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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 - Novel Engine
무기상인 지음, hakusai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4년 6월
평점 :
마법소녀 장르를 대해 생각하면,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의 박인하 교수가 학술논문으로 저술한 글이 생각난다. 마법소녀라는 존재는 어린 소녀가 현실에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나, 어떤 특이한 조건과 상황에 맞이하게 되면 마법이란 환상적인 힘으로 일상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로 말하자면 현실의 여성은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비현실이란 환상적 공간에서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장소에서는 그런 논리는 통할 리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적들이 존재해야 한다. 마법소녀의 변신은 2가지로서 작용한다. 하나는 현실에서 여성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결국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고, 또 다른 특징은 마법소녀라는 존재로 통해 평소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은 요소가 부여된다. 작은 소녀가 성숙한 여성의 몸을 가지게 되거나 혹은 의상이 아주 독특하여 남성으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흔한 클리셰 중에 하나가 여자 주인공이 마법소녀로 변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앞에 다가가면, 그 남자는 그 마법소녀에 대해 반한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서로 잘 지낼 수 없으며, 여자주인공은 멀리서 바라본다. 즉 변신이란 이름 아래 소녀는 소녀가 아니라 여성이란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남성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1990년대까지의 마법소녀 장르를 살펴보면 대부분 이런 패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법소녀 역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은근히 욕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에겐 순응적인 여성, 혹은 여성에겐 자신의 성적매력으로 통한 사회적 지위 향상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법소녀 이전의 평범한 소녀이던 여자주인공이 옛날 마법소녀 장르처럼 약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다면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하는가? 이번에 읽어본 라이트노벨인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는 기존의 마법소녀 장르를 새롭게 변모하여 나타났다. 물론 마법소녀 장르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우선 작가인 무기상인부터 일본 만화애니메이션부터 라이트노벨까지 어느 정도 파고들어갔다는 점이다. 남자주인공인 유청명이 남자인데도, 마법소녀의 의상을 입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좀비입니까?>라는 하렘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마법소녀가 아니라 마장소년이 되어버린 좀비 소년은 자신의 주변에 괴기스러운 미소녀들이 찾아온다. 남자주인공이 좀비설정과 미소녀 괴물들이 모이면서 겉으론 괴기와 모험으로 가득하지만, 속은 여전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남성이었다. 일단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멀리 내쫓고, 형제인 헤라와 결혼한 것도 모자라 수많은 여자들을 범한다. 단지 제우스는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면, 하렘계통 작품들은 주인공이 가만히 있어도 온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망각 속에 정신적 자위는 착각의 자유라는 말도 있겠으나, 결국 그런 작품으로 통해 읽혀지는 것은 한계성이 드러날 뿐이다. 어째든 그런 작품이라도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에서는 열심히 패러디로서 차용한다. 게다가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에 나오는 남매처럼 오빠는 늘 여동생에게 무시만 당하고, 심지어는 심한 꼴을 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같은 반에는 마이 페이스인 미소녀 세별이의 등장까지 말이다. 작품에서 원래 마법소녀로 등장하는 루다의 입을 빌리자면 주인공의 여동생인 유아영은 츤데레라고 한다. 겉으로 심하게 차갑게 굴지만 속은 엄청 부끄럽고 좋아한다고 말이다.
라이트노벨 표지에서 보다시피 아영이란 인물은 마법소녀의 의상을 입었지만, 뭔가 특이점을 볼 수 있다. 보통 트윈 테일이란 헤어스타일로 등장하는 마법소녀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일단 주인공 캐릭터가 표지에 나왔으니 그 모습을 분석하면, 원 피스에 고등학생치고는 제법 큰 가슴의 위 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어깨부위에서 손목까지 연결되는 상의, 그리고 무릎 위에까지 올라오는 부츠, 마법소녀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트윈 테일과 부츠 끝에 날개가 달려있다.
