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리뷰 시작전에 

인간의 인식지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지식의 네트워크 시스템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다. 다양한 정보와 그 정보로 통해 우리는 생활의 영위를 즐긴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시장 아래 자본에 국경이 없기에 가능한 서비스다. 그렇다면 구글과 같은 대형검색 사이트의 이용은 무엇으로 봐야 할까? 트위터나 페이스북 역시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이런 정보 이용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발전해 간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와 더불어 그 소유에 대한 재생산에서 계속 증식하고 반복되어 간다. 문제는 증식의 결과가 정보의 과잉화이다.

 


심지어 예술과 같이 일반인들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분야도 그렇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은 레니메이드로 생산된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 한 번 했는데, 이제는 다다이즘 예술이라면 누구나 봐야할 과정이다. 예술이 아닌 대중 산업 활동의 사소한 물품도 예술인가? 예술의 과잉은 정보의 과잉만큼 휘황찬란하다. 따지고 보면 서울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시 전경이나 부산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은 어떠한가? 어두운 하늘 아래 불빛이 잔잔하게 올라오며,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듯한 느낌이 온다. 아니 심지어 환락가나 유흥가와 같이 유혹과 성적인 욕망으로 넘쳐난 곳도 예술이 보인다.

 

적나라한 색의 네온사인이 서로를 마주보며 돌아가고 있다. 일정한 시간으로 패턴이 정해지며, 도시의 욕망이 화려한 환상의 공간처럼 보인다. 억압된 충동에서 표출되는 욕망의 표출에서 우리가 아는 예술 역시 그런 욕망이 표출과 억압의 표출, 이상에 향한 집착 등에서 탄생된다. 그런 만큼 우리 사회는 자기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와 욕망에 충실하게 따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과학적인 분석으로서 경제성을 따진다. 그런데 그 경제성에서 오히려 과학적이기보다는 신화적으로 변모된다.

 

 

2. 미디어와 욕망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거리에 가면 많은 간판과 디자인, 그리고 우리가 입고 마시고 즐기는 상호까지 말이다.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의 기호이다.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은 그 욕망을 성취하면 또 다른 욕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욕망의 대상을 투여하기 좋은 것이 미디어의 세계이다. 특히나 우리는 문자문화로서 세상을 보는 것보다 영상문화로 세상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문자처럼 계속 반복하여 지식과 판단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상은 순간적으로 지식과 판단력을 요구한다.

 

순간적이고 부동화 되지 않은 매체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보단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포로가 된다. TV 드라마와 혹은 극장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보다는 우리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것에 대해 집착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캔디 이데올로기, 그리고 역으로 온달 콤플렉스가 끊이지 않을까? 그래도 적어도 온달 콤플렉스보단 신데렐라의 신화에서 우리는 많이 이끌린다. 드라마의 세계에서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은 우리 사회로 하여금 더욱 더 타인에게 욕망하도록 한다.

 

생각해보면, 영상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옷과 구두, 가방과 차량 등등 그 많은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으로 찾아온다. 자본시장에서 보이는 미디어의 효과는 즉 상품의 기호를 대상인물로 하여금 매체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spectacle을 요구한다. spectacle은 1번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spectacle이 새로운 spectacle로 이어지고, 어떤 spectacle의 무너짐은 또 다른 spectacle로 등장한다. 인류가 존재하고 나서 자본주의시장과 더불어 영상미디어의 지속성에서 spectacle은 영원한 우리의 지배자다.

 

 

3.영화와 대중

그래서 미디어라는 것에는 항상 권력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그 권력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외교적이든 좋다. 미디어로 통한 대중들의 의식장악은 좋든 싫든 하나의 종교적 제의와 같다. 영상은 이미지와 더불어 소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영상기호학적으로 영화는 영상, 대사. OST, 효과음(소음), 그리고 서사다.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에서 같은 스토리를 진행해도 그 감정의 기복과 재미는 당연히 후자가 앞선다. 문자서사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나, 영상서사는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 어렵게 만든다. 눈과 귀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므로 가역적인 선택권이 없다.

