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정의 - 위기의 시대에 읽는 인권과 정의의 투쟁 역사
정경환 지음 / 이경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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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권과 정의>라는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갑자기 국내에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안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여객선을 탑승했는데, 선박운항 중에 중심을 잃고 선박이 침몰한 것이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470명 전후로 추정되고, 생존자보다 사망자 내지 실종자의 수가 더 많았다. 우리나라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생긴 몇 안 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 희생자들은 아직 미래조차도 열어보지 못한 고등학생이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하면 이번 비극은 단순히 끝날 일은 아닐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은 자의 주변사람들은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 정신적 외상증상으로 우울증 내지 각가지 신경정신 병적인 증세를 안고가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trauma는 눈으로 드러나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은 관념적인 세계이므로 억지로 고칠 수도 없고 가릴 수도 없다. 오히려 보이지 않은 내적세계이므로 계속 안고 가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왜 <인권과 자유>라는 책이 이 사건을 두고 나는 연결을 짓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인권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하거나 도구로 삼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세상 때문이다. 인권과 선박사고의 연계성에서 이 비극의 시작은 단순히 선박안전을 지나 그 근본이 되는 사회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만약 선박을 운항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경험으로 통해 운항을 잘 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을 수 있다.

 

인지의 불찰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대형사고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안전을 생각했다면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왜 안전을 중요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안전이란 것은 무슨 사고로 인해 어느 인간의 생명과 재산에 위험이 가지 않기 위해 사전에 예방하고, 설사 사고가 나더라도 신속한 조치로 통해 최소한의 피해로 줄이기 위한 절차다. 안전을 지키는 것은 사고가 나지 않거나 사고가 나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다. 안전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안전이 부실하고 무너지면 누가 다치게 되거나 또는 누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닥치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서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실천하는 행동이다. 배에 달린 안전도구가 부족하거나 관리가 부실하고, 안전을 위한 선원교육도 그렇고, 승객의 안전을 고려해야할 선박 내의 승무원들과 또는 그 선박을 고용한 회사도 그렇다. 그들은 승객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돈이었다. 물론 시장경제를 생각하고, 이익을 생각하면 승객유치로 통한 이윤창출은 기업의 목적이다. 그러나 기업은 기업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 내지 의무가 있었다.

 

최소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상 상업에 대한 도리란 사라진지 옛날이다. 한국 불감증 중에 몇 가지가 있으나 안전과 환경이 더욱 그러하다. 이런 것에 생각하는 인식은 기업의 이윤을 깎아먹고 오히려 기업의 재정에서 쓸데없이 낭비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참사가 일어나고, 큰 환경오염이 발생했다. 진도 앞바다에 죄 없는 어린 영혼이 자기가 찾아가야 부모의 품에 가지 못하고, 추운 바다에서 들리지 않을 진홍곡만 울리고 있다. 배가 침몰하고 안에 들어있는 많은 물품들을 바다를 오염시킨다. 만약 이런 사고가 없었다면 인간의 생명과 소중한 자연을 망쳤을까?

 

나는 그 문제의 근본을 인권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왜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에서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물론 인간의 존재론적인 고찰에서 살아가는 것은 또한 죽어가는 것이다. 죽는 것이 있기에 살아있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아야 한다. 만약 선박회사와 선장이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했다면 과연 저런 사고부터 나왔을까? 하다못해 저런 사고가 터져도 허무하게 대처했을까?

 

지금 TV와 신문에서는 하루 종일 저 사건에 대해 다룬다. 선박회사의 회계에 나와 있는 지출내역이나 선박 내의 안전장비, 승무원들의 심문 등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전초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예전에 삼풍백화점 사건이나 페리호 사건이나 대구지하철 사건도 그렇다. 그것뿐만 아니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자동차 회사는 부품 하나 더 보강하는데 몇 백 원만 투자하면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는데도, 부품비용이 아까워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명작영화 중에 하나인 <타워링>에서도 건축자재만 똑바로 사용했다면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소한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 이익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안전을 무시하다가 그 이상의 피해를 남에게 안겨주고, 그 가해자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남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돈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했다면 어떻게 흘러갔을까? 내가 정말 안타까운 것은 저 학생들이 죄 없이 죽어가는 것보다 왜 죽어갈 수밖에 없냐는 것이었다. 시간을 흘러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다시는 이런 비극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주어야 한다.

 

위에서 내가 정신적 외상이란 단어를 거론했는데, 저런 사고를 당한 사람과 주변 사람들은 평생 그 충격으로 심리적, 정신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이번 일이 지나가고 똑같은 사고나 유사한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 예전의 충격이 다시 떠오르게 되어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런 일들은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어릴 적에 성폭행 당한 여성은 남성이 옆에만 와도 공포에 질리며, 군인들의 의해 학살당해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군복만 봐도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그리고 실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조차도 정신적 외상으로 우울증에 걸려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당하게 되면 정신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건강한 신체만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과 심리도 필요하다. 건강한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자유와 평화라는 기본적인 명제가 필요하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인권이다. 인간의 권리가 소중하고 필요하기에 자유와 평화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권이 무시된 인간에게 자유도 없고 평화도 없다. 오로지 억압과 불행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인권과 자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인권이 무엇이고, 정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 깨끗한 입으로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인권이 없는 인간의 정의란 과연 통용되는 것인가?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가? 인간의 권리는 이른바 천부인권이라고 한다. 하늘이 부여한 인권,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인권, 대한민국 헌법도 다 인권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도 인권을 유린하고, 짓밟으면 심지어는 생명조차 아무 망설임 없이 파괴하는 사례도 있다.

