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그리고 그와 대담한 선정우 역시 한국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한일 양국의 문화평론가 거기에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보단 하위문화라고 불리는 서브컬처에 대한 연구자들이 대담하는 것이란 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이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된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보며 일본 하위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하위문화까지 지평을 넓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한다면 오쓰카 에이지의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한다>는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지식과 사유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판과 담론을 이어간다.

 

국내에서 하위문화 연구자로 선정우는 명성이 있는 분이다. 하위문화가 한국에서 그동안 탄압받고 규제되어 왔으며, 단지 아이들이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여겼다. 그러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서사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하나의 문학성을 인지하게 되면서 하위문화에 대한 다방면적인 검토가 가능했다. 하위문화적 특성 즉 오타쿠문화에서 보는 내 입지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대중사회를 거치면서 자신에게 언제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인간에게 자신의 취향과 성향 그리고 상황적 순간에 따라 그런 대중적 가치를 받아들이기도 하나 때론 거부하기도 한다.

 

인간의 성향과 취향은 모두 같을 수가 없지만, 대중문화 코드에서 언제나 일괄적이고 전체화된 문화적 요소를 대중에게 전달한다. 대중문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모든 주변인하고 다 잘 지낼 수는 없다. 스트레스, 강박관념, 무의식적인 욕구 등이 인간에게 하나의 집착을 보이게 하고, 그 집착이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오타쿠문화에서 잘 인지할 점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만족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길 원하는 점이다. 끊임없이 생기는 욕망은 현실에 대한 박탈감과 공허감이 자신들에게 창작 내지 생산적인 관점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과거 오타쿠문화는 그러했다. 일본 대표적 오타쿠이면서 현재 전 세계 오타쿠문화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있다. 그는 특촬물을 좋아했고, SF영화로 울트라맨 특촬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오타쿠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집착과 집중력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하위문화로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 대중문화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크기 때문에 언제나 주제가 진부한 Cliche로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에 사람들과 만화애니메이션 등 하위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방영되는 TV드라마조차도 기존 대중문화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위문화 콘텐츠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웹툰은 그렇지 않다. 다음과 네이버 심지어 웹툰전문 사이트까지 등장하여 웹툰은 이미 한국 대중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웹툰의 작가는 기본적으로 만화작가라는 점이고, 그들이 만화를 만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한국에서 만화작가와 웹툰작가는 동일선상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웹툰이 인터넷 매체에서 흥행되자 드라마 각본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 <식객>이나 <미생>이 있고, 일본 만화원작인 <노다메 칸타빌레>도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 시나리오 제작에서 기존 드라마에서 제공되는 이야기는 흔한 주제에 흘러가고, 흔한 내용과 결말로 이어져간다. 대중들도 거기에 만족하기도 하나, 가끔 새로운 주제와 흐름 또한 재미를 요구한다. 하위문화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는 바로 대중문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새로운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 오타쿠문화가 한국에 오면서 많은 만화작가 및 애니메이터 또는 다른 문예계통 작업자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기존에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도전과 흐름이 하위문화에 숨어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거대서사에 의해 세계가 움직이고 개인이 그에 따라 움직인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도래는 개인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거대서사에서 작은이야기의 분할로서 매체가 발달된다. 대중문화는 작은이야기를 올리더라도 그 한계성은 거대서사에 맞추어진 작은이야기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처음에 색다른 이야기가 결국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것에 흘러간다. 단지 대중의 욕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라는 점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다.

 

예전에 TV 드라마로 흥행한 삼순이 신드롬을 보자. 노처녀에 뚱뚱하고 잘 살지 못하는 삼순이가 재벌에 잘생긴 연하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새로운 자태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의 욕망을 보여준다. 과거에서는 계급에 따라 지위가 달라지지만, 현재는 자본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에 대한 욕망은 어느 자본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시야는 그 여성의 외모와 상관없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분은 김선아 씨고, 본래 그 분은 날씬한 미인이었다. 단지 연기를 위해 살을 찌우고 미녀로 꾸미지 않을 뿐이다.

 

드라마 종영 후에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미디어세계 즉 가상의 드라마에서 김선아 씨가 연기한 삼순이는 뚱보이나, 현실의 김선아 씨는 미녀연예인이다.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한계란 바로 저런 현실과 가상의 간격을 대중으로 하여금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위문화라고 모두 좋은 것만이 아니나, 적어도 하위문화에서는 대중문화와 다른 분리적인 요소를 공격하는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좋은 예처럼 마이너리티의 문화가 하위문화에 엄연히 존재한다. 예전에 재미있게 본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 시리즈는 일본의 대표적인 마이너리티 계층을 보여준다.