 

신드롬의 여파에서 영화와 드라마는 막대한 영향을 가진다. 최근 영화 <광해>를 보자. 조선왕조 선조시대, 무능한 왕과 어리석은 신하로 인해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영화에서 <광해>는 사라진 기록에서 하나의 faction을 추구하나, 그 <광해>라는 영화의 광해군으로 통해 많은 흥행을 일으켰다. 광해군이란 인물로 통해 우리가 선택하고자 하는 왕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이다. 미디어에서 대중을 파고들어가는 그 심리적 호응과 공감에서 메시아주의적인 요소와 더불어 마녀사냥광란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교조주의적인 가치관이 하나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폭력이란 단순히 사람의 신체에 대한 물리적 가격이나 폭언만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내에서도 충분하다. 인간이 옆에 있어도 마치 없는 것처럼 혹은 처음부터 제외된 존재처럼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 인간이란 존재인데도, 인간으로 관념적인 인식조차 부정당하는 이상 생물학적인 동물이 있어도 사회적인 존재로서 존중받지 못한다. 그래서 <광해>는 그런 인간 내면에 쌓인 억압과 해방에 대한 욕망을 노래한 것이다. 결론은 그 욕망으로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해준 것이다.

 

 

4. 미완의 이야기

단지 영웅을 두고 만든 서사에서는 그가 과업이 완수되든 혹은 되지 않든지, 누구나 그의 임무를 맡지 않으려 할 것이다. 영웅은 누구나 되고 싶으나, 그가 거치는 여정이나 매우 고되고 괴로운 일이다. 거기서 자신이 할 수 없음에 거기에 몰입하는 인간들은 영웅의 과업완료에서 만족하고 극장에서 나오나, 다시 갈증을 느낀다. 극장의 가상세계는 가상세계이지 결코 현실 안이 아니다. 단지 현실 안에서 우리의 시간과 돈을 내어 관람할 뿐이다. 오히려 현실 속에 사는 인간들은 더욱 더 괴리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영웅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그 영웅처럼 되고 싶은 것이냐? 그런 점에서 이번에 상영하는 영화 <26년>은 매우 독특한 서사적 관점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영웅을 바라지도 않고, 영웅을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다. 영웅서사의 특징은 어느 등장인물이 거대한 모험 후에 과업을 완료할 경우 상으로 새로운 세계나 권력을 가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무속신화에서는 신작을 부여받거나 신령으로 승격된다.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신이란 존재로 신화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건국신화에서는 나라를 세우거나 혹은 나라를 이어받는다. 또한 영웅서사의 특징은 대부분 주인공이 남성이란 점에서 과업완료에서는 여성과의 혼인이 필수적이다.

 

영웅의 조건은 자신만의 세계와 혼인이란 통과제의다. 그런다고 모든 영웅이 이런 과업을 완수하는 것은 아니다. 도중에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아쉬움으로 가득하기에 우리는 그 버려진 역사의 시간을 하나의 신화로 만든다. 삼국지의 유비와 제갈량, 한고조 유방과 패권을 다투던 항우와 그의 여인 우희,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 소설과 영화, 게임과 만화로 계속 나온다.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통함이 이들의 비장미를 한층 올린다. 그런데 이런 비장미의 세계를 영웅이 아니라 일반 사람이라면 어떠한가라는 점이다.

 

 

