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사상의 이해
박호성 지음 / 인간사랑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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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도시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던 토마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자신에게 강요하면 그는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그래야만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최후에는 어느 농촌 시골에 가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도시에서 언제나 수많은 여자의 침대에서 화려한 바람둥이로 살아간 토마스, 하지만 시골에서 그런 모습은 없다. 농촌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트랙터를 고치는 농부로 살아간다.


본래 어릴 적에 토마스는 트럭을 수리해본 경험이 있었다. 다들 화려한 세계에 살아간 전(前) 외과의사인 토마스를 존경했지만, 토마스는 결국 시골생활에 만족했다. 토마스와 결혼한 테레사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토마스를 이끌고 와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오히려 토마스는 시골생활에 만족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시작은 니체로 시작하는 것이 나온다. 프리드리히 니체, 모든 서양의 형이상학적 관념을 전복한 신을 죽인 남자, 그리고 인간의 관계성보단 실존적인 인간에서 이 소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따라간 토마스 모습에서 니체보단 오히려 루소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싶다.


토마스의 모습에서 말년은 루소의 <에밀>이 보여주던 이야기와 흡사하다. 자신의 의지로 시골에서 살아가고, 다양한 시골사람들과 관계에서 토마스는 자신의 의지로서 사람들과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실존적인 요소에서 토마스는 그의 아들조차 아들이기보단 차라리 남으로서 대한다. 인간 그 자체로서 자신의 실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그 자체를 외면하고 여자의 품에서 방황한 토마스에게, 시골농촌이란 즉 자연이란 어머니의 품이었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그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해준다.


인간에게 자연성이 왜 중요한가? 루소의 사상을 생각하면 인간은 자유와 평등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도덕적 인간도 아니고, 정치적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불륜에 빠졌고, 프라하에서 소비에트의 침공 이후 그들의 정치제에 반대하는 서명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인간상은 자연적 인간상이다. 왜 루소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서로 대조했을까? 루소의 사상에서 인간의 시작은 자연적 인간 내지 도덕적 인간에서 또는 정치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에밀>에서 제시한 인간상은 도덕적 인간이나 그 본래에 자연적 인간이 숨어있다. 왜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루소사상의 이해>에 연구한 내용을 본다면 인간은 자애심,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 그게 바로 인간의 사랑에서 첫 번째 명제다. 내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애심에 만족하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찾는다. 자연인들은 자신의 삶을 만족하면 타인에 대해 감정을 품게 된다. 혼자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타인과 교류하고, 그들의 입장을 동조한다.


누군가 아프고 괴로우면 자연인은 그것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괴로워한다. 자신이 가진 감정, 즉 연민이란 인간 순수한 감정을 루소는 발견한다. 왜 이런 인간의 자연성 감정, 연민이란 감정이 중요한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루소가 보는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루소가 보는 사회란 오로지 악과 부패 그리고 착취와 억압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 속박하는 현실에서 <사회계약론>에서 억압이란 사슬을 다룬다. 나를 위한 사슬이 결국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이 되고, 그것은 새로운 사슬을 찾기 위해 도구로 이용되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불평등에서 루소는 기존 서구와 다른 관점으로 제시했다. 루소는 분명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에서 최고 이상적 국가관은 스파르타와 로마였다. 특히 스파르타 남성에 대한 찬미는 대단했다. 모든 법적 제도나 생활습관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명료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서 살아간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플라톤의 <국가> 내지 다른 서적에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플라톤의 사상을 뛰어넘어 다른 식으로 물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책에서 1912년 루소 탄생 200주년에서 루소의 사상은 칸트와 연결하였다면, 1962년에 칸트 대신 마르크스가 그 자리로 들어간 점이다. 루소의 <에밀>은 칸트의 3대 비판서 토대가 되었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선험적 판단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인간 그 자체가 자연적인 존재, 즉 모든 경험과 파당적 사유로부터 멀어져야 가능했다.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선(善, goods)이란 바로 자신의 의지로서 실천한다. 하지만 인간이 타인에게 베푸는 선에서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근거하는지 혹은 감정이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점이다. 이성과 감성이 올바르게 정립되었다면 그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면서 또한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차라리 모순보다 역설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바로 루소의 사상이 위험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역설적인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그것에 반대(反對)하기도 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열렸을 때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사회적 초점은 진보적 이성과 과학적 기술에 의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루소는 그것이 바르지 않음을 이미 예견했다. 이성의 발달과 더불어 감정이 중시되고, <신(新) 엘로이즈>와 같은 경우 데탕트 쥘리로 보는 인간이란 이성 이성의 자연스런 인간의 마음이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니체가 말한 인간상에서 진정한 강한 사람이 약한 자를 돕는 이유는 마음에 느끼는 약한 감정이나 또는 그 도움으로서 타인의 평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답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을 타고 올라가면 루소의 경우 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조하는가?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고, 인간은 본래 선하기에 연민의 감정으로 타인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민에 자만이나 우월심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이 존재해도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연적 인간을 넘어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에밀>에서 에밀은 자신의 가정교사와 더불어 소피의 집으로 간다.


