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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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사극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되고 있는 시기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정유재란까지 하여 벌써 40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까지 임진왜란이 겪은 상처는 한국의 전 지역에 남겨져 있다. 부산 기장에 가면 왜성이 있고, 그밖에 많은 곳에 왜성이 외로운 담벼락이 되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급박한 상황에서 벌여진 전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하면 떠오른 사람이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그는 조선 북경지역 오랑캐를 무찌르던 육군 장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수군에 능한 장군이기도 했다.


 

 

<징비록>을 저술한 서애 유성룡하고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 이야기에서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순신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이에 반해 국내 정치상황과 외교, 경제 상황은 아마 서애 유성룡 중심으로 보는 게 더 적정할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학파를 이어받은 동인계 정치인이다. 당시 정치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동인은 후에 북인과 남인,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진다. 정치적인 흐름에서 훈구학파가 초기 조선의 권력을 차지한 시점에서 사림학파가 조정에 나오고, 훈구에게 억압당한 사림의 유림들이 이제는 서로 아전투구하는 상황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면 무릇 어떻게 하면 적을 제대로 쳐서 멀리 바다 밖으로 내쫓는 것에 대해 궁리하는 게 옳지만,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은 그런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과 사익에 따른다는 점에서 역사는 항상 다른 인물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반복되는 형상을 보여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거론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나온 게 아니었다.


 

 

<징비록>을 보면 가장 첫 단추가 잘못된 것은 일본 해적들이 국내 백성들과 결탁하여 노략질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국과 사신왕래를 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이다. 선조시대에 매우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으나, 이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임금의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이 나서 종묘사직뿐만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 전쟁이 끝난 후에 개인적 이익에 신하를 질투하는 한심함은 단지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만이 아닐 것이다.


 

 

이후 등장할 인조나 정조 승하 이후 순조 역시 그러하다. 대한제국이 봉건시대의 국가 즉 왕과 귀족계급에 해당되는 사대부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도 역시 그런 위와 같은 전례가 존재한다. <징비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그런 치욕적이고 비극적이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며 후세가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하는 점이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악몽, 그리고 그 시기에 있었던 큰 사건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기록의 위한 서적이 아니라 후세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적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이다.


 

 

<정비록>은 생각보다 개인적 감정이 매우 배제된 상태에서 저술한 도서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시기에 적은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적힌 글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피난길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어느 자리에 앉아 홀로 우는 유성룡, 그 모습을 보는 군관과 지역주민 역시 따라 운다. 백성들이 배고픔과 질병에 힘겨워 괴로워하며 죽어갈 때 또 다시 유성룡은 눈물을 흘린다.


 

 

아마 국가정치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녹을 먹는 자라면 유성룡의 눈물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보겠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은 체통과 체면이란 이름으로 눈물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한 부류다. 예기치 못한 전쟁, 계속되는 패전과 후퇴, 죽어가는 백성들, 부자와 부부가 서로 죽여 잡아먹는 행위에서 전쟁은 인륜을 파괴할 만큼 잔혹하고 끔찍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고생하는 것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예비식량이나 무기가 없는 백성이다. 백성을 버리고 가는 국가지도자만큼 못난 인물이 없다.

 

 

 

임진왜란에서 선조의 어리석음과 질투에 대해 논하기란 한숨만 나올 정도지만, <징비록>에선 선조에 대한 원망과 오류를 적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 신하들에 대해 적은 글이 있었다. 일본에 간 김성일이 본 왜정 상황이 적절치 못한 것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일이란 장군이 용맹만 믿고 지략이 부족해 왜적에게 패배한 일들도 기술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수들의 판단력과 용기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우리에게 바로 지략과 상황판단이다.


 

척후병을 제대로 두지 않고, 소문으로 왜적이 온다고 하여 그 소문을 낸 사람들을 참하는 문무대신을 보면서 한심했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바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고, 중국에서 파견된 진린 장군도 눈물을 흘렸다. 친구로서 장군으로 천거한 서애 유성룡 역시 그러지 아니하겠냐마는, 이순신은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나, 밑에 있는 수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인품과 그릇이 있었다.


 

 

가장 최측근의 장수부터 밑에 있는 장졸까지 전쟁에 대한 정보와 상황판단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우린 임진왜란에 이순신에 대한 업적을 아직까지 기리며, 현재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하고, 매년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한 영웅심을 대해 찬양하여 영화 <명량>,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흥행하더라도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징비록>에서 유성룡 역시 친구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반영했다.


 

 

우선 그가 갑옷을 진중에서 벗지 않는 점, 쓸데없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은 점, 주변 지형지세 그리고 수군에서 해류와 바람의 형태를 잘 보고 있다는 점이다. 원균 장군은 왜적을 공격한다고 하는 오만에 수군을 출동했으나, 먼 곳에서 노를 젓고 온 병사들이 체력이 떨어져 결국 왜국의 책략 앞에 무너졌다. 전쟁의 승패에서 전술과 전략은 장수나 참모들이 세우나, 정작 적을 치는 당사자는 군졸이었다. 군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신의 계급에 도취된 고위직의 한심함이 결국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점이다.