5. 신화와 26년

길거리에 흔히 보일 것 같은 사람들에서 말이다. 등장인물은 신화적이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은 신화의 세계를 단절하고 자신이 스스로 희생한다. 그들에게 그런 단절을 하게 만든 것은 억압과 폭력이란 신화가 있었다. 그 신화는 그들의 문명이 아니라 어느 거물의 권력에서 비롯된 희생의 plot 이었다. 그들은 제의 속에 희생된 자들이고, 그 희생은 1번이 아니라 평생 남길 수 없는 상처가 된 희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물과 그 거물이 만들어낸 괴물적인 사회의 존치를 위한 신화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들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정말 도덕적인지 부도덕인지에 대한 이성의 판단 대신 인간이 만들어낸 배타적인 무의식적 공포가 그들을 악귀로 만들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메시아주의는 곧 마녀광란이다. 누군가 위대한 구원자가 되려면 반대로 구원자가 응징해야할 원인제공자가 필요하다. 그 원인제공자들은 흔하게 넘치는 영웅서사영화에서는 광기에 빠지거나 혹은 비이성적이거나 양심이 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원인제공자들이 오히려 거대하고 강력한 조직이 아니라 볼품없이 약하고 규모도 적다.

 

<26년>의 영화에서 반정부조직과 이적단체로 몰린 어느 도시의 주민들은 금방 제압되고 모두 주저앉을 정도로 나약했다. 그러나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자국의 위협을 제거했으며, 매우 신속하게 타격을 가한 점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진실과 그 진실에서 전해지는 사실은 분명 존재하면서도 우리의 사회는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로 전이되고, 그것은 1980년 5월부터 시작하여 영화원작인 만화와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던 지금까지 시뮬라시옹(simulation)이 되었다. 오히려 왜곡된 거짓이 하나의 거대한 교조주의로 탄생했다.

 

 

6. 영화의 시작

그래서 메시아주의는 1980년 5월에 잠시 완성되었으나, 그 희생자들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살아있는 한 메시아주의는 계속 진행되고, 그 메시아주의에 의해 마녀사냥은 일어난다. 지역주의이란 차별에서 말이다. 이 영화는 매우 특이하게도 이근안이란 고문기술자와 그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김근태 전 의원을 소재로 한 <남영동 1985> 이후에 나왔다. <남영동 1985>는 실존인물 김근태의 <남영동>이란 수기에서 직접적 사실로 서사를 꾸몄다면, <26년>은 강풀의 원작을 하였고, 실제 사건이 있더라도 직접 그가 그 현장에 있지 않고 증인과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었기에 간접적 사실로 서사를 꾸몄다고 볼 수 있다.

 

서사를 이루던 원작의 발단과정과 본래 서사형태가 수기와 만화라는 점에서 서로 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남영동 1985>는 암울한 어둠이 내리는 감옥에서 디스토피아 세계를 불편한 카메라로 보여준다면, <26년>은 상상력을 하늘로 띠우면서 재미와 감동 그리고 슬픔과 분노를 느끼기 위한 추임새들이 들어간다. 다소 한국에서 상투적으로 나오는 조폭영화의 코믹한 설정을 넣음으로 관객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 대신 <남영동 1985>은 지속적 고문과정과 학대만 나왔기 때문에 관중들은 감정의 기복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어둡고 답답한 심정만 유지한다. <26년>은 이에 반해 카메라의 앵글이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과감하고 지나친 클로즈업을 자제한다. 특히 소품의 배치나 건물의 배치들은 구도의 안정감으로 통해 관객에게 카메라로 불편한 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사건의 진행에서 감정을 자극한다. 이 영화에서 영상이미지의 묘미는 바로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조합이다. 구상은 처음 어느 여성이 총을 들고 누굴 노린다. 그 후에 갑자기 어느 방이 나오고, TV에서 거물이 등장한다.

 

 

7. 비극의 시작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브라더처럼 말이다. 영화는 실사이미지에 갑자기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바뀐다. 실사영화는 카메라 중심의 미학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작가의 미학이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촬영한다면 애니메이션은 만들고 싶은 세계를 촬영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영화 대신 반리얼리즘한 애니메이션이야 말로 만화의 원작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전달력을 보여준다. 시를 읽던 어느 문학도가 있는 방에 어느 여인이 아이를 업으며 행복한 가정을 보여준다. TV 옆엔 결혼한 부부의 행복을 상징하는 장식물들이 장롱 위에 놓여있다.

