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엘로이즈 2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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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은 루소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이 있는 계몽주의 청년들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들고 있었고, 여자들은 <신엘로이즈>와 <에밀>을 읽었다. 사실 프랑스공화국이 세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으나 그 사상적 근본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루소가 유명하게 된 동기는 <신엘로이즈>와 <에밀> 덕분이었다. 특히 <신엘로이즈>의 열풍은 상당한 열기를 만든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보수나 진보진영 그리고 그 누구라도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찬양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인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당통 같은 자코뱅당원들이 있었으나, 이에 반해 지롱드에서 활동한 롤랑 부인 역시 루소의 열렬한 팬이었다. 롤랑 부인은 귀족의 아내였고, 당시 여성이 정치적으로 배제된 상황이라고 했으나, 그녀는 프랑스혁명의 여걸이었으며,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 나가기 전에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라고 외친다. 롤랑 부인이 프랑스혁명에 참가할 때 루소의 <신엘로이즈>라는 소설에 빠져들어 루소가 살아생전에도 열렬히 루소를 사모했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는 보면 단순히 생각하면 쥘리 데탕주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연애소설로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소설은 현실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생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룬 서적이다. 겉으로 본다면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책이다. 게다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에밀>을 읽다보면 <신엘로이즈>는 루소 저작의 다양한 사상과 가치가 하나의 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1>을 보면 보통 연애소설처럼 사랑하던 남녀가 현실적 운명 앞에 헤어지면, 남자는 멀리 여행을 가는 결말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와서 재회한다면? 게다가 그 재회의 장소가 그 사랑하던 그녀가 남편과 자녀들이랑 같이 사는 집이라면? <신엘로이즈2>를 읽는 순간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과거 사랑했던 연인이 이제는 다른 인연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거친 바다로 나간 생 프뢰, 그는 목숨을 몇 번의 위협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다. 거친 바다생활에서 세계를 바라본 생 프뢰는 루소의 자연주의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편지 속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산업이라는 것이 개화된 사람을 그에게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은둔으로부터 끌어내어 새로운 욕망의 구렁텅이에 다시 빠트리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라고 보낸다. 문명화가 되지 않은 미개한 영토에 가서 그 영토와 그 영토의 주인인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인이란 야만족들의 폭력에 생 프뢰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을 한탄한다.


 

“자연은 인간이 눈에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인간은 그 매력에 너무 둔감하고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훼손시키지요. 자연은 인간의 자주 찾아오는 곳은 피해요. 자연에 가장 감동적인 매력을 떨치는 곳은 산 정상, 깊은 숲 속, 인적이 닿지 않은 섬들이에요. 자연을 사랑하지만 그렇게 멀리 자연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에 폭력을 쓰게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들에게 와서 함께 살 것은 자연에 강요하지요. 그런 일에는 어느 정도 환상이 따르기 마련이에요.”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이 파괴되면 다시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말한다. 쥘리의 집을 보면 분명 쥘리는 집 주인 볼마르의 아내이나, 그녀는 먹을 만큼만 먹고 남는 것은 저장하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기를 권했다. 억지로 땅을 사서 빼앗는 게 아니라 자신의 땅을 정성스레 가꾸어 그곳에서 좋은 곡식을 나오도록 했다. 집안에 하녀와 주인의 관계는 명확하나, 그 관계의 유지는 미덕과 포용에 의해서였고, 하인들이 집안에서 일한 뒤 식사를 한다면 같이 식탁을 이용하도록 했다.


 

제 아무리 계급이나 지위가 다르더라도 쥘리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서 대해준 것이다.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에서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자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이 옳겠지만, 인간의 세상은 이미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 자연으로 갈 수 없다.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은 인간의 선한 감정으로 돌아가란 뜻이다. <신엘로이즈>는 인간이 가진 이성을 우외로 두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 나온 소설이다. 그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 반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루소는 이성보단 감정이란 것을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가령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는 볼마르의 경우, 마지막엔 쥘리의 죽음 아래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분리할 수 없는 존재적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쥘리의 죽음에 볼마르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정의 싸움에서 최종승리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는 쥘리의 마음에 깃든 자연적인 감정 즉 미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엘로이즈>는 미덕을 상당히 강조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로코코시대로 탐미주의가 문화적으로 주도했다.

 

여성은 수많은 남자 애인을 두고, 남자들은 여자꽁무니 쫓아 따라 다닌다. 파리의 사교계를 보자면 바보들의 천국이라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2>에서 “파리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교계를 안락하고 수월하게 만드는 것을 뽐내는데 이 수월성은 다름 아닌 그 거드름에 관한 규칙에서 나온다. 상류사회에는 오직 관습과 규칙밖에 없다. 이 모든 관습은 번개처럼 생기고 사라진다. 오늘날의 관습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다)이 세상을 흘러가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허망한 욕심과 이기심들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 것이다. 그 당시 결혼문화는 쥘리의 모습처럼 어린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 시집간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다행히 쥘리는 남편의 인격에 사랑을 느낀다)과 살아가는 것은 결국 지옥과 같은 세상이고, 거기에 많은 파리의 남녀들은 타인의 부부를 탐하고 욕망했다. 이런 욕망과 이기심은 여기에 끝나지 않고, 자기 후손에게 이어졌다.


