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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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에서 캘리번이란 영국의 대표 작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인물이다. 캘리번은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식민지 개척을 하던 영국의 당시 시대와 상당히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저자는 대표적인 여성학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노동운동가이기도 하다. 모든 세상의 착취와 폭력이 최종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공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단순히 여성에게만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사회적 박탈감이 남녀 간의 갈등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남녀문제는 단순 남녀만의 성적인 문제, 즉 섹슈얼리티 내지 젠더적인 요소만 아니라 하나의 계급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 텍스트를 충실히 활용하기도 하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가난한 노동자는 각종 노동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그 노동자의 아내와 딸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부르주아의 놀이(창부)가 되는 시대상을 고발한다. 하지만 실비아처럼 구체적으로 여성의 지위적인 측면에서 조금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남녀평등에 대한 계기는 프랑스혁명 시기에 거론되었지만, 혁명의 주도권은 남성에 있었고,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고, 마르크스는 남녀문제를 단순히 성에 대한 부분보단 단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갈등으로 그렸다. 하지만 너무 계급의식에 치중한 나머지 남녀문제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클로저라는 공공의 재산을 어느 특정세력이 독차지하는 현상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에선 16세기 초에 강렬한 농민의 몰락을 적고, 농민들은 도시로 가게 되어 빈곤층이 되고, 그 문제에 왕국의 처방은 거리의 거지에 대한 무한적으로 노동착취를 할 수 있게 하는 점, 그래도 거지생활을 하면 고문과 처벌하고, 최종적으로 교수형에 처한다. 마녀사냥의 시작 시점은 바로 영국에서 일어난 농지에 대한 인클로저에서 보고 있으며, 이것은 16세기부터 17세기에 광란으로 일어난 마녀사냥과 연결되는 것이다. 광적인 마녀사냥은 아마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잔혹하고 어리석고 무서운 역사다.


십자군 원정과 페스트 창궐이 유령처럼 지나가자, 인구의 감퇴, 봉건기사단의 몰락, 농지의 황폐화, 그리고 농경산업에서 무역중심의 상공업으로 변경된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탐험가들은 사실 탐험이 목적이 아니라 무역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그 무역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가속화한다. 농경사회는 봉건영주의 권한이 유지되었다면, 중앙집권적인 절대왕권은 모든 것을 왕의 권한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다. 경제에서 주화와 화폐의 관리는 결국 모든 것을 왕이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제공한다.

 

이런 문제는 상부계급과 달리 하부계급에 큰 부담으로 이어진다. 세금의 공납에 대한 갈등도 있겠지만, 농지의 몰수, 대규모집단 농장, 그리고 공업의 분업화는 인력을 감축하게 된 것이다. 인력의 감축으로 제일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생명은 소중하나, 인간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우리 인간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명이 나오는 여성, 즉 어머니가 아이를 죽이는 일이다. 유아살해는 인류문명에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죄악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혹은 그것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최악인 것이다.


인류의 영속은 바로 어머니의 신체로부터이나, 바로 저 신체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억압하는 것이 마녀사냥하고 이어진다. 아이를 죽이는 여자는 국가에서 처음에 일반적인 형벌에서 교수형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인구의 축소는 바로 무역정책을 군사작전과 연결하던 시기에 군사력을 모우는 것에 큰 방해거리다. 대외적으로 파견되는 군인들은 자국민으로 구성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갈 곳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그 후 식민지를 개척하고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린다.


노예는 재산이고, 금전적 부담이 없으므로 기존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들과 경쟁하는 구도가 된다. 가령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임금에 대한 갈등으로 서로 대립하게 한 방법도 있었다. 사회적 불만을 구조적인 방법이 아니라 단지 그 분노를 받아줄 대상을 억지로 만들어준 것이다. 일반 민중은 어리석었다.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에서 관념적인 판단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찾을 수 없었고, 단지 형이하학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대상에 대해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자본주의 가속화는 이런 부조리를 더 키우고, 모순을 더 골 깊이 만들어버린다. 마녀사냥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를 구조적 해결이 아니라 그 구조의 상부가 하부의 토대를 붕괴하는 것과 같다. 이 책에서 여성 중에 특히 노인여성에 대한 탄압이 심한 것으로 나오는데, 우선 노인여성들은 노인남성보다 수명이 길고 민간치료사로서 활동했으며, 특히 출산 시에 산부인과 의사 겸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민간에서 노인여성의 활동력은 국가지배자 입장에서 거슬리는 존재였다. 15세기에 농민반란과 봉기가 거칠게 일어난 시기다.