 

그런데 어디서 날라 오는 총알, 그리고 머리를 관통하여 피를 뿌리는 여인, 시나리오의 비극은 여기부터다. 길에 우연히 걷다가 군인들이 시민에게 발포한다. 당시 누가 그 발포를 했는가? 거물은 군인의 자위권이라고 하나, 무장력이 형편없는 일반사람에게 총을 겨누고 발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총알은 날라 오고, 어느 남매가 길을 달린다. 총에 맞은 사람들, 가다가 넘어서 곤봉을 맞고 죽는 사람들, 그런 아귀와 같은 상황에서 누나는 남동생의 손을 붙잡고 뛴다. 그리고 갑자기 뭔가 관통하는 소리, 누나는 배에 총을 맞아 내장이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 중의 하나다. 어디선가 어느 아낙네가 아들을 데리고 시체들이 쌓인 구릉지에 간다. 거기서 자신의 남편을 발견한다. 이미 부패가 되었는지 턱 상단으로 해골이 조금씩 보인다. 어느 건물 어느 군인이 사람을 쏜다. 그 사람은 죽어가며 우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묻자 군인은 당황하고, 자기의 다리 한쪽을 칼로 베어버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전우에게 가니 그는 더 이상 이성도 찾을 겨를 없이 총의 개머리판으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친다. 이미 죽었는데, 미친 듯이 내려치는 그의 광기는 안경을 낀 전우의 자제로 결국 정신이 드나, 자신의 손에 묻은 피에 절규한다.

 

 

8. 영상기법

이런 장면이 실사장면이 아닌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한 점에서 상당히 포스트모던한 연출을 하였다. 실사 ☞ 애니메이션 ☞ 실사의 연결은 병렬기법이란 애니메이션 연출을 사용했고, 그 병렬기법 아래 애니메이션 내부에서 실사의 영상의 조합은 병치기법을 사용했다. 애니메이션의 표현주의 미학에서 암울한 분위기와 잔혹한 상황, 그들이 느끼던 공포와 분노, 슬픔과 원망을 스크린의 전부를 채워버렸다. 그렇게 1980년 5월 그 도시의 폭풍은 지나갔다. 하지만 폭풍은 지나가도 상처는 남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되 살은 자는 평생 상처를 이어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자신을 몰아넣고 가혹한 여생이 되어도 말이다. 오히려 죽는 것이 속편해도 그냥 죽는 것이 불가능한 그들에게 현실에서 어떤 구원도 오지 않는다.

 

이미 현실은 구원의 메시아를 차단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권력은 그들과 마주한다. 언론, 국가기관, 심지어 여론까지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 크리틱>에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이란 삼분위 체계가 이미 거물에게 존재했다. 어떤 여론과 저항이 와도 끄덕도 없다. 그래도 그는 영원히 추앙된다. 그의 생일에 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할 때,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이 된다. 얼굴전체가 아니라 코 위로 눈과 이마가 보인다. 거물에게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의 눈과 이마 아래로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경찰이 맡은 신호시스템에서 거물의 이동에서 모든 것이 정지되어야 했고, 거물의 이동에는 수많은 고급승용차가 따라 붙는다. 이러기에 과거에 상처를 받은 자들은 절망에 빠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아무 것도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정이 기울이게 되어 양아치에서 조폭이 된 진배, 그의 어머니는 평생을 트라우마로 미쳐 지낸다. 군인만 봐도 놀라고, 아들이 군제대하여 군복 입은 모습을 보고 놀라 식칼을 휘두른다. 그 칼에 진배의 오른쪽 눈가에 상처가 난다. 그리고 어머니는 계속된 정신병으로 결국 병원에 머문다.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고통에서 평생 지울 수 없는 분노와 증오로 살아간다. 그의 인생이 깡패로서 3류 인생으로 살아가나, 그 누구보다 삶의 의지가 있었다.

