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들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에릭 홉스봄이 타계하고 나서 국내 출간된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마크르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란 명제로서 만들어진 책이다.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 타계 전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미권 마르크스주의 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르크스가 살아생전부터 시작하여 21세기 초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논한다.

 

 

마르크스에 대해 말하자면 한국에서 여전히 말하기가 어려운 이름이며, 하다못해 도서를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모임조차 꺼내기 힘든 서적이다. 하지만 국내 유수한 대학교, 하다못해 외국의 대학교에서 마르크스의 서적은 꼭 읽어야 하는 인문고전 중에 하나다. 최근에 서울대학교 100대 서적에 마르크스의 <자본>이 등장하고,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 있었다. 이미 국내 최고의 대학교조차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이 3%가 반영된 점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가 차지하는 지성의 세계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자본> 전문번역자인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살펴보면 한국은 모더니즘 철학사상을 지나가지 못하고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성이 중심인 학문체계를 가지지 못한 채 바로 오늘 우리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가치와 더불어 부정적 가치가 큰 부작용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나치의 존재는 명확한 악이나, 네오나치가 자신들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 사상에서 넘어가 반이성적 사고에서 일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휴지조차 되지 못할 정의를 외칠 수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온오프라인의 갈등과 심지어 테러행위 역시 이성의 시기를 보내지 못한 부작용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 이후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다시 포스트 해야 하는 새로운 가치 아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사상은 볼셰비키혁명으로 통해 성공하는 것 같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 그리고 트로츠키의 망명과 암살로 스탈린은 사회주의혁명인 10월 혁명을 이젠 <한낮의 어둠>처럼 철권정치를 실행했다.

 

 

스탈린과 자본주의 충돌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에릭 홉스봄도 지적하다시피 마르크스와 전혀 관계없는 북한이 아직도 한국과 대치중이다. 소비에트러시아가 붕괴하고 마르크스는 그저 역사 속에 사라질 운명일까 싶었다. 하지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서문에 놀라운 사연이 있었다. 에릭 홉스봄에게 마르크스에 대한 사상을 자문을 받는 사람들이 늘었고, 마르크스에 대한 서적을 새롭게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들이 문의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마르크스에 대해 자세히 아는 부류가 아니란 점이다.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저술서인 <자본>과 <공산당선언>은 19세기에 저술된 서적이다. 19세기 저술한 서적이 21세기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가 도래한 국제사회에 큰 예언서가 된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는 이제 단순히 국가 내부의 문제를 넘어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최근 대두된 문제는 역시 저출산 문제일 것이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최소 2인 이상 출산되어야 국가가 운영이 되는데 그것이 무리라는 점이다. 국가와 사회적 기능에서 재생산이란 시스템은 매우 중요하다. 재생산적인 기능이 저하될 경우 정치사회적인 기능이 저하된다.

 

 

당장 산업부문과 경제부문의 벽이 무너지지 않지만, 국방인력의 공급부족으로 이어지고, 추후 국가를 부양할 수 있는 인력이 없어서 고령사회로 접어든 국내경제가 매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여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경제적인 문제가 결국 정치사회 더 나아가 외교적인 영역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자본주의를 집어삼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영주가 있던 구체제 국가도 아니고, 소비에트연방을 만들어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아니다. 자본주의 그 자신이었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결국 인간을 잡아먹게 되고, 그 사회는 계속 쇠락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의 사상의 조류를 보면서 딱히 답을 주는 것보다는 답을 스스로 찾아가란 식으로 결론을 낸다. 또한 이 책에서는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데 우선 좌파에 대해 논하자면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로 볼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이외에도 다양한 점이고,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역시 모든 것이 마르크스에서 기원된 게 아니라 마르크스로 통해 보여 진다는 점이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로베스피에르와 마르크스의 아버지라고 한다. 마르크스가 루소에 대해 딱히 언급한 것은 없지만, <자본1>의 주석을 보면 루소의 <경제론> 내용을 인용한다. 「자본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노동에 대한 보수로서 (즉 너희들 수중에 있는 것을 얼마간 나에게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너희들이 나에게 봉사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노라(장 자크 루소, <경제론>, 제네바, 1760, 페이지 70)"」

 

 

마르크스를 비롯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도 루소와 특히 자코뱅당 좌파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루소의 사상을 말하면 한국에서 흔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란 말만 알지 루소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자유의 절대성을 강조한 루소 여기에 평등의 절대성을 마르크스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연 속의 인간은 자유와 평등 모두 가진 존재다. 우선 자유를 모두 가질 수 있는 평등이 있어야 하고, 루소의 실패한 아들인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라는 것은 우리만 가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골고루 줘야지 그 자유가 유지된다고 한다.