 

노인여성들은 그 사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민간생활의 지혜를 알고 있었기에 국가에 대한 반란이나 봉기에서 그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많은 노인여성들이 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원한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런 노인들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우선, 그들이 알고 있는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토지몰수와 공유지 독식으로 노인여성의 살림을 어렵게 했다. 그녀들은 이웃과 친구에게 의탁하여 생활을 영위했으나, 그것도 부족하면 구호기관에 빈민대장에 올리지만, 그것조차 무너졌다. 기독교 내 신교혁명 이후 그들의 가난을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태만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뭉치고, 같이 연합하고, 이런저런 일을 돕지만, 의술을 시술했다는 이유로 반국가적인 죄인으로 몰려 사형 당한다. 기술의 발전, 특히 의학은 기존 민간치료사와 산부인의 대리자를 노인여성에서 지식인 남성으로 교대한다. 해부학의 발전, 과학의 발달, 그리고 기계론적인 철학은 인간의 자연성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감정에서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고, 이성을 중시하며, 그 이성이란 단어는 오히려 야만에 가까운 편집증에 이르게 된다. 마녀사냥이 데카르트, 베이컨, 라이프니츠 전후로 더 심각해진 것을 보면 참으로 어이없어 보였다.


계몽주의 발달은 합리주의 과학철학에서 나오나, 그 자들이 오히려 비과학적인 방법을 유도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마녀사냥만이 아니라 동물의 감정이 없다고 여기는 데카르트식의 이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고, 피지배계급인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무작위적 착취를 인정하게 된다. 마녀사냥에서 이런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제와 관리, 그리고 억압과 탄압은 피지배계급 내의 대립관계를 만들고, 여성에 대한 철저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하면 프랑스대혁명 시기 혁명의 운동에서 여성이 상당히 강력했으며, 어떤 헛소문(마리 앙투와네트가 외국에 도피하다 실패하여 궁에 갇히는데, 그녀가 상당히 좋은 음식을 먹고 잘 지낸다는 이야기)을 들은 시장의 아낙네들은 왕비와 근위병이 있는 궁으로 쳐들어왔다.


약 2만 명에 가까운 시장 아낙네들은 생선조리용 칼을 들고 공격하여, 길을 가로막은 근위병을 목을 자르고 궁 안까지 돌격한다. 게다가 프랑스대혁명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의 시작점은 역시 여성들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경제가 침체된 러시아에서 다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량이 부족하자 2월 혁명이 발발되고, 그 운동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은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 아이를 가지고 있던 주부들이었다. 혁명의 시작에서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 모순이 자신의 생명만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과격해지는 것이다.


현실에서 보면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라는 말이 실감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을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출산만이 아니라 양육에 관여하므로 만약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아이들에게 주입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군대, 병원, 감옥, 회사 등 인간의 눈과 눈이 겹치는 곳에 사회성 내지 단체생활의 이름 아래 사람을 조작하고 개조한다. 감옥의 역사인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 시스템 자체가 마녀사냥의 연계성이란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인간에 대한 감시와 처벌 시스템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전략하게 되고, 과학적 인간은 중세시대 인간처럼 인간이란 신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 보는 것이다. 노동시간의 길이나 착취강도, 식량배급조차도 척도화 되고, 인간은 인간을 해방이 아니라 더 억압하고 옭아매는 것이다. 마녀사냥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교회의 권력만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주의 관계로서 파악하는 것은 마녀사냥은 16~17세기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서로 공동체 생활을 추구했지만, 서구사회는 이것을 반대했다.


자발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저항세력이 이어지고, 특히 현대사회처럼 아파트 같은 경우, 공간적으로 인간을 수용소에 집어넣는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개인의지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계약이 되는 시점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을 분리하여 서로를 이웃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가까운 적으로 두는 것이다. 자기소유애가 강한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타인의 절망은 나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자신의 불행은 타인에게 그저 쇼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마녀사냥과 이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발견이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마녀사냥은 누구나 마녀심판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마녀로 내몰려 죽을 수 있다. 예전처럼 생물학적인 죽음은 면할 수 있지만, 대신에 사회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누군가 하나의 이슈로서 사회적 지탄과 비난이 지속되면 그 대상과 가족들은 살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그 지목당한 대상자가 죄를 지었다면 모르나, 오히려 부당한 일에 처하여 사회적 모순에 반발하다 더욱 더 억압당하는 일들이 넘치는 현실이다. 이 글을 적는 나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마녀 재판관이자 마녀사냥의 희생양 후보자란 사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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