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시작 - 노무현에 관한 첫 구술기록집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생각의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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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를 대변한다. 우리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은폐 및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나,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실조차도 신화로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화의 겉에 보이는 이야기와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르다. 이번에 읽은 <노무현의 시작>은 한국 노동운동역사에서 노동자를 변호하는 변호인이 탄생한 것을 적고 있다. 물론 여기에 구술된 기록은 사실적인 관계에 의해 적시된 것이고, 구술관계자는 그 당시 역사에서 핍박받던 사람들이었다.

 

신화와 매치하면서 신화는 그 사회나 문화적 집단의 기원이나 혹은 정체성을 말해주는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신화는 과연 보는 이에게 어떤 존재로 왔는가? 노무현의 변호인 시절을 다시 보는 것은 우리 사회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 최근에 나는 역사학자가 저술한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라는 책을 읽었다. 노무현 변호인이 활동을 하던 시기는 1980년대이고, 내가 읽은 도서는 1910~40년대 일제 식민지를 중심으로 연구한 도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소름이 끼친 이유는 일제가 펼친 노동억압정책이 1980년대의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한 점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는 독립운동을 한 것만 기억했지, 노동운동을 한 것은 잘 모른다. 노동운동을 한 이유는 우선 생계수단이 우선이고, 다음으로 가혹한 노동시간이다. 집에 공장에 일하는 가족들이 있다면 잘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노동환경에서 얼마나 가혹하게 일하고 있는지를 옆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그런 문제가 이미 시작된 점이다.

 

기업과 공권이 결탁하여 노동자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때에 따라서는 감금, 납치, 구속, 심지어는 살해까지 하였다. 사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조선 안에서만 아니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선집들을 읽어보면 일본 내에서도 일본인에 대한 노동운동 탄압은 매우 심각했다. 국가와 민족들은 다르고, 설사 남에게 빼앗긴 나라나 혹은 빼앗은 나라에도 늘 빈자는 빈자였다. 빈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제대로 목격하기보단 또 다른 차별에 의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려 했다. 타인에게 받은 억압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린 악순환이 연속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1980년대는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다. 물론 정부가 일본이건 한국이건 크게 변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안기부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그 가족들은 갖은 협박과 감시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이런 시기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극단적인 수단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니 그 과격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노동운동을 한 반면 시위과정에서 다치거나 죽은 경관도 있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과 분노의 화살만 존재했다. 그러나 정작 그 문제에 대한 중재나 해결방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과 명령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까? 민주주의 제도는 포용성과 국민에 대한 최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정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정부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후대에 의해서 희비가 엇갈린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70~80년대의 향수로 판단한다.

 

안타까우나 그것은 한국의 자유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파괴하는 원동력인 파시스트다. 한국에서 아직도 파시스트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에서 그 역사적 철학적 가치관을 두고 깊이 고민하는 자는 없다. 사실 노무현이란 인물이 누군가에게 좌파대통령이라 하고, 누군가에게 우파대통령이라고 한다. 좌우 이념적인 부분에서 기본적 맥락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토론을 100분을 하든 200분을 하든 변한 것은 없다. 정치란 결국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의 발판이 되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정치가 흘러가면 나라 상태가 말이 아니게 꼬이게 된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는 자들이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확장한다. 그리고 확장된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새롭게 이권으로 등록되나, 등록되는 순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이권으로 자리 매김한다. 이런 악순환 고리가 반복되며, 그 과정에서 생긴 모순과 부조리는 누군가 떠맡게 되고, 결국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였다. 내가 대학에서 전공하던 과목은 환경공학이다. 환경공학에서 배운 무서운 공해역사에서 런던 스모그현상, LA 광화학스모그, 일본의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이다. 일본에서 이타이이타이병은 카드뮴이 인체에 누적되어 인간의 근골계에 심한 질환을 준다. 이때 병으로 인한 통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타이이타이라고 말한다. 일어로 이타이이타이는 너무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병인 온산병이라고 한다. 울산의 온산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에게 이 병이 걸린 것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강제로 직장에서 내쫓김은 당하고 보상조차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옆에 누군가 그러면 언젠가 그 옆에 있었던 그 누군가도 똑같은 병에 걸려 서글픈 인생에 괴로워하며 증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분노는 필요할지는 모르나 증오는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아무런 희망도 빛도 없이 그저 억압을 받고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심정이란 그야말로 저주가 걸린 세계일 것이다.