 

마이너리티의 모습은 대중문화에서 나오기란 어렵다. 그곳에는 현실에 존재하나 현실의 인간들이 외면하고 감추려 하는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revolution Number3>에서 문제아 고교집단이 나온다. 거기에 재일한국인, 이혼가정, 오키나와 주민, 혼혈인 등 다양한 사회적 소외계층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일본에서 비주류고 어떻게든 엘리트집단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밑바닥을 오고가는 사회적 약자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자였다. 그들이 이길 수 없었던 사회는 모순과 부조리의 연속이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좀비들은 열성인자 유전자를 아가씨 학교학생과 연애하여 이어가려 한다.

 

우성인자라도 계속 머물면 도태되는 것처럼 교류 없이 정체된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각자에 대해 정체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적 속성이나 취향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많은 이야기와 흐름이 요동친다. 대중문화는 아주 넓은 호수가 있지만, 호수의 수심은 1m 안 되는 곳이고, 하위문화는 관로의 직경이 1000㎜ 된다. 단지 어떤 사회인지 조건에 따라 관로 안의 물탱크는 1㎥도 될 수 있고, 1000,0000,0000㎥도 될 수 있다. 드러난 것은 수도꼭지이고, 수도꼭지 아래에 숨어있는 물탱크는 미지수다.

 

보통 사람들이 미지수의 수원이 자리 잡은 하위문화를 접하면서 생각하는 점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하위문화 특성에서 오쓰카 에이지는 다른 작품들을 모르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과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은 작품으로 여기고 비평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기 비판적 태도이고, 어떤 주제에 대해 흔한 결말로 이어지는 Cliche를 벗어나고, 더 중요한 이유는 프로파간다를 벗어나 상상력을 우선 시하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TV판 25화와 26화는 신지가 인류보완계획 이후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이코드라마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자기 안의 결단력을 세워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목표심이 생기자 주변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끝이 난다. 만약 이렇게 끝이 나면 서사의 완결은 갈등의 해결점, 어째 보면 카타르시스의 해소와 더불어 현실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가능하다는 회피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7년에 <Death & Rebirth>와 <End of Eva> 2편이 상영된다.

 

<Death & Rebirth>는 TVA 1~24화까지 축약하고 거기에 다른 장면을 추가로 집어넣고, <End of Eva>는 인류보완계획으로 모든 지구생물이 멸망하고 신지와 아스카가 남는 것으로 끝이 난다. <End of Eva>의 절망적인 결말은 주인공 파일럿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오직 고립만으로 현실의 상황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바로 이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보여주는 현실적 절망에 작품적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단절성을 보여주고, 거대서사로부터 벗어나 거기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런다고 모든 게 그렇지는 않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작품 <반딧불의 묘>처럼 일본과 한국에서 보는 관점도 다르고, 거기에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미도 보는 이에게 다르다. 최근 한국에서도 흥행한 <코드 기어스>도 한국에서 제국주의적인 요소로 비난당하고, 일본에서 극우세력에게 비난당하고, 미국에도 비난당한다. 자신들이 과연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오해가 있을지라도 보는 이에게 다른 관점을 주는 것이다. 작품을 만든 작가들은 의도하던지 혹은 의도하지 않던지 그 작품의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윤리성에서 작가에게 달린 것보다 소비자 즉 향유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 작품이 문제성을 보고 느끼는 것은 관중의 입장이지 제작자의 입장이 아니다. 제작자는 창의적인 사고에 의해 작품을 제작한다면 그것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향유자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관객이라면 작품에서 다가오는 이야기가 바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관객에게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던지 혹은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고 싶은 불편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제작자의 의지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현실의 대다수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을 심어주려 하지 않는다.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서 기존 일본인들이 피하고 싶은 것은 은근 집어넣는다.

