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황봉모.박진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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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너무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 그의 저서엔 <게공선>은 1930년 실제 게잡이 공선의 일을 토대로 계속 연구하고 조사하여 만든 소설이다. 그 안에서 누구의 이름은 없다. 오로지 아사카와라는 감독이란 이름만 나온다. 몽둥이를 들고 혹은 권총을 들고 무력으로 선원들을 잡아대는 무법자, 그런 무법자는 자신에게 밀어준 권력에 빌붙어 마치 자신이 제왕으로서 군림한다. 그는 제왕보다는 그저 독재자고, 폭력만 추구하는 불한당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세계에선 이런 불한당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된다. 여러 곳에 글을 적을 때마다 하는 말이나 나는 개인적으로 정의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정의실현, 정의를 위해라는 슬로건만큼 쓰레기 같은 것은 없다. 정의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나 모든 것을 다 외면하고 박대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의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편할 때 얼마든지 우려먹을 수 있는 좋은 단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수재들에게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존 롤즈의 <정의론>을 읽는 순간 정의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정의는 오히려 상대적인 가치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가치란 즉 상대편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을 넘어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가치가 무너지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보통 나는 베스트셀러라는 도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무나 읽고, 소장하여 그 책의 본심과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찾을 수도 없는 책에 얽매이는 부류에 대하여 그냥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이 책 <게공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일본에서 150만부가 팔린 이 도서, 처음 나오던 때도 3만 이상 팔린 이 도서가 베스트셀러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것은 이 책이 그만큼 잘 만든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에 보이는 색깔은 전혀 밝은 빛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비참한 분노를 보여주는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이외에 그의 다른 서적이 읽고 싶어졌다. 그의 책에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전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분노에 찬 작가의 본인이었다. 후기를 읽어봐서 더욱 심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자신과 친하게 지낸 동료들이 경찰서에 가서 무척이나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심한 고통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 <게공선>이 <게잡이공선>으로 나온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 제1권은 그야말로 악의가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 보인다.

 

<방설림>이란 작품을 보면 모든 것을 잃은 겐키치의 분노도 선하고, <1928년 3월 15일>에는 고문취조실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운동가들의 비명소리도 들린다. <게잡이공선>은 순수하게 게를 잡아 가공하는 배에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방설림>은 삿포르에 떠난 연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아버지가 일꾼 땅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는 겐키치의 분노가 보였다. <1928년 3월 15일>에는 일본에서 군군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다나카가 총리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들에게 반대되던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이 나온다.

 

안 그래도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적으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 성우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유키노 사츠키라고, 40대의 여자성우가 있다. 한국에서 흔히 <이누야사>라는 작품의 카고메나 <풀메탈패닉>의 치도리의 목소리로 유명하다. 그 성우가 일본의 유사법제라는 것이 2003년에 일본 국회에서 통과할 때 치안유지법에서 국가총동원법이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글을 찾으면서 국가총동원법은 일본이 1938년에 만든 법으로 일본에서 가장 부끄럽고 더러운 역사인 위안부 및 강제징용의 근거가 되는 법이었다.

 

일본에서도 그런 암울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 시대에 대한 반민주적 반평화적 반자유적인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일본 역시 그런 문제가 되는 법에 대한 심각성을 잘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다. 바로 그러한 것이 <1928년 3월 15일>이란 작품에서 저런 내용이 생각나는 문구가 있었다. 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류키치가 순사에 의해 잡혀갔을 때 하던 이야기가 인상 깊다.

 

‘류키치는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보라구 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 헌법에 말이다. - 일본 신민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심문,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말이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정신 법률 수속을 밟아 체포, 감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나? - 이 속임수와 순 거짓말!”