하지만 마법소녀에 가까운 복장보다는 오히려 총잡이인 건너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역시 왼손에 매그넘 모양의 권총이 잡혀있다. 최근에 들어 마법소녀의 무기는 상당히 변해온 것을 알 수 있다. 본래는 마법 봉이나 지팡이에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처럼 칼이나 창, 그리고 활을 사용하고, 심지어는 m-16이나 수류탄도 사용한다. 그런데 아영이는 권총을 들고 있고, 화가 나면 기관총을 들고 싸운다. 사실 총과 칼이 마법소녀 입장에서 중요한 위치가 있는 이유는 본래 칼이나 총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그러니깐 여자가 여자로서 그냥 있기보다는 여자가 남성으로서 있고자 하는 것이다. 성적인 요소로 들어가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르게 본다면 남성이 가진 권력을 이제 여성이 가지고 있겠다는 의미도 같을 것이다. 그런 요소는 작품 내에 다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과거의 마법소녀들은 평상시에는 매우 귀엽고 순종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아영이는 순종적이거나 혹은 고분고분한 모습이 아니다. 나이 20세 이전까지 애인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뛰어난 외모인데도 남자축구모임에서 활약할 정도로 매우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다.
최근의 마법소녀 장르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구조는 달라도 신체적인 조건과 정신적인 조건 더불어 사회적인 조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남성보다 더 우월하여 남성의 위에도 군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동생인 아영은 오빠인 청명보다 문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인간관계도 좋다. 이에 반해 오빠인 청명은 2D 소녀에게 푹 빠진 오타쿠란 존재다. 물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등장한 오타쿠와는 조금 다른 개념일 것이다. 적어도 1982년의 오타쿠는 상대방을 가리키는 의미이나, 현재의 오타쿠는 청명처럼 인간실격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제 아영은 오빠가 롤리타 콤플렉스라고 하면서 변태 취급을 한다. 게다가 오빠가 전혀 되면 안 될 마법소녀가 되면서부터 더 곤란해진다. 마법소녀 장르에서 남자에게 환상의 세계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금기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남자가 환상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오타쿠라는 존재도 있지만, 청명이가 2D 로리(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옆에 있던 아영이란 존재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가령 <가와이이 제국 일본>이란 책을 보면 가와이이라는 것은 단순히 귀엽다는 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다.
만일 여자가 아주 괜찮다면 남자들은 우츠쿠시(아름답다) 내지 키레이(예쁘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와이이는 단순히 귀엽다는 것을 넘어 자신의 손에 의해 지켜줄 수 있거나 혹은 소유하고픈 욕망이 드는 대상을 가리킨다. 아영이란 여동생은 이미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슈퍼우먼이었고, 이어 등장하는 7세 기계소녀인 여리 역시 강력한 힘을 가진 어린 소녀다. 도저히 청명에게 여동생이나 여리에게 가와이이 즉 귀엽다고 여길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안하고 잠을 자는 여리라면 모른다.
