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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네 여자 - 그리스도 기원 이래 가톨릭교회의 여성 잔혹사
기 베슈텔 지음, 전혜정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신의 네 여자>를 읽으면 그동안 우리 인류가 가지고 오던 문화유산의 암흑적인 부분을 알게 된다. 인류문명의 진보는 단순히 문화, 기술, 생활양식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게 아니었다. 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 이전보다 못한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책에서는 지금의 세계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수난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죽음과 비참한 운명의 기록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알게 해주는 도서였다. 신에게 필요한 여자란 정녕 신이라고 불리는 관념적인 존재가 요구한 인간이 아니었다.
단지 신의 이름으로 향하는 인간들이 만든 치졸한 행위였다. 인간이 신의 명령에 따라 신의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그 인간이 진짜 신의 말을 들었던 혹은 듣지 않았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신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타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신이란 존재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무의식적 내면에 있는 존재다. 바로 신이란 인간의 이성의 영역에 존재하기 보단 인간의 집단 무의식적으로 잔존하는 본능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군중심리에 따른 집단광기는 희생제의라는 독특한 문화적 현상을 만들고, 이 제의에서는 언제나 대속이란 희생양을 만들게 된다. 이런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적 요소들은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 즉 인간이 수렵과 채취로 통해 살아가는 미개한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침범할 일도 없이, 남자나 여자 모두 평등하기에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공동체 규모가 커지며, 가족단위가 부족단위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단위로 이어지면 국가라는 체계가 생겼다.
끊임없이 대지를 이동하며 풍요로운 자연의 은총을 받았던 인간들은 이제 그 자연의 한정적인 자원 때문에 서로에 대해 칼과 창을 겨누게 되었다. 플라톤이 추구하던 <국가>라는 서적처럼 인간사회는 결국 전쟁으로부터 언제나 자국을 지켜야만 했고, 강력한 정신력과 육체가 필요했기에 남성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리스폴리스 시대라도 남성중심의 사회라도 그나마 여성에게도 나름 권리가 있었다. 인류에서 가장 용맹하고 사나운 남성으로 스파르타 전사를 손꼽을 수 있다. 스파르타 용사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고, 용감하게 전장을 향하여 돌진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유일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스파르타 용사의 아내였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진정으로 강한 남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더 강한 용사가 아니라, 그들보다 육체적으로 약했던 그들의 아내였다. 이 부분에서 <신의 네 여자>는 다소 지나친 오도를 범한 것이다. 루소의 <에밀>에서 여성은 남성, 즉 남편에게 복종하게 위해 존재해야 그를 반여성주의적 요소를 드러나게 했으나, 사실 <에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면, 가정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식탁에서 그 자리의 권한과 관리는 모두 여성이었다.
다소 부엌에 권한을 지니게 한 점이 아쉬울지도 모르나, <에밀> 이전에 루소의 <신엘로이즈>에서 생 프뢰와 데탕주 쥘리의 편지를 읽어보면 과연 루소가 반여성주의적 성향 혹은 남성우월주의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신엘로이즈>는 이성과 감성에서 르네상스 이후 유럽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서 이성을 절대화를 추구했으나, 루소는 오히려 계몽주의자이면서 반계몽주의자로서 대변한 것이다. <신의 네 여자>가 아쉬운 부분은 바로 이런 요소다. 여성이 당하던 부조리와 모순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하다.
그림 한 장도 없는 책이지만, 여성에게 가해진 고문과 폭력을 텍스트를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 흘러 오르는 이미지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나치게 여성피해에 대한 강박관념이 지나치다고 여겼다. 물론 그 피해가 있었고, 그 피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여성에 대한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과거 교회의 시작인 가톨릭 중심에서 시작되지만, 글을 보면 남녀 차별문제로 지나치게 강요될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읽어본 <캘리번과 마녀>의 경우, 마녀사냥에서 여성이 당한 수모와 고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그 원인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에서 극대화되었다고 설명한다.
<신의 네 여자>에서도 그런 부분을 인용하고 있으나, 모든 부조리가 교회에서 시작되고, 지금의 교회가 그렇지 않더라도 예전부터 전래된 문화적 양식이 계속 덫이 되고 있음을 설명한다. 책의 끝은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하나, 내가 보기엔 단순히 여자의 억압하던 존재는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가 그동안 결탁해온 권력에 대해 공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책에서도 마녀사냥에 대한 본보기가 단순히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이루어진 16~17세기만 아니라 고대국가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현대의 마녀사냥이 아닌 마녀사냥의 대상은 여자들이 많이 당하고 있지만, 남자들도 만만치 않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네 여자>는 이때까지 여성이 당한 억울함을 충분히 짐작하게 되겠지만, 그 대안방법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 여성들이 공직자로 오면서 고위공직에 남성이 틀어막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계속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직업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다투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여자의 인권만 보는 것이 맞는 게 아니라 소외된 중하위층 남녀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 왕이 정치하고, 교황이 정치에 큰 압박을 가할 때는 전 근대적 사회였고, 이 시기에 부당한 위치에 놓인 여성이라면 그 처지는 분명 99.9% 부당하고 억울하다. 하지만 지금은 왕이 지배하는 세계도 아니고, 교황은 세계평화나 인류애를 말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아직까지 꽉 막힌 사고로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여성들은 투표권이 있고, 자유롭게 연애할 권리도 있다. 연애할 권리, 결혼할 권리, 심지어 아이를 낳을 권리마저 박탈된 게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된다면 충분히 결정할 수 있다. 이 책이 2004년에 번역되었다고 하나 1990년대 말이라도 충분히 위의 조건들은 한국에서 가능했고, 한국보다 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유럽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신의 네 여자>는 과거의 여성수난사에 대한 서적으로 탁월해도 미래에 대한 여성에겐 그다지 의미가 없다. 유럽에서 여성들이 구교인 가톨릭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으며, 설령 믿고 있더라도 자신들만의 삶을 반영하여 종교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종교라면 아마 미래에 도태되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여성은 남성보다 생체적 조건에서 불리하나, 생물학적(추위나 더위가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으로 불리한 게 아니다. 경제적 조건에서 극한의 상태가 아니라면 충분히 생계가 가능하고, 적당한 교육과 환경이 주어지면 좋은 학자도 되고, 정치가도 될 수 있다.
