운한다.

 

 

경신환국에서 노론이 득세하고 숙종은 노론과 같이 통치를 하였고, 영조는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에서 태어났다. 중전도 혹은 정식적인 후궁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 무수리의 아들이란 이름은 영조에게 신분적 콤플렉스를 주었다. 영조가 자신의 형을 이어 왕이 되었을 때 병권을 노론에게 위탁한 것은 신분적 한계도 있었던 것도 있지만, 왕권을 둘러싼 반정이나 쿠데타 문제를 조치하려 했기 때문이다. 병권을 잡아 반정을 일으킨 왕들은 자신이 사랑하던 형과 동생 그리고 조카마저 죽이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왕은 군주제도에서 왕권 중심 정치와 신권 중심 정치로 대립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내놓으나 그것은 신권 중심의 현실에서 그나마 왕권을 부여하려 했지만, 겉모습만 탕평이지 붕당 간의 갈등은 늘 위기의 불씨였다. 사도는 바로 그 붕당정치 안에서 젊은 남인 선비들과 친하게 지낸 이유는 바로 경신환국 이후로 권력을 잡은 사대부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군포세를 낮추고 양반의 세금을 조달하며, 군복무를 백성만 아니라 양반에게 하기를 사도는 처음 시도했다. 공자의 유학에서 선비는 하급 문관과 무관을 수행하던 자였다. 그렇기에 항상 도리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사도는 인간적 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것이 처음 공자가 생각한 인간의 예인데, 조선에서 다르게 변질되었다. 군포세 같은 경우 윤휴 때 크게 반발을 보였으며, 사도 역시 큰 반발에 벽에 가로 막혔다. 병권 같은 경우 일부 특정 정파가 모두 관직을 독점하여 독재 수준으로 이르렀다. 병권을 잡는 것은 곧 군사를 다루는 것이고, 군사를 다루는 것은 나중에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옹립하여 반정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노론이 영조에게 압박을 주는 이유가 바로 병권에서이다. 사도가 영조의 심기를 건든 이유가 분명히 모순이 있는 정치적 현실을 건든 것이고, 그것은 영조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든 것이다.

 

 

영조는 계속 나라의 정치적 목적이고, 사도는 인간의 도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유학에서는 선비가 개인의 영역에서 먼저 그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국가의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영조가 펼친 탕평정책에서 남인들은 열세하고 노론의 강대했다. <사도> 영화에서 정조가 즉위할 때 자신이 어린 시절 많은 고비를 넘어왔다고 하는데, 정조는 어린 시절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항상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사도를 죽이면서 풍악을 울리는 모습은 단순히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왕이란 신분이 명분만 좋은 자리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도가 죽고, 정조가 다음 왕위로 계승되자,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옆을 떠나지 않으려하던 정조를 따귀를 때리면서까지 보내려 한다. 이후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정조도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숙청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 <사도>는 이런 전후맥락을 통해 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부분은 채제공의 역할이 축소된 점이다. 채제공은 사도가 위기에 몰릴 때 영조에게 목숨을 걸고 말린 사람이고, 정조가 왕으로 있을 때는 진정한 충신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왕족들의 이야기는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의 이야기다. 영화는 국가라는 이름을 가진 왕족을 개인적으로 다루고 싶지만, 그것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영조의 아내가 죽고, 나이가 어린 정순황후가 중전으로 온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영빈에게 말을 낮추어 쓰는 현실에서 사도는 자신의 어머니를 외면한 아버지의 무정함에 탄식을 한다. 영조는 뭔가 성격이 다혈질 같아서 영화 대사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영조의 행동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흠집을 잡혀 공격당하지 않으려고 했던 결벽증이었던 것이다. 옷고름이나 용모 하나라도 영조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예법, 즉 조선의 통치기구와 신하들의 감시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사도는 바로 그것이 싫었다. 조금 흐트러져도 아니라면, 중전이 아닌 친모에 대한 행동에서도 그가 바란 것은 인간의 도리였다. 인간의 도리를 위해 만들어낸 예법이 오히려 인간의 도리를 망치는 꼴이 되었다. 영조는 정조에게 묻는다. 왜 영빈에게 절을 4번 했냐고, 정조는 단지 아버지 사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라면 절을 4번이 아니라 천 번과 만 번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공자의 유학에서도 가족관계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던 마음인 것이다. 정조는 사도의 마음을 이어받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했다. 단지 사도처럼 직접 대놓기보다는 은근히 말을 돌린다.