원래 제 시간에 갈 수 있으나, 길가에 쓰러진 남자를 보고 그를 그의 집에 데려간다. 그리고 가정교사와 더불어 병자를 간호한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다. 의사를 데려오고, 집 안의 식구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안정을 되찾아 준다. 하지만 현대인들 즉 문명인에서 타인의 고통은 그저 구경거리로 변한다. 길가에 누군가 쓰러지면 가서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경찰이나 소방서에 신고하여 어서 그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또는 길가에 싸움이 벌여지면 모두 구경하기 바쁘다.


루소는 길가의 신사들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일 때 그들을 말리는 사람들이란 순박한 시장가의 사람인 점을 말했다. 그에게 이상적인 인간이 에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현실에 에밀이 없다면 어느 인간이 더 소중한가? 지식을 갖춘 높은 분보다 차라리 시골에서 농사짓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민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역시 인클로저 현상이 제법 지난 후에라 농민들이 집과 농지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다. 도시에 온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로 되어 비참한 노동으로 살아가거나 때로는 강도나 거지로 살아간다.


최후는 병에 걸려 죽거나 사형대에 죽어 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 루소가 지적한 인간을 타락하는 요소는 사회다. 루소의 사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 그리고 그 인간과 신에 대한 관계다. 신이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은 존재, 혹은 인간은 원초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죄인이라는 관념을 바꾸었다. 오히려 인간이란 본성을 선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존재한 사회적 억압이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것이다. 인간이 욕심이 생기고 고통이 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불평등이 강하고, 그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인간, 즉 자신에게 돌아간 인간에게 탐욕의 손길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로서 행복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인간의 삶을 악덕으로 가득하게 한다. 루소의 이런 사상은 훗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의 토대가 된다.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서적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자코뱅당 좌파와 리카도학파 좌파로 이어진 것에 중점을 맞춘다.


특히 자코뱅당의 사상적 기반이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이고, 좌코뱅당의 대표적인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로, 당통, 마라 등은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다. 루소의 사상은 인간을 지배하는 신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원리로 바꾸었다. 신은 분명 존재하나, 그 신은 인간과 자연을 처음부터 만들 뿐이지 그 이상으로 관여하지 않은 이신론(理神論)을 제기한 것이다. 신의 의지란 바로 내가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나란 존재가 스스로의 의지로서 살아간 것이다. 덕분에 루소는 자신이 저술한 <에밀>이 불태워져야 하는 비극을 겪고, 프랑스 파리 당국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는 신세가 된다.


평생 권력에 의해 억압과 탄압을 받고, 파리에 돌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야유와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루소는 인간에 대한 인류애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소의 생애를 보면 그가 시골에 은거할 때 처음 마을주민들은 마치 악마를 본 것처럼 깜짝 놀란다. 하지만 루소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루소는 마을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가진 의복이나 물건 등을 주었다. 그들은 권력자와 상위계급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루소는 산악지방이나 농촌지방에서 그들과 살면서 그들이 주로 먹는 음식을 즐겼다.