 

 

9. 담배와 오이디푸스

조직에서 두목에게 서울에 담배 좀 사러간다는 시시한 변명거리는 오히려 담배를 사는 것이 보편적이고, 그 보편적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것이다. 담배는 흔히 일상적으로 피기도 하나 답답하고 미칠 것만 같은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를 면하기 위해 피는 경우가 많다. 담배를 사러 가고, 진배의 소란에 교도소에 갇힌 조폭두목은 담배를 사는 것에 대해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조직이 와해하여 진배의 졸개들 역시 담배를 같이 사서 푸고 싶다고 한다. 그들이 단지 양아치 깡패와 같이 3류 인생일망정 그들은 깊은 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무서운 것이 없는 진배, 그에게 찾아온 김회장, 그는 자신의 다리 한쪽을 베어버린 군인이었다. 그를 보면 이 노래가 생각났다. 밥 딜런의 원곡이고, 후에 guns &roses가 부른 knocking on heaven's door에서 총을 든 군인이 전쟁이란 참혹한 비극에서 평화를 원하는 것을 말이다. 그는 평생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는 오이디푸스였다. 오이디푸스왕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아들로 신탁에 의하면 라이오스는 아들인 오이디푸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예언에 라이오스는 아들을 버리고, 후에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인다.

 

하지만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왕 신화이야기에서 죽어도 현실의 상황은 다르다. 김회장은 자신이 군인시절 스스로 다리를 한쪽다리를 베어 절름발이가 된다. 참고로 오이디푸스라는 단어에 절름발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영화의 <박하사탕>의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한쪽다리에 물이 차서 걷지 못한다고 할 때, 군화를 벗은 그의 발에는 많은 피가 흘렸고, 그의 다리가 총상을 입음에 절름발이가 되었다. 오이디푸스에게 가해진 정치적 폭력은 거세가 되어 그를 복종하게 만들거나 혹은 불구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마지막 이룰 수 없는 그들의 간절한 소원에서 김회장은 거물과 만나면서 오이디푸스의 실험을 맞이한다.

 

 

10. 이성과 광기

그러나 김회장은 단순히 원수만 갚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로 인해 피해본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기를 바란 것이다. 진배의 어머니에게 찾아가 대신 사과한 모습에서 이 영화의 이미지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병실 안에 창문이 열려 마치 황혼의 빛이 아름답게 김회장과 준배의 어머니의 화해를 상징하는 미쟝센 구도는 보는 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대신 글을 적는 나는 울 수 없다. 옆에 앉던 여성은 계속 울고 있고, 다른 쪽의 남성도 눈물을 흘리며 훌쩍 거렸다. 나는 울 수가 없는 것은 거기서 눈물을 흘리면 그 때의 감정과 기분을 거기서 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적는 입장에서 다소 그들의 입장이 되는 몰입을 생각해야 하나, 그 감정의 기복이 거대하므로 부동의 자세로 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게 표출했다면, 글의 내용에서 비추어지는 전달하려는 의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 심정을 그대로 가슴에 묻어두고 글을 적어야 하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답답함을 같이 공유하기보단 공유시켜야 하는 점이 중요했다. 물로 나 역시 공유하고 있다고 하나, 그 공유를 개인으로 하기에 이 영화의 비극성은 아쉽다.

 

인간이란 언제나 이성이 있기에 냉정하고 판단력을 신중하게 보일 수 있으나, 이 영화는 판단력과 이성의 영역을 배제했다. 도발적이고, 순간적이며, 저돌적이다. 뒤는 알 수 없이 그저 죽을 각오로 뛰어드는 모습에 상당히 참신하고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주인공 심미진, 그녀의 어머니는 이마에 총을 맞고 죽고, 아버지는 정신적 충격에 폐인이 되어 그 광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거물의 집 앞에서 분신자살을 한다. 그나마 그녀가 이성을 유지한 이유는 아버지의 존재고, 진배 역시 어머니의 존재로 살아왔다. 그러나 심미진의 부친상에서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11. 평화와 폭력

길거리에서 사격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가족에게 준 비극에서 광기는 아버지가 가져갔기에 가능했으나, 이제 그 광기의 대상자는 없어진 이상 그녀가 마음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정혁은 그런 광기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에게 누나가 있었으나, 누나가 죽고 그는 혼자 산다. 그를 대신하여 광기를 받쳐주지 못했기에 아니 그 광기를 받쳐준 자가 없었기에 그는 의지할 자가 없었다. 그는 결국 국가에 못된 사람 잡자고 갔으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를 절망으로 빠지게 한다. 게다가 관료체계인 경찰에서 그는 자주 자신의 현실에서 갈등을 느낀다.