 

인권이 왜 중요할까? 인권은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이며, 인권이 없는 국가는 세계화가 된 현실에서 매우 도태된 국가라는 점이다. 세계에는 UN이라는 국가연합이 존재한다. 물론 UN이 모든 국가분쟁과 세계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도 최소한 UN의 존재성에 따라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UN총회에서 선언문으로 채택된 글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태어났으며,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1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나타난 모든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국제적 질서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28조), 모든 사람은 종족,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혹은 기타 의견, 민족적 혹은 사회적 신원, 재산 가문, 혹은 기타 지위 여하로 인하여 하등 차별을 받음이 없어 본 선어에 발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을 가진다(2조).”이다.

 

만약 인권을 무시한다면 UN에서 정한 선언문을 무시하고, 국제연합의 정신을 무시하기에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이야말로 세계평화를 어기고 인류발전을 더디게 하는 해로운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권보다는 오히려 이권에 치중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본성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고, 그런 이기적인 조건이 부합하여 공리주의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인간이 이타적인 이유는 그 자체로 실천이성적인 정언명령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정언명령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언명령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정언명령이든 가언명령이든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인권을 위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많이 따른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으로 통해 인간에게 인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많은 인민(people, citizen)들이 피해를 받게 되며, 그것은 결국 그 나라의 근원마저 흔들리게 되는 알 수 있는 것이다. 1789년 7월 프랑스 바스티유감옥의 함락과 더불어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은 귀족과 왕족, 그리고 종교인들의 지나친 욕심과 향락으로 인해 국고는 줄고 국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비참한 생활을 하는 원인은 결국 지배계급의 부조리한 정치체계였고, 그런 부조리가 혁명을 봉기했다. 혁명의 근원에너지는 민중의 분노였으나, 그 화살의 도화선은 루소였다. 루소는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지닌 존재나 사회에 소속되므로 억압의 사슬이 묶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슬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제도로 통해 “모든 국가의 권리는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각자 하나의 존재이어야 하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루소는 계몽주의철학자이면서도 한편으로 반계몽주의철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이 프랑스인권선언문부터 시작하여 UN선언문, 심지어 대한민국헌법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 루소를 생각하면 최근에 어떤 사람이 지은 책을 보면 웃기지 않을 수가 없다. 뒤에 생 쥐스트에 대해 나와 있는데, “자유주의의 적은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것은 이른바 본인이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인권과 정의>에서 그런 자유주의자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생 쥐스트를 생각하니 그의 옆에 있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이 생각난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실행한 인물이나 본래는 자코뱅파에서 프랑스대혁명 영웅 중에 한 명이다. 그런 그도 자유는 우리만 아니라 상대에게 줘야 그 자유가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법조인이 적은 책 내용에서 생 쥐스트를 말하기 전에 로베스피에르나 장 자크 루소를 말하면 어떨까 싶다. 왜냐하면 <인권과 정의>의 저자는 다소 보수주의적 성향이 있다. 보수주의라도 우리가 아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철학에서 말하는 의미다. <인권과 정의>에서 보수적 관점은 헌법의 정신에서 말하는 인권으로 저자의 보수적 성향은 민족주의자라는 점이다.

 

백범 김구 선생을 추모하고, 김구 선생이 말하는 민족주의로서 자국민이 스스로 국가를 세우고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생 쥐스트를 거론한 사람은 민족주의보단 국가주의에 가까워 보였다. 자신은 모르나 자유란 국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부여받아야 하는 점인데, 몇 페이지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째든 <인권과 정의>라는 책을 보게 된 동기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철학자가 장 자크 루소 이외에도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존 롤즈라는 사람이다.

 

<인권과 자유>에서는 존 롤즈의 내용이 나와 있다. 존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것을 드러내서 시민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만민법>으로 통한 세계적인 시민으로서 만민이 되는 것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하던 정치적 철학사상은 거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나, 그는 그런 유토피아적인 가치를 현실 구현 화를 위해 집필했다고 한다. 실제로 무척이나 책인 <정의론>에서는 다소 이상적인 내용이나 정의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현실에서 균등한 기회라는 것은 모두 똑같이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최소수혜자에 대한 권리보장에서 그들이 정치적 자유주의에 참여하기 위해 경제적인 보장과 최소한의 교육을 보장받아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본주의국가이고, 루소는 자본주의경제체계가 들어오나 아직까지 루이16세가 지배하던 왕정이었다. 롤즈는 시장경제국가라면 루소는 봉건왕정국가의 차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인간의 권리를 중시하는 점이 분명하고, 인간에게 권리가 없다면 그 나라는 잘못된 나라인 점은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자유라는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고, 그 자유를 존재성을 인정하기 위해 비자유라는 것을 대비하는 옳지 못한 일이며, 비자유로운 상대에게 자유를 주어 자신들의 자유를 같이 지키고 넓게 포섭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사상은 단군왕검께서 홍익인간 사상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소 민족주의적인 가치이기나 백범 김구 선생은 그런 사상을 잘 이해했다.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문화가 있는 나라이기를 바란 점에서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는 평화의 노래와 자유의 율동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복을 더 누리기 위해 다른 이들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행복하다는 기분을 그렇게 잘 느끼지 못하는 성향이나 그래도 행복이란 것이 저런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것은 충분히 실감한다. 인간의 목적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인간에게 행복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권리인 인권이며, 그 인권이 곧 진실한 진리이며 정의다.

 

물론 그런 말은 쉽게 나오나, 막상 실행은 어려운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히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여 누리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라고 여기는 오만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복을 짓밟고, 타인의 생명을 짓밟으며,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의 정의라는 위선의 가면을 씌워 합리화 하는 인간들을 보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없는 것이다. 폭력으로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에 인권이 제대로 존재할 리가 없고, 그것은 진장한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국가라면 그 나라의 국민은 자유를 가진 주인이다. 모두에게 그 권리가 없다면 그것은 파시스트 국가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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