 

나이가 어린 아이에게 마치 천재로 생각하고, 억지로 밀어 넣은 지식 앞에 아이들은 자기의 본질적인 삶을 찾아가지 못하고, 이기심과 교만심만 늘어만 가고, 나중에 남에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현실을 보면 루소의 선견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신엘로이즈>에서 쥘리가 말하는 교육가치관은 후에 <에밀>에 이어진다. <에밀>을 읽다보면 쥘 리가 한 대사하고 많은 유관성을 가진다. 진정한 아이의 스승은 아버지고, 그 아버지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아이 역시 제대로 될 수 없다. 아이의 교육은 바로 아이에게 시작되는 게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에밀>과 <신엘로이즈>의 유사성은 <에밀>에서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독신인 남성이고, 친한 친구에게 아들을 위탁받아 교육을 시킨다. 그 친구는 가난한 귀족이나, 이제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친구에게 가정교사를 부탁한다. 그런 점을 본다면 <신엘로이즈>에서 쥘리는 병으로 인해 죽고, 병으로 죽기 전에 생 프뢰에게 자신의 아들을 가르쳐주기 바란다. 원래 생 프뢰는 쥘리와 쥘리의 사촌인 클레르의 가정교사였고, 결혼 후에 자신의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에밀>을 읽어보면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신엘로이즈>의 생 프뢰라는 점은 그렇게 맞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고, 아이 그 자체를 자연적 존재로 보는 <에밀>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은 결국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에밀>은 인간의 자연적 그리고 도덕적 자유를 위한 도서이다. 남들에 의해 길들어진 인간은 나약하여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아마 그런 완벽한 인간은 <신엘로이즈>의 쥘리였을 것이다. 열정적인 감정과 미덕으로 자연 그 자체를 살려내어주고,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쥘리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신엘로이즈1>에서 쥘리는 생 프뢰에게 “당신은 ‘우리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살자’라고 말했는데, 그건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아아! 이렇게 말했어야 해요. 살시 위해 우리는 서로 사랑하자‘라고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그저 허례허식과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온 여성들, 특히 로코코 시대의 불륜적인 로맨스는 상위계층 여성들이 주로 즐겼다. 하급계급 내지 가난한 사람들은 늘 생계에 고단함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18세기까지 책 1권이 매우 비싼 물건이었고, 그 가격은 보통 가정이 2주 동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상위계층 또는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 정도였을 것이다.

 

여성은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문자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어려운 시대만큼 루소의 서적은 당시 여가생활을 책으로 찾을 수밖에 없던 여성에게 매우 큰 화제가 된 것이다. 편지에서 보여주는 사심 없이 오로지 진심으로 이루어진 문체와 아름다운 글의 흐름은 그녀들의 눈을 사로잡기가 충분했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그것에 대해 뛰어넘어 보자고 했던 루소의 소설 <신엘로이즈>는 낭만주의 소설의 모태가 되었다. <신엘로이즈2>에서 번역자 김중현 교수의 해설을 읽어보면 “낭만주의자들은 루소를 ‘자연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언자, 감정과 열의 원초적 힘을 재발견하고 이를 사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사상가’라고 평가하며, 바로 <신엘로이즈>가 그러한 평가의 시발점이 되었다.”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어지는 것처럼 루소의 가치관은 세상의 중심은 권력층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힘을 가늠할 때 재사(才士)는 군주의 궁정과 항구, 군대, 병기고, 도시들을 보러 갑니다. 반면에 진정한 정치가는 경작지를 돌아보며 농부들의 초가집으로 갑니다. 전자는 그 나라 국민이 무엇을 해 놓았는지 보고 후자는 그 나라의 국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게 단순히 연애소설이었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가 없다. 낭만주의소설로서 정치와 사회에 대한 루소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민주주의국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정치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이런 문구는 평생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글이다. 루소는 시골에 사는 농촌주민들을 자연인으로 보았다. 바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그 나라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 본 것이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읽어보면서 이 소설은 18세기 중반에 나온 도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순간 21세기 인간이 나 역시 많은 깨우침을 가져간다. 물론 종교적 가치관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물질문명에 빠져들어 인간성의 본질적 의식 대신 기계적인 의식만 주입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 스스로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엘로이즈>에서 이런 대사가 인상 깊다.


 

“우리의 욕구 중 가장 큰 욕구이자 우리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욕구는 욕구를 느끼려는 욕구이며, 우리가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을 그 비참을 아는 거예요. 지혜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강해질 거예요.”, “고통 없이 사는 것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사는 것은 죽어있는 거예요. 신이 아니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비참한 인간일 거예요. 그는 욕망하는 기쁨을 박탈당할 거예요. 다른 모든 박탈이 이것보다는 더 견딜만한 거예요.” 우리 인간이 자연적 그 존재를 상실하고, 기계적 물질만능주의로 변모하여 스스로 삶의 의지조차 찾지 못한다. 물론 그것을 깨닫는 것은 인간 그 본인이다. 그 본인을 찾아가는 것이 곧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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