야생에서 나오는 과일과 채소, 그리고 강가에서 잡히는 생선, 투박한 맛이나 건강에 이로운 음식들, <에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나오는 곳은 농촌이었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은 자연의 공간에서 살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에밀>에서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민에게 복종하는 것은 법이지 그 이상은 없다. 하지만 현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루소의 공화주의 국가관은 인간은 법 이외에 그 외는 절대 복종하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이권에 개입되면 인간은 비참해진다. 인간이 평등해지기 위해선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면 된다.


그런다고 법 위에 군림하는 인간에게 복종해도 평등해진다. 모두 다 억압과 압제의 희생자로서 말이다. 만일 그런 인간들만 존재한 나라에 자유가 돌아와도 인간은 살아가는 방식을 모르고, 난폭한 야만인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적 인간상 대신 남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 하는 난폭한 맹수가 된다는 점이다. 루소는 자애심은 인정하고 자신의 재산을 인정한다. 그것은 자신이 비참한 삶을 살면 안 되고, 자신의 쌓아온 성과를 무시당하면 안 된다. 그러나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반대했다.


지금 현실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재산은 타인의 재산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루소는 시민들이 누구나 너무 부자가 되면 안 되고, 자신의 몸을 팔 만큼 너무 가난하면 안 된다고 했다. 만일 그 가난이 치중되면 인간은 비참해진다. 루소가 본 파리의 거리는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빈민과 거지의 소굴, 강도의 은거지, 창녀들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사람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천대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이렇게 되었고, 이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였다.


철학에서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경우 스승인 소크라테스로 통해 인간의 행복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갈 깊은 사고와 성찰로서 초연해질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니체가 말한 초인도 플라톤이 말한 철인적인 요소와 흡사할 것이다. 이에 반해 루소는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으로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일반의지가 파괴될 수 없는 이유, 인간은 자연적 존재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루소의 역설적 요소는 바로 인간이 숲에서 곰처럼 살아갈 수 없는 점을 알기에 문명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은 자신의 세계에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약 거기에 초월한 인간이라면 완벽한 실존적인 자연인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느끼는 세상이란 자신 이외에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호수세계 파동을 느낄 것이다. 루소가 계몽주의만 아니라 자연주의자로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인간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역설적 요소는 책에서 최초의 칸트주의자,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처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아버지로 될 수 있다. 후대에 이르러 교육학의 거두인 존 듀이, 인류학의 거장 레비 스트로스, 그리고 많은 혁명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이 책을 보고 의아한 점은 쿠바혁명에서 체 게바라와 같이 활동했던 피델 카스트로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주의로 알고 있지만, 그는 <사회계약론>을 항상 가지고 다녔고, 피델 이전의 남미의 혁명가인 시몬 볼리바르의 경우 루소에게 영향을 받아 평생 혁명을 위해 살았다.


현대에서 큰 사회적 변동을 마르크스에서 찾지만, 사실 그 원류는 루소에게 있다. 루소가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은 없었다. 물론 프랑스국민들의 분노로 인한 반정이나 쿠데타 폭동, 혁명 등은 존재했어도 그것을 이끌어 주는 이데올로기는 루소의 사상이다. 그 에너지를 흐름을 타고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루소의 사상이란 점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신은 오로지 자신의 양심과 의지를 알아주는 존재인 것처럼, 오늘 날 우리 인간은 스스로에게 떳떳한가? 약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어긋난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루소의 눈에서 오히려 그런 포악한 자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 여긴다.


선악의 구분은 결국 인간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힘의 대결이고, 그 선악이란 정의는 의미 없거나 비참한 결말로 이어진다. 더 많은 권력을 찾기 위해 권력에 아부하는 세상에서 루소의 자연성을 찾고, 시민의 의무를 생각하는 것은 그나마 우리 인간이 인간이란 이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진정한 자유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연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만일 이 사회가 비참함과 분노로 가득하다면 그 사회는 자유의 참 된 의미를 상실했다. 진정한 자유가 없다면 그 나라의 시민들은 애국심도 없고, 올바른 판단도 없다. 오직 멸망이란 사슬로 인도될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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