 

 

자유가 없는 나라가 자유가 있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 자유를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게 옳다는 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소의 사상을 신봉한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루소의 사상이 마르크스에게 그대로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말이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도처에 야만적인 무관심, 한편에서는 냉혹한 이기심, 다른 한편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 도처에 사회적 전쟁이 널려 있고 모든 이들의 집은 요새이며, 곳곳에 법의 비호 하에 약탈을 일삼은 약탈자들이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런 문구가 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 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

 

 

문장의 느낌은 다르나, 기본적으로 엥겔스의 공장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을 본 내용과 루소가 당시 농민과 도시빈민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던 시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는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러시아혁명 당시 많은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프랑스대혁명의 후예로 생각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적 배경에서 자코뱅당 좌파의 사상은 마르크스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 대신 루소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미덕을 가진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면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동력을 프롤레타리아로 보았다.

 

 

처음 마르크스 국제노동운동을 보면 지식인보단 노동자와 직접 상대하면서 이끌어 갔다면, 그가 죽고 엥겔스도 죽은 이후 20세기 초중반에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 점이 특징이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이끄는 2차 세계대전에선 반파시스트 운동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한 점이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은 처음 과학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파헤친 도서라면 20세기 들어오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경제학적으로 큰 맥락이 되었고, 그의 사상은 인류학, 역사학, 정치학, 문화사회학 등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서적들은 지식인들의 인문고전으로 올라가고, 그의 지식을 고스란히 남은 도서는 21세기에 닥친 위기에 대한 해석이 되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 주변을 잘 봐야 할 것이다.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에 다니면 물론 좋겠지만, 우리 전체 인구 경제활동에서 그런 곳에 일하는 사람은 100명 중에 하나이다. 대부분 중소기업 직원, 공장노동자, 서비스산업, 소규모 영세상인 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중에 일부는 높은 임금이나 높은 매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 이상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력이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여 생계수단을 얻는 자들에 대해 프롤레타리아라고 한다면, 이제 소부르주아인 상인조차도 프롤레타리아 부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내수경제가 불안한 한국에서 자꾸 외국의 수입물에 의존하고, 그 대부분을 대기업(선박이나 항공 운송, 대규모 택배시스템 및 마트시스템)에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된다면 결국 저렴한 상품에 의해 중소 상인들은 몰락하게 된다. 골목상권이나 혹은 사소한 물품에 대한 시장 갈등은 21세기에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전자처럼 높은 임금보단 후자에 처해진 자거나 또는 그런 자와 같이 살아가는 부류라는 점이다. 공정한 시장경제에 대하여 긍정하나, 그 시장경제가 자본력에 의한 독과점이 이루어진다면 국내 경제는 하부로부터 붕괴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듣기 싫은 말 중에 “너도 성공해라 저기 성공한 사람이 있자나?”나 혹은 “로또복권 당첨되면 되지!”라는 말이다. 물론 나 하나 잘 되면 이런 문제로 고민은 없겠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발을 내빼고 싶은 것이다. 한국사회의 성공신화에 대한 멍청한 열망은 1명이 성공하는데 반해 2~3명 정도 되지 않는다면 납득되겠지만, 1명이 성공해도 99명 이상 성공하지 못하면 분명 그건 말이 안 맞다. 다행히 성공하지 못한 자는 99명이 아니라 9999명 이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스펙을 쌓으려면 매달 150만원이 필요하다는 뉴스를 보았다. 150만원을 매달 쓰지 않아 높은 임금을 받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활하는데 불안하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게 좋지 않는가 싶다. 점차 높아져가는 비정규직으로 인해 내수경제는 축소되고, 1980년대 과소비에서 과소소비로 대체되었다. 부동산 가격 증가로 물가는 해마다 올라가는데(이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자기 집값은 오르고, 다른 집값은 내리기만 바란다. 부동산이 오르면 사회간접자본이 열악해지고, 상가의 상품은 비싸게 된다. 10만원 들고 마트에 가면 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집값 고민은 매우 충실하다.

 

 

이런 자신들의 이기심을 찾는 게 똑똑하다고 여기기에 자기 살만 파먹고 있다. 때로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보인 것처럼 그의 분석도 좋지만, 때로는 루소의 사상처럼 인간에게 미덕을 다시 찾는 것도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미덕을 찾는 것은 거의 무리인 현실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마르크스 말대로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은 그들을 속박하는 사슬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기 몸 하나이고, 그들의 미래조차 만들 수 있는 여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보면 왜 그들이 난폭해지는지 이해하기보단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그 사회에 길들이게 만든다. 당장의 고비는 해결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모순과 부조리는 쌓여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 내용을 동의한다. 죄를 지은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들게 하는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루소의 말이 과격하다고 하여 그를 부정하면 처음부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 질서를 위해서라며 힘을 휘두르는 현실에서 세상이 바뀌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꼼꼼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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