주변 동급생인 세별이의 경우, 그녀는 분명 외모도 출중하고 스타일도 좋으나, 마이 페이스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보자면 <나와 내 여동생이 마법소녀>에서는 평범한 사고방식을 지닌 등장인물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라이트노벨에서 특이한 인물을 내세우거나 혹은 특이한 상황을 설정해야 이야기가 흐르고, 재미를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왜 모든 사람들에게 특이한 속성과 일반적이지 못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청명이로 보는 세계관은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나 속으로 뭔가 자신의 취향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예전의 마법소녀 장르라면 대개 주인공은 옆에 좋은 친구나 다정한 부모님이랑 보내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탈근대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인터넷의 발전과 개인 사생활의 중요성으로 가족과 학교라는 공간의 커뮤니티가 단절되기 시작했다. 주인공 역시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즐기고, 세별이는 인간형 인형을 고르는 것을 좋아하고, 아영이도 토끼 인형이나 곰 인형을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영이의 팬티가 곰이 새겨진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되지 않아 그런 말을 하기가 그렇지 않을까 하나, 적어도 그런 속옷은 사춘기 이후부터는 착용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특히 생식기가 도래하는 제2차 성징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아직 어린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즉 몸은 점점 커지는 만큼 자신이 초등학생 같은 어린이로 취급당하기를 거부하는 점이다. 문제는 여동생은 고등학생이 된 점과 신체적으로 이미 거의 성숙한 점을 본다면 어린아이보단 오히려 어른에 가깝다. 오타쿠인 오빠와 달리 우등생인 그녀에게 탁월한 이성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곰이 새겨진 속옷을 입는 점은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보자면 마음 속 깊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평소 오빠를 두고 인간취급도 하지 않은 아영이가 은근히 어떤 상황에서 집착을 보이고, 때에 따라서는 매우 부끄러워한다. 별로 부끄러울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세별이와 만남은 조금 의미가 있다. 둘 다 인형에 대하여 안목이 높다는 점과 때에 따라서는 상당한 콜렉터라는 점이다. 또 그게 서로간의 인격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특히 아영이의 경우, 그녀는 분명히 마법소녀지만, 기존의 마법소녀는 어린 소녀가 어른여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그녀는 반대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리가 적에서 어느 순간 적이 아니게 될 때의 모습이다.
여리에게 옷을 입히는 아영은 마치 여리를 인간이기보단 살아있는 인형으로서 옷을 입히는 모습이었다. 즉 자신이 인형을 제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어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었으며, 대신 자신이 인형 같이 꾸미고 싶어도 꾸밀 수 없기에 여리로서 욕망을 대체한 것이다. 이와 다르게 세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형이 여자형인데도 남자라고 한다. 인형이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소유물처럼 집착한다. 이쁜 것은 남자인형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주변에 있는 동급생 여자보단 자신의 소꿉친구인 청명이가 더 소중하고, 청명에 대한 소유욕이 인형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법소녀의 욕망이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어른이 가질 수 있는 특권에 대한 동경이라면, 여기서는 마법소녀들로 통해 욕망이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시작되지 않은가 싶다. 청명이는 2D라고 하나 결국 어린소녀를 원하고, 다 큰 아영은 아직까지 곰이 새겨진 속옷을 입고 다닌다. 두 남매가 지금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다는 게 드러날 뿐이다.
또한 마법소녀 하면 선과 악의 이분법이 중요한 플롯인데, 여기서는 그 플롯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선의 사도여야 할 루다는 의무감도 없고, 악의 존재인 여리를 가지고 노는 모습만 나온다. 아니 오히려 여리가 아영과 청명을 위기에 빠지게 하자, 여리를 공격 후에 치료까지 해준다. 악의 역할로서 여리가 등장해도 여리는 자신의 의지로서 악의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라 로이드라는 자에 의해 억지로 인스톨이 되었기 때문이란 점이다. 게다가 루다는 마법소녀이면서도 청명에게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그저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여준다.
적과 아군이 원래 그래야 하는 이분법적인 요소는 해체되어 버렸다. 최근에 들어와 많은 작품들에서 이분법적인 요소가 해체된 만큼 마법소녀 장르 역시 해체되는 형태를 보여준다. 정의라는 절대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절대적이지 못하거나 그게 더 가치로서의 존립하기가 어려워진 셈이다. 게다가 마법소녀가 소녀의 것이 아니라 소년에게도 부여되었다. 그러면서 루다는 이렇게 말한다는 마법소녀는 소녀이든 소년이든 중요하지 않아 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겠지만, 작가가 받아들이는 세계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청명과 아영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이것을 본 우리는 남자가 불행해서 세상이 불행질 것이라 보지만, 중요한 것은 남자가 불행해도 여자가 불행해지고, 여자가 불행지면 남자도 불행해진다. 남자주인공의 불행이 결국 여동생의 불행이 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