 

 

영조와 사도의 대결에서 결국 예법을 중시한 영조가 승리했다. 하지만 정조는 예법보단 인간의 도리로서 마지막 장면에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에서 부채춤을 춘다. 부채에 그려진 용의 그림, 사도가 아들 정조가 무사히 자라나길 바라며 그렸던 그림,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왕을 이어가지만, 사도는 자신이 죽고 아들을 살려내어 왕으로 만든다. 피할 수 없는 가치관의 대립이 결국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사도의 죽음으로 이어져 간다. 그러나 결론은 정조의 마음이 옳고, 정조가 그리던 사도의 가치가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조는 수원에 사도세자 묘지에 종종 방문하고 수원화성을 건축하여 미래를 다지려 했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축할 때 백성의 재산이 아니라 왕가의 재산으로 이용하고, 최대한 백성의 노역을 동원하지 않으려 했다. 수원화성이 정약용 선생의 기증기로 세운 이유가 바로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전에 실록에서 나온 내용을 보니 조선의 왕 성종은 길가에 다리가 잘려진 소녀를 두고 큰 형사사건을 지시했다. 그 소녀는 천민의 딸이었고, 몸에 병이 들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범인을 찾아 치조를 하고 그 소녀를 관아에서 보살피도록 지시했다. 무릇 왕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은 백성들조차 걱정하여 정사를 봐야한다.

 

 

신분이 천한 계집아이라고 천대하면 안 된다. 군주는 만백성의 어버이다. 어버이라는 점은 언제나 백성의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억울함이 없도록 항상 정사에 매진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정성스럽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큰일에 그 도리를 따를 수 있겠다는 말인가? 사도는 작은 것에 시작하여 큰 길로 가려 했다. 하지만 영조는 큰 권력이란 이름 앞에 사도를 가로막았다. 영조가 권력에 무력한 이유는 그의 위치가 언제나 위태롭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노론대신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사도와 정조가 죽으면 왕실 인척 하나를 왕으로 내세우면 되는 점을 말이다.

 

 

실제 그게 정조 이후에 이루어지고, 조선왕조는 몰락의 길로 이어진다. 부자관계의 이야기지만 부자끼리 나눈 대화와 그들의 뜻이 현실의 상황을 비교하여 보자면 참으로 그렇다. 작은 하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각해야 할 윤리적 덕목을 망각하는 순간 비극은 일어난다. 영조와 사도 간의 대립은 단순히 부자관계만이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시작되는 인간적 도리이다. 사도가 인간적 도리로서 아버지 영조에게 다가가야지 그가 원하던 왕도정치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꿈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실에 평생 한으로 살아간다.

 

 

죽이고 싶지 않아도 죽여야만 했던 영조는 평생 후회한다. 금등에 자신의 비서를 넣어 세손 정조에게 물려준 것을 소재로 만든 소설 <영원한 제국>처럼, 영조는 자신의 손으로 사도를 죽였으나 자신의 의지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바로 예법, 궁궐에서 말하는 예조의 기능이 비극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세상의 법도나 도덕에 의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도리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조차 가지지 못하니 사도는 그 시대에만 존재한 게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상징적 존재다.

 

 

단지 세상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다. 그 의지가 실천되려면 결국 누군가 희생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사도는 단지 사도세자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인간의 의지다. 영조는 그런 의지도 알지만 끊을 수밖에 없는 힘이 없는 강자이다. 자신의 힘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변의 관여로 이루어진 것이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의 의견을 윤허하고 책임지는 것이라 한다. 결국 영조는 왕조사회의 군주지만, 당시 사회가 왕권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신권에 의한 정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고, 명분이 곧 예법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눈물에서 말하지만, 인간이 있어야 예법이 있는 것이다. 현대에서 법과 제도가 있지만, 그 법과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 법과 제도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과 제도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무형적 존재이기에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실행한다. 사도는 영조와 부자관계로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나, 사도의 죽음에서 보듯이 세상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사도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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