교회가 만들어온 열등한 여자, 창부, 성녀, 바보 같은 여자들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 신이라는 이름을 대는 교회에서 그렇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자본주의와 미디어가 생산하고 있다. 교회가 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돈이라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새로운 신이 되었다. 아직까지 그런 과거의 유산이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교회에선 늙은 여성들의 지식과 삶의 지혜를 두려워했다. 그녀들이 의학기술과 민간요법은 마을의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늙은 노인들을 혐오하게 만든 것은 그녀들이 마을공동체에서 영향력을 박탈하게 하고, 늙은 여자는 마녀의 이미지화 시켰다.
디즈니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인 <백설 공주>에서 늙은 마녀가 나와 독이 든 사과를 백설 공주에게 건네준다. 독이 든 사과를 만든다는 것은 독 자체가 하나의 약품에서 시작되고 사과는 철분과 비타민이 많은 과일이다. 독이 든 사과로 독살하는 장면처럼 음식과 약초로 통해 의학기술을 가진 여자들을 악적인 존재로 전략하게 한 것과 같다. 백설 공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고, 생식력을 가졌기에 필요한 존재였다. 왕자의 키스에서 모든 운명을 맡기는 것처럼 여자는 아무 것도 필요 없고, 남자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물론 신화적으로 백설 공주는 근친상간을 하다 어머니에게 내쫓기고, 어머니는 백설 공주의 계략 아래 잔혹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신화와 동화는 겉과 속이 서로 다르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내지 민간에서 자신들의 입장에 맞게 금 전해온다. 문제는 현실에서 우리는 백설 공주처럼 살아가기 바라는 여성이 많다는 점이다. 한 번 꿈을 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백마 탄 왕자는 현실에서 부르주아고, 그들은 일부 극소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이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의 권력에 의지하는 여성도 있고, 아닌 여성도 있다.
과거의 여성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입장을 다지기 위해 여성 자신도 주체적인 존재로 되어야 하나, 자신의 이익에 치중한다면 마녀사냥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다. 한국에서 최근 극우사이트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 지나치게 심각하나, 그 혐오대상이 되는 여성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그것을 너무 확대하여 일반화시키는 것 자체가 논리성을 찾아보기란 무리다. 이런 현상에서 사회는 남녀의 대립적 관계로 몰아가기 위해 서로를 적으로 만들고, 서로 골을 상하게 만든다. 마녀사냥의 토대 역시 그러하다. 대부분 농민의 토지가 몰수되고, 한파와 가뭄으로 몰아치면 그 책임에 소재를 자연적 재해가 아니라 대속의 존재를 찾게 된다.
대속의 존재가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의 네 여자>를 보면 부패한 기득권층이 행한 방식과 그 철저한 모습을 보고 반추하여 이에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이에 대한 대안 역시 누차 강조하듯이 좋은 결말을 줄 수 없을 것 같다. 광신적인 행동이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빠지고, 바보 같은 인간은 여성만 아니라 남성도 적용된다. 이성적 문명의 유지 아래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며, 그 죄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에 대한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고 해도 그 비참한 역사는 지금의 여성이 아니라 과거의 여성이 받은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잊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 부당함에 대한 책임에 대한 보상심리를 바라는 것이 문제다. 부당함 현실은 보상심리로 당장은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다시 불화를 일으켜 다른 방식의 마녀사냥으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항상 약자이고, 사회적으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되는 점에서 그 대상자는 이제 여자만이 아니라 단지 약자인 자들이다. 남녀차별로 희생당한 여성들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여성의 권리만 보는 게 아니라 약자의 입장을 보는 게 타당하다. <신의 네 여자>에서 억울하게 마녀로 지목되어 참혹하게 고문당한 주부의 유언에서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걱정이 참 안타깝다. 마녀로 지목된 여자 중에서 처음에 늙은 여자에서 과부와 주부가 많았다. 그들의 죽음에도 여전히 집에는 그녀들의 아이들은 남아있고, 아이들은 배고픔과 외로움, 그리고 광기에 빠진 마을주민에 의해 고독한 삶에 분명 절망할 것이다.
마녀사냥이 사라진 지금도 마녀사냥이 아닌 마녀사냥에 희생된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다고 멍청하게 TV만 보고 인형처럼 살아가는 것 역시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편리를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결국 여성들은 자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삶의 주인이 되는 게 이 모든 비극을 마무리 지는 길일 것이다. 물론 그건 여성의 노력만 아니다. 한국사회에 보면 꼰대 같은 남성들이 여전히 기득권층에 속하며, 그들의 비논리적인 말과 행동이 하나의 법칙이 된다. 과거 <신의 네 여자>를 만들고 유지하려 한 자들인 만큼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나 별 반 차이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