 

실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사실적이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고문 기술자나 또는 고문을 하는 기술이 마치 독립군을 고문하던 일본 순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얼굴표정이 마치 내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 오는 기분이었다. 고문에 대한 이야기에서 얼마나 심하게 구타했으면, 정신상태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었고, 고문을 할 때 사람의 목을 졸라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비단 우리만 아니라 일본의 자국민까지 이어지고, 특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이어진 것이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책을 보는 순간 그들과 왠지 모를 공감이 형성되었다. 암울한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비참함에 시달렸나? 우리나라에서 산업화의 일꾼이라고 하던 자들은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시간과 끔찍한 근무환경에 병들었다. 잠도 못자고 일하다 재봉틀 바늘이 손가락에 찔린 여공, 프레스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에 왠지 모르게 송곳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기서도 안타까운 내용이 소설에 나온다. 작가가 괜히 아픈 신음소리를 내며 만든 소설이 아닌 이유는 롤링에 2사람이 끼여 배출구에 나온 사람들은 아주 얇은 쥐포처럼 나온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하나, 그 소설 자체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인간에게 철학이란 말은 여기서 바로 나오는 것 같았다. 일본의 1920~30년대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1960~70년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해 외국의 문물을 본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일본의 30년 후의 모습을 우리가 밟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깐 지금 우리는 1980년대의 일본이라고 할까나?

 

부동산 투기와 버블경제로 인해 침체된 서민경제, 그리고 국가는 부유하나 국민은 가난하며, 여전히 권력은 못사는 사람을 위해가 아니라 못사는 사람을 쥐어짜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설림>에서 겐키치의 연인이던 오요시의 죽음은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삿포르에 일하러갔으나 처음에 일을 하려고 했으나 어느 부자 아들의 애인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임신하자 버림받았다. 집에 와서도 제대로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고, 만삭의 배로 추운 겨울 창고에서 잠을 청하다 산통이 오자 이내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의 편지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겐키치를 떠나온 그녀는 삿포르 도시에서 부자 아들에게 있는 그대로 다 버림받은 것도 한이 맺히나 자신이 사랑하던 겐키치와 결혼하지 못한 것이 더 한이었다는 점이다. 삿포르를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입을 챙길 수 있는 가정형편이 못 된 것이었다. 훗카이도의 무서운 추위를 이기고 개척하러 간 농민들이었으나, 그 농민이 만든 땅을 모두 지주가 채가고, 그들의 지주의 농노로 전락했으며, 이제 그 소작조차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심지어 강가의 연어조차 모두 독차지한 장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어떻게 그 상황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푸성귀에 된장을 넣고 끓인 국은 먹다가 토할 것 같고, 쌀은커녕 감자와 호박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들의 식단,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해지는 그 시간까지 일만 하는 농민들의 얼굴을 까맣게 타들어가고, 손은 소나무 껍질보다 더 거칠었다. 가지지 못한 자에게 어디에 가서 호소할 수 없는 것만큼 더 서러운 것은 없었다. <게공선>도 그렇고 <방설림>도 그렇다. 선원과 농민이 있는 힘을 다해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비참한 생활일 뿐 더 나은 미래는 없었다. 단지 일하고 일해 오직 해방되는 순간은 죽음이란 말처럼 너무 끔찍했다.

 

<1928년 3월 15일>에서 개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강가에 빠져죽을지 알면서도 향한다고 한다. 그 미래를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희생하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얼마나 한이 맺힐까?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암울한 상황과 거기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아무리 고문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노동운동가들은 실제 일본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역사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 인간의 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피로 끝난다.

 

물론 그 당시보단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비정규직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2개 내지 3개를 하는 바이트족도 생겼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이며, 그렇게 일하는 자리도 서로 경쟁자가 몰리는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게공선>이나 <방설림>에서 그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 가혹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흘러온다는 사실이다.

 

당장에는 국가적으로 부를 축척하고, 기업가들에겐 큰 이익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나라에는 미래와 희망을 죽이고, 스스로 살을 깎는 일로 되는 것이다. 단지 살이 깎는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는가? 아니면 덜 폭력적으로 해결하는가이다. 물론 비폭력적이라고 해도 그 상황에서 처한 약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국가에서 국민은 헌법 위에 있어야 하나 헌법이든 인간이든 모두 돈이 위에 있다는 점에서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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