 

하위문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넣을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상상력을 억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화에서 상상력에 대한 언급에서 나는 진중권 교수의 서적에서 본 말이 생각난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점을 말이다. 윤리적인 태도에서 상상력이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적 상황에서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만약이란 것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에 대한 사유와 판단을 하게 할 수 있다. 단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단순히 소비하고, 그 의미의 전후맥락을 놓친다면 단지 불편하게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불편한 것들에 대하 성찰은 내가 살아있는 현재를 말해준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한편으로 단점도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문화는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여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신들의 소비와 향락에 침식당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는 아키하바라에서 모여 무언가를 만들고 활동한다면, 지금은 아키바계 상업적 비즈니스의 고객으로 변했을 뿐이다. 물론 소비의 영역에서 창작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나, 오로지 소비에만 치중하여 오타쿠 문화에 유입되는 부류는 현실에 불만족에 대해 자신이 만족할 것을 찾기보단, 그저 현실적 문제에 눈을 돌려 자신만의 세계 갇히게 된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갇혀있는 사람에 대한 비판성이라면, 그것이 오타쿠문화 3번째 혁명이란 점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거대서사 해체 후 작은이야기의 진입에서 모에요소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모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소비시장으로 계속 집중되고, 하위문화 향유자들은 현실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성보단 현실 그 자체의 부적응자에 의해 채워져 간다. 일본 넷우익이나 한국의 극우성향 사이트에서 애니메이션 소비자가 많다는 점은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기보단 그 현실적 문제를 자신과 사회적 구조보단 어느 다른 누군가로 전가시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담에서 계속 느끼나, 과거 내가 잠시 읽어본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의 내용과 상당히 일치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은 기존 소설이 몰락하고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하위문화 계통의 이야기들이 앞으로 흥행할 것이라 보았다. 근대성의 종언, 즉 모더니즘의 종료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에서 단절되어 기존에 없었던 것들의 탄생이다. 오타쿠문화는 거대서사에 대해 생각하면 대중문화 기류에서 분리된 존재다. 그런다면 대중들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대중들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없는 점과 그 새로운 이야기의 원천지는 하위문화일 수밖에 없는 점을 나는 위에 언급했다. 그렇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기에 극단적 행동도 불사하는 요소도 보인다. 과거 일본과 한국은 농경중심의 사회다. 가족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다. 결혼, 장례, 식사, 교육, 기타 수많은 문화적 유산이 가족들 안에서 해결되었다. 자급자족 사회에서 생산된 것이 교환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로 이환되면서 개인의 존재는 집단사회 즉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신의 정체성 및 자아에 대한 혼돈에서 캐릭터적인 요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어느 이야기를 보면 사회에서 보면 그 당사자는 매우 불합리적이고 악의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에서 그 인물 중심으로 전개될 경우 그만의 합리성과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윤리성의 영역하고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혹은 현실적인 부분과 괴리성이 생기는 원인도 된다. 하렘이나 미소녀연애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점에서 그것이 하나의 장르로서 이용하는 게 문제는 아니어도, 그 자체로 빠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남성은 왜소하고 특별한 것이 없지만, 어느 계기로 주변에 수많은 미소녀들이 모이고, 남자주인공 한 명을 두고 서로 질투하고 연애 공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력보단 자기 캐릭터를 합리화하기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들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대리만족으로 채워 나가고, 그 현실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한 이성적 판단력과 사회구조적 모순보단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약자라는 존재가 자신의 피해자 심리를 두고, 주변에 다른 약자에게 적으로 간주하여 피해자 심리로서 가해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혔기에 그에 따라 보상 및 응징에 대한 대가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거대서사에서 응징의 용사는 가해자의 공격에 의해 피해를 봤기에 응징의 명분이 생성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응징은 실제의 피해를 주는 대상과 응징당해야 하는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캐릭터설정을 계속 부여한다. 하위문화는 대중문화와 다르게 억압된 것들이 표출되는 요소를 보여준다.

 

대중문화이든 하위문화이든 이제는 소비중심 사회로 이환되어 더 이상 사람들은 사고와 비판을 하지 않은 세상이 도래했다. 지나친 억압보단 오히려 지나친 물질적 쾌락에 길들여져 우리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응시하기 것보단 단지 현실에 안주한다. 당장 길거리에서 나가 투쟁하는 시기는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물질적 혜택과 재미라는 쾌락에 의해 그런 행위에 대한 반감만 불러올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모순과 부조리는 감지한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되고, 그 문제를 볼 수 없거나 보지 않는 사회라면 어두운 사회가 될 것이나, 하위문화는 바로 그런 사회를 비꼬거나 뒤돌아 볼 수 있게 만든다.

 

강풀의 <26년>이나 최규석 작가의 <100℃>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는 작품이다. 역사의 왜곡과 수정 그리고 은폐가 이루어지는 현실사회에서 어떻게든 그런 불만들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기억에 각인되고, 단절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려하는 욕망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탄생은 바로 저런 거대한 흐름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간다. 그런 이야기들이야 말로 오타쿠의 문화의 특성이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잘 안 되는 게 현실이고, 그것을 밝혀내어 새롭게 해석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의문이 작품에 드러나도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단지 스쳐가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