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녀 프레임>이란 책을 읽으면서 마녀는 옛날 중세이후 혹은 르네상스 시대 전후까지 존재한 자들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존재다. <마녀 프레임>이란 제목처럼 마녀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녀는 단순히 선천적으로 하늘을 날고 인간을 유혹하는 무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자들이었다. 피해자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화형이 처해지는 시대에 우린 왜 그들이 그런 비참한 운명에 쓰러질 수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볼테르의 기록처럼 1780년대까지 마녀사냥은 존재했고, 당시 계몽주의자였던 볼테르는 마녀사냥에 대한 무지한 폭력에 큰 비난을 날린 것을 알 수 있다. 마녀는 실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존재해야만 했던 자들이다. 왜 그런 것인가? 일단 마녀사냥 기원은 십자군 원정 실패와 페스트 창궐 이후 유럽의 암울하고 비관적인 사태는 당대 권력자인 왕권과 교회에 대해 심한 의문과 반발을 일으켰다. 국가가 그 당시 농노나 장인에 대해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제대로 살기가 어려웠다.

 

 

국가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서 이단의 존재가 부각된다. 이단의 존재가 도시 한복판에서 나올 리가 없다. 그들은 자연이나 농촌 같이 외부 쪽에서 등장했다. 특히 중세의 겨울과 백년전쟁 전후에 마녀에 대한 환상은 국가와 교회의 지배 권력이 약해지면서 그 책임을 자신들의 체계가 아니라 다른 희생양을 처단하는 것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그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권력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란 폭력의 합법성이다. 그 합법성을 찾는 방법은 자기들만의 법칙을 만들고, 그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다.

 

 

특히 반국가, 반봉건, 반교회적 세력에 대한 처단 혹은 그런 대상이 아니더라도 본보기를 위해서라면 군중을 하나로 단결하기보단 그들을 각자 의심하고 불안하게 만들어 모두 권력에 의지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가혹한 마녀사냥에서 처음에 교수형으로 끝날 형벌이 참수, 능지처참, 화형 등 각종 끔찍한 사형 그리고 고문방법이 동원되었다. 지금이야 마녀가 있다고 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마녀를 찾아 처단하는 마녀심판(사냥)을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 마녀라는 이름을 가진 마녀희생자들은 사라졌지만, 그 마녀 대신 새로운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단지 그들은 마녀가 아니라 다른 올가미에 엮어 새로운 희생자들이 되어야 했다. 이택광 교수가 <마녀 프레임>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녀의 역사보단 마녀로 몰아가는 사회다.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그것은 결국 현실 사회에 큰 모순이 새로운 변화와 흐름에 역행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구시대적 발상을 남발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란 과학적 지식이 배제된 신화화된 사회로 이어지고, 이미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사회적 분란자 내지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계속 그들을 적으로 몰고 간다. 이런 방식은 사회적 갈등과 책임소재를 지배계급의 문제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대되거나 또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반대세력까지 끌어당긴다. 한국에서 마녀사냥은 최근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군사독재정권과 한국전쟁에 큰 피해를 일으켰다. 조선시대에 정조가 승하하자 노론세력은 시파인 남인들을 모두 천주교도로 몰아 유배 내지 처형시켰다.

 

 

당시 천주교가 성행한 이유 새로운 문물에 대한 지식인(특히 양반계층)들의 관심이 있었으나, 현실 정치에서 발견되는 모순에서 천주교의 확대가 널리 퍼진 것이다. 게다가 대원군 시대에는 새로운 문물이 유교국가 조선에 큰 혼란을 줄까봐 쇄국정책을 일삼고, 최후에 세계열광의 욕망 아래 집어 삼켜져버린다. 지금 우리사회에 부익부 빈익빈 역시 사회적 갈등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이런 시기에 경제적 불평등을 제기하는 순간 반국가 세력으로 지목하게 만들고, 언론의 공정치 못한 정보는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중세유럽처럼 사람의 사지를 찢거나 혹은 불을 태우지 않지만, 대신 육체적 죽음보단 사회적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회적 약자의 몰락과 비참한 현실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현실을 비웃거나 또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우월의식까지 느낀다. 사회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과학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이 올바른 선택지점이나 오히려 미신적 망상에 의해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마녀사냥 효과를 인쇄술의 발달로 보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마녀의 해머>라는 책이 널리 보급되어 과학적인 마녀식별방법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당시에 하나의 과학이라 해도 그 역시 미신적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과학이다. 이런 비과학성이 과학성으로 인정받고, 그것이 다양한 계층에 정보로 이어진다. 문자문화의 보급에서 책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면, 현대의 마녀사냥이 더욱 무서운 이유는 미디어라는 영상매체는 스펙타클로서 현실에 반영된다. 범죄를 공모한 것도 아니나, 마치 그렇게 언론(독재기관에 사주를 받은)에서 조작하여 억울하게 죽거나 고문당한 많았다. 많은 군중들은 미디어로 통해 그들이 마치 세상의 암 덩어리로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최근 21세기 경우 인터넷의 보급과 정보화시대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인터넷 매체에 개인정보 신상이 노출되어 곤혹을 치루는 사람들이 있다면, 극우사이트에는 각종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비인간적인 욕설들이 퍼져가고 있다.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던 마녀사냥은 거의 끝났을지는 모르나, 아직까지 무고한 사람들이 계속 희생당하는 것은 여전한 비극적 현실이다. 마녀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 존재한다. 바로 이성의 판단과 연민의 감정을 상실하여 광기가 넘친 교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말이다.

 

 

거기서 마녀는 마녀로 지목되어 벌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그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내어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광신도들이다. 전투적 메시아주의는 그런 무리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마치 순교자인양 영웅주의 행세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폭력적 광기는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넘어설 때 비로소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심한 광기의 세계로 가고 있다. 정신병원을 만든 이유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자가 있어서 마치 정신병원에 밖에 있는 자들이 정신병이 없다고 여긴다고 보나,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거대한 정신병원(精神病院)이 아니라 정신병국((精神病國)을 만드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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