 

신화적인 요소에서 어두운 세상을 찾아오는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민중의 바램처럼 노무현의 시작 역시 그런 것이다. 다소 그에 대한 표현이 지나칠 수 있겠으나, 책을 읽든 안 읽든 만약 어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비참한 사람에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준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살아가고, 누가 불행한 일을 당하면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만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 기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주변에 일어나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그 이유만으로 별개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기만이 가득한 세상에 누군가를 향하여 아무런 사심 없이 도움의 손길을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 일을 하는 것은 각종 박해와 억압, 심지어 자신이 쌓아온 부와 명성까지 모조리 버리는 것이다. 그런 희생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변호인 노무현은 좋아해도 대통령 노무현은 조금 꺼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와 입장을 들어보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노무현이란 인간 자체가 변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소선 여사가 청와대에 방문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이야기하던 모습이 나온다. 정말 그가 노동자들을 외면했다면 이소선 여사나, 노동운동인사와 노동관련 정당의 인사가 찾아올 리가 없다. 단지 오면 불평이나 정치적 사회적 한계성에 대해 토로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무현의 시작점은 부림사건이란 희대의 용공조작사건이고,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에서 놓칠 수 없는 마녀사냥이다. 납치 구금되어 온갖 폭력과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사람들, 지금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당시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뒤에 일어난 노동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해결해야할 급과제이다. 최근 군대 병력 감축으로 인해 예비군의 훈련기간이 23일에서 조만간 45일로 늘어난다고 들었다. 군대에 입영해야할 남성들이 수가 줄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남성이 아니라 한국의 출산율이 저하되어 앞으로 100년 이후 이대로 가면 한국이란 나라가 존재할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결국 한국사회를 유지하려면 인구가 재생산되어 유지 되어야 하나,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가고 있다. 그 원인은 결혼을 하는 것이 어렵고, 결혼 후에 출산과 육아가 더더욱 어렵다. 인구의 재생산이 되지 않으면 경제력이 축소되고, 군대에서 병력이 부족하여 이미 국방과 경제의 약화로 국가의 위기가 초래되는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월급쟁이들의 생활수준을 높여 인구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계가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임금피크제도를 말하는 점에서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20대 청년이 50대 어른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만 일을 하던지 혹은 월급을 덜 받으라고 요구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들이 취업노선에 달려든 후 20~30년이 지나면 한 가족의 가장이 되고, 그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수단과 자녀의 육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때 되면 지금의 20대도 50대로 되어 추후에 나올 20대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에서 당장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 모순을 다른 부조리로 대체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인력이 감축되는 것은 기계의 보급과 전자동 디지털시스템에 의해서다. 사람이 하는 일이 기계로 대체되고, 기계의 능률이 상승하여 많은 인력을 둘 필요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시장과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직종을 살리고, 인력중심의 노동시장을 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건비 축소로 이윤을 지키려 하고, 기업의 유보금은 늘어간다. 현실적 문제는 알지만,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자들이 계속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부조리로서 모순을 대체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이미 절벽 앞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래하면서 거리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정면으로 부딪히는 변호인들은 지금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변호인의 시작은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시작이 결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시작이 된 것이다. 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법 이외의 것으로 억압받던 시절에 유일한 대안 점은 법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무지와 가난은 독재정부의 연속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가진 것도 없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항상 양면의 칼날처럼 대우받았다. 노무현을 두고 기존 권력자들의 시선에서 매우 귀찮고 짜증나는 인물일 것이다. 이에 반해 계속 당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속이 시원하고 통쾌한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신화로 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의 신화는 성공의 신화가 아니라 패배의 신화다. 승리의 이야기는 회자되지 않으나 패배의 이야기는 회자되어 우리의 기억을 자극한다. 그가 옳고 그른 인물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차이일 것이다. 만약 적어도 현실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 억울하게 그 일로 계속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노무현이란 이름은 영원히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무현 신화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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