 

분노로 쌓인 무의식적 자기안의 폭발인가? 아니면 사회적 권력에 의한 복종인가? 그는 결국 계속 고민하고 작품에서 큰 plot을 전개하는 요인이 된다. 그런 광기에 빠진 인물들 속에서 유일한 침착한 자, 그는 김회장의 비서인 김주안, 똑똑한 엘리트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설 경호업체의 직원이다. 그러나 그 역시 광기를 숨기며 더 위협적인 공격성을 가졌다. 아니 오히려 침착하고 냉정하게 보이기에 그의 행동들은 더 위험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이런 분노와 원망, 광기와 절망으로 살아온 이들이 이때까지 그 거물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평화라는 단어는 정말 난해한 단어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이 필요한 것이 아이러니가 되었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거물을 죽이려 했고, 거물은 권력을 잡아 자신의 권위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위해 즉 자신만의 평화를 위해 학살을 펼쳤다. 그리고 자신만의 평화는 그들의 권력을 나눈 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다시 그 평화는 언론과 미디어로 통해 평화롭다는 이미지를 주었다. 영상으로 보이는 spectacle에서 인간의 욕망은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비롯됨을 보여주었다. 그때 문화정책 3S는 Sports, Screen, Sex였다. 인간의 경쟁의식과 성적본능 그리고 그것을 유도하는 미디어라는 새로운 방법이 도입된 것이다.

 

 

12. taction에서 fiction으로

인간에게 욕망을 선사한 점에서 인간들은 동물화 되어간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이 생산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대중들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란 정치적인 도구로서 영화다. 그렇다면 <26년>은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정치적 도구로서 영화라는 설정이 매우 강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단순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폭시킨다. faction이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와 그 시나리오 안에서 겪은 인간의 분노를 fiction이란 영화로 만든다. 그리고 그 fiction은 미완의 미를 거두고 다시 faction으로 연결된다.

 

어떤 사고가 있어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가 다가오고, 그렇게 시끄러워도 오늘 역시 서울의 거리는 시원하게 차들이 소통한다.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던 심미진의 망설임에서 그 망설임은 여지없이 관객들에게 던지고 간다. 서사의 목적이 미완으로 그치는 영화에서 <26년>은 <32년>과 <37>년으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에서 강철 같이 냉혹한 경호 대장 역시 또 나오고 버틸 것이다. 그도 역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트라우마로 누군가 명령받기를 거부한다. 거물 앞에서 총을 겨누며, 자신이 살기 위해서 거물이 필요하다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13. 루소와 사회계약론

비합리적인 정체성 확인 합리적인 사고가 마비된 점에서 그 냉정한 경호 대장 역시 광기에 얽매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런 광기의 합리화를 여기저기 볼 수 있다. 그것은 메시아주의적인 광기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녀를 만들어야 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다. 영화에서 시작되는 신화의 탈출시도 역시 신화적인 부분이었다. 억압에 대한 해방욕구, 그리고 그것은 폭력이 된다. 프랑스혁명의 영웅이자 폭정의 정치가로 되어야 했던 로베스피에르는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라고 연설한다.

 

어떻게든 인간은 폭력을 피할 수 없이 좋게 해결할 수 없을까?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사회계약을 위반하고 어긴 자에 대하여 그 사회의 일원이 아니며, 만일 그런 자가 정치를 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시민들이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혁명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루소가 그렇게 말한 <사회계약론>이란 도서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대부분 채용하는 사상이다. 아니면 차라리 <사회계약론>에서 폴란드 로렌공작이 의회에서 발언한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가 이 영화의 슬로건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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