 

 

<징비록>이 400년 이상에 벌어진 일이고, 지금 당장 그런 구시대의 무기로 싸우지 않고, 군사편제 역시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은 국가적으로 외교를 맺고, 민간적 차원에서 왕래가 매우 활발한 이웃국가다. 심각한 극우성향의 아베 정권이 들어왔다고 하여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일본을 하든지 혹은 그 외의 국가를 한다고 해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정보력과 지도층의 능력이었다. 사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 풍신수길이 이미 열도를 통일한 상태이고, 겉으로 완성된 것이었으나, 전쟁 이후의 군사들은 매우 사나운 점을 조선이 간파하지 못했다.


 

 

왜구가 끊임없이 해안을 침범해도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간첩들이 왜적에게 정보를 건넬 정도로 국내 내정은 엉망이었다. 선조시대 많은 문신들이 있으나 역시 내정에 문제가 있었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란 말이 있다. 서울경기를 제외한 타 지역에 있는 백성들은 가난과 외적들의 침입에 두려워했고, 그들이 국가를 배신하여 적에게 붙는 이유를 생각하면 역시 그렇다. 전쟁이 나더라도 백성들이 안정하지 못한 이유 역시 성을 지키는 수장들이 모두 도망쳐서 그렇다.

 

 

성에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 모로 불편하고, 산 속에 숨어 있으면 식량부족과 질병에 고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을 보면서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단력 부족이란 점이다. 그래서일까? 유성룡과 이순신의 활약이 그만큼 두드러진 이유 역시 주변 상황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임금 중심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은 인물보단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장과 무신사대부들의 공로가 제일 큰데, 등급은 2번째 내지 3번째다.

 

 

 

관료정치의 한계성, 관료들의 그늘 아래 목숨을 걸고 싸운 수많은 장병들과 의병에게 감사한 마음이야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 모습 역시 현실적인 것 같았다. 군대에서 내가 복무할 때 생각한 점은 지휘관의 지휘란 전장에서 병사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명은 단 하나이고, 그 생명을 잃을 경우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장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수많은 생명을 담보하고 있기에 그렇다. 장병이 전장에서 무너지면 성과 도시가 침범당하고 수많은 양민들이 도륙을 당한다.


 

 

아직까지 교토에서 있는 코무덤은 일본 왜적이 조선 양민들을 도륙하고 코와 귀를 베어 본국에 보낸 것을 모아진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국가는 바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그 근본을 잊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다면 비극은 다시 국민에게 전가된다. <징비록>에서 유학을 신봉한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공자의 가르침이란 바로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나, 그 근본을 망각했다. 그러면서 피난길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자, 한국의 조상신인 단군왕검, 기자, 동명성왕에게 제를 올리는 모습에 과연 그 조상신들은 이런 생각으로 국가를 세우고 했을까?


 

 

<징비록>에서 서설부분에 번역자의 말에 인상 깊은 부분이 있다. 서애 유성룡은 동인이나, 추후에 남인으로 이어지며, 남인에서 대표적인 실학자인 성호사설을 만든 이익에 남긴 『서징비록후』에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켜 상상을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다. 세상 사람들은 임진전란에 유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을 유 선생의 경우에는 사소한 이리이고, 그 보다는 더 큰 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충무공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무공은 한 사람의 부장에 불과했으니, 유 선생이 아니었다면 다만 군졸들 중에서 목숨만 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회복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로는 과연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가. 근세에 와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킨 이런 도리는 실행되지도 않았으며, 다만 추천 등용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뒤따라 시기하고 미워하기도 했으니 아아 슬픈 일이다.”라고 한다.


 

 

이순신의 기용은 바로 서애 유성룡이 한 업적 중에 가장 큰 일이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여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정치적 업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단순히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보고 판단해야할 것이다. 정치권에 보는 인물기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품과 행적이다. 이순신의 행적은 강직하고 침착하며, 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안전을 고려했다. 진린 장군이 올 때 그가 사나운 것을 생각하여 진린과 그 수하에게 극진한 대우를 한 이유 역시 자신의 군사가 주둔한 지역의 백성에게 침해가 가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을 보면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계속 참담해진다. <징비록>에서 가장 일을 그르치는 인물이 사적인 이익에 치중하는 인물, 밑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은 인물, 병사들이 치지고 배고픈데도 진격을 명령하는 인물, 타인의 공을 시기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징비록>을 보면 생각한 점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유성룡의 마음은 애절함과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이순신이 부각한 점은 1970년대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순신은 일본이 침략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운 분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꼬리 밑에 있던 분이 아니었다. 최근 태극기 계양과 관련된 시